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4복음서 한 권으로 보기

메시아 예수님(마, 막, 눅, 요 복음서를 한꺼번에 보기)-(끝)

Tayseek Kwon 2015. 12. 29. 21:22

 


통관복음서(通觀福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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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메시아 예수님ㅡ


l. 탄생 
ll. 가르치심 
lll. 나의 죽음 
Ⅳ. 부활一새 피조물의 탄생, 새 삶의 시작
V. 마지막 아담ㅡ'또 하나의 나 자신(My Another Self)' 
Vl.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구약 성경의 의미) 
4복음서가 아닌 사도들의 서신에 나타난 메시아 죽으심의 의미 
Vll. 제5복음서(logia iesou)
Vlll.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
Ⅸ. 다른 시각에서 4복음서를 일괄해서 보기



다음에는"확대로마서" 차례로서, 사도들의 서신을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여 <한꺼번에 보기>입니다

확대 로마서 1, 2, 3 모두 아래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http://blog.daum.net/tri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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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희귀한 역사적 교훈을 우리 민족은 지니고 있는데 이를 어찌 외면하랴. 외면한다면 가장 소중한 자산 하나를 상실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빛을 보지 못하는 의로운 생각과 결단의 삶이 결국 어떤 결과를 이루어내고야 마는지 온 세계가 실로 경청해야 할 인류 최대의 교훈적 유산의 하나다. 공동체 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결과가 이렇게 가시적으로 극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일반 인생사이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모습을 똑똑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특전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의롭게 살려 하고 그 소신대로 사는 사람은 대개 백이면 백 이름없이 자취없이 소리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통례다. 이렇게 명확하게 그 결과로써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이공 역시 무명의 한 말단 관리로서 세상이 말하는 대로 "불우한" 생애를 마치고 복 없는(복이 태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또 우직하기만 하고 고집스럽기만 하고 세상 물정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주위의 핀잔 속에서 그냥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 터이다. 그렇다고 임진왜란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 민족적 참극 속에서도 이공과 같은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난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뿐이다.


이공이 평소에 나타낸 멸사봉공의 정신은 주위에서 아무도 알아 주는 이 없이 자기 신상에 갖가지 불이익만 낳았었다. 알아 주는 몇몇 지기(知己)도 그런 큰 동량 감이 썩어가는 것을 보는 안타까움만 토로하며 한숨만 내리 쉴 뿐 세태만 탓할 뿐이었다. 그러나 미증유의 국난이 그를 드러내 준 것이다. 모두가 몸을 사리고 갈팡질팡 하여 쥐 죽은 듯 했을 때 이순신의  그 정신만이 홀로 우뚝 서서 나라를 혼자 힘으로 건진 것이다.


이공이 그렇게 막지 않았다면 명나라 구원병이 무슨 소용이랴. 한반도를 한 입에 삼켜 기세 등등한 왜군은 마치 불길에 기름 붓는 격이 되어 더욱 거세진 병력이 되었을 것이니 이를 막느라 전전긍긍하다가 손도 써보지 못한 채 패망했거나 아니면 전란에 엉망진창이 되어 지리멸렬했을 것이다. 바닷길을 막아 주었기에 한반도도 명나라 중원 천지도 명맥을 유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목요연하게 평소에 괄세 받던 올바른 삶의 올바른 정신이 빚어낸 이렇게 혁혁한 결실과 그 당연한 결말을 만천하에 입증해 보인 실례는 동서고금을 통해 없다. 있었다면 어느 기록에서든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그 유례를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그러나 동양 3국에 연한 일대 전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대주의에 찌듦으로 인한 전적으로 우리 한민족 탓이다. 단지 일개 무장으로서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그 일만을 두고 구국영웅이라고 하는 정도에 그칠 뿐, 사람 삶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이 공동체의식이 거둔 실효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나'원균으로 대표되고 상징되는 인간 보편화된 자아중심의 삶과 대조되게 부각되어 있다는 점에서의 그 막중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 교훈의 실체가 완전히 외면당한 채 지금까지 묻혀 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현실은 이렇다.


이렇게 이순신 정신을 강조하고 이공의 삶을 기리는 것은 우리 복음의 내용이 바로 그런 실질적 내용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즉 한 몸 의식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에서 그 특징을 이루는 주인의식을 성경이 강조함이다. 그런 정신이 인류를 살리고 유지해내는 바로 그 원동력임을 증명해 줌이다. 반면 자아중심이 평소에는 그냥 예삿일로 취급되지만 일조유사시 얼마나 치명적인 해독의 원흉이 되는지 이를 넉넉히 입증해 줌이다. 다시 말해 죄의 속성이요 결말이다.


그리고 의로운 삶이 절대로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평범한 현실을 또한 일깨워 주고 있다. 왜냐면 이공은 전쟁 전에는 그의 올곧은 성격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품으로  인해 상관의 미움을 받아 세상은 가는 곳마다 이공의 진로를 가로막은 장애물이 되어 준 것이다. 그래서 강등되고 좌천되기를 거듭하여 현감(縣監) 직이라는 미관말직에 머물러 있었던 것. 성경은 한 몸됨의 이 공동체 의식에서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함께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이웃을 사랑하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런 한 몸으로서의 체제로 이루어진 삶이 법도를 벗어나 자아중심으로 살면 즉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롬 8:13)는 사실로써 경고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과 나란히 이 살아 있는 역사적 교훈을 항상 널리 릴 책임이 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실질적인 효과가 이 이공과 '나'원균의 역사적 교훈과 결부되어 막중한 의미를 드러내 주고 있음이다. 평시에는 이공과 같은 인물은 빛을 보지 못하고 가족 고생시키는 못난 남편, 융통성 없는 아버지로 홀대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은혜의 때 이 구원의 날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환영을 받지 못하나 그러나 그 중에도 믿는 사람은 때가 이르면 이공의 국난 극복과 같은 혁혁한 결말을 보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현재는 자아중심 일색의 이 세상에서 나그네 길의 고달픔을 외면할 수 없는 것.

당시 관료들이 출장을 가면 그 비용으로 양곡이 지급되었는데 이공은 용무를 다 마치고 돌아오면 반드시 그 남은 양곡을 그것이 얼마가 되든 간에 반환했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몹시 좁쌀 같은 쩨쩨함이라고 손가락질하겠으나 바로 그 "쩨쩨함", 그 철저한 공사(公私)에 대한 분별이 국난에서 구국영웅이 되게 한 원동력이었던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공은 키는 크고 힘은 장사였으나 결코 호걸풍이 아니고 학자풍이었다고 어릴 때부터 한 이웃에서 자라 잘 알던 유성룡이 말했었다.


세상은 그를 일개 무장(武將)으로만 알고 있으나 인간 정신의 고창자(高唱者), 그리고 진정한 인간 삶의 실천인(實踐人) 그리고 그 승리자로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족적으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 같은 선진국 정도라면 국내외로 널리 홍보하여 이미 온 세계가 다 아는 위인으로 추앙되고 있었을 일이다. 이웃 일본만 해도 아는 사람은 그를 세계적인 위인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동족인 이 나라 사람들은 사대주의에 젖은 약소국 근성에 사로잡혀 무조건 외국 것에 부화뇌동하기에만 정신이 없으니 선진문명국 문턱에 오르기는 항상 요원하기만 하다. 그 정신적 바탕이 무너져 가는데 물질적으로 부유하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고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이런 '나'원균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그런 자아중심적인 삶을 청산하고 이순신 정신과 같은 멸사봉공의 자세로 임하라는 그 메시지이다. 인간답게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올바르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한 몸 구조로서의 공동체 의식에서 주인 의식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런 사람들만의 이상 세계가 현실로 구현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우리는 이제 그 역군(役軍)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원균 식으로 살면 필멸이라고 경고하기를 아울러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 결말이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이다. '나'원균의 자아중심에서 그 해와 악을 우리는 이 역사적 교훈을 통해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중심은 번번이 하는 일마다 공적(公敵)의 짓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공과 같이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구원과는 별개다.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왜 인간이 멸망의 비운에 처해 있는가, 왜 범죄하는가, 그 원인을 '나'원균의 행동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이다. 자아중심으로 나가지 않고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으로 나가는 그것이 "육신대로 살지"(롬 8:13) 않는 것이요 자기 부인의 기본 의미라는 뜻이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마 3:8). 요한이 이 열매를 가리켜 아주 구체적으로 예거한 바 있다(눅 3:10-14).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 바로 그런 의를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여 행하는 법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순신 정신으로 나타난 그 결과는 이 세상에서의 이야기다. 바로 그런 이순신 정신을 구현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이 바로 그런 정신과 같은 본질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의 핵심은 한 몸 의식 곧 공동체 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을 때 어떤 이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냐 하고 여쭈니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바로 그 예화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공동체 의식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불완전한 것이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비로소 공동체 의식 즉 한 몸의 이치로서의 삶의 의미로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것임에도 그것이 인간 삶에 적용될 때는 이공의 경우처럼 크나큰 위력을 나타낸다는 그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자기 부인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느냐 할 때 바로 이공으로 대표되는 그런 현저한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義)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한 몸 의식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이다. 자아중심을 왜 미워하느냐 할 때 '나'원균으로 나타난 결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불의를 한사코 미워하는 것이다(히 1:9). 죄가 그런 자아중심의 속성이기 때문. 자신도 망하게 하고 주변의 숱한 인명들을 손상시키고 멸절시키는 것이니, 에덴낙원에서의 사단의 살인행위(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 그리고 아벨에 대한 가인의 살인행위가 그 증거다.


한 사람이 들어 나라가 망할 뻔했고 한 사람이 들어 나라를 건졌다는 사실은 이공과 '나'원균이 당시 위치를 바꾸었다고 가상해보면 드러나는 일이다. 이공이 그 요긴한 길목인 국가 관문을 지켜 가령 경상 우수사로 있었다면 이공은 사력을 다해 막아 섰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전라좌우 수사들이 병력을 거느리고 내원(來援)했을 것이고 사태는 급진전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니, 처음부터 일본은 전쟁 전에 우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 경상우수영의 철통 같은 방비 태세에 감히 내침(來侵)해 올 야욕을 품는 것조차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이 세계, 이 세상 나라는 인간 삶의 터전이 아니다. 영계에 속한 천국이 인생 본연의 삶의 터전이다. 인간은 원래 영계(초자연계)에 속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 인간 세상이 자연계에 속한 사실도 그러하거니와 사람 삶의 법칙대로 운영이 되지 않는 세계다. 그러므로 죄 많은 이 세상은 멸망이 필지이다. 따라서 이 법질서를 따라 살지 않음을 모든 인생은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생명의 법질서를 어기고 있었던 것이 이 자연계에서의 인간 삶인데, 이 법질서 곧 생명과 영원한 행복의 원리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도 이제까지 그렇게 할 힘이 없었던 것.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세상에 오시어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 모두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요 3:6)을 통한 새 창조를 받음으로 능히 지킬 수 있게 됨으로 인하여 회개를 명하시는 것이다(행 17:30). 그리스도 없는 이 자연계에서의 삶은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닌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의 동물적인 삶이므로 이런 환경을 청산 종식시키고 자연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초자연계 몸의 초자연계 삶의 나라가 천국(heavenly kingdom)이요, 현재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 죽음과 멸망뿐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품 속으로 돌아온 새 생명의 삶이므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자연계(the kingdom of the nature)에 속한 지금까지의 인간 삶은 사람으로서는 타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 세상 신(神)에게 속아 그에게 종속된 것이므로 증오할 만한 것임이 드러나는 것. 고로 이 세상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상이고 이상적인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한없는 어리석음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상적인 인간 삶은 생명의 법질서에로의 복귀이다. 지금까지의 죽음과 멸망이 그 종착점인 동물적 생활 양식을  미련없이 버려야 함이니 곧 자아중심이다.


