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말씀 혼잡"

Tayseek Kwon 2019. 3. 30. 11:49






바울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4:2)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간단 간명하고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 혼잡"은 주님께로서 오지 않고 사람으로 온 결과이고

사람으로서 난 것은 이 세상에서는 원수(악령)에게서 옵니다.

그 지배 아래 있어 철저히 조종당하고 있으니까.

"말씀 혼잡"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경 내용과 일치하게 

생각하고 말하려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부지런히 읽어야 하고

성구 사전을 통해 같은 단어를 모두 살펴야 합니다.

지금은 스마트폰 성경 앱의 검색 기능을 활용할 수 있어

필자는 수시로 이를 이용합니다. 간편합니다. 

이런 검색 기능 없는 성경 앱은 무용지물이고

검색하지 않고 성경을 읽으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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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 하셨는데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검색 기능에서

천국,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하늘 나라 등등을

다 찾아보아야 안전합니다. 

외곬으로 해석하여 엉뚱한 해석을 내릴 

위험이 다분히 있기에 경계해야 합니다(벧후 3:16)

요한은 그 계시록에서 경고하기를(계 2:18,19),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 외에 더하든지 제하든지 하면

기필코 그에 대한 엄중한 보응을 받게 된다고 했는데

이 경계는 동일한 모든 하나님 말씀에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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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성경 진리에 관해서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일반 서책과 같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것이니

많이들 선생되기를 바라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약 3:1).

확신이 들기 전에는 어정쩡하게 말하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혹은 신기한 해석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해보겠다는

그런 공명심 같은 악심 품는 것은 곧바로 자살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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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단 중 하나인 밀러(Miller)는

젊을 때부터 성경을 부지런히 읽기로 소문났습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다는 것 자체를 

어여삐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즉 성경을 읽는 동기를 중시하십니다. 

진리를 갈망하는 것 외의 그 어떤 것도 용납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사탄은 일부터 키우기도 합니다.

해서 성경을 직접 읽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금식을 남용 또는 악용하게 해서 

금식 기도하는 것을 차단시키는 효과를 노립니다. 

이런 것이 사탄의 궤계이니 여기에  휘둘릴 것이 없습니다.

고로 그렇다고 성경 읽기를 꺼려해서는 안되는 것은

베드로가 말씀을 젖먹이의 젖에 비유한 것처럼(벧전 2:2)

말씀을 가까이 않는 한 영적으로 아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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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선의로든 악의로든 고의적이든 실수로든

"말씀 혼잡"이 우심한 때라 

처처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들뿐입니다. 

그럴수록 내 스스로 성경에 접근해야 하고

성령의 가르치심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문을 두드려야 하고 찾아야 하고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심과 동시에 약속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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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하심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심에

그 포인트가 있으니 지역적인 것 혹은 시공간을 통해

구분하고 구획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회개, 회개한 결과로서의 사랑, 절대적 순종 등이

천국 들어가는 절대적 열쇠가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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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살게(영생하게) 된 것이라면 

<우리가 살아 있는 한에는 즉 영생하고 있는 한에는 

절대로 살아나시면 안되고 계속 죽으신 채 머물러 계셔야 한다>는 

엄청난 말의 부조리(조리가 없는 말)가 생기게 됨은 상식이다. 

고로 다시 살아나 부활하시는 경우 

우리는 말의 논리상 덕분에 일껏 살아 있다가 

다시 죽어버린다는 

우스꽝스러운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탄은 이런 어쭙잖은 교리를 만들어주어 

거룩하신 생명의 구원의 도리를 세상의 웃음거리, 

말도 되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놀려먹은 것이다.


하나님이시니까 살아나실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은 왜 되셨나? 

그러니까 말도 되지 않는 종잡을 수 없는 소설 나부랭이 

하류급 동화 같으니까 인간이 지어낸 것이 성경이라고 

지금까지 기염을 토하게 만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심한 현재 "교회"의

단면도이자 자화상인 것이다. 

구제불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밖에 없다. 









성경을 읽기보다

소위 "교부신학", 소위 "루터 신학", 소위 "칼빈 신학" 등등 따

위만 붙들어 온, 아니, 거기 붙들려 온 결말로서의

레밍(lemming)/도미노(dominoes) 현상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는 

이 대칭 아담이 되어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나머지는 당연히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요 6:44, 65)

다시 말해 회개할 수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44,45).

회개 않고 아니하고는 내게 달린 것이지

그 누구도 강제, 간섭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사랑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악, 의/선이 

이 사랑의 있고 없음으로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것뿐입니다.

