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역천자 망하고 순천자 흥한다

Tayseek Kwon 2019. 3. 30. 07:39






역천자 망하고 순천자 흥한다


남을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

그 뜻을 찾아 행하기를 힘쓰는데 시간을 보내다보니

자연 가난해질 수밖에 없고

(남들은 그 시간에 악착스럽게 돈을 벌려고 하는데)

가난하니 천대 받고 천대 받는 것이 불가피하니

약한 자들 축에 들어가고...

고로 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평안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주님 은혜 안에서의 기쁨과 평안.

주님 누리셨던 그 기쁨과 평안으로 대체됨.

.......

이런 것을 주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것이 눅 14:25-35.

이런 내적인 초강력의 만족과 풍족으로 살지 않고

외적인 세상 삶에서는 빈한하다보니

"아이구 못살겠다, 도저히 못견디겠다" 하고

주님을 버리게 되는 것이

망대 지어 올릴 예산은 충분히 생각 못하고

달려들어 시작부터 했다가 중도에 그만둠으로써

사람들의 비웃음만 사는 것과 같다고 경고하신 것.

처음부터 그런 삶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무나 누구든지 생명의 주님께 오는 것,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신 것(요 6:65).

.......

항상 유념할 것은 원래부터(아담의 범죄 이후)

현세는 도무지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것.

사람 살 수 없는 죽음의 황야뿐임을 아는 것이

메시야 예수님께 나아오는 첫째 동기임을 알아야.

이제까지 멋모르고 실상을 모르고

그저 살아 있으니까 살아야겠다고

남 따라 정신없이 달려오다가 이 세상이 실제는

깊은 수렁 앞 또는 천길 낭떠러지 앞인 줄 뒤늦게 알고

아차 하고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요 6:45) 받음인 것.

.......

바로 이것이 목마른자 물을 찾음이요

병든 자 의사 찾음이요

죽음의 불뱀에게 물려 죽음을 앞두고

모세의 놋으로 만들어 올린 뱀 형상을

쳐다보는 순간임(요 12:32/민 21:9).

이러한 위기 의식이 없는 한

절대로 대칭 아담께 올 수 없음을 명심해야.

이 세상의 정확한 실상에 눈뜨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요 6:45) 것.

.......

아담이 초자연계 몸이었음을 강조하고

에덴이 초자연계였음을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 있음.

자연계 몸의 황량함은 사막의 황량함 바로 그것인 것.

이 세상을 황량한 사막, 사람 살 수 없는 사막임을

직시하지 않는 한 세상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필연적으로 구원은 불가능하게 됨을

미리 경고하신 것이 눅 14:25-35.

영생 얻는다니까 그것도 믿으면 된다니까

얼씨구나 너도나도 하고 달려들도록 만든 것이

오늘날까지의 "기독교 교리".

.......

영생의 도리는 바르게 가르칠 생각 없이

사람 끌어들이기에만 혈안이 된 것처럼.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해.

구원이 과거의 사실임과 동시

현재에 국한하고(과거 믿었어도 오늘 믿음에서 떠날 수 있어)

또한 미래형 즉 "구원될 것이다" 하고

표현함이 이 사실에 기인함인 것.

왜냐면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 곁을 떠나가는 것이 속출하니까(요 6:66).

.......

당사자 본인은 자기가 믿음이 그대로 있는 줄 착각하고

심판대에 나가기까지도 자신하지만

정작 심판 자리에 가서야

불법을 행한 자라는 선고를 받게 됨을

주님 친히 명백히 하셨음을 항상 명심해야.

고로 아담 범죄 후 죽음(자연계 육체로의 전락)의 세상임을

실감해야(요 6:68) 생명의 주님을

어떤 일이 닥치든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아중심으로 흘러버려

"자기를 빼앗기거나 잃게 되는"(눅 9:25) 것.

"꺼리지 않고 하나님 뜻을 전하였다"(행 20:27) 함이 바로 이 뜻.

무엇 때문에 <꺼리겠는가>. 듣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계속 주장하면 제자들 예수님 떠났듯이 떠나버리기 때문.

그렇다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면 그들 영혼이 멸망하는 것이

명약관화ㅡ그래서 꺼리지 않고 전했던 것.

떠나든 말든 곧이곧대로 정직하게 전한 것.

.......

고로 천국 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제대로 알라는 것.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아가기를 힘쓰고

크고 넓은 문과 길을 기피하는 이유.

제대로 보고 제대로 인식하라는 것뿐.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하고 있는데

눈이 먼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휘둘릴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에 따른 대가를 각오하고 있으라는 것이 주님의 경고.

.......

이 세상은 죄덩어리라 자아중심 일변도이고

생명의 길(방법)은 자기 부인인데

어찌 화합이 되고 조화가 될 수 있는가, 생각하면 간단한 것.

자아중심의 화신인 악마가 이 세상을 움켜쥐고 있는데

어찌 대세가 자기 부인이 될 수 있는가.

결국 결론은 이 세상 살기 위해서는

자아중심 즉 죄를 짓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도 아예 세상 살려고 하는 마음부터 버리라는 것.

이것이 순리이고, 억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역행ㅡ역으로 행함이다.

순천자/는 살고 역/逆천자는 망한다.

......




위에서 말한 것은 기본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의 자연계 삶과 아담의 원래 누렸던 초자연계 삶이

비교가 안된다는 것은

우리가 비록 그 초자연계 삶은 상상으로만 그치지만 명백합니다.

고로 이런 삶 같지도 않은 삶을 사느라,

주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귀한 시간,

내 시간도 아닌 주님의 소유인 시간을

주님의 뜻대로 사람 구원하여 살리는 일에 쓰지 않고

"세상 삶을 산다"고 허비한다는 것은

우리의 양식/良識으로도 결코 허용되지 않는 일입니다.


또 이 세상 지배자가 사탄으로서

우리가 그 원수인데

자기의 원수들이 호강을 누리며 살도록 허용할까요?

오히려 고생의 수렁에 처넣을 수 있고도 남습니다.

문제는 똑같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판인데,

우리 <스스로 그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과

그와 반대로 이 세상에서 품위 있게 잘 살고자 하는데

이 욕구와는 반대로 <강제로 천덕꾸러기 되는 것>과의

차이인 것입니다. 치욕과 명예로운 것과의 차이.

참으로 품위를 지키고 손상시키지 않는 방법이 후자가 아닌 전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