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올린 전도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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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마지막 아담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항상 강조하신 것이 이미 설명한 "자기 부인" 그리고 "십자가 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당시 사형수를 처형할 때 쓰던 형구를 사형수가 직접 메고 가던 모습을 가리킴입니다. 때문에 이런 가르침에 놀란 많은 제자들이 실망한 나머지 그 곁을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각종 기적을 보고 세상에서 편안하게 잘 살기를 희망했었는데 도리어 그 반대되는 말씀을 하심에 대한 당연한 반응입니다. 오늘날도 사정은 똑같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가 타락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진실이라는 자체 증명 중 하나라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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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① 이 모두 사랑과 삶의 법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고전 12;26)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 공동운명체 구성원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즉 한 몸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입증함입니다. 백만의 지체 중 단 하나라도 고통 중에 있으면 100만 모두가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없이 이상적인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사랑)가 여기서 빛을 발휘합니다.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 하고 인생살이를 인간고라 하듯이 지금은 '함께' 고난 받는 때이지 '삶의 낙'을 즐기는 때가 아닌 것입니다. 죽음의 이 자연계 육체가 그 증거입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자연계 육체를 가지고 삶의 낙을 꿈꾸는 것 자체가 망상이고 도저히 이지적일 수 없는 "미친 마음"(전 9:3)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아담의 죽으심은 바로 나의 죽음이요 이 세상의 죽은 상태임을 훌륭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왜 세상과 이 자연계 육체에 대한 죽음이냐, 세상과 내 육신은 무조건 무작정 살려고만 나대는 저돌성으로 특징지워져 있는 까닭입니다. 죽음뿐인데도 막무가내로 살려고만 덤빕니다.
*********************************************************************⑪-②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연계와 초자연계가 양면으로 대립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있고 그 성질이 정반대가 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경우 오는 영원세계에서는 반드시생명과는 반대인 고난뿐임을 미리 내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로 엄중한 경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양 세계를 함께 취할 수는 없습니다. 악령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神)이 되어 있는 마당에 살기를 도모한다는 것은 이 악한 신에게 무릎 꿇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자아중심으로 동조하여 함께 장단 맞춰 춤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되어 있으니 장차 악령들과 함께 영원한 멸망 속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게 됩니다. 대립되는 둘은 항상 성격이 반대라는 사실에 유념하는 이들이야말로 복이 있습니다. 장차 오는 진노(wrath)를 피할 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⑪-③ 이러한 사실들을 밝혀 경고하고 있는 것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라 함은, 성경이 만일 지어내고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그런 거짓을 시도함에는 반드시 특정 목적이 있을 것이므로 그 목적은 다름아닌 가급적이면 많은 숫자를 끌어모음에 있는데 이와 같이 대체적으로 반발심만 자아내는 말을 거침없이 할 리가 만무하다는 그 점입니다. 구름떼같이 몰려든 제자들이 이런 경고의 말씀을 듣고 썰물같이 빠져나가더라고 액면 그대로 생겨난 사실 그대로 기록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라면 도무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이기 때문에 담담하게 기록해두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란 것은 눈치 보지 않고는 입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니 반응 여하에 아주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자체 특성 때문입니다. 고로 감언이설로써 주를 이루고 반발심을 일으킬 만한 것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 법입니다. 가감없이 이런 내용을 담아두고 있다는 바로 이런 사실이 진실 추구가 아니면 불가능하기에, 인생들의 호불호를 개의치 않고 오직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는 창조주의 말씀이시기에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성경의 진위(眞僞)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현명한 조처입니다.