내 스스로 어떻게 나갈지를 미리 아신다는 것이니

이는 강제, 간섭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로지 내 운명을 내 스스로 정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그 사랑에 반응하는 여부가

내 중심에서 우러나는 사랑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린 아이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때문에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삶은 

남녀 데이트가 아닌 

내 영혼으로서의 주님과 

그 육체로서의 나 자신과의 랑데부인 것. 

원수 사탄에게 발꿈치를 물렸으니 

다음 차례로 그 머리를 짓밟기 위한(창 3:15/롬 16:29) 

최종 진격의 고난의 행군/行軍의 랑데부. 

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랑데부(마 11:29).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 창조를 한탄하셨다는 이 대목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것도

만일 성경이 사람이 지어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시라면

썩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지어낸 하나님이라면 

이런 대목을 집어넣어 득 볼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 

이는 일종의 하나님 약점인 것이다. 

일껏 창조해놓으시고는 그 일을 한탄하셨다는 것ㅡ

한번 이루시고는 한탄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누가 신뢰하려 할 것인가 하고 

성경을 지어낸 자들이라면 

반드시 생각하고도 남을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결코 이런 대목은 지어내지 않을 것이기에

성경은 진실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것이다. 




믿는 자여 어이할꼬ㅡ생명수가 말랐구나


삶의 방법/법칙을

몰라서 지금까지 인류가 실천 아니 한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한 가지 예를 들면 상호간 믿지 못한다.

누가 누구를 믿어 이런 똑같은 자세로 나오겠는가.

나만 손해본다는 피해의식부터 앞선다.

머리되는 이가 솔선 수범으로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실제 가능한가? 불가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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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유일한 방법이 있으니

대칭 아담 예수님의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의 사랑의 확증.

고로 이 사실을 믿는 자가

이러한 이상 사회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대칭 아담을 머리로 모심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예수" 이름 외에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행 4:12)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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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대칭 아담은 하나뿐이니까.

아담이 하나뿐이니.

그리고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의 머리인 아담이 되자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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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미 범죄하여 죽은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나면서부터 죄인이요 죽은 자로서

자연계 육체이니 내일이라도 죽을 목숨에

이런 만인간 행복의 삶의 지혜인들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영생하는 자 즉 초자연계 육체를 지닌 자에 한해서

시행되는 삶(생명)의 법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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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먼저 이 대칭 아담에 의해 산 자부터 되지 않고는

다시 말해 죄 용서 받아 죄인 아닌 의인

그리고 자연계 목숨의 첫 출생이 아닌

초자연계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을 모셔

새 사람이 되는 재차 출생, 새 창조가 되지 않고는

한 마디로 불가능인 것이다.

이러한 새 생명으로 시작된 초대교회였기에

자기의 모든 소유를 공유, 또는 공용화하는

새 사람의 삶을 실천하여

무/無소유의 만유/萬有 소유의

유무상통을 세상 앞에서 현실화시킨 것이다(행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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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놀랄 수밖에.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집단도 시도 못한 것을

거침없이 구현해 내니 구원의 말씀도 말씀이지만

이 확신에 따른 실천력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것.

그래서 사랑이 메말랐던 당시 사회가

거의 앞을 다투어 "믿음"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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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막강한 초강력을

교회는 헌신짝 같이 버렸다.

왜? 그 자신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으니까.

초대교회의 그같은 생명력을 상실한 오늘날

모든 기독교는 남 구원커녕

자신의 샘명도 부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거의 들린다는 소리마다 기독교인의 위선적 행각.

남 구원하자는 전도보다

자기 생명부터 먼저 되살려놓고 보자는

회개 운동이 시급한 실정임을 제대로 파악해야.





구원받은 사람마다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요 20:21,22).

나와 둘이 하나되신 대칭 아담께서

성령으로 내게 임하심으로써 된 사실입니다

세상에 보내심 받았으면 

천지를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의 착각처럼

이 세상 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거룩한 사명을 띠고 세상에 파견된 것입니다(요 4:34).

이것이 보내심을 받은 자의 "양식"(:34)이라 하셨으니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이

바로 그런 뜻의 양식입니다. 

즉 우리가 이 사명을 받은 대로 수행하지 않을 경우

곧바로 아사 즉 사망 선고를 받는 것

다시 말해 영생은 <없습니다>. 

영생은 대칭 아담과 둘이 하나 관계에 있음을 말하기 때문. 

이것이 첫 사람 아담이 아닌

대칭 아담으로 옷입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