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sns에 올린 전도문 (2)

Tayseek Kwon 2019. 4. 9. 16:34




sns에 올린 전도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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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결론은 인간의 현재 위치가 애초 창조 때와는 아주 딴판으로 망가졌다는데 있고, 정상 아닌 비정상, 생명 아닌 죽음과 저주, 행복이 사라진 다음의 불행 일색이라는 것. 정상으로 복귀하는 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하는 성경의 정의를 지금까지 절대 다수가 왜곡해 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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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① 여기서는 토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사실 관계만 적시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래, 내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오직 오늘만이 확실한 "하루살이"의 비극 속에 처해진 현재 내가 당장 구원되는 것 즉 원상 복구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ㅡ첫 창조가 망가졌으니까 <새로운 창조(新創造)>, 인간으로 태어나도 태어난 즉시 죽음으로 무자비하게 끌려가는 판인 인생이니 <다시 출생할(再出生)> 필요성이 절박하다, 바로 이 뜻입니다. 창조와 출생의 성격상 나의 자유 의지로 나고 싶어서, 내가 힘들이고 공들여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새 창조, 재 출생도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내 스스로의 노력과 공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창조의 손길만이 절대적입니다.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그렇습니다. 거기 나의 힘, 의지, 피나는 노력 등은 일절 없습니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은혜(grace)", "선물(gift)"입니다. 내 돈 주고 얻으면 사는 것이요 내가 힘들여 이루었으면 당연히 받을 보상이지만, 그렇지 않고 소유할 때에 한해서 은혜를 입었다, 거저 얻은 선사였다는 말이 통합니다. '주니까' '받으면' 끝납니다. 몇 시간 또는 며칠 후에 받는 것도 아니고 이 시간에 모든 주고 받음의 동작은 종료됩니다. 내가 거절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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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② 단 한 가지 유일한 조건이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ㅡ절대 다수가 오해하여 실로 엉뚱한 해석을 하는 바람에 영원한 생사가 달려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 요건이 무엇이냐, "돌이켜, 전향하여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다른데 있지 않고 <사랑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데에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엄마의 사랑의 품속에서 생장하기 때문. 그게 무슨 대단한 요건이 되느냐, 사랑을 누가 몰라서ㅡ그냥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살면 사는 것이지 사는 데에 무슨 법칙이란 것이 있느냐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랑에 법이 있습니다. 사랑이 생명의 핵이므로 그렇습니다. 고로 사랑의 법이 곧 생명의 법, 삶의 법칙이 사랑의 법칙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엄마 없으면 못산다 하고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금방 울음을 터뜨리는 바로 그것이 어린 아이가 나타내는 엄마에 대한 절대적 사랑입니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가장 근본이 되는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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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③ 한 몸됨의 이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면 갑 없이는 을의 삶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둘이 하나이므로 그 짝이 되는 것이 없으면 바로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의미가 되는 까닭에 당연한 결과요 결론입니다. 왜냐면 내가 나 자신을 볼 수 없고 내 이웃이 나를 나보다 더 잘 보아 주는데 그런 이웃이 없어지면 바로 내가 없어지는 것과 같이 되는 까닭입니다. 머리가 없으면 몸이, 몸이 없으면 머리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고 영원히 한 몸으로서의 신체 기능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이 이치, 그래서너 없으면 내가 없고 너 없이 내가 못살고 나 없이 네가 못살 수가 없다 이렇게 됩니다.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이제 나는 못산다 하고 딴에는 대성통곡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엄마가 무엇을 시키면 이의 없이 따릅니다. 차츰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랑이 식어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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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④ 창조주께서는 창조하시는 순간부터 이미 피조물 없으면 존재가 불가능한 구조의 틀 속에 스스로 들어가시자신을 영원히 가두어 버리신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자기 분신이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여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관계로 스스로를 속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자"의 정확한 개념입니다. 