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3운법칙이 "전설"로서 사장(死藏)되어 있었던 노아를 부활시키다

Tayseek Kwon 2015. 12. 28. 08:08

3운법칙으로 입증된 노아의 생애의 진실성



고대 인물로서는 유일하게 노아의 생애가 3운법칙(trini homo, fashomo)으로 분석됨으로써 무게가 더해지고 있다. 천년 가까이 살았다 해서 성경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대다수 기독교인들마저 전설처럼 취급해 왔던 것인데 이제 3운법칙으로 말미암아 혜성 같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3운법칙의 SN유형을 대표하는 인물로서ㅡ. 세 가지 유형을 혈액형처럼 그냥 A형, B형, C형처럼 부르면 더 간단하나, SN형의 특징인 7/19이라는 숫자를 기억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 SN(Seven-nineteenths), OT(One third, 1/3), FS(Four-seventh, 4/7) 로 이름 지은 것뿐이다.


모두 LP(활동기 또는 전성기를 가리킴)에 해당된다. 노아의 JP는 장장 250년이다. 고로 이해하기 쉽도록 외우기 편하게 "유청소년기"라고 하는 것이지, 현대인도 장수한 사람이 SN형에 해당될 때는 청년기를 훌쩍 넘기기도 한다. 미국 대통령 후버의 경우가 그러하다. 모세도 그 JP가 40세까지였다. 노아가 부패했던 당대에 의인으로 살았을 때는 고초도 많았으리라. 그러나 홍수 후에는 아담처럼 되어 모든 인생들의 수장 격이었으므로 활동기로 잡는 데에는 아무 무리가 없다. 상대적으로 홍수 이전을 노아의 비활동기, 침체기(DP)로 꼽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 것은 현재 우리의 지각[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을 판단하고 판별하기에는 한없는 역부족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초자연계 몸이 되어야 능히 다루어질 수 있음이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초자연계 몸으로 만드셨으나[처음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지으셨지만] 그래서 모든 지식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체제 속에서 모든 지식을 누리게 되어 있었으나[천사들의 도움을 입어], 스스로 범죄하여 자청해서 이런 불행 속에 들어 왔으니 이런 현실을 감안해서 넘치고 지나쳐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은 지혜롭게 일단 접어두는 것이 정상이요 지혜이자 상책이다. 우리가 장차 초자연계 즉 영적인 몸으로 변환될 때는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니 그 때까지 기다려도 손해될 것은 없다는 결론이다.


우리가 자연 환경의 아름다움에서 확인하듯이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이 아름다움뿐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조화되어' 있음으로써 즐겁고 좋은 느낌을 줄 때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자리잡아 위치해 있을 때 우리는 이를 가리켜 아름다움이라 한다.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 구조도 이렇게 조화되어 있는 것을 가리켜 미인(美人)이라 하듯이 팔이나 다리 또는 이목구비가 아무렇게나 붙어 있다든지 길고 짧음이 불규칙으로 부조화를 이룰 때 이를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 경우 미(美)가 아닌 추(醜)이다.


이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룸에 대칭 원리가 그  근간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구원하시는 이로서의 사랑 일변도만 아니라 하나님은 "재판장"[행 10:42]으로서의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심은 위에서 지적한 그런 조화미에 속한다. 사랑만 있으면 그 자체가 '추'가 된다. 그 '추'는 혼란과 혼돈을 야기시키고 질서 정연함의 '미'를 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임이다. 엄정함이 함께 깃들여 있을 때 그 사랑은 기막힌 아름다움을 조성해내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를 증명하고 있는 3운법칙도 그런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다. 그 3가지 유형으로서의 구조 자체가 이미 그런 기묘한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개개인의 인생 삶을 어김 없이 그런 법칙으로써 그와 같이 묘사해놓으시는 것만 해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 아닐까. 창조하신 모든 것이 어느 하나라도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만물은 다 아름다우나 사람의 마음이든 악령의 마음이든 마음이 거짓되어 부패하고 더럽고 추한 것으로서 우주 천하 만물 중에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하였다[렘 17:9]. 


