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sns에 올린 전도문 (4)ㅡ교회

Tayseek Kwon 2019. 4. 9. 16:24





sns에 올린 전도문 (4)ㅡ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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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① 이제는 교회를 논해야 하는 단계. 한 아버지를 모신 가족 공동체가 교회. 마지막 아담 친히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영원히 존재하시니까 나는 나를 지으신(낳으신ㅡ그래서 마지막 아담을 가리키는 칭호 중 하나가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 마지막 아담과 동기간 즉 같은 형제가 되어 있는 망극하신 은혜. 마지막 아담과 같은 수준의 "창조자의 아들"이니까. 그리고 아들께서는 이제 영원히 사람이시니까.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으로서의 유일무이의 사람. 이미 설명한 대로의 '머리'의 유일한 특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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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①-① 아버지와 아들께서 내 안에 성령(聖靈, Holy Spirit)으로 계시는데(요이 1:9) 모습은 한 모습이십니다. 두 개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한 개체처럼 보이시니 곧 사람의 모습. 성령으로 계시니까 물론 볼 수는 없으나 상상으로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두 분께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 이렇게 하나로 사람으로서 계시는 모습을 "아버지를 본다"고 해도 되고 그래서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는 뜻이요 아들을 대한다고 해도 되니이 경우 그냥 "주님"으로 불러도 됩니다. 양쪽으로 다 통합니다. 이것이 둘의 하나됨입니다. 고로 기도할 때 "아버지"라 불러도 되고 "주님"이라 해도 됩니다. 주(인)님(나를 소유하신 소유주ㅡ이는 창조주이니시까 당연하지만 '섬기고 동시에 섬김을 받는' 사랑의 차원에서도 적응됩니다)이라는 호칭은 성경상으로 아들만 아니라 아버지께도 통합니다. 처음 믿음에 들어온 이들로서 "주님"이란 호칭이 어색하게 들리면 시종일관 "아버지"라 부르며 대화(기도)해도 무방합니다. "아버지"라 부른다고 해서 마지막 아담께서 섭섭해 하시지도 않고 마지막 아담을 가리키는 의미로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서운해 하실 일도 없습니다. 둘이 하나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형상(실체는 아버지)은 아들이시니 곧 사람이십니다. 창조주께서 이다지도 우리 인생들에게 가까이 되셨습니다. 곧바로 사람으로서 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기이하고도 너무도 엄청난 은혜로우신 사실을 성경은 "임마누엘"이라고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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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①-② 그러나 "성령님"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습니다. "성령"이라는 용어를 쓸 때는 성경적 사실을 설명할 때 대개 그런 경우입니다. 성경 중 사도들의 편지에서 인삿말 중에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지만 "성령"이라는 호칭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개체로서는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로서 항상 존재하시고 움직이시니까 이 때의 "이름"(마 28:19)이 "성령"이십니다. 물론 아들의 영도 성령이시고 아버지의 영도 성령이시나 이러한 특수한 경우의 이름 역시 성령이심을 알아두면 성경을 읽을 때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마치 한 분이 더 계시는 양으로 "성령님"이란 호칭은 없습니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니까 주로 거론되는 것이 성령으로 계시는 마지막 아담 곧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형상이시니까 그렇다는 것이고 실체로서의 아버지이시므로 아들께서 하시는 일이나 움직이심이 바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로서 통합니다. 형상과 실체로서의 구분뿐입니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시니까 아버지께서는 아들보다 크시고 아버지께서만 아시고 아들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엄격합니다. 당연히 아버지께서 중심이십니다. "아버지, 아들"로서만 일관되게 설명이 나가니까 남성 위주라 착각할지 모르는데 모자 관계임을 이미 지적했으므로 앞선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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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①-③ 교회(마지막 아담을 머리로 모신 공동운명체)를 말할 때 교회를 '몸'으로 한 '머리'가 바로 마지막 아담이시니까 "성령"의 이름으로 "교회"와 관련된 대목에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행 15:28 /계 2:7 등). 여기서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생략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도움이 될 정도로만 지적했습니다. 이와 같이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가 교회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 불가결한 불가분의 존재가 되어 있어 함께 모인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눈은 귀가 있고 팔이 있고 손이 있어야 하는 등 다른 지체가 함께 작동되어 주어야 자기 생명을 유지 보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혼자로서는 존재 의의도 없을뿐더러 아무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한 몸'으로 기능해야 비로소 존재 가치가 있는 것. 