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sns에 올린 전도문 (4)ㅡ교회 (보충 2/끝)

Tayseek Kwon 2019. 4. 9. 16:20




sns에 올린 전도문 (4)ㅡ교회 (보충 2/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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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 오늘날 각 교회 뜻 있는 목회자들도 장로교의 "구역예배"와 같은 것을 활성화하여 조(組) 단위의 세포 교회(cell church) 체제로 개편 운영하면 굳이 대형화를 꾀하지 않아도 내용상으로는 초특급 대형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지금은 바야흐로 적그리스도의 시대로 돌입하는 때로서 외형적 교회 장엄과 위세는 무의미하고 먹히지도 않는 시대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교회 본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북한 "움막" 교회입니다. 21세기 교회의 표본입니다. 최종적인 전무후무한 환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휴거는 성경에 없는 인위적 교리의 일예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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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① 창조자께서는 공평무사하셔서 인간을 차별하시지 않고 한 몸 체제에서 평등 평균되게 하시는 것이 뜻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차등을 두고 사랑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따라서 "핍박이 우심한 북한에서는 교회가 없다"고 해도(그 쪽 2천5백만 인생들은 구원의 길이 막혀 있다는 뜻이 되므로) 차별하시는 것이고, "교회가 있기는 해도 다른 자유로운 국가들보다는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라 해도 역시 차별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차별적으로 대하시지 않는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탄압 아래 있는 북한 교회가 정상"이라는 결론을 내릴 때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의 자유로운 세계에서 평화롭고 안락한 교회들이 자진해서 북한 교회와 같은 형태를 취할 수는 있어도, 현재의 북한교회가 이 자유 세계에서 호강을 누리는 교회처럼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이 단 한 가지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상식 수준의 결론입니다. 더 무슨 특별한 것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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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② 이 자유 세계에서는 "기독교회"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어도 창조주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구원 받은 자의 백분율로 따지면 오히려 북한 교회 쪽이 더 높을 수가 있다 해도 결코 과언일 수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믿을 때에는 그렇지 않고 다양한 여러 가지 불순한 목적으로 교회문을 두드리는 경우보다 진성(眞性)일 확률이 높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다시 말해 북한 교회는 교회 수는 가뭄에 콩 나듯 해도 8~90 프로 알맹이들이고 자유 세계 쪽은 그와 정반대로 쭉정이 빈 껍데기가 8~90 프로일 때, 건실한 교회일 가능성은 북한 쪽이지 자유 세계 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은 교회 초창기 바로 시작 벽두부터 가혹한 탄압이 시작됨으로써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명색이 "창조자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무자비하게 탄압이 가해졌고 따라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창조주의 뜻이 그러하다는 증거요, 한 번 이렇게 뜻으로 나타나진 이상은 세상 끝 날까지 그러하리라는 확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뜻일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고 있음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오죽하면 "생명(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불편하여 찾는 이가 적으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겠습니까. "들어가고자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 소위 "기독교회"는 이 경고를 아주 무시했었습니다. 갖가지 무리한 억지 설명을 붙여 자기 세뇌를 해 왔던 것입니다. 오직 사랑 유무가 관건입니다. 순탄할 때에는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진위 여부는 역경을 만나서야 드러납니다. 영원무궁토록 누릴 생명의 환락에 비할 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사랑의 진실성 여부를 시험하는 기간은 찰나적입니다. 이런 기간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역시 상식입니다. 