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sns에 올린 전도문 (4)

Tayseek Kwon 2019. 4. 9. 16:30




sns에 올린 전도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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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마지막 아담을 머리로 모신 이상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핍박의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사랑의 인내의 연단 또는 시험(저울질)을 위한 일면도 있음을 부인 못합니다. 또 다른 측면은 이미 설명한 대로 이 고난 받음이 고난 속에 헤매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 물에 빠진 자 건지려면 직접 같은 물 속에, 불에 갇힌 자 구출하려면 같은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ㅡ. 이것이 한 몸됨을 통한 인생 구원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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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① 예로부터 성현군자는 대체적으로 자진해서 선을 행하는 자율형 인간이니 그런 사람은 마지막 아담으로 인한 재출생, 신창조가 필요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그 선을 행함이 궁극적으로 죽은 뒤 좋은 데 가기를 바라고 자기 구원을 위하는 것이라면 그게 다름아닌 자기를 위하는 자아중심이므로 드러내놓고 악이 좋아서 악을 행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다 자기를 위한 욕심/욕구가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세상에서 모두가 선을 행해서 훨씬 살기가 좋다 한들 내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이 자연계 육체에게는 '무의미' 한 마디뿐입니다. 세상이 좋아진들 내가 이 시간 후 죽는다면 그 "좋은" 세상이 한낱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는 새 창조, 재출생은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께서 나 위한 일체를 도맡아 주시는 고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서 할 것이 없어서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논리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상대가 나를 더 잘 보아 주지 내가 나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위한답시고 끙끙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뜻입니다. 자기 부정(否定)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착각 오해하는이들이 많습니다. 자기 부정커녕 자기 확대, 확산, 확충입니다. '소아'가 아닌 무한대의 '대아'입니다. 고로 이 신창조, 재출생은 모든 악의 근원인 자아중심을 근절시켜 그림자도 어른거리지 않게 만드는 근본적 치유, 갱생ㅡ말 그대로 다시 나고 새로운 존재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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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② 마지막 아담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것은 바로 내가 그렇게 죽어 모든 것 청산/결산한 다음 가쁜하게 새 존재로 영존(永存)하는 새 생명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바로 그 뜻입니다. 인격 혁신, 인간 혁명과는 차원이 다른 말 그대로의 새 창조, 다시 남입니다. 이것은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유일의 영역입니다. 다른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 창조주로서 감히 피조물이 되신 그 파격적인 행보.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는 그 위치에서 성령으로 내게 임하시어 나와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셨으니, 2천년 전의 그 죽음, 부활, 승천 등이 고스란히 그대로 오늘날 21세기 존재인 나의 것이 되고 내가 누리는 영광의 생명이 됨은 아주 논리적이고 합당한 이치 중의 이치입니다. 내가 상상하고 꿈꾸는 것 이상으로 나는 이미 마지막 아담 안에서 모든 소원 성취 다 한 것입니다. 창조주의 아들이 되었으니까! 이것이 어버이 사랑입니다. 아낌 없이 모든 것, 자기 자신마저 다 주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영원 불변의 사실은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심으로써 그 분 자신이 오로지 나를 위하신다는 증거. 그럴진대 그 지으신 만유야 물론 나의 소유가 되어 있고도 남은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부질없는 욕심이 간 곳 없습니다. 욕심 부릴 대상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우주 천하를 내게 안겨 주신 다음에 생명의 법칙 준수 여부를 보시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금은 이것을 누리면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참으로 이 사랑을 알고 나 역시 머리되시는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 내 이웃(함께 믿어 공동의 머리로 모시고 있는 한 몸되어 있는 지체들)을 사랑하느냐 그 진위 여부가 만천하에 입증되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천사들은 이미 그런 구분이 이루어져 '악령'과 '거룩한 천사'들로 나누어져 각자 그 운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생들이 그런 구분을 스스로 정하게 되어 있는 시기입니다. 이 세상의 의미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삶의 낙을 누리고자 존립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 구차한 자연계 육체 가지고 생명의 낙을 누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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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③ 세례를 받는 이유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례에서 물은 과거 노아 홍수 때 온 세상이 죽음의 물로 덮인 대홍수를 상징하는 일면도 있습니다. 