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로마서
[The Epistle to the Romans, Combined and Classified]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사도 서신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사도들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요 따라서 주님 친히 성령으로 하시는 말씀을 대필한 형식이라고 인정하기에 주저하지 않음은 베드로가 말한 그대로다(벧후 3:16). 그래서 성경이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와도 일치한다(요 14:26).
요즘 성경을 보면 주님 말씀하신 대목이라 하여 붉은 글씨로 구별해 표시했는데 고로 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사도들이 그 편지에서 밝혀놓은 것은 주님 친히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여 그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쓴 것이기에 특별히 그렇게 구별해놓는 것은 오히려 읽는 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혹여 후대 사람들이 읽을 때 오해될 만한 것이라도 있다면 아예 그 편지 자체를 유실되게 하셨으리라 얼마든지 짐작도 가능하다.
왜냐면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글들(성경)이므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두시고 충분히 조정하셨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통합하여 모든 서신을 그 대체적인 주제별로 모아 읽는 것도 과히 흠될 것은 없으리라 확신한다. 또 주제별 내용의 분량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그 비중이 크다는 법은 없으니 혼동하지 말 일이다. 이들 서신은 당시 사정과 형편에 따라 각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단 한 줄의 내용이라도 우리로서는 천 마디 만 마디보다 더 중한 의미가 될 수 있기도 하므로 주님의 인도와 가르쳐 주심을 따라 그 명확한 뜻을 살피기에만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성경 각 구절은 말하자면 흩어져 널려 있는 구슬들이다. 이 하나하나의 구슬들로써는 제대로 된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 그것을 제대로 제 위치에 꿰어 놓아야 하는데 이 작업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계시로 말미암지 않고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하심이다[마 11:27/요 14:26]. 그러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 두는 우리 편에서의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열심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두드리는 자에게만 문이 열려지기 때문이다.
사도 서신들은 처음부터 체계 있게 각 시대 교회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각 시대 모든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시라는 점은 분명하다] 당시의 상황을 따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고 또 당시 교회가 익히 잘 아는 것은 생략하여 단 한두 절의 대목으로만 나타낸 것도 있을 것이니, 반드시 기록자의 강조한 대목을 따라 중시하고 강조하지 않은 것이라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유의할 일이다.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바를 따라 그 경중(輕重)을 구분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설명할 때 글로 적는 것보다 말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부담이 적은 것은 직접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상호간의 문답도 가능해서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 까닭이다. 이에 반하여 글이란 것은, 말을 대신하여 글로 나타내는 것과 앞으로 말로써 보충 설명이 될 것을 전제하고 쓰는 글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바, 사도들의 편지 글들은 후자에 속하니 평소에 가르친 것 그리고 앞으로 가르칠 것을 염두에 두고 간략하게 추려서 쓴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글이라면 아주 세심하게 체계를 갖추어 공들여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런 것은 편지가 될 수 없고 그냥 한 권의 책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모로 보나 사도들의 글들은 전자에 속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점을 감안해야 하고 오직 살아 계신 주님께서 그 성령으로 계시하여 주시지 않는 한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함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우리가 이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의존하지 않고 그냥 세상의 학문처럼 옛 자료나 옛 사람들이 기록한 것만을 막연히 의존하여 그 내용을 추구하려 한 데에 크나큰 실수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런 식으로는 천년 만년을 간다 해도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진리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친히 가르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무시하고 들어가는데 하나님께서 진리의 문을 열어놓으실 리 없다.
오히려 굳게 닫으시고 혹여 조금이라도 열려져 빛이 새 나가지나 않을까 단속하실 것이 분명하니, 왜냐면 그렇게 될 경우 구하지 않아도 주시는 것이 되어 버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이 무의미하게 되는 까닭이다. 성경에 자주 인용되는 말씀에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지 않을까 극력 경계할 일이다.
그런 중에서도 바울의 로마 서신은 전자와 같은 목적 의식으로 비교적 나름대로의 분명한 체계를 갖추어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로마서를 기준으로 신약 성경 전체 서신을 한 묶음으로 엮어 항목별로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시도한 것이 이 글이고 그래서 이름도 "확대로마서"라 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괄한 것은 이 로마서가 대표적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는 메시지라면 이 로마서가 유일하고 또 적절한 것이다. 다른 편지들은 모두가 이미 믿는 이들 즉 교회에 보낸 편지들로서 체계를 갖추어 이 경우처럼 의도적으로 복음을 풀이해간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로마서 외의 각 서신들 각 구절은 그 로마서 해당 구절을 보충 설명하는 식으로 해서 분류, 편집이 되도록 힘을 썼다.
그러나 어느 구절도 임의로 삭제한 것은 없으므로 사복음서, 사도행전,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성경 그대로이다. 장절 표기도 물론 그대로다. 전체 편집에서 두드러지게 중복되는 일부 극소수 내용 외에는 모두 그대로 두고 하나도 삭제하여 버리지 않았고 해당 장절과 함께 그냥 두었으니 얼마든지 참조하실 수 있다. 맨 첫 부분은 각 서신의 첫 인사말에 해당되는 것을 모두 모았고 맨 끝 부분은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별 인사에 해당되는 대목들을 한데 모았으며, 거듭 강조하지만 모든 내용이 가급적이면 같은 종류를 따라 분류되도록 노력했다.
편집 원칙을 그렇게 정했으므로 혹 억지 분류에 따른 무리를 방지하기 위해 부득불 해당 항목에 맞추어 중복되는 장절, 내용도 있을 수 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의미를 더 분명히 새기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영역(英譯)도 제한적으로 첨가했는데 주로 KJV이고 그 외 NKJV, NIV, Good News Bible 등도 인용했다. [말이 쉬워 분류이지,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성경이고 또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것이 성경이므로 실상 제대로 된 분류가 불가능한 것이다. 분류가 되도록 최소한 시도는 해보았다는 것으로 그치는 의미일 뿐이다].
영역을 참고하는 경우, 흠정역[KJV, NKJV를 통틀어]의 장점을 들라면 다른 번역은[NIV 등] 쉬운 현대 말로 고쳐 쓴다는 명분 아래 원문에는 없는 것과 있는 것[읽기 쉽도록 최초의 번역자들이 몇 마디 가필해 놓은 것을 말함이니, 예를 들면 마태 1장 6절에서 영역으로 "David the king begot Solomon by her of Uriah"가 본문이고 "by her"와 "of Uriah" 사이의 "that had been the wife" 부분은 번역자들이 임의로 삽입해 넣은 것이어서 본문에는 없는 것]을 한데 뒤섞어 버렸으나, 흠정역은 방금 예를 든 것과 같이 엄밀히 구분하여 이탈릭체로 명시하였으므로 어느 모로는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흠정역의 난하주에는 이런 설명이 되어 있는 것이다. "Words in italic type have been added for clarity. They are not found in the original Greek."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 한 부분만 읽고 그만 두는 일이 많은데, 모든 내용을 전체적으로 머리에 입력해둠으로써 산 아래 혹은 산 중턱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는 것만 아니라 날아다니는 새처럼 위에서 내려다 보기도 하는 전체 조망 즉 부감(俯瞰)이 필요함을 거듭 강조한다. 부분적으로 인식하게 될 때 오류에 빠질 수 있고 제대로 그 의미를 음미할 수 없는 위험이 따른다.
그런 점에서 대표적으로 로마서를 기준하여 이들 서신들을 편집해보는 것도 다시 말하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사람이나 사물도 일단 그 시각을 달리해 보면 나름대로의 신선함을 다시 느낄 수 있다. '확대로마서신'은 그렇게 시각을 달리하여 성경을 읽는 의미를 겨냥한 것이다. 이 '확대로마서'는 세목별로 분류해서 편집했으므로, 전체적으로 전후 문맥을 살펴 음미하는 데에는 미진한 데가 있을 것이기에 혹 그럴 기미가 있다 싶으면 언제든지 성경을 꺼내어 전체를 훑어 보실 필요가 있다.