이와 대칭이 되고 반대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중심이요 이웃 중심이다. 그래서 첫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니 내 이웃이 나와 별개가 아니라 다 같은 사랑스러우신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입은 똑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의 분신(分身) 곧 나의 몸의 한 지체 격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기 전의 이공의 전도(前途)가 밝지 못했던 것은 악한 소인배들이 이공의 진로를 따라가며 사사건건 막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공을 미워한 것은 전날 이공의 상관이었을 때 부정 부당한 청탁을 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한데 대한 사감(私憾)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공이 자기 신념대로 일관되게 행동한 것이 상찬의 대상은 못될망정 도리어 그 앞날의 장애가 되었으니 이것이 세상의 특성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자아중심을 버리고 공동체 의식으로 살려고 하랴. 이공과 같은 유형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여하한 세파도 뚫고 나아갈 여간 큰 결심과 배포가 아니고는 한마디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으로 일궈낸 단 물은 빨기에 혈안이 되고 또 그 자체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만 정작 자기도 그런 정신으로 살라고 하면 예외없이 몸을 사린다. 거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다. 이것이 세상이 악하고 자아중심 일색이라는 증거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는다"(잠 29:27)고 한 그대로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삶에서도 옳음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할진대 하물며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영합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경청한 다음의 필연적 결론으로서 "구원 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하고 여쭌데 대하여 대답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 하신 것이다. 자아중심의 세상에 결코 영합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가르치면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상식 중의 상식에 속한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은 에덴낙원에서 사단이 아담 부부를 속일 때처럼(이것이 모든 거짓과 속임수의 시작이자 표본이다) 반드시 현재 내가 그 말을 따르게 되면 상당한 유익이 됨을 강조하는 듣기에 그럴싸한 것을 말하는 법이다.


인생 삶을 마감한 후에 일어날 일을 가지고 거짓말을 지어내지 않는 법이다. 성경의 가르침 즉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등지는 것뿐이다. 죽고 나서야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모두 생각하는 판인데 죽고 나서 이렇다저렇다 식으로 아무리 거짓말해 보아야 그것이 먹혀들 리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나가는 것이 오늘날의 소위 "기독교"다. 잘 믿으면 축복받아 혹은 십일조(수입의 1/10)를 내면 이 세상에서 잘 산다고 가르치지를 않나,


기독교가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라고 가르치는 것이니까 당연히 세상을 지배하고 지도해야 한다는 자기 멋대로의 생각으로 이제까지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해 오지를 않았나, 모두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면서 지금까지 성업 중에 있으니 이야말로 속임수요 거짓이다. 이런 인위적인 종교로서의 소위 "기독교(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대로의)"를 사실 그대로 거짓말이요 속임수라고 하면 맞는 말이나, 그런 내용으로는 비판하지 않고 이들 사이비가 표방하는 성경 자체를 거짓이고 속임수라 착각하니 잘못해도 한참 잘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그가 이 세상이 전권을 쥔 이 세상 왕이요 신(神)인 이상, 이 세상 인간들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일을 하는 것쯤이야 마귀에게는 식은 죽 먹기다. 기독교의 가짜를 만들어 얼마든지 흥왕(興旺)시킬 수 있고 진짜 위에 군림하게 할 수 있다. 성경의 가르침 자체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항상 소수로서 약한 자의 위치에 있어 각 시대마다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다음에야 더 할 말이 무엇이야


이 자연계에 속한 현재의 세상이 위의 설명처럼 생명의 법질서에서 아주 동떨어져 정반대의 양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그 특색이고 이를 지배하는 것이 악령 곧 인간의 원수인 사단이므로(고후 4:4)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다. 고로 이 영광스러운 새 창조의 재(再) 출생은 이 악령들의 세력과의 전투 개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한마디로 인류 역사는 인간과 사단간의 전쟁 상황이다(창 3:15).


그러나 승패가 이미 결정 난 싸움으로서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는 담대하라" 하셨다(요 16:33). 이 "이김"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기정 사실화한 자기 부인의 바탕 위에서만 믿고 누릴 수 있는 승리의 환희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 투신하지 않는 이에게는 이 세상 신과의 싸움이 있을 수 없는 여전히 그의 노예가 되어 있음이요 따라서 그리스도의 승리와는 무관하기 때문.


고로 이 "천국"이라는 표현으로써, 이 세상의 자연법칙에 예속된 현재의 인간 삶을 단죄(斷罪)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세상을 대체하는 "천국' 개념이 되는 까닭이다. 이는 곧 우리 육체를 단죄하셨다는 사실과도 같은 내용이 된다(롬 8:3). 바로 이 사실을,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강력히 뒷받침하시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위, 삶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뉘우쳐 새롭게 바꾸지 않는 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지시키고 있음이다.





Vl.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구약 성경의 의미)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죽음의 운명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자 하나님의 인간 구원이 필연적이게 되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생명을 부여하시고 창조하시어 생명체로 건재하도록 만드셨는데 인간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으니 이는 애초 창조의 목적이 좌초되었음을 의미한다. 왜냐면 한번 죽으면 그것을 다시 되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원칙에서 볼 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이미 무시한 까닭에, 하나님의 한번 입 밖에 내신 말씀은 그것이 곧 원리이요 법칙이므로 이 죽음의 현실은 영원히 변경될 수가 없어 그래서 인간은 죽음에서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새 창조의 필요성


그러므로 새 창조밖에 없다. 첫 창조는 결딴 나 버렸고 전연 새롭게 즉 이전 것과는 별도로 인간을 창조하시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이 도저히 구원될 수가 없는 것이니 이유는 위에서 밝힌 그대로다. 즉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시는데 그것을 새로운 창조로 하신다는 것이니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하나님의 이 구원을 학수고대하면서도 그 궁금증은 더해 갔다. 때가 이르러야 그 비밀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그 때를 인간은 기다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기간도 못참아 급속도로 부패 타락해 갔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나타나는 기간이 늦어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예상과는 아주 빗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고 그 자유 선택을 보장해 주셨는데 그 자유를 인간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듯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자유로써 조물주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악용, 오용된 것이다.


인간을 위해 창조된 영물(靈物)들 역시 그런 경향은 인간과 나을 바 없었다. 적지 않은 악령들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이 세상 신(神) 곧 마귀(사단)이다. 더구나 이 인간세계에 마귀가 군림하여 인간들을 조종하다보니 인간들의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마귀가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행위와 더불어 아담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이었으므로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한은 이 악순환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야 이런 "있어서는 안될" 모든 것이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정상 세계로 복귀하게 되는 것. 그러면 왜 그 정상 상태로 돌아가지 않느냐 하면 구원 얻어야 할 인생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구원 얻을 인간이 없어질 그 때에 "있어서는 안될" 이런 세상은 참으로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것이 없는 세계로 정착하게 되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노아의 홍수 직전까지도 사람들이 집 짓고 결혼하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도 그러할 것이니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즉 미리 아심으로써 미리 택하시지 않으면 그 후 앞으로 태어날 인생들 중에 혹 구원 얻는 사람도 있을 터인즉 그리스도의 재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나, 누가 구원 얻을지 미리부터 아시므로 이제 후로는 단 한 사람도 믿고 구원 얻을 사람이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 때 세상에 다시 오실 수 있음이다.


그리스도의 미리 택정(擇定)하심은 이런 사실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다 회개하여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새 생명에 들어오기를 바라시나 인간들이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회개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어야 하는 까닭에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만을 찾으시다보니 또 그런 사람만이 영생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이런 사람은 강제로 억지로 만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 의지를 따라 그렇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법질서로 되돌아오는 것을 그 스스로 기뻐서 해야 하므로 이렇게 지체된다면 지체되는 것이다.


메시아 약속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에게 그리고 인간 세계에 이 구원자(救援者) 곧 메시아의 출현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분은 하나님이시고 또한 인간이시라는 사실도 그 선지자들을 통해 밝혀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둔하여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 알려고 해도 알아듣지를 못함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를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이다. 왜냐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의 마음이 일반적으로 악으로 줄달음질 쳤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찌 하든 살고자 하는 자아중심의 마음으로 미련해진 것이다.


자기의 죽음의 실상을 깊이 생각하려 하는 것보다 우선 눈 앞의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꼴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를 살피실 때 어느 것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었다. 거의 모조리 제각기 자기 속셈만 차리려 하고 그래서 죄와 악을 물 마시듯, 밥 먹듯이 하고 있었던 것. 인간들이 아담 부부로부터 태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일어난 사건이 살인행위였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입증된다.


자아중심이다보니 자기보다 잘되는 이웃을 못참고 못봐 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시기심이 발동하여 자기 동생을 죽인 가인의 행사가 나온 것이다. 모두 이렇게 되다가는 약속하신 대로 인류의 구원자가 때가 되어 나타나시더라도 그 분이 과연 그 약속하신 분인가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도 없게 될 판이었다. 그 분이심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분을 인간들이 따르고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분이 나타나시더라도 인간 죄인처럼 고난 받으시는 분으로 나타나실 터이니 더욱 그러할 터이다. 누가 그런 모습의 인물을 인간 구원의 주체로서 여기겠는가. 물론 초자연적인 능력과 위세를 과시하면서 나타나신다면 모든 인간이 하나 같이 그런 분을 하나님의 권위로 쉽사리 인정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누가 또 그런 분을 죽이려 하겠는가. 우리 위해 죽으시려고 오시는 것인데, 그렇게 되어도 역시 일은 되지 않는다. 인생을 새로 창조하실 수가 없는 일이 되니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내 형상으로 오셔야 하는 메시아


위풍 당당하게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로 나타나시게 되어 있는 메시아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오시면 인간 구원의 새 창조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의미도 없게 된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시면야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누구나 다 이를 구세주로 인식이야 하겠지만 그리 되면 우리의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니, 죽는 운명의 죄인 곧 나의 모습으로 오셔야 되겠기 때문이다. 허나 누가 그런 저주 받은 죄인이나 걸인(乞人) 풍의 한 인간의 낮고 비참하고 약하디 약한 저주 받은 죄인으로서의 모습을 반기며 하나님의 구원자로 영접해 들이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곧장 부패하기에 바쁜 인간들의 무리 중에서도 그래도 굳건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는 한 개인을 찾으셔야 했다. 그래서 그 개인으로 하여금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그 후손을 잘 교육시켜 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할 뿐 아니라, 먼 훗일에 이르러서도 장차 오실 메시아를 모든 인간들을 대표해서 인지할 수 있도록 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택하신 것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썩 좋은 결과가 되지를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자 한 사람이야 아무리 잘 믿고 훌륭하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한다 하더라도 그 후손이 자기가 아닌 이상 자기처럼 그렇게 믿음이 있으리라는 보증은 되지 못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그래서 역사가 생기고 하면 그것이 전통이 되어 메시아 오시기까지만이라도 지탱해 주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신 것이다.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의 후손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이 이른바 하나님의 선민(選民)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 중에서 편파적으로 한 민족만을 편애하셔서 선민으로 내세워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 같이 부패 타락의 일로로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 중의 한 민족이라도 대표적으로 사전(事前) 교육시키셔서 나중에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나타나실 때 바로 이 분이 그 분이라고 인정할 수 있도록 하심이 그 유일하신 목적이었던 것.


그러나 유의할 것은 이렇게 선민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별명으로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것) 민족의 그 동안의 역사는, 그 선민(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란 명칭답게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따르게 될 모든 사람으로써 구성된 바로 그 "하나님의 교회"를 이룸이 되고 바로 그런 의미의 상징성을 띠게 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그 기나긴 역사로서 점철된 모든 사건과 사례들은 장차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경고와 교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구약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딤후 3:16,17)이라 했고,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롬 15:4)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 하였다. 베드로 역시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0,21)이라 했다.


