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각자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인생들인즉 이미 오래 전 공멸(共滅)했을 것을 가까스로 목숨이 부지되도록 강권력을 발동하신 것이 3운법칙

Tayseek Kwon 2016. 1. 6. 16:51

고로 이렇거나 저렇거나 의당히 살게 되어 있는 그런 인생, 그런 세상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이렇게 억지로나마 겨우겨우 붙들어가는 형식으로 각 인생의 수명을 확보해주시는 것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오직 그 뜻 하나뿐인데 철부지 같은 인생들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를 못해ㅡ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만유의 법칙)을 이 사실을 인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주는 화두로 삼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던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사자에게 물려 죽게 방치하신 이유
만인에게 주시는 경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성경(딤후 3:15)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않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列祖)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하니, 이에 그 사람(선지자)이 돌아가는데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죽인 고로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가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었다[왕상 13:21-24].


여기서 선배 선지자가 후배 선지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속였다 할지 모르나, 거짓말이 왜 악(죄)이 되느냐 하면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남을 해치기 때문인데 이 경우는 전혀 그런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상대에게 그 허물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어진 방편일 뿐인즉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교훈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기꺼이 순종함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 이 선지자처럼 마지못해서 그저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은 차라리 아니함만 못한 백해무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체의 것ㅡ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으로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셨기 때문.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해야"[살전 5:17] 하는 사실이 여기에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 명령을 아주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경솔하게 반응해보아야 자해 행위만 될 뿐이지 아무 소득도 없다. 왜 그런가 하여 간절히 알고자 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마음이 있어야 그것이 정상이고 자멸 행위를 막는다.


마지막 아담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종 노릇을 하셔서 자신을 나 위해 다 바치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그 피 값(목숨 버리신 대가)으로 사시어 나의 주인이 되셨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명칭이 그냥 호칭만으로 끝나는 것으로 착각하면 큰 잘못이니, 말 끝마다 "예, 예, 주인님, 처분대로 시키시는 대로 절대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몸종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 역시 마지막 아담께서 나를 강제로 붙들어 종을 삼아서가 아니라 나 위해 일체의 것(생명 곧 자기 자신을 나 위해 바치시고 버리시기까지 즉 나에게 그 자신을 몽땅 선물로 주시기까지)을 하심으로써 친히 내게 사랑으로서의 "몸종"이 되어 본을 보여 주셨고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그 한 때만 아니라 영원히 그러하시니 무엇이든 한 번 하신 일은 하나님께는 영원히 그러하고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 그래서, 이 사랑에 감동하여 과거에 미련하게도 자아중심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데 급급하여 자멸의 길을 재촉하던 일체의 행위를 뉘우치고 돌이켜, '이제는 나도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리라' 마음에 굳게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 드리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이제는 나 중심으로 나가기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자신을 편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이 양면성으로 동시에 움직이는 '둘의 하나됨'의 내 쪽에서의 첫 발걸음이다. 이미 주님께서는 나의 본으로서 그 첫 발을 내디디신 것. 즉 전적으로 지금이나 영원토록 나를 위하시지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음을 내가 확인했기 때문에 그 본을 따라 나도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의 필수 불가결의 "회개"이다. "믿음"은 회개 전에도 작용되었고 이후에도 줄곧 가동되어져야 하는, 일회성이 아니라 중단 없는 영속성이어야 하는 것이니, 때문에 믿음, 희망(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는 것이라 했다(고전 13:13).


많은 사람들은 이전 어느 한 때 "믿은" 것 즉 믿음의 고백을 한 것으로만 전부인 양 여기고 그 때문에 구원이 보장된 것인 양 태무심으로 지내지만 이것은 아주 위험하고 잘못된 것이니,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 했듯이 믿음은 생명과 직결되고 생명은 사랑이 핵심이고 사랑은 항상 오늘 이 시간(내일도 어제도 아닌)이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믿음'을 '사랑' 아닌 다른 무엇으로 착각해 온 것이다.


그런즉 갑은 영원히 을의 종이고 을은 영원히 갑의 종이다. 종이면서 동시에 주인이니 왜냐면 갑에게 을은 섬김을 받는 주인이고 갑은 을의 위함을 받는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항상 강조하지만 3위1체 원리에 의한 삶의 법칙으로서의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여기서는 머리와 몸은 기능상의 구분이지 높고 낮음, 우열 등의 구분을 두지 않으니 왜냐면 그런 것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맨 아래 꼬리 부분의 끝이라 하더라도 실상은 나를 모두 머리처럼 대접하기 때문이다.