사람 삶에서 '가족', '가정'이라는 의미가 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교회에 대하여 상론하려는 것이 아니고 처음 믿음에 들어온 이들을 위한 기초 상식 정도로만 그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회는 한 몸을 구성하여 각 지체들로서의 역할을 나타내는 공동체이므로 이미 구원을 얻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과정을 거쳐 그 작업은 일단락된 창조주의 아들들의 가족 역할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창조주의 아들들로서 창조주의 창조(새 창조)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밤낮없이 일한다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일하는 작업자의 그룹 활동(個敎會-개교회)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창조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서로를 독려 격려함으로써 힘과 지혜를 모으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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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①-④ 일하는 작업 현장으로서의 이 세상이므로 쉬는 것이 없으니 쉴 때는 즉 쉰다는 것은 모든 일(사람 살리는, 구원하는 다시 말해 새 창조의 일에 참여하는)을 끝낸 다음의 영원한 안식 다시 말해 영생의 낙을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하는 그 때부터입니다. 고로 처음의 교회가 본을 보이고 가르친 대로(행 2:4,6/히 3:13), 모이는 것을 <일상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일을 정해서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 활동이 아니라 임무(사명)를 받고 파견된(세상에) 역군으로서의 일상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뿐아니라 앞서 지적한 대로 여러 다른 지체들이 함께 움직여 주어야 나라는 존재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부단히 지원을 받고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힘을 합치는 일에서는 "전혀 기도에 힘쓰는"(행 2:42) 것이 한 가지 예이고, 힘을 공급 받기는 "서로 교제하는"(히 3:13/10:24,25) 데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또한 필수적으로 갓믿은 믿음의 초보자들을 위한 성장 앙육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일상생활로서 영위되는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교회 활동(모여 서로 교제하는 것)은 불가결한 몫으로 작용하므로 매일 모이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하루라도 빠지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나는 그런 강제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사랑 가운데 주체 의식으로 매일 모이는 것으로 최선을 다함입니다. 마지막 아담을 중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의 일을 하는 일상생활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일정한 날 일정한 장소와 시간과 틀에 맞추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생명 없는 종교 의식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이 목적이 아닌, 구원받아 창조주의 아들들 즉 왕(king)과 제사장(priest)이 된 신분과 위치에서 창조주의 새 창조의 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종사하는 이들의 작업 현장이자 전장(戰場)이기도 합니다. 인생 구원의 고귀한 일들을 이 세상 신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끊임 없는 도전을 감행해 오고 있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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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② 매일 모임에는 가족들이 매일같이 숙식을 같이 하며 얼굴을 맞댐과 같아서 그룹 활동처럼 운영되어 유기적인 횡적 연대(유대)로 자연스러운 세(勢) 불리기로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지, 처음부터 개별적으로 거대 집단화하는 것은 금물. 오늘날 유행처럼 되어 있는 대형교회는 반(反)성경적. "배도(背道-살후 2:3)"의 상징. 종교적 베벨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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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②-① 우리의 머리이시고 교회의 주인이시고 친히 운영자가 되시는(행 15:28) 마지막 아담께서는 굵직한 교회 가이드라인을 그어주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나도 그들 중에 있다". 교회 주인장이 친히 임재해 계시는 거기가 교회이지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들과 하나로 계시는 아버지 친히 임하신 곳 거기가 성전(聖殿, holy temple)이지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큰 제사장(대제사장)이 마지막 아담이시고 모인 이들은 창조주 앞의 개별적 제사장들이며 동시에 제물입니다(롬 12:1). 모세 시대의 상징물인 '건물로 표현되는 성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개개인이 성전이요(성령이 계시는 육체이니까) 제사장이요 제물입니다. 그 중에 먼저 믿은 또는 나머지를 믿음으로 인도해낸 사람이 목자(牧者)입니다. 마지막 아담께서는 목자장(長)이십니다. 