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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예수님(마, 막, 눅, 요 복음서 한꺼번에 보기)ㅡ2

Tayseek Kwon 2015. 12. 29. 21:12

 


통관복음서(通觀福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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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메시아 예수님ㅡ



(막 2: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말씀하셨다. "소자(小子)야("Son"), ((눅 5:20) 이 사람아("Man")) 안심하라. 네 죄 용서함을 받았다". (마 9:3) 어떤 율법학자들이 (막 2:6) 거기 앉았다가 속으로 말하기를,((눅 5:21)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막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불경스럽다. 이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이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용서하겠느냐".

(막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말씀하셨다. 


(마 9:4)(눅 5:22)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막 2:9)(마 9:5)(눅 5:23) 중풍병자에게 네 죄 용서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6) 그러나 인자가 (막 2:10) 땅에서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한다". 이에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막 2:11)(눅 5:24) "내가 네게 말하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자 (마 9:7) (막 2:12)(눅 5:25) 그 사람이 곧 일어나 상을 (누웠던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마 9:8) 그들이 보고 다 놀라 심히 두려워하고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눅 5:2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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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註-이 중풍병자에 대해 '마가'는 '가버나움'에서라 하고 '마태'는 예수님의 향리 곧 본 동네(his own city)에서 일어난 것처럼 하고 있다. 사건 전개를 기술해 나가는 순서도 기술한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서를 쓸 때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기록하고-'마태'나 '요한'('요한'은 모든 사건의 단순한 소개보다는 주님의 말씀의 내용에 더 치중하고 있고)의 경우는 자기 기억에 의존할 수도 있겠으나-결코 서로간의 기록을 대조하여 손질하여 짜맞추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로써 이 모든 기록이 인위적이거나 상상에 의한 날조가 아니라 실제 그대로의 사실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것 즉 증인들의 증언에 의한 것임을 웅변하는 바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 된다.


즉 이렇게 혼동스럽게 기록해둔 자체가, 기록한 이들이 진실만을 말하고 결단코 지어낸 말을 삽입하여 만든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데, 당시의 기록자들은 그 말씀 자체만 기억하여 전달하였을 뿐, 피차간 각자의 기록을 대조해가며 장소와 때 등에 관한 정확성을 기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실 관계를 엄정히 구분하여 기록했어야 하는 것을 간과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혼동을 수정하도록 조처해 주시지 않고 그대로 두신 것이다.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그런 효과를 나타내도록 하심이니 과연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신가. 정확히 기록하도록 만드셨다 해서,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진실이라 믿겠는가. 오히려 이런 옥에 티 같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성경의 진실성을 웅변하는 것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런 허튼 말을 하는 사람들의 입을 봉쇄하는 결과로 반전(反轉)되어 나타나 있는 것. 이렇게 일견 혼돈이 되는 부분은 이 대목이 아니라도 여러 군데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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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레위'


(마 9:9) 예수님께서 거기서 떠나(막 2:13)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니 군중들이 다 나아오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마태'라는 사람이) ((눅 5:27) '레위'라 하는 세리(稅吏, 세관원, 징세원)가) 세관(稅關)에 앉은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5:28) 그가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눅 5:29)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므로 (막 2:15) 그의 집에 ((마 9:10)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당시 '유대'인들로서 로마 정부의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니 말하자면 로마의 주구(走狗)처럼 대접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사욕으로 무리하게 세금을 정하는 일이 흔하여 이들을 죄인시했다-註)와 죄인들이 (세리와 다른 사람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름이었다. (막 2:16)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마 9: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눅 5:30) '바리새'파 사람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비방조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너희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막 2:17)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눅 5:31)(마 9:12) "건강한 이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이에게라야 쓸 데 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矜恤, pity, commiseration, sympathy, compassion)을 원하고 제물(祭物)을 원치 아니한다'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義人)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罪人)을 (눅 5:32)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공관복음인 '마태', '누가', '마가' 복음서 중 특별히 '마태'와 '누가'에서 사건 순서 배열이 약간 다르므로 산상보훈(山上寶訓)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순서를 정했으나 주로 '누가'를 주된 골격으로 삼았고, '요한'복음을 포함해서는 물고기 5마리와 떡 2덩이 기적을 중심으로 사건 배열을 정했다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註).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막 3: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군중이 따르는데 (막 3: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Tyre)'와 '시돈(Sidon)' 근처에서 허다한 군중이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므로 (막 3:9) 예수님께서 군중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하기 위해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막 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여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막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니 (막 3:12)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계하셨다.