이상 두 가지를 병행하여 성경을 읽는 것이 안전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고 하셨으니 이는 두드리지 않으면 결코 열리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기도 하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이 그 두드리는 일 중의 하나다. 이를 게을리 할 때 당연히 암중모색 중에 패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약속 말씀을 주신 이상 이를 따르지 않을 때 이는 당연히 말씀을 믿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듣고도 믿지 않고 알고도 순종치 않는 자에게 긍휼은 없는 것이다.
끝으로, 당시 사도들의 개인적인 편지 글이라 해서 일상 용어로서의 존대어를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고 판단된다. 이미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혀져 있는 모든 구절들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이 사도들의 편지다. 따라서 당시 편지들이었다고 해서 굳이 존대말을 고집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불필요한 혼돈만 야기시킬 뿐이다.
반면 "예수" 아닌 "예수님"이라는 높임말은 일관되도록 유의했다. 여기는 외국이 아닌 공대어가 발달된 한국 땅이다. 그리고 편집자의 개인적인 주석이 필요하다 싶은 대목에는 "註"라 하여 첨부해 두었으니 참고하시면 될 것이다. 편자의 의견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이나 단어에는 ''부호를 쳐두기도 하고 혹은 붉은 글씨로도 표시했다. 예: '순종'. 괄호 사용에서도 성경에 원래 있는 괄호는 {}로 통일되어 있고 그 외 []는 편집자의 설명임을 밝혀 둔다.
그리고 꼭 덧붙여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전의 양면성과 같은 것이 성경과 성령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성경 없이 성령 홀로 역사하시지 못하고 성령의 가르치심(계시) 없이 성경 홀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으로서의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느 말씀이 어느 장절에 있다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성경을 훤하게 안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니, 성령께서 친히 성경의 구절을 짚어 주시고 다른 구절들을 연관시켜 주시지 않는 한 제대로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같은 구절이라도 오늘 읽은 것이 다를 수 있고 며칠 수 혹은 몇 달 후에 새롭게 읽을 때 새로운 교훈과 가르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 항상 성경을 명상하거나 아니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식으로 안다고 성경을 모두 알아 버린 양 성경 읽기를 중단하여 덮어두는 일이 없도록 할 일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자해 행위가 되니 조심할 일이다.
그래서 본문 중에서 붉은 글씨로 특별히 강조하는 것도 그 점만 강조하는 것이 되어 처음에는 그렇게 구별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래도 눈에 얼른 띄게 하는 장점이 있다고 하여 그냥 두었지만 오히려 그렇게 특별 표시를 하지 않은 어두운 데에서 "심 봤다!" 소리 칠 정도의 산삼(山蔘)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관심을 집중시켜 말씀을 음미하기를 삼가 권한다.
이방언(異邦言, tongues)
오늘날 많이 회자되고 있는 "방언"은, 소위 천사의 말도 아니고 천국의 언어도 아니고 각 시대의 각 나라 말, 각 족속의 언어를 말함이다(행 2:8).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장차 그치게 된다고 했다(고전 13:8). 따라서 여기에서는 불필요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우리말 번역에 "방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을 "이방언(異邦言)"으로 모두 바꾸었다. "이방인들의 언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은 처음으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당시의 각 국어를 구사할 때 현지에서 온 유대인들(대체적으로)이 그 말을 알아듣고 소동한 것으로 확인된다(행 2:8).
"대신하여 죽으심"은 "위하여 죽으심"으로
또 사도 서신에 우리말 번역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 운운" 한 것은 모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역시 바꾸었다. "대신한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있다"(고후 5:20)는 정도밖에는 신약성경에 없다. 모두 영역으로 말하면 "for us"이지 "instead of" 또는 "in(on) behalf of"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 구원의 중요한 의미를 그르칠 수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머리말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하심을 입었으니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서 (롬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해 모든 이방인들로 믿어 '순종'케 하려는 것이다.
(롬 1:6) 여러분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이들로서 (롬 1:7)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거룩한 형제들[註-우리말 번역 "성도"는 몹시 폄훼되어 단지 믿는 일반 사람들 더욱이 평신도를 구별해서 나타내는 말로 오용되고 있으나 문자 그대로 "거룩한 사람들"(聖人, 聖徒, saints)이 그 원 의미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 "성인"들이라고는 번역할 수 없어 "거룩한 형제들"이라 의역(意譯)하여 통일시켰으니 이 문구가 나올 때는 바로 그런 뜻임을 알면 될 것이다]로 부르심을 입은 로마에 있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平康]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註-이런 서신들의 인사말[작별 인사말을 포함]에서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스도"는 반드시 명시되고 있는데 반해 성령의 "이름"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 대목을 모두 ''(예: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처리해서 특별히 표시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을 가리켜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는 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두 구절에서만(벧전 1:1/고후 13:13)에서만 "성령"의 이름이 나와 있다].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전 1:2) 고린도[Corinth]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해지고 거룩한 형제들이라 부르심을 입은 이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 주님 곧 그들과 우리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고전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Achaia]에 있는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고후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살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Thessalonica]인의 교회에 편지하니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살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니 (살후 1:2)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골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 1:2) 골로새[Colosse]에 있는 거룩한 형제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빌 1: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거룩한 형제들과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니 (빌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거룩한 형제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의 신실한[충성된] 이들에게 편지하니 (엡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갈 1: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딛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니,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before the beginning of time] 약속하신 것인데 (딛 1:3) 그 정하신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다. (딛 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딤전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된 바울은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딤후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몬 1:1) 그리스도 예수님을 위해 갇힌 자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이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몬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기를 원한다.
(유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이들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註-우리말 번역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으나 영역은 "preserved in"(KJV), "kept by"(NIV)] 지키심을 입은 이들에게 편지하니 (유 1: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여러분에게 더욱 많으시기를 원한다.
(유 1:24) 능히 여러분을 보호하셔서 거쳐 넘어짐이 없게 하시고 여러분으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분 (유 1: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萬古)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으시기를. 아멘.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전함은 여러분으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다.
(요이 1:1) 내가 참으로 사랑하고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사랑하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lady]와 그 자녀에게 장로는 편지하니, (요이 1:2) 이는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다. (요이 1: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 우리와[또는,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
(요삼 1: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한다.
(벧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스러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이들에게 편지하니 (벧후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더욱 많으시기를 원한다.
(약 1:1) '하나님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支派)에게 문안한다.
(엡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으시기를. [註-위의 구절은 인사말이 아니라 편지를 끝 맺는 말이지만 연관이 있기에 함께 엮는다. 아래 구절들도 비슷한 성격이기에 한데 모아 보았다].
(살후 2:15) 이러므로 형제들,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전달 받은 가르침을 지키라. (살후 2:16)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살후 2:17)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한다.
(요이 1:9)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이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 [註-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써 구원되는데 일차적으로 "성령을 모신다"고 해야 함에도 일절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심을 "성령"이시라 하기 때문이다].
(살전 3: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 길을 여러분에게로 직행[直行]하게 하시며
(요일 2: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여러분 안에 거하면 여러분이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할 것이다.
(요일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이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 2:23) '아들'을 부인하는 이에게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나 '아들'을 시인하는 이에게는 '아버지'도 계신다.
(딤전 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한 쪽으로 치우치게 하지 말며 [註-사도가 엄히 명령한다고 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말했으나 성령의 이름이 없고 그 대신 오히려 "택하심 받은 천사들" 앞에서라는 말은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을 가리켜 "성령"이시라 함이다].
(딤전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언하신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니 (딤전 6:14)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계명]을 지키라.
(계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었다.
(계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다.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빛이 되심이다.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니
"그리스도의 은혜, 아버지의 사랑, 성령의 교통"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Pontus], 갈라디아[Galatia], 갑바도기아[Cappadocia], 아시아[Asia]와 비두니아[Bithynia]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편지하니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더욱 많으시기를 원한다.
(고후 13:13)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交通, communion]하심이[혹은, "친교(親交, fellowship)가"] 여러분과 함께 있으시기를.