교회 중의 마지막 아담을, 보이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으로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보이시지 않는 사람'으로서의 성령이십니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이러한 소그룹 형태의 교회는 대형화가 지닐 수 없는 힘을 보유하고 있으니 침투성(전도)이 뛰어나고, 월등한 기동력(합의, 합심 기타), 강한 결속력(사랑)입니다. 말 그대로 대가족 형태로서의 장점입니다. 언제든지 불신자들(아직 믿지 않는)을 불러다가 상세하고 친절히 일대일 대화로서 믿음의 도리를 설명하여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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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②-② 평상시 모이는 숫자가 12명 정도면 그것을 6명으로 쪼갤 수 있고 이렇게 세포 분열식으로 진행하면 짧은 시간 안에 상당수 인원 확보가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 가정 집에서 모인 방식 그대로입니다.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19/골 4:15/몬 1:2 ). 매일이다시피 모이는 이런 6~12 명 단위의 모임들이 전체 숫자로는 날이 감에 따라 성경에 나오는 숫자대로 70인, 120인, 많으면 500인 또는 그 이상으로 불어나, 일시에 일시적으로 대집회를 열어 특정 목적에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독자적으로 건물을 확보하는 것도 좋지만 없어도 무방하다는 뜻입니다. 항상 명심할 것은 교회의 어른은 성령으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마지막 아담이시라는 것. 보이시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으로서 유일무이의 '머리'로 계시는 분.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그림으로 묘사된 그런 모습이 아니십니다. 범죄 결과로서의 부끄러운 자연계 모습으로 마지막 아담을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불경입니다. 원래의 아담의 모습이 자연계 육체가 아닙니다. 범죄의 대가인 죽음을 십자가 고난으로 치르시고 부활하신 그 초자연계 몸의 영광의 모습으로 마음 속에 그려야 마땅합니다. 아직 그런 영광의 모습은 어느 인간도 뵌 일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바울 사도(使徒, apostle)가 있고 요한 사도는 이상 중에서만 뵈었는데도 혼절해 버렸습니다. 바울은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실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초자연계 존재가 되어 있으나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자연계 모습 그대로 있는 것뿐입니다. 이런 목적뿐인 이 자연계 몸으로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살아보겠다는 마음은 먼지처럼 털어버려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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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②-③ 오늘날 교계가 타락하여 많은 사람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마지막 아담을 내가 모시고 있는데 교회 주인이시요 설계자이시고 최고 관리자이신 마지막 아담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하십시오.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지금 믿음에 들어온 분은 주저 마시고 기도하는 중에 인도해 주심을 받는 대로 적당한 교회를 택해 찾아가 세례를 받으십시오. 소위 "대형교회"는 배제하시고, "순복음교회" 같은 "이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가 이런 식으로 대중을 오도하고 있지만)고 가르치는 데도 외면하고. 그렇게 따지다 보면 아무데도 더 나은 데가 없을 수도 있으니 구차하게 세세히 묻지 말고 일단 그 교회에서 세례 받으시고 거기 있는 이들과 친교를 맺어 성경 연구반 같은 것을 만들어 활동하시면 됩니다. 마음 맞는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면 좋지만 없으면 전도해서 만들면 됩니다. 그런 믿음의 동지들과 합심해서 거기 교인들과 목회자(목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기를 시작하십시오. 내 속까지 비어 있으니까 이리저리 이교회 저교회 방황하는 것이지 내 속이 꽈 차 있어 내용물이 충실하면 현장에 눌러 앉아 생명의 생산 작용을 시작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만일 그 교회 담당자가 "불순하다" 하여 따돌리는 경우에는 거기서 그냥 나오시면 됩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마지막 아담을 내가 모시고 있는 마당에 사람이 어찌 하리요. 정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생각되시면 마지막 아담과 상의(기도) 중에 그 인도하심을 따라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내가 거기 있다" 하신 기본 기준을 따라 교회 모임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가족까지 전도하면 두세 사람은 넘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설립 기준이 바로 오늘날의 북한 교회입니다. 모임 자체를 불허하므로 신학교도 신학생 졸업자도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없이 오직 믿는 사람 두셋 정도로 움막에서 또는 별스러운 장소에서(적발되면 당장 와해되니까) 모이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형태를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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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②-④ 혼자 믿고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우리가 구원되었어도 여전히 이 자연계 몸으로 남아 있는 이유가 전도하여 사람들을살리기 위함입니다. 이런 일이 없으면 나 자신의 구원 자체가 불가능이 됩니다. 