산으로 가셔서


(눅 6:12) 이 때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다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날이 밝자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막 3:13) 자기의 원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시니 나아오므로 그 중 열 둘을 택하여 "사도(使徒, apostle)"라 칭하셨으니 (막 3:14)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셔서 전도도 하며 (막 3:15)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었다.


(막 3:16)(마 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음)을 비롯하여 그 형제 '안드레', (막 3:17)(눅 6:14)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막 3:18)(마 10:3) 또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세리(稅吏ㅡ관세원, 징세원)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눅 6: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눅 6:15)(눅 6:16)(마 10:4) '셀롯'('셀롯'이라 함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급진적 정치 결사인 "열성당" 당원을 가리킴)이라 하는 '가나안' 사람 '시몬'이며 (막 3:19) 또 예수님을 파는 이가 될 '가룟' 사람 '유다'였다.


산상 보훈(山上寶訓)


(예수님의 가르치심 중에 유사한 것은 그 말씀하신 사건과 때를 무시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내용 별로 한데 모아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했다. 한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가르치시고 있기 때문이다-註),


(마 5:1)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오므로 (마 5:2)(눅 6:20)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입을 열어 가르쳐 말씀하셨다. (마 5:3) "가난한 이는 (심령이 가난한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천국(天國)이 그들의 것임이다(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다).


(마 5:4) 애통하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눅 6:21) 이제 주린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다.


(마 5:5) 온유(溫柔, gentleness)한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땅을 상속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義, 올바름)에 주리고 목마른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불쌍히 여기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것임이다.


(마 5:10)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눅 6: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핍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나쁘다) 하여 버리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나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니 (마 5:12)(눅 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보답(報答, reward)이 큼이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 같이 핍박하였다(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다).


"화 있을 것이다"


(눅 6:24) 그러나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 (눅 6:25)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배부른 사람들아, 너희는 주릴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웃는 사람들아, 너희가 애통하며 울 것이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다.


"'모세'는 그렇게 말했으나 나는 말한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마 5:18)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一點) 일획(一劃)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이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이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의(義)가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審判, 하나님이 내리시는 모든 악에 대한 보응,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 함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는 의미의 욕설)'라 하는 이는 공회(公會)(사사로운 업무가 아닌 공적 업무를 관장하는 곳으로서 이해됨. 종교적인 의미로서 모이는 예배 장소는 회당(會堂)이 해당된다-註)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이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禮物, 모세 율법에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가지 헌납하는 물건)을 제단(祭壇)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릴 것이다. (마 5:25)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화해하라((눅 12:58)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 고소하는 이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어가고 재판관이 너를 옥리(獄吏, 간수, jailor)에게 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6) 참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한푼이라도 남김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님(하나님)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4)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寶座, the throne)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도시임이요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다.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따라 나는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눅 6:29) 네 이 뺨을 치는 이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이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네 겉옷을 빼앗는 이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마 5:42)(눅 6:30) 무릇 네게 구하는 이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이에게 거절하지(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


(눅 6:31)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라.(마 7:12)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면 찍어 내버리라"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 (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失足)케(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내버릴 것이다. 네 백체(百體)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30) 또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릴 것이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마 18:8)(막 9:43) (막 9:44) {없음}(어떤 사본(寫本)에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음).


(막 9:45)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릴 것이다.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지옥(Gehenna-그리스어)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마 18:9)(막 9:46) {없음}(어떤 사본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음) (막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릴 것이다. 한 눈으로 영생에(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고 (막 9: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이다. ("지옥"이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라고 하셔서 강조하셨을 수도 있다-註).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눅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이들에게 말한다, 오직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 (눅 6:35) 너희를 미워하는 이를 선대하며 (눅 6:28) 너희를 저주하는 이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 너희를 모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 같이 함으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太陽)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이에게 내려주심이다.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면 무슨 보답이 있으리요.((눅 6:32)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세리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죄인들도 사랑하는 이를 사랑한다). (눅 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이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한다. (눅 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으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려 준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줄 것이다. 그리하면 보답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이에게도 인자(仁慈)하시다.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


구제할 때에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義)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보답을 받지 못한다.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위선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미 보답되었다.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이다.