고로, 역대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우리에게 임하게 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미리 나타낸 일종의 예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두 신약성경을 말함이 아니라 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으로 엮어진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여기서 바울이 쓴 편지 글 역시 성경이라 인정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4복음서 및 사도들의 여러 서신 그리고 요한의 계시록이 신약성경을 구성하고 있는데, 구약성경의 모세 율법은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


앞에서 인간을 하나님께서 교육시킨다는 말을 했거니와 다른 교육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되었다는 것, 그리고 왜 죄인이 되어 있는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래야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모든 말씀을 알아 들어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바 새 창조가 가능해지는 것이요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모세의 율법이다. 그런데 이 모세의 율법이 세워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시작된 것이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모세 율법이 그 이후 대대로 지켜지게 될 역사적 시발점이 된다.


그러한 근본 의의를 지니기 때문에 그 날이 있게 되는 달을 그 해의 첫 달 즉 한 해가 시작되는 달로 정했다(이 역산법(曆算法)을 통상 '종교력'이라 하여 '유대'인의 '민간력'과 구분되는데 유월절이 드는 종교력 1월은 민간력('유대'인의 행정, 사업, 일상생활에 적용) 7월에 해당된다. 물론 우리 역법과도 다르며 우리의 3,4월에 대략 맞춰진다. 그 날이 마침 만물이 한창 무르익어 소생하기 시작하는 봄이 풍만한 4월경이 된다. 이래서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은 광야 길로 돌아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도중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고 "모세 율법"으로 통칭되는 각종 법과 규례가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를 어기지 않고 준수할 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약속하시게 된다. 이것이 옛 언약(言約) 곧 구약(舊約, Old Testament)으로 통칭되는 구약 성경의 내용이다. 이에 반해 신약(新約) 즉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새롭게 새 차원에서 즉 새 창조의 의미로 주시는 약속 말씀이시니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그 죽으시면서 흘리신 피로 세우신 새 약속이다(눅 22:20). 이 내용을 수록한 것이 신약성경(New Testament)이니 이전 것과는 다른 새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차이는 옛 것은 새 것을 위한 즉 새 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그림자의 의미로서 상징적이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옛 것을 기반으로 해서 나타난 실체가 새 언약 곧 본격적으로 우리가 지키게 되어 있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된다. 구약 따로 신약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한 준비 혹은 보조 역할로서 즉 사전 교육 차원에서의 구약이다. 그런즉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는 것이고 더 이상 모세 율법은 그 효용(效用)이 지속되지 않는다.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 편지글에서 강조하여 변론하고 있는바 "율법"이란 것이 바로 이 구약의 내용 즉 모세 율법을 대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대체적이라 함은 창조 당시부터 시작해서 영원히 확립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강조하여 설명한 대목도 있기 때문인데 이를 혼동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라고 하는 언급이다.


이 영원한 계명은 아들께서도 친히 지키시는 것으로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심과 같다. 이 가장 핵심이 되는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켜 "온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마 22:40)이라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는 차원에서는 구약 시대나 오늘날 우리 신약 시대나 아무 차이가 없는 것. 당시 '이스라엘'이 믿지 않음으로써 타락하고 멸망에 들어간 것과 같이 오늘날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사실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오늘날 우리들에 대한 경고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명백히 하신 것처럼 율법이 폐기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7,18) 하신 그대로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함은 "그리스도를 믿음이 없이"라는 단서가 붙는 내용이다. 왜냐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고 전제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제는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통하는-고전 9:21)을 행하는 것이 선(善)이요 의(義)이다. 따라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으로 보답된다"(롬 2:7)고 바울 사도는 명시했다. 그 앞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6) 했으니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대로 "믿음 여부"가 아니라 "행함의 유무"로써 결정되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갚으신다"(:8) 했는데, 이 "당을 짓는다"는 것은 영역 KJV의 "contentious"와 같은 의미로서 오역이다. 대부분의 영역(Biblegateway)은 자아중심 곧 이기주의(selfishness, self-seeking)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9) 했으니 이 선언을 하면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차별하지 않음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다시 더 강조하기를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10)고 했다.


바울 사도는 다른 데에서고 같은 내용으로 강조했으니,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는 것으로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했다. 이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이다"(요 5:29) 하심과 같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도 금방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소위 "복음" 이해는 전연 성경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 구원과 결부시켜서는 일체의 행위, 행함을 배제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배도(背道)"의 하나이다(살후 2:3). 이는 전가(轉嫁, imputation) 즉 우리의 죄과를 그리스도에게 넘겨 씌운다는 의미의 반(反)성경적 교리에서 주로 기인하는 것이다. 이른바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죽으심이니 이 둘의 의미상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있는 고로 오직 말씀을 믿고 믿지 않음으로 결정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하였고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8) 한 것이다. 이 믿음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 곧 행함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의미이다. 왜냐면 사랑이기 때문이니 사랑은 말만의 사랑은 통하지 않고 그 사랑의 마음에 상응하는 사랑이 행동이 필수인 것이다.


때문에 거듭거듭 강조하신 것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 14:15,21,23,24/15:10)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고전 7:19/요일 2:3,4/계 12:17)라 한 것이다. "입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9) 하였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10) 한 대로, 말씀을 믿는 내부적 역사(役事)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입으로 시인하여 인정하고 그 모든 말씀대로 행하는 외부적 표현과 불가분이다.


주(主)라 함은 말 그대로 주인, 소유주의 뜻이다. 즉 나를 소유하는 주인이요 상전(上典)이니 종된 나로서는 그 한마디 한마디에 절대적 순종이 요구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알아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신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율법, 계명, 뜻,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가능해진다는 바로 그러한 뜻이 되는 것.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 5:19) 하심이 바로 그 뜻이다.


앞에서 우리는 설명하기를 영원히 변함없는 삶(영생)의 체제는 한 몸 구조에 있다고 했거니와 모름지기 몸(의 각 지체)은 머리의 지시를 받들게 되어 있다. 그렇지 못하고 절대 복종하지 않을 때면 그는 한 몸의 조직으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다. 생명의 조직인데 이로부터 분리되니 자연적으로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 부인 아닌 자아중심 곧 죄의 대가는 죽음인 것이다(롬 6:23/약 1:15). 이제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고 나를 비롯한 각 사람의 주인, 소유주로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니 나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율법" 곧 "새 계명"(요 13:34)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 머리로서 몸의 각 지체에게 내리시는 지시의 기본이기 때문.


원래 "온 선지자와 율법의 총 강령"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곧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을 말함이다. 머리도 몸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니 자기 부인이다. 이 하나님의 율법을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리스도 없이 지키려 하니 지키지도 못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이 한 몸의 구조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이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이 처음부터의 하나님 율법의 핵심이다. 그런데 영물들 중에 사단을 위시하여 일부가 이에 불복하게 됨으로써 범죄가 구성되고 인간 아담이 이를 따름으로써 인간 세상에 죽음이 오게 된 것이다(롬 5:12).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한 몸 구조에서 벗어나 죽은 자가 되었으니 이제 산 자가 되려면 새 체제가 구성되지 않으면 안되고 바로 그 새 체제가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는 구조이다. 이전에는 이런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새 창조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의 각 지체)으로서 머리를 지시를 따르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 우리 구원의 골자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은 범죄하기 이전과 똑같이 하나님(머리로서)을 사랑하고 이웃(한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한결같고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여기에 덧붙인 것이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요 13:34)다. 얼핏 보기에는 이전보다 더 엄정 엄격하다. 왜냐면 이 말씀의 뜻은 자기 부인에 터전한 사랑을 요구하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을 않으면 사랑함이 앞에서의 설명처럼 불가능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렇다 뿐이지 실제는 이전과 같은 내용이다. 같은 본질의 내용이지만 워낙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 죽은 자였기 때문에 생명의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상세히 풀어 말씀하시는 것이 이 자기 부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던가. 자기 자신을 다 바쳐 즉 자기 부인으로써 사랑하신 것이다. 즉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대로 사랑함이다. 삼위일체 원리에서 주종(主從), 대소, 선후 관계가 이것이다. 작은 자와 큰 자와의 관계에서 큰 자는 본을 보이고 작은 자는 이 본을 따르는 관계다. 바로 이 뜻이기 때문에 요한 사도는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것이다. 이로써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서로 위하되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원래의 정상 궤도로 돌아온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으로 낙착된 것이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시범해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곧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고후 5:15/롬 14:7-9)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시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몸된 우리를 위해 사시는 것으로 확고하게 나타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이 믿음은 반드시 그 몸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사는 현재의 영원한 삶이다(갈 2:20).


머리 친히 나를 위하시는 터에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필요가 없어서 않는 것이지 강압에 의해 부득불 하는 일이 아니다. 자기 부인을 마치 자기 부정처럼 여기는데 이는 사단이 심어놓은 전형적인 "말씀 혼잡"(고후 2:17)이다. 머리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생명이든 죽음이든 고난이든 안락이든 개의치 않고 오직 머리를 따름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이전의 율법(계명) 지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계명) 지키는 것과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 생명의 법칙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인데 자기 구원 즉 자기 자신을 위함이 되니 죄로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왜냐면 자기 자신을 위함이므로 의롭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의롭게 되려는 데에서는 그럴수록 의에서 구원에서 멀어져 가는 역효과만 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구원 받아 있는 현재의 나 자신으로서는 나의 구원을 위함이 목적이 아니므로(왜냐면 이미 구원되었으니) 오직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 아름다운 이 한 몸 체제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영원한 방법이므로 자진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신바람 나게 행하는 삶의 즐거움 그 자체이다. 남을 위하는 이웃을 위하는 것이므로 보람차기로는 이 이상 가는 것이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 삶의 법칙이요 원리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 말이니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그 법칙과 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삶의 낙이요 즐거움이기에 그렇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하는 말이 나올 정도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로 그러하다. 이 차이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계명(율법) 지키는 것을 모세의 율법과 혼동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게 만든 것이 다름아닌 사단이다. 그는 원래부터 속이는 자이기 때문이다(계 12:9).


광야 교회


이렇게 모세의 인도를 따라 광야 길로 통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행적을 가리켜 성령 충만하여 스데반은 "광야 교회"라 지칭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상징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유월절 사건은 우리의 새 창조를 나타내고 모세 율법은 이렇게 우리가 새 피조물이 된 다음에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킴, 정상적인 법질서에로의 복귀를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으로 오늘날 이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구애되지 않는 옛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나 그 상징하는 바 의미는 변함이 없다. 그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역시 이미 설명한 대로 새 피조물은 새 법질서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길로 행하기 전 이집트에 있을 때는 모세의 율법이란 것은 없었다. 이집트의 법을 따라 거기 종 살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어 분리되면서 '이스라엘' 고유의 법 체제를 갖춘 것이다. 당연하지만 뿌리째 뒤흔드는 변혁이었다. 우리의 새 피조물로서의 모든 은혜와 특권이 바로 이와 같은 것. 이전에 살던 삶의 사고방식은 절대로 통용되지 못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 그러면 이 새 피조물에 해당되는 생명의 법질서는 무엇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새 계명으로 나타나는바 자기 부인이 그 골자임을 이미 지적했다.


사랑이란 것은 원래부터가 자기 부인을 그 뿌리로 하고 기본 바탕으로 하는 까닭이다. 과거 자아중심의 생활 양식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의 죽음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실이 지니는 의미가 절대적이 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생활이 죄의 뒤범벅이라면 이제 새 피조물된 위치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해 사랑 일색으로 나가는 것이므로 이 생명의 법질서를 사랑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랑이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니 이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바로 이 같은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의 개략적인 최소한의 맛보기였던 것이다. 자아중심은 자기 스스로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데에 있다. 거기는 하나님도 없고 자기 이웃도 없다. 자기가 우주의 주인이다. 맹랑하고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비극적인 오늘의 현실은 이런 식으로 시종일관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귀속시킨다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었고 이에 따라 예컨대 일주 하루 정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고 수입의 최소 10프로는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떼어놓는 그런 기초적인 학습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생각하면 번문욕례와 같은 이런 모든 것은 요약하면 첫째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둘째는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함에 있는 것을 가르치는 말하자면 유치원 교육이었다.