(계 1: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의 일곱 영과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
[註-위의 세 구절은 둘은 인사말이고 하나는 편지를 끝 맺는 말이지만 사도 서신들[계시록도 요한이 각 교회에 보낸 편지 형태로 되어 있으므로] 중 희소하게 삼위일체적 표현이 되는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20)는 분부와 맥을 같이 한다. 즉 "이름"으로서의 역할이니 "그리스도"라고 하면 그 은혜로 통하고 "아버지 하나님"이라 하면 그 사랑으로 통하고 "성령"이라고 하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그 사귐(요일 1:3/요이 1:9)으로 통하는 거룩하신 "이름"들인 것이다.
항상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므로 딱히 이는 아버지시라 또는 아들이시라 지칭해서 가리킬 수 없는 것이다. 그 이름으로써는 아버지께서는 이러하시다 또는 아들(그리스도)께서 이러하시다 등으로 말할 수 있지만, 내 안에 혹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모습을 가리킬 때는 "성령"의 이름으로 통일되는 것이니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성령과 우리는"(행 15:28)이라는 대목에서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단 위에 인용한 계시록의 경우 특이한 점은 성령이 "일곱 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곱 영은 "아버지의 보좌 앞 일곱 영"으로 되어 있는 바, 아들(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졌다"(계 3:1) 한 것이다. 또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켜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5:6)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영이시기도 하고 아들의 영이시기도 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으시다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註-영역으로 "no (other) God but one"이니 우리말 번역처럼 "한 분"이라 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으로 마땅히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 식으로 번역함이 옳다.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고 더군다나 '하나'(요 10:30)로서 계시니 한 하나님이시지 않고 달리 표현될 수 있는가] 줄 안다.
(고전 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자칭하여 많은 신(神)과 많은 주(主, 신을 지칭할 때도 쓰이는 호칭으로서 말하자면 예속되어 있다는 뜻이니 곧 명령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주종관계임을 의미할 때 쓰이는 말)가 있으나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
[註-앞 구절과는 달리 이 경우의 "하나님"은 "아버지"를 가리킴이므로(왜냐면 그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언급이 나오기에) "한 분뿐이시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될 경우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통해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들을 일단 사람으로서 젖혀두니까 "하나님(아버지)은 한 분 하나님"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잘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물론 "성령"에 대한 언급은 없다].
몸이 하나, 성령이 하나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한 몸이요 한 성령이시니 이와 같이 여러분이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다. (엡 4:5) 주님도 하나이시고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관통(貫通)해 계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to be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골 3:11)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Christ is all, and is in all]. [중복]
[註-여기서 "성령이 하나", "주님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라고 하지 않았느냐 할지 모르나, "성령이 하나"이시라는 말은 "몸이 하나"라고 말한 다음에 이 몸과 연관시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주님도 하나",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과는 계속 연관되지 않고 "한 소망"이라는 말로써 일단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 한 몸이니까 한 성령이시라는 그 뜻이다. 이는 "한 몸에 한 영혼이 있다"는 의미를 빗댄 것이다].
집에 있는 교회
(몬 1:2)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인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your house]'에게 편지하니[註-인사말에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한다는 말이 있기에 서신 중 그 끝 맺는 말에도 관련된 언급이 있으므로 그 구절들을 역시 여기에 한데 모았다].
(롬 16: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helpers]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롬 16: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해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으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한다. (롬 16:5) 또 '그 집에 있는 교회["the church that is in their house"-KJV]'에게도 문안하라.
(롬 16:23) '나와 여기 온 교회가 모이고 있는 집의 주인'인 가이오["my host Gaius, in whose house the church meets"-Good News Bible]도 여러분에게 문안하고
(고전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the church that is in their house]'가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전 16:20) 모든 형제도 여러분에게 문안하니 여러분은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전 16:21) 나 바울은 친필로 여러분에게 문안하니
(골 4: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여러분에게 문안한다. (골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the church which is in his house"-KJV]'에 문안하고 (골 4:16) 이 편지를 여러분이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여러분도 읽으라.
생명의 약속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된 바울은
(요일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다.
(히 10:36) 여러분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여기서 올바르게 행했다고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다.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들어라.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유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 받게 하지 않으셨느냐.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치 못했다" 함과 같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 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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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우리가 누리는 영생이 약속이기도 한 사실을 강조함이 본 항목의 의미다. 특별히 '영생이 약속'이라는 이 사실에서, 약속은 쌍방의 그 준수 의무가 동시에 지켜질 때 그 실효가 나타나는 것이므로 영생을 두고 약속이라 할 때는 하나님의 약속 준수는 더 논할 필요도 없으니 우리의 의무 이행 곧 모든 말씀에 대한 복종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의무 이행은 믿음을 지키는 의무인데 그러나 이 믿음의 의미를 똑바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즉 단순히 특정 사실을 사실로 인정함만이 믿음이 아니니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약속하는 당사자가 상대를 믿지 않으면 그 계약 체결 자체가 불가능한 것과 같이 쌍방에 대한 요구 사항이 있어 이에 대한 상호간의 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구원이니 즉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음과 죄에서 놓여 나 영생과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다름아니라 주님의 우리 위한 죽으심으로써 다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인 것이다(고후 5:15/롬 14:8).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고(롬 8:13) 한 것은 이 같이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고 여전히 자기가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자기 부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므로 이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34)는 말씀과도 맥이 닿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을 사랑함이다. 왜냐면 사랑이란 것은 사랑하는 상대방의 요구를 즐거이 수용하여 그대로 그 뜻을 이루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둘이 하나됨으로써 한 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자기 부인 즉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아래 여러 구절들도 바로 이런 점을 경고하고 있으므로 한데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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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견고하게 잡으면
(히 3:12) 형제들, 여러분이 삼가 혹 '여러분 중에' 누가 믿지 않은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고'하여 여러분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剛愎, 고집이 셈: '퍅'이 아니라 '팍'-어그러지고 괴팍스러울 팍[愎]-국어사전]케 됨을 면하라.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우리말 번역 "확실"은 오류]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다.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구원됨
(고전 15:1) 형제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여러분들로 알게 하니 이는 여러분이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다. (고전 15:2) 여러분이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킴으로써 헛되이 믿은 결과가 되지 않았으면 이로써 구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살전 3:7) 이러므로 형제들,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란 가운데서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위로를 받았다. (살전 3:8)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 것'이다.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그의 집
(히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충성했고 (히 3:6)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으니 우리가 믿음의 담대함[courage-용기, 담력, 배짱]과 자랑스러운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으면 그의 집'이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벧전 2:1) 그러므로 모든 원한과 모든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註-영역(英譯)으로는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여러분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다. (벧전 2:3) 여러분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유 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킴으로써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말세에 나타날 구원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 능력이 보호하심
(벧전 1:5) 여러분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으니 [註-그리스도께서 "말세에 나타나신 바가 되었다"(벧전 1:20/행 2:17) 하는 것과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딤후 3:1)이라 말한 것과의 차이는, 그리스도 오신 때부터 지금까지가 말세이니, "말세"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끝 자락에 붙은 기간이라는 선입견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미상으로 말세인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당장 세상을 끝내시려 할지라도 어떤 뜻이 있어 그 끝장내시는 것을 지연시키실 경우 상당 기간에 걸쳐 늦추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 '더욱 힘써' 여러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여러분이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않을 것이다. (벧후 1:11) 이 같이 하면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다.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 얻는[우승하는] 이는 하나인 줄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도 이기도록[승리하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얻고자 함이다.
(고전 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하지 않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하지 않아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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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이 구절은 앞의 23절 "내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에 연이어 나오고 그리고 다시 10장 1-5절,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반석" 곧 그리스도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나 "그들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경고와 연이어진다. 이는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생 외의 덤으로 얻는 특별한 일종의 "상급(賞給)"이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 곧 구원 자체를 말함이다.
왜냐면 "생명의 면류관"은 "약속"이기 때문이다(약 1:12). 이 약속은 그 얻는 조건이 있다. 즉 "시험을 참아" 여기서 "인정하심을 받은 후"이니 곧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약속이다(:12).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계 2:10) 하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총칭해서 바울은 "우승하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 믿어 이미 구원 얻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바울은 다음 한 마디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즉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가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갈 수 있도록 나를 친히 잡아 주신[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 안에서 이제 바로 그것을 잡고자 달려간다는 의미다.