왜냐면 마지막 아담께서 부활 후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세상 끝까지 나아가 이 구원의 희소식을 전달해 주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로, 나의 구원 받음=남에게 전도하여 그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게 함으로써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만드는 일. 다시 말해 나 자신의 확대 재생산입니다. 고로 열매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않으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 구원받고 남들이야 죽든 말든 관심 없는 것은 지독한 자아중심입니다. 한 몸됨의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 됩니다. 위의 말씀에서 "능력을 받는다"의 "능력"은 마지막 아담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어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심 바로 그 의미입니다. 별다른 초자연적 초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런 초능력이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초능력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므로, '능력'을 말함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신 사람' 그 분이시라 한 것입니다. 오늘날 초능력으로써 "사랑으로 역사되는 믿음"을 대신하고 믿음의 전부인 양 속이는 사례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경계 대상입니다. 소위 "병고치고 방언하고" 등등의 무리들은 일단 피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 진위 여부를 가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기 부인, 십자가 짐"의 여부입니다. 이것을 마지막 아담께서 강조하신 것처럼 강조하여 가르치지 않거나 그런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무조건 사이비라고 낙인 찍으면 틀림 없습니다. "잘 믿으면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것이 그런 종류에 속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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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 오늘날 각 교회 뜻 있는 목회자들도 장로교의 "구역예배"와 같은 것을 활성화하여 조(組) 단위의 세포 교회(cell church) 체제로 개편 운영하면 굳이 대형화를 꾀하지 않아도 내용상으로는 초특급 대형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지금은 바야흐로 적그리스도의 시대로 돌입하는 때로서 외형적 교회 장엄과 위세는 무의미하고 먹히지도 않는 시대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교회 본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북한 "움막" 교회인 것입니다. 21세기 교회의 표본입니다. 종적인 전무후무한 환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휴거는 성경에 없는 인위적 교리의 일예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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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① 창조자께서는 공평무사하셔서 인간을 차별하시지 않고 한 몸 체제에서 평등 평균되게 하시는 것이 뜻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차등을 두고 사랑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따라서 "핍박이 우심한 북한에서는 교회가 없다"고 해도(그 쪽 2천5백만 인생들은 구원의 길이 막혀 있다는 뜻이 되므로) 차별하시는 것이고, "교회가 있기는 해도 다른 자유로운 국가들보다는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라 해도 역시 차별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차별적으로 대하시지 않는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탄압 아래 있는 북한 교회가 정상"이라는 결론을 내릴 때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의 자유로운 세계에서 평화롭고 안락한 교회들이 자진해서 북한 교회와 같은 형태를 취할 수는 있어도, 현재의 북한교회가 이 자유 세계에서 호강을 누리는 교회처럼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이 단 한 가지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상식 수준의 결론입니다. 더 무슨 특별한 것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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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② 이 자유 세계에서는 "기독교회"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어도 창조주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구원 받은 자의 백분율로 따지면 오히려 북한 교회 쪽이 더 높을 수가 있다 해도 결코 과언일 수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믿을 때에는 그렇지 않고 다양한 여러 가지 불순한 목적으로 교회문을 두드리는 경우보다 진성(眞性)일 확률이 높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다시 말해 북한 교회는 교회 수는 가뭄에 콩 나듯 해도 8~90 프로 알맹이들이고 자유 세계 쪽은 그와 정반대로 쭉정이 빈 껍데기가 8~90 프로일 때, 건실한 교회일 가능성은 북한 쪽이지 자유 세계 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은 교회 초창기 바로 시작 벽두부터 가혹한 탄압이 시작됨으로써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명색이 "창조자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무자비하게 탄압이 가해졌고 따라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창조주의 뜻이 그러하다는 증거요, 한 번 이렇게 뜻으로 나타나진 이상은 세상 끝 날까지 그러하리라는 확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뜻일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고 있음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오죽하면 "생명(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불편하여 찾는 이가 적으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겠습니까. "들어가고자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 소위 "기독교회"는 이 경고를 아주 무시했었습니다. 