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3위1체 원리가 가르치는 인생 운명의 양면성 구조(그러나 이 운명은 3운법칙과 달리 각자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

Tayseek Kwon 2016. 1. 10. 16:51

덩덩 덩더꿍 지화자 좋구나 덩더꿍 인생의 명암(明暗)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삶을 백안시한다. 연연하지도 않거니와 그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오히려 옷 적실까 싶어 비 피하듯이 굳이 일부러 피하는 상황이다. 왜냐면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릴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 것이다"(눅 6:24,26)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몫에 태인 위로를 이 세상에서 모두 소진시켰다"는 것이니 장차 올 영원 세상에는 한 톨의 위로도 남지 않았다, "위로 받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만 남았다 즉 이 세상에서 맛보기로 당하는 고난 고통밖에 없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면 이 세상 사는 것을 회피하는 그래서 세상 사느라 헛되게 시간을 날려보낼까 전전긍긍 오로지 사람들을 구원하는 한껏 보람찬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이느라 불철주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리스도 안의 사람들은 삶의 낙이라고는 모르고 고난 고통만 움켜쥐고 있다는 말인가? 허나, 사람들 살려내는 이 일에 무한한 만족감을 누리고 다른 그 무엇과도 바꾸려 하지 않는데 어쩔 것인가. 그래서 이에 수반되는 고난 고통도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판인데 어쩔 것인가.


이야기의 주제가 다른 것이다. 번지 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삶에는 단 것만 있지 않고 쓴 것도 있는 법. 아무리 이 세상 삶을 즐겨도 단 것만 있던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이 세상 생활에서 주기적으로 당하지 않고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아주 크게 분류해서 나누어 겪는다는 그 차이뿐이다. 어찌 나 혼자 구원 받아 잘 살겠다는 것인가. 모두 내 이웃 전부가 다 함께 구원 받아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ㅡ이것이 하나님이 장치해놓으신(명령하신, 계명을 주신) 양심의 지상 명령이다.


이렇게 사람 살리자니까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는 고난 고통이므로 이런 고생을 치르는 것을 무한한 보람으로 느끼고 <즐기고> 기뻐한다는 것뿐이다. 때를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하는 때이고 싸우는(사람 구원의 일을 한사코 방해 저지하려는 악령들을 상대로) 때이지 편안하게 쉬는(안식하는) 때가 아닌 것이다(히 4:10). 하나님 주신 솔로몬의 혜안(慧眼)도 이 때를 분명히 가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으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전 3:1-8)고 하였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영원 세월의 최고도의 낙을 즐기는 측면에 비하면 한 순간만도 못한 이 세상에서의 시간(그것도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를 불확실성의)을 그 삶의<쓴 맛>을 당하는 것에 불과하고, 그것도 이 세상 삶의 <쓴 맛>의 측면과는 달리 내 스스로 자진해서 기쁨으로 뛰어드는 것이므로 가히 비교할 상대도 안된다. 이를 잘 표현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righteousness)와 평안(peace)과 희락(joy)이니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롬 14:17,18) 하는 대목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압축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 차체가 한 시도 부지를 못하니까. 초자연계 몸은 그렇지 않고 삶을 즐기기 위해서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닐까. 안먹고 안마신다 해서 목숨이 결딴 나는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옷에 걸치는 옷의 화려함이나, 몸뚱이 하나 비 피하고 추위 피하는 수단으로서의 집의 웅장함이 대수가 아니니, 먹고 마심의 식도락으로만 거의 소진되어 이로써만 거의 응집되어 있는 이 처량한 자연계 삶의 몰골이 아닌가. 먹고자 해서 사는지, 살고자 해서 먹는지 헷갈릴 정도의 그런 구차한 목숨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누리기 시작하는 '천국'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이며 그 대신 한 아름 넘치게 받아 챙겨 매일 매시간 누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한 것. 의 곧 참다운 올바른 삶을 사는 데에서 오는 만끽하는 포만감, 어디 그뿐인가, 나와 함께 1년 365일 사시는 사랑하는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의 품 안에서 일하는 그 평안과 기쁨의 잔은 항상 철철 넘쳐 난다. 삶(생명)의 본질은 이렇게 사랑의 교류(교제, 교통, 사귐)에서 오는 평안과 희열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생명의 정수(精髓)는 남김없이 꿀 빨아 먹듯이 다 챙겨 먹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위 구절에서 지적한 "의"를 두고 그리스도의 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가지신 의 등 쓸모 없는 잡소리를 함으로써 자신을 속인다. 모두 멸망을 재촉하는 상여가 지나가는 소리 그 푸념에 불과하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고전 1:30).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님과 같이 마지막 아담께서 나를 대신하여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혜와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과 구속됨의 기반을 닦아놓고 바로 그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원동력으로 하여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내 스스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됨을 구축해 간다는 뜻임을 바르게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천만에. 나를 위하여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고 이제는 내 차례가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이 새 생명 가운데에서 행하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아닌가! 이것이 항상 강조하지만 매사 만사(우리 구원을 포함하여)의 동시성과 양면성이다. 어느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이 우주 천하에 존재하지 않음을 웅변하는 것이 만유의 법칙 곧 3위1체의 원리인 것.