*********************************************************************⑩-④ 바로 이런 점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지 이른바 "석기 시대", "탄소연대측정" 운운 등에 곁눈을 두고 이를 반박하는 등 따라가다보면 끝이 없고 시간 낭비만 됩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 神의 존재를 의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령(靈物)들은 인간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최고도의 지식을 활용하므로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모든 초능력을 구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인간 파괴의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속이는 것, 거짓에 있습니다. 아담 부부를 죽음의 늪에 빠뜨린 그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수법입니다. 무신론도 그런 거짓의 일종인데 이제는 그 스스로 창조주로 가장하여 무대 위에 서려는 야심에 차 있는지라 서서히 빛이 바래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그 최고도의 지식("과학적")을 가지고 얼마든지 인간을 농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5가지 사실로써만 종합하면 A라는 결론이 나오지만 나머지 다른 2가지 사실을 보태면 전혀 다른 B란 결론이 뒤바꿔질 수 있을 때 악령은 그 5가지만 강조하고 그 2가지는 감쪽같이 감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神이 아닌 자연계 존재이므로 그런 神의 농간을 따라잡을 수 없고 그 거짓을 간파할 수 없을 때 그런 경우를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친히 그런 짓거리를 용납하실 때(위의 설명과 같은 성경의 확고한 자체 증명의 예를 보여주셨으므로 그에 따른 인간의 반응 여부를 다루어보시기 위해) 문제의 차원은 아주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소위 다윈의 "진화론"이 그와 유사한 보기 중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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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이와 같은 인류사상 최대 최고 유일의 희소식인즉 당연히 세상에서 인기 절정에 올라 있는가ㅡ답은, "아니다, 그 정반대다"ㅡ왜냐, 이 세상 神은 천사가 아니라 악령이기 때문입니다(고후 4:4). 그래서 이를 가리켜 "복된 소식의 수난(受難)ㅡthe afflictions of the Gospel"(딤후 1:8)이라 합니다. 모순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때문에 "나와 내 복음(福音, 희소식, 복된 소식, 좋은 소식)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ㅡ엄중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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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① 죽음의 고해(苦海)에서 살려고 발버둥 몸부림치며 한껏 달아 있는데 냉수까지 퍼다가 끼얹어 주는 격이니 그래서 반발하고, 거기다 더 보태서 세상에서는 개밥의 도토리(개는 개밥을 먹다가도 도토리는 애써 걷어 치우니까)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을 미리 경고하시는 판이니 더더욱 인기가 없다는 이것이 또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 중 하나입니다. 성경이 진실이 아닌 꾸며낸 소설이라면 절대로 이런 내용이 담겨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 끝까지 그러할 것이라 하셨고 이것이 창조주의 뜻이라고 명백히 하신 이상 우리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인기가 있는 것은 가짜 기독교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로마카톨릭). 지금까지 세계 최대 종교요 유럽 천하를 주름잡기도 했지만, 마지막 아담 친히 나와 영혼/육체 관계로 하나가 되어 계시는데 왕청되게 '마리아'를 끌어드렸으니 간판만의 기독교입니다. 개신교 역시 지금 상황으로는 더 나을 바 없음을 이미 지적했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악령이므로 그의 목적은 인간 구원의 방해 저지에 있는 이상 당연한 결론입니다. 만일 성경이 인위적인 작품에 불과하다면 그래서 진리가 아니라면, 이슬람처럼 초기에는 고난의 표적이 되더라도 종내 마지막 판에 가서는 온 세계를 풍미하고 온 세계를 정복하고 기독교화할 것이라는 선전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반대의 내용으로 일관합니다. 이 점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여기에 주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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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② 마지막 아담께서 성령으로 친히 내게 임하여 계신다는 것은 홀로가 아니라 아버지와 둘이 하나되어 오시는 것이므로 특별히 "성령"이시라 합니다. 갑과 을로서의 둘이 하나되어 계시니 이를 아버지(갑)시라고도 또는 아들(을)이시라고도 못하고 제3위 격으로서의 병 곧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통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3위1체"입니다. 아들만 아니시고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하나되시어 내 안에 좌정해 계시니 그래서 내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된 것입니다. 창조자의 아들들이니 천하무적, 그 어떤 악령, 그 어떤 존재도 고양이 앞의 쥐로서 일사천리 일방통행이므로 싸움이라도 싱겁게 끝납니다. 이런 싱거워진 판인지라 아기자기한 양념을 더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구조 즉 악령이 이 세상 神으로 군림해 있는 한 때만의 과도기적 현상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이 식어져 자아중심으로 흐르면 악령의 승리로 돌아가 "창조자의 아들"로서의 천하무적 막강함도 한바탕 물 거품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이 세상 신의 물리적 육체적 압박과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사수하고 시종일관할 때 그 때 비로소 "창조주의 아들들의 승리"가 되도록 정하신 것입니다. 과연 공평무사 합리적인 조처이십니다. 다시 말해 제대로 완전무장하면 상대가 안되는 일방적 우열의 양쪽 적수가 "그러지 말고 우리 무장 해제하고 맨몸 맨주먹으로 한번 결해보자"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 경우 '사랑'이 진정한 힘입니다. 힘 있는 자가 이기게 마련입니다. 거룩한 천사가 악령이 된 것도 이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아담 역시 범죄로 죽음에 이른 것이 이미 사랑의 법칙에서 설명한 대로 머리가 되시는 창조주께 대한 사랑이 없었다는 오직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생명의 법칙의 핵이 사랑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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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③ 짝의 원리에서 이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오늘의 세상이 '원인'이 되어 이 '원인'과 인과율로 대립되는 '결과'로서의 미래의 세계가 있고 이렇게 양면으로 대립되어 있으며 그 이상으로는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소위 "전생"이라는 것은 이 세상 神의 농간으로 실제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 오직 내가 태어난 이 세상과 이 세상 이후의 영원하고 완전한 오는 세상만 있어 그 때 가서야 이 세상을 전생(前生)이라 일컫게 되고 그 때 세계는 영원한 금생(今生)이 됩니다.