그러나 워낙 자아중심으로 뭉쳐진 인간이기에 그 구체적인 실천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하게 될 이 내용을 상징하는 갖가지의 제도를 통해서 상기시키고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모든 "믿는" 일에 대하여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처신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이외의 족속 즉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서 멸시하던 이방인들과 나은 점이 하나도 없었음을 구약의 역사가 입증한다.


성경 표현을 빌리면 오히려 그들보다 더 심하게 악을 자행한 것이다. 비유적으로 나타난 상황은 아주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떠난 60만이나 되는 20세 이상의 남자들 가운데 믿음 있어 정작 가나안 땅을 밟은 이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인 겨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뿐이었기 때문. 이런 비극적 실상은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여러 잡다한 민족과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 12 지파(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12 아들로써 나누어진) 중에서 두어 지파만('유대'인들을 가리키는 '유대' 지파와 벤야민 지파이니 제사장 직과 하나님의 성전 일을 맡게 되는 레위 족도 물론 포함) 남겨두고 나머지 10지파가 그와 같은 범죄 타락을 인해 영원히 잘려 나간 것이다. 잘려 나간 채 현재는 그 형적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런 범민족적 특수 교육을 받지 못했던 다른 여러 이방 국가와 하나도 다름 없이 범죄 타락해 버린 것이다.


레위는 본래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하나였으나 성전 일을 맡는 특수 임무를 대대로 물려받아 수행한다 하여 지파로 분류되지 않고 그 대신 요셉의 두 아들이 특별히 열 두 지파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한 지파씩인 다른 형제와는 달리 두 지파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이 레위 족속이 지파로 분류되지 않고 족속으로 남아 성전 일을 책임지고 있는 것 역시 오늘날의 교회를 더욱 세부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레위 인들을 특별히 그렇게 세우신 이유가 구약 성경에 명시되어 있으니, 즉 당시 첫 유월절 때에(그 때부터 이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했으므로) 주변의 이집트 사람은 그 장자(長子)들이 다 죽었으나(모든 가축의 첫 새끼까지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장자들만은 죽음의 사자가 그대로 통과해 즉 넘어가(출 12:13,27. "유월(逾越)했다"는 것으로 우리말 성경은 번역) 주었던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때 살아남게 된 모든 이스라엘 장자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출 12:3)을 각 가정(세대)의 몫으로 한 마리씩 그 날 잡아 그 피를 바르고(:7,22) 그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어린 양으로 인해 그 생명이 구속(출 13:13)되었던 것이다.


가축도 그 첫 새끼는 이와 같이 함으로써 이를 "구속하였다(to redeem)" 했으니 사람의 장자와 마찬가지로 그 날 죽지 않고 생명을 보전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들(이스라엘의 장자들과 가축들)을 모두 "하나님의 것(소유)"이라 하셨다. 이 출애급기 대목에 보면 하나님 친히 두루 다니신다는 말씀이 있고 (:23) "멸하는 자"가 따로 있는 듯이 되어 있으나 천사가 이 모든 일을 한 것이다. 천사는(천사만 아니라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도 물론이고-골 3:17)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어서 이는 하나님 친히 그렇게 움직이시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이 된 이스라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하나님의 소유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나님의 성전과 관련된 일)에 봉사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한 것이니, 처음부터 제사장직을 맡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레위인인 것이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다른 나머지 열 한 지파(요셉만 특이하게 그 두 아들로써 각각 지파를 이루었음)와는 달리 가나안 땅을 따로 분할 받은 것이 없고 오직 각 지파 사람들이 그 배정 받은 땅에서 일궈낸 농축산물 소출 중 1/10(십일조)을 받아 생활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그와 함께 죽어 함께 다시 살아난 우리 구원 받은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니 그 피로 구속 받았으니(몸값을 치르심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함이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고후 5:15/롬 14:7-9)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을 달리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된 장자(長子)의 교회"(히12:23)라 하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의미가 바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미로만 집중되어 있어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요 5:39) 하신 것. 여기서 말씀하신 성경이 구약성경으로서 다름아닌 이스라엘 흥망사를 둘러싼 모든 내용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메시아)를 나타내시기 위한 이스라엘 역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께서 마침내 탄생하실 때에도 이 4복음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를 세상은 물론이지만 유대인들까지(나머지 지파는 이미 범죄함으로써 세계 만국에 다 흩어져버려 사라진 지 오래고)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단지 몇몇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실 당시에도,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남녀 합쳐 겨우 120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도 이 실상은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 승천하실 때 모두 모였다고 볼 수 있는데도 겨우 500명 정도였다.


병 낫기 위해 혹은 호기심에서 혹은 다른 이유로 또는 말씀을 듣기 위해 구름 같이 몰려든 사람들도 제각기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였고 진리를 알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모든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렇게 손 꼽을 정도로 항상 소수로 남는 비극적인 현실이었던 것. 이를 잘 반영하는 것이,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을 것이다' 함과 같다"(롬 9:29)는 '바울'의 '이사야' 예언 인용이다.


'이사야'는 이 대목에서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건만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여물통을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 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에서 시작하는 것을 보아도(사 1:2-17) 이 "남겨두신 씨"란 것은 극히 소수의 택하신 사람들 외에는 모두가 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불신자들처럼 되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났고, 오직 이 "남은 사람들" 덕택에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가 다 소돔 고모라처럼 오늘날 사라지고 남아 있지 못할 것이나 오직 이 극소수의 믿는 이들 덕택에 겨우 그 그루터기 정도로서 메시아 오실 때까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었고 이들을 통해 애초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구현될 수 있었으니 즉 그리스도 오셨을 때 그 오심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사야'는 아예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소돔의 장로들", "고모라의 백성들"로 호칭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행적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들 중에서도 절대 다수가 탈락되는(고전 10:5) 한심스럽고도 비극적인 결말을 상징하는 것이니, 말 그대로 우리는 항상 복종하기를 힘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 마땅하다. 바울 사도가 우리가 다 심판대 앞에 드러나 선악간에 그 행한 것을 따라 영생이든 멸망이든 받는다고 전제하면서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고후 5:9-11) 함은 이를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기를,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나 운동장에서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우승하는 자는 하나인 것과 같이 너희도 우승하려는 자처럼 이와 같이 달려 나가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리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3-27) 명시한 후, 곧장 이 '이스라엘로써 상징되는 의미'를 예시한 것은 의미 심장하다.


즉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던 것으로서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저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10:1-6)이라 한 것이다. 악, 죄, 불법, 불의가 무엇이냐,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메시아를 배격하기에 이른 '유대' 민족


이러한 실상은 메시아를 죽여 없애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됨은 4복음서에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므로 그 중심 뜻을 파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여전히 자아중심을 회개치 않으니 그 의미가 제대로 먹혀 들어올 턱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바란 메시아는 그네들의 '자아중심의 욕구'에 따라 당시 '유대' 민족을 압박하고 있던 로마 제국과 같은 외적을 물리치고 세계 열국 가운데 군림하는 그런 위풍 당당한 구세주였지, 이렇게 우리 각 사람 개개인을 위해 죽으시고 저주 받으시는 모습 곧 죄인으로서의 형상인 메시아는 아니었으니 이를 알아볼 리 만무했다.


이 4복음서에서 기록된 대로의 그리스도와 '유대'인들과의 각종 알력이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승을 부린 것이 종교적 열심히 대단하다는 대 제사장들, 제사장들, '바리새' 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등의 소위 종교인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복음에 방해되는 세력이 바로 이런 세력화하고 세속화한 종교인들이다. 가장 앞장 서서 복음을 방해하는 것이 여전히 이런 종교인 계층이다. 다른 세상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도 믿고 성경(당시는 구약성경)도 믿는다고 자처하는 집단들이다.


일반인은 몰라서 방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성경을 안다는 무리들이 그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충만한 그 피상적 성경 "지식"으로써 잣대를 들이대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히 저울질하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요 16:2) 하며 그리스도의 교회와 복음을 탄압하고 방해하고 핍박해온 것이다. 이렇게 '유대'민족을 통해 메시아께서 이 민족 가운데에서 일어난 소수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되어 왔던 그대로 오신 것이다.


이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히 1:1)이라 한 그대로이며,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여호와" 다시 말해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註)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 밝히신 것이 어느 시, 어떠한 때인지를 상고하였다"(벧전 1:10,11)고 한 그대로임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4복음서에서 누누이 구약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과연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셨으니, 이는 의미심장하고 누구나 새겨들을 경고의 말씀이시다. 이는 누구나 성경을 읽을 때이면 확인할 수 있는 바 아담 때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시대와 세대의 똑같은 하나 같이 변함없는 특색이요 색깔을 말씀하신 것이니 곧 "믿지 않음"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면서도 그 색깔은 여전했음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12 지파 가운데 열 지파가 결딴 나버렸고 이제 겨우 '유대'지파를 중심으로 일부만이 남아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 지금 그들이 아무리 불 같은 종교적 열정으로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하나 레위인들을 찾을 수 없어 제사장을 맡을 인맥이 끊겨져 버려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그들이 남아 있든 사라져 버렸든 상관없이 모세 율법으로 대표되던 그 시대는 이미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그림자로서의 형태로 상징해왔던 실체(그리스도께서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는 교회)가 벌서 20세기 이전에 형성되어 새 창조가 시작되어 진행되는 과정에 있음이다.


이제 이 창조의 작업이 끝나면 그토록 대망하던 안식(安息-히 4:9)이 도래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이 전개될 것이다. 그 때까지는 마지막 남은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다시 출생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을 다하는 것이요 죽음으로써 충성할 일이다. 이 세상의 의미는 이 외에는 일절 없다.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지금까지도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증언과 똑 같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과 같이 꼭 그대로 이제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를 구성하여 새 피조물의 구조로 존재하고 있음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유월절 사건에서 비롯된 이집트 탈출을 오늘날 우리가 '새 피조물로 다시 출생하는 것'으로서 영적으로 해석하면, 모세의 율법은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요 13:34)대로 현재 우리가 새 생명의 법질서 아래 있음을 동일하게 가리킴이니, "내가 하나님께는 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라고 한 그대로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가 그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총회로부터 가차없이 격리된 것과 같이 이 새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은 지당하다(마 7:21/25:45).


그리고 가나안 복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첫 사람 아담의 경우처럼 낙원에 들어가 시험에 들고 그 결과 생명에서 떨어지는 현상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고, 지금은 새 낙원인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부터 당연히 걸러낼 것은 걸러지고 추려지고 솎아지는 것이니 곧 이 세상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추려지고 솎아지는 비율이 상징되는 것이 있다면 앞에서 밝힌대로 60만 장정(壯丁) 대(對) '갈렙'과 '여호수아' 단 두 명이다. 어쨌든 그 상징하는 바는 크다.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주님의 경고가 이에 해당된다.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이가 "많다"(눅 13:24) 하셨다.


다음에는 가나안 정착에서부터 메시아(메시아는 히브리 말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 말로서 의미는 같으니 곧 "기름 부으신 자"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오시는 이, 성령(하나님은 영이시므로)이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뜻한다) 오시기까지의 기간은, 다시 우리가 새 피조물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를 맞는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이 기간을 개인적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시대적 의미로 결부시켜도 역시 그 상징하는 바 의미는 같다.


즉 쟁쟁하던 '이스라엘' 12 지파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한두 지파로 축소되고 그리스도 오실 당시에는 그것도 전부가 아니어서 불과 120명의 남녀가 성령 강림 때 동참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그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실 수 있었던 유자격자의 숫자는 겨우 500에 불과했다. 이런 상징성이야 믿거나 말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주님의 경고 말씀과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도들의 모든 경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핵심이다.




