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4복음서 한 권으로 보기

메시아 예수님(마, 막, 눅, 요 복음서 한꺼번에 보기) ㅡ1

Tayseek Kwon 2015. 12. 29. 21:09

 


(초신자나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는 이로서 처음 대해야 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 막상 대하고 나면 고어투성이에 처음부터 정나미가 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고(崔古)이면서도 최첨단 지식이요 정보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눈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성경이어야 마땅하다. 이 글은 이미 믿음에 들어선 이들보다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함이다)





통관복음서(通觀福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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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메시아 예수님ㅡ



l. 탄생

ll. 가르치심

lll. 나의 죽음

Ⅳ. 부활一새 피조물의 탄생, 새 삶의 시작

V. 마지막 아담ㅡ'또 하나의 나 자신(My Another Self)'

 Vl.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구약 성경의 의미)

 4복음서가 아닌 사도들의 서신에 나타난 메시아 죽으심의 의미

Vll. 제5복음서(logia iesu)

Vlll.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

Ⅸ. 다른 시각에서 4복음서를 일괄해서 보기




4복음서의 내용을 일괄해서 읽는 의미


한 권의 책에다 예수님 일대기를 기록해두면 될 것인데 왜 네 가지씩으로 기록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가 하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자체 증명으로서 성령의 감동에 의해 그렇게 되어졌음을, 이 통관복음을 읽으시는 중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 읽고 저 책 읽고 그것도 같은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 하는 등으로 시간도 제법 걸리고 그러다 보면 신약성경 복음서를 읽을 흥미를 잃는 수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럴 것 없이 4복음서 전부를 한 책으로 정리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내리 읽는 통독(通讀) 형식이 되도록 엮고, 이를 '통합복음서' 또는 '통관복음서'라 명명했다. 4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을 제외한 3복음서를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 하므로 이런 이름도 무난하리라 여겨서다.


4복음서 자체로서의 가치는 방금 지적했듯이 막중하다. 그런 점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인식하는 한편, 주님의 생애 전체에 대한 명확한 윤곽을 우리가 머리에 담아 두기 위해서는 부득불 이 같이 통독해서 읽을 수 있도록 편집된 것이 있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통합 복음서'만 읽으면 사복음서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근시안적 식견이다. '통합 복음서'는 전체 줄거리를 정확히 파악하자는 것이 목적이고, 사복음서는 제각각의 기술자(記述者)의 안내를 따라 그 특징을 강조한 대로 하나씩 음미해보는 가치가 있음이다.


내용이 중복되는 것은 생략하고 다른 것은 한데 취합(聚合)하여 조화 일치를 기했지만, 각 복음서 장절만은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남겨 두었으므로 그 장절을 따라 각 복음서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성경의 각 구절은 말하자면 흩어져 널려 있는 구슬들이다. 이 하나하나의 구슬들로써는 전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을 제대로 제 위치에 꿰어 놓아야 하는데 이 작업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계시로 말미암지 않고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하셨다(마 11:27/요 14:26). 그러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 둠으로써 우리 편에서의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열심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두드리는 자에게만 문이 열려진다.


용어는 쉬운 현대어로


내용 중에 약간 고친 내용 몇 가지를 말하면 아래와 같다. 가장 먼저, 일반적으로 현재 쓰이는 쉬운 말로 고치는 것 외에도(예를 들어 '옥'은 감옥으로 바꾸는 따위), 자주 나오는 단어 중 "서기관"은 '성경학자', "세리"는 '세관원', 바리새인은 '바리새파' 사람, 사두개인은 '사두개'파 사람, 율법사는 '율법학자' 등으로 고쳐 보았다. 복음서에만 220회 이상 나오는 "가라사대"다. 이래 가지고 어찌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야 된다고 애독하라고 권할 것인가. 벌써 오래 전에 간단히 손 보아 고칠 만한 일도 방치해두고 교회당 건물 크게 짓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 대체적인 한국 교회야말로 세상 종교의 하나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라는 증거가 아닌가.


사건의 순서보다 내용 중심으로


4복음서를 읽어보면 주님께서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심으로써 강조하여 가르치신 일도 물론 있으나, 내용상 특별히 전후 사정을 살필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한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해서 그 표현의 차이만 표시해두는 것으로 정했다. 즉 말씀하신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각 복음서에서 먼저 기술되고 나중 기술되는 순서 같은 것에는 구애받지 않기로 하였다.


말씀하신 순서를 반드시 밝힐 필요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즉 명확하게 사건 배열이 그 순서가 드러나지는 경우 외에는 말씀하신 때나 사건을 무리하게 차례를 따라 배치할 필요는 없다고 보아, 시간대 별로 나누지 않고 장절(章節) 상의 순서 배열도 무시하고 다만 그 내용을 중심으로 분류 편집하되, 중복되는 일 없이 한 자리에서 그 대목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했다. 4복음서 중 누가복음을 골격으로 하여 그 대체적인 순서를 따랐다.


"예수님" 호칭


"예수"는 무조건 "예수님"이라고 바꾸었다. 성경 번역에는 어쩔 수 없이 번역자 자신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원문이라도 사본에 따라서는 어떤 구절이 빠져있기도 하고 혹 보태져 있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성경에 대한 자기의 이해가 원숙하지 못하면 어떤 구절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한계는 인식 못하고 도리어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닐까 지레짐작해서 마음대로 그것을 고치는 것은 옳은 도리가 아니다.


자기가 이해 못하는 것은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말이나 영어를 막론하고 현대어로 고쳐 쓴 성경이라고 하는 데에서 그런 사례를 더러 본다. 이렇게 되면 '성경'이 아니라 성경 해설서 또는 개인적인 견해와 주장을 펴는 사적인 논설밖에 되지 않는다.그런데도 현대어 성경이라 표제를 달았으니 이득커녕 해독이 더 클 우려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한다 해서 심각한 의미상의 오류가 있다고도 보지 않는 것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주장(主掌)하심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주장하시면 왜 정확무오하게 번역하도록 강제하시지 않느냐 하겠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아 하늘이 땅보다 높음과 같은 것.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든지 적절하고 합당할 수도 있는 일이므로, 그렇게 믿고 오직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에만 우리의 최선을 다함이 옳은 줄 안다.


우리나라 말은 존대어가 발달하여 그 존대어 하나로 그 말이 담은 의미가 아주 달라지는 그러한 어군(語群)에 속한다. 우리말 번역에 "예수"라고 한 것은 그런 존대어가 분명하지 않은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무조건 아무 식견 없이 무지무식하게 따른 결과다.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즉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존대해드리고 예수님은 그냥 단순한 사람으로 알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이나 다 같은 하나님이시나 예수님의 경우 사람이심을 강조하시니까 그냥 보통 사람으로 대접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의 헷갈림에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주님(주인 곧 소유주이니 상전(上典)의 의미다)으로서 현재 내가 모시고 있으면서 그럴 수 없다.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께서는 그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지으셨다고 성경에 밝히고 있다. '말미암아'라는 말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아드님 친히 창조를 담당하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그 안에 계셔서 함께 창조의 일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신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번역자의 미숙한 성경 지식이 계속 우리말 성경에서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수치다. 웬만한 지위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직접 현재 내 앞에 있으면 내가 얼마든지 하대(下待)할 수 있거나 평교(平交)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존대어를 쓰도록 되어 있다. 하물며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께 관해서랴. 여기서 "예수님"이라는 호칭으로 통일시킨 것도 그런 자연스러운 맥락에서다.


예수님은 그 성령으로 지금 현재 내 안에, 내 앞에. 우리 앞에 계신다. 다음 말을 들어보라.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이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고후 4:10-11). 우리 위해 죽으셔서 현재 우리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마치 아이 이름 부르듯 한다.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칭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칭호에는 "님" 자를 붙여도 붙이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본다. 그리스도와의 직접 대화가 아니고 그리스도께 관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존함이다. 자기 아버지의 함자(銜字)를 함부로 말하는 이는 없다. 그래서 비록 성경 내용에 대한 설명을 하더라도 이 때는 반드시 "예수님"으로 일관성 있게 표현하는 것이다.


불교 신도들은 그들의 현재 실존하지 않는(왜냐면 죽고 지금은 살지 않으니까) 가상적 교주임에도 불구하고 깎듯이 예를 차려 "부처님"이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부처님"이라 불러 준다. "부처님 오신 날"이 그런 예다. 그러나 소위 기독교인들은 "예수, 예수" 하니 낯 부끄러운 일이다. 심지어는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 운운" 하는 정도다. 기독교인들마저 이런 자기 비하(卑下)를 일삼는다.


성령께 대해서는 우리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다. 이유는 어감상(語感上)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시고 게다가 성령이시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존재가 따로 계시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상적으로 "주님"이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또는 아버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부러 "성령님"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기도할 때 "아버지" 또는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읽을 때 성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가 이해가 될 수 있도록 편자(編者)의 견해를 (주[註])로서 곳곳에 삽입해놓았으므로 참작하시면 될 것이다. 이 글은 제1부 탄생, 제2부 가르치심, 제3부 나의 죽음, 제4부 부활一새 피조물의 탄생, 새 삶의 시작, 제5부 마지막 아담ㅡ'또 하나의 나 자신(My Another Self)', 제6부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구약 성경의 의미), 제7부 제5복음서(logia iesu). 제8부 복음서가 아닌 사도들의 서신에 나타난 메시아 죽으심의 의미, 제9부 다른 시각에서 4복음서를 일괄해서 보기, 이렇게 8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제6부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예고하던 구약성경이 4복음서 기록에서 인용되고 있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그러나 간략하게 초보 지식 정도로 설명했다. 따라서 필요하시면 이 부분을 먼저 읽어두시는 것도 바람직하다 하겠다.


"여호와"


우리말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를 "주(主) 하나님"으로 고쳤다. 신약에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절 그 이름으로 하나님을 지칭한 예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일면 '보이시는 하나님'으로 정착하시고 그렇게 사람으로 나타나신 이름이 메시아 "예수"이시니 이 이름으로 족하고 충분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부름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시대다. 율법 시대에는 이방인들이 음란하게 자기네가 위하는 신들을 섬기고 그 이름들을 정해서 불렀기 때문에 그에 대처해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이름이 "여호와"시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성경을 필사(筆寫)할 때 하나님의 이 이름이 나오면 나오는 족족 반드시 손을 몇 번씩이나 씻고 난 다음 필(筆)을 잡았다고 한다.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도 발음하지 않고 번번이 "주(主)"라고 대신 불렀었다.


그런 유래인지는 모르나 흠정영역(欽定英譯)에서도 이 이름 대신에 대문자화하여 "the LORD"으로 차별화하여 대용(代用)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흠정역(KJV)은 1611년 영국 제임스 1세의 명으로 47명의 학자가 영어로 번역한 성경으로서 간결한 표현과 장엄한 문장의 리듬 및 아름다운 어구법(語句法)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개역(改譯) 성경이 많이 나왔으나 아직도 상당수가 이 장중한 고어체(古語體)의 성경을 애용하고 있는 이유다. 여기서도 반드시 그런 뜻은 아니지만 새삼스럽게 그 이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신약성경에서도 구약을 인용하는 경우 외에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므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경우 "주 하나님"으로 통일하고 있으니 양해하시기 바란다.


영국의 헛슨 테일러가 중국 선교를 위해 순수하게 믿음으로만 운영하는(선교 기금을 먼저 마련하고 혹은 후원회를 구성하여 그 뒷받침으로 진행하는 사업이 아니라 무일푼으로 오직  기도와 믿음과 그리고 때마다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운영해 가는) 중국 내지 선교회가 한참 활동하던 당시 중국에 장래가 촉망되던 한 30대 초반의 유학자가 회개하여 다대한 복음 활동을 했는데 그가 처음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성경을 읽음으로 된 것이었다.


바로 중국의 석자직(席子直-구미인들에게는 "Pastor Hsi(Xi)"로 널리 알려져 있음) 목사이다. 그는 전도지도 두어 편 썼고 그가 지은 찬송가도 60편 가량 중국교회에서 애창되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으로 또한 널리 알려져 그의 본명보다는 별명 겸 존칭으로 "귀신 쫓아내는 사람" 즉 "석승마(席勝魔-중국말로 '시셩모')" 목사로 중국인들 간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아편 중독자들을 주님께 인도해내는 큰 사업을 20여년간 지속한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믿기 전 그 자신 인생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색으로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지인의 잘못된 권유로 그 자신이 중독자의 처지에 한 때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중국 교회의 거물이 성경을 직접 읽음으로써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처음 나온 사실에 자극을 받아 누구나 부담없이 성경을 읽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통관복음서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길잡이가 될 뿐 아니라 이미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므로(딤후 3:15) 성경을 애독하도록 널리 권유할 필요가 있다.


이하 본문 중에 나오는 ()와 []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로 된 것은 성경 구절상으로 4복음서의 각기 다른 표현을 나타낸 반면, []는 편집자 자신의 설명임을 가리킨다. 편집자의 설명으로는 (註)로도 나타냈는데 여기서는 문장이 길므로 괄호 내 괄호 구별은 본문과 같이 했다. 편집자의 글이라도 영문자가 들어가는 괄호는 모두 ()로 처리했다. 또 괄호 표기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 안에서의 괄호는 []로, [] 안에서의 괄호는 ()로 각기 달리 했으니 이것과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성경의 장절 표시는 모두 ()로 통일시켰다. {}는 성경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괄호다.


고유명사로서의 인명, 지명 등은 ''로 표시했다. 예: '마리아', '갈릴리'. 단 예수 또는 그리스도는 예외로 했다. 그리고 흔히 알려져 있는 외국 이름의 경우 역시 제외시켰다. 예: 영국 왕 제임스. 그리고 영문 표기에서 ""로 표시한 것은 해당 성경 대목의 영역이 그렇게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 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밤낮 묵상하는 이는 복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강가에 심은 나무가 계절을 따라 실과를 맺으며 그 잎이 마르지 않음 같으니 그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할 것이다"(시 1:1-3). "나는 생각을 미워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시편 119:113의 원 의미ㅡ"I hate vain thoughts: but thy law do I love"-흠정영역).

고어체(古語體) 그대로 방치된 우리말 성경을 현대어로 새로 번역하고자 하는 시도는 많다. 독자의 기호에 따라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을수록 좋다. 앞으로 보다 많이 좋은 번역이 나오게 되기를 바란다.


l. 탄생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되고 말씀의 일군이 된 이들이 전해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는 집필자가 많은 터에 (눅 1:3) 이 모든 일을 시초부터 상세히 살펴본 나도 귀하(데오빌루스ㅡ"you, most noble(or, excellent) Theophilus")께 차례대로 써 보냄이 좋은 줄 앎은 (눅 1:4) 귀하로 그 배운 바가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복음의 시작은 이렇다.

'세례 요한'에 대한 천사의 예고


(눅 1:5) '유대' 왕 '헤롯'(Herod) 때 '아비야' 계열('바벨론' 포로 귀환 때 돌아온 4개 제사장 계열 중 하나)에 이름이 '사가랴'인 제사장(祭司長)이 있는데 그 아내는 '아론'의 후예인 '엘리사벳'이었다. (눅 1:6) 두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規例)대로 흠 없이 행했으나, (눅 1:7) 수태(受胎)를 못하므로 무자(無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았다.


(눅 1:8) 때마침 '사가랴'가 그 계열의 차례를 따라 제사장 직무를 하나님 앞에 수행할 때 (눅 1:9) 제사장의 전례(前例)를 따라 제비 뽑아 주님의 성소(聖所)에 들어가 분향(焚香)하고 (눅 1:10) 모든 국민은 그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는데 (눅 1:11) 주님의 사자(使者)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香壇) 우편에 섰다.