나를 친히 잡아 주신 현재의 이 상태가 나의 구원 받음이요 구원을 누림이다. 그러나 달려가서 내 스스로 그것을 붙잡아야 함이니 이 달려가 붙잡는 것이 다름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약속을 내게 주심과 맞물려 주님은 내게 주시는 것이 되고 나는 그것을 받는 것 즉 "상" 혹은 보답(reward)으로써 종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속히 임할 것이니 네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고 다시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경고는 절대로 낯 설은 것이 아니니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 2:18)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주님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래서 "무릇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 하셨다(마 13:12/25:29). 주님께서 그렇게 "나를 잡아 주신" 은혜 일면만을 생각하여 그것을 영생 또는 마치 천국에 다 들어간 것처럼 착각하는 이가 많다.
반드시 "달려가서" 내 스스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항상 복종함"이다(빌 2:12). 이럴 경우 달려가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왜냐면 주님 친히 그 달려갈 수 있는 힘이 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문제는 이렇게 달려갈 수 있음에도 달려가지 않는 여기에 있으므로 이를 바울은 우승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으로 경고한 것이다. 복종하는 것이 달려가는 것인데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육신대로 살면서도(롬 8:13) 구원은 받는다고 하여 아주 맹신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적 비극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심"(눅 15:24/엡 2:5)이다. 살리셨으니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다. 열심히 살아야 살려 주심에 의의가 있다. 이에 반하여 자살 행위를 취하는 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살려 준 의미도 없고 살려 줄 가치도 없다. 무용지물이니 그래서 폐기처분은 필연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전자에 해당되고 후자에 걸리는가. 순종이 응당 전자에 속한다. 이 순종은 자기 부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특성을 지닌다. 자기 부인과 대칭되는 것이 자기중심이다. 이것이 "육신"(롬 7:5-8:13)이다.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롬 8:7)고 성경은 단정했다. 따라서 "육신대로 사는"(롬 8:13) 것이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죽는다"(:13)고 한 것이다.
고로 범죄하는 것은 자살행위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라고 성경은 엄중 경고하는 것이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선을 행하라, 의를 행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과거 아무리 선을 행하고 의를 행했어도 오늘 죄를 짓고 이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행한 의와 선이 모두 물거품이 됨을 성경은 경고한다. 왜냐면 이는 사랑과 직결되어 있어 사랑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고 오늘 현재에 있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죄 짓는 것을 자살 행위 차원에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살행위는 바로 "의를 사랑하지"[히 1:9] 않고 "불의를 좋아함"(살후 2:12)이다. 사단 등 악령들이나 아담은 다시 말해 자살행위를 한 것이다.
이 글은 주석서가 아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행 17:11)이로서 이상과 같은 여러 구절들에 직면하여 종래의 잘못된 성경 이해(실상은 오해이지만)의 편견으로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많으리라 보고 일차적으로 그런 시급한 궁금증을 풀어 줄 의무가 있겠기에 이 같이 설명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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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
내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다.
[註-이상과 같이 현재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얻고다 하고 그 안에서 뱔견되려 하고 믿음으로써 그리하여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부활해 있는 상태이면서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하고"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구원을 이루려"(빌 2:12)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앞에서 지적한 대로 자살 행위를 하지 않고 선을 행함 또는 의를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니 이 결국이 영생이기 때문이다[롬 2:7,10/6:22].
따라서 이는 자연스럽게 "내가 가진 '의'"(3:9)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으니 즉 이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을 말미암아 하나님께로서 난 의"(:9)라 못박은 것이다. 고로 내가 비록 "구원을 이루었다"(2:12)고 해도 내가 구원 받은 "새 생명"[롬 6:4]의 "권능"(행 1:8)으로 "이룬"(빌 2:12) 것이니, 그렇다고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무엇을 또 이루느냐" 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의미 자체를 앞서의 설명대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살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니 이미 산 자가 되었으니 산 자로서의 일을 하고 죽음의 일, 죽을 일, 죽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임이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 함을 인함이다.
몸의 구속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롬 8:15) 여러분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childrenㅡ우리말 번역처럼 "sons and daughters"가 아님]인 것을 증언하시니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는 것이다.
[註-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현재 양자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위 구절에서 양자됨을 우리 몸의 구속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영생 가운데 있으나 동시에 영생이 미래의 약속이 되어 있음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처음 열매", 몸의 "구속(redemption)" 등은 우리 구원을 상징하여 나타낸 이스라엘의 유월절의 의미와 맞물려 있는 표현들이니 당시의 사정을 알려면 그 대목의 구약성경을 읽을 것이다. 당시 살아 남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이기 때문에 짐승도 첫 새끼, 식물도 첫 열매, 사람도 장자(맏아들)로서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은 당시 어린 양의 죽음으로 흘린 그 피로써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들이 목숨을 건졌으니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상징적으로는 죄(죄의 값은 죽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두려워 하라
(히 12:15) 여러분은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먹을 것을 위해 장자(長者)의 명분(名分)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 12:17)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상속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히 12:18) 여러분이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검은 구름과 흑암과 폭풍과 (히 12: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구했으니 (히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할 것이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다. (히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했으나
(히 12:22) 그러나 여러분이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千萬) 천사들의 희희낙락(喜喜樂樂)의 총회(總會)[영역, NIV]와 (히 12:23) 하늘에 [그 이름이]기록된 장자(長子-이스라엘의 첫 유월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들의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仲保-mediator, 중재자, 조정인]이신 예수님과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다.
(히 12:25) 여러분은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한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했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히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했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시킬 것"이라 하셨다.
(히 12: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않은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해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다.
(벧전 1:17)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여러분이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빌 2: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라. (빌 2:13)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여러분들로 하여금 소원하고 행하도록 여러분 안에서 역사(役事)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빌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히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조심해야 할 것이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새어버릴까] 염려함이다. (히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 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히 2:3) 우리가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님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다.
(롬 11:17) 또한 [감람나무]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다.
(롬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여진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다" 할 것이니 (롬 11:20) 옳다. 그들은 믿지 않으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은즉 너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嚴威, sternness, 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여러분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가 될 것이다.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약속[註-하나님이 아버지되심과 우리가 그 아들들이 됨으로써 아들은 아버지께 마땅히 순종하게 되어 있는]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딤전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4:16) 네 자신과 가르침에 유의하여 너는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할 것이다.
이스라엘 광야 교회는 우리의 거울
(고전 10:1) 형제들,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않으니 우리 조상[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당시의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우리 교회를 상징한 것이므로]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3) 다 같은 신령한 먹을 것을 먹으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마실 것을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신 때문이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다.
(고전 10: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 고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고전 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 10:7) 그들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여러분은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논다" 함과 같다.
(고전 10:8)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간음하지 말자.
(고전 10:9)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주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했으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 10:10)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했으니 여러분은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 것이다.
(고전 10:11) 그들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했다.
(히 3:15) 성경에 이르기를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그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했으니 (히 3: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히 3:17)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히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셔서 그의 안식(安息-편히 쉼)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하셨느냐? 곧 순종치 않던 이들에게가 아니냐. (히 3: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는 고집 부리는 마음이 되지 말라. (히 3:9) 거기서 너희 조상이 나를 시험하여 증험(證驗)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한 것을 보았다. (히 3:10) 그러므로 내가 그 세대를 노(怒)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했고 (히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했다" 하셨으니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여러분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다. (히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터인데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 함이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갈 6:1) 형제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여러분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이를 바로잡고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아 여러분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주님의 두려우심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자.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다[중복].