곧 죽음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실제 인물임이 3운법칙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왜냐면 그의 950년 생애가 너무 황당한 듯하여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조차 전설처럼 취급했으나 생애의 활동기가 전체 생애의 7/19이 되는 SN형에 들어맞는 까닭입니다. 성경에 600세에 홍수가 났다 했고 950세에 죽었으니 홍수 후 350년을 살다가 죽습니다. 자료는 이것뿐입니다. 이 600, 350, 950이란 수치를 다른 유형 FS, OT에는 맞지 않으나 SN에는 맞는 것이, 350년의 LP, 350년의 DP로 하면 250년의 JP가 되는 까닭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생애가 7/19(LP), 7/19(DP), 5/19(JP)의 생애 구조를 가진 인생이 많고 당당히 3유형의 하나가 되어 있으니까 또 인간 생애는 이 3가지밖에 없음이 3위1체 법칙의 도식(圖式)이 입증하고 있으니까 노아라고 해서 억지로 여기서 제외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들어맞으니까(성경에 250세에 대한 언급은 없어도) SN형이라고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 이후 노아 홍수 전까지 당시 사람들이 장수했느냐 하면 아담이 원래 영생하도록 되어있는 초자연계 존재였음을 전제한다면 쉽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생하도록 기력이 충실해 있던 아담이 자연계 존재가기는 했어도 그 기운이 그대로 얼마 동안은 남아 있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둘째는 노아 홍수 전의 기후가 장수하기에 알맞을 수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이후에 급격한 변동으로 더 다시는그런 장수가 불가능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서 그 전에는 무지개가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성경에 기록된)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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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④ 이와 같이 세례식에서의 물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벧전 3:21,22) 일단 전제한다면 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몸을 풍덩 잠기게 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그 의미 즉 마지막 아담과 함께 죽었다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에 잠기는 방식을 취해도 자기 부인이 없으면 헛일이고 무의미하며 죄 용서가 될 수 없고, 소위 "약식" 세례를 받아도 자기 부인의 취지만 정확히 이해하면 누구든지 성령의 선물(마지막 아담께서 아버지와 함께 하나되신 모습으로 오시는)을 받을 수 있으며 역사적 사실이 또한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물 속에 직접 들어가는 의식을 원하면 그것은 물론 좋습니다. 이렇게 죽었으니까 죄 값으로서의 죽음이므로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그 뜻입니다. 과거의 죄가 용서되고 앞으로 다시는 구조적으로(앞의 설명대로) 죄를 짓지 않게 되어 있으니까 말 그대로의 "죄로부터의 구원"(마 1:21)입니다. 이렇게 죄 용서된 자리에 거룩하신 창조주의 영 곧 성령(聖靈, Holy Spirit)께서 내게 친히 주시는 개인적 선물로서 임하시게 됩니다. 이제까지다. 이 성령 즉 3위1체에 대해 모두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아담 바로 자신이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별도로 누가("성령"으로서) 따로 존재하시는 것처럼, 그러나 분명히 또 그렇지는 않음을 성경에 명시했기 때문. 이와 같이 3위1체의 법칙은 모든 법칙의 기본이고 으뜸이므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충분한 길잡이입니다. 이 법칙 따라 만유가 창조되어 움직이기 때문에, 성경이 진실일진대 이 법칙을 따라 모든 말씀이 이루어져 있음은 필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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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지금까지 설명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으니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인(소유주)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어...<마음>으로 믿어 의(義, 죄를 척결한 정상 상태)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누구든지 주님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롬 10:8-13).


여기서 주인(소유주)이라 함은 앞서 설명한 대로 사랑으로서의 주종(主從) 관계 즉 섬기고 섬김을 받는 한 몸의 원리에서 머리와 몸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체제를 가리킴입니다. 사랑에서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라 서로 고백함과 같습니다. 물론 머리이시고 창조주이신 마지막 아담이시니까 홀로 만왕(萬王)의 왕이시요 만주(萬主)의 주이심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존재한다, 위치한다ㅡ항구적으로)"(눅 22:27) 선언하셨습니다. 사랑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그리고 위의 성경 대목에서 강조되는 것이 바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니 얼마나 간단 명료합니까. 창조주의 창조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친히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다 이루신 것이므로 나는 단지 그것을 사랑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달리 있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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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① 그러므로 이 세상은 원천적으로 창조주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저주와 진노 차원에서 악령이 이 세상 지배자가 되어 고난을 가중시키는 그런 형국이기도 합니다.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고에서 기진맥진 허덕이라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므로 진노와 저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창조주의 지극하신 사랑이시니 곧 자신을 우리 각자 앞앞이 선물로 주실 정도로 그 사랑을 원도 한도 없이 유감없이 다 쏟아 부어 주신 상태입니다. 