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자유를 구가한답시고 무신론의 기치를 신나게 흔들어대지만 이미 악신(惡神)의 굴레에 매인 그 꼭두각시 놀음인 줄 왜 모르나

Tayseek Kwon 2016. 11. 10. 10:20





너무 고통스러워 죽으려 해도 영원히 죽지 못하거나 영원히 삶의 낙만을 누리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되는 영원한 초자연계 인간 시대가 곧 도래하는 바, 오늘의 세상은 그 영원한 때를 인생 각자 스스로 가름하는 즉 자기 운명을 직접 정하는 기간 이외 아무 의미도 없다. 강조하거니와, 이 세상만으로 끝이 아니니 양면성의 세계로서 자연계와 초자연계 즉 일시적인 한정성과 영원성의 대립 관계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온갖 것이 있어도 이러한 유일한 의미의 일시적 목적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할 뿐. 세계 대통령을 해먹었다고 그 영원 세계에 가서 눈곱만큼이라도 더 알아주지 않는다. 오직 이런 구차스럽고 연악한 임시 방편적인 육체로 있을 때에 과연 선하게(좋은 것을 따라) 의롭게(올바른 것을 따라) 인생의 향방을 정해놓고 시종일관했느냐 여부로써만 미래 세계가 결정되는 것이(고후 5:10), 3위1체의 법칙이 가리키는 바 만유의 대칭성 원리의 의미이다.


자연계에 속한 현재의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선하게 의롭게 만들 수 없다.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다 해도 불가능하다. 자연계는 자연계로 끝나는 것이다. 초자연계 육체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어야 함이 따라서 급선무이고 일차적 과제다. 영원한 생사를 가름하는 이 새 창조, 재 출생 작업의 기본 토대가 이미 닦여져 있기 때문이다. 곧 인류 개개인 다시 말해 당신과 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현재 이런 자연계 육체ㅡ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선상의 생명체가 되어 있으므로 초자연계 몸부터 되는 것이 시급하고 필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초자연계 존재였다. 유튜브(youtube)에 의해 오늘날 곳곳에 홍보되고 있는 초자연계 현상(소위 ufo를 포함하여)들이 그 방증이다. 즉 자연계와 대칭되는 초자연계가 엄존하고 그 생명체가 자연계 존재와 함께 그렇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증거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자연계에만 국한된 지극히 편협된 비극적인 시각만을 고집했다. 우주는 덧없다(無常)는 데에서부터 시작된 불교 역시 그러한 예다. 이제는 만유가 대칭성 원리로써 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아야 할 때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필수 불가결이다.


초자연계 몸의 자유 의지로써 선(좋은 것) 대신 악(좋지 않은 것 즉 나쁜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자연계 몸이 된, '자초한 비극적 결말'이 오늘의 인간고(人間苦)다. 고로 초자연계적 원래의 몸으로 회복된 다음에 "선"과 "악"을 묻는 것이 마땅하다. 초자연계 몸으로서의 악인이냐, 의인(선인)이나 하는 것이 비로소 가름된다는 뜻이다. 고로 첫 사람 아담과 하나가 되어 모든 인간이 인간의(동물이 아닌) 육체를 입음과 같이 즉 자연계 육체의 존재가 되어 있음과 같이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야 자연계 육체로부터 탈피, 초자연계 육체가 되는 바탕을 형성, 애초의 상태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필연적인 이러한 회복 절차를 무시하고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경우 싫든 좋든 자동적으로 초자연계 몸의 존재로 환원되는 것이나 생명 아닌 생명과 대칭되는 죽음 다시 말해 영원한 고통만이 태이게 됨은 필지이다. 이 경우 "회복"이 아닌 "환원"일 뿐이다. 회복은 원래의 생명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생명 아닌 죽음의 고통일진대 그냥 초자연계 몸으로서 존재하기는 하되 원래의 생명의 상태가 아닌 그 정반대가 되므로 초자연계 몸이 되었다는 의미만으로 끝나는지라 환원으로만 그침이다.