 

Vll. 제5복음서(logia iesou)





1897년 팔레스틴 지역에서 발굴된 어떤 고문서에 따르면 내용이 4복음서와 같으나 그 중 몇 가지 특이한 다음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문서를 "logia iesou"라 이름 붙였는데 그 내용이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기에 편집자는 "제5복음서"라는 이름을 붙여보았다. 그 특별한 내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Except ye keep (your life in) the world as a fast, ye shall not find the kingdom of God, and except ye keep the (whole) week as a sabbath, ye shall not see the Father.①

I stood in the midst of the world and in the flesh was I seen of them, and I found all men drunken, and none found I athirst among them, and my soul grieveth over the sons of men, because they are blind in their heart, and see not. ②

Wherever there are two, they are not without God, and wherever there in one alone, I say, I am with him. Lift the stone, and there thou shalt find Me; cleave the wood, and I am there.③

Let not him who seeks cease until he finds, and when he finds he shall be astonished, astonished he shall reign, and having reigned he shall rest.④


①세상에서의 너희 삶을 금식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일주 전체를 안식일로 지키지 않으면 너희가 아버지를 뵙지 못할 것이다. ②내가 육체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보여져 이 세계의 중앙에 우뚝 서서 보니, 사람들이 모두 세상에 취해 있어 목말라 하는 자가 없는 것을 알았고 세상 인생들의 마음 눈이 닫혀 있어 (이를) 보지 못하고 있음이 슬프다.


③어디서든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내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어디서든 홀로 있어도 내가 그와 함께 있다. 돌 밑을 들추어 보라, 거기에 내가 있음을 알 것이다, 나무를 쪼개어 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④구하는 자는 찾을 때가지 멈추지 말 것이다. 찾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요 그 놀라움 가운데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서부터 안식하게(쉬게) 될 것이다.


해석한다면, ①평상시처럼 즐겁게 먹고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것처럼, 세상 지내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니, 평생을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이 세상이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님을 알고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것이 위험천만의 일인 줄 알아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말씀이 된다. 이는 성경에서 시종일관하여 경고하고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리고 한주간 하루만 안식일로 지키는 그런 모세 율법에 얽매인 생활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구원 받은 것일 수가 없다.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은 실체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사전(事前) 교육 차원이었다. 이는 내 것이 있고 하나님의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은 일절 없고 나 자신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가르치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즉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그런 관계가 정상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것은 피조물의 것이 된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내가 나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여 내 마음대로 하려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 죄, 악, 불법, 불의다.


이러한 생명의 기본 법질서를 어김으로써 아담이 범죄에 이르러 죽음에 이르자 모든 인간은 생명으로부터 격리되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산 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나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고후 5:15)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어 주님을 위해 사는 정상 상태로 복구되어 있다(롬 14:7-9). 그러므로 더 다시는 일주 7일 중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 나머지 6일은 나의 날로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런 것은 구원 받은 자라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요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다. 내 것은 없다. 그 대신 주님의 것이 내 것이다. 주님의 것이 내 것이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쓰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심으로써 주님의 모든 것이 내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 것이라 하여 주님 마음대로 하시지 않는다. 반드시 내가 솔선해서 주님께 나 자신을 바쳐야 그래서 주님 위해 살아야 하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강제나 간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②주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구원자로 나타나셨으나 그래서 마지막 때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발을 붙이셨으나, 모든 인생이 세상 술에 취하여 그리스도를 알아 보지 못함을 슬퍼하신 것이니, 사람마다, 세상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음이요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여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므로 이런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무용지물인 것이다.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땅 위에 서신다"는 것은 욥이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Redeemer)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in the end, at last)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도 여전히 내가 육체 가운데 있어 하나님을 뵐 것이다"(욥 19:25,26) 한 데에서 이미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야 할 때에 정확히 오셨으나 세상이 전반적으로 알아보지 못하니 비통한 일이 아니랴.


세상 사는 재미, 세상 삶의 낙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있다.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영생만 욕심 내고 세상에서 사는 것만 생각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 즉 다시는 죄 짓지 않는 것 더 정확히 말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먼저 들이키고 있는 주제넘은 모양새가 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 친히 "누구든지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요 6:45,65) 하셨다. 위 욥의 예언에서 우리말 번역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했지만 이렇게 번역한 의도는 육체가 썩어 없어졌으니까 육체 밖 즉 영혼으로써 본다는 뜻으로 그렇게 번역을 한 모양이나 영역(KJV, NIV)에서 번역한 대로 육체(자연계에 속한)가 썩어지지만 부활한 신령한 새 몸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왜냐면 구속자가 오시면 우리는 당연히 부활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③이 대목은 그리스도 친히 자기가 하나님이심을 밝히심이다. 즉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니 이 우주에 충만해 계심이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나와 함께 그리고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당연히 함께 계심이다(마 18:2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하늘에 계심은 '사람'으로서 즉 육체로서 그렇게 계신다는 뜻이요 성령으로는 이 우주에 충만하시다. 이미 이 세상에 오순절 날 성령으로 오시어 교회와 함께 계시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하심과 같다.


④두드리라, 찾으라, 구하라 하셨고 그렇게 할 때 열릴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끝까지 두드리고 찾고 구할 것을 말씀하심이다. 중도에 그만 둘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하지 않음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는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 사실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가르친 것으로만 대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까닭에, 아무 것도 새로운 것도 놀라운 것도 없어 백년 천년 가야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기가 현재 소위 "신학"의 현주소다.




Vlll.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





요한 사도가 그 복음서 말미에 유별난 것으로 들릴 수 있는 한 에피소드를 삽입하고 있다. 왜 이런 특이한 대목이 끼워져 있을까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해서 간략하게 요점만 기술하는 성경 기록의 특징으로 보아 필요없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말로 이 복음서의 최종 결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렇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 하나만 보아도 다른 모든 것이야 더 말할 필요 없이 모두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요한이 의도적으로 이런 기록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다시 말해 성령의 감동으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볼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이는 성경이 진실 그대로의 기록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록되었음을 또한 자체 증명하는 확고한 한가지 사례가 됨을 우리는 주목한다. 즉 그와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삽입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이 요한복음서가 인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서 처음부터 거짓말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는 의식이 항상 작용하는 관계로 그렇게 속이기 위한 목적 이외의 것으로는 감히 더 이상의 군소리를 보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거짓말은 처음부터 인위적이므로 갈고 닦고 다듬고 반질반질하게 해놓는 특성 때문이다. 과거 우리 한학자 한 분이 우연히 창세기를 읽다가 롯의 딸들이 그 아버지를 술 취하게 만든 다음 차례차례로 아들들을 낳았다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으로는 입에 담지도 못할 사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보고 무릎을 치며 하는 말이 "이런 것도 있는 그대로 기록해두는 것을 보니 스스로 천명하는 대로 과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유교 경전 같으면 이런 것은 당연히 잘라내고 쳐내어 듣기 좋은 말만 남겨두었을 것이다' 하고 가족과 더불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례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 복음서의 말미에 적힌 바와 같은 그런 잣단 말은 천하의 그 어느 거짓말쟁이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런 대목(요 21:15-23)이 자연스럽게 끼어 든 것은 요한이 처음부터 기록한 모든 것이 그가 직접 보고 듣고 확인했던 사실뿐이었음을 강력히 방증하는 것이다. 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웅변으로 나타내는 자체 증명이라는 것은, 위에서 방금 지적한 바와 같으니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는 이런 식으로써, 요한이 지금까지 요한복음서에서 기술한 내용이 진실 그대로임을 서명 날인하시는 그런 형국이 되어 있다는 점에 우리는 새삼 놀라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 복음서만 서명 날인해놓으시면 요한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의 다른 복음서 그리고 기타 사도들의 서신들 모두가 같은 내용이므로 모두가 진실됨을 인(印)치시는(날인하시는) 것이 됨이다. 요한은 그 기억력이 비상했던 것 같다. 30세쯤 되셨던 예수님의 품에 가끔 기댈 수 있을 정도로 12 제자 중 가장 나이 어린 아마 20세도 채 되지 못한 십대였을 수도 있다. 예수님과 이종간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게 아주 젊어 그런지 또는 남달리 기억력이 좋아 그런지는 모르나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그 행하신 일보다는 주님의 말씀들을 아주 상세하게 들은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그 기록(요한복음)의 특색이다.


물론 모두가 다 요한 자신의 기억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기록한 후 나중에 다른 제자들에게 들려 주면 그 다른 제자들이 듣고 나서 "그것만이 아니고 이런 말씀도 그 때 하셨다" 하고 지적해 주면 요한 역시 그 말씀을 다시 기억해내어 끼워 넣는 그런 과정도 거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친히 약속하시기를 "(성령께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기억 나게 하실 것이라" 하셨으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만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설교도 그렇다. 상당한 장문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요한 이하 모든 사도들이 들었을 것이요 그런 사도들의 기억들을 살려내어 그렇게 스데반의 명설교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요한이 듣고 기억하여 말한 것을 누가가 직접 전해 듣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누가 역시 듣고 그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그 내용대로 옮긴 것일까. 물론 성령께서 친히 그 기억을 되살려 주시는 등 역사(役事)하신 것이야 언제나 변함없는 진실 그대로다.


요한이 그 복음서 말미에 기록해두고 있는 이 "잣단" 내용이라 하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그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 했으니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려고 이런 기록을 덧붙이지 않았나 할 정도다. 이 "제자"는 바로 요한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도들을 두고서 그런 "자기 과시(자아중심으로서의) 운운" 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만큼 이 말미의 기록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만세반석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스며 있으니 곧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이라고 하는 관점이다. 당시 사정으로 보면, 베드로가 수일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 있고 난 다음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으므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그런 순간이었다 하겠다.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고로 주님 역시 그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리라. 그러면 내가 주님만을 사랑하는데 그런 나의 사랑을 받는 상대방이신 주님도 역시 같은 사랑으로 나만을 사랑해 주시기를 바라는 감정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그보다 더 정확한 것은 그런 주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던 베드로였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요한 역시 듣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약간의 질시(嫉視)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하면 지나친 망상일까.


또한 평소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될 만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기에, 그런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베드로에게는 요한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 예수님을 평소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요한이었기 때문이다. 질투란 것은 '나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왜냐면 내가 '그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사랑의 속성이 그러하다 하면 너무 억단일까.


내가 오직 나의 상대만을 사랑하여 생각하고 다른 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나의 상대도 나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감정 또는 요구("욕구"라기보다)가 바로 질투인 것이라 해석해서 하자는 없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욕심이라기보다 삼위일체 원리 곧 생명의 법도 자체라 해도 무방하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고 다른 그 무엇에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 둘의 하나됨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육체로 하나됨에서의 남녀는 자기 육체가 상대방의 소유가 됨으로써 가능하므로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또는 욕심대로 돌릴 권리가 없다. 상대방의 육체로서의 "의무"(고전 7:4)를 다할 때 상대방의 것을 내 소유로 삼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것.