빛은 동방에서  


바울 사도가 아시아 쪽으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성령께서는 이를 금하시고 마케도니아로 향하게 하셨다. 그로부터 복음은 동쪽이 아닌 서쪽 즉 유럽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갔고, 거기서 일시 멈추어 있다가 다시 서진(西進)하여  아메리까 신대륙으로 건너가 거기서 뿌리 내려 번지기 시작한 복음운동은 세계 선교의 깃발로 나부껴 마침내 다시 서진을 계속하여 한국에까지 미쳐 1907년 온 세계 교회가 놀란 "한국 부흥", 세계에서 가장 지능지수가 높은 민족의 한국 땅에서 마침내 그런 부흥역사가 탄생하였다.


이 장엄한 역사(役事)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국 주재 선교사들이 4개월[9-12월] 합심 기도에 의해 탄생시킨 것으로서 이런 합심 기도에 의한 성령의 역사는 교회사의 측면으로 볼 때 일대 기념비적인 것이다. 가히 세계 선교의 본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제 한국에서 복음은 한반도 민족을 통하여, [바울이 애초 시도하려다가 미래를 내다보시는 주님에 의해 그 코스가 변경되어 일시 보류되었던] 광활한  아시아 아프리까 정복을 위한 대장정(大長征)으로서 방금 지적한 그런 전통적 '서진 패턴'을 이어받은 한국 교회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바울의 복음 전도를 동방이 아닌 서방으로 방향을 고쳐 잡게 하신 것은 이미 동방으로는 페르시아 당시의 '조로아스터'교를 위시해 인도에는 불교 등이 왕성하고 중국에는 완고한 조상 숭배의 유학이 성행함에 비추어 볼 때 비교적 장애가 없는 서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 전파는 산지사방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일정한 방향이 있어 환경 여건이 좋은 데만 골라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시대적 구분으로 보면 동방에서 서방으로의 흐름인 것만은 분명하다.


"빛은 동방에서부터"라 할까. 창세기에서도 에덴낙원 역시 "에덴의 동방[eastward in Eden]"에 창설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아담 내외를 에덴낙원에서 추방하실 때도 "그 동쪽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막게" 하셨다 했으니 "에덴낙원의 동쪽"이다. 동쪽이 머리가 되는 모양이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적 진행 방향을 따라 주로 아프리까, 아시아 대륙을 향하여 복음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사도시대에는 모든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었으나 300년간의 박해 기간을 거치면서 그리고 이후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는 등의 세월을 보내며 몇 가지 핵심 진리가 왜곡된 채 현재까지 이르렀다. 그 첫째가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을 가리켜 구약에 '엘로힘'이란 말의 복수로 지칭되어 있음과 같이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으로 계시는 정도는 알고 있으나 이에 대한 해석이 중구난방이었다.


심지어는 말하기를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세 가지 측면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었다. 올바른 지식에 터전을 둔 확신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해야지, 그렇지 못한 불확실한 지식으로는 오히려 하나님 사업에 걸림 돌밖에 안된다. 불확실한 지식은 자연 불확실한 믿음을 만들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각종 이단사설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둘째는 인류 시조가 살았던 에덴낙원에 대한 몰이해다. 이에 대한 부정확한 지식은 죽음에 대한 그리고 이 세상의 실상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낳아 성경 말씀에 입각한 능동적 복음 사업에 적잖은 지장을 자초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에덴낙원은 이 자연계의 일부가 아니라 영계 곧 초자연계로서, 이 세상의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거기서 인간을 위해 창조된 영물(지금까지 "천사"라 불러 왔던ㅡ성경은 그런 고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단지 "사자[使者, messenger]" 정도로 지칭하고 있는데,, 자연계에 속하여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는 기를 못펴는 인생들이 마치 반(半)하나님처럼 여겨 천사[angel]라고 다소 거창하게 부르기 시작했던 것(창 2:19). .