(고후 5:11)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려졌고 또 여러분의 양심에도 알려졌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라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in the fear]으로 피차 복종하라.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요일 4:16) 사랑 안에 거처하는 이는 하나님 안에 거처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처하심으로써 (요일 4:17) 사랑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는 바, 이는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으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다. 두려워하는 이는 사랑 안에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註-"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2) 하면서도 왜 "두려움이 없다" 하는가 하면, 두렵도 떨라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지만, 기뻐하라"(4:4) 함과 같다. 즉 구원 받아 새 생명을 얻어 산 자가 되어 있는 사실을 기뻐하고 거기에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아담 스스로 손을 내밀어 그 죽음의 선악과를 먹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꿈엔들 생각했으리요. 이것이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가 하지 말 것은, 그러면 그 당시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켜 주시지 못했기에 그렇게 아담이 죽음에 이르렀던가. 자기 스스로 죽음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으면 그것은 간섭이고 강제가 된다. 또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을 막아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나중에 결국은 기어이 그 짓을 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의미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스스로 좋아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든지 아니면 불의를 좋아하든 하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려 함이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왜냐면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렇게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도록 되어 있으니까-골 1:24) 부활에 스스로 이르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히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
(갈 6:7)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아무도 하나님은 속이려 들지 못할 것이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해 심는 이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이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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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당연히 교회에 주는 경고이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육체를 위해 심을 수가 있고 또는 성령을 위해 심도록 자유 선택을 할 수 있어 자유 의지가 간섭되거나 강제되지 않는 까닭이다. 강제로 마지 못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지 혹은 않는지가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가름되어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시험하는 자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현재 나의 본 색깔을 보기를 원하시는 까닭에 죄를 짓든지 아니면 안짓고 거룩하게 되든지 두 갈래로 분류되는 것을 보기 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으면-고후 5:15] 그는 무조건하고 구원에서는 탈락되는 것이며, 처음은 잘 믿었다가도 나중에 중도에서 마음을 변하여 불의를 좋아하는 경우 역시 반드시 탈락되는 것이다-마 7:21/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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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치 않은 본에 빠지지 않도록 힘쓸 것
(히 4:3) 그러나 믿고 있는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하신 바와 같으나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일은 종료된 것이다.
(히 4:4) 이는 제 7일에 관하여 어디 이렇게 기록되기를 "하나님은 제 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했음이며 (히 4:5) 또 다시 그 대목에서 "그들이 내 안식(安息-일을 완료하고 쉼)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으니, (히 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 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히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하고 미리 이르기를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 했으니 (히 4: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히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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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선과 악, 의와 불법(히 1:9) 어느 쪽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따라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분류되는 작업을 거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고 않고 하는 것을 따라 이미 그들은 그렇게 분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 구원의 본질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에 있으니,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의로우시고[공명정대, 공평무사] 올바르시므로 이는 다시 말해 '올바른 것을 좋아하느냐' 아니면 '불의를 좋아하느냐'로 가름되어지는 일이다.
항상 강조하는 말이지만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느냐 여부를 묻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여기서도 분명히 나타난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래서 의(올바른 것)를 사랑하느냐 따라서 그 모든 올바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느냐 여부를 묻는 것이므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기준으로 저울질된 끝에 실격되어(이는 순수하게 자기 자신에게 달인 문제다) 그와 같은 비극을 맞음으로써 우리에게 경종이 되어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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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않은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다. (벧전 2:8) 그들이 말씀을 순종치 않으므로 넘어지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to be destined] 것이다. [註-순종치 않으면 생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즉 한 몸 체제 안에서가 아니면 이상적인 행복한 생명이 유지될 수 없고 이 한 몸 체제에서는 의당히 모두(머리를 포함해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은자기 부인으로 일관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범법 행위자는 그 생명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구원 받음이 기쁨이 능력의 원천
(빌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여러분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여러분에게는 안전하다. (빌 4: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
[註-기뻐하라는 말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면서도 이와 같이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구원의 기쁨(믿음으로 인한)이 두렵고 떪으로써 구원을 이루는 능력 자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니 형제들,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하라[펑안한 마음을 품으라]. 또 사랑과 평안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이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충만케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한다.
(벧전 1:8) 예수님을 여러분이 뵙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뵙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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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24:12,13).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10:22). 이상 말씀과 더불어, "구원 얻는 자가 적습니까?" 여쭈었을 때 "좁은 문", "좁은 길"을 말씀하신 후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시고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많은 사람이 구원이란 의미 자체를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구원 얻었다고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구원해 주신 주님을 사랑하고 그 구원 속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구원이 믿음으로 이뤄진 까닭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끝까지 나중까지 견딤"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끝까지 나중까지 견딤으로 믿음을 지키지 않는 자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구원을 받음으로써 출발했으니 구원이 목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의미를 끝까지 살리지 못하고 지키지 못했으니 믿음을 지키지 못한 탓이라 그래서 믿음이 없으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인 만큼 결국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워하라"는 경고를 사도들은 그 편지에서도 거침없이 발하고 있으니 평소 교회에서 가르칠 때에는 오죽 강조했겠으랴.
야고보나 요한이 강조한 것처럼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름으로써 주님의 계명에 순종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함 곧 믿지 않는 이들을 구원함과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 행함이 없을 때 그것은 곧 믿음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고로 모름지기 "항상 기뻐함"과 "두려워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니 전자만 있고 후자는 없거나 후자만 있고 전자가 없다면 그것은 명백히 구원 얻는 믿음이 없다는 증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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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으신 만물이 하나님 계시는 증거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다.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음이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한다. (히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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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자연계가 자연법칙에 의해 철저히 관장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 과학이다. 인간 신체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와 같이 빈 틈 없이 공교하고 오묘하게 지어진 것이 우연히 아무 일정한 법칙도 없이 저절로 맞추어지고 채워졌다는 것을 믿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의 극치를 나타낸다. 아무리 이 세상 신(神) 사단이 조종한다고 해도 인간이 이다지도 어리석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면 실로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메바와 같은 미생물로부터 진화해 왔다고 해도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 혹은 물체인 만큼 반드시 자연법칙을 따르게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법칙은 미리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도록 짜여져 있는 지적이고 이지적이고 이성적인 사전(事前) 기획, 고안, 설계를 전제하지 않고는 그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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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않으며 감사치도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롬 1:23)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禽獸)와 기어 다니는 것들로 형상화한 우상으로 바꾸니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셔서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심이다. (롬 1:25) 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조물주- 곧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아멘!) -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이다.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인(女人)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逆理)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니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아[이는 동성간의 성행위를 가리킨 것]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 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심이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부패로 가득한 것이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앙심으로 가득하며, 수군수군 하는 것, (롬 1:30) 비방하는 것,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 능욕하는 것, 교만한 것, 자랑하는 것, 악을 도모하는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 (롬 1:31) 양심도 없는 것, 약조를 저버리는 것, 무정한 것, 무자비한 것 등으이다.
(롬 1:32)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한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릇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네 자신을 정죄(定罪-단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다.
(롬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안다. (롬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인생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하심을 멸시하느냐?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않은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 스스로 쌓는다.
하나님의 진노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니
심판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 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롬 2:8) 오직 이기주의로 나가[self-seeking, selfish: 즉 자기 중심임을 말함이니, "당을 짓는다"라는 우리말 번역이나 "contentious"라 한 흠정영역은 모두 오역]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怒)와 분(忿)으로 하신다.
(롬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요
(롬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있을 것이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다. [註-유대인이라 함은 종교인을 표상(表象하고 헬라인은 일반적인 지식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롬 2:11) 이는 하나님께서 겉보기로 사람을 차별하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롬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다. [註-참고할 성경 구절: 행 17:30,31/요 5:27].
하나님의 심판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 (롬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평강(平康)의 길을 알지 못했고 (롬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함과 같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니
비밀의 계시
(롬 16:24)(롬 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춰졌다가 (롬 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여러분을 능히 견고케 하실 (롬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으시기를. 아멘.
(빌 1:6) 여러분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 (빌 1:7) 내가 여러분을 위해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여러분이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註-복음 전도 활동을 하다가 투옥된 것을 가리킴]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여러분이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다.
(엡 1:17)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8) 여러분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거룩한 형제들 안에서의 그 상속(相續) 받는[註-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버지의 상속자다] 영광의 풍성이 어떠하며 (엡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役事)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여러분들로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성령의 계시로 알아짐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
(고전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오신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않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으니 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니 이런 일은 성령으로라야 분별함이다.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 (고전 2: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님을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이다.