(눅 1: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눅 1:13) 천사가 말하기를,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을 들으셨으므로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할 것이니 (눅 1:15) 그가 주님 앞에 큰 사람이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모태(母胎)로부터 성령 충만을 받아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님 곧 그들의 하나님께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다. (눅 1:17) 또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님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이를 의인의 슬기로 돌아오게 하고 주님을 위해 세워진 한 백성을 준비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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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註-"보라! 주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않도록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그가 돌이키게 할 것이다"(말 4:5,6).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terrible day of the Lord: And he shall turn the heart of the fathers to the children, and the heart of the children to their fathers, lest I come and smite the earth with a curse".


"만군(萬軍-the hosts)의 주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낼 것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열(to prepare)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主)가 홀연히 그 전(殿)에 임하실 것이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言約)의 사자(使者)가 임하실 것이다"(말 3:1). "Behold, I will send my messenger, and he shall prepare the way before me: and the Lord, whom ye seek, shall suddenly come to his temple, even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whom ye delight in: behold, he shall come, saith the Lord of hosts".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기를, '너희는 주(인) 하나님의 길을 열라.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사막을 질러가는 평탄한 대로(大)를 열라'"(사 40:3)."The voice of him that crieth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우리말 번역은,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기를, '너희는 광야에서 주 하나님의 길을 열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출현으로써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정확한 번역(흠정영역[KJV]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음)이라고 할 수 있고 '세례 요한' 자신도 다음에 나오지만 그런 식으로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왜냐면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국민에게 나타나기 전에는 줄곧 인적 드문 황야에서 생활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원도 생명도 없는 이 세상을 황야, 그리고 사막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고로 이 경우 틀리고 맞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상의 경우를 보면 둘 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번역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흠정영역을 대표적으로 함께 소개하는 것이니 좀더 연구를 요하는 경우, 인터넷을 통해 각 번역을 대조해서 참작해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황야에 거처하였고 "황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자처하였는지 그 이유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을 사람이 살 수 없는 황야와 사막에다 하나님께서 비유하신데 따른 것이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다음 말씀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즉 '이사야'의 예언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무엇이라 외칠까요?', 이렇게 외치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주(主) 하나님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인생들)은 실로 풀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다'"(사 40:6-8)라 한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상징하여 '세례 요한'은 황야에서 거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본 틀은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나타나시기까지는 변함이 없으니 곧  이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빈 들 곧 인적 없는 삭막한 사막과 같은 곳임을 성경은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천국"이 바로 사람 사는 곳이다. 다시 말해 자연법칙에 예속되지 않는 세계라야 영혼을 갖춘 인간의 진정한 보금자리인 것. 자연법칙에 얽매인 육체가 필경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현재의 상태는 인간 본령(本領)이 아니니 첫 사람 아담이 범죄행위로써 스스로 벌어들인 참상이요 비극이라는 사실을 이 "황야, 사막" 개념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곧 인간으로서의 탄생은 이런 사막의 황야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시작됨을 나타냄이니 그래서 "황야와 사막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길을 열라, 굽은 데가 곧아지고 높은 데가 낮아지고 낮은 데 즉 골짜기가 돋우어져 땅이 평평하게 되어져서 생명의 주님께서 오시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게 하라"고 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회개하라는 뜻이니, 회개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또한 "'세례 요한'"이라 한 것이다. 회개함으로써 세례 받음이 다름아닌 인간의 현재의 상황 곧 죽음과 죄와 멸망에 처해 있는 현실을 타개하는 유일한 생명 길이요 새 창조의 길인 것이다. 모세 율법이 가리키고 안내하던 바였다.


곧 죄 덩어리, 죄투성이로서의 인간이므로 생명의 법질서에서 벗어난 지금까지의 일체의 행위를 뉘우침이 선결 문제요, 지금까지의 인간 삶이란 것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므로 이 죽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죽음에 하나되어 함께 하심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곧 세례 받음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와 함께 죽으심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음은 물 속에 완전히 침몰함이니 곧 죽음에 완전히 빠져들어가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죽어 장사 지내지는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죽음 안으로 완전히 침잠(沈潛)됨으로써 과거의 나 다시 말해 이제까지 산다고 살아 왔던 나 자신이라는 것이 완전히 말살되는 바탕 위에서만 비로소 새 생명으로 다시 출생하고 그리하여 생명의 법질서를 정상적으로 준수할 수 있게 되는 것. 과거는 청산되고 새로운 미래가 설정되어 현재 전개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새 출생 곧 새 창조의 삶이니 세례로 시작되고 상징되는바 인간 개벽(천지 개벽이 아닌)의 상황이다. 이 획기적인 변화는 그리스도 친히 그 육체로써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셔서 완전히 죽음 가운데 침몰하셨다가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시어 내 속에 영원히 계시게 됨으로써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래서 이를 가리켜 성령으로 난다(出生)고 하는 것.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것은 그 때문이다. 즉 나와 하나되심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나의 죽음에 동참하시어 나와 함께 죽으심을 통해 나와 하나 되시고, 이 하나 되신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내가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과정을 나를 위해 완벽하게 치르신 의미를 나타냄이다. 이렇게 "새 생명"의 법질서 가운데에서의 삶을 가리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다"(롬 6:3-6) 한 것이다.


성경은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결코 되지는 않으니 하나님께서는 애매 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8에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자 하나님"이라 했는데, NIV에서는 이를 "God the one and only, who is at the Father's side"라 하고 있다. 그 난하주(欄下註)에서만, "어떤 사본에는 the only(or only begotten) Son"이라 하고 있다는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 가지 원어로 표기된 것을 번역자의 소견을 따라 그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하는 의미로 나타낼 수는 있어도 그러나 정작 그렇게 표현한 원저자는 딱 한 가지 의미만을 나타내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 곁에 있는 아들"과 "아버지 품 안에 있는 아들"이라는 묘사는 의미뿐만 아니라 어감 자체부터 다르다. 원저자인 요한 자신은 분명하게 그 구절로써 아버지께서 여러 아들이 아닌 한 아들만을 낳으셨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NIV 번역은 "유일하게 홀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강조하고 명칭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시라는 식의 의미를 넌지시 비치는 그야말로 요령부득으로 번역하고 있다. 낳는다는 개념을 우리는 성별로 따져 모친에게만 해당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으나, 성경은 인생의 씨가 그 아버지의 계통임을 밝혀 아버지가 "낳는" 것으로서 밝히고 있으니(마 1:2), 때문에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지 하와의 후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아들을 가리켜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것으로서 표현함은 서로 연결이 되고 자연스러운 것.


자연계에서는 태에서 나고 자라고 그것이 장성해서는 늙어가고 죽어 썩는 것이지만 자연계를 초월한 경우 (만일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내처 '에덴'낙원에서 자식들을 낳았다면) 낳자마자 아담처럼 완벽한 성인으로서의 인간으로 출현하는 것처럼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태초부터 영으로 계시는 영원하신 아버지이시고 영원하신 아들이시니 아들께서는 아무리 조물주이시지만(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앞에서는 영원히 "품 속의 아들"이신 것이다.


"품 속에 계신다"고 해서 자연계에서 태어난 갓난 것이 제대로 활동할 수 없어 그 모체(母體)에 의존해 있는 의미로만 한정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님은 이를 가리켜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시다" 하심으로써 분명히 하셨고 이 "크다"는 것은 "만물보다 크시다"는 말씀으로서 또한 명백히 하셨다. 그리고 성별(性別)은 영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천사들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에만 해당된다.


비록 자연계의 육체로 창조된 아담이지만 그 속에 영혼이 조성된 후로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고, 연이어 여자가 창조되는 대신 곧장 '에덴'낙원으로('에덴'낙원도 아담을 위해 창설된 것) 들어갔고 거기서도 여자는 창조되지 않는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다음에도 여자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동물들"을 지으신 것이고 그 연후에 여자를 지으신 사실에 유의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묘사되시는 것은 인간의 근본인 아담을 따라 된 표현이니 아담이 나중에 여자가 생김으로써 비로소 남자로 분류된 되었으므로 이 근본을 따라 남성으로 받아 그렇게 나타내어지시는 것이다.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인데 어버이 자식 관계를 표현할 때 인간의 언어대로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생각해보면 자명해진다. 모친으로 나타내면 반드시 아버지를 연상하게 될 것인즉 양자 택일을 해야 하는 판에서는 부득불 대표성을 띠는 아담을 따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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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가 일시 벙어리되어


(눅 1:18) "제가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습니다" 하고 '사가랴'가 천사에게 말하니 (눅 1:19) 대답하기를,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네게 보내심을 받았다. (눅 1:20) 보라! 일이 이루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되어 말을 못할 것이니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오면 내 말이 이룰 것이다" 하였다.


(눅 1:21) '사가랴'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성소(聖所) 안에서 그가 지체함을 보고 이상히 여기다가 (눅 1:22) 나오기는 하였으나 말을 못하므로 성소 안에서 환상을 본 줄로 알았다. 형용으로 의사 표시를 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다가 (눅 1:23) 직무가 다하자 귀가했다.

(눅 1:24) 이 후에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5개월간 숨어 있으며 말하기를, (눅 1:25) "주님께서 나를 돌아 보시는 날 인간의 내 수치를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신다" 하였다.


그리스도(메시아) 탄생에 대한 천사의 예고


(눅 1:26) 그 후 6개월이 지나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다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가서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이와 정혼(定婚)한 처녀에게 오니 이름이 '마리아'였다. (눅 1:28) 천사가 들어가 말하기를,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함이 있으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하였다.


(눅 1:29) 처녀가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웬 일인고" 생각하는데 (눅 1:30) 천사가 말했다. "'마리아'야,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그가 큰 사람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러지게 되실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니 (눅 1:33) 영원히 '야곱'의 가문(家門)에서 왕이 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다." ["다윗의 왕위", "야곱의 가문" 등 마치 유대 민족에 한정된 것 같은 인상을 주나, 사실은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모든 믿는 이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눅 1:34) '마리아'가 말하기를, "저는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이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눅 1:35)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실 것이니 이러므로 나실 거룩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러지게 되실 것이다. (눅 1:36) 보라! 네 친족(親族)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다. 본래 수태(受胎)하지 못한다 하는 이가 이미 6개월이 되었으니 (눅 1:37) 무릇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하므로 (눅 1:38) '마리아'가 "주님의 여(女)종이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니 천사가 떠났다.


'마리아'가 급히 달려 '엘리사벳'에게로


(눅 1:39) 이 때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산중(山中)의 한 '유대' 동네로 달려가 (눅 1: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서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듣자 아이가 배 안에서 뛰놀았다. 이에 '엘리사벳'이 성령 충만을 받아 (눅 1:42)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고 네 태중(胎中)의 열매도 그러하시다. (눅 1:43) 내 주님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게 웬 일인가.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아이가 배 안에서 기뻐 뛰노는구나. (눅 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에게 반드시 이룰 것이다".


(눅 1:46) 이에 '마리아'가 말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救主)를 기뻐함은 (눅 1:48)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니,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만대(萬代)에 저를 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눅 1:49) 전능하신 이께서 크신 일을 제게 이루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이에게 대대(代代)로 이르십니다. (눅 1:51) 그 팔로 능력을 나타내시어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리치시고 비천한 이들을 높이시고 (눅 1:53) 굶주리는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며 부자를 빈 손으로 보내십니다. (눅 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기억하셔서 (눅 1: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을 '아브라함'과 그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이루실 것입니다". (눅 1:56) '마리아'가 3개월 정도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세례 요한'의 출생


(눅 1:57) '엘리사벳'이 해산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눅 1:58) 이웃과 친족이 주님께서 그를 크게 불쌍히 여기심을 듣고[자녀 생산을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여 당시 큰 수치로 여겼으므로] 함께 즐거워했다. (눅 1:59) 8일째가 되니 아이를 할례(割禮ㅡ남자 아이 생식기의 끝 즉 포피(包皮)를 자르는 '유대'인 의식)하러 온 이들이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아이 이름을 '사가랴'라 하고자 하는데 (눅 1:60) 그 모친이 "아닙니다. '요한'이라 할 것입니다" 하므로 (눅 1:61) "그대의 친족 중에 이런 이름으로 작명한 예가 없다" 하고 (눅 1:62) 그 부친에게 "무엇으로 이름하려는가?" 형용으로 물으니 (눅 1:63) 글 쓰는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니 다 이상히 여겼다.


(눅 1:64) 그러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을 하니 (눅 1:65) 인근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하고 온 '유대' 산중에 이 모든 말이 두루 퍼졌다. (눅 1:66) 듣는 이마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되려나?" 하니 주님의 손이 아이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 충만을 받아 이에 예언하여 말하기를, (눅 1:68) "주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 백성을 돌아보시어 속량(贖良, 구속[救贖], to redeem)하시고 (눅 1:69) 저들을 위해 구원의 뿔(뿔은 능력과 권세의 상징)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 1:70) 이는 주님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아 (눅 1: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십니다.


(눅 1:72) "우리 조상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 거룩하신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눅 1: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로서 (눅 1:74)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눅 1:75) 종신토록 주님 앞에서 성결(聖潔)과 의(義)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할 것이라' 하신 대로입니다.


(눅 1:76) "이 아이야,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불려지고 주님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눅 1:77) 주님의 백성에게 그 죄 용서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할 것이니 (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인함이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이에게 비취고 우리의 발을 평안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눅 1:80) 아이가 자라면서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荒野)에 거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의 나심


그 나심은 이러하다.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定婚)하고 동거(同居)하기도 전에 이미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마 1:19) 이 일이 성령으로 된 것을 모르는 남편될 사람 '요셉'은 [본시] 의로운 사람이라 파혼(破婚)은 하되(신 24:1) 이를 폭로하는 대신 비밀리에 해 주려는 (마 1:20)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주님의 사자(使者)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꺼려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되신 이는 성령으로 되신 것이다. (마 1:21)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 되심이다".


(마 1:22)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 곧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되신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마 1: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 주님의 사자(使者, 천사)가 분부한 대로 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마 1:25) 아들을 낳기까지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하더니 낳을 때 이름을 '예수'(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의 '히브리'어)라 하였다.


'베들레헴'


(눅 2:1) 이 때에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saer Augustus-로마제국 초대 황제)'가 영(令)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戶籍)하라 하였으니 (눅 2:2) 이런 호적은 '구레뇨(Cyrenius)'가 '수리아(Syria)' 총독되었을 때에 처음 한 바 있었다.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니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를 향하여 (눅 2: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는데 '마리아'가 이미 출산 날짜가 가까웠던 터라 (눅 2:6) 거기서 해산하였다. (눅 2:7) 이에 그 맏아들을 낳아 포대기로 싸서 여물통(manger)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이 차서 빈 방이 없었음이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


(마 2:1)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은 '헤롯' 왕 때였다. 당시 동방(東方)으로부터 박사(wise men)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느냐? 우리가 동방(東方)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 하니 (마 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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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註-하늘의 별들은 모두 이 지상의 인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하늘 위의 별들은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分定)하신 것"(the stars, {even} all the host of heaven...which the Lord thy God hath divided unto all nations under the whole heavenㅡ흠정영역)(신 4:19)이라 함과 같다. 그래서 점성술과 같은 것이 예로부터 성행하고 있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처럼 이런 것들을 위하거나 이런 것을 믿고 따르는 일체의 점술 행위를 금하시고 죄로 정하시는 것이니(신 18:10,14/사 47:13-15)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위하고 의뢰하는 행위(롬 1:25)일 뿐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그리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데도 이 외의 달리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는 것은 도리에서 벗어나는 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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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大祭司長)과 율법(律法) 학자들을 모아 "그리스도(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마 2:5) "'유대' 지방 '베들레헴'입니다.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되었으니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도시 중 가장 작지 아니하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이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牧者, 양떼의 앞장을 서므로 곧 통치자를 가리킴)가 될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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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註-이상 예언의 전거(典據)는 구약 미가서 5장 2절이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네게서 나와 내게로 올 것이니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서부터이고 태초(太初)로부터서다"인데, 흠정영역은 "But thou, Bethlehem Ephratah, {though} thou be little among the thousands of Judah, {yet} out of thee shall he come forth unto me {that is} to be ruler in Israel; whose goings forth {have been} from of old, from everlasting"이다. 이를 인용한 위의 마태복음 구절의 흠정영역으로는 "And thou Bethlehem, in the land of Juda, art not the least among the princes of Juda: for out of thee shall come a Governor, that shall rule my people Israel"로 되어 있다.