그러나 앞서의 설명대로 모든 인생들이 자동적으로 모두 구원되도록 하실 수는 없습니다. 자유 의지를 구가, 구사하는 인생인지라 사랑에서는 각자가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자진 자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 한한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인간을 로봇 취급하실 리 없는 까닭입니다. 세상이 진노와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은 만물이 한 몸 체제 안에서 모두 고통 중에 있다는 사실과도 통합니다(롬 8:22). 고통도 보통 고통이 아니라 극통 중의 하나인 바로 산고(産苦)입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더 이상 이런 실상을 알지 못하던 이전처럼 세상에 연연하거나 미련을 둠으로써 자아중심으로 흐르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 모든 욕심은 이 세상에서 한번 잘 살아보자는허망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 만사 형통, 만사 성취한 "창조자의 아들들"의 신분과 위치에서 그런 것은 썩 어울리지 않는 행티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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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② 마지막 아담께서 자신을 송두리째 내게 선물로 나의 소유(所有)로 주셔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줄 알았으니(창조주이시니까 이미 설명한 대로 한 날 한 시 모든 인류를 위하시면서도 마치 나만 위하시듯 '개인'과 '전체'를 아울러 동시에 상관하심이 가능하시고도 남습니다), 이제는 나도 당연히 머리되시는 이 분을 위해서만 전적으로 살고 나 자신을 위해서는 추호도 살지 않으리라는 것이(갈 2:20, 고후 5:15) "회개"요 "믿음"으로서 오늘 내가 "창조주의 아들"이 되는 요건인즉, 이러한 결단이 섰으면 인생들의 마음을 다 아시고도 남으시는 창조주이신지라 충분히 알고 계실 터이니까 지금 곧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감사와 사랑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가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수시로 꾸준히 듣기로 작정하는 것이 당연 순서입니다. 무슨 말씀(가르치심)이든 있으실 것이니까. 이렇게 말씀 듣는 것이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말씀의 기조 정도의 윤곽입니다. 그러나 마음(사랑) 가운데의 결단(작정)이 핵심이므로 이 결심만 확고하다면 설혹 이 시간 무슨 변고가 생겨 목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그래서 세례를 받을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는 한이 나더라도 죄는 용서되고 아버지(어버이)로서의 창조주의 품안에 안기게 됩니다. 무조건적 영생입니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를 주시는 경우 생존해 있는 자로서의 모든 필요한 조건을 채우는 것이 거룩하신 그 분의 뜻이므로 이 마땅한 책무를 다하기에 다시 말해 나를 위하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 분을 위해 사는 책무를 다해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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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③ 나의 소유가 되어 계시니까 365일 24시간 나를 떠나시지 않고 나와 함께 영원히 사시게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아담"의 의미입니다. 왜냐면 육체로서의 "첫 사람 아담"의 의미와 같기 때문입니다. 바로 365일 24시간 영원히 첫 아담의 육체를 내가 입고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동물의 형상이 아닌 "사람"인 것처럼. 후자는 육체로 그러하고, 전자는 영(성령)으로 그러하시다는 그 차이뿐이니까.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으로 설명이 되니까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진행되도록 미리 정하신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첫 아담 하나만으로 충분하고 더 이상 창조가 필요 없는 것인데, 창조를 다 마치신 다음에 생긴 불상사가 아담의 범죄요 죽음인 것입니다. 여유도 두지 않고 곧바로 범죄가 시작되고 죽음이 오고 창조가 망가지게 된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사람을 지으셨는데 죽어버리게 되니 창조주의 뜻에서 완전히 빗나간 것이요 그래서 "망가졌다"고 하는 것. 이 망가진 것을 새로 시작하시는 데에는 친히 피조물 인간이 되시는 방법 외에는 없으므로 "마지막 아담"이라는 순서가 자동적으로 정해진 것뿐입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짝의 원리 즉 3위1체의 법칙대로 하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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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④ 그러나 성경을 읽노라면 두서넛 잘못된 번역이(지금 지적하려는 것은 번역이라기보다 해석상의 문제)이 있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다름아니라 "우리를 위하신" 죽음을 "우리를 대신하신" 죽음이라고 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구미(歐美) 신학의 여파입니다. "대신하여 죽는다"는 의미는 A가 죽을 것을 B가 죽음으로써 그 대신 A는 죽지 않는다는 뜻ㅡ이것은 인위적인 교리로서 성경과는 전연 배치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르치는 AB 관계는, 이미 죽어 있는 A를 살리기 위해 죽지 않은 또는 영원히 죽지 않는 B가 A를 살리려면 A의 죽음과 같이 되어 일부러 죽어 주어야 하므로 A의 죽음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간 것을 말하고, 따라서 죽을 필요가 없는 B인데도 A를 위해서 죽었으므로 그 죽음이 영속적이어야 할 아무 정당성이 없어 다시 살아날 권리가 있되 한 번 B를 위해 죽었으니까 스스로 살아날 수는 없고 B와 하나된 C(아버지)가 B(아들)를 살리실 때 B와 이제는 하나가 되어 있는(죽을 필요가 없는 B가 A와 하나되기 위해 죽으신 것이 기정사실화 했으므로) A도 함께 살아나게 되었다는 그 뜻입니다. 다른 잘못된 번역은 바르게 고쳐 읽으면 되지만 이 부분만큼은 핵심을 건드리는 것이니까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