그 때에 가서야 이 세상을 가리켜 말하기를 "내가 전생에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내가 이 금생에서 영원 복락을 누리고 있다" 또는 "내가 전생에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하고 슬피 울고 이를 갈며 고난 중에 있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전자의 경우는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마지막 아담을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시고 함께 생활하기(살기) 시작하는 즉 다시 출생하여 새로 창조된 새 생명을 누리기 시작함을 말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고 이 마지막 아담과 더불어 짝으로서의 삶 즉 둘이 하나됨의 일상생활이아닌 아닌 홀로 영원한 외톨이의 고독 속에 몸부림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고독은 죽기보다 더 비참한 것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차라리 죽어 모든 의식이 끝나는 것이 복이라 할 것이나 인간은 처음부터 초자연계 존재로서 창조를 입은 까닭에 그런 인멸(湮滅)이라는 것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삶의 쾌락과 짝을 이루어 영원한 고난으로서 영원히 양립되는 그 중 하나에 반드시 모든 인생 각자는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무서운 냉혹한 그리고무척이나 다급한 현실에 눈떠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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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④ 그러므로 창조주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①회개 곧 지금까지 창조주를 나의 '머리', '어버이'로서 믿지 않고 마치 나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하루살이같은 인생으로만 착각하여 자아중심으로 살았던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을 외면했던 삶으로부터 180도 전환/전향으로 돌이켜서, 나를 낳은 부모보다 더 원조(元祖)이신 창조주께서 나를 만드셔서 존재하게 하신 즉 당신의 아들로(이 "아버지" "아들"에 관한 설명은 이미 했으므로 생략) 삼아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셨으니 이 뜻에 순종하여 오직 창조주의 사랑의 뜻대로만 살리라는 결단을 최후 확정적으로 하십시오. 창조주의 사랑은 마지막 아담의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확증되었습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전지전능(불가능이 없으신), 무소부재(이 우주 아니 계신 데가 없으신)의 창조주이시니까 우리 인생전체와 상관하실 뿐 아니라 그와 똑같이 나와 일대일로 상관하십니다. 나의 생각과 결심과 사랑의 의지를 낱낱이 아십니다. 모든 개개인과 한 사람처럼 관여하여 관심을 가지시므로(그렇지 않다면 아예 이와 같이 인간을 창조하시지도 않았을 것) 지금 내 앞에 계신다고 100% 믿어도 100% 진실이니 이 사실을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사랑의 마음 그 일편단심으로 마지막 아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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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이러한 결심이 확고히 설 때에는 아래에 지적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사수하겠다는 결의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꺼리고 조금이라도 불편해 하는 심기일 때는 재삼 재사 모든 것을 숙고해야 하며, 조급한 결단은 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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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①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점을 사전(事前) 경고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아담께서는 명백히 이런 경고를 해 주라고 지시하셨는데도(눅 14:25-35) 이를 감히 무시하고 있으니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시는(성령으로)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의 명령을 어기고 어찌 그 '몸'된 교회라 할 수 있으리요. 간판은 교회지만 결코 교회일 수가 없는 오늘의 혼돈이 여기서부터 벌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진리의 지식은 지금까지의 설명처럼 간단명료합니다. 이런 점은 누구나 비록 어린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저하고 망설일 때는 절대로 구원 받은 것으로 인정해 주지 말아야 합니다. 정작 구원은 구자도 모르는 사람이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는 판이 되어 오늘날 기독교가 사람들의 칭찬은커녕 조소거리와 비방거리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의 유병언 사건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조차 쑥 들어가버렸다"고 말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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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② 이 점이라는 것은, 자아중심으로 뭉쳐진 이 세상에서 그와는 정반대인 자기 부인 곧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한 몸 구조에서 나의 상대방을 위하는 삶을 영위함에서 자초하는 갖가지 불이익을 진리 사랑하는 마음으로 능히 감내할 수 있느냐 여부이고, 지체 중 단 하나라도 고통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생명(삶)의 법칙을 준수함에서 오는 모든 핍박과 환난을 개의치 않고 일관성 있게 <창조주의 아들>들로서의 품위와 격을 자랑스럽게(내 자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아름다우신 창조주이시고 아름다우신 그 말씀, 구원의 말씀이십니다. 