이렇게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내는 대목이 많은데, 구약 예언과는 약간 다르게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바 이는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고 단지 손으로 필사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누구나 그 전거를 찾아 확인하는 것이 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예언 성취만은 정확하며 또 확실하게 기술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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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 이에 '헤롯'이 비밀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마 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알려 주어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시오" 하였다. (마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때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므로 (마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계심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예물을 드렸으니 황금과 유향(乳香, 동아프리카·아라비아산 감람의 일종; '이스라엘' 민족이 제례에 쓰던 고급 향료)과 몰약(沒藥,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 분포하는 감람과 교목으로 고대로부터 방향 및 방부제로 쓰고 즙액은 향수·의료품· 구강 소독 및 통경제·건위제 등에 썼음)이었다. (마 2:12)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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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註-흔히 보는 그림에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고 하여 세 사람만 낙타를 타고 가는 광경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멀리서 왔고 또 언어가 서로 다른데 통역인도 없이 올 리가 없다. 그러므로 "박사" 3인을 위시해서 다소간의 인원(하인들을 포함하여)이 동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대충 그 줄거리만 뽑아 소개하고 있으므로, 그 장면들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상상력을 동원함이 좋다.


그리고 박사들이 보니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움직여 그리스도께서 갓 태어나셔서 뉘이신 그 곳에 멈추었다고 했다. 성경은 그 별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다. 정체를 정확히 지적해 주지 않았으니 우리도 그만큼 해석의 자유 또는 여유가 있다 할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에서 밝히는 사실은, 박사들이 "보았다" 하고 "그 별"이라고 증언하는 그것만을 '인용하는 것'에 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 자체로써 그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천문학적 지식 즉 우리의 상식대로 말하면 별이라는 것은 박사들이 증언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시 천문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그들이 "움직이는 별"에 의아해하지 않을 리가 없다. 박사들이 처음 본 것은 "그의 별"이었으니 다른 별과 구별되는 별이다. 그리고 "나타났다" 했으니 이전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새로 생긴 별이다. 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은 이전에도 한 나라에 특출한 왕이 일어나게 되면 "그의 별"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런 근거가 과거의 그와 같은 기록에 의존하는 것이든 실제로 그런 사실을 직접 경험한 것이든 어쨌든 그 이론에 대한 확신이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런 별은 우리의 상식대로 말하는 천체(天體)와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 정체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천하 인생들을 위해 분정(分定)하신 별들"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이 천문에 해박한 지식이 있다 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든지 또는 지동설, 천동설이 그 뒤로부터 한참 세월이 지나서야 확정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지식이라는 것은 고작 점성(占星)을 치는 것과 관련되고 거기 한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별"을 보고 왔다는 것은 그런 점성과 관련되어 있음은 명백하다. 전에 없던 별이 "나타났는데" 그 별이 "움직여" 박사들을 안내했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왜냐면 이들 "박사"들이 본 "별" 이야기는 당시 이를 들었던 마리아(모든 일들을 마음에 두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으므로)의 전언에 의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것인즉, "이상하게 생각하였다"면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것인데도 그런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추려야 할 몇 가지가 있다. ①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늘의 별들이 인간들의 활동과 관계 있는 것으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 ②영물(靈物)들-여기서는 사단을 위시한 악령들을 의미하지만-이 현재의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라는 것, ③따라서 고대로부터(현대에는 어떨지 모르나) "네피림"(창 6:4)이 세상을 주름 잡아 대체적으로 군왕(君王)들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 ④그렇다면 이들에게 소위 "하늘이 점지했다"는 식의 신적(神的)인 권위를 부여해 줄 목적으로 처음부터 악령들이 적극적으로 이런 일에 관여한 것이 점성이라는 것, ⑤그래서 악령들은 그들의 능력(지식을 포함해)으로 적절한 때 별로서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 등이다.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천체로서의 발광체임과 같이 영물들은 그 스스로 빛을 뿜어대는 존재들로서 그들이 비상한 능력으로 적당한 거리에서 광채를 발산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별"인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이런 영물들에 대해서는 지식이 전무(全無)하고 천체 자체에 대해서도 오늘날의 지식보다야 훨씬 미치지 못하니 그런 영물을 "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악령들 스스로가 이상 지적한 바와 같은 목적으로 그런 "별"로서 인생들을 속이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특별한 영걸이 태어날 때에는 이는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네피림과 관련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또 사단이 이 세상의 지배자이므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기법(技法)의 하나로 해당 지역 상공에 나타나 있는(점성에 관련된 천체들의 분류법을 따른 ) 성군(星群)들의 위치에 편승하여 이를 적당히 활용(악용)하여 스스로를 별로서 나타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대한 지배자의 출생을 예고할 때는 그런 식으로 악령들이 해당 지역 인생들의 눈에 띄도록 의도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도 그리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늘 위의 별들을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分定)하신 것"과는 관계가 없으면서도, 바로 그렇게 천하 만국을 위해 별들의 분포가 일정한 규칙성을 따라 분할되어 있는 것을 악령들이 활용(악용)할 수는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특별한 제왕(네피림의 출생 또는 환생 등의 소행으로서)이 출현할 때 악령들이 그와 같이 "그들의 별"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런 악령들의 활동과는 전연 무관하지만 그러나 악령들의 지배하에 있는 이 세상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이상, 일정량 그런 것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니, 천사가 이 경우 그런 악령의 역할을 대행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악령이 지금까지 해오던 관행을 따라 역시 그렇게 행동했을까 어느 쪽일까 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우리의 관심의 대상일 수도 없다. 그저 그런 정도로만 이해하면 될 뿐이다. 또 이런 일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라고 해서(천하에 되어지는 일이 하나님의 직간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이루어지는 일은 없으므로) 점성술을 이미 지적한 대로 정당시하는 것은 아니니 혼동하지 말 일이다.


이상 설명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하늘의 별들을 그냥 물체로만 보지 않고 반(半) 물질 반(半) 영물(靈物)과 같은 신비한 것으로 인식함으로 인해 미신에 젖은 고대인들이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고 그 앞에 경배한(신 17:3/왕하 17:16/21:3/21:5/습 1:5) 것이 아닐까. 별들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니 해와 달은 "움직일" 뿐 아니라 별보다는 비교도 안되리만큼 광채를 발하므로 거기 압도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이 이런 악령들의 활동을 정당시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로써 그리스도의 탄생을 증명하려는 그런 시도라고 해서도 안될 일이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는 것을 그냥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기술해두고 있을 뿐이다. 헤롯이 이 때문에 베들레헴 출생의 소아小兒)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등 끔찍한 사건을 일으켰고 더군다나 성경이 이에 대한 예언을 해두고 있으므로, 그 성취 차원에서도 기록할 만한 것이다(마 2:17).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대사건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한국 및 중국 등지에서 하늘의 무슨 무슨 별(星)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장군도 되고 제왕도 되었다는 등의 설화가 있는 것도 이런 사실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미신(그러나 네피림과 결부시키면 부분적으로 진실일 수도 있다)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간의 천문 지식이 발달하는 등의 변화로 더 이상 악령들의 속임수로 활용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신선(神仙) 사상도 악령 및 네피림과 관련된 것이다. 오늘날 과학 시대에서는 난데없이 소위 "외계인(UFO)"으로 둔갑해 있을 뿐이다).


네피림의 소위 "환생"


네피림의 환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좁쌀이나 그보다 더 작다 할 수 있는 하얀(태양에 의한 반사광인 듯 때로는 청색, 적색, 황색 등으로 변함) 색깔의 형체가 허공에 어떤 때는 빠른 속도로 어떤 때는 느리게 경우에 따라서는 허공에 가만히 붙어 흡사 박아놓은 듯이 고정되어 꼼짝도 않을 수 있는(폭풍이 불어와도 미동도 않을 수 있는) 그렇게 떠도는 형체가 네피림의 죽은 혼백인데 이것들이 여자의 태 속으로 들어가면 나름대로 작용하여 그런 연후 일단 태 밖으로 나오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몇 번이라도 이렇게 해서 인간의 육체를 입기만 하면 한 인간으로 출생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물론 처음으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고 이미 존재하던 것이 단지 여자의 태를 빌려 인간의 육체만 새로 입고 나오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런 네피림의 망령들을 NSO(Nephilim Soul Orb)라 부른다. 이들은 일반 인생들의 영혼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일정 형태를 지니는 영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형태라 해보아야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앞서 지적한 대로 좁쌀 만한 크기이다. 그러나 외국 사례 즉 유튜브(youtube) 동영상에 나타난 대로 하면 상당한 부피의 것도 있는 듯하다. mysterious orb, strange orb 등의 검색어로 치고 들어가면 각종 참고할 만한 영상들을 만나볼 수 있다. 요즘은 그것도 희귀한 것이라 하여 촬영자가 거두어 들이고 있는 듯 전보다 흔히는 볼 수 없는 것같다. 그러나 우연히 찍혀 그 정체를 몰라 당황해하는 이들은 지체 없이 공개하는 수가 있는데 바로 그런 영상들은 언제든 관찰이 가능하다. 필자의 경우도 우연히 촬영된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네피림의 망령 즉 죽은 넋을 가리켜 성경은 "귀신"이라 하는데 이들은 육체는 비록 죽어 썩어 없어져도 아비들인 영물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사진에 보면 영롱한 반사광을 2중, 3중 때로는 9중(重)까지로도 아름답게 나타낸다. 따라서 얼마든 형태를 변형시켜 (필자의 슬로 비디오에 의한 관찰에 따르면 26분의 1초마다) 변화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영물의 초자연계 육체 그대로이므로(비록 인간의 영혼이라는 특수 상황에 있기는 해도)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의 그 초자연계 몸으로 굳게 닫힌 문도 무사통과로 지내신  것과 같이 말 그대로 자연법칙을 초월한다.


고로 그런 식으로 해서 여자의 몸을 어느 부분으로든 투과(透過)하여 여자의 태 속에 안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식은 죽 먹기로 "환생"할 수 있다는 논리다. 혹 이 글을 읽은 분들 중에 이런 사전 지식을 통해 의심스러운 점이 상당하여 낙태시켰다고 가정하자(물론 이것은 절대로 권장하는 바는 아니나). 그러면 살생인가? 이 환생의 경우만은 아니다. 육체는 파괴되더라도 NSO는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환생"이 아닐 경우 살인임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손대는 일은 금물이다.


어쨌든 그런 자식은 본의 아니게 생산되게 마련이니 인간이 조처한다고 막을 일은 아니고 저들 악령들의 능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인즉 그냥 두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고 누가 네피림이고 아니고 하는 판단은 인생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는 실상을 말하는 것뿐이다. 고로 절대로 다른 것으로는 다 판단해도 "네피림"이라는 세 글자로는 판단하지 말 것이다. 요즘 세계 동영상에 사람의 얼굴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광고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악령들의 속임수로 일단 취급하고 현혹될 필요가 없다.


이 이상 상세한 것은 별도로 기회가 있을 때 밝히기로 하고 결론은 이런 네피림의 예에서도 확인되듯이 인간은 모친을 통해서는 인간 육체만이 전수(傳授)된다는 사실이다. 그 실질에 해당되는 영혼과 관련된 것은 부친으로부터 나는 것으로서 때문에 대대로 이어지는 이른바 "씨"는 남자로 인함이지 여자 계통으로 나는 것은 아니므로 예로부터 바로 그런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가 발전하기커녕 오히려 퇴보 일로를 치달아 물질 문명과는 반비례로 정신문화가 황폐해짐을 따라 호적제도까지 손질되고 난도질당하고 있는 실태다. 남자(아담)로부터 여자가 났으니 무릇 인간은 남자의 씨이지 여자의 씨일 수는 없다는 것이야 상식으로도 통하는 기본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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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


(눅 2:8) 밤중에 그 지방의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다가 (눅 2:9) 주님의 한 사자(使者, 천사)가 곁에 서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취는 것을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눅 2:10)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국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救主, savior)님께서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메시아) 주님이시다. (눅 2:12) 너희가 가면 포대기에 싸여 여물통에 뉘인 아기를 뵐 것이니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하는데, (눅 2:13) 홀연히 그 천사 주변에 천상(天上)의 허다한 무리(host)들이 나타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눅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가 서로 말하기를, "지금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눅 2:16) 급히 달려가 '마리아'와 '요셉'과 여물통에 뉘이신 아기를 찾아 (눅 2:17) 보고 이 아기에 대하여 천사가 말한 모든 것을 알리니 (눅 2:18) 듣는 이가 다 목자들의 말을 이상히 여기나 (눅 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재어두고 생각하였다. (눅 2:20) 자기들에게 알려준 바와 같음을 듣고 본 목자들은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다.

'이집트'로 피신


(마 2:13) 동방 박사들이 떠나자 주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 속에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일러 주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니, (마 2:14) 요셉이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가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님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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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註-"'이스라엘'의 어렸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호11:1)는 대목을 가리킨다. 이는 '이스라엘'의 첫 유월절 사건이 우리의 구속(救贖)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입어 하나님의 아들됨을 가리키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사실로도 통하는 복합 의미인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서도 그런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이 같은 유아 때 사건의 예언으로도 연결됨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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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무차별 영아 학살


(마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역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게 하니 (마 2: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렘 31:15)로 말씀하신 바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없어진 그 자식들을 인한 '라헬'의 애곡(哀哭)이니 어떤 위로도 효험이 없다" 함이 이루어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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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註-'헤롯'왕의 사망이 기원 전 4년이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도 그 무렵이고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위해 이집트에 피신했다가 돌아온 것도 극히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불과 8킬로 거리이므로 당일로 박사들이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린 '헤롯'왕이었기에, 그 다음날쯤 아동 학살극을 벌였을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요셉'과 '마리아'는 이집트로 떠났을 것이며 결국 며칠 안되어 '헤롯'은 급사(急死)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모든 것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는 '베들레헴'에 있을 때 즉 거기서 8일을 유하면서 영아이신 예수님을 안고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이렇게 여러 날이 지체되도록 의심 많은 '헤롯'이 그냥 있었을 리 없다.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다시 "이집트로부터 내 아들을 불러 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했으나, 반드시 그것이 이집트에서 체류했다는 뜻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이집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다시 '요셉'의 꿈에 천사가 '헤롯'의 죽은 사실을 알려 주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요셉' 일행이 이집트로 가는 길에 이미 '베들레헴' 인근의 아이들은 죽음을 맞는 비극이 연출되었을 수 있다.


'헤롯'은 자기 왕위를 보전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아들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로마의 '어거스터스' 황제는 '헤롯'의 두 아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차라리 '헤롯'의 돼지 중 한 마리가 될 일이지 그 왕자 중 하나가 될 일은 못되는군" 했을 정도다. '헤롯'이 죽기 닷새 전에도 이미 그 다른 아들을 죽인 터였다. 때문에 그가 죽을 때까지 '헤롯'왕의 목숨을 노리는 시도가 빈번했다.