인생들이여, 현실을 직시하시라. 실상을 직시하시라. 지금까지 허상만을 보아 온 것이다. 지금까지 속아 온 것이다. 신(神)의 존재 유무는 인간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미 악신(惡神)의 수종에 완전히 사로잡혀 철통 같은 지배 아래 놓여 있어 꼼짝없이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인간의 현실이요 실상이다. 재차 언급하기니와, ufo가 그 증거다. 소위 "외계인"으로 위장하여 다시 인간을 속이고 있는 그 적나라한 형태다. 포수에게 쫓기는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현실을 억지로 외면하려 한다고 해서 그 현실이 가상의 세계가 되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명령하면 귀신은 복종하고 물러간다. 쫓겨간다. 이것이 참된 퇴마(악마를 퇴출시키는, 쫓아내는)다. 소위 "퇴마사"라고 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이것은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저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저들끼리 해 먹는 속임수다. 소위 "퇴마"하는 이들의 속에 있는 영(그 영은 그 퇴마사 자신의 영 곧 인간의 영이 아닌 전혀 별개의 영 즉 악령이 자리잡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과 "쫓겨가는" 영들과의 교감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들의 목적은 속이는데 있고 그리하여 인생들을 어찌 하든 구원되지(영생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데 있으니까.


"주님(또는 주)"이란 말은 주인(主人)이라는 의미 곧 나를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 상전이란 뜻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일방적인 소유물 또는 종의 위치가 아니라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에서의 상호 교류에 의한 주종 관계다. 한 몸 관계에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바로 그 관계다. 어느 쪽도 자기를 위함이 없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불가결한 존재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몸은 머리에게 종 노릇이요 머리는 몸에게 종 노릇이다.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따라서 주인이 되어 있다. 섬김을 받으니까.


이 '둘이 하나됨'을 가리켜 "사랑"이라 한다. 이 '둘의 하나됨'의 3위1체의 법칙이 물리학적으로 표현될 때 닐스 보어(노벨 물리학 수상자,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에서 더욱 유명해짐)의 상보성 원리로 나타난다. 저 유명한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의 두 소립자(짝을 이룬) 간의 "엎스핀(up spin)"과 "다운스핀(down spin)"의 현상도 이에서 나온 것이다. 즉 상보성 원리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음양조화"라고 하여 한중일(韓中日) 동양 3국에서 생활화하고 의식화되어 있는 이원론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단지 여기서 핵심 사항인 양(兩)자간의 인과, 주종, 대소, 선후 관계를 밝히지 못하여 과학적 검증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법칙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이 사실이 3위1체의 법칙으로 넉넉히 입증됨에 이른 것이다. 3위1체의 법칙으로써 자연계와 대칭을 이루는 초자연계의 존립이 입증되었지만 3위1체의 법칙은 자연계 현상으로는 검증 불가능한 것이다. 초자연계와 관련된 것은 세계가 전혀 반대라 다르기 때문에 한계 밖이요 영역 밖이다. 오직 한 가지 수단밖에 없으니, 이를 최종적으로 검증하는 매개 또는 수단이 되는 것이 인간 생애를 3가지로만 한정해서 분류하여 철통같이 통제, 지배하는 3운법칙이다. 3운법칙으로 이 난제가 해결된 것이다. 인간의 생애를 자로 재듯이 마름질한다는 것은 자연 현상에 속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3가지로만 분류되는 것은 바로 3위1체의 원리를 여실히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즉 그 구조 자체가 3위1체 법칙의 구조식 또는 도식(圖式)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만유가 이 3위1체 법칙의 "둘이 하나"됨에서 벗어나지 않는 까닭이다.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과 삶의 법칙이기도 함은 당연하다. 이 '둘의 하나됨'에서 '머리'와 '몸'의 '한 몸'됨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삶(생명)의 근간이요 뼈대다. 때문에 당연히 인간의 구원도 이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래서 '머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친히 몸을 위하고 섬기고 몸에게 종 노릇함의 증거가 바로 인류를 위한 십자가 죽으심의 고통 받으심인 것.