(요일 2:20) 여러분은 거룩하신 이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안다. (요일 2:21)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여러분이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다.
(요일 2:26) 여러분을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여러분에게 썼다. (요일 2:27) 여러분은 주님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여러분 안에 거하니 아무도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註-성령을 받아 모시고 있음을 가리킴]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여러분을 가르치신 그대로 주님 안에 거하라.
성경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感動, moved by the Spirit)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다.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으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感動, inspiration of God)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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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이 "성경"은 물론 우리가 아는 구약 성경을 말한다. 베드로가 바울의 편지들을 "성경"(벧후 3:16)이라고 했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은 구약으로서, 구약에서 취급되는 당시의 이스라엘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머리로 나타나실 몸을 이루게 될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하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의 머리가 되어 계신다"[대하 13:12]고 한 것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나 유의해서 구약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구약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나침반 없이 낯선 산간 지대를 여행하려는 것과 같은 극히 무모한 것이 됨을 명심할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구원을 이루는"(빌 2:12) 데에 필수적인 지혜가 된다 함이다. 마틴 루터는 요한 복음 3장 16절 한 구절만 남아 있어도 성경으로서는 충분하다는 극언(極言)까지 했다지만 물론 우리 구원의 근본 의미대로 하면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온 동기가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이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임을 벗어나 '산 자'가 되어 생명이 있다는 사실 하나에만 집착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전부인 줄 알고 정작 산 자로서의 사는 법을 등한시하여(히 2:3)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었음을 외면하는 것이라면 말도 못할 정도로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이나 아담이나 살기는 살았어도 즉 산 자로서 창조를 받았지만 사는 법을 따르지 못하여 멸망의 운명에 처해지고 오늘날과 같은 죽음의 인생 불행 속에 함몰된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성경의 모든 경고는 바로 이 때문에 있는 것이다. 즉 사는 법을 따라 충실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본격적인 삶과 죽음으로 영원토록 나누어져 각자 그 해당되는 세계에서 영구적으로 지내게 될 때 생명 세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의 영원한 불 못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비극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이 되는 까닭이다. 사는 법대로 따르지 않고 영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는 법이 무엇이냐, 한 몸의 지체(肢體)를 이루어 머리에 절대 복종하고 그 지시를 따라 움직임으로써 자기만의 단세포(單細胞的)적인 삶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몸을 이루어 자기를 무한 대로 확대, 확장, 확충시켜 최대한으로 누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의 삶이다. 단세포적인 삶은 존재하지 않거니와 무리하게 자기중심으로 나갈 때는 당연히 그 한 몸의 체제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肢體)가 포도나무(머리를 포함한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사람이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사람이 내 안에 계속 있지(居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요 15:4-6] 하신 그대로다.
여기서 주님 친히 일방적으로 내 안에 계속 계셔(거한다는 것은 계속하여 있게 된다 즉 사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니 영어로는 to abide, to dwell이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 안에 계속하여 있으라(가하라)"고 명령하시고(계명을 주시는) 있음을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해야 내가 너희 안에 거할 것이라" 하셨으므로 이는 당연히 만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주님 역시 내 안에 거하실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한 것이다.
내 스스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해야 그 인자가 내게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무자비한 꺾여지고 찍히는 것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의 상징이 되어 있는 당시 "광야 교회"(행 7:38)에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고전 10:11]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 한 것이다. 이렇게 조심하는 자에 한해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되셔서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시어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13]는 약속이 있는 것이다.
물론 주님 친히 먼저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심으로써 내 안에 거하시는 관계를 설정하심으로써 이 관계는 지속되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열쇠가 주님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 유지가 되는 능력은 주님의 것이지만 정작 열쇠는 내가 쥐고 있음이니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을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되게 할 것이다"[계 3:19-21] 하시는 것이다.
내 스스로 직접 문을 열어드리지 않으면 주님은 절대로 내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무한정 문만 두드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니 내 스스로 문을 열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실 때는 나를 영구적으로 떠나시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문을 따고 강제로 들어오실 수가 없으니 열쇠는 내가 쥐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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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않고
(고후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책략 같은 것을 쓰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않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적 판단에 스스로를 맡긴다.
(엡 6:17) 성령의 검[劒]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벧전 1:23) 여러분이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
(벧후 3:15)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여러분에게 이 같이 썼고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했으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
(벧후 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無法)한 자들의 미혹(迷惑)에 이끌려 여러분의 굳센 데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벧후 3:18) 오직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으시기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
(고전 4:6) 형제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다.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가 아니요
(벧후 1:16)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여러분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사람들이다. (벧후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 (벧후 1: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는 것을 들은 것이다. [註-변화산상에서의 사건을 가리킴-눅 9:29].
더 확실한 예언
(벧후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빛과 같으니 날이 새며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여러분이 이것에 유의하는 것이 좋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니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진리에 섰으나 다시 생각나게 함
(유 1:5) 여러분이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여러분으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한다. 즉 주님께서 백성[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않은 자들을 멸하셨으며
(롬 15:14) 내 형제들, 여러분이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한다. (롬 15:15) 그러나 내가 여러분들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註-계속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 스스로 그렇게 만드는 것이 성경 말씀 묵상이요 성경 다독(多讀), 정독(精讀)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여러분에게 썼으니
(벧후 1:12) 이러므로 여러분이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여러분으로 생각하게 하려 한다. (벧후 1: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는 여러분을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아니 (벧후 1:14) 이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으로 (벧후 1:15) 나의 떠난 후에라도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고 내가 힘쓰려는 것이다.
(벧후 3:1)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여러분에게 쓰니 이 둘로 여러분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님되신 구주께서 여러분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한다.
주님의 재림
(딤전 6:15) 기약이 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보이실 것이니
(살전 4:16) 주님께서 호령[a loud command, a shout]과 천사장(天使長)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 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이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살전 4: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註-마치 바울 생존시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듯이 말하고 있으나 실상인즉 바울은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은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에 해당되는 이들에게 적응하게 되어 있다].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심
(살후 1:7) 주 예수님께서 그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이니 (살후 1:9)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과 그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살후 1:10) 그 날에 강림하셔서 그의 거룩한 백성들[註-우리말 번역 역시 흠정영역(KJV) "saints"처럼 "성도들"이라 되어 있으나 다른 영역에서는 "거룩한 형제들"이라고도 했고 여기서는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고쳤음]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하게 여김을 받으실 것이다.{우리의 증거가 여러분에게 믿어졌음이다.}
(고전 15:51) 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말하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이니 (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할 것이다.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않을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 함을 입을 것이다. (고전 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 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 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이기는 자에게 사망이 삼켜지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할 것이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註-뱀이 물고, 벌이나 전갈 등이 쏘는 것처럼]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 때문이요 죄의 힘은 율법에 있다[롬 7:7].
(고전 15:57)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다.
(벧후 3:10) 그러나 주님의 날이 도둑 같이 올 것이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그 체질(體質)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다.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질 것이니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이다. (벧후 3: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니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5) 또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註-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날은 앞서 바울이 말한 주님 오시는 날과는 구분이 된다. 전자는 마지막 심판을 전후한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기 전의 현 지구와 천체에 미치는 영향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이 시작되는 날의 광경을 묘사함이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
(살전 4:13) 형제들, 자는 자들에 관하여 여러분이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않으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다.
(살전 4:15)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하니 주님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이들도 자는 이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날의 때와 시기
(살전 5:1) 형제들,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여러분에게 쓸 것이 없음은 (살전 5:2)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여러분 자신이 자세히 앎이다. (살전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임함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그들에게 임할 것이니 결단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살전 5:4) 형제들, 여러분은 어두움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도둑 같이 여러분에게 임하지 못할 것이니 (살전 5:5) 여러분은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다.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으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
(고전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여러분을 위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니 (고전 1:5) 이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口辯)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고전 1:6) 그리스도의 증거가 여러분 중에 견고케 되어 (고전 1:7) 여러분이 모든 은사[선물]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다.
