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자기 부인이 아니면 아예 살 수가 없음을 못박는 것이 중요

Tayseek Kwon 2019. 3. 29. 19:42





자기 부인이 아니면 아예 살 수가 없음을 못박는 것이 중요


"지금은 "이가봇"의 수치를 씻고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아야 하는 때"

의 속편으로 올리는 게재물입니다. 




인간이나 영물/靈物이나 이지적인 피조물의 

사는 방법이 그렇듯이(창조주께서 모든 피조물의 머리이시니)

즉 머리와 몸 관계에서 한 몸됨에 있음과 같이 

우리 구원의 이치도 당연히 그래요.

만유의 존재, 작동이 그러함이니 만유의 법칙

다시 말해 짝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절대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몸만을 위하고

몸 역시 머리만을 위함으로써 불협화음 없이 물 흐르듯

삶의 행복은 진행되어 가는 것이지요.

아담읁 모든 인류의 이러한 머리로서 창조된 것이지요.


아담을 대신하신 대칭 아담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바로 그 머리의 역할을 차질없이 수행하신 것이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어 우리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신

바로 십자가 죽으심의 사랑으로 증명하시어 본을 보이신 것.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셨느냐ㅡ목숨까지 다 주심으로써. 

목숨까지니까 하나도 남겨두신 것이 없어요.

그래서 요한 사도는 다시 이를 나중에 또 설명하여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옳다"(요일 3:16) 했으니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사랑하는 것 외에 

달리 있을 수 없고 그렇지 못하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밖에 없어요.


이것이 "사랑"(자신을 다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예수님의 제자

즉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을 확인하게 된다

인정받게 된다 즉 구원 받은 증거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그 실질적 증거가 자기 자신을 다 바침,

목숨까지 바치니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구원받을 사람들 위해 또는 교회 위해(골 1:24)

"자기 목숨까지 미워함"이니(왜냐면 자기를 위하지 않으니) 

머리이신 "주님을 위해"(빌 1:29) 그리고 따라 십자가 지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눅 14:25-35) 자들이었기에 

초대교회는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것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롬 14:7) 한 꼭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법이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할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표현하여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선한 일을 행하여 

선한 사업에 부유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라"(딤전 6:17,18) 한 것이며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도록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도록"(엡 4:28) 가르쳤어요.

이런 선한 행실 곧 생명의 법대로 사는 것을 보고(마 5: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벧전 3:1) 됩니다. 

머리(남편)와 몸(아내) 관계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감동이 옵니다.


동시에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 후 

그 자리가 악마에게 넘겨진 상황이 되어 사탄이 지배하므로

이와 같이 생명의 법칙을 준수하여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데는 죽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미워하는 

충성심으로써 우리 믿음이 저울질되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이 원수는 죽음의 권세를 쥐어(아담 살인자로서)

죽음과 고난, 고통으로 위협하게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기 때문에 

죽도록 사랑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는 증거/결론임을

결단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있어요. 

그냥 말로만 하나님 "믿는다, 사랑한다"로는 통하지 않아요.

그래서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살인자라고 했지요(요일 3:15).

요한일서 초두에서부터 시작되는 "죄, 운운"은

이 (형제) 사랑이 없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무슨 살인이나 간음이나 절도죄 등을 지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커녕 믿음도 없는 자로서

믿는답시고 단지 교회 중에 끼어 있는 자기 기만 행위일 뿐.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형제 사랑", 

당시나 지금이나 거의 같은데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법칙대로 사느냐 여부를 좋이 가름하는 잣대로서

이보다 명백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죄란 것이 무엇이냐 할 때

법을 어김이라 했지요(요일 3:4).

모든 것을 이와 같이 자연법칙대로 우주가 운행되는 것처럼

생명의 법을 어기느냐 않느냐로써 가름해야 

정확한 이해가 됩니다.

그저 막연하게 인식하여 구원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죄와 악이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믿는 자로, 구원받은 자로 자처하여 얼렁뚱땅 지냅니다. 

이제는 정확히 알아 처신할 때입니다. 시대가 다릅니다.

과거에 전연 볼 수 없던 초능력으로써 하나님의 위엄을 가장,

"택한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속이려" 드는 시대이기 때문.