기도할 때에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위선자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미 보답되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한다.(마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마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ㅡ잘못이나 허물, 과오와 실수)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


(눅 11:1)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마치시니 제자 중 하나가 여쭙기를,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저희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눅 11:2)(마 6: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마 6:10) 뜻이 하늘에서 이루는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눅 11:3)(마 6:11) 오늘 저희에게 (날마다) 일용(日用, daily bread)할 양식을 주시고 (눅 11:4) 저희가 저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마 6:12)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저희 죄도 용서하여 주시고 (마 6:13) 저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들지 않게 하여 주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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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註-"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니,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는데 "아들"들이 된 우리는 땅에 있다. 이는 부자(父子) 간의 격리를 의미함이니 확실히 비극이다. 모든 것은 이런 비극적 현실을 인식함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자'(마 8:22)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산 자'가 되어 있어 아들들이니 그리스도와 함께 된 아들들로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이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이 세상에서 아들의 보내심을 받은(요 20:21)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아들들이다(롬 8:17).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시니)자들이 되어(고후 6:1/요 5:17) ①아버지의 이름을 온 세상 만민에게 알리고 ②그 나라를 전파하고(눅 9:2,60/행 20:25/28:31) 우리를 대하신 ③아버지의 뜻을 알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본분인 것이다.


①아버지의 이름을 전파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을 알림이다(행 4:12). 그런즉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 이렇게 된다. 따라서 중심 주제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②아버지의 나라를 전파한다는 것은 거기가 생명의 나라요 아버지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은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의 세상임을 알리는 의미다. 고로 이 세상 일을 오늘날 우리가 백안시(白眼視)하고(골 3:1,2)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아(요 12:25) 세상 삶에 빠져 있지 않아야 함을(요일 2:15/딤후 4:10)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에덴낙원에서 영물들을 창조하심으로써 확립하신 바 삶의 원리 즉 사는 법 다시 말해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를 알려 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이 가르치는 바로서 한 몸을 이룬 공동체적 삶의 근간이니 곧 한 몸에서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그 어느 쪽도 자아중심이지 않아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상대를 위하여 사니 자기 부인이라고 한 마디로 요약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위치해 있는 유일한 의미이므로 그래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아들된 도리인즉 이런 일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까닭에 우리의 기원 역시 이에 맞추어지는 것이다. 곧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 삶의 기본 도리 곧 우리를 창조하신 뜻(목적)을 전달하여 그 법질서를 따라 모든 인생들이 살도록 함이다. 물론 그렇게 살고 살지 않는 여부는 각자에 달린 문제다. 그렇게 하도록 완전한 자주 독립성을 각인에게 부여하시고 보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오늘 일용(日用)할 양식을 구함이니, 여기에는 두어 가지 이유가 있다. 이미 앞에서 아버지는 '하늘(영계)'에 계시고 아들들은 '땅(자연계)'에 속해 있는 사실을 상기(想起)하는 것부터가 비극적 사연이 개재되어 있음을 강조했지만, 원래 영계 곧 에덴낙원에 살도록 되어 있는 인생들이 당치도 않게 이 자연계에 속한 뭇 짐승들처럼 자연계에서 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고 비극인 것이니 왜냐면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끝내는 죽도록 하시려고 만드실 리 없다(롬 5:12). 죽지 않는 것이 되자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반드시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지라(자연법칙이 그러하므로) 신령한 몸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과연 에덴낙원이 그러한 신령한 세계 곧 영계라는 사실은 창세기나 기타 성경 각 대목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는 터. 꼭 "에덴낙원은 영계였다" 하고 설명을 달아야 영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가 아님을 여러 객관적 사실로써 확인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영원성을 지닌 영혼과 한정된 자연계 소속의 육체는 절대로 좋은 배합일 수 없으니, 육체가 죽어 없어져 혼자 남게 되는 영혼의 불만, 불평이 극도의 고통에 이를 것은 필연적인데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인간을 창조하실 리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니 이는 평범한 상식에 속한다. 이런 것조차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아담은 자연계 육체로 시종 살고 있었고 에덴낙원은 자연계의 한 동산이었다고 맹신해 왔고 그렇게 가르쳐 온 것이 지금까지의 소위 "신학(神學)"의 실체다.