다시 말해 우리에게 종이 되시고 우리를 주인(상전)으로 섬기심으로써 주인이 되심이니, 우리 각자 이에 감화 감동되어 즉 이 본을 따라 스스로를 종으로 인식, 사랑 가운데에서 종 노릇하게 만드시는 것, 이보다 더 이상적인 관계는 없고 삶의 양식,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양쪽이 동시에 주인이면서 종이 됨이니 이 상호 교류를 3위1체 법칙의 "양면성의 동시성"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독재냐 민주냐 하고 따질 필요가 없게 된다. 아무리 독재자라도 그가 '종으로서 섬기는 주인'일진대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까닭이다. 아무리 민주라 하더라도 이런 관계를 형성함이 없이 각자 주인되려 하고 종 노릇은 기어이 기피하려는 자아중심일 때 콩가루 집안 사분오열이 됨으로써 차라리 사리사욕인 독재보다도 못하게 됨이다. 그래도 독재는 일조유사시에 뭉치기라도 하여 자위책을 강구할 수 있지만 각자 모래 알 같이 흩어져 있으면 그조차도 불가능한 까닭이다.


세계 그 어느 종교도 철학도 이런 삶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에서는 최고 유일의 어버이로서의 머리가 되실 수밖에 없는 창조자를 인정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이 세상을 지배해 오고 있는 악신(선신이 아닌) 악마가 인생을 철권 통치하여 눈을 어둡게 함으로써 숨겨 놓으니 알 턱이 없다. 왜 이런 불법적인 악신(惡神)이 용납되느냐 하면 인간(첫 사람 아담)의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방금 설명한 대로의 삶과 사랑의 법칙을 어기고 즉 머리와 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머리가 되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이 악령과 동조했기 때문에 초래된 비극적 결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악령들의 행위는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이다. 왜냐면 그 나름대로의 필요악으로서의 구실이 있기 때문. 창조자께서 그들 악령들을 '악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역이용'하심이다. 악령들 스스로는 자기 자유 의지로써 자기의 사악한 계략을 획책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공정공평,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그들을 부분적인 도구로 삼아 인간 구원의 필요불가결한 요건들을 이루어 가심이다. 이는 악령들 자신도 이에 대하여 아무 불만을 토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 된다. 오직 악령들의 오만함이 스스로를 눈멀게 하고 망치는 것뿐이다.


그런즉 머리로서의 창조자를 시인하지 않는 판이라 이상 설명과 같은 이상적인 삶의 구도를 상상하기조차 힘들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가상적인 논리 안에서만 맴돈 것이 이제까지의 모든 종교다. 그리고 소위 "철학적 탐구"다. 그래도 임마누엘 칸트는 "요청적 유신론"에까지는 겨우 접근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무의미뿐이었으니 즉 진리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인간의(그의) 교만이 진리 탐구에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은 까닭이다. 악령들의 타락도 원래 아름다운 거룩한 천사들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나 그들의 출중함과 월등함에서 온 교만이 발목 잡은 결과다.


말의 논지는 다름아니라 악한 귀신들(악령들이 인간 여자들과 교접하여 낳은 자식들이 죽어 방황하는 넋들)이 쫓겨가는 것은 이 둘의 하나됨의 이치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악령들(여기서 귀신의 모체로서의 "악령"과는 구별해야)을 명령하여 쫓아내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과 '둘이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심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이 애초 초자연계 몸이었으므로 그 위치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회복해 계심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이 되시어 영원히 사람으로 계시므로 사람이시라는 사실에 방점을 두는 것이지 더 이상 하나님으로서의 위상으로서는 언급되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측면으로는 각자에게 똑같이(이것은 육체에 매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 성령으로 임하여 오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각 사람의 속에 영으로서(나의 영혼처럼) 내재(內在)해 계심으로써 나와 '둘이 하나됨'을 이루어(이 역시 육체인 인간으로서는 전연 불가능한 일) 계실 수 있다는 것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하게 되어 있음이다.