초대교회 당시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얼마 후 그 역시 천사의 손에 죽은 '헤롯'은 '아그립바'라고 하는 그 손자다. 그 조부 '헤롯'도 그 한량없이 흘린 피-'베들레헴' 유아 학살을 포함하여-의 대가로 천사에 의해 급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헤롯'(손자)을 그렇게 천사의 손으로 죽이실진대 그 조부 '헤롯'도 그같이 데려가실 수 있음에도 왜 그렇게 아니 하셨느냐, 그렇게 하셨다면 죄없는 영아들이 죽임을 면할 것이 아닌가 혹 생각한다면, 세상의 모든 살인행위를 사전 예방하실 수 있는데도 왜 방치하시느냐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 된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이집트로 피신하게 할 것 없이 '헤롯'의 목숨을 끊어놓으면 될 일이 아니냐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 된다. 그렇게 방치하시는 것은 악을 조장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된다. 아예 그럴 바에야 세상의 살인행위는 하나도 없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과도 같다. 아예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죄는 종국적으로 살인행위니까 죄를 짓지 않도록 막으시면 될 일이 아닌가 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롯'의 손자를 처치하신 것은 그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조부 '헤롯'도 마찬가지다. 죄든 의(義)든 자유의지를 따라 행해짐이다. 죽을 때에 죽었는데 그럼 왜 성경은 천사가 그를 쳤기 때문이라 하는가? 이 대목(행 12:23)에서는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다시 말해 죽음의 근본 원인, 죄의 성격을 성경이 밝힘이다. 


즉 남보다 "억울하게" 또는 "죄 지은 것도 없이 까닭도 없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이 '빌라도'의 만행을 주님께 알리자 주님은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있어 그렇게 죽은 줄 아느냐?" 반문하시고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 하심과 같다. 즉 죽을 때가 되어 죽든 어떻게 죽든 무릇 인생의 죽음은 "회개치 않음을 인한 멸망"이라는데 있다.


천사가 '헤롯'을 쳤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다시 말해 모름지기 인생의 죽음은 그가 지은 죄 때문에 맞는 결과 곧 형벌인 것. '헤롯'만 아니라 누구든 믿지 않는 이는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음 즉 자아중심이라는 점에서 똑 같기 때문이다. 인생의 죽음은 자연계에 속한 똑 같은 육체이지만 그런 동물과는 다른 것이니, 비슷한 죽음이지만 동물들의 죽음은 죄 때문이 아닌데 유독 인간만은 죄의 결과다.


첫 사람 아담의 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죄의 결과다(롬 5:12). 이는 범죄하기 전의 인간 즉 첫 사람 아담이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기 전에는 영생하고 죽지 않는 몸이었다는 바로 그 뜻으로 연결된다. 죽지 않는 즉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몸이었기 때문에 "네가 여차여차하면 죽으리라"는 경고가 가능한 것이다. 이는 아담의 몸이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일 수 없고 신령한(초자연적인) 몸이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단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간의 모든 죄의 실상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아중심이 되어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일체의 것이 악이요 죄, 불의 불법이다. 그러나 같은 인간의 죽음이라도 주님의 고난 받으심은 일반 인생의 일반적인 죽음과는 전혀 별개이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죽음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죽음으로서 그 의미가 무한대로 격상(格上)되어 있다.


아직도 구원 얻을 사람이 있는 동안은 교회를 통한 이런 주님의 남으신 고난은 지속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죽음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 세상 삶 자체가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영위하시던 삶 즉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던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헤롯'으로 대표되는 그런 죄의 삶과 대칭이 된다. 즉 자아중심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다. 왜냐면 죽어도 주님 위해 살아도 주님을 위함이니(롬 14:7) 그렇지 않고는 보내심을 받았다고(요 20:21/17:18) 할 수 없는 까닭이다.


혹자는, "예수님의 한 생명 보전하기 위해 그 숱한 죄 없는 아이들이 학살 당해야 했던가?" 할 것이다. 그러나, "죄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시편에 "내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시 51:5) 했다. 그런 말보다는 차라리, "'헤롯'이라는 인간을 그런 명령을 내리기 전에  왜 그 목숨 끊어놓지 않으셨는가?" 해야 보다 이성적인 질문이 된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전쟁에서 수백만 인간이 죽는데 "왜 하나님께서 전쟁이란 것을 애초부터 없애시지 않는가?"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당시 '베들레헴' 인구가 얼마였는지 모르고 그 중에서 2살 아래의 아이들이니 그 숫자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다. 1,2천명 정도였다 하기도 하고 그래서 죽은 아이들도 2,30명 선이었으리라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전염병이 한번 돌아도 어른 아이 할 것없이 그만한 숫자 또는 그 이상도 죽게 마련이다. 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인간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직접적인 원인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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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부터 다시 돌아오다


(마 2:19) '헤롯'이 죽은 후 주님의 사자가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꿈으로 나타나 (마 2: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다" 하니 (마 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마 2:22) 그러나 '아켈라오(Archelaus)'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 왕이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는데 꿈에 지시를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마 2:23)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하게 될 것이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다.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으심


(눅 2:21) 할례할 8일이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대로였다. (눅 2:22) '모세'의 법대로 결례(潔禮ㅡ'유대'인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33일, 여아를 낳으면 66일 후에야 그 산혈(産血)이 정결케 되므로 이 기한이 차면 결례 예물을 드리는데 산비둘기, 집비둘기 종류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것이었음)의 날이 다가오므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레12:2, 레12:3, 레12:4) (눅 2:23) 이는 주님의 율법에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님 앞에 바쳐 거룩하게 하라" 하신 대로 아기를 주님께 드리고(출13:2) (눅 2:24)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호도애, turtledove) 한 쌍이나 혹 어린 비둘기 둘로 제물로 바치려" 함이었다(레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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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註-여기서 잠시 우리말 "유월절"에 대해 말하면, "유월(逾越)"은 오늘날은 통용되지 않는 말로서 국어 사전에는 "한도를 넘는다"는 의미로 되어 있으나 유월절의 유월은 그런 뜻이 아니고 유(踰, 逾)도 "넘는다"는 뜻이요 월(越)도 넘는다는 뜻으로서 영역의 "to pass over"에 해당된다. 실상 한중일 3국 성경 공통으로 쓰이는 용어다. 속죄 양으로서의 주님을 상징하여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의 예표(豫表)가 되어 있는 유월절의 의미다.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는 즉 그들의 모든 기력(氣力)의 원천을 끊어놓는 천사는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예정된 무자비한 심판을 상징하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공포의 심판에 대하여 그야말로 무사 통과의 은혜를 입는 것이다. 복(福)은 누구나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터이지만 화(禍)는 찾아 주기를 바라기커녕 제발 그냥 지나가 주기를, 즉 통과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그 날 밤 죽음을 내리는 재앙의 천사는 '이스라엘' 집에는 이미 어린양의 피가 그 문설주에 발려져 있기 때문에 희생 양으로서의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고 절대로 들어오지 않고 고맙게도 그냥 통과해 버린 것이다.


들어오거나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 버린다는 의미가 얼른 머리에 들어오는 단어가 우리말로는 적당한 것이 없어 한문 "유월"로 대신한 것이다. 그런 절기를 '이스라엘'로 하여금 지키도록 명령하신 이유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오신 하나님의 뜻을 음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 때 죽음을 면한 '이스라엘' 장자(長子-당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들은 죽음의 천사에게 비명횡사했기 때문)들은 그래서 하나님께 바쳐졌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고 한 것.


이는 우리가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을 면한 그 은혜로 영원히 주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소유물됨을 상징하는 바로서 이 바로 우리 구원의 의미이다. 왜냐면 죽어 없어져 버릴 것이 그 죽음을 면했으니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맏아들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말하자면 그 날의 천사는 모든 생명체(인간이든 가축이든)의 기력(氣力)의 시작 곧 장자(長子)의 명줄을 끊어놓는 사자였던 것이다.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는 즉 그들의 모든 기력의 원천을 끊어놓는 천사는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예정된 무자비한 심판을 상징하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공포의 심판에 대하여 그야말로 사면(赦免), 면죄(免罪), 면사(免死)되는 은혜를 입음이다. 그냥 "넘어간다"고만 하면 국경을 넘어가는 것도 넘어가는 것이고 어떤 경계선을 지나가는 것도 다 '넘어간다'로 표현되는데, 들어오거나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 버린다는 의미로서 얼른 머리에 들어오는 단어가 없어 현재로는 "유월절" 외에 대안이 없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예로서의 '요셉'의 양자(養子)되신 위치이시니 당연히 맏아들로서 하나님께 바쳐져 '마리아'의 품에 안기신 채 이 때 성전에 오신 것이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과 관련된 것이나 첫 태에 난 사내 아이 곧 맏아들을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미리 앞당겨 유월절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이시요 우리는 그 맏아들을 필두로 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왜 하필이면 "어린 양"인가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했다(요 1:15). 첫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았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어린 양인가. 인간과는 불가분의 동물이니 그래서 인간의 한 식구처럼 되어 있는 것이 양이기 때문이다. 이 양이란 동물은 인간이 인도해 주지 않고는 물 가로 제대로 찾아가 마시지도 못하고 푸른 초장으로 스스로 나아가 뜯어 먹지도 못하는 유일한 짐승이다. 말하자면 목자 없이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인간 의존의 가축이다. 


그래서 주님 비유에서도 심판 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실 때 한 쪽에는 양, 다른 쪽에는 염소로 갈라 놓으신다고 하셨다. 염소는 다른 동물처럼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 말하면 양과 같은 생김새이지만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삶을 상징하고, 양은 그 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을 상징함 즉 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할 줄 모르는 자기 부인을 말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동물로서 상징하는 바는 절대적인 의존이지만 우리 인간으로 말하면 의존이 아니라 순종이다. 자의적으로 즉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하는 이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구약)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사랑의 원리에서 나를 위하시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요 나의 사랑의 상대가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용어다. 즉 나는 열 손 놓고 하나님만 기댄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나를 위하시는 이는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그 의미이다. 실상 내가 나 자신을 위함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더 잘 나를 위하심은 불문가지다.


그리고 희생 제물로서의 양이 어린 양인 것은(출 12:2) 말할 필요도 없이 어리니까 장래가 만리 같다는 뜻이니 즉 죽을 나이도 아닌 한창 살 나이로서 생명을 구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타(他)를 위해 희생 당한다는 뜻이 강조되어 어린 양으로 택해진 것이다. 즉 희생 당하는 사실이 강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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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이가 있으니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로 성령께서 그 위에 계셨다. (눅 2:26) 그가 주님(하나님)의 그리스도(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는데 (눅 2:27) 이 때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니 마침 아기 예수님을 안은 그 부모가 율법의 전례(典禮)를  따르고자 하여 들어오고 있었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눅 2:29) "주재(主宰)시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십니다. (눅 2:30)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뵈었으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서 준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십니다" 하니 (눅 2:33) 그 부모가 아기에 대한 그 말들을 기이하게 여겼다.


(눅 2:34) '시므온'이 부모에게 축복한 후 그 모친 '마리아'에게, "보시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해 세우심을 입으셨소. (눅 2:35) 또 칼이 그대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오" 하였다.


(눅 2:36) 또 '아셀'('야곱'의 12아들 중의 하나)' 지파(支派)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는 나이 매우 늙었다. 출가한 후 7년간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7) 과부된 지 84년으로 이 사람이 성전(聖殿)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금식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눅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하였다.


(눅 2:39)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고향 동네 '나사렛'에 이르렀다. (눅 2:40) 아기가 자라시며 강건해지시고 지혜가 충족해지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의 세계(世系, 世譜)


(마 1:1)(마 1:6)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의 세계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 '헤스론'은 '람', '람'은 '아미나답', '아미나답'은 '나손', '나손'은 '살몬',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마 1:7)(마 1:11)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르호보암'은 '아비야', '아비야'는 '아사', '아사'는 '호사밧', '호사밧'은 '요람', '요람'은 '웃시야', '웃시야'는 '요담', '요담'은 '아하스', '아하스'는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므낫세', '므낫세'는 '아몬', '아몬'은 '요시야', '바벨론'으로 이주할 때에 '요시야'는 '고냐'와 그 형제를 낳았다.


(마 1:12)(마 1:18) '바벨론'으로 이주한 후에 '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 '스룹바벨'은 '아비훗', '아비훗'은 '엘리아김', '엘리아김'은 '아소르', '아소르'는 '사독', '사독'은 '아킴', '아킴'은 '엘리웃', '엘리웃'은 '엘르아살', '엘르아살'은 '맛단', '맛단'은 '야곱',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칭호의 예수님이 나셨다. 그러므로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주할 때까지 14대요 '바벨론'으로 이주한 후부터 그리스도()메시아)까지 14대이다.


(눅 3:23)(눅 3:38) 그리스도(메시아)께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시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 그 이상은 '레위', '멜기', '얀나', '요셉', '맛다디아', '아모스', '나훔', '에슬리', '낙개', '마앗', '맛다디아', '서머인', '요섹', '요다', '요아난', '레사', '스룹바벨', '스알디엘', '네리', '멜기', '앗디', '고삼', '엘마담', '에르', '예수', '엘리'에서, '요림', '맛닷', '레위', '시므온', '유다', '요셉', '요남', '엘리아김', '멜레아', '멘나', '맛다다',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었다.


그 이상은 '이새', '오벳', '보아스', '살몬', '나손', '아미나답', '아니', '헤스론',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다.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 '스룩', '르우', '벨렉', '헤버', '살라', '가이난',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 그 이상은 '레멕', 그 이상은 '므두셀라', 그 이상은 '에녹', 그 이상은 '야렛', '마할랄렐', '가이난',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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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註-'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했다. 다른 여자들 즉 '다말', '라합', '룻'은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경우 단지 "'우리야'의 아내"라고만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간통에 의해, 정확히 말해 '다윗'의 범죄행위로 낳은 '솔로몬'이므로 성경은 일부러 그 사실을 밝히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솔로몬'의 친모의 이름이 나오지만 이 족보에서는 그 이름을 말하지 않고 단지 "'우리야'의 아내"라 하여 임자가 있는 여자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솔로몬'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면 '솔로몬'의 자손이라는 것이니, 이 정도로 사심(私心) 없이 편파적이지 않게 철저히 진실만을 기록한 것이 역사서(歷史書)로서의 성경의 철두철미함이다. 다시 말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것이 실로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진실 그대로 아무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그 점이다. 다시 말해 거룩하신 그리스도께서 범죄 행위에 의해 낳은 아들의 자손이시라는 의미이다.