구약시대 당시의 일부―다처(一夫多妻) 또는 이방인들의 특수 환경에서의 일처다부(一妻多夫) 등의 현상은 하나님이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진실을 가르치시기(요 4:25) 전의 이야기들이다. 모든 진리가 공개되고 모든 법질서가 정상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오늘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서 이를 어길 경우 영원한 멸망의 결말을 면치 못한다. 허울도 좋은 소위 "성적 자결권"은 자멸의 지름길이다. 소돔 고모라의 죄악(소위 동성끼리의 성행위-롬 1:26,27)과 더불어 간통죄를 국가 차원에서 허용하고 그 모든 불합리에 대한 통제력을 철회하는 망나니 짓을 해도 소위 "교회"는 꿀 먹은 벙어리이니 이런 오늘날 "교회"에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엄마 품속의 아기와 그 엄마와의 관계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육체로 한 몸되어 있는 남녀 관계 그 이상의 것으로서 성경은 이를 표현하여 "한 영"(고전 6:17)이라 한 그대로다. "한 몸"(막 10:8)보다 더 상위 개념이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 함은 당연하다. "성령께서 시기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헛된 말(빈 말)인 줄로 아느냐"(약 4:5) 하고 성령의 사랑을 가리켜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다.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한 그대로다.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들고 계십니다"(시 73:23). "그 오른손"(시 18:35)으로 내 오른 손을 붙들고 계시는 이의 위치는 내 뒤이므로 항상 나를 품으시는 모습 그대로다. 아기를 품에 품다가 그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어 그 몸집이 부모보다 장대하더라도 항상 부모 마음은 그 자식을 품는 그 모습 그대로다. 또 "한 몸"이라지만 세상 어느 아내 남편이 항상 이런 품새로 지내겠는가. 성경에 아가(雅歌)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심심해서 끼워 넣었는가. "생명이 사랑이기 때문에"-이것이 그 답이다. 주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인간적으로 묘사할 때 이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데에서까지 굳이 "질투"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면 이 "질투"라는 말을 쓰는 것이야말로 주님과 나와의 사랑이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는 아주 반대로 실질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남녀끼리의 사랑보다 더(삼하 1:26) 진한 개인적 감정이란 사실임을 이런 용어를 통해 강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는 못하리라. 인간의 일로써 인간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진리를 제대로 터득할 수 있으리요. "질투하는 하나님"(출 34:15)이라 선언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다. 곧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다. 내가 어떤 이를 나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사랑했다면 나 역시 그에게서 같은 정도의 사랑을 기대함은 인지상정이니 왜냐면 그럴 충분한 사유가 되는 까닭에 그렇게 기대함은 무리가 아니요 이것은 자아중심과는 별개의 의미라 하겠다. 이기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시기나 질투라는 것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런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의 속성상으로도 이와 같은 해석은 충분히 그 타당성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각자에게 임하여 계심으로써 각 육체에게 영혼처럼 위치하시어 나와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니 그런 유(類)의 욕구에 대해서는 이의 없는 100퍼센트 만족도다. 고로 그런 점에서는 더 다시 그와 같은 감정이 믿는 형제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누구는 더 여기시고 누구는 덜 여기시고 하는 것 없이 전부가 완전한 사랑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각자 안에 공평하게 평형되게 다 1대1의 사랑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이 베드로의 물음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대답하신 것은 역시 언뜻 보기에도 동문서답처럼 비쳐질 수 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 하든 그런 것은 그와 나와의 관계(사랑 즉 개별적인 사랑)이고 너는 네 나름대로의 너만이 가진 너와 나만의 관계(사랑 즉 또 하나의 개별적인 사랑)가 중요하고 그것만이 네게 한도 없이 충분하고 다른 것은 네가 상관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시는 뜻이라 하겠고, 그래서 다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시는 베드로에게만 주시는 사랑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이 대목을 통하여 성령께서 강조하시는 사실은, 개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각자 개개인에게 지극히 만족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도록 사적(私的)이고 개별적인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도 변함없이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이렇게 할 수 없다. 당장 삼각관계가 되어버리고 질투와 시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육체로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한 면으로만 바라보는 얼굴을 지니고 있음과 같다. 그 쪽을 보면 다른 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는 가운데에서의 1대1의 사랑이다. 그 둘의 사랑에는 다른 제3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다르시다. 그렇게 1대1의 사랑을 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런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동일하게 베푸실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이 대목은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차이 혹은 하나님의 특성 중의 하나가 된다.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처럼 그런 완벽한 1대1의 사랑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가능하게 된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바로 이런 극히 핵심적인 사실을 이 간단한 에피소드로써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때문에 요한 사도 역시 그저 담담하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시는 의미뿐이었다고, 일반적으로 복음서 내용에서는(어느 복음서에서나) 좀처럼 설명을 가하지 않았던 "설명"까지 하고 있을 정도다.


왜냐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람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요한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당시 파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런 오해 풀기라면 그것 하나만 가지고 이 복음서 기록에 일부러 기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오해는 지내놓고 보면 다 사라지고 말 한낱 부질없는 생각이 되어 버릴 것이요 자동적으로 해소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 일개인에 관한 오해를 풀어 주는 차원의 해명이 아니기 때문에, 즉 성령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하는 이 점이 중요하다.


"너만을 사랑하는 내 사랑은 내가 너 외의 그 누구를 너처럼 사랑하든 상관없이 '한 사람'으로서 너만을 사랑하는 그 의미 그대로이니, 이 점에 관해서만은 네가 백 번 믿어도 좋고 100프로 만족할 수 있고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여기에 우리 믿음의 핵심이 있는 것. 곧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너만 사랑하고 나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사랑과 똑같이 그렇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강조하여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자기 자신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이심을 명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때문에 나의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단지 구원 얻어 영생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나의 순간순간의 삶으로 융화되어 나타나는 그런 사랑이니 곧 내 생명의 핵이 됨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는 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함이다. 그래서 이를 간략히 표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생명"(골 3:4)이시라 하게 된다. 이렇게 둘(주님과 나는 엄연히 둘이 아닌가)이면서도 하나요, 하나로 보이면서도(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또 주님 혼자만 계시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둘(주님은 나와 함께, 나는 주님과 함께 존재하는)로서 동거(同居), 동역(同役), 동고동락함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존재이기에 성경은 "새 피조물"이라 하고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다"고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린 결론에 좀 더 덧붙여, 그 요한복음 21:18-25의 줄거리를 다시 훑어보면 이렇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자,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이 일견(一見)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순전히 베드와 요한에게만 관련된 개인적인 이야기인데도 버젓이 수록되어 있다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왜 요한이 따랐을까. 그러면 또 베드로는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주님께 "이 사람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던가. 또 주님의 대답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언정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는 것이었으니 왜 그럴까.


나중에 요한도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단순히 주님 하신 말씀 그대로의 의미뿐이었다고 했다. 물론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인해 당시 자신에 관해 떠돌던 말들을 여기서 단박에 해명코자 이 대목을 일부러 삽입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베드로가 어떤 심경에서 그런 질문을 했고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어떻게 간파하시고 그런 대답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게 된 당시 베드로의 마음 상태는 과연 무엇이었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필자는 그 초점을 베드로의 질투 같은 감정에다 두어보았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필자 개인의 상상 즉 편견으로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당시 베드로의 마음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계셨던 주님의 대답에서 그 실상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즉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고 앞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점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든 하지 않든 요한과의 관계는 요한과의 관계로서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너는 너와 나와의 관계 이상으로 네가 관심을 둘 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요한이 주님을 따르니까 (베드로 자기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도) 그렇게 여쭌 것이다. 요한이 따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여쭐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렇게 여쭐 정도의 그 관심이 요한을 위함이었던가, 주님을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자기를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그저 부지중에 튀어나온 소리였던가. 그 어떤 심리 상태였을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그런 것에 관심 두지 말라는 책망과 비슷하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베드로와 주님과의 관계만 강조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부질없는' 관심이었던 셈이다. 베드로는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과 요한과의 사이에 대한 베드로의 관심인 것이다. 그토록 요한을 사랑하시는데 그리고 현재 요한이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따르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一여기에 베드로의 관심이 미쳐졌던 것.


그런데, "내가 요한과 무슨 엄청난 일을 해 주고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말을 해 주든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너는 오직 나와만 상관 있다" 하시는 것이 주님의 대답이시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이 베드로의 "관심"을 질투에다 관점을 두었는데 실상 그럴까? 암암리에 그런 질투 섞인 감정에서 그렇게 말이 나왔을까.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 요한도 따라 나서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인데 즉 베드로 자기 혼자에게 주신 개별적인 분부이신데도 요한이 말하자면 옆에서 끼어 든 격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을 샘에 가까운 감정이라 판단해보았을 뿐이다. 베드로는 요한 못지 않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위치와 시각에서 그렇게 요한을 보았으니 말하자면 경쟁의식 같은 것을 느낀 것이라 하면 역시 망상일까. 질투가 원래 그런 성질이 아닌가. 독점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독점욕을 "질투"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있는가. 요한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더러 따르라 하셨지만 이미 요한의 발걸음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간의 묘한 감정의 교차다.


필자의 판단을 유치한 생각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사랑은 원래 독점이다. 남녀 부부간의 육체의 사랑 곧 둘이 한 몸이 됨에서도 상대에 대한 독점이다. 나 외에는 주인(소유주)이 없다는 확신이다. 다시 말해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이지 더 다시 아내 자신의 것이 아니다(고전 7:4). 남편 외의 남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의 몸 역시 똑같이 아내만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독점(獨占)임과 동시에 완벽한 의미에서의 공유(共有)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사에는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굳이 샘(jealousy)이 아니라고 해도 좋으며, 앞에서 말한 대로의 '관심' 표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고로 위의 설명에서 "질투"라는 용어에 대해 거북해할 이유도 실상 없겠다. 이 '독점'과 '공유' 두 가지를 함께 담고 있는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여기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도 그런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지적하려 함이 아니니, 앞에서 밝힌 대로 오직 주님과 나와의 세상 그 무엇과도 비견(比肩)할 수 없을 '가장 가까운 사이'로서의 사랑을 밝히려 하고 강조하려 함이다.


하나님과의 개별적이고 사적(私的)인 사랑의 관계이니, 이는 한 몸된 아내 남편 사이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보이려 함이다. 이는 바울이 그 편지에서 이미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즉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뉘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32-34) 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의 아들이라 할 때 이는 우리를 낳은 부모의 체질 그 육신을 그대로 물려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 즉 성령을 나의 것으로 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베드로는 "신성"(神性-신의 성품)이라 했다. 육신의 부모는 육체이기 때문에 그 육체를 내 것으로 하여 내가 태어나 그 자식이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영 곧 성령을 나 자신의 일부로써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니까 즉 육체(나 자신)와 영혼(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 관계이니까) 영원토록 모시어 영을 물려받는 것이 됨으로써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하나님으로서 요한만의 세계로써 만족하고 너 베드로는 나와 너 베드로만의 사랑의 세계로서 너와 나만의 세계인즉 내가 요한에게 어찌하든 너는 신경 쓸 것 없고 오직 너는 나와의 사랑의 관계만 진척시키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것만이 너와 나의 유일한 소관사로서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이 또 있느냐" 하시는 말씀이 되신다. 내게는 최고, 최선, 최상, 최신(最新)의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특성은 항상 새롭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이기도 하다. 늘 새롭다는 감격 가운데에 있으므로 싫증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이 어제가 아니었듯이 내일은 오늘이 아닌 것이다. 똑같은 판에 박은 듯한 날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렇다. 사랑이 생명에서 배어 나오고 우러나면서부터 생명 또한 사랑과 이제는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지냄이 좋지 않다"(창 2:18) 하신 대로 혼자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요 혼자가 아니라 둘 또는 그 이상이니 그래서 사랑이 삶(생명)의 중추 역할을 함이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의 우리말 "배필"은 남녀개념이 아니라, 단지 돕는 자("helper")라는 단어이므로 오역(誤譯)이다. 성령을 우리말 번역은 "보혜사(保惠師, Comforter)"라고 했지만 바로 창세기에 여자가 창조되기 전에 나오는 단어로서의 그 "helper"의 의미다. 즉 짝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고 그 말씀 즉시 여자가 창조되지 않았다. 그런 짝으로서 각종 짐승들(이들이 영물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사"들)을 지으셨다.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짝으로 삼으면 되는 데 그 중에 아무도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어 제각기 이름(그 생김새대로 붙여준 별명과 같은 것)을 붙여주었으므로 마지막 시도로 여자를 아담으로부터 창조하신 것이다.