대칭 아담 오시기 전에는 아무리 생명의 법칙을 지킨다 해도

구원이 되지 못한 것은 이미 인간은 죽은 자이므로

죽어야 하고 죽지 않고는 아무 일도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나 죽으면 만사휴의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더

자시고 말고 할 게 없어요. 모든 것의 종결입니다. 

고로 일단 죽은 다음에 이야기가 돼요. 

고로 대칭 아담으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아니고는 

그 어느 인간도 의로운 자가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율법(고전 9:21) 곧 생명의 법칙을 지켜 행해야

하나님 앞에 의인되는데(롬 2:13), 죽은 자에다 죄의 몸 즉

자연계 육체이다보니 자아중심으로서의 본능적 행위가

주장하는지라 도저히 앞서 설명한 생명의 법칙 준수가 안돼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만이 나를 주관하게 된 것입니다.

위의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 얻는다"(롬 2:13)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없습니다. 

무시하거나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9)는

이 말에만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으로 눌러붙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어요.

그것이 왜 그런지 자초지종을 생각할 여유가 도무지 없어요. 


의를 행해야 의인이 되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요 죄인인 상태에서는 의를 행할 수 없으므로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 뜻입니다. 

대칭 아담 예수님의 나 위한 죽으심을 믿어야 

그제야 비로소 "의를 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 의 뜻입니다.

곧이어 설명하게 되는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믿어 구원되는 그 구조 자체가 의를 행하도록

다시 말해 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의 육체가 초자연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함(아담의 범죄로써)으로 인해

초자연계 육체로 다시 돌아간 상태에서야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의미가 비로소 있게 되어

영생과 연관 지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영생 자체가 불가능해요.

자연계 육체로 어떻게 그 육신이 썩지 않고 영생한답니까.

그러니 의롭게 된다 할 때는 영생을 전제로 하는 의미인 고로

썩어지는 육체로서 아무리 의롭다 하심 받아보아야

썩는 육체로 죽어버리는데 영생 곧 구원과는 무관하니까

대칭/對稱 아담이신 예수님의 구원을 믿어야 

문제 해결이 나는 고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한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자연계 존재가 어떻게 초자여계 존재가 되느냐,

아담의 범죄의 대가인 죽음의 자연계 육체를 

물려받음으로써 자연계 육체가 됨과 같이

대칭 아담으로써 초자연계 육체가 되는 방법이 

'아담의 육체'와 대칭되는 '대칭 아담의 영'을 모심으로써

예수님의 초자연계 몸의 부활이 나의 것이 됨으로 인하여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것입니다.


고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즉 영생하게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대칭 아담이신 성자/聖子 하나님 예수님께서 

대칭 아담이 되시어 마땅히 죽어야 될 죄인으로서의 

형벌(사형ㅡ여기서도 형벌이 따르는 범법행위임이 드러나)을

받으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써 

대칭 아담이 되신 사실을 믿어 

죄 용서가 되니까(주님과 함께 죽어 그 십자가 죽으심이 

내가 죽은 것이요 그 흘리신 피가 내가 흘린 것이니까)

이렇게 먼저 죄 용서 받고나서 그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인해

성령(대칭 아담 자신)을 받아 그와 완벽하게 둘이 하나됨으로

그의 초자연계 몸이 나의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이 하나된 구조는 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한 영됨이니 육체(남녀)가 한 몸됨과 같은 이치라

남자 몸은 여자의 소유, 여자 몸은 남자 것이 되듯(고전 7:4)

그리고 앞서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에서 설명했듯이

몸은 머리를 위해서만 살고 머리는 몸을 위해 사는 관계로

오로지 나는 주님 위해서만 살고 나 위해서 살지 않으니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대로 사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니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요일 3:9).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 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양심을 주신 사실과 일치하게-롬 2:15)

그래서 그대로 행하면 그것이 생명의 법 행함이요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cannot sin") 한 것이니,

죄는 법을 어김인데 나는 주님과 둘이 하나되어 있는 

이러한 구원의 구조상 법을 어길 수가 없으니 

왜냐면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롬 14:7/고후 5:15)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구원받음의 대요/大要입니다. 

헷갈릴 것 하나도 없어요. 어려운 것도 결코 아닙니다. 