성경이 꾸미고 손질한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기록이라면 과연 이럴 수 있을까? 이왕 거짓말할 바에야 하나님의 아들의 인간적 측면의 혈통(비록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양자[養子, 친자가 아닌]이시기는 하나)을 말하는 것이니 그 말을 빼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진실성은 구약을 기록한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기록이 인간적인 거짓과 꾸밈이 곁들여졌다면 당연히 '다윗'의 그런 불미한 사건은 과감히 생략해 버렸을 것인데도 곧이곧대로 기록해두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께서 그 '다윗'의 자손이시라 확신하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의 하나임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이런 족보를 '누가'나 '마태'가 기록한 것은 아니다. 아래 사실 즉 '다윗'의 자손이심을 알리기 위함이다.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의 계보를 주목하면 '마태'가 기록한 것과 '누가'가 기록한 것이 약간 다르다. 더 살필 것도 없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 바로 위에서부터 그 상이점이 드러난다. 즉 '마태'는 '요셉'이 '야곱'의 아들이라 하고 누가는 '헬리'라 했다. 이는 '요셉'이 양자라는 뜻이다. 두 기술(記述) 방법을 따라 생부가 '야곱'이고 양부(養父)가 '헬리'이다. 몇 대 올라가면서 이 두 갈래는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진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라 할 때 '요셉'의 양자 격이라는 그 의미를 강조함이 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양자라는 사실을 역설함이 된다. 그러나  양자나 생자나 '아들'임에는 차이가 없다. '요셉'이 비록 양자이기는 하나 '다윗'의 혈통임에는 분명하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양자이시기는 하나 다윗의 혈통임에는 변함이 없으시다. 관점(觀點)의 핵심이 이 "양자(養子)됨"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4복음서 기록이 제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기록이 상이하니 그에 대한 적절한 해설이 필요한데도 전혀 없다. 이는 각 복음서나 서신이나 그 때 당시의 필요에 따라 독자적으로 기술되었을 따름이고 횡적으로나 종적(縱的)으로나 상호 긴밀한 연관성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연관성이 없이 기술한 것이 내용면에서 일치한다는 것은 그 사실의 가감없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寫實性)과 진실성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거짓말에는 이런 것이 도저히 있을래야 있을 수 없다. 거짓말 자체가 비합리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그 합리적이지 못함을 합리성을 띤 것으로 호도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설명이 가해지게 된다. 거짓말 자체가 바로 그런 합리성으로 위장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설명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정반대다. 전혀 설명이라고는 없다. 복음서나  사도들의 서신 간의 차이 또는 상이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령 한 복음서 내에서도 특정 사실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그 한가지 예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의 그 육체의 특질이니 곧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말함인데(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이 있을 것) 다시 말해 문을 닫아도 거침없이 들어오실 수 있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변화인데도 이에 대해 당연히 단 한 줄의 글이라도 마땅한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전연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시 역설하지만 성경의 진실성, 그 모든 기록에서 일체의 거짓이 없고 속임수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자체 증명이다. '자체 증명', 이 이상 가는 증거는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면 즉 부활 자체가 거짓말이라면 이렇게 될 수가 없다. 편자는 지금 부활에 대해 논급(論及)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일체의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그 절대적 진실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그냥 우리 육체와 같은 것으로 살아났다고 하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특이하게 마치 유령처럼 되어 있는 몸으로 다시 살아났다 할 작정이라면 반드시 거기에는 왜 그런지 이유를 달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상식이다.


상식을 무시하고서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상식에 가장 밀접하고 근접하게 하는 것일수록 그것이 가장 쓸모 있는 효과를 내는 것이 모든 거짓말의 속성인 까닭이다. 그래서 거짓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 들통이 날 것을 왜 하겠는가. 고로 상당히 영리하고 또 지적 수준도 월등히 높아야 할 수 있는 것이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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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때의 예수님


(눅 2: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눅 2:42) 예수님께서 12살 되실 때에도 이 절기의 전례를 따라 가족이 모두 올라갔다가 (눅 2:43) 그 모든 날을 마치고  돌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무셨으나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했다. (눅 2:44) 동행 중에 있는 줄 생각하고 [워낙 인파에 휩쓸리다시피 하여 갔으므로] 하룻길을 간 후에야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으나 (눅 2:45) 만나지 못하여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6) 사흘만에 성전에서 만나니 예수님께서 선생[모세 율법에 관한]들 중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데 (눅 2:47) 듣는 이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하게 여기고 있었다.


(눅 2:48) 부모가 보고 놀라 그 모친이 말하기를, "얘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근심하여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 하니, (눅 2:4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혹은, "내 아버지 일에 관계해야 할 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시나, (눅 2:50) 부모가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눅 2:51) 예수님께서 함께 내려가셔서 나사렛에 이르러 [양친에게] 순종하며 받드셨다.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두었다. (눅 2:52) 예수님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시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세례(洗禮) 요한'


(눅 3:1) '디베료 가이사'(Tiberius Caesar-로마 제2대 황제)의 재위 15년 곧 '폰디우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유대'의 총독,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分封王), 그 동생 '빌립'(Philip)이 '이두래'(Ituraea)와 '드라고닛'(Trachonitis) 지방의 분봉왕, '루사니아'(Lysanias)가 '아빌레네'(Abilene)의 분봉왕으로, (눅 3:2) 그리고 '안나스'(Annas)와 '가야바'(Caiaphas)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황야)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셨다.


(마 3:1)(막 1:4) 이 때 '유대' 황야(광야)에 나타난 '세례 요한'은[처음으로 세례를 주었으므로 이런 명칭으로 불려진다] (눅 3:3)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가 용서되는 회개(悔改)의 세례[행 2:38]를 전파하여 말하기를, (마 3:2)(마 3:3) "회개하라, 천국(天國, the kingdom of heaven)이 가까웠다" 하였으니, (눅 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막 1:2)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네 앞에 보내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막 1:3) 황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기를, '너희는 주님이 가시는 길을 준비하라. 그가 곧바로 나아가시도록 땅을 평평케 하라. (눅 3: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질 것이니 (눅 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것이다' 하였다' 하신 대로였다[사 52:10].


(마 3:4)(막 1:6) 이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石淸ㅡ산속의 나무나 돌 사이에 석벌(石蜂)이 모아 놓은 꿀]이었다. (마 3:5) 이 때에 '예루살렘'과 (막 1:5) 온 '유대' 지방과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마 3:6) 자기들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눅 3:7) 그 세례 받으러 나오는 군중에게 말했다. "독사의 후예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마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치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마 3:10)(눅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눅 3:10) 군중이 묻기를,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눅 3:11) 대답하기를, "옷 두 벌 있는 이는 옷 없는 이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이도 그렇게 할 것이다".
(눅 3:12) 세리(稅吏-징세원 또는 세관원)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눅 3:13) 말하기를, "정한 세금 외에는 부과치 말라".
(눅 3:14) 군인들도 묻기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말하기를, "사람에게 포악하지 말며 무고(誣告)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였다.


(눅 3:18)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눅 3: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헤롯이 강제로 자기 아내로 삼은 까닭에]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눅 3: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나중에 '요한'을 옥에 가두게 된다.


그리스도(메시아)를 증언하기 위해 온 '세례 요한'


(요 1:1)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서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말씀", "빛"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킴].


(요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곧 '세례 요한'이었다. (요 1: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이 빛을 믿게 하려 함이었다.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이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계시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요 1:12) 영접하는 (to receive)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권세ㅡpower)을 주셨으니 (요 1:13)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정(肉情)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사람들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子ㅡ외아들)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하신 데에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다.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외아들)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눅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 (마 3:13) 예수님께서 '갈릴리' (막 1:9)(막 1:10)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시니, (마 3:14) '요한'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께서 내게로 오십니까?". (마 3:15)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義, 올바른 것)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하시므로 이에 '요한'이 허락하였다.


(마 3:16)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시면서 (눅 3:21)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갈라짐과) 하나님의 성령이 (눅 3:22) 비둘기 같은 형체(形體)로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막 1:11) 하늘로서 소리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한다)" 하셨다.



예수님의 광야(曠野, 황야) 시험


(눅 4:1)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시니 (막 1:12) 성령께서 곧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시므로 (마 4:1)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셔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눅 4: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데 (막 1:13)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 들었다.


(마 4:2) 40일을 밤낮 금식하심으로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어 날 수가 다하자 주리신지라 (마 4:3) 시험하는 자 (눅 4:3) 마귀가 예수님께 나아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시오" 하였다. (눅 4:4)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마 4:4)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기록되었다" 하셨다.


[여기서 '누가'와 '마태'는 순서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을 먼저, 누가는 만국을 보이며 절하라는 대목을 먼저 말하고 있다. '마태' 쪽을 택하여 순서를 정했다].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님을 (눅 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말하기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 내리시오. (눅 4:10)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어 그들이 너를 지켜 (눅 4:11)손으로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라' 기록되었소". (마 4:7) 예수님께서 (눅 4:12) 대답하셨다. "또한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셨다".


(마 4:8)(눅 4:5) 마귀가 또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이끌고 데리고 올라가 순식간에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마 4:9) 말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눅 4:6)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그대에게 줄 것이다.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이에게 준다. (눅 4:7) 그러므로 내게 절하면 다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마 4:10)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하기를, (눅 4:8)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다". (마 4:11) 이에 ((눅 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예수님을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 들었다.


'세례 요한'의 증언


(요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야곱의 12아들들 중 하나인 '레위'의 자손들로서 성전(聖殿) 일에 종사하므로 특정 계층이라 하겠고, '레위' 자손 중 하나인 '아론'이 종신직인 제사장직을 맡아 대대로 세습(世襲)시키는 것이므로 '레위'인은 준(準) 제사장 급이라 할 수 있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다.


(요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라" 하였다. 
(요 1:21) 그들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무엇이냐, '엘리야'냐?"
대답하기를, "아니다". 
다시 묻기를, "그럼 네가 그(오기로 되어 있는-말4:5, 신18:18) 선지자냐?"
대답하기를, "아니다". 
(요 1:22) 또 묻기를,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요 1:23) 요한이 대답하기를,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to make straight)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요 1:24)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요 1:25) 다시 묻기를, "네가 만일 그리스도(메시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눅 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메시아)신가 심중에 의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굽혀 그의 신을 들기도 (막 1:7)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 ((요 1:27) 그의 신발 끈 풀기에도 자격이 없다) (요 1:26)곧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셨으니 그는 (마 3:11)(눅 3:16)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눅 3:17)(마 3:12) 손에 키[곡식 따위를 일정량 담아 위아래로 흔들어 잡물을 날려 보내어 고르는 농기구. 앞은 넓고 평평하게, 뒤는 좁고 우긋하게 고리버들 같은 것으로 결어 만듦]를 들고 자기의 타작[곡식의 알을 떨어서 거두는 일] 마당을 정리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곡식을 거두어 저장해두는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막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요 1: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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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註-"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표현은 누가 및 마태 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혹자는 성령이 곧 불이라는 의미로 둘을 동일시하여 불과 세례를 "정결케 하는 능력"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하심을 나타낸다. 고로 "불"로서 지니는 의미는 아무 것도 없다. 물로 세례 받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냄에 함께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서, 성령의 세례로서 실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과 밀접하게 직결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나 "불의 세례"는 전혀 그런 의미가 없는 동떨어진 개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례" 중에는 고난의 세례가 더 있다(눅 12:50/막 10:38). 이는 물 속에 들어가 잠기는 것처럼 혹은 물을 뒤집어 쓰는 것처럼 죽음의 고난을 뒤집어 쓰거나 그 속에 잠겨버려 그것과 '하나됨'을 의미한다. 물과 하나됨, 성령과 하나됨, 고난의 죽음과 하나됨과 같이, 불과 하나되는 불로써의 세례는 바로 "불 못"에 들어가는 것이니 불 못의 불과 하나되게 하심 곧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의미는 그리스도를 '구원하시는 이'와 동시에 '심판하시는 이'로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행 17:31/요 5:27). 구원에 해당되는 것이 성령의 세례요, 심판에 해당되는 것이 불의 세례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 자신을 내 안에 그 영으로 모셔 들임, 영접해 모심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 각자를 정결하게 한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미 물로 세례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었으니(행 22:16) 이미 정결하게 되어 있는 상태인지라 다시 새삼스럽게 정결하게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성령 곧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자리이니까 오시는 것이지 정결케 하시려고 즉 죄가 그대로 있어 불결하고 부정(不淨)한 자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먼저 자리를 정결하게 해놓으신 다음 그 정결하게 된 자리에 임하여 오시는 것이니 이를 혼동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불로서 상징한 데가 성경 아무 데도 없다. 하나님을 불로 상징한 것이 바로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시라는 표현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심판의 주님이 되심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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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요 1:15)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 1:30)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서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분을 가리킴이다!" 하였다. (요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했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였다.


(요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기를, "내가 보니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물러 계셨다.(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했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이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시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하였다.


제자들을 부르심


(요 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 1:36) 예수님께서 다니심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하니, (요 1:37) 두 제자가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므로 (요 1:38) 예수님께서 돌이켜 자기를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셨다. 그들이 말하기를, "랍비(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하니 (요 1:3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와 보라"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유(留)하니 때가 제 10시[요한은 우리와 같은 로마식 시간 계산법으로, 기타 복음서 기자는 '유대'식 시간을 적용하고 있음] 쯤이었다.


(요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아{'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고 (요 1:42)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니 예수님께서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이니 곧 반석(盤石)이란 뜻}라 할 것이다" 하셨다.


(요 1:43) 이튿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었다.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을 우리가 만났는데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시다" 하니, (요 1:46)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인물이 날 수 있느냐?" 하므로 '빌립'이 말하기를, "와 보라" 하였다.


(요 1:47)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니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하셨다. (요 1:48)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기를, "'랍비'(선생님), '랍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요 1:50)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다". (요 1:51) 또 말씀하셨다. ""진정으로, 진정으로[이 표현은 원어대로 하면 "아멘, 아멘"] 너희에게 말하지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使者-천사)들이 인자[人子-'사람의 아들' 곧 사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항상 이와 같이 표현하셨다]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 하셨다. [일단 이렇게 주님을 잠시 따르다가 때로는 어부로서의 생업을 그들은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으니 열 두 제자로 택하심을 받기 전에는 그랬다-註].





ll. 가르치심 




가르치기를 시작하심


(눅 4:14) 예수님께서[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후]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 4:15) 친히 그 여러 회당(會堂ㅡ'유대'인의 종교 집회소)에서 가르치심으로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눅 3:23) 예수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셨다[사회학자들에 따르면 이 나이가 성인으로서의 완성 단계에 접어드는 때라 한다].


제자들을 삼으심


(눅 5:1) 군중들이 에워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다가 (눅 5: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으므로 (눅  5:3) 예수님께서 한 배에 오르셨는데 그 배는 '시몬'의 배였다. 육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시더니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저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눅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고 있었다.(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을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는데 배가 잠기게 되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기를, "주님, 저를 떠나주십시오[황송하게 자기 배에 앉아 계심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뜻] 저는 죄인입니다" 하니, (눅 5: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사로잡을[고기를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것이다". (눅 5:11) 이에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댄 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이상은 '누가'의 기록이고 '마태'와 '마가'의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으나 '누가'의 말이 더 자세한 것으로 드러난다-註](마 4:18)(막 1:16)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막 1:17)(마 4:18)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였다. (마 4:19)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하시니 (마 4:20)(막 1:18)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 4:21)(막 1:19)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함께 역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곧 부르시니 (마 4:22)(막 1:20) 그들이 그 아버지 '세베대'를 그 일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곧 예수님을 따랐다.


'갈릴리'에서부터


(마 4:23)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셔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쳐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지므로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므로 그들을 고치셨다. (마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군중들이 따랐다.


'요한'이 잡힌 후


(마 4:12)(막 1:14) 예수님께서 '요한['세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마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거처하시니,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으로서 거기 기록되기를,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암흑 중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한 것이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님께서 비로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막 1:15) 말씀하시기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다.