달리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오직 유일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창조주를 잘못 설정하고 180도로 거꾸로 이해한 것입니다. 자아중심의 인간처럼 오해하고 그리고 왜곡하여 자기를 세뇌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선물'로서 '값 없이' 베푸시는 원상 복구 즉 "구원"인데 오직 유일하게 요구되는 것이 이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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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고로 모든 인류에게 대한 창조자의 명령이 있습니다. "믿으라"가 아니라, "회개하라(뉘우쳐라, 돌이켜라, 회오하라)"이니, 사랑과 삶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한 데에서부터 180도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으로 입증되었듯이 이 우주는 철두철미하게 법칙을 따라 시계톱니바퀴처럼 엄중 엄격하게 한 치 오차 없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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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①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심은 대로, 뿌린 대로 거둡니다. 콩 심은 데에 팥 나지 않습니다. 생명(삶)의 법대로 하지 않아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런 '결과'를 알고도 또 다시 그런 '원인'을 만들진대 참으로 그 사람은 구제 불능이라는 뜻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이 세상에서 선을 쌓으면 후세에서도 선을 거둔다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자연법칙을 어기고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생존 불능이듯이 삶의 법을 따라 사니까 그것이 선(善, 좋은 것)이 되고 의(義)가 된다는 것뿐. 이 법칙을 무시하고서는 인생 중 그 어느 누구든 선과 의를 행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머리가 있음으로써 몸이 비로소 있듯이 머리가 여기서 핵심 주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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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② 인류의 머리요 어버이가 되는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여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머리'를 어디서 찾을 것이냐. 머리가 핵심이고 절대 필요불가결한것이니, 머리 없이는 이미 설명한 대로의 이상적인 삶의 체제를 형성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창조자께서 머리이시고 어버이심은 만고 불변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친히 그런 위치에서 시작하지 않으시고 따로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그를 만물의 머리로 세우신 이상 또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구조라고 정하신 이상에는 그 체제를 따라야 함이니, 왜냐면 인간은 처음부터의 영물(靈物)도 아니고 더더욱이 창조자와 같은 체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인간만이 지닌 특수성에 들어맞는 요건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어버이로서의 창조주의 사랑의 결단이 내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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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③ 앞에서 3위1체의 법칙을 모자(母子) 관계로 설명했지만 창조주 친히 이런 모자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와 같이 모자 관계로 친히 존재하시는 모습을 기반으로 하여 만유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짝의 원리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고로 3위1체의 법칙은 만유 창조의 원리요, 만유 존립의 원리, 삶(사랑)의 원리로서 두루 통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때문에 만유(무릇 존재하는 것)의 법칙(the universal law)으로 통합니다. 모든 법칙의 큰 줄거리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분화되어 아래로 내려갈수록 복잡다단해지고 전문가적 지식이 요구되는 등 그 때부터는 일반인의 영역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법일귀(萬法一歸)라 결국 큰 맥은 단 하나이므로 이 하나만 따라가면 되는 까닭에 가닥을 잡아가면 역시 쉽게 풀어지는 특징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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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④ 그러면 성경에 왜 "아버지"와 "아들"로서 창조주를 묘사하느냐.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하여 통일성 있게 일관되게 설명할 수밖에 없어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미 남녀 성별로 분류되어 있고 아담이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명할 때에는 골고루 섞어 "모자 관계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그 위에 다시 상위(上位) 분이 계시니, '창조주'로서 모든 것이 끝이고 그 위로는 우리 인간의 상상을 절(絶)한다, 끊어진다고 하면 더 다시 물을 것도 말 것도 없는데도, 다시 그 위(上)가 존재하니 아주 여유 만만하고 여백이 충만, 충분하다고 해야 할 그런 모양새입니다. 결단코 빠듯하지 않은 유연성, 융통성이라 할까ㅡ. 어쨌든 "아들"께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피조물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 '빈 자리'가 되어 버린 아담의 위치를 메우시게 된 것입니다. 창조주로서 그 피조물 중 하나가 스스로 되신다는 것은 <어버이 사랑>이 아니고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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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이 경우 '머리'로서의 아담의 역할이 무엇인가. 