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지금은 "이가봇"의 수치를 씻고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아야 하는 때

Tayseek Kwon 2019. 1. 31. 05:10


중복되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사람 사는 법은 간단해요.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봄에 있어요.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없으니 네가 봐주고 너는 내가 봐주고. 내 등 뒤에 오물이 묻어 있어도 나는 보지 못하나 네가 봐줄 수 있고 나도 너를 봐줄 수 있고. 그래서 너 없이는 내가 못살고 나 없이는 너 역시 그렇고. 이렇게 서로 필요불가결한 존재로 살도록 되어 있어요. 이 상호간의 필요불가결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한 몸 체제의 삶의 방식(법)이라 해요. 더 정확히,머리와 몸의 구조.


머리와 몸 관계를 보면 철두철미 상호작용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되 철저하다는 것은 절대로 어느 누구도 자기를 위함이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이 엄격성은 법질서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 신체는 물질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그렇게 되지만 자유의지를 구사하는 이지적인 인간은 자기 선택에 의해 그렇게 한다는 차이가 있어요. 그 방식(법)이 좋아서 스스로 그 방법을 지키거나 아니면 필요 없다 판단하여 버리거나.


머리가 있기 때문에 몸이 있고 따라서 머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고 당연히 몸도 머리를 위함으로써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이치가 앞에서 말한 상호간 필요불가결성이지요. 눈이면 눈, 귀면 귀가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오로지 자기 외의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존재가 최상으로 부각되니 모두가 자기를 위하기 때문.

성경이 밝히는 삶의 이치, 사는 법이 바로 이런 한 몸됨의 법칙인 것입니다. 고로 코 또는 입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자기를 위하므로 모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따라서 온 몸 전체가 머리를 위시해서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비록 맨 아래에 위치한 발의 발톱이라 하더라도 머리를 비롯해 몸의 전부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원도 한도 없이 모든 주변의 섬김을 받는 그야말로 더 바랄 수 없는 최고 절정의 행복한 삶으로서 또한 평등.

이런 삶은 짝의 원리에서 만인의 섬김을 받으면서 동시에 만인을 섬기는 양면성의 동시성이 작용해요. 바로 이 삶의 이치, 생명의 법칙을 따라 초대교회는 유무상통한 것입니다(행 2:44/4:32). 신학생 카알 마르크스는 이러한 유무상통이라는 결과만 성경을 통해 읽었을 뿐, 한 몸을 구성하여 머리와 몸 체제로서의 '양면성의 동시성'의 새 창조로 다시 출생하는 (성경의 가르침) 그 원인을 간과하는 큰 불찰을 처음부터 범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실패의 이유입니다. 소련의 붕괴로 환멸의 비애만 느끼게 된 원인입니다. 일방적으로 받으려고만 했지 남에게 베푸려고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국민은 나태해지고 생산성이 저하되자 국가 경제는 나락으로 급전직하한 것.


고로 20세기 들어 최대 기형아인 공산주의의 무덤을 거름으로 삼고 울울창창하게 벋어나가야 하는 것이 21세기 교회의 유무상통입니다. 이 초대교회의 본을 되찾지 않는 한 교회의 존재 가치는 없어요. 머리되시는 대칭 아담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데 어찌 그 몸된 교회라 할 수 있나요. 초대교회는 그 분부를 잘 이행했지만 지금은 이가봇이 된 것입니다(삼상 4:21). 이제는 그 빼앗긴 법궤를 되찾아야 할 때입니다(삼하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