순리대로 생각하면 돼요.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소위 "신학/神學만이 비상식 일변도로 

몰고 간 것뿐입니다. 인간 스스로로는 이렇게 못합니다. 

상식대로 판단하는데 악령들이 인생들의 자아중심과 맞물려

미혹하여 비상식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 진리 말씀을 듣고 

올바른 길로 접어들면 구원의 기회는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전도의 말씀도 허락하신 것이지요.


공짜로 거저 먹인 것처럼 "은혜", "믿음"을 

거의 대다수가 착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애쓰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친다고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함이니까 이 새 창조를 "믿는" 것이요,

지은 것은 죄뿐이나 그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니

(마치 아담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처럼 되어) "은혜"입니다. 

비록 내가 살인을 했어도 용서하시니까 "은혜"가 아닌가요?

내 감정대로, 욕심대로만 했던 결과밖에 없었지만 

이 모든 죄악을 나 위해 죽으심을 통해

(나와 함께 사형당해 주심으로써) 용서가 되게 해주시니

은혜가 아닐 수가 없지요. 

기회를 주시어도 그냥 죄 용서의 선포 정도가 아니라

친히 나 위해 나와 함께 죽어주심으로써 용서하시니 

망극하신 은혜가 아니신가요.


그렇게 은혜를 받아 이렇게 믿게 되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아담과 똑같이 취급하실 수밖에 없지 않아요?

하나님께는 차별 대우란 것이 없어요.

모든 피조물을 한결같이 동등하게 취급하십니다.

범죄하면 가차없이 법질서 확립을 위해 처벌 대상이 돼요. 

천사와 같은 영물도 범죄하면 영원 멸망뿐입니다. 

그래서 악령들이 돼 있는 것입니다.

아담도 모든 인간의 머리이지만 범죄하니까 

가차없이 그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고로 우리도 범죄하면 당연히 그런 전철을 따르게 됩니다.

구원 아무리 받아도 죄를 다시 짓는 다음에야

(죄 짓지 않겠노라고 믿을 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해놓고도)

속절없이 아담의 종말, 악령들의 스스로 만든 운명처럼 돼요.


사탄은 "아담이 인류의 머리가 되어 있는 신분이니까

범죄해도 죽음에 버려두시지는 못하실 것이리라

그리 되면 범죄한 자기도 형평 차원에서 

하나님이 손대지 못하시리라" 속으로 계산했지만

사탄의 기대와는 전연 판이하게 가차없이 죽음에 

그대로 처분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마 그 때 사탄은 크게 낙담하고 

자기 종말을 예견했을 테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기회가 있지 않겠나 

다시 말해 구원 받는 인간의 숫자가 하나님의 기대하심에

미달하면 이 세상이 언제까지든 끌어 갈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걸고 지금까지 끈질기게도 버텨왔고

대칭 아담의 천년 통치 말까지도 

그런 소망을 버리지 않음을 성경은 예언합니다(계 20:7)


고로 구원의 도리는 아주 간명합니다.

어린 아이라도, 일자 무식자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어린 아이 또는 무식자가 

아예 생기지 않도록 정하셨겠지요.

그러나 그런 무식자는 부지기수로 널려 있고

어린 아이라도 얼마든 죽어 나가니까 

어릴 때라도 예수님 믿으면 영생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지시 말씀대로 

순종함에 구원이 있으니까.

이미 새 창조 자체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이미 기정 사실화되어 있으므로

오직 순종하기로 하는 사람든 누구나 구원얻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은 강도처럼 

즉 그 후 일절 행함의 기회가 없어도 

곧장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갈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임종까지 믿음의 결단을 미룬다면 

그 자체가 자아중심이므로 회개하지 않는 그 마음 그대로 

영원세계로 들어갈 확률이 클 수밖에 없으니

믿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바울 사도의 훌륭한 전도를 받고도 결국 멸망한

로마 총독 벨릭스처럼 됩니다(행 24:24). 

그 후 그는 자살했으니까. 


이상 모든 설명과 같이 범죄하지 않도록 

스스로 깨어 있는 것이

즉 범죄함으로써 악령들처럼, 아담처럼 

그 응분의 비참한 결과를 거두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딤후 3:15) 성경이라 함과 같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엄중 경고함과 같이

이 시험의 세상에서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이대로만 나가면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요

대칭 아담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