(고전 1:8) 주님께서 여러분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고전 1:9) 여러분을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을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빌 1:9) 내가 기도하니, 여러분의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셔서 (빌 1:10) 여러분들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한다.
(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않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 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다. (빌 2:17) 만일 여러분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灌祭-a drink offering, 구약에서는 전제{奠祭}라 하는데 제물 위에 포도주나 기름을 부어 향기가 나게 했으니 야곱이 처음 제단에 기름을 붓는 이 의식을 거행했다-창 35:14]로 드릴지라도[註-그러므로 자기의 전부를 바쳐 희생물로 삼는다는 의미-딤후 4:6]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이니 (빌 2:18) 이와 같이 여러분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할 일이다. (빌 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여러분에게 보내기를 주님 안에서 바람은 여러분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빌 2:20) 이는 뜻을 같이 하여 여러분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이밖에 내게 없음이다.
(살전 3:12) 또 주님께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함과 같이 여러분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셔서 (살전 3:13)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의 모든 거룩한 사람들["거룩한 형제들" 곧 영역으로는 "saints"이나 여기서는 "사람들"로 바꾸었다]과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한다.
(히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니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패멸(敗滅, destruction, ruin)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다.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 주님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니 (약 5:8) 여러분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님의 강림이 가깝다. (약 5:9) 형제들,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할 것이다.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신다.
(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 것이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벧후 3:4) 말하기를, "주님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가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다[중복].
의의 면류관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님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이에게 또한 그러하다. (딤후 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장래 노하심에서
(살전 1:8)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여러분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 (살전 1:9) 여러분이 어떻게 우리를 처음 영접해 들인 것과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 곧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그들 자신 그렇게 말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살전 2:1) 형제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 스스로 아는 바니
(벧전 1:13)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방심하지 말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 일이다.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해 준비됨
(벧후 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부러 잊으려 함이다.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으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간수하신 바가 되어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다.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
(살후 2:1) 형제들, 우리가 여러분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살후 2:2) 혹 영(靈, spirit)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는 편지로나 주님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을 그것이다.
(살후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여러분이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不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살후 2:4) 그는 대적(對敵)하는 자로서 무릇 하나님이라 일컫거나 숭배함을 받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나는 자로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의 성전(聖殿)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
(살후 2:5)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여러분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살후 2:6) 그로 하여금 자기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여러분이 아는 것이니 (살후 2: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했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자리로부터 치워질 때까지 그러할 것이다.
(살후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날 것이니 주 예수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降臨)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실 것이다.
(살후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살후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아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다. (살후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그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살후 2: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 복음을 전함
(살전 2:2)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했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말했다.
(살전 2:14) 형제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는다. (살전 2:15) 유대인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對敵)이 되어 (살전 2: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니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고 있다.
(딤후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님의 증언하신 말씀과 또는 주님을 위해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후 11: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39번 내리치는 매를 5번 맞았으며, (고후 11:25) 3번 몽둥이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3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同族)의 위험, 이방인[이민족]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믿는 체 하여 속이는]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고후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다. (고후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않으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이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안에서 약하나 여러분을 향하여[여러분을 섬기기 위하여, towards you, to serve you]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고전 4:9) 생각컨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와 같이 미말(微末)에 두셨으니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여러분은 강하고 여러분은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
(고전 4:14) 내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러분을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않으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여러분을 낳았음이다.
(고후 6: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고후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고후 6: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 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고후 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무기(武器)로 좌우에 대처하고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다.
(고후 6:11) 고린도 사람들이여, 여러분을 대하여 우리가 기탄없이 말하며 우리의 마음을 넓혀 포용하고자 함이니, (고후 6:12) 우리가 여러분을 향한 우리 마음을 좁힌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우리를 대하여 마음을 좁힌 것이다. (고후 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니 보답하는 양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라.
복음 전파는 고난을 수반
(딤후 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해 반포자(頒布者, 세상에 널리 퍼뜨림)와 사도[apostle]와 교사[teacher]로 세우심을 입었다. (딤후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 함은 나의 의뢰한 이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다.
(딤후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방심하지 말고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함으로 네 직무를 다하라.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셔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히 12:3) 여러분이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해 죄인들의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 12:4) 여러분이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않고
(엡 3:13)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구하니 여러분을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여러분의 영광이다.
복음 전도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벧전 2:9) 오직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여러분을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니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警責)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이다. (롬 1:15)(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 헬라인에게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 올바름)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 함과 같다.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셔서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다. (롬 15: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롬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해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한다.
(롬 15: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Illiricum]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 (롬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으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 함이다. (롬 15:21) 기록된 바 "주님의 소식을 받지 못한 이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이들이 깨달을 것이다" 함과 같다.
복음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어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 (고전 9: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다. (고전 9:18) 그런즉 내 상[reward, 보답, 응보]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은 이것이다.
복음에 참예하고자 복음 위해 모든 것 행함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했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다.
(고전 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 9:23) 내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어 아무쪼록 몇이라도 구원 얻게 되도록 힘쓰라
(고전 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면 {이는 주님의 명령이 아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않은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고전 7: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않은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고전 7:14) 믿지 않은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않은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니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자녀도 깨끗치 못하다. 그러나 이제 거룩하다.
(고전 7:15) 혹 믿지 않는 이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여러분을 부르셨다. (고전 7:16) 아내된 이여, 그대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이여, 그대가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고전 7:17) 오직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한다. (고전 7: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고전 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않은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다.
(고전 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전 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고전 7:22)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이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고전 7:23) 여러분은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 7:24) 형제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처하라.
외지 전도인, 선교사 접대
(요삼 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된 일이니 (요삼 1: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했다.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을 것이다. (요삼 1:7) 이는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위해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다. (요삼 1:8)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다.
"우리가 여러분의 종이 됨을 전파"
(고후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의 주님되신 것과 또 예수님을 위해 우리가 여러분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다. (고후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췰 것이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 함을 알게 하려 함이다.
[註-그리스도를 주인[우리의 소유주]으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이룬 한 몸 체제로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지체 역할을 함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하나된 위치에서 서로를 섬기는(종 노릇하는) 것이 그리스도 복음의 요체인 것이다].
(살전 2:3) 우리의 권면은 간사스러움에서나 부정(不淨)에서 난 것도 아니요 계략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살전 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하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다. (살전 2:5)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신다.
(살전 2:11) 여러분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여러분 각자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니 (살전 2:12) 이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려 함이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여러분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해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다.
하나님의 동역자들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시다. (고전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보답될 것이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同役者, 함께 일하는 이)들이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니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 것인지를 조심할 것이다.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각 공력(功力)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명백히 할 것이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다.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 대로 있으면 일한 대로 보답이 될 것이고 (고전 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을 것이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을 것이다.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일이다.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다. (고전 4:3) 여러분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다. 나도 나를 판단치 않으니 (고전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지는 못한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시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님께서 오시기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이다.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전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걸림 돌이 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
지금은 구원의 날
(고후 6:2) 말씀하시기를,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
복음의 말씀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했으니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다.
성령 힘입어 복음 전함은 천사들도 보기 원해
(벧전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여러분을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여러분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 나를 버렸으나 주님이 함께 계심
(딤후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이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 (딤후 4:17)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獅子)의 입에서 건져졌다. (딤후 4:18) 주님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으시기를. 아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도 않고
(고전 2:1) 형제들, 내가 여러분에게 나아가 하나님께 대하여 증언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으니 (고전 2:2) 내가 여러분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음이다. [註-이는 복음 전도자의 마땅한 자세로서 바울이 본을 보인 것이다].
(고전 2:3) 내가 여러분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한 것이다.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함이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권위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춰졌던 것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시어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지배자들이 하나도 알지 못했으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 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9)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으니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미련한 것으로 전도함으로써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고후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여러분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니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여러분을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니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여러분을 권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빌 1:12) 형제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여러분이 알기를 원한다. (빌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복음 전도 활동을 인해 구금되어 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侍衛隊, 당시 로마 궁정 수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빌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님 안에서 자신감에 넘쳐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빌 1:15) 어떤 이들은 질투에서 또는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빌 1:16) 후자는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빌 1:17) 전자에 속한 이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으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이다.