때문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가 나를 그에게 나타내주리라" 하셨으니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주님을 내게 나타내주시지 않는다. 하시고 싶어도 하실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불가능>을 두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신 것이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그 날개 아래 모으려 하지만 병아리들 스스로가 오지 않는 다음에야 어쩔 도리가 없음에 비유하신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나와 내 복음(구원의 희소식, 복된 소식)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 선언하셨고,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부인할 것이요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라"고 엄중 경고하신 것이다. 모두 동시성과 양면성을 말씀하심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나아가시면서도 아버지와의 둘이 하나되심의 사랑 가운데에서 그리고 우리와의 하나됨에서 오는 "앞에 있는 즐거움"(히 12:2)을 바라보시는 가운데에서 그 넘치는 주체하실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낙심 낙담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주시기"까지 하신 것이 아닌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하셨고,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다'(요 15:11) 하신 것이다.


우리의 현재 위치가 꼭 이와 같으니 우리는 주님의 닮은꼴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편 23편 정도만 애송(愛誦)하는 것으로 그치고 시편 139편은 간과하고 있는데, 물론 23편도 우리 속에 개설된 에덴동산을 말하는 것이지만 139편은 구체적으로 이를 적시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성령 안에서의 나의 모습을 성령의 감동으로 묘사한 그림인 것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앞뒤)를 두르신다"는 것은 나를 안으시는 것이요, "내게 안수(손을 대는 것)하신다" 함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는 형용이니 우리가 그 품속의 아기인 것이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아들께서도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것이다(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獨生)하신(외아들이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 하나님 보기를 원하는 사람, 보아야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역사상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가 하나님이시다.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대 위하여 그대를 사랑하시어(갈 2:20) 그대를 살리시려 세상에 오심으로써 영원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합니다"(시 139:6) 하게 되는 것.


그런즉 마지막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았다고 하여 당장 천사와 같은 영광의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됨이 아니고 세상에서 사람들 건지어 살려내는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당연한 일을 하게 되어 있음이니(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다"(마 11:28-30).


멍에는 있고 짐을 진 것은 그대로 있다. 그러나 과거 믿기 전 죽은 자로 있을 때처럼 혼자 지는 내 자신의 죄 짐도 아니고 이 세상 신 사탄에게 얽매인 멍에도 아니다. 생활은 여전히 고생 길이고 이전과 다름 없는 고초가 그대로 있지만 이 고난의 의미는 하늘과 땅의 차이로 180도로 바꿔진 것이요 뿐 아니라 나를 자기 목숨 바치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과의 둘이 하나됨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니 현재 내 위치에 내 옆에 내 앞에 나를 위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쓴 바로 그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따라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역설하니) 기뻐하라"(4:4) 한 것. 구원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무릇 인생은 아래 그림과 같다.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항상 어깨에 둘러메고 가는 것이다. 양면성과 동시성의 모습이다. 