갖가지 무리한 억지 설명을 붙여 자기 세뇌를 해 왔던 것입니다. 오직 사랑 유무가 관건입니다. 순탄할 때에는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진위 여부는 역경을 만나서야 드러납니다. 영원무궁토록 누릴 생명의 환락에 비할 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사랑의 진실성 여부를 시험하는 기간은 찰나적입니다. 이런 기간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역시 상식입니다. 더구나 단순히 우리의 사랑을 테스트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명과 영광을 한 몸 구조의 생명의 법칙에서 무한대로 한껏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는 보람찬 일일진대 더 이를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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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③ 창조주의 새 창조의 일에 동참하여 사람 살리는 작업은 나 자신의 확장, 확충, 확대가 된다 했는데, 그럼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자아중심이 아니냐 할지 모르나, 나 혼자만이 향유하는 결과가 아니요 전체 모두에게 미치는 것으로서 나도 그 전체의 일부이니까 '나'로도 결부되고 '우리'에게도 결부되는 양면성(상태)의 동시성(작동)입니다. '우리'라고도 할 수 있고 '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둘의 하나됨'의 특성입니다. 우리 위해 마지막 아담께서 죽으셨다는 의미로도 통하고 "나 위해 죽으셨다"(갈 2:20)고 해도 백프로 옳은 진실이 됨과 같습니다. 이 양면성과 동시성은 창조주의 품성에서도 드러납니다. 창조자께서는 사랑 일변도이실 수 없습니다. 동시에 소멸하시는 무자비한 불이십니다(히 12:29/롬 11:22). 왜냐면 모든 법질서의 근원이시므로 법질서 유린자에게는 무자비한 가혹만이 있으실 따름입니다. 이는 질서 확립 차원에서 불가피하십니다. 우리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이런 현실을 여실히 여지없이 드러내는 한 실례입니다. 엄정하게 원리원칙대로 만사를 다루시므로 여기에 우리는 무한한 신뢰를 느끼게 됩니다. 즉흥적으로 한 때 기분에 의해 단 한 번이라도 일을 전단(專斷)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걸고서라도 질서를 확립하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영원한 사례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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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③-④ 다시 반복합니다. 이 세상은 단일 세계가 아닙니다. 양면 세계입니다. 이 세상으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무상(無常)하니까 반드시 상주(常住)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한 고통, 고난입니다. 아니면 최고도의 생명의 환락의 세계, 극과 극의 양립 세계입니다. 지금은 생명과 죽음이 한데 섞여 뒤죽박죽인 듯 보입니다. 의와 불의, 선과 악이 한데 뒤섞여 엉망진창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세상 다음에 반드시 오는 영원하고 정상적이고 완전 무결한 세상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영원히 가름되어져 우리 각자에게 안겨지는 지금의 현실을 똑똑히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경고는 한 두어 번뿐입니다. 계속 되풀이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죽음의 고난을 택하십시오. 원래부터가 죽음이지만,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갸륵하기에 그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양면의 세계는 그 성질이 서로 정반대임을 명심하십시오. 내 스스로 결정함에 따라 영원한 미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내 운명을 내 스스로가 정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거꾸로 가르쳤습니다. 창조자께서 각자의 운명을 정하신다고 잘못 인도했습니다. 창조자께서 정하시는 것은 인간 생애를 주장하는 3운법칙에 한합니다. 방치하면 서로가 서로를 망하게 하여 공멸할 것이므로 억지로 장치해 두신 각자의 울타리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각자 자기의 죽을 때가 되지 않는 한 어떤 인간도 세력도 손대지 못하도록 방어막을 쳐두신 것에 불과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데에서 이는 입증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운명은 순수히 내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마지막 심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제 이 경고도 마치려 합니다. 인간 누구도 자기의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망망 대해 일엽 편주와 같은 자기 육체 하나로써 떠 있는 천하보다 귀한 자기 목숨입니다. 신중한 그러나 너무 늦지 않은 결단을 내리실 것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