그제야 아담은 이름을 붙여줄 수가 없었다. 자기와 같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있다면 자기의 이름인 "아담"밖에 없다. 그래서 범죄 전에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었고 아담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통했다. 범죄하여 여자가 남자에게 진정한 "돕는 자(helper)"의 자격을 상실했을 때 다른 영물들처럼 여자의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아담으로서는 여자에 대한 실망의 순간인 것이다. 이제 요한의 그 복음서 말미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의 모든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이렇게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분을 가리켜 성경에 보혜사(保惠師-"Comforter"(KJV), "Counselor"(NIV), "Helper"(NKJV))라 하고 있는데, 그런 '보혜사'란 거창한 듯이 보이는 이름은 우리말 번역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창세기에서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실 때 내비치신 바로 그 "조력자"(helper)의 의미임을 재차 강조한다(요 14:16). 다시 말해 서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구조(構造)에서의 그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상대방' 즉 짝의 개념으로서의 '돕는 자'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할 때 그 영이시라는 의미는, 우리의 육체와는 그런 현격한 차이의 의미로서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나에게만 계심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계심이다. 즉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만 아니라 나 개인에게 또한 이렇게 말씀하심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요한에게 무슨 일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이상으로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최고, 최상, 최선이다. 내게는 네밖에 없다. 네가 내게는 최고, 최상, 최선이다. 내가 나 자신을 네게 선물로 다 주지 않았느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한시도 떠날 수 없어 너와 영원히 하나되어 함께 살지 않느냐. 사람인 나로서 너를 위해 이 이상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이 내가 사람이 되어 있는 측면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라. 하나님으로서 나는 요한이나 기타 모든 사람 그 어느 누구든지 너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육체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되 육체가 아니라 영인 하나님에게는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네가 언제나 명심할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를 가까이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고로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랑이다. 머리가 몸을 위해도 몸이 머리를 위하지 않으면 그 한 몸됨이 유지될 수가 없다. 이것이 한 몸됨의 특징이다. 함께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일방적으로 움직이면 이 하나됨이 존속될 수가 없다.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 있고 또한 요한을 비롯해서 모든 다른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다. 요한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네게 내가 한 말이다. 네게 다시 말하거니와, 너는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이를 위하고 사랑하는 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이의 뜻대로 해 주는 것 자체가 무한한 삶의 낙을 누리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마시고 먹을 때에 느끼는 낙만큼이나 큰 낙인 것이니 생명의 근원적 낙이기 때문이다. 먹는 것은 육체에 관해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이지만, 영적인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므로 우리가 능히 측량할 수 없는 낙일 수도 있어 더할 수 없이 그야말로 극락(極樂, 최고도의 낙)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는 것 자체가 우리 육체가 누리고 느끼는 그 쾌락과는 비교도 안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낙을 느끼게 됨이니 이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 사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말씀과 "나의 먹을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 하신 데에서도 드러난다.


단지 이 세계는 그런 정상적인 생명의 낙이 통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육체적인 낙 그런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의 생명에서 느끼는 낙만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정작 영적인 생명의 낙은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니 이런 측면에서도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다. 고로 '먹는 것 자체가 낙이기 때문에' 먹고 마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일이 옳기 때문에' 비록 그런 자연스러운 낙을 현재 이 시간은 느끼지 못해도 의지력으로 (이것이 자연계의 법칙을 좇아 육체의 낙만을 따르는 동물 같지 않고 지, 정, 의로 행동하는 인간의 인간다운 행위가 됨) 당연히 할 일을 하게 됨으로 인한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면의 색다른 낙을 느끼고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받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그리스도를 위한 즉 사람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기뻐하시는 일을 함에서 오는 보람찬)이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낙이 아닌 낙과는 정반대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요 그래서 이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명시하기를, 주님께서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다"(히 5:8) 하였고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다"(1:9) 한 것이다. 또 "이와 같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5:9)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들이요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된 만유의 주인들이다. 주인답게 격조 높은 품위에 걸맞는 말하자면 검증된 자들이라야 함은 당연하다. 이 검증은 우리가 세상에서 시험을 받음으로써 되는 것이요 그래서 여기서 탈락하는 자가 생김은 불가피하다(마 7:21/25:45). 왕으로서 겁약(怯弱)해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서든 스스로의 왕다운 품격, 왕으로서의 품성, 체통에 흠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검증을 받는 것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딱 한번의 기회뿐이다. 약한 가운데서 강함을 스스로 지키는 것, 역경 가운데서 그런 품성을 검증받는 것인데 주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고후 13:4) 선례를 따르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단 한번으로 끝난다. 베드로는 이것을 정금(正金)이 시뻘건 불에 연단되어 나오는 것에 비유했다. 우리 인생사에서도 이런 일은 항다반사로 일어남을 본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에서 이런 일이 없으랴. 하나님이시라도 사람되신 후에는 이런 과정(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을 통과하셔만 했던 것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개,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금도(襟度)를 네 활개 펴고 마땅히 나타내어야 할 우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으로써 될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머리께서는 의를 사랑하여 불법을 미워하는데 몸이 과연 "불의를 좋아할"(살후 2:12) 수 있는가. 사람이라도 그렇게 되면 손발이 안맞아 하나될 수 없는데, 하물며 영생하게 되어 있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구조에서랴. 그래서 아버지의 뜻(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시는)을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명백히 하시지 않았는가(마 7:21).


둘이 하나됨은 우리의 삶의 경우 한 몸의 구조와 체제 속의 삶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 한 몸을 유지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의요, 이와 반대로 나가는 것이 불법, 불의 곧 죄, 악이다. 하나님께 의가 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위해 사시지 않고) 오직 그 몸된 우리 각자를 위해 사시는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와 하나님은 처음 창조 당시부터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우리 피조물 자신의 행위 곧 자유 선택에 의한 자아중심이다. 아담이 그러했고 사단 등 악령들이 그러했다. 그런 반면에 현재의 모든 거룩한 천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 바로 그 분류에 속하든 않든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므로 아무쪼록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요한이 기록한 대로의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오간 문답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지만 정작 핵심은 그런 설명에 있지 않다.


주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강하게 느끼는 베드로의 "질투"니 하는 따위의 말은 아주 유치한 망상으로 치부해도 좋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도마에 올려 놓고 요리해본 것은 다음의 가장 핵심적인 것 즉 왜 성령께서 요한으로 하여금 이런 "잣단" 기록을 남겨 놓게 하셨는가 하는 그 근본이 되고 핵심이 되는 다음 의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사랑이면서도(마치 엄마 품속에 안긴 아기처럼,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느라 품속에서 안고 키우면 아기가 하나이지 여러 아기일 수가 없듯이) 전체를 상대로 하는 똑같은 사랑을 강조하시기 위해 이런 대목을 요한으로 하여금 삽입해 넣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역시 이제까지의 설명처럼 말도 못하게 중요하지만, 정작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목표로 그와 같은 얼핏 보기에 아무 의미도 없을(앞에서와 같이 심층 분석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내용을 기록하게 하셨느냐 하면,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인 것이다. 즉 요한 복음서의 이와 같은 특이한 끝 마무리 기술(記述)은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아주 확정적으로 인(印) 쳐 주시는 성령의 최종적인 사인(서명 날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냐면 이상의 그리스도와 베드로와의 대화가 부활하신 직후의 시점(時點)에서 일어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자시 강조한다. <부활하신 직후의 시점(時點)에서 일어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부활이 만일 지어낸 것이고 꾸며서 만든 것이라면 절대로 이런 대목이 기록될 수가 없다는 이 한 마디 결론으로써 충분하다. 진실 그대로의 가감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고 요한은 이렇게  기술한 후에도 '필요 없고 객쩍은 사사로운 소리'라고 하여 나중에 삭제하려는 생각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다.


요한 자기 딴에는 자기에 관한 주님의 언급(베드로에게 주신)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가 퍼져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였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은 바로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라는 점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거짓말쟁이가 이런 말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 삼아 지어내려 했다면 왜 이것 하나만 만들어내겠는가. 내친 김에 비슷한 이야기를 더 만들어 냄 직하지 않은가.


요한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베드로의 질문 자체가 어찌 보면 싱겁기 짝이 없다. 또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으로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 역시 위의 설명과 같이 자세하게 분석해보지 않고 언뜻 들으면 알쏭달쏭하기만 하여 요령 부득이 되는 동문서답 격이다. 따라서 요한과 베드로 두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극히 사사로운 멋없는 이야기가 되어 있다.


최소한 이 요한의 복음서를 읽게 될 수많은 독자 개개인에게는 전연 상관도 유익도 없는 대목임이 분명한 것이다. 요한은 참으로 사사(私私)로운 필요 없는 멋적은 이야기를 중요한 복음서 기록에다 덧붙여 놓은 것인가. 아니다. 우리 전체 아니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메시지로서 절대 불가결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메시지가 되어 있음이니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는 최종 증명이 되어 있음, 이것이다. 물론 이것도 이렇게 믿는 자에 한해서 주시는 크나크신 은혜다.


이와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 우리에게는 당연히 멋적기만 한 당시의 한 에피소드이지만 그것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점에서 그래서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증명이 되어 있을 것이므로 이를 기록하도록 요한을 감동시키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화이었으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러하니 이것이 바로 이 글과 이 대목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지어낼 경우 이상과 같은 일견 무의미하기만 한 장면을 지어내야 한다는 고충이 뒤따르는 것이기에, 아무리 천재와 같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까지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성과 역사성을 후세 사람들에게 확고부동하게 증명하여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 요한으로 하여금(요한 자신은 자기에 관해 쓸데없이 나도는 낭설을 불식시키려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런 무의미한(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시답잖은 내용을 기록해놓게 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나눈 베드로의 대화>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의 다른 모든 기록은 그 부활이 진실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인 만큼 그런 의도하에서라면 아무 특이한 점이 없으나, 이 대목만은 순전히 요한 사도의 개인적인 해명(解明) 차원에서의 사사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 독보적인 가치가 실로 무한대이다. 그래서 필자는 '무리하기는 하지만' 그 대목이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질투 운운" 하면서까지 억지로 해설을 시도해볼 정도였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복음서 기자는 아주 간단히 기술해  버리고 있으니 이는 너무나 명백한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여러 가지로 그 부활의 사실을 입증해서 드러내기 위해 이런 저런 말로 애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써 모든 답은 이루어져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유독 요한만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자기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해 두고 있을 뿐이다.




 

Ⅸ. 4복음서를 달리 일괄해서 보기





혹자는 4복음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은 사건 순서별로 분류해서 일치시키고 있는데 자료로 참작하시면 좋을 것이다. 이 글의 편자는 이 기준에 따르지는 않고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편집하였다.


 

제1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약 30년 6개월의 기간 및 그 이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1

말씀




1:4

2

누가의 머릿글



1:1-4


3

요한의 머릿글




1:1-18

4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1:5-23


5

엘리사벳의 수태



1:24,25


6

'마리아'에게 천사 나타남



1:26-38


7

'마리아', 엘리사벳을 방문



1:39-56


8

'세례 요한' 출생



1:57-79


9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

1:18-25




10

예수님께서 나심

1:25


2:1-7


11

예수님의 세계(世系, genealogies)

1:1-17


3:23-38


12

목자에게 천사 나타남



2:8-20


13

예수님의 할례

1:25


2:21


14

성전에서의 예수님



2:22-38


15

동방박사, 이집트로 피신 후 돌아오심

2:1-23


2:39


16

어리신 예수님



2:40


17

12살 때 성전에서



2:40-52


18

자라나시는 예수님



2:51


19

'세례 요한'의 활동

3:1-12

1:1-8

1:80/3:1-18

1:15-28

제2부: 세례 받으심과 시험 받으심-약 6개월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20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