ⓒ kwon tayseek

덩덩 덩더꿍 덩덩 덩더꿍

에헤야 좋구나 덩더꿍 지화자 좋구나 덩더꿍

 

덩덩 덩더꿍 덩덩 덩더꿍

에루화 좋구나 덩더꿍 얼씨구 절씨구 덩더꿍


덩덩 덩더꿍 덩덩 덩더꿍

덩실 덩실 덩더꿍 덩지 덩지 덩더꿍


①지금 지화자 덩더꿍 하고 좋아라 하는 사람은 그 정반대의 상황을 항상 운명적으로 둘러메고 가는 것이요, ②지금 사람 살리는 영적(靈的) 의술, 인술(仁術)을 베푸는 이들은 이 일을 함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온갖 고초 시련 속에서도 덩더꿍 흥에 겨운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 "매사에 감사함"(살전 5:16,18)이다.


 

덩덩 덩더꿍
땅땅 땅다콩

하하하

또한 ①의 경우 영원한 <기쁨 없고 평안 없음>의 자기 자신을 둘러메고 가는 자기 운명 자기 결정의 걸음걸이요, ②의 경우 영원 복락의 <덩더꿍 지화자>와의 불가분의 관계를 의식하면서 또 그러한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가고("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양면성의 인생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만 한정된다. 오는 세상, 영원 세계에서는 단 하나뿐인 이 세상과는 달리, 그 세상의 구조 자체가 양면성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은 영원 멸망에 있든지 복락에 있든지 단일 구조 즉 생명의 낙을 누리면 영원히 생명의 낙 일색으로만 누리고 멸망의 죽음 고통이 안겨지는 경우에는 그 영원한 고통 일색으로만 받게 되는 단일 구조다. 고로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는 그 영원 세계에서는 다시는 받을 위로가 없다 하신 것이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ㅡ"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니 아버지께서 또한 그러하시다. 그래서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뉜다.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고전 7:32-34) 함과 같다.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주님보다 내게 더 가까운 사이가 없으니 그 사랑에서, 그 모습에서, 그리고 나와 '둘이 하나됨'에서 그러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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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이트에서 옮긴 글/위의 그림 거꾸로 하면 아래 그림 되고, 아래 그림 거꾸로 하면 위의 그림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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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풀어 가로쓰기(世界共用文字)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①자모음 수가 보조모음을 포함시켜도 27개이므로 영문 자판과 똑같아

②보조모음을 활용하여 세계 거의 모든 모음 표기 가능

③보조 모음과 더불어 한글 자음 ㅇ을 보조자음으로도 활용, 세계 거의 모든 자음 표기

④보조모음을 통해 장모음(길게 소리 내는) 표기 가능ㅡ대소 문자 구별해서 쓰는 것은 기본

⑤한글 모양을 그대로 본딴 것이므로 인식하기에도 부담 없어 광고 용 문자 활용 가능

영어 이상으로 각종 화려한 문자체를 만들 수 있으므로

⑥모음이 아래 위로 꼬리를 달고 있고 자음은 일치하게 둥근 모양을 띠며 받침 위에는 영어 i나 j처럼 위에 점을 찍으므로 시각적 효과가 뛰어나 읽기 쉬움(필기체)

⑦글자 없는 언어가 세계에 수두룩한데 문자 수출 가능

⑧일본 문자가 히라카나 가타카나 두 벌로 쓰이는데 우리라고 해서 이 개량 자모음을 못쓸 이유가 없음

⑨모음 구성이 거의 완벽하므로 여기에 영문 알파벳 자음을 붙여 써도 문자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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