범죄하여 죽음을 자초한 결과 죽은 자(자연계 속한)가 되어 버린 인간(모든 인생들)의 죽음의 고난에 똑같이 함께 해야 하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 왜냐 하면 한 몸의 체제는 고통도 영광도 모두 다 함께 공유(共有)하는 구조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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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① 창조주 친히 사람이 되시는 것은 "궐위"가 된 아담이 되시고자 함인데 첫 사람 아담에 대비, "마지막 아담"이시라 합니다. 양면 원리에서 하나가 폐해지면 다른 하나가 자리를 메우는데 그 이상 되풀이될 수 없고(짝으로만 이루어지니까) 오직 이번 단 한 번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입니다. 그냥 사람이 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인생과 똑같이 되심을 의미함이니 즉 삶의 법을 거역한 모든 인생들이므로 죽음밖에 없는 그 죽음을 <함께> 당하셔야만, 그래서 우리 인생과 하나 즉 한 몸이 되셔야만, 그렇게 해서 성립된 '하나됨'을 인하여 내가 그 분(사람되신)의 생명과 하나됨으로써(마지막 아담께서는 나를 위해 일부러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는 것뿐이지 나처럼 죽음 가운데 계시는 것은 아니므로 바로 그 생명) 내가 이 죽음의 처지를 벗어나 그 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논리 정연한 합리적 바탕을 이루게 됨입니다. 바로 생명의 법칙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3위1체의 법칙은 우리의 구원에서는 '구원의 원리'가 됩니다. 법칙이니까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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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② 바로 이것이 창조자의 위치에서는 아무리 우리의 '머리'되시고 '어버이'되셔도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이유, 사람이 되실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입니다. 왜냐면 나와 똑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받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고통의 운명을 함께 하셔야 되기 때문인데 이는 친히 사람이 되시지 않고는 안되기 때문. 말이야 "새 창조"이고 "재 출생"으로서 간단하지만, 이와 같이 창조주로서 형언할 수 없는 극통(極痛)이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가 없는 것이 인간 구원입니다. 삶의 핵심이 사랑이므로 창조주로서의 '어버이' 사랑(만유를 낳으셨기 때문에), 몸에 대한 한 몸으로서의 '머리' 사랑이(이미 창조의 일을 하신 후라 피조물과 영원한 머리/몸의 불가분의 관계에 위치하시므로) 나타낸 경이(驚異)입니다. 물론 이런 사태를 다 예견하셨지만, 실제 일을 당하시는 것과는 별개일 수밖에 없습니다. 초지 일관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그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인생들)을 이처럼 사랑하시어..."(요한복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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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③ 만일 창조주께서 둘이 하나됨의 모자 관계로 계시지 않고 홀로 계셨다면 이런 일이 불가능하셨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되어 계심은 가장 안정적인 모양새라는 것으로서, 바로 이 모습대로 만유를 창조하셨고 유지하고 계시며 가장 이상적인 삶의 법도가 이 '둘이 하나됨'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께서 홀로 우리 위해 죽음의 고난 당하시고 아버지께서는 그냥 보고만 계셨는가. 그렇기 때문에 '둘의 하나됨'입니다. 우리 홀로 고난 받든지 말든지 그냥 두시지 못하고 친히 우리와 함께 죽음의 고통을 함께 하신 것처럼, 아버지 역시 아들께서 우리 위해 당하시는 죽음의 고난에 함께 하신 것은 물론입니다. 이 둘의 하나도심은 실체와 형체(형상) 관계이기도 한 때문. 우리 인간의 구조 또한 그러하니 실체는 영혼이요 형체는 우리 육체입니다. 전자는 초자연계에 속하고 후자는 자연계에 속했으나 나중에 전자로 인하여 후자 역시 자동적으로 초자연계에 속하게 되어 초자연계적 육체가 된 것인데, 범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자(생명의 법을 어기니 죽음밖에 결말이 날 것이 없어) 아담의 경우 죽음은 원래의 자연계 육체로 환원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현재와 같은 자연계 존재로 전락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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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④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창조주로서의 원래 속성을 상실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고 한 번 그렇게 사람되시면 영원불변이시므로 사람이신 것이지, 영원부터 영원까지 창조주의 속성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원히 사람이시니까 말하자면 볼 수 없는 창조주의 속성이 볼 수 있는 피조물 인간의 속성을 가미하신 셈이므로, 이제는 "볼 수 있는 창조주"라 해도 그리 큰 하자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이 되어 계시는 아들께서는 볼 수 없는 창조주의 (이제는) 볼 수 있는 형상이시기 때문. 