'가나'에서의 혼인 잔치


(요 2:1) 사흘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님의 모친도 거기 있었고 (요 2:2)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는데 (요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모친이 예수님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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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註-그리스도께서 아무리 하나님 아들이시지만 그래도 당신을 젖먹이고 거둔 '마리아'인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공대어를 쓰신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처음에는 생각했으나 마음을 바꾸었다. 이미 처음부터 하나님이라 선언되신 터다. 때문에 동시에 사람이심을 강조하여, 당신 자신을 가리키실 때마다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 곧 사람이심을 강조하셨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이신 사실이 그만큼 강조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유대' 땅이 아닌 한반도(존칭어, 하대어가 유달리 발달한)에 오셨다고 가정해보자. 여러 사람을 대하시는 말씀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셨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그 누구에게든 공대 말을 쓰시지 않으셨을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일단 선포되셨으면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 그러면 사람이신 측면은 무시해도 좋은가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심을 강조하여 공대 말을 쓰셨다고 하자. 역시 질문은, "하나님이신 측면은 무시해도 좋은가?"일 것이다.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사람이시니 어디까지나 우선(優先) 순위는 하나님이신 측면이지 사람이신 측면일 수 없다. 이미 '마리아'를 "어머니"라 하시지 않고 "여자"라고 하신 마당에서는 이는 확정적이다. '마리아'에 대하여 "모친"이라 부르시지 않고 "여자"라 하신 것은 피조물을 대하시는 조물주의 위치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자세이심을 또한 명백히 하심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구원 받은)의 머리이시고 지도자이시고 스승(랍비)이신 위치에서(마 23:8,10) 모든 성인(成人) 남녀를 대하시는 그대로 '마리아'를 대하심뿐이다.


우리말처럼 공대어가 발달하지 못한 '유대'인의 언어라도 "여자"라 하실 때는, "'마리아'를 모친으로 해서 태어나 비로소 존재하시게 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께서 단지 한 여자('마리아'라는 이름의)의 태를 통해 세상에 오심으로써 사람되셨음"을 사실 그대로 나타내신 것이기에,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높임말을 사용하실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다. 평상시 다른 모든 성인 여자를 대할 때와 같은 어투이셨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완전하신 사람이 되신 것은 사실이나, 무엇이 '완전한 사람'인가를 논할 때, 남녀가 결합하여 생긴 양친으로부터 나온 결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을 완전한 사람이라 한다면 주님의 경우에는 전연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사람이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알고 있는 개념으로서의 모친으로 '마리아'를 주님께서 반드시 대하셔야 하는 것으로 설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셔야 완전한 사람이 되신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그 뜻이다.


예수님께서 "여자"라고 부르신 상대는 모든 여자에게 동일했음이 복음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마리아'를 "여자"라고 부르신 이상, '마리아'와의 모든 인간적인 연(緣)이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하는 것이고 따라서 부모자식 관계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시기 위해 태를 통해 세상에 오시지 않았는가.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해 오심으로 영아(infant)에서부터 시작,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baby) 단계를 거쳐 그 키가 다른 인생들처럼 자라기 시작하는 소년기를 거쳐 나오심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완벽성을 철저히 기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늘로부터 강림하시어 인간 육체를 입으시고 금방 다 자란 성인으로 행세하신 것이 아닌 것이다.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장유(長幼) 유서(有序)가 해당되지를 않는다. 공대말 하대어 등은 장유 유서에서 오는 것으로 이는 당연한 엄연한 질서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시다. 사람이 되셨다고 이 질서가 깨어질 리 만무하다. 이러한데 우리 한국어 같은 존대어를 굳이 사용하시겠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이미 '마리아' 본인은 예수님께 대한 '세례 요한'의 선언 즉 하나님의 아들 곧 조물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실을 선포한 것을 유의해 듣고 이 때쯤은 모든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12세 되시던 때 성전에 남아 성경 학자들과 담론하고 계시기를 사흘 동안이나 하셨을 때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자기를 찾고 있다는 것을 모르실 리 없다.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하도 기가 차서 "얘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우리가 얼마나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 했을 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내 아버지 일에 관여해야) 할 줄을 알지 못했습니까" 하신 것이니 한 술 더 뜨신 셈이다(죽 2:49).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데 대해 "어찌하여 나를 찾았느냐?" 하시기까지 했으니 인간의 도리로서의 막심한 불효 차원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차이로 오히려 이들 부부를 일깨워주신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뜻이었고, 예수님의 대답은 그러한 "도리"를 정면으로 부인하신 것이니 마리아는 이미 여기서부터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성경은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이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두었다"고 했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기 때문.


만일 공대어 하대어가 발달된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나셨다면 소년으로서의 예수님은 어떤 말씨로 마리아나 요셉과 대화하셨을까. 답은,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이 아닌 유대 민족 가운데 나셨다는 말밖에 나올 것이 없다. 그보다도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민족의 언어는 한국이나 일본처럼 까다롭게 공대어 하대어를 찾지 않도록 하셨다는 대답이 더 타당성이 있겠다. 평소의 생활에서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어리신 예수님의 태도에서 아무런 이상(異狀)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당시 어리신 예수님의 "아버지 운운" 하시는 말씀에 의아하게까지 생각했었고, 그러나 그 한 때뿐이었지 다시 평상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마리아는 일찍부터 그와 같이 예수님께 대한 인식을 달리하고 있었기에 그 날도 잔치 술이 떨어져 몹시 난처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손을 좀 쓰실 수 없을까 하고 어떤 기적 같은 일을 바랐음이 분명하다. 주님의 대답이 그런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기적이나 바라는 그런 정도의 '마리아'의 마음(메시아 곧 구원하시는 자로 인식하지 않고)을 책하시는 듯 들리기도 한다. 그러니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그런 어조로 나가신다 해서 '마리아'로서 내심 서운해할 것도 전혀 없다. 이미 "모친"이라 하시지 않고 "여자"라 하시는 데에서도 확인되듯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일종의 기적 같은 것을 바랐던 '마리아'일진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즉 자기가 남편 '요셉'의 씨를 받아 잉태함으로써 낳은 자기 자식이 아니심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 자식처럼 여겨 그런 말씀에 접하여 섭섭해한다면 적어도 '마리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 '엘리사벳'의 성령 충만한 말에도 배치된다. '마리아'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도(눅 1:45) 이런 면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즉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고지해 줄 때 그 사실을 믿는 믿음만 아니라 그의 태에서 나신 이가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내다보셨으므로 '마리아'를 이 일을 목적으로 택하셨던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라도 우리처럼 부친의 씨를 받아 된 '아담'의 씨가 아니시니, 창세기의 예언 말씀에서도 "인간(아담)의 씨"라 하시지 않고 "여자의 씨(후손)"(창 3:15)라 하신 것이 그 까닭이다. "여자의 씨"라 함은 여자의 태를 빌려 그 육신 즉 인간의 육신만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시는 다시 말해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분이 사람이 되시는 그런 유형으로는 유일하신 사람이라는 뜻이다. 첫 사람 아담의 자리를 이어가시는 "마지막 아담"이실진대 이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거듭 강조하지만 "'마리아'의 소생"이시라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안될 일이다.


주님께서도 틀림없는 인간의 육신으로 나신 까닭에 젖먹이로 '마리아'의 품에서 그 젖으로 성장하신 것은 물론이다. 사람이 원래 낳은 정은 없어도 기른 정은 있다 했듯이 그런 모정(母情)이 '마리아'에게 없을 수 없다. 그래서 귀여운 젖먹이(예수님)를 안고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났을 때 '시므온'이 "칼이 그대의 영혼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 하여 주님의 십자가 고난 앞에서의 '마리아'의 침통한 심경을 충분히 헤아려 예언한 것이다.


또 주님께서도 그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 계셨으므로 십자가상에서 제자 '요한'에게 '마리아'를 특별히 그 모친으로 모시라고 하신 것이니 역시 같은 의미이다. 이로써 생모(生母)로서의 '마리아'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계셨음을 유감없이 밝히신 것. 다른 복음서는 특별히 이런 점에 주목하지 않았으나 '요한'은 두 번이나 "여자"라고 부르신 사실을 밝혀놓고 있다.  가나안 잔치 자리에서 처음으로 마리아더러 "여자"라 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 때까지 평소 그렇게 마리아를 대하셨다고 해도 하자는 없다. 주님께로부터 그런 특별하신 분부를 받아 '마리아'를 양모(養母) 이상으로 모신 '요한'으로서, 이런 사실을 밝히고 있는 데에는 다른 그 어떤 까닭도 있을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된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이 세상 신(神) 사단의 조종 아래 있기에 더군다나 그러하지만) 얼마든지 '마리아'를 신성시까지 하는 악행을 주저없이 저지를 수 있는 충분한 성향을 인간은 지니고 있어 이런 것을 미리 차단시키는 배려이신 것이다. '모세'만 해도 그가 죽은 후 그 시신을 위하거나 신성시할까 하여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기신 것을 보아도 이는 명백하다. 아니나다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마리아'를 숭배하고 그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는 미신에 빠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리아를 공공연히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고까지 한다. 이는 보통의 신성 모독이 아니다. 그래도 아시아 쪽 사람들은 서구인들보다는 이성적이어서 그련 표현은 않고  "성모(聖母)" 정도로만 그치지만,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언사인가! "사람 예수님의 어머니"라 해도 지금까지의 설명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반(反)성경적이라 할 것이거늘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경의 원수들만이 방자하게 입에 올릴 그런 언사를 농하면서 감히 구원을 논하다니!


세상 사람들이 세상 종교를 믿는 것 자체를 두고 비방할 이유는 없지만, 최소한 성경과 관련되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점만 명확히 해두기 위해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름만 "기독교", 그리고 형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표방하나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런 언급을 하는 것뿐.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를 모친이라고도 부르시지 않았지만 성경은 '마리아'를 그 "모친"이라 기술하고 있다. 사기(史記)로서 그럼 그렇게 표현하지, 번번이 아리아가 나오는 대목마다 "예수님을 낳은 여자"라고 하겠는가. '마리아'의 태를 통해 세상에 오셨으니 그 '모친'이지 모친이 아닐 이유는 없다.


그래서 이미 예언서에서도 "여자가 남자를 안았다"(렘 31:22) 했고 "여자의 씨"라 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주님은 호칭하실 때에 분명히 "여자"라 하심으로써, 사람은 사람이시되 유일하신 사람 즉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다. 사람이시라면 당연히 그 모친을 "모친"이라 해야 정상이 아닌가 하는 구차한 논리는 내세우지 말 것이다.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이신데 이 사실을 무시하려 들 것인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신 분이 또 누가 있는가. "모친"이라고 하면 대칭적으로 "아버지"를 동시에 연상하게 되는 것이기에 주님께는 해당되지 않는다.


고로 그리스도를 두고 "사람"이시라 할 때는 여자의 태를 통하여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 입으신 인간의 육체와 영원히 불가분이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자의 태를 통하여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으로서 육체를 입으셨으므로 '마리아'의 인성(人性)으로서의 육체만을 물려받으신 것이다. 그뿐이지, 그 육체에 신성(神性)은 티끌만큼도 가미되지 않았다. 오직 신성(神性)은 그 영(우리로 말하면 영혼)께서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에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으로서 육체를 입으셨으므로 우리들 인간으로 보면 영혼에 해당되는 부분이시다.


그런즉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그 특성을 상실하신 것이 아니니 아버지와 여전히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니 백분율로 따지면 반반씩이실까 하는 그런 의미도 통하지 않는다. 백프로 하나님, 백프로 사람이시다. 이 표현이 제대로 맞는다는 의미 이 이상으로 우리는 생각할 수 없고 또 생각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신 것은 우리의 구원 그리고 현재 구원 받은 삶(일상생활)에 관해서 강조되는 사항이다. 동시에 하나님이신 사실도 똑같은 비중의 의미이니 나에게만 계심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의 안에 함께 계심이다.


따라서 영으로 우주에 충만하게 계시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시나, 동시에 육체로 계시므로 완전한 사람이시다. 내 안에 계실 때는 사람으로 계시는 것이니 사람과 사람과의 사귐으로서 하등 하자가 없으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람으로서의 그 본령(本領)이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중성(二重性)에 있으므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 그 육체로서의 고난을 받으신 그대로 다 받으신 것이다. 주님 친히 당신께서 하나님이심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신 데에서 이미 선언하신 터였고 기타 말씀으로도 충분히 나타내셨다. 그러면 주님의 청소년 시절은 어떠했을까, 역시 그 때도 "여자"라 부르셨을까.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공대어와 하대어로 엄격히 구별되어져 있는 민족도 (일본은 고대로부터 그 문물이 우리의 영향권 내에 들어 왔으므로 예외이나)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을 비롯해 대부분의 민족의 언어가 그 호칭과 억양만으로써 우리의 공대어 구실을 하는 정도다. 언어의 그 어떤 표현보다 더 완벽한 의사 소통의 수단이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충분한 것이다. 굳이 그 모친을 청소년 시절의 주님께서 어떻게 부르셨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그 모친을 사랑하여 공경하셨고 모든 일에 순종하여 받드셨다고 이미 복음서 기록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우리로 치면 반말을 구사하신 것으로 해놓은 것도 "여자"라는 호칭을 쓰시지 않았다면 감히 엄두도 못낼 문구임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나 마리아더러 "여자"라고 하셨을 때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부모 자식 관계는 존재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도 마리아의 태를 통해 나오셨으니 사람이 아니신가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신데 아담의 한참 후대에 속하는 마리아로서 감히 처음부터 예수님더러 말을 낮출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다" 하시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언하시는 터에 어찌 마리아에게만은 차별하여 공대어나 그 비슷한 어투라도 나타내시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까지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우상화하여 받들고 있는 터에 그런 식으로 마리아를 대접하시게 되면 더욱 더할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까지라도 신격화할까 하여 모세의 시신을 일부러 감추시기까지 하신 마당에 마리아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음을 앞에서 지적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 계시다가 친히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고(인간 여자의 태를 통해) 그리고 한 번 하신 일은 영원성을 띠시므로 영원히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사람이시지 실제 영으로 계심에는 변함이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단지 지금은 사람이시니 '사람의 영혼'으로서 위치를 달리하셨을 뿐이다. 격이 달라진 것도 없으니 수직 이동이 아니라 수평 이동이시다.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전지전능, 무소부재 모두 그대로이시다. 선입견에 따르는 고집을 탈피하지 못함에서 오는 우리 자신의 요령 부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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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5) 그 모친이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였다. (요 2:6) 거기 '유대'인의 결례(潔禮)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요 2: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니 아구까지 채우므로 (요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니 갖다 주었는데, (요 2:9) 연회장은 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나 물 떠온 하인들은 알고 있었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요 2:10) 말하기를,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는데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 하였다. (요 2:11) 예수님께서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셔서 그 영광을 나타내시니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요 2:12) 그 후에 예수님께서 그 모친과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는데 거기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셨다.


'갈릴리'로부터의 '예루살렘' 1차 방문


(요 2:13) '유대'인의 유월절(通過節, Passover-3,4월 경)이 가까우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성전(聖殿, holy temple)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다. (요 2:17) 제자들이 "주님의 전(殿-성전,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킬 것이다"라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요 2:18) 이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응수하여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기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요 2:1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킬 것이다". (요 2:20)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는데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였다. (요 2:21)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聖殿)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으니, (요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 및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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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註-"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켜버렸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실 정도로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확고한 자세로 행동하심과 동시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킬 것이다" 하심으로써 자기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밝히셨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냐 할지 모르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심으로써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贖良, emancipation)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셨다"(갈 4:4,5)는 바로 그 의미를 구현하심이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명령하심과 같은 뜻이다. 또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가 먹을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막 7:26) 하심과도 같다. 우리 이방인이 들으면 매정스럽게 들릴지 몰라도 이는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선언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요 6:44,65).

즉 모세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다시 말해 자기의 죄인됨과 죽은 자 되어 있음을 먼저 자각하지 않는 한 영생만을 욕심 내어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음을 밝히신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께서는 모세 율법의 그림자 시대가 종료됨과 동시에 성령의 시대 혹은 그리스도의 시대를 여는 그 종점(終點)과 시점(始點, 始作點)의 분기점이 친히 되어 계시므로 이상과 같이 나타내심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는 또 다시 말하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10:4) 하심과 같으니 하나님에게서 배우지 않고 이끄심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는 것이다(요 6:45). 모세 율법은 말하자면 그런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모든 이스라엘이 다 그리스도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들"(롬 9:27)에게만 해당된 것임을 우리는 아는 것이다.