아담이 범죄로써 애초의 초자연계 몸을 상실하고 이 자연계에 항구적으로 소속됨에 따라 정상적인 인간 삶의 세계(초자연계)가 아닌 데에서 살자니 첫째 입에 들어가는 먹는 것부터가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처럼 그냥 풀(野生)이나 뜯어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힘들여 농사를 짓겠는가. 또 짐승들처럼 피부에 자연스러운 털옷이 입혀져 어떤 기후에든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힘들여 옷감을 손수 만들어 옷을 해 입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의 결과가 아니라 저주의 결말인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원래 살도록 되어 있는 영계에서는 그렇게 수고할 이유가 없었으니 옷은 피부에서 발산하는 광채로서 빛의 옷이요 먹고 마시는 것은 신령한 몸에 걸맞게 별로 먹지 않아도 될뿐더러 오직 먹는다는 것은 생존 차원이 아니라 삶의 낙을 즐기는 차원에서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계에서는 먹지 않으면 죽는 판이요 그것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본질상 매일 먹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런 비극적 실태가 이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일용할 양식"에서 생생하게 입증되어 나타난다.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먹을 것이 충분히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 이마에 땀 흘려 수고해야 그런 생존 수단이 생기게 된다고 저주 차원에서 말씀하신 그대로다(창 3:17). 즉 먹는 것까지도 일일이 하나님께 구해야 할 상황이다. 구하지 않아도 인생들이 살 만한 환경이라면 왜 역대(歷代) 아사자(餓死者)가 생겨나는가. 죽을 때는 죽더라도 최소한 굶어 죽는 자는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또 하나의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서 "품속"(요 1:18)의 아기와 같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모든 피조물의 실상이다. 영원히 그렇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태 속에서부터 빠져 나와 자라고 어른이 되면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육체가 쇠약해짐으로써 병들고 죽지만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 신령한 육체는 영원히 그 상태 그대로 영속되므로 아버지 품속에 있는 상태 역시 영원히 그러하다. 모든 것이 처음 창조된 그대로의 완벽하고 온전한 모습 그대로 지속됨이다.


아들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만유의 주인이신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품속"의 아기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다"(요 10:29) 하시면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14:28)고 하셨다. 그래서 성령 강림하신 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아버지의 거룩하신 소자(아이, Child)라 하였고, 성령 충만하여 함께 기도할 때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것이므로 평상시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번역자들도 원래의 흠정영역을 빼고는 거룩한 종(Holy Servant)이라고 일치하게 '풀이하여' 표현하고 있으나, 아버지 앞에서의 "아이"라는 표현보다 "종"은 더욱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 친히 그 아들에 대하여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에는 아들이 장차 사람이 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시는 까닭에 "종"이라고 하셨지만, 피조물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종"이라 함은 아주 마땅치 않은 것이다. 엄연히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아들이시요 독생자이신 것이다.


성령께서 그 당시 "거룩하신 소자((小子), Holy Child)라고 표현하도록 하신 것은 이상 설명과 같은 사유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요 1:18)고 말함으로써 확인되어 있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인식하고 있는 대로의 "엄마 품속"이라 할 때의 의미를 원용(援用)한 것이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그대로이다. 즉 엄마 품속의 아기는 입을 엄마 젖꼭지에 갖다 대기만 하면 빨 수 있는 '먹을 것'이니, 바로 이러한 의미가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인 것이다. 우리가 비록 현재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이미 이루어져 있고 엄연한 실질적 모습 그대로이므로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로서, 우리의 현재 위치가 거듭되는 설명이지만 이 세상에서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할(히 13:5/딤전 6:8) 오직 일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 어떤 의미로든 삶의 낙을 향유하는 위치가 아님을 명시하는 것이 이 주님 가르치시는 기도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보내심을 받아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로서 그 날 하루하루 먹으면 족하지 남은 것을 쌓아두고 재어두어 부유함을 자랑하는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더불어 여기서 강조하게 되는 의미는 저주 받은 죽은 자로서의 인생은 내일이 없다는 것이다. 내일 죽을지 심지어 오늘 이 시간 후의 일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쓸 것을 구하는 것 이상으로 합리적인 구함은 없는 것이다. 즉 내일이 없는 인생의 비극적 실상을 끝까지 주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인생. 오늘 이 시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만이 확실한 것이 현재의 인생의 현주소다. 앞서의 설명대로 이것은 삶의 낙을 누리는 차원이 아니라 일하는 차원이다. 오늘 몫으로 할 일에 오늘로써 충실을 기하는 것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함이다. 물론 이 죄 용서를 비는 것은 이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죄를 거듭거듭 용서해 주시기를 구함이 아니다. 이미 그 죄는 다 용서 받은 의미가 우리의 세례 받음이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는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요일 5:16,17) 함과 같이 이럴 경우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원래 "우리"로써 시작한 기도이고 "우리"로써 마치는 것이니 '나'라는 개념은 여기에 없다. 따라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구하는 성격의 기도일 수가 없다. 나로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확고한 결의 속에서 시작한 삶이므로(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벧전 4:1) "우리" 속의 내 이웃을 위해 구함이다. 물론 나라고 해서 절대로 죄를 짓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할 처지는 아니니 이 경우 다른 형제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 이 기도를 드릴 때는 내 이웃(형제들)의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드리되 반드시 그렇게 용서해주시는 법질서를 따라 구함이니 즉 내 스스로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때에 한해서 베풀어 주시는 용서이므로(마 18:35) 그런 이웃이 그와 같이 먼저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다니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때 자기를 포함해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한 것이 그러한 제사장적인 기도의 예(例)이다. 자기 자신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기로 한 의지의 사람 다니엘이 "우리는 죄인입니다" 한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함도 역시 같은 성격 즉 제사장으로서의 기원이다. 물론 이와 같이 기도하면 그 우리 속에 기도하는 나 자신도 포함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철칙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가르치신 기도도 "우리"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내가 범죄하였음을 뒤미쳐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당연히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버리는 것이요 그래서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것도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의 죄를 뉘우치고 버린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 나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아닌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 몫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나의 몫은 오직 회개하여 죄를 버림이다. 물론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는 줄 내가 믿기 때문에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은 확신 속의 기도라야 함을 나타냄이니 이 믿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드러나듯이 세상 영광과 권세가 마귀 사단에게 넘겨진 상태다(눅 4:4-7). 이런 현실 앞에서 그와 같은 변함없는 믿음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믿음과 동시에 우리의 결의를 다시 한번 더 다짐하는 대목이기도 한 것은 이런 마귀에게 속한 세상(요 18:36)을 사랑하지 않고 여기서의 삶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이다.