물론 위계 질서는 분명하다. 그래서 심판이 있는 것이고 심판이 있으니 재판장이 있다. 그래야 법질서가 있고 공동체가 운영된다. 그러나 그러한 머리 자신께서 친히 이렇게 우리에게 본이 되어 계시니 나머지 우리끼리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머리께서 나를 위하시니 그 몸의 지체된 나는 영원히 그 종으로서 그를 위해서만 살고 그만을 섬겨 그 지시를 받들어 내 이웃(나와 함께 한 몸의 지체된)들을 섬기고 위하고 사랑으로써 종 노릇함이다.


이렇게 말할 때는 머리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히 나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이를 토대로 하고 근거로 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 나의 모든 이웃 역시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나만을 위하는 것이다. 나는 물론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머리를 위함으로써 내 이웃만을 위하는 것이지만 내가 나를 위하는 여러 갑절(내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이웃이 많으면 많을수록)로 내가 위해지는 것이니 어느 쪽이 지혜로운 삶이요 내게 더 합당한가.


목적이야 주님을 위하고 내 이웃을 위함이니 실질적인 내용인즉 내가 위해짐이다. 내가 위해진다는 것을 의식하고 이해타산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나로서는 나 자신이 아닌 나의 상대를 위하는 것으로 일관할 때 내가 위해지는 작용은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것. 이것이 진정 자유인이 누리는 자유다. 요렇게 하면 저쪽에서 나를 더 잘 위해줄 것이다 하고 이기심으로 따지고서 행하면 그런 고역이 없다. 왜냐면 자기 자신에게 노예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여하에 따라 일우일희, 일비일희에 바쁘기 때문에 여유가 일절 없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내가 위해진다기보다 '우리' 속의 '내'가 위해짐이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엡 5:28) 것이라 못박은 것. 이것은 무슨 심오한 철리(哲理)도 아니고 순전히 상식 차원의 이해다. 그런데 이러한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 앞에서 내가 마땅히 종의 일을 충성되게 하는 것이나 그래서 어느 순간에든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할 것이나(실상은 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지시하심뿐), 과연 그렇게 매사 일일이 지시하시고 명령하시는가?


아니다. 왜인가. 사랑으로써 둘이 하나되고 머리와 몸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 모두에서 밝힌 대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사랑 가운데에서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사랑으로 주님과 둘이 하나됨으로 이루어진 구조인데 마지못해 하라니까 별 다른 도리가 없어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 이렇게 내 편에서 적극적으로 나의 '주인 어른'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그 사랑의 의지 바로 그 방법이 쉬지 않고 기도함에 있는 것. 가령 예를 들면 빗발치듯 명령하신다면 나도 빗발치듯 기도하는 것.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말하자면 그런 식이다.


왜냐면 사사건건마다 주님의 인도하심대로 무엇이든지 하여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무엇을 하라 하시든 순종하겠다는 그 말씀을 올리는 순간이 주님께는 내게 지시하시는 순간으로 겹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주인(주체) 의식, 그 적극성이요 능동성이다. 한 마디로 사랑의 생명력이다.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않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몬 1:14)이라든가, "이렇게 준비해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이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5-7) 함과 같다.


우리도 한 때는 하나님께서 만일 내가 싫어하는 곳으로 보내시거나 가라고 명령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단적 증거다. 사랑하게 되면 나 자신을 다 바치기까지 하게 된다는 것을 나 위하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배우지"(요일 3:16) 않았던가. 요한 사도가 여기서 우리가 "사랑을 알고"라 한 것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해 온 것, 즉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사랑을 배운 것이다. 다시 말해 3위1체 원리에 의한 삶의 법칙을 배운 것이다.


그런즉 지금까지의 그릇된 관념으로부터 혁신적으로 완전히 탈피함이 필요하다. 그저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만 마음이 허공에 떠 있어 발은 정작 땅에 붙이지도 못한 채 온갖 풍조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려 경황이 없는 모양새와 이제는 단연코 결별할 때다. 이전에 진리를 알지 못할 때 행동하던 것처럼 이 세상에 내가 있는 것은 나머지 삶을 구차하게 마저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획기적으로 변혁된(나 한 개인으로 보아서는 천지 개벽인) "새 생명"(롬 6:4) 곧 새 삶, 새 생활에 돌입함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오로지 내 주인님이신 메시아 예수님 곧 마지막 아담을 위해 사는 것이니 이것이 정상 상태의 기본 표준형의 삶이다. 영원히 그러하다. 왜냐면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는 주님께서 나만을(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를 위하시기 때문.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이마다 나를 위하기 때문. 물론 이 세상에서는 이 기준에 크게 미흡하다기보다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생명의 법칙을 나 자신까지도 무시하고 파기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다 버리는 짝이 나더라도 나만은 이 가치를 제대로 깨달았으니 이 법대로 살리라는 그 사람만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입장 표명이 회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정, 단언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소유로서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主,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것이 우리가 "주님"이라 부르는 뜻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주님, 주님" 한다면 주님 앞에서 드러내놓고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 주님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됨이니 이런 이들이 구원커녕 그 무엇이든 받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만일 이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기도 응답을 받거나 무슨 초자연적 현상에 휩싸여 있다면 그것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악령으로부터 나온 것인즉 각별 유념할 일이다. 소위 "기적"이 능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증거"가 아니다.


