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악마가 말 그대로 이 세상 신/神이요 임금/통치자임을 알아야

Tayseek Kwon 2019. 3. 29. 20:13





악마가 말 그대로 이 세상 신/神이요 임금/통치자임을 알아야



아직 본 게시물들이 주목을 받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될 정도이면

소위 "신고"라는 것을 통해 압력을 넣기 시작하게 되고

그리 되면 게시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게시물이 삭제되는 일들이 속출할 것이며

이런 것을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미미한 소리이므로 무시하기에 잠잠할 뿐입니다.

언제 어느 경우에서든 폐쇄까지도 될 수 있습니다.

네이버에서는 구원파가 죽치고 앉아 

자기네 떼서리에 내용이 불리하다 싶으면 즉각 신고해버리고

그러면 운영자는 지체없이 순응합니다. 

이런 것이 이 세상이 마귀의 손아귀에 있다는 증명들입니다. 

앞으로 천주교가 그러할 것이고 

반/反 복음적인 모든 집단들이 그러한 행패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구미 제국은 동성간/同性姦에 대한 부정적 주장을 펴도

신체적 위협을 가할 정도가 이미 되어 있습니다. 

의견 개진도 못합니다. 

언론의 자유든 무엇이든 원래부터 없는 것이고

이 세상 지배자 마귀의 입맛대로 처리되도록 돼 있는 것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자로서의 권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 세상 왕"이요 "이 세상 신"이라고

성경이 밝혀놓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 유렵에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렇게 

각종 박해를 자행해 왔던 것이고

그런 탄압이 멈춘 것은 시대가 개화되어서도 아니고

또는 자유로운 좋은 시절이 와서가 아니라

사탄이 자기 구미에 맞도록 전술을 바꾼 것뿐이며

되풀이해서 언제든 필요하면 써먹는 수단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머리되시는 주님의 남은 고난(골 1:24)을 

그 몸으로서 마땅히 감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은혜"(빌 1:29)로 승화시키심이라

우리로서는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대로

"기뻐 뛰놀면"(눅 6:23) 되는 것뿐입니다. 

주님과 그 복음의 말씀을 위해 누구 못지 않게 고난을 많이 받은

바울 사도가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 했고(고후 11:30)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는 말을 자랑과 결부시킴과 같이

우리는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 그 주역들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역전되는 것보다 신나는 일이 없는 것이니

그래서 꾸민 소설이나 연극에서나 가능하다는 뜻인데

우리가 사실상 바로 그 주인공들이 돼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편하고 영광스럽고 형통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표방하고서 그렇게 합니다.

따라서 히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산다, 운운" 등의

모든 감언이설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마귀에게서 난 것입니다. 

그들은 각종 초능력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속입니다.  

적그리스도에 이르러 그것이 최고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그대신 우리는 도리어 "마귀, 사탄"의 패거리로 내몰리게 됩니다. 

사탄에게 속한 악한 "귀신 족속"들이니 얼마든 죽이고

또 고통을 주어도 정당하고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언사를 거침없이 쏟아내게 되어 있습니다(요 16:2).

이런 것을 예상하여 각오하는 우리는 

앞날이 암담하다 할까요ㅡ천만에, 그 반대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껑충껑충 "기뻐 뛰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정확히 말하거니와 구원 얻는 그 믿음입니다. 

범죄로 죽은 아담 대신으로 세상에서 마귀가 왕노릇함이

바로 이런 실상인데도 성경대로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거짓 술수에

그야말로 맥없이 넘어간 것뿐입니다. 

이 실상에 제대로 눈 뜨는 것이(행 26:18)

구원에의 첫 걸음, 첫 단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말씀하신 바 "하나님께 배우는"(요 6:45) 것입니다.

이런 첫 단계부터 잘못 걸음을 걸었기 때문에

첫 단추 잘못 채우면 이제껏 공들인 것 다 풀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끼워가야 하듯이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첫 단계부터 착실히 딛고 나가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당시 제자들이 "이 말씀은 어렵다"(요 6:66) 하고

그 수가 몇이든디 다 썰물처럼 쫘악 빠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이렇게 된 실상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을 여기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 지혜로운 최상책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기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 한 것입니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이 죽기를 결하고 싸우는 생각뿐이지

왜 이런 전쟁이 애초부터 일어났느냐 하고 

한탄하고 슬퍼하고 세상을 비관하여 미리 자살해버릴까요?

그렇습니다ㅡ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현실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에하는 것으로 격상시켜 주신 것입니다.

영원무궁 삶의 쾌락만이 어지러이 난무하는 세상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가장 보람된 순간의 기회를 우리는 향유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와 한 몸될 나의 지체된 여러분들을 위해 

이 내 한 목숨을 버렸노라"는 그 평안과 기쁨을

지금, 바로 지금, 한 가닥씩 만들어가고 있는 자부심, 자긍심

이것은 아주 대단한 것으로서 

온 세상과도 맞바꿀 수 없는 보화 중의 보화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