고로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마지막 아담과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마지막 아담의 권위를 거스를 우주 천하 그 어떤 존재도 없기 때문에 귀신이든 마귀이든 물러간다는 것이다(약 4:7). 이 세상 신 사탄도 에덴낙원에서 인간(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아담 수하(手河)에 있었던 것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마귀(이 악령을 별도로 지칭하는)에게 스스로 굴복해 들어와 오늘날 인간 세상이 이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된 연유가 되어 있지만 아담의 범죄 전에는 인간(아담)이 그의 절대적 상전이었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렇게 폐기되었던 아담의 위신과 권위를 회복하심으로써 사람되어 계시니 내가 이 마지막 아담과 문자 그대로 혼연 일치가 되어 있는데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마당에 어느 귀신 어느 장사가 감히 이 명령을 거스를 것인가. 끽소리 못하고 그대로 순종할 것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비결이 되고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 마지막 아담과 둘이 하나되어 머리와 몸 관계에서의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우리 각자는 그 권위와 권세가 어느 피조물도 범할 수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獨存)"이다.  


나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마지막 아담과의 '둘이 하나'되어 있는 실체로서의 권위 즉 마지막 아담의 권세인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위인데 왜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저 북한과 같이 갖은 모욕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느냐. 역시 같은 이치이니 즉 죽은(삶의 쾌락과 반대되는 것은 무조건 "죽음"으로 분류되는 것이 3위1체 법칙에 의한 법리) 죄인 살리기 위해서는 한 몸의 이치를 따름이기 때문이다. 몸의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그 고통이 모든 지체 전체에게 파급되는 것을 따름이다. 고로 현재 죽음의 죄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을 살리고 건져내려면 당연히 그리고 부득이 한 몸의 이치에서 그들의 죄의 고난에 동참으로써만 현실화하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이 뜻.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 성령을 받아 말 그대로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 있는 나는 나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몸을 위한 머리로서의 고난 고통에 당연히 참여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머리와 분리되어 서로 남남이라는 증거만 될 것뿐이다. 세상에서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살고 고통 없이 호의호식하며 지낸다는 것이 마귀의 발상이라는 여지 없는 증명이 여기에 있다. 그런 세상 삶을 사랑하는 자 치고 진리에 있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요즘 이단 사이비 사교 등으로 해서 세상이 시끄러운데 초자연적인 영의 활동이 사신(邪神)이냐 거룩한 천사 곧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냐 식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돈을 탐하고 사리사욕을 챙기고 재물에 눈독을 들일 때에는 그는 악령에 속한 것이다. 고로 식별법은 쉽다. 너무 간단한 것이다.


방금 설명한 한 몸의 이치에서 함께 고통 받는다는 이 의식에서 벗어나 나만은 편안하게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망념 속에 있는 한 그가 아무리 성경적 진실을 말해도 이미 그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 진리에 있지 않다. 진리에는 모순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만물이 지금까지 함께 고통한다"(롬 8:22)고 못을 박은 것이다. 고통도 보통 고난이 아니다. 해산의 고통이다. 자고 이래 아이 낳아보지 않는 이 없다(거의) 하겠는데 그 고통은 몇 안되는 최악의 고통 중 하나임을 모두 경험하고 있다. 저주의 결과다(창 3:16).


세상이 이러한 고통 중에 굴러온 것은 바로 이 목적 곧 인간 구원에 있고 이 외에는 그 어떤 이유도 없는 것임을 알아야. 고로 생명은 마지막 아담과의 둘이 하나됨에 있는 것이고 그 외로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삶의 방법은 머리와 몸의 한 몸으로 하나됨에 있는 것이고 그 외에는 우주 천하 그 어떤 것도 없는 줄을 알아야. 이렇게 명명백백한 삶의 지침이 지금까지 가려져 온 것은 이 세상 신의 장중에 놓은 인간의 노예 상태에 기인한 것임을 알아야.


3위1체의 법칙이 알려지고 3운법칙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도 바로 이 사실을 밝힘에 있다. DPA pix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이니  그렇지 않다면 그런 것이 필자에게 나타나질 수가 없다. 그런 작업을 하고도 촬영자가 해를 입지 않고 무사하게 되는 것도 목적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진실과 진리를 마지막으로(인생들이 미련함으로 인한 자업자득에 의한 현재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알리시려는 창조자의 거룩한, 자비에 넘치는 배려에 의해서인 것이다.