더구나 단순히 우리의 사랑을 테스트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명과 영광을 한 몸 구조의 생명의 법칙에서 무한대로 한껏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는 보람찬 일일진대 더 이를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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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③ 창조주의 새 창조의 일에 동참하여 사람 살리는 작업은 나 자신의 확장, 확충, 확대가 된다 했는데, 그럼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자아중심이 아니냐 할지 모르나, 나 혼자만이 향유하는 결과가 아니요 전체 모두에게 미치는 것으로서 나도 그 전체의 일부이니까 '나'로도 결부되고 '우리'에게도 결부되는 양면성(상태)의 동시성(작동)입니다. '우리'라고도 할 수 있고 '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둘의 하나됨'의 특성입니다. 우리 위해 마지막 아담께서 죽으셨다는 의미로도 통하고 "나 위해 죽으셨다"(갈 2:20)고 해도 백프로 옳은 진실이 됨과 같습니다. 이 양면성과 동시성은 창조주의 품성에서도 드러납니다. 창조자께서는 사랑 일변도이실 수 없습니다. 동시에 소멸하시는 무자비한 불이십니다(히 12:29/롬 11:22). 왜냐면 모든 법질서의 근원이시므로 법질서 유린자에게는 무자비한 가혹만이 있으실 따름입니다. 이는 질서 확립 차원에서 불가피하십니다. 우리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이런 현실을 여실히 여지없이 드러내는 한 실례입니다. 엄정하게 원리원칙대로 만사를 다루시므로 여기에 우리는 무한한 신뢰를 느끼게 됩니다. 즉흥적으로 한 때 기분에 의해 단 한 번이라도 일을 전단(專斷)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걸고서라도 질서를 확립하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영원한 사례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③-④ 다시 반복합니다. 이 세상은 단일 세계가 아닙니다. 양면 세계입니다. 이 세상으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무상(無常)하니까 반드시 상주(常住)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한 고통, 고난입니다. 아니면 최고도의 생명의 환락의 세계, 극과 극의 양립 세계입니다. 지금은 생명과 죽음이 한데 섞여 뒤죽박죽인 듯 보입니다. 의와 불의, 선과 악이 한데 뒤섞여 엉망진창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세상 다음에 반드시 오는 영원하고 정상적이고 완전 무결한 세상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영원히 가름되어져 우리 각자에게 안겨지는 지금의 현실을 똑똑히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경고는 한 두어 번뿐입니다. 계속 되풀이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죽음의 고난을 택하십시오. 원래부터가 죽음이지만,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갸륵하기에 그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양면의 세계는 그 성질이 서로 정반대임을 명심하십시오. 내 스스로 결정함에 따라 영원한 미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내 운명을 내 스스로가 정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거꾸로 가르쳤습니다. 창조자께서 각자의 운명을 정하신다고 잘못 인도했습니다. 창조자께서 정하시는 것은 인간 생애를 주장하는 3운법칙에 한합니다. 방치하면 서로가 서로를 망하게 하여 공멸할 것이므로 억지로 장치해 두신 각자의 울타리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각자 자기의 죽을 때가 되지 않는 한 어떤 인간도 세력도 손대지 못하도록 방어막을 쳐두신 것에 불과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데에서 이는 입증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운명은 순수히 내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마지막 심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제 이 경고도 마치려 합니다. 인간 누구도 자기의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망망 대해 일엽 편주와 같은 자기 육체 하나로써 떠 있는 천하보다 귀한 자기 목숨입니다. 신중한 그러나 너무 늦지 않은 결단을 내리실 것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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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 장교 고넬리우스ㅡ세례 받기 전에도 성령의 선물 받음(행 10:47)ㅡ사람의 마음을 아시므로 세례 받는 것이 좀 지체되어도(믿고 회개한 즉시 세례 받음이 원칙ㅡ행 16:33)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믿고"(행 8:37) 사랑의 삶을 영원히 살기로 일생일대 결단을 내리면, 성령으로 지금 이 시간 내게 오십니다. 이것은 죄 용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아담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로 죄 씻음 받아정결하게 된(죄 용서된) 바탕에서야 거룩하신 영(성령)께서 임하시는 법.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 받는 것을 절대로 미루시면 안됩니다.


(사람이 내일 운명을 알지 못하므로 세례 받기도 전에 세상을 하직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므로 믿고 결단하는 즉시 세례 주는 것이 당연하나, 오늘날은 "교회"가 종교화로 경직되어 일정 기간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이 아님). 고넬리우스에게만 해당되는 특별 경우가 아님. 이렇게 예외적인 사례를 허용하신 것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사례가 가능함을 시사하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