즉 첫 사람 아담이라도 범죄했을 경우 예외없이 가차없는 대가를 받아 죽음에 처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하시어 죄를 짓고는 생명에 머물 수 없고 따라서 구원도 불가능한 것임을 천명하신 이상(사단을 위시한 악령들도 물론 같은 처지였지만), "불의를 좋아하여"(살후 2:12) 죄를 여전히 짓는 자아중심을 선호하여 회개가 없는 자는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이 해당되지를 않는 것이다.


때문에 처음부터 바울이 전한 복음은 믿으면 구원된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차적인 뜻이요 명령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행 17:30). 오늘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는 색다른 성경 해석으로 바울이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만연되어 성경대로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배제 또는 대체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개탄스러운 실정이니 조심할 일이다.


무조건 자기가 죄인임을 인지하기만 하면 곧장 영생하는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 죄인으로서의 자각을 단지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 구원을 받는 조건으로만 여기고, 회개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죄인으로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 곧 성령의 권능으로) 의지 표명이 필수인데도 이 핵심 부분은 완전히 빠뜨려놓고 빈 껍데기만 들어올려 "이것이 구원이다" 하고 선전하는 행티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으나 계명이 이르니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가 기회를 타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롬 7:9-11) 함과 같이, 죄인임을 깨달아 그 죄의 대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다시 살아날 때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살아나 하나로서의 짝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 구원의 골자인 것이다. 


진리를 모르는 세상 사람은 자기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산 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한 절대로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수 없다는 것이 "누구나 내게 올 수 없다"(요 6:44,45,65)는 말씀의 뜻임이 분명한 것은,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고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 없으며(막 2:17) 목 마른 자가 물을 찾고(요 7:37) 죽음에 직면한 자가 생명을 찾고(요 3:14) 수고하는 자가 쉼을 갈구한다는(마 11:28) 말씀 그대로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다. 수요 없이 공급만 있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에 기초함이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라는 사실에 눈 뜨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하나님의 엄중한 계명을 듣고 자기가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하나님 앞에서 죄 짓고는 절대로 살 수 없음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천사를 구원하려는 것도 아니고 오직 사람들을 건지시기 위함이니, 이런 사전(事前)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은 말하자면 사람이 아니라 동물과 같은 위치에 있음과 같으니 개나 돼지와 같음이다. 그런 사람들을 비하한 표현이 아니라 구원에 해당되지 않음을 강력한 어조로 표현하심이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복음을 전하려 하지 말 것이다. 날림공사를 하지 말고 꼼꼼히 하나님의 설계대로 건축하여 지어 올릴 생각을 할 것이니 정격(正格, 定格) 정품 복음을 전할 일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 용서도 없다(행 2:38). 회개를 강조하지 않고, 다시는 죄 짓지 않음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고후 5:15) 삶을 가르치지 않고 비켜 나가는 일체의 소위 "복음"은 사이비요 모조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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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23)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 2:24) 예수님은 그 몸을 그들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인간을 아심이요 (요 2:25) 또 친히 인간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인간에 대한 그 어떤 증언도 들으실 필요가 없었음이다. (자아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요 또 지금은 믿는다고 해도 나중에 그 마음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


(요 3:1) '바리새'파 사람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이가 있으니 '유대'인 관리였다. (요 3:2) 그가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했다. "'랍비'(선생님), 당신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신 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행하시는 이 기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입니다". (요 3: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진정,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사람이 다시 출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 3:4) 니고데모가 말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번째 모태(母胎)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요 3: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진정,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 3:6) 육(肉, flesh)으로 나는 것은 육이요 성령(영)으로 나는 것은 영(靈, spirit)이니 (요 3:7) 내가 네게 다시 나야(出生) 하겠다 하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요 3:8) 바람이 제멋대로 부니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이 다 이러하다".


(요 3:9) '니고데모'가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요 3:1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진정,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우리(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계심 즉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의미하심이니 곧 "아버지와 아들"-註)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언을 받지 아니한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子-사람의 아들, 당신 자신을 가리켜 예수님은 항상 이와 같이 표현하셨으니 사람되심을 강조하심이다) 외에는 하늘로 오른 이가 없다.


(요 3:14) '모세'가 황야('모세'를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당시-註)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그와 같이 들려져야 할 것이니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이면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獨生子, 독자, 외아들)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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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註-"뱀을 들었다" 하심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광야를 거쳐 가나안 사람들의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생스러운 여정 곧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 우리 마음이 이 풍족하지 못한 생활에 질린다" 하며 원망할 때, 독사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등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자, 백성이 그 원망함으로 인한 범죄를 뉘우치고 불 뱀이 물러나게 해주시기를 원하므로, 모세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세우니 이렇게 만든 뱀을 본 사람마다 살아난 것을 말한다(민 21:4-9).


즉 '이스라엘'이 원망한 범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모세가 기도하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지시하시기를 그 불 뱀(fiery serpents, venomous serpents)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아 세우면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되는 순간 살 것이라 하신 것이다. 장대에 높이 달리는 것은 죄로 저주 받음(갈 3:13)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리스도 친히 "우리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가 되시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贖良)하심(to redeem)을 미리 보이시는 의미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의미의 죽음을 당하실 것을 예고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율법(계명) 자체는 선한 것이며(롬 7:12)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이미 범죄로 인해 죽은 자로서(5:12) 저주 받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어버린"(7:10) 사실로써, 우리의 그와 같은 실상을 자각하게 하심이 목적인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지키게 함으로써 "능히 살게 하는 율법"(갈 3:21)의 그 애초의 역할 수행이 지금은 우리가 죽은 자요 죄인이기 때문에 불가능하게 됨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은혜로 하나님의 새 창조(고후 5:17) 즉 다시 출생하게 하심(요 3:3)으로써 우리가 산 자가 되면서부터는, 하나님의 율법(계명)이 당당히 우리에게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 되어 있고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이 되어 있는 것. 즉 본래의 율법(계명)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니 이를 가리켜 "율법이 우리의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롬 8:3) 한 것이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하신"(:3) 것이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인 것이다. 육신 즉 "죄의 몸"(6:6)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단죄되었으므로)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생명"(:4) 가운데 있게 되었은즉, 이제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따라 행하게 됨으로써 우리가 넉넉히 율법(계명)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4).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성령(그리스도의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법이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5-9) 함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죽으시기 위함이다. 단순히 우리 대신 형벌 받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공짜로 우리에게 영생이나 주시고자 함이 아니다. 함께 죽으신 것은 함께 다시 살아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원수 같은 육신도 척결하고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도 완전히 치렀으므로(청산하였으므로) 저주와 죽음의 굴레로부터는 완전 해방되어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복구된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아담에게 그리고 영물들에게 요구되었던 그대로 하나님의 '삶(생명)의 법칙'을 우리 또한 당당히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지키게 된 것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로써 지키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음도 물론이니, 따라서 그 결과로 아담처럼 죽을(이제는, 멸망) 수도 있는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처럼 영원 멸망에 들어갈 자유도 당당히 있는 것이다. "당당히"란 표현에 유의할 일이다.


즉 이전에는 인간으로 태어난 자는 예외없이 죽게 되어 있고 멸망하게 되어 있지만, 이제는 오직 나의 자유 선택에 의해서만 그와 같은 죽음(멸망)의 길도 택할 수 있게 됨을 말한다. 반면 영생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생명의 계명(율법-고전 9:21)을 넉넉히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능력 또한 받고 있는 것도 물론이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이 이 사실에 대하여, 헷갈릴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도 헷갈리는 생각을 함으로써 스스로 죽음(멸망) 길을 택하고 있으니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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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요 3:18) 그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 (요 3:19) 그 단죄(斷罪)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함이다.


(요 3:20) 악을 행하는 이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 것이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 3:21) 진리를 행하는(따르는) 이("he that does truth")는 빛으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다".


세례 '요한'의 증언 (2)


(요 3:22) 이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숙하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 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으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다. (요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다.


(요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 하나가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潔禮-"purifying")에 대하여 변론을 하고 있다가 (요 3:26) 그들이 '요한'(을 보고)에게 와서 말했다. "'랍비'(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분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분이 세례를 주니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갑디다". (요 3:27) '요한'이 대답했다.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요 3: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요 그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한 것을 증언할 사람들은 너희다. (요 3:29)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이지만 곁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말 번역과 몇 영역(英譯)은 여기까지 '세례 요한'이 말한 것으로 인용하고 아래 36절까지는 이 글을 쓴 요한 자신의 말로 정하고 있으나 흠정영역 및 NIV은 그 구절(다음 구절들)까지 모두 요한의 말로서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를 택했다-註).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심이니 (요 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나 그의 증언을 받는 이가 없다. (요 3:33) 그의 증언을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印)치는 것이다. (요 3:34)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다.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이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이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 그리고 계명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는 사실(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15:10/계 12:17/요 14:15,21,23/15:10,12/13:34)이 여기서도 명시되어 다-註).


(요 4:1) 예수님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는 말을 '바리새'파 사람들이 들은 줄을 주님께서 아신지라 (요 4:2)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다} (요 4:3) '유대'를 떠나셔서 다시 '갈릴리'로 가실 때 (요 4:4) '사마리아'로 통행해야 하겠으므로 (요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


예수님께서 행로(行路)에 곤하시어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6시쯤이었다.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오므로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다.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었다.


(요 4:1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명의 물(生命水)을 네게 주었을 것이다". 
(요 4:11) 여자가 말했다. "주님(선생님),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명의 물을 얻겠습니까? (요 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가축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십니까?".
(요 4:1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이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요 4:15) 여자가 말했다. "주님, 이런 물을 제게 주셔서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 


(요 4:16) 이에 말씀하셨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 4:17) 여자가 대답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 (요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이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
(요 4:19) 여자가 말했다. "주님, 제가 뵈니 선지자이십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네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합디다".
(요 4:21)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 (요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이들은 영(성령ㅡ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할 때가 오는 바 곧 이 때이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이들을 찾으신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이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일이다". 


(요 4:25) 여자가 말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분이 오실 줄을 아는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요 4:26)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네게 말하는 내가 그 이다" 하셨다.

(요 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는지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는지 묻는 이가 없었다.

(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요 4: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 있다. 와 보라! 이가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냐?" 하니 (요 4: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님께 나아왔다.


(요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잡수실 것을 가지고 와서 말했다. "'랍비'(선생님), 잡수십시오". (요 4:3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요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던가?" 하니, (요 4:3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 (요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요 4:36) 거두는 이가 이미 삯(급료)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것이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이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다. (요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다. (요 4:38) 내가 너희로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다".


(요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으므로 (요 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숙하시기를 청하니(날이 저물었으므로-註) 거기서 이틀을 머무셨다. (요 4:41)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더욱 많은 사람이 믿고 (요 4:42) 그 여자에게 말하기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다" 하였다.


'갈릴리' '가나'에서의 두 번째 기적


(요 4:43) 이틀이 지나니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요 4: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셨다. (요 4:45) '갈릴리'에 이르시니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다. (요 4:46)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다.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는데 (요 4:47) 그가 예수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와서 간청하기를, "내려오셔서 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하니 그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음이다.


(요 4:4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적과 기사(奇事)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 (요 4:49) 신하가 말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요 4:5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므로 (요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7시에 열기가 떨어졌다 하니 (요 4:53) 아이 아버지가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었다. (요 4:54)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기적이었다.


'나사렛'에 이르셔서


(눅 4:16) 예수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安息日, 모세 율법을 따라 일주의 제7일인 토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켰음)에 자기 규례(規例)대로(as His custom was)  회당에 들어가시어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자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므로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이에게 자유를, 눈먼 이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이를 자유케 하고 (눅 4:19) 주님의 은혜의 해(year)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대목이었다. (눅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이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였다.


(눅 4:21)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 하시니 (눅 4:22) 그들이 다 예수님께 관해 증언하며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씀을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니, (눅 4: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반드시 '의원(醫員, 의사)아, 네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해 보라' 할 것이다.


(눅 4: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선지자로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이가 없다.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3년 6개월간 닫혀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눅 4: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의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환자(한센병자)가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다".


(눅 4:28)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내리치고자 하였으나 (눅 4:30)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가버나움'에서


(눅 4: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막 1:21) 즉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는데 (막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 (눅 4:32) 곧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權勢-능력) 있는 자와 같고 (그 말씀이 권세가 있어) 율법학자들과 같지 아니함이었다.


(막 1:23)(눅 4:33) 마침 그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큰 소리를 질러, (눅 4:34)(막 1:24) "아아, 나사렛 예수님!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니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므로, (막 1:25) 예수님께서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1:26) 이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눅 4:35) 그 사람을 군중들 중에 넘어뜨리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나 사람은 상하지 아니하였다. (막 1:27) 다 놀라 서로 말하기를, (눅 4:36)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 있는 새 교훈이다. 이 어찌 된 일이냐.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들을 명하니 순종한다" 하였다. (막 1:28)(눅 4:37)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베드로'의 장모


(눅 4:38) 예수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셔서 (막 1:29) 즉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려 (마 8:14) 앓아 누웠고 사람들이 (막 1:30) 즉각 그의 일로 예수님께 여쭙고 그를 위하여 구하니 (눅 4:39) 예수님께서 (막 1:31) 나아가셔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고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마 8: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 들었다. (이에 대한 '누가'와 '마태'의 기록은 주님의 산상 보훈 전후를 따라 서로 다르니, '마가'와 '누가'는 산상보훈 전에, '마태'는 그 후에 일어난 일로 기록하고 있다-註).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심


(마 8:16)(막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그 날 해가 져서야 사람들이 몰린 것은 그 날은 안식일이므로 해가 져야 안식일이 끝나기 때문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는 안된다고 가르친 때문-註)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이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오면서 (막 1: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다. 예수님께서 (막 1:34)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눅 4:40)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어 고치시며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되 귀신이 자기를 그리스도(메시아)인 줄 알므로 꾸짖으시고 그 말하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셨다. (눅 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했기 때문이다. 병든 이를 다 고치시니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未明)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시고 (눅 4:42) 날이 밝자 나오시니 군중들이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도록 하려 하므로 (막 1:36)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이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 (막 1:37) "모든 사람이 주님을 찾습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막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할 것이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눅 4:43)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할 것이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다) 하시고 (눅 4:44)(막 1: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바알세불'


(눈 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고치실 때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알세불로써 주님의 일을 폄훼하려 했는데 이 때 하신 말씀도 같은 내용이므로 한 사건처럼 한데 합쳐 여기 소개하고 있으니 독자의 양해를 구함-註).


(마 12:22)(눅 11:14)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이를 데리고 오니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므로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되므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 내시니 귀신이 나가 벙어리가 말하므로)(마 12:23) 군중들이 다 놀라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는 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이 아니냐"("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은 그리스도를 가리킴-註) 하나, (눅 11:15)(마 12:24)(막 3:22) (그 중에 더러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바리새'파 사람들은 듣고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 하고 (눅 11:16) 또 더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마 12:25)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막 3:23)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하에 나오는 구절들에서도 보듯이 바리새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계속하여 "표적"을 요구한 것을 알 수 있다-註).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마 12: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눅 11:17)(막 3:24)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해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고 무너진다. ((눅 11: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막 3:26) 이내 망한다.