앞으로 적 그리스도는 "기적" 가지고 한 몫 보도록 되어 있는 자이다. 거짓 것까지 보태어(살후 2:9) 그야말로 현란한 "기적" 잔치를 베풀어 온 세계 사람들의 넋을 빼놓을 것이니 유념할 일이다.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불교 쪽에서도 지금은 특이한 기적들을 많이 행하고 있다. 기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들도 얼마든지 그런 것을 행할 수 있으니 (물론 일정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라 했지만ㅡ살후 2:10) 기적  자체에 비중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즉 기적을 행한다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믿는 미신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


그러므로 구원받았으면 천사들처럼 초자연계 몸이 되어 과거 한 때 아담의 초자연계 몸으로 복구되어 살아야 당연하지만 아직도 이런 비극의 부끄러운 자연계 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세상에 보내심 받은 증거다(요 20:21,22). 성령께서 내게 임하실 때 그리스도(마지막 아담ㅡ고전 15:45)와 하나되어 있는 나이므로 나도 세상에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과 동시에 새로 보내심을 받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대 혁신이요 변화이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도 함께 죽고 부활하여 승천해 있다가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세상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이미 오순절 날 당시 임하여 오신 후 세상에 계심)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임해 있는 모습이 나의 현재의 이 육체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습인 것. 그러니 일하라고 보내심 받은(그리고 일함에는 반드시 이 세상 신의 거센 저항이 있으므로 이와 맞서 싸우기 위한) 나의 위치인즉 세상에서 소위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것은 믿음 없음은 고사하고 곧바로 사탄의 손발이 되어 있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음(빌 1:29)도 그 하나다. 그리스도의 참혹하게 당하신 고난을 짊어지고(고후 4:10) 그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4) 처지에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말인가, 그런 잠꼬대가 없다. 오늘날 이런 사탄의 풍조가 이 나라 "기독교"계를 휩쓸고 있다. 모두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요 이 무지의 현상은 인위적인 것("신학" 등등)만 찾고, 정작 명하신 대로의 찾음과 구함과 두드림(눅 11:9/마 11:27)이 없는 데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다. 그리스도께서 그 남으신 고난을 우리들 각자의 육체를 통해 마저 채우고 계심을 모른 무지다.


그런즉 이제부터는 심기 일전(一轉), 일신(一新)하여 오로지 주님의 종으로서 주인님이신 마지막 아담의 사람 살리시는 일에 동참한다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매사 임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골 3:17) 것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고전 10:31) 것이다. 육신에 있어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은(그가 아무리 구원 받았다 자처해도) 이런 명령 앞에서 우선 답답함부터 먼저 느낄 것이다. 고금 없는 속박이고 자유 억제라고.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생명의 핵심인 사랑의 정수(精髓)를 아직 맛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 받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감화되어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함을 가리킴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므로. 다시 말해 내가 의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을 여러 수만 명이나 죽인 죄인이라도 그 나 위하여 흘려주신 피로 다 씻어주시는 터이므로.


그러므로 사랑을 모르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유의 억제라고 해도 나만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 어쩔 것이냐. 남이 보기에는 아무리 사지(死池)로 기어 들어가는 형상이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할 때 이것이 자유인의 자유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강요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 이보다 더 큰 자유는 없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심으로써 나를 보내시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함으로써 주의 은혜의 해(year)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 함과 같다.


필자는 이 한국에 태어나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니 이유는 한국인들이야말로 동기 부여만 적절히 되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 가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근성을 타고 난 민족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선교 사업에 가장 적합한 인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데에서 큰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IQ를 자랑하는 민족이라고 영국인 Lynn 교수 등이 발표하지 않았던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영원 세계를 헤아리는 이지 작용이 일찍부터 발달해 있어 이를 믿어 의심치 않아 장례식을 후하게 치르는 민족으로도 중원 천지에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냥 죽으니 죽는가보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필시 이 죽음에 까닭이 있고 사후에 반드시 별도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나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흔들림 없는 신심의 발로이었다. 그러므로 이 21세기에 들어 세계 선교에 선두 주자로 나설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는 것이 한반도에 거주하는 우리들이다.


젊은이들은 아시아 아프리카로 옛 바울의 전도 장정(長征)의 배턴을 물려받아 용맹 정진으로 달려나갈 일이다.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떠나라고 당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두 사람 한 짝으로 믿음의 동지를 구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만한 패기를 가진 일꾼들을 이 시대는 시급히 요청하고 있다. 교회 목회자로서의 사례금을 일절 사절하고 순수한 믿음의 기도로 생활하며 교회를 이끌기로 작정했던 당시 20대의 조지 뮬러 부부의 결단을 본받을 일이다.