셋째는 이상과 같은 핵심적 사항에 대한 부정확한 지식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가 또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핍박 받는 것을 정상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지 않고 어쩌다 일어나는 불행한 일 즉 비정상적인 사태로 보는 그릇된 안목이다. 이런 극히 위험한 교회관과 세계관을 가지고는 이 마지막 때를 당하여 향후 교회를 운영하고 복음 전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제대로 일을 진행시킬 수가 없다. 오직 처음부터 일사각오 아래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전장에 나서는 자가 살기를 바라면 그 군대는 필패이다. 인류 역사는 사탄 곧 이 세상 신과의 전쟁사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구원 받기에 지장이 있은 것도 아니다. 이런 악조건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꾸준히 줄기차게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른 것이다. 왜냐면 구원은 지식 자체에 있지 않고[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고전 8:1,2]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뜻에 순종함에 있는 까닭이다(:2). 따라서 위에 지적한  그런 지식이 전혀 없어도 얼마든지 구원의 사업은 이루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적 양상이 많이 달라진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살후 2:3-12].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복음 전도의 막중한 사명을 받은 우리 한민족은 이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 부여된 자랑스러운 과업을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으니 무엇보다 정확하게 복음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 사업을 펼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능지수의 민족답게 우리 조상들은 이웃 중국인들로부터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불려져 예의 바른 민족으로 알려졌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남을 존중해 줄 줄을 알았다는 증거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한국에 건너온 선교사들조차 그들 스스로가 놀랄 만큼 개인주의 성향보다 '우리' 의식이 창달된 문화를 꽃피워 공동체 의식이 강했던 전통에 심히 놀라고 부러워했다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그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고 훗날 고국에 돌아가 기록에 남겨 두고 있을 정도다. 또 장례(葬禮)를 성대히 치르는 나라 민족으로 일찍이 알려졌었다. 지능지수가 높은 민족답게 인생의 죽음에 대해 남다른 예지(叡智)가 있어 죽음 이후에도 반드시 별도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인간이 동물들과는 완연히 다른데 그 모든 이치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구명하고자 하는 진리에의 갈구 곧 빛을 사모하는 심정, 이 기풍은 흰 옷을 즐겨 입은 데에서도 드러났다 할 것이다. 백색은 광명을 상징하고 어두움을 배제하는 빛을 나타냄이다. 빛을 동경함은 진리에의 강렬한 욕구를 말하는 것이니, 해 돋는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온 그 땅 끝이 바로 한반도였음을 감안할 때 우리 민족의 진리 탐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빛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요 8:12]. 어두움은 무지무식(無知無識)과 통하기 때문에 모든 진실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일심에서 빛을 동경하고 밝음을 추구하는 것이 이런 백의민족으로서의 긍지였었다. 그리하여 나라 이름도 조선(朝鮮)이니 곧 아침의 광명이다. 국민적 기질이 그러하므로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대로 남달리 왕성했고 유교가 들어오면 유교대로 흥했고 기독교가 들어오면 기독교가 창성했다.


이런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이는 한국인이 종교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남다른 진리에의 향수 때문이다. 무엇인가 올바른 삶, 진리대로의 삶, 인간다운 삶에의 강렬한 탐색인 것이요 진리에의 갈망이다. 천재는 예외 없이 종교의 문을 한번씩은 두드려본다는 말도 있듯이 지능지수 높은 민족이기에 이런 성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벨탑 불상사 이후 인류는 제각기 자기네끼리 통하는 언어를 따라 끼리끼리가 되어버려 동서남북 사방으로 흩어졌다.


노아가 가르치던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은 어느 새인지도 모르게 까마득하게 잊혀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갈망하여 한국인 특유의 기마민족성은 그냥 그대로 동으로만 말을 몰게 한 것이다. 이제 이 민족의 선천적 열망을 완전히 채워 주는 진리를 성경 말씀을 통해 접하고 있는 오늘이다. 그 옛날 광명을 찾아 동쪽으로 말 달리던 기상(氣像)은 이제는  그 찾은 바 진리를 한 아름 안고서 당시에 왔던 길을 되돌려 서쪽으로 말 달려 그 찾은 진리를 온 세계에다 광포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안겨 줄 수 있는 자기 '때'를 만난 것이다.


