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올린 전도문 (6)ㅡ하나님 아들됨은 양자됨인즉 얼마든 파양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됨
②성경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면 문자 그대로 창조주의 아들이며 상징적 묘사가 아니니 성경은 모든 계층의 사람이 어렵지 않게 다시 말해 어린 아이라도 또는 일자 무식한 사람도 아주 쉽게 이해 가능하도록 씌어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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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① 만일 "간다"는 말이 경우에 따라서는 "온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면 그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의도적인(악령들에 의한) "말씀의 혼잡"(고후 2:17/4:2ㅡ성경의 장절 표시는 필자 개인의 견해가 아님을 밝히기 위함)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아들"이라 하면 어느 모로 보든 완벽한 창조주의 아들입니다. 자주독립성, 창조성, 존귀, 막강함 등 더 바랄 것 없는 말 그대로의 지존자의 자제입니다. 창조자의 독자(외아들)이신 마지막 아담과 하나돼 있기 때문이요 그보다도 아버지 친히 내 안에 아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령 다시 말해 아버지의 영을 따라 나도 동일 본질(성령을 선물로 모심)로서의 닮은꼴이므로 그렇습니다. 오는 세상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미 그러합니다. 죽은 자였다가 산 자가 돼 있는 것만 해도 과분 황송한데 그 아들로 삼으셨으니(양자, 養子) 그래서 "은혜"입니다. 이런 분에 넘치는 것을 한꺼번에 받으니 가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인생을 구원하실 때 위 설명처럼 친히 그 아들들로 삼으시는 방법 외에는 우리를 살리심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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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② 다만 지금은 이미 설명했지만 인생들을 다시 출생시키고 새로 창조되도록 하시는 아버지의 일에 합력하는 고로 불가피한 조처로서 이런 물리적(신체적)인 약함과 천함(세상이 자기네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타향살이 나그네처럼 천대하니까)의 없는(가난한) 자가 되어 있으니 세상의 가난한 자들과 그 고통을 함께 하고자 함입니다. 만일에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반 세상사람들처럼 축복 받아 잘 사는 것 찾고 욕심내고 돈을 사랑하거든 저것은 가짜라고 판단하시면 틀림 없습니다. 대형 교회를 지어놓고 호의호식하는 교역자들은 그 아무리 유명세를 타고 있어도 그래서 세상이 알아 주어도 틀림없이 그런 부류에 속합니다. 말하자면 역전 드라마 극의 주인공이 우리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이익의 모든 고난 받음, 인생고에 허덕이는 대중과 함께 함으로써 감내하는 고통이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너무나도 보람찬 일이기에, 똑바른 의식이 있는 이라면 오히려 이런 처지에 있기를 바라야 마땅한 그런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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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③ 그러므로 항상 느긋하고 넉넉하고 든든하고 여유 만만한 꽉 찬 일상생활의 행보입니다. 내적 충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로 빈약할수록 외적인 것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기타 욕심을 따라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얻는 것은 없고 하루 아침의 이슬이요 뜬 구름. 이것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도취에 빠져 세상을 백안시하며 무위도식으로 소일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 직접 물과 불 속으로 뛰어들어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바로 그것이 "천국으로 침입하여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지금 불이 났는데 물난리가 났는데 여객선이 침몰 직전인데 사람들이 아우성인데 한가할 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이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현장 모습입니다. 마지막 아담께서는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그 짧은 개략적인 성경 기록에도 "우셨다"는 기록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물론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들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십니다. 우실 정도로 창조주로서도 불가항력이십니다. 무엇이 그토록 불가능이시냐. 영원한 생명은 사랑에 있고 사랑은 자유 의지에 의한 자진자발성에 있으므로 억지로 믿게 하시고 억지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두렵고 떨 수밖에 없는 현실로 육박해 오는 것이니, 다시 말해 내 스스로 생명의 길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한 하나님께서도 속수무책이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 운명은 내 장중에 있는 것이요 그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는 이 무서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듯 소스라쳐 깨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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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④ 한 가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도 "영(성령)으로 나는" 것을 말함이고 따라서 "육(아담의 육체)으로 나는" 것과는 전혀 판이하다는 점. 어떤 점에서냐, 후자는 기계적이라 변동이 없으나 전자는 양자됨(adoption)인지라 파양이 가능하다는 뜻. 파양(罷養)은 물론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끊어지는 것. 창조주와의 관계니까 이는 당연하니, 애초 아담이 산(영생하는) 자였다가 범죄함으로 죽은 자(자연계에 속한 육신의)가 되고, 초자연계 존재(천사) 중 일부가 악령이 되어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들어가 있는 것과 상통합니다. 왜냐면 성령으로 내가 모신 마지막 아담이신지라 사람과 사람 관계는 사랑으로 하나됨이 생명이요 이 생명은 머리/몸의 '한 몸' 체제에서만 가능하고 자아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할 때에는 그 한 몸 체제가 붕괴되므로 이 하나되는 요건 다시 말해 삶의 법칙을 깨뜨리면 그 하나됨이 필연적으로 와해되는 운명을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대로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망칠 수 있다는 경고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언제나 유효하니 엄중 경계를 요합니다. 이 세상을 일단 떠나면 모든 시험(테스트)은 종결되므로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이런 경고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만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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