[註-"겉으로 하나 참으로 하나 그리스도가 전파되니 기쁘다" 했는데 물론 그렇게 불순한 동기로 전파한 사람은 자기를 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은(고후 5:15/롬 14:7-9) 죄목이 명백하므로 이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빌 3:18) 것이 되어 이를 회개하지 않는 한 "멸망"(:19)이니 바울이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 자기는 도리어 버림을 받는"(고전 9:27) 경우다. 그러나 복음은 전파되고 그리스도는 알려진 것이다.
왜냐면 그만큼 믿는 도리라는 것이 지극히 간명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복음 전파의 핵심을 빠뜨리게 하는 데에 대해서는 관록이 붘은 자로서 사이비를 만들고 이단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즉 "회개하여 돌이켜 죄 용서함을 받는"[행 3:19] 일은 빼어 버리고 오직 특정 사실(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위해 죽으셨다는)만 믿고 있으면 구원된다고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만들어, "다른 영"을 받게 하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구원자만 아니라 심판주시라는 사실(17:31)을 믿음에 따른 것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회개하고 돌이키고(to turn to God/to convert) 해야 죄가 용서된다는 것은 이제는 죄 용서를 받았으니 다시는 같은 죄(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를 되풀이하여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돌이키는 것 즉 전환하는 것, 다시 말해 가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이다.
이는 완전히 행동 성량을 180도 돌리는 것을 말함이니 곧 지금까지 불복종하고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 죄 짓는 것이었다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신 즉 구원의 목적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임을 성경은 명백히 한 것이다. 죄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이 죄를 낳는다"(약 1:15) 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 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롬 14:9)대로 사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가 없는[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벧전 4:1] 것이다.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곧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곧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함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약속 아래 죄가 용서되는 것이지 같은 죄를 여전히 지을 바에야 처음부터 용서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성경은 상식 따라 말씀하는 것이지 비상식적인 것은 통할 수 없으니 상식대로 말하지 않고는 인간이 이를 이해하는 것조차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죄인으로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있고 이 세상에서는 현실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육신" 타령을 하면서) 터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우리 죄 위해 죽으심을 근거로 하여 구원은 확실히 받는다는 것이 '복된 좋은 소식'의 특징이요 은혜의 은혜다움이라는 사이비 주장은 오늘날 구석구석이 만연되어 있는 독소(毒素)가 되어 있다.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다. 하나님 창조는 완벽하시다. 그리고 이전 것과는 완전히 결별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는 "새롭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죄 짓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그 소위 "육신"은 이전 창조에서 아담이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창조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았던 결과다. 그런 결과가 어찌 새 창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감히 생각하려는가. 논리에도 맞지 않는 황당한 사이비 주장인 것이다. 아담을 창조하실 때 또는 사단과 같은 영물들을 만드실 때 그들이 죄 짓도록 만드시지 않았다. 거룩하게 만드신 것이다. 우리 역시 새 창조의 결과물이므로 죄 짓지 않도록 창조된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 주장을 함으로써 감히 하나님을 모독하려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위해 죽으신 목적을 성경은 그와 같이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는가(롬 14:7-9/고후 5:15). 죄를 지어도 눈 감아 주시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은혜의 참 뜻은 우리가 아담의 범죄의 결과 그리고 우리가 직접 지은 죄의 결과로서 죽은 자이고 따라서 살 수가 없는데도 산 자로 만들어 주신 것을 말함이다. 어찌하여 엉뚱한 데에다 은혜의 의미를 갖다 붙이는가. 이 육신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와해되고 파괴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했다(롬 6:6/요일 3:8)].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롬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한다. (롬 9:2)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는 바로서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위함이니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다. (롬 9:4) 이스라엘 사람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다.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벧전 3:19) 그가[죽으신 이후의 그리스도께서]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않던 이들이다.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이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다[중복].
(벧전 4:4) 이러므로 여러분이 그들과 함께 그런 극(極)한 방탕에 휘말리지 않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벧전 4: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 이 앞에 이실직고(以實直告)하게 될 것이다. (벧전 4:6) 이를 위해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을 따라 심판을 받았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않은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다. (롬 10:16) 그러나 그들이 모두 복음을 순종한 것은 아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주님,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습니까?" 한 대로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거니와, 그들이 듣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
(롬 4:16) 그러므로 후사(後嗣-하나님의 상속자,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 믿음으로 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아브라함의]에게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다. 율법에 속한 자[모세 유럽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
(롬 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을 것이다" 하신 말씀 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다. (롬 4:19)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아브라함의 아내]의 태(胎)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롬 4:20) 믿음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일이 없이 믿음에 견고해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 확신했으니 (롬 4:22) 그러므로 이것으로 그를 의(義, 하나님 앞에서 올바름)롭다 하신 것이다.
믿음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realization, evidence, assurance, a confident assurance of, being sure of] 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confidence, evidence, conviction, a conviction of the reality, certain of]니 (히 11:2) 선대(先代)들이 이로써[이렇게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았다. [註-만물은 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그 볼 수 없는 것을 비록 보이지는 않으나 있다고 믿는(공기는 볼 수 없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것과 같음이요, 미래의 일로서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나타날 줄로 기대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창세기 4장]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는 것이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창 5:24]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인정하심을 받았던 것이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했으니[창 6:9]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定罪-단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義)의 후사(後嗣, 상속자, heir)가 되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하나님으로부터] 상속 받을 땅에 나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9) 믿음으로 그가 외국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서 나그네로 자처하여 동일한 약속을 함께 상속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처했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이 친히 지으시고 경영하실 영원한 터전의 그 도시[city, 나라]를 바랐음이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아브라함의 아내]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斷産)했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한 것이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했으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언했으니 (히 11:14) 이 같이 말하는 이들은 본향(本鄕, 자기의 본 고장, 고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다.
(히 11:15) 그들이 나온 바 고향(故鄕)을 생각했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도시[나라]를 준비하신 것이다.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이지만 바로 그 [약속의] 독자를 드린 것이다. (히 11: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들은 이삭으로 말미암을 것이라" 하셨으므로 (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셈이다.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했으며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했으며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해 명했으며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기며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않았고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7)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나 임금의 분노를 무서워 않고 보이지 않으시는 이[하나님]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법(禮法)을 정했으니 이로써 장자(長者)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출 12:1 이하] (히 11:29) 믿음으로 그들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고
(히 11:30) 믿음으로 7일 동안 여리고 성(城)을 에워싸고 돌아가니 성이 무너졌으며[구약성경 사사기]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으므로 순종치 않은 자들과 함께 멸망치 않았다[사사기].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구약 성경]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히 11:33) 그들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義)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lion]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 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陣, 군대)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惡刑, a cruel [severe] punishment, torture)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으며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켜서 몸이 잘리기도 하고 각종 시험을 당하고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은 채 [산야에] 유리방황하기도 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그들이 광야와 산중과 바위 굴과 토굴(土窟) 사이를 떠돌았다.
(히 11: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했으니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준비하셨으므로[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우리로 말미암아 그들 역시 온전하게 됨을 이루려 하심이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競走, race-고전 9:24)를 달려 나가며
속되게 여기면 속되다
(롬 14:14) 내가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속된[unclean] 것이 없으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
(롬 14:20) 먹는 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淨, pure)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그 사람에게는 악한[evil] 것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사람은 정죄(定罪-단죄)되었으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않은 연고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
(살후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다.
(살후 3:3) 주님은 신실하셔서 여러분을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실 것이다. (살후 3:4) 우리가 명한 것을 여러분이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님 안에서 확신하니 (살후 3:5)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
(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여러분이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롬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사람은 채소를 먹는다[중복]. (롬 14:3) 먹는 이는 먹지 않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이는 먹는 이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다. (롬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므로 그가 세움을 받을 것이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께 있음이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했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롬 10:11) 성경에 "누구든지 그를 믿는 이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다. 한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셔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시다. (롬 10:13)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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