(눅 11:19)(마 12: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될 것이다.(눅 11:20)(마 12:28)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


(마 12:29)(막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살이(살림도구)를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할 것이다. (눅 11:21) 강한 이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나 (눅 11:22) 더 강한 이가 와서 그를 이길 때에는 그의 믿던 무장(武裝)을 해제시키고 그 재물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눅 11:23)(마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이는 나를 반대하는 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이는 헤치는 이다. (눅 11:24)(마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나 얻지 못하고 (마 12:44) 이에 말하기를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 (눅 11:25)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으므로 (눅 11:26)(마 12:45) 이에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처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된다.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될 것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


(막 3:28)(마 12:31)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용서하심을 얻으나 (막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이는 ((눅 12:10) 모독하는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한다.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으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막 3: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했기 때문이다.


(마 12:33) 또 말씀하셨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안다. (마 12:34) 독사의 후예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다. (마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 12:3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니 (마 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단죄를 받을 것이다"(엡 5:4).

"'요나'의 기적밖에는"


(마 12:38) 그 때 (눅 11:29) 군중들이 모였을 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 중 몇이 말하기를, "선생님, 저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마 12:3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눅 11: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기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할 것이다.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마 12:41)(눅 11: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단죄할 것이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눅 11:31)(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南方女王)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단죄할 것이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


(마 16:1)(막 8:11)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signㅡ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증거) 보이시기를 청하니(막 8:12) 예수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마 16:2)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니 너희가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후는 분별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마 16: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할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 (註-마태가 두 번씩이나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여러 번 이러한 표적 보여 주기를 요구했음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막 3:20) 집에 들어가시니 군중들이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데 (막 3:21) 예수님의 가족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이었다. (마 12:46)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막 3:31)(눅 8:19)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께 말하려고 왔으나 군중들을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고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르므로 (막 3:32) 군중들이 예수님을 둘러 앉았다가 (눅 8:20) 혹자 고하기를, "보십시오.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서 찾습니다" 하니, (막 3:33)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시기를,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 3:34)(마 12:48)(눅 8:21) 둘러 앉은 이들을 둘러 보시며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마 12: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이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셨다.


"당신을 밴 태와 먹인 젖"


(눅 11: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군중들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말했다. "선생님을 밴 태와 선생님을 먹인 젖이 복이 있습니다!". (눅 11:28) 이에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복이 있다".


씨 뿌림의 비유(1)


(마 13:1) 그 날에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 (막 4:1) 다시 바닷가에 앉으셔서 가르치시는데 (마 13:2)(눅 8:4) 각 동네 사람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어 큰 군중을 이루니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가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군중들은 해변 바다 곁 육지에 섰다.


(마 13:3)(막 4:2) 이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가르쳐 말씀하셨다. (눅 8:5)(마 13:18)(막 4:3)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씨를 뿌리는 이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마 13:4) 뿌릴 때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니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 밭에 ((눅 8:6) 바위 위에) 떨어지니 났다가 흙이 깊지 아니하고 습기가 없으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7)(막 4: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속에) 떨어지니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마 13:8)(눅 8:7)(눅 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니 나서 (막 4:8) 자라 무성하여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하였다". (마 13:9)(막 4:9)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이는 들으라(귀 있는 이는 들으라)!" 하셨다.


비유로만 말씀하심


(막 4:10)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의 (눅 8:9) 뜻을 묻고자 하여 (마 13:10)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막 4:11)(눅 8:10)(마 13:11) 이에 말씀하셨다. (마 13:12) "무릇 있는 이는 받아 넉넉하게 되나 없는 이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막 4:25) 누구든지 있는 이는 받겠고 없는 이는 그 있는 것까지(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 나라(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 되어 모든 것을 비유로 하는 것이니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막 4:12)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용서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었으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셨다).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마 13:1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義人)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했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했다".


인내로써 결실-씨 뿌림의 비유(2)


(막 4:13)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막 4:14)(눅 8:11) 이 비유는 이러하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뿌리는 이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막 4: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눅 8:12) 마귀)이 즉시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니,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 것이요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다.


(막 4:16) 또 이와 같이 돌 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눅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막 4:17)(마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믿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 시험을 받을 때에는 배반하여 곧 넘어지는 자요,


(막 4: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지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들으나 (막 4:19) 지내는 중 (눅 8:14) 이생(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재리의 유혹)와 일락(逸樂)에(기타 욕심이 들어와) (마 13:22) 말씀이 막혀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막 4: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눅 8:15)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즉시 말씀을 듣고 받아서 지켜 (마 13:23) 깨달아 인내로써 30배와 60배와 100배의 결실을 하는 자이다.


"비판치 말라"


(눅 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번역ㅡ"너희 판정(判定)하는 그 판정으로 너희도 똑 같이 판정을 받을 것이다")) 단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단죄함을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막 4:24)(눅 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주의하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가 판단을 받고 또 더 심하게 받을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되로써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가 재는 그 잣대로 너희도 도로 재어질 것이다.

(막 4:33) 예수님께서 (마 13:34) 이 모든 것을 이러한 많은 비유로쏘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나 (막 4:34)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셨다. (마 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낼 것이다"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가라지


(마 13:24)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로써 말씀하셨다.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는데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 가라지도 보이므로 (마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마 13:28) 주인이 말하기를,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십니까?'. (마 13:29) 주인이 말하기를,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된다.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하는 일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할 것이다' 하였다".


(마 13:36)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떠나셔서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말하기를,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하여 주십시오". (마 13:37) 이에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人子,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키실 때 항상 자신의 사람되심을 강조하여 사용하심)요 (마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하는 일군은 천사들이다.


(마 13: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할 것이다. (마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낼 것이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인즉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마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이는 들으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할까 "


(막 4:30)(눅 13:18)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막 4:31)(마 13:31)(눅 13:19)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나 (막 4:32) 심어져 (마 13:32) 자란 후에는 모든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된다".


(마 13:33)(눅 13:20)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눅 13:21)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막 4:26)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막 4: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한다. (막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다. (막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는 것이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다.


천국은 마치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게 된다. (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으니 (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자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이다.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면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린다. (마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할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마 13:50)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마 13: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기를 "예, 깨닫습니다". (마 13:5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은 지식인(知識人)-scholar)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막 4:21)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곡식이나 액체 따위를 되는데 쓰이는 나무 그릇) 아래나 평상(平床)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잔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마 5:15)(눅 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말 아래 두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잔 위에 두는 것이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디.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된다.


(마 5:16)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막 4:22) 숨긴 것으로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감추어지는 것으로서 나타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눅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춰진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 (막 4:23) 들을 귀 있는 이는 들으라".


('누가'는 이 등잔 위의 등불 말씀을 연거푸 기록하고 있음-註) (눅 11: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숨겨 놓거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잔 위에 두는 것이니 이는 들어가는 이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다. (눅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다. (눅 11: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눅 11: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을 것이다" 하셨다.


세 사람과의 문답


(눅 9:57) 길 가실 때에 (마 8:19) 한 율법(모세의 율법) 학자가 나아와 예수님께 여쭙기를,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눅 9:5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마 8:20) 거처가 있으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마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말했다. "주님, 저로 먼저 가서 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눅 9:60) 이에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마 8:22) 너는 나를 따르라)".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마는 저로 먼저 제 가족을 작별케 허락해 주십시오". (눅 9:6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누가는 이상 말씀을 "길 가실 때"라고 했으나 당시 주님과 함께 있던 마태는 에워싸기 시작하는 군중들을 피해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명하신(마 8:18) 다음에 그런 질문이 있었다고 했으니 마태의 증언이 정확한 듯하다-註).


광풍


(막 4:35)(마 8:18) 그 날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군중들이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명하시고 (눅 8:22)(마 8:23) 배에 오르시므로 (막 4:36) 이에 제자들이 군중들을 떠나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니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다. (눅 8:23)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므로(바다에 큰 놀이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막 4:37)(마 8:24) 배에 들어와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였다.


(막 4:38)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므로 (마 8:25)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지 않으십니까!" ("주님! 주님!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겠습니다!" 하니 (막 4:39) 예수님께서 잠을 깨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말씀하시기를,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이에 그쳐 아주 잔잔해졌다. ((눅 8:25)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고 곧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니)(여기서 마태는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시며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셨다 하고 누가는 바람은 잔잔케 하신 다음 그렇게 책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註).


(막 4:40) 이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 8:26)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니 " (막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고 (기이하게 여겨) 서로 말하기를, "그가 뉘기에 ((마 8:27)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눅 8:24) 그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니 순종하는고") 하였다.


무덤 사이에서


(막 5:1)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 (눅 8:26) 곧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막 5:2) 배에서 나와 (눅 8:27) 육지에 내리시자마자 그 도시 사람으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마 8:28)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다. (그들은 심히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했다). (막 5:3)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있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막 5:4) 이는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사로잡으므로 그가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리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음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어 (막 5: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다. ('마태'와 '마가'는 하나라 하고 '누가'는 둘이라고 적고 있음-註).


(막 5:6)(눅 8:28)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달려와 그 앞에 절하며 엎드리어 (막 5:7) 큰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마 8:29)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저와 (저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이르기 전에 저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원컨대 (당신께 구하오니)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저를 괴롭게 말아 주십시오!" 하니, (막 5:8)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눅 8:29) 더러운 귀신을 명하셔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다.


(막 5:9)(눅 8:30) 이에 예수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니 그가 말하기를, "제 이름은 군대(legion)니 저희 수가 많습니다"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다. (막 5:10)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눅 8: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 8: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막 5:11)(눅 8:32)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으므로 (마 8:31) 귀신들이 예수님께 간구하여 말하기를, (막 5:12) "만일 저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였다. (마 8:32) 그들더러 가라고 (막 5:13) 허락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눅 8:33)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는데 거의 2,000 마리되는 온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 달아 바다에 (호수에) 들어가 물에서 몰사하였다.


(눅 8:34) (돼지를) 치던 이들이 그 된 일을 보고 도망하여 시내(市內)와 촌에 ((마 8:33)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사람의 일을 알리니 (눅 8:35) 사람들이 ((마 8:34) 온 시내가) 그 (막 5:14) 어떻게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가서) 예수님께 이르러 (막 5:15) 그 귀신 들렸던 이 곧 군대 지폈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막 5:16) 이에 귀신 들렸던 사람의 당한 일과 (눅 8:36) 어떻게 구원 받은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사람들이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눅 8: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막 5:17) 그 지방에서 떠나가시기를 간청하였다. (많은 돼지 떼가 몰사하는 변을 당하여 큰 재산의 피해가 났으므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註).

예수님께서 다시 배에 올라 돌아가실 때 (눅 8:38)(막 5:1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막 5:19) 허락치 아니하시고 그를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눅 8: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주님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셔서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족에게 일일이 알려라" 하시니(막 5:20) 그가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온 성내와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겼다.


(막 5: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셔서 (눅 8:40) 돌아오시자 군중들이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다. 큰 군중들이 그에게로 모이므로 이에 바닷가에 계셨다. (註-'마태'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건너가 본 동네(향리-his own city)에 이르셨고"(마 9:1) 거기서 지붕을 뜯고 내려와 고치심을 받은 중풍병자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군중들에게 다시" 돌아오셨다"고 하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 '마가'는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어 바닷가에 계실 때의 일로 역시 '야이로'의 일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마가'와 '누가'의 순서를 따랐다).


금식에 대해


(막 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금식(禁食, 단식)하고 있었으므로 (눅 5:33)(마 9: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와 '바리새'파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어찌하여 선생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실 뿐 금식하지 아니합니까?" (마 9:15)(막 2:1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슬퍼할 수 있느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막 2:20)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는 것이나 (눅 5:35)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는데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다".


(눅 5:36)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마 9:16)(막 2:21)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이가 없으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겨 해어짐이 더하게 된다(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이가 없으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할 것이다). (마 9:17)(막 2:22)(눅 5: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負袋, 포대)에 넣지 아니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다(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될 것이다). (눅 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된다. (눅 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이가 없으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다".


'야이로'의 딸


(마 9:18)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막 5:22)(눅 8:41) 회당장(會堂長)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한 유력자(ruler)가) 와서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눅 8:42) 이는 자기에게 12살 먹은 외동딸이 있어 죽어 감이었다. 예수님을 보고 발 아래 엎드려 절하고 (막 5:23) 애절히 간구하여 말하기를,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시고 아이가 구원 얻어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살겠습니다" 하니 (마 9:19) 예수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실 때 제자들도 가는데 가실 때에 군중들이 둘러싸 밀었다.


혈루증(피가 새 나오는 병)을 앓는 여인


(막 5: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때 큰 군중들이 따라가며 에워싸 미는데, (눅 8:43)(마 9:20)(막 5:25) 이에 12년간을 혈루증(血漏症, 여자의 몸에서 때때로 피가 나오는 병)으로 앓는 중에 (막 5:26) 많은 의원(醫員)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고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도리어 더 중해졌던 차에 (막 5:27)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들 가운데 섞여 (눅 8:44) 예수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에 손을 대니 (마 9:21)(막 5:28) 이는 자기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었다. 

(막 5: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라 혈루증이 즉시 그쳐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다.

(막 5:30) 예수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군중들 가운데서 돌이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눅 8:45) 내게 손을 댄 이가 누구냐?" 하시니 (막 5:31) 제자들이 ('베드로'가) 여쭙기를, "주님, 군중들이 에워싸고 밉니다. 군중들이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 하나, (눅 8:46) "내게 손을 댄 이가 있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다" 하시고 (막 5:32) 예수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셨다.


(막 5:33) 자신에게 된 일을 알고 있던 여자가 (눅 8:47)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아 두려워하고 떨며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모든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서 여쭈니, (눅 8:48) 예수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하여라") 하셨다.((마 9:22) 하시니 여자가 즉시로 구원을 받았다).


(눅 8:49)(막 5: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합니까?" 하니 (막 5:36) 예수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눅 8:50)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 9:23) 예수님께서 ('마태'는 여기서 '야이로'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註)(막 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막 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셔서 ((눅 8:51)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치 아니하시고) (막 5:39) (눅 8: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심히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 (마 9:24) 피리를 불고 시끄럽게 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물러가라. 너희가 어찌하여 시끄럽게 하며 우느냐? 울지 말라. 이 소녀가(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눅 8: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었다.


(막 5:40)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이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셔서 (막 5:41)(마 9:25)(눅 8:54)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니, 일어나라") 하시니(막 5:42)(눅 8: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소녀가) 곧 일어나 걸으니 예수님께서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명하셨다. (눅 8:56) 그 부모가 놀라고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니 (막 5:43) 예수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여러 번 그들을 경계하셨다. (마 9: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두 소경


(마 9:27) 예수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 때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지칭함이다-註)이시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는데 (마 9:28) 예수님께서 어떤 집에 들어가시니 그 소경들이 나아오므로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기를, "주님, 물론입니다" 하니 (마 9:29)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셨다. (마 9:30) 이에 그 눈들이 밝아지므로 예수님께서 엄히 경계하시기를,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마 9:31) 그들이 나가서 예수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였다.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마 9: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니 (마 9:33)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므로 군중들이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였고 (마 9:34) '바리새'파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였다.


고향으로 가시니


(막 6:1)(마 13:53) 예수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 배에 오르셔서 거기를 떠나 고향(본 동네)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랐다. (막 6:2)(마 13:54)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말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능력이 어찌 된 것이냐.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木手)가 아니냐? ((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마 13:56)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그러니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 하고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마 13:57)(막 6: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 하시며 (막 6:5) 거기서는 아무 능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막 6:6)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 ((마 13:58)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다.


중풍병자가 지붕을 뜯어


(막 2:1) 수일 후에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을 듣고 (막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도(道, 말씀)를 말씀하셨다. (눅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 박사들이 앉았고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셨는데, (막 2:3) 사람들이 (마 9:2)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눅 5:18)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막 2:4) 군중들을 인하여 예수님께 (눅 5:19)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병자를 침상(寢牀, bed) 채 군중들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