그들은 그 후 역시 순수한 기도 응답에 의한 자금으로 고아원 운영을 통한 대규모 전도 활동을 함으로써 이에 영향을 받은 중국 내지 선교회를 창립했던 젊은 영국인 헛슨 테일러 선교사. 헛슨 테일러는 조지 뮬러의 영향을 받아 순수한 기도 응답으로 선교사업을 운영하여 누구도 엄두를 못내던 중국 대륙 선교를 시작했고 찬란한 결실을 거둔 바 있으니 그들의 초교파 성격으로 인해 장로교 일색인 한국에는 보다 덜 알려져 있으나 세계적인 믿음의 대가요 선구자들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젊은이들은 대 이상을 품고 아시아 아프리카 각 지역으로 선구자, 개척자로 말 달려 나아갈 일이다. 마지막 때를 대비하여 성령으로 경고하고 권면한 바울 사도의 교회 위한 충정심(고전 7장)에 동조, 공감하여 홀몸으로 출발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물론 각 사람의 사정을 따라 받은 바 은혜가 가지각색이나 별달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독신으로 일생을 마칠 각오가 바람직하다. 곧 이어 들이닥칠 적 그리스도의 행패를 미리 예상 각오하는 혜안이라면 이에 이의가 없을 것으로 안다.


그리고 고국에 남아 있는 60대 이상의 '미망인 세대' 즉 교회 "과부"(딤전 5:5-9/눅 23:6,7)들은 성경에 이른 대로 각 시대 기도의 자산(資産)들이다. 개별적으로 또는 여럿이 함께 모여 기도를 시작할 일이다. 젊은이들의 전도 선교 해외 진출을 최전방 부대에 비한다면 위에 지적한 기도하는 이들의 결집은 그 후방 보급부대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민족이 역사적으로 부여받은 동방의 빛의 역할과 임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 인력은 국내 전도에 심혈을 기울임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각 교회 교역자들은 기도로 완전 무장하여 인근 지역 주민 전도에 총력을 경주할 일이다. 역시 한국 교회에는 덜 알려져 있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폄훼를 받고 있지만 19세기 미국의 부흥 전도자 찰즈 피니와 그와 함께 한 기도의 동역자 다니엘 내쉬 목사가 암긴 본은 지대하다. 무엇보다 1907년 한국 부흥의 원동력이요 그 기폭제가 되었던 당시 장감(長監) 주한 선교사들의 초교파 연합 기도 4개월의 정오 기도회 본을 따를 일이다. 그들은 정오에 모여 하루 1시간씩 기도하다가 별 영향이 없다 더 힘을 내어 저녁 식사 시간까지 연장하여 열심을 다한 결과 세계 교회 사랑 유례 없는 대역사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일하라고 구원하여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딴전을 피운다면 자기 구원을 소멸시키는 결과밖에 거둘 것이 없다. 죄를 지으면 다시 말해 구원하신 뜻에 못미치게 되면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이름을 스스로 말소시키는 격이 됨은 당연하다(출 32:33/계 3:5). 우리가 우리 이름이 그 생명 책에서 지워질까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책에 이름이 있으니 이를  근거로 용기 충천하여 원기 백배하여 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일 뿐. 그러나 자아중심으로 흘러 옛 아담의 길과 사탄 등 악령의 전철을 밟고 있을 경우 그 생명 책의 내 이름이 여전히 보전될 리 만무하다는 의미로 바로 알아 들어야 하는 것.


항상 초점은 내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이는 얼마든지 우리가 수시로 점검할 필요가 있으니 성경이 이를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선언한 후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려진 자"(고후 13:5)라고 서슴없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 내가 주님을 위해서만 살고 있고 나를 위함이 없다고(롬 14:7-9) 확언할 때 주님은 당연히 내 안에 계시나 그렇게 자신 있게 스스로에게 말하지 못할 때 주님은 계실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 사는 자는 생명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이 사망의 길을 버리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다시 출생하는 것이요 새로 창조됨이다. 아담도 사탄 등 악령들도 자기를 위해 사는 쪽으로 임의로 방향 회전을 했기 때문에(자기 자유 의지로써) 스스로 거두어 들인 결과다. 육신이 연약하므로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묵인하는 것이 "은혜"라고 하는 이들은 바울의 선언대로 하면(고전 16:22) 저주 받을 대상이다. 육신 그대로 남겨지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출생한다 하고 새로 창조된다 하리요. 죄짓는 죄인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아담은 왜 죽었으며 사탄은 왜 멸망의 운명에 처해 있는지를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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