3:13-17

1:9-11

3:21,22

1:32-34

21

예수님의 광야 시험

4:1-11

1:12,13

4:1-13


22

예수님께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1:19-51

23

갈릴리 가나에서의 혼인 잔치




2:1-11

제3부: 첫 유월절에서부터 약 1년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24

가버나움에 가심




2:12

25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심




2:13-25

26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심




3:1-21

27

'유대'에 머무셔서 세례 주심




3:22-36

28

사'마리아'로 가시다가 여인 전도




4:1-42

29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힘

4:12/14:3

1:14/6:17

3:19,20

3:24

30

'세례 요한' 잡힌 후 갈리리로 물러가심

4:12/14:3-5

1:14,15/6:17-20

4:14,15/4:43-45


31

갈릴리에서 본격적 공생애 시작, 가나에서 '헤롯'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

4:12

1:14,15

4:14

4:43-54

32

나사렛에 가셨다가 가버나움에 거처하심

4:13-16


4:15-31


33

고기 잡는 기적과 함께 제자들을 부르심

4:18-22

1:16-20

3:1-11


34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 고치심


1:21-28

4:31-37


35

베드로의 장모 고치심. 갈릴리에서 기적을 행하심

8:14-17/4:23-25

1:29-39

4:38-44


36

문둥병자를 고치심

8:2-4

1:40-45

5:12-16


37

폭풍을 잠잠케 하심

8:18-27

4:35-41

8:22-25


38

거다랴 지방의 귀신 들린 자

8:28-34

5:1-20

8:26-39


39

야이로의 딸, 혈루증 앓던 여인

9:18-26

5:21-43

8:40-56


40

소경들과 귀신 들린 자

9:27-34




41

중풍병자 고치심

9:2-8

2:1-12

5:17-26


42

세리인 마태 부르심

9:9-13

2:13-17

5:27-32


43

금식에 대해

9:14-17

2:18-22

5:33-39


제4부: 두번째 유월절에서부터 약 1년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4

예루살렘 베데스다에서 38년된 병자 고치심




5:1-47

45

밀밭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안식일 변론

12:1-8

2:23-28

6:1-5


46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 고치심

12:9-21

3:1-12

6:6-11


47

산에 오르셔서 12 제자 택하심

10:2-4

3:13-19

6:12-19


48

산상 보훈

5:1-7:29/8:5-13


6:20-49


49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8:5-13


7:1-10


50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7:11-17


51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질문함

11:2-10


7:18-35


52

세상의 불신에 대해 책망하심

 11:20-30




53

죄 많은 여인, 죄 용서하심 받음



7:36-50


54

갈릴리 지방에 제2차로 순회하심

9:35/12:22-37

6:6/3:20-30

8:1-3/11:14-23


55

비유를 말씀하시는 까닭을 설명하심

13:1-53

4:1-34

 8:4-18/13:6-10/18-22


56

바리새인 등이 표적 구함을 책망하심

12:38-45


11:16,29-36,24-26


57

말씀 듣고 순종하는 이가 복이 있다



11:27,28


58

제자들을 "내 가족"이라 하심

 12:46-50

3:31-35

8:19-21


59

바리새인 등에게 "화 있으라" 하심



11:37-54


60

제자들과 군중들을 가르치심



12:1-59


61

어떤 갈릴리인들의 재앙을 인용하시어 말씀하심



 13:1-9


62

나사렛 재차 방문하시나 다시 배척 당하심

13:54-58

6:1-6



63

전도의 필요성을 강조하심

 9:36-38




64

12제자들을 전도차 보내심

10:1,5-42 6:7-11

9:1-5



65

갈릴리를 계속하여 두루 다니심

11:1




66

12제자가 곳곳에 다니며 회개하라 전도함


6:12,13

9:6


67

'세례 요한'의 죽음

14:6-12

6:21-29



68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보고자 함

14:1,2

6:14-16

9:7-9


69

12제자 돌아옴

 6:30,31

9:10



70

남자와 아이 외에 5,000명 먹이심

14:13-21

6:32-44

9:10-17

6:1-14

71

바다 위로 걸으심, 게네사렛에서의 기적

14:22-36

6:45-56


6;15-21

72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심




6:22-7:1

제5부: 세번째 유월절로 시작하여 1년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73

손 씻는 일에 대해 변론하심

15:1-20

7:1-23



74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15:21-28

7:24-30



75

농아(聾啞)를 고치심

15:29-31

7:31-37



76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 먹이심

15:32-59

8:1-10



77

바리새인 등이 다시 표적을 구함(56항 참조)

16:1-4

8:11,12



78

바리새인 등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심

16:4-12

8:13-21



79

벳새다 근처에서 눈 먼 사람을 고치심


8:22-26



80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베드로가 다시 고백함(72항 참조)

16:13-20

8:27-30

9:18-21


81

장차 고난 받으실 것을 가르치시고, 베드로를 책망하심

16:21-28

8:31-9:1



82

변화산에서의 변형 후 내려오시면서 제자들과의 대화

17:1-13

9:2-13

9:28-36


83

벙어리되고 귀머거리인 귀신 쫓아내심

17:14-21

9:14-29

9:37-43


84

고난 받으심과 부활하실 것을 다시 말씀하심

17:22,23

9:30-32

9:43-45


85

성전세를 내는데 필요한 돈을 물고기 뱃속에서

17:24-27




86

누가 크냐 제자들이 변론

18:1-35

9:33-50

9:46-50


87

"하늘로부터의 불"로 요한 형제를 책망하심



9:52-56


88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으나" 말씀하심

8:19-22


9:57-62


89

70명의 제자들을 전도차 보내심



10:1-16


90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7:2-53

91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




8:2-11

92

바리새인, 자기를 믿는 이들 그리고 일반 불신 '유대'인들과의 문답




8:12-59

93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심




9:1-41

94

선한 목자에 대해 말씀하심




10:1-21

95

70인이 돌아옴



10:17-24


96

영생 얻는 법에 대해 율법 학자와 문답



10:25-37


97

마르다가 자기 집에 식사하시기를 청함



10:38-42


98

기도에 대해 제자들에게 다시 가르치심

6:9-13


11:1-13


99

18년간 등이 굽은 여인 고치심



13:10-21


100

"구원 얻는 이가 적습니까?"



13:22-35


101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14:1-24


102

믿기 전에 단단히 각오하고 믿을 것을 말씀하심



14:25-35


103

죄인을 가까이 하심에 대해 바리새인 등에게 말씀하심



15:1-32


104

불의한 청지기 비유



16:1-31


105

실족, 용서, 겨자씨만한 믿음, 무익한 종 등등을 가르치심



17:1-10


106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심



17:11


(註-위의 106항과 앞서 있던 87항을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 이 편집자는 방향을 놓쳐 버린 것 같다. 편자가 이미 지적한 대로 요한 외에는 오직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고난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으로 사건을 설정해놓는 반면, 요한만이 예루살렘으로 서너 차례 정도 왕래하신 것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에 준하여 사건 순서를 정리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처음부터 편자가 강조했듯이 사건이 일어난 순서 배열이 중요하지 않고 그 내용의 전후를 살펴 주님의 교훈을 제대로 음미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어떻게 편집하든 상관이 없음을 여기서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87항과 106항을 같은 때로서 잡지 말고 별도의 시간대로 정해야 할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107

나환자(한센(Hansen)病者) 열 사람을 고치심

17:12-19

108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의 질문. 주 기도문



17:20-37


109

기도, 금식, 겸손 등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치심



18:1-14


110

'유대'에 이르시자 이혼에 대하여 바리새인이 질문

10:1-12

10:1-12



111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심

19:13-15

10:13-16

18:15-17


112

청년 부자와의 문답

19:16-30

10:17-31

18:18-30


113

포도원의 일군들

20:1-16




114

예루살렘으로 가시며 받으실 고난에 대해 말씀하심(81,84항 참조)

20:17-19

10:31-34

18:31-34


115

요한 형제가 예수님 좌우편에 앉을 것을 원함

20:20-28

10:35-45



116

여리고 근처에서 두 소경 고치심

20:29-34

10:46-52

18:35-43


117

수전절 겨울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과 문답




10:22-39

118

요단간 저편으로 나가심




10:40-42

119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11:1-54

120

공회(公會-Sanhedrin)를 모아 예수님을 처치할 음모를 논의




11:45-53

121

에브라임에 계심




11:54-57

122

삭개오의 집에 들르심



19:1-28


123

유월절 6일 전 베다니에 이르심




12:1,9-11

124

제자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

21:1-11,14-17

11:1-10

19:29-44

12:12-50

125

무화과 나무. 성전을 정결하게 하심

21:18,19,12,13

11:12-19

19:45-48


126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제자들이 발견

21:20-22

11:20-26



127

성전에서 바리새인 등과 문답

21:23-46/22:1-14

11:27-33/12:1-12

20:1-19


128

바리새인 등이 세를 바칠지 여부로 시험

22:15-46

12:12-37

20:20-44


129

바리새인 등을 책망하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23:1-39

12:38-40

20:45-47


130

과부의 헌금에 대해 말씀하심


12:41-44

21:1-4


131

예루살렘 멸망 예언, 성전을 마지막으로 떠나심.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주님 오실 일을 가르치심

24:1-25:30

13:1-37

21:5-36


132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

25:31-48


21:37,38


133

유월절 2일 전. 예수님 처치할 모의. 가룟 유다의 은 30. 향유를 가지고 온 여자 예수님 머리에 부음.

26:1-16

14:1-11

22:1-6

12:2-8

(註-향유를 부은 이 여자가 '마리아'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앞의 그 해당 부분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제6부: 사흘 밤과 사흘 낮


마태

마가

누가

요한

134

유월절 잡수시기를 준비하심

26:17-19

14:12-16

22:7-13


135

12제자와 식사하심. 제자들 간에 또 누가 크냐 쟁론

26:20

14:17

22:14,24-30/22:15-18


136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13:1-20

137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미리 말씀하심

26:21-25

14:18-21

22:21-23

13:21-35

138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하심

26:31-35

14:27-31

22:31-38

13:36-38

139

성찬예식一떡을 떼심

26:26

14:22

22:19

(고전 11:23,24)

140

성찬예식一잔을 나누심

26:27-29

14:23-25

22:20

(고전 11:25)

141

제자들을 위로하심




14:1-31

142

여러 가지로 가르치심




15:1-16:33

143

아버지께 기도하심




17:1-26

144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26:30,36,46

14:26,32-42

22:39-46

18:1

145

유다에게 배반 당하시다

26:47-56

14:43-52

22:47-53

18:2-12

146

가야바와 안나스에게 이끌려-베드로 세 번 부인

26:57,58,69,75

14:53,54,66,72

22:54-62

18:13-18,24-27

147

가야바와 '유대' 공회 앞에서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시자 단죄되심

26:57,59-68

14:53,55-65

22:66-7163-65

18:19-23,28

148

빌라도 앞에 서심

27:1,2, 11-14

15:1-5

23:1-5

18:28-38

149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냄



23:6-12


150

'헤롯'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냄. 빌라도가 예수님을 방면하려고 애씀

27:15-23

15:6-14

23:13-23

18:39-40

151

빌라도의 수차 에 걸친 방면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자 마침내 '유대'인에게 넘김. 온갖 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해

27:26-31

15:15-20

23:23-25

19:1-16

152

유다가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

27:3-10


(행전 1:18,19)


153

십자가를 지시고 끌려가심

27:32-34

15:21-23

23:26-33

19:17

154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까지

27:35-50

15:24-37

23:33-46

19:18-30

155

운명하실 때 그리고 운명하신 후의 그 날

27:51-61

15:38-47

23:45,47-56

19:31-42

156

빌라도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27:62-66




제7부: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의 40일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157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이전에 일어난 주님 부활 당시에 일어난 일

28:2-4/27:52,53

16:1



158

무덤에 여인들이 찾아감

28:1,5-8

16:2-8

24:1-11

20:1,2

159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찾아감



24:12

20:3-10

160

'마리아' 막달라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심


16:9-11


20:11-18

161

예수님께서 두번째 나타나심

28:9-10




162

'유대'인 두령들과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인들의 흥정

28:11-15




163

베드로에게 보이신 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보이심


16:12,13

24:13-36

(고전 15:5)

164

도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16:14-18

24:36-49

20:19-23

165

도마도 함께 있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20:24-29

166

갈릴리로 간 제자들. 디베료 바닷가에서 예수님 그들에게 보이심

28:16



21:1-24

167

갈릴리의 한 산에서 나타나심

28:16-20




168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다른 경우

(고전 15:6,7)



(행 1:3-8)

169

예수님의 승천


16:19-20

24:50-53

(행 1:9-12)

170

결론을 맺는 요한




20:30,31/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