생명 자체가 이와 같이 마지막 아담과의 둘이 하나됨에 있으므로 이 고통의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인간 구원만이 목적이고 여기에만 의의가 있으므로, 인간 구원에는 이러한 한 몸됨의 이치가 필연적으로 적둉되므로, 죄인으로서의 고통을 함께 하는 가운데 구원 즉 새 창조와 새 출생이 가능해지므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고통이요 고난인 것이다. 세상 사람은 진리를 알지 못해 하나님도 모르고 초자연계 즉 장차 오는 세계도 몰라 단지 이 세상뿐인 것으로만 착각하여 버둥거리고 발버둥치고 아비규환으로 이 세상 살고자 하고 그래서 세상을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것이나, 마지막 아담 안에 있어 생명 가운데 있는 자로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구는 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이다(고후 6:1). 왜 그러냐 하면 나는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 있어 마지막 아담께서 아직까지 사람들 구원하는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심 그대로다. 나는 그 몸으로서 당연히 머리와 함께 함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이지 몸 마음대로 하는 일이 없고 되는 일도 아니다. 영으로 계시므로 육체처럼 음성으로 기타 무엇으로 지시하시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종이면서 동시에 주인이다. 이 역시 양면성으로서의 동시성이다.


동시성이라 함은 양면이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됨의 기본이다. 고로 주인만의 일방적인 행위가 전부가 아니고 몸으로서의 주체의식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이 함께 하는 '하나'이다. 따라서 내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주인님께 일일이 여쭙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다(살전 5:17). 그렇지 않으면 내 생명이 없다. 다시 말해 내 존재가 없다는 의미다. 


이는 사랑의 주체성을 말한다. 일방적인 것은 사랑이 아니다. 불쌍해서 거지에게 몇 푼 던져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런 일방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구원을 오해하는 이 절대 다수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구원이 되지 않는다. 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이 사랑이 주체 의식이다. 구원은 "공짜로" 받아 놓았으니까 내 아음대로 이 세상 살다가(여전히 자기 사랑만 있고 하나님 사랑은 없이) 천국 가겠다는 망상을 품는 것이다. 동시에 함께 움직이는 양면성임을 망각하고 있다. 사랑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주체 의식이다. 그래서 "천국"은 "쳐들어가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신 것이다(마 11:12/눅 16:16).   


때문에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가 석승마(席勝魔, "시셩모")라는 별명답게 귀신을 쫓아내려 하는데 주님께 이전처럼 기도하지 않고 행동했더니 귀신이 이를 먼저 알고 "방금 전에는 네가 하늘처럼 높더니 이제는 내 발톱의 때만도 못하구나" 하고 길길이 날뛴 것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면 주님께 기도하는 즉 몸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산 자가 아닌 죽은 자, 존재하는 자가 아닌 존재하지 않는 자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귀신이 먼저 알고 그와 같이 기고만장 날뛰며 도리어 호통을 친 것이다. 그렇다. 마지막 아담과 둘이 하나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산 자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죽은 자로서는 존재한다. 죽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산 자로 살기 위해 창조되었다면, 사는 것이 아닐진대 존재하지 않는 자이지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귀신 앞에서 그와 같이 "무존재(無存在)"로 무시당한 것이다.


사랑의 고난을 인내(patience, longsuffering)로써 감당하되 불의, 불법, 악, 죄에 대한 사무치는 증오로써 인내하라. 나를 직접 해치는 인간에 대한 증오가 아니다. 그들은 한 때 나처럼 아무 것도 몰라 철없이 저지르고 있는 행위이다. 그들도 안다면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못박히실 때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십시오", 스데반도 돌무더기 속에서 숨져 가면서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ㅡ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이유다. 우리는 진리를 알지만 그들은 모른다. 불쌍히 생각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어찌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진리를 안다" 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