징기스칸이 세계 정복을 위해 질풍노도처럼 서쪽으로 말을 몰아 유럽대륙을 석권한 후 동쪽으로 다시 돌아 중원에 안주한 것과는 반대로, 우리는 '세계 정복'이 아닌 정신적 영적 자유를 얻고자 진리를 통한 '인간 정복'을 위해 동쪽으로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가 이제 애초의 그 색깔 그대로 칼 아닌 복음을 들고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찰나에 이르렀다. 같은 몽골계 인종이라도 징기스칸의 몽골은 무력으로 세계 정복을 시도했으나 그 영광이 오늘날은 단지 허울만 남기고 물거품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이 아닌 정신문화적 측면 즉 진리로써의 세계 정복을 위해 그 장도(壯途)를 펼치려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로 완전무장하여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설 때가 바야흐로 우리 발 앞에 떨어진 것이다. 즉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복음운동의 단초가 되게 하셨고 이제 이 말세지말에 와서는 세계에서 가장 지능지수 높은 그래서 처음부터 진리를 누구보다 남달리 목말라 하던 우리 한(韓) 민족을 통하여 복음 전파의 대임을 맡기시는 것이라 믿어도 좋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가장 잘 어울리는 선교 활동가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제 한민족은 하나님 나라의 선구자로서 또는 곧 재림하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사(傳令使)로서 맡은 바 임무에 충성할 일이다. 진리를 찾아 동으로, 동으로 외롭게 말을 몰던 그 시대의 선구자는 이제는 서(西)로 서방으로 회귀하여 말 달리는 이 시대 선구자로 부각되는 마지막 몽골 기마 민족의 후예이다. 이 우렁찬 말 발굽 소리가 사라지면 이 세계도 그 피비린내 나는(형 가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아우 아벨을 죽임으로써 첫 페이지를 연 인류사이므로) 죽음의 무대의 종막을 서서히 내리게 될 것이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그 때 세상은 끝나게 된다고 말씀하신 그대로다(마 24:14).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으로 그 역사적 소임을 마쳤다. 세계에서 가장 지성적인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인간 삶의 진리에 대해 어느 민족보다 목말라 할 것이 틀림없고 그렇다면 그런 민족을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을 이유는 없다. 과연 이 마지막 때를 위하여 그런 민족을 이 한반도라는 항아리 속에 보관해두신 것이 아니랴. 이제는 동방의 빛을 발해야 할 때이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이 나라 잃은 이천 년이라는 장장 세월을 거치고도 다시 불사조처럼 일어나 세계의 이목을 끎으로써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세계에 알리는 몫[신약의 전주(前奏)가 되는 구약의 역사적 의미와 그 진실성을 입증하는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과 맞먹는다 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이 한반도는 수없는 외침(外侵)을 받았지만 그 때마다 그 위기를 면하게 해 주셨던 것이다. 그 최대의 전란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1908년 한국 부흥을 일으킨 20명 주한(駐韓) 선교사들의 하루 4시간 이상 4개월에 걸친 정오기도회를 모든 나라에 가서 실시하면 그것은 단기간 내에 그 지역을 복음화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조지 뮬러의 기도 응답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헛슨 테일러의 중국 대륙 선교 방침을 따르면 역시 단기간 내에 해당 지역(外地)을 복음화할 수 있는 역시 지름길이 된다. 그리고 국내 전도는 찰즈 피니와 다니엘 네쉬가 그 본이 되어 있는 기도와 복음 전도라는 양면성의 전략으로 철저히 나가면 역시 짧은 기간 내에 복음화가 가능해진다. 세계 각처로 쏟아져 나가 이상 3가지 방안으로 공략하면 틀림없다.


한국인은 동방으로 말 달려 온 기마민족의 후예답게 이 좁은 땅 덩이 위에 서로 상대의 상투나 쥐고 흔들며 객기를 부릴 일이 아니다. 해외로 나아가 미지의 땅을 개척할 의기와 용기가 넘쳐 흐르는 호기를 부려야 마땅한 자질들이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빠져 나가 국외에서 강토를 넓힐 일이다. 그렇다고 남의 땅을 침략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본시부터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역사를 엮어 온 긍지 넘치는 민족이다. 마땅히 사람 사는 도리를 가지고 세계 공략에 나설 일이다. 일찍이 김구 선생이, "우리는 마땅히 문화로써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갈파한 사실을 잊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