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신바람 내며 휘파람 불며 어깨 춤추며

Tayseek Kwon 2016. 1. 1. 12:02

신바람 내며

휘파람 불며

어깨 춤추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ㅡ엡 5:19)


 

 

이것이 정확히 말하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를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앞에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2:12) 했는데 웬 딴 말이냐 할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3위1체 원리의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실상 두렵고 떠는 것과 항상 기뻐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울리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에 거짓말하지 않는 성경이 그렇게 대문짝 같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해서 항상 경직된 얼굴이 되어 전전긍긍 또는 노심초사하는 것은 없다. 왜냐면 이미 구원 받아 마지막 아담과의 영원한 짝이 되어 사랑의 노래, 사랑의 희열, 사랑의 막강한 생명력 속에 넘쳐 나는 시편 23편의 마음 속의 에덴 낙원을 향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으니, 항상 기뻐함이 있는 고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이 가능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이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함으로 엮어가는 매일의 시간이 줄기차게 연이어지는 것.


이 진실, 진리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계시하여 주심을 바라고 믿고 부지런히 다시 말해 어린 아이가 젖을 찾듯이 성경을 읽을 일이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다(벧전 2:2)" 함과 같다. "구원을 받았는데 뭘 또 '구원에 이르도록' 한단 말이냐" 하는 우문을 인제는 마음에 품지 말 것이다. 어린 아이는 젖 떨어지면 죽을 지경에 이르고 여차하면 죽는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다. 때문에 우리의 마지막 아담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내가 먹을 양식이다"(요 4:34)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신 것이다.


내가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고 안간힘을 다하여 먹으려 하고 마시려 하는 이는 천하에 아무도 없다. 왜냐면 먹고 마시는 것이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삶의 기쁨인 고로 먹으려고 사느냐 살려고 먹느냐 할 정도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즉 사람들 구원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사랑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고난 받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받는"(빌 1:29) 사랑의 행위이므로 "은혜"(:29)가 되는 까닭에 고난 받음 자체가 기쁨이 되니 어찌 하리요. 바울의 승리의 개가를 듣지 못했는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악한 것들(고난 받음)에 대하여 자랑하리라"(고후 12:9) 하지 않았는가.


세상 천지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고 이것을 자기 "자랑"(고전 15:31)이라고 사자의 포효성을 울리는 인간은 바울을 위시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공 순신의 한 마디 "常有十二 微臣不死"를 대단한 배포라고 민족적인 긍지를 일깨워주는 명언 중의 명언이라고 자랑하지만 바울 사도가 우리를 대표하여 승리의 함성을 내지른 이 대목에 와서는 할 말을 잃는다. 나는 아직 이렇지 못하다 싶으면 전력을 다하여 이 정상 상태로 각자의 믿음 생활을 회복시킬 일이다. 자유! 얼마나 소중한 말이더냐. 자유 위해 죽기까지 할 정도다. 자유, 사랑 모두 상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를 주신 것도 사랑의 삶이란 것이 처음부터 자유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삶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삶, 사랑, 사람ㅡ우리 조상들은 이 지혜를 일찍부터 꿰뚫고 있었기에 이런 말들을 한 사슬에 꿰어놓았던가.


세상 유혹에 넘어가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사랑을 잃지 않도록 삶을 제대로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구원을 이룸이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에서 자신을 채찍질하여 주님을 사랑함에 믿음의 형제들 사랑함에 불신자들 구원하기 위한 열성에 마음이 식지 않도록 하는 것이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 감이다. 구원 받은 기쁨 속에서 지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모든 악령들("사탄"이라는 말로 대변되는)의 시험에 굴하지 않고 초지일관 사랑 가운데에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을 때 그것이 두렵고 떪으로 구원을 이룸이 되는 것.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자아중심이어서 그런 것이므로 하늘 나라에는 불합격인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 자기가 그 죽음의 선악과를 입에 넣고 씹을 줄이야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어느 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을 우리가 어찌 잊을손가. 그래서 두렵고 떪이다.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경고하는 대목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광야 교회를 항상 교회에 연상시키기를 힘썼다. 그들이 세례 받고 성령의 은사에 참예하고 다 했지마는 결국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멸망하였음"(고전 10:2-5)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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