창조주로서의 속성이 영원히 변하심이 없어야 우리 위해 당하신 죽음의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 얻는 의미가 영원히 유지가 되는 것이니, 창조주와 인간( 또는 피조물)의 차이는 영과 육(체)의 차이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초자연계 존재는 그 초자연계 육체로 되어 있는데도 이런 상태를 "영"이라 하는 것은 자연계 속성인 인간을 기준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창조주로서의 "영(靈)"의 의미는 피조물로서의 영의 의미와는 사뭇 달라, 이 모든 우주 안에(in), 위에(above) 그리고 속속들이 관통해(through)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시 말해 최소의 미립자에서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런 최미소의 입자에 대한 관심과 한 덩어리로서의 우주 전체에 대한 관심이 동시에 가능하신 창조주께만 가능한 유일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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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따라서 그러한 영으로 존재하시므로 일시에 그 누구에게든 현재의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일지라도 동시에 일대일로 상대하실 수 있고 마치 나와만 1년 365일 24시간 함께 사시는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하실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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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① 아들께서는 사람이 되셨지만 아버지와 둘이 하나로서 계심이 그러하므로, 만약에 지금 나와 같은 육체로 다시 세상에 오셔서 계시는 경우 한 날 한 시 세계 어느 곳에서든 모든 인간 개개인에게 바로 내 앞에 계시어 대화하시고 상관하시는 것과 똑같이 한 치 차질 없이 꼭 그대로 수행하실 수 있는 이런 것이 창조주의 특성이십니다. 창조주의 속성이 없으시고 사람만으로 계신다면 이런 일이 불가능하므로 우리에게 구원이 되실 수가 없는 것은 명약관화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육체로서 만인간 즉 그 숫자가 몇 백억이 되든 상관 없이 그 육체를 물려주는 것이고 이것을 "육체로 나는(to be born of the flesh)" 것이라 하는 반면, 마지막 아담께서는 창조주로서의 자기 영을 "물려 주시는" 것이기에 이를 가리켜 "영(성령)으로 나는(to be born of the spirit)" 것이라 합니다. 재출생(再出生, 다시 출생하는 것, to be born AGAIN)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말이 "물려주시는" 것이지 방금 설명대로의 창조주로서의 영이시므로 아들의 경우 사람이 되신 그 모습 그 육체 그대로 내 안에 오시고 계실 수 있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들께서는 사람이시자 창조자이시므로 100% 가능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시자 하나님,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란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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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② "다시 출생하는" 것은 그렇고 "새로 창조되는" 것은 또 무엇이냐ㅡ아들께서 그 성령(聖靈, Holy Spirit)으로 내게 임하여 오시어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는 앞서 설명한 사실을 창조 차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애초 아담을 창조하실 때 먼저 자연계 육체를 창조주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신 후 다음 단계로 그 아담에게다 영(혼)을 불어넣으신(숨을 내쉬심으로써) 것입니다. 이리하여 첫 인간이 탄생한 것인데, 바로 이와 똑같은 과정이 우리의 재출생이므로 그래서 "새 창조"라 합니다. 아들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은 실제 영원히 죽으심인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심으로 비로소 다시 살아나신 것이니,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둘의 하나됨'의 원리는 모자 관계로서 때문에 이를 가리켜 인과, 주종, 대소, 선후 관계라 합니다. 다시 말해 먼저 있던 갑은 크고 주동이 되고 '원인'으로서의 모자 관계인즉 을은 갑으로부터 나왔으니까 상대적으로 작고 '결과'로서 큰 것을 따르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고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니까 아들을 살리심이 가능해집니다. 아들은 우리 위해 죽으셨지만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니까 죽으신 아들께서 살아 계시는 아버지를 따르게 마련이라는 이치입니다. 절대로 죽음의 시늉만 내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살리시지 않았다면 영원히 죽어 계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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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③ 아들께서 지금까지의 설명처럼 아담이 되시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해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 위해 죽으셨으므로 그러한 마지막 아담으로서는 다시 살아나실 수밖에 없음이니, 왜냐면 범죄하여 죽은 아담의 위치에서 그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을 다 치른 마당에서는 다시 이전의 생명을 되찾는 순서가 당연 순서일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실 때의 그 부활하시던 때의 모습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우리와 같은 자연계 육체의 모습으로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실 때에는 완벽한 초자연계 육체의 모습이셨습니다. 여러 장정이 힘을 합쳐야 굴리어 옮길 정도의 육중한 무덤 돌 문을 거침없이 통과하셨습니다. 초자연계의 몸이 원래 그러합니다. 다시 살아나신 후 나타내신 행보가 완전히 초자연계 몸의 그것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죽기 전 즉 이 자연계 몸이 되지 않았을 때는 이러한 초자연계 존재로서의 속성 그대로였음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공중 부양으로 지구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오늘날 초자연계 존재인 UFO가 나타내는 속성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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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④ 이 분이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