이 내적 아름다움인 사랑이 외부적으로 표현될 때 우리가 아는 각종 미(美, beauty)로 나타납니다. 사랑은 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자식은 부모가 되어보아야 부모 마음을 압니다. 사랑의 위력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므로 성경 아가(雅歌, the Song of Solomon)에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삶의 알맹이가 사랑에 있기 때문이니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둘의 하나됨의 생명의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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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③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부정적 대가에도 개의치 않고 이 사랑의 생명력을 고수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히 섰으면(이런 결단을 하고도 나중에 변심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지만 그러나 믿음에 들어오는 불가피한 첫 관문입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에도 상호간 충성 서약을 마음으로 다지는 것과 똑같은 것), 세례(洗罪禮式)를 받게 됩니다. "침례(immersion)"니 "세례(sprinkling)"니 말이 많으므로 영어권에서 "baptism"으로 통일한 것과 같이 우리도 "세죄예식-행 22:16"의 준말로 못박으면 불필요한 혼돈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세례는 마지막 아담의 이 세상에서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다시 말해 누가 세례의식을 거행하든 상관 없이 마지막 아담 친히 세례를 베푸신다는 의미가 됩니다(고전 1:14-17).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살아 계시고 지금 우리와 성령으로 함께 계셔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삶을 공동으로 영위하시는 마지막 아담께서 교회의 머리시고 주인이시고 운영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보이는 육체로 계시지 않는다는 그 차이뿐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무나 남발되어 온갖 사이비들도 이 이름으로 행세하므로 가급적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에 나오는 대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주로 대신하는 것은 그 의미가 주는 의미가 오늘날 너무나 시의적절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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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④ 더 설명하기 전에 혹자는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불의, 불법, 부정을 보라! 어떻게 정의의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보겠느냐!"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불의, 불법이 즉시 척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알아야 하는 것은 창조주의 기조(基調)는 '생명'이요 그리고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 본질상 타율이 아니라 자율입니다. 강제하면 로봇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장된 것이 개개인의 자유 의지입니다. 이 자유 선택에 의해 선악이 구분되려면 죄를 범하는 즉시 처벌되는 강제성이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선과 의를 행해도 스스로 원해서 기쁨으로 하는 것이 저울질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선과 악을 몰라서 죄인되고 불법이 자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양심이란 불문율을 이미 각 개인에게 심어놓으신 것이니 이것은 타율 아닌 자율을 기대하신다는 확고한 창조주의 의지 표명입니다. 강제에 의한 질서 확립이었다면 아담부터 범죄 않도록 미리 조처하시든가 강제로 막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께서 절대로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인내로써 기다리시는 것뿐입니다. 그 악을 버리고 스스로 돌이켜 돌아도록ㅡ바로 이것이 어버이 마음입니다. 회초리를 드시나 불응하면 하는 수 없습니다. 이 창조주의 말씀 전달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로써 드러납니다. 강제로 믿게 하든가 기독교화한다는 것은 창조주의 뜻과는 전연 무관한 인간 및 악령들의 소행에 불과합니다. 국교를 정하는 것도 당연히 창조주 앞에서는 불법입니다. 천주교, 이슬람 등이 세상을 강제로 장악하여 소위 신권정치를 감행하려 든 것이 다 선이 아니라 악인 것입니다. 권력에 의지여 포교하려는 것 역시 같은 범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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