왜 이런 점이 반복되어 강조될 필요가 있느냐 하면 많은 사람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이 세상 삶을 사랑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비극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서도(요 12:25) 구원은 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열의 아홉은 되는 오늘날의 실태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시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거짓말을 더 믿는 것이 에덴낙원의 아담 당시나 오늘날이나 일관된 실로 괴이한 "역사의 되풀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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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할 때에


(마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미 그 원하는 것을 받은 것이다. (마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 6:18) 이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이다. (사람에게 나타내기 위해 했으므로 그 목적한 대로 즉 "하나님 앞에 경건하구나" 하고 사람들이 인정해주었으니 "이미 그 원하는 것을 받았다" 하신 것ㅡ註)


재물에 대하여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寶物)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녹이 슬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한다.[(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다]. (마 6:21)(눅 12:34) 네 보물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누가의 기록을 보아도 이 등불에 관한 언급이 두 번 나온다. 같은 내용도 여러 번 주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치 한 자리에서 모든 말씀을 하신 것처럼 해서 정리했는데 이는 비슷한 내용은 한데 모아 그 표현에 따른 내용의 본질을 음미하고자 함이다-註).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重)히 여기며 저를 경(輕)히 여김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

하여 섬기지 못한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 12:22)(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 12: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나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기르시는 것이니 너희는 새보다(이것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눅 12:25)(마 6:27)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눅 12: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눅 12:27)(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백합화를(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한다(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한다).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 (눅 12:28)(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 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9)(마 6:31) 그러므로 너희는 염려하여 말하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여 찾지 말며 근심(의심)하지도 말라. (눅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마 6:32) 이는 다 이방인(불신자)들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신다.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마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 (눅 12:32) 적은 무리들아(Little flock),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눅 6:39)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와 선생


(눅 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이는 그 선생과 같을 것이다.


"네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마 7:3)(눅 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한식(韓式) 가옥에서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눅 6:42)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그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5) 위선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분명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것이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pearls)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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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註-믿지 않는 사람들을 개나 돼지로 비하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의 차이처럼 전혀 해당이 되지 않고 상관이 없는 사실을 강조하심이다. 그러면 "너희를 찢고 상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아 믿어 거룩하게 되지 않으면 그 반대가 되어 실질적으로 복음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에 원수가 되는 사이비, 가짜, 세상 종교가 되고 그런 종교인으로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禮, 예법)"(요 16:2)인 줄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받는 것이 되지 않고 구원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 없는 개나 돼지에 전달하는 모양새가 되어 정작 구원은 시키지 못하고 종교인만 만들게 되는가 하면, 자기 부인의 복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자아중심의 제자들이 이를 곡해하여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는가?" 하고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게 될 때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배운 사람 곧 아버지께서 이끄는 자가 내게 오는 것이다"(6:45,65) 하심과 같이, 죄인임을 자각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다짐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인데도, 덮어놓고 "믿으면 영생한다"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싸구려로 남발하는 경우다.


무엇을 아버지에게서 배우는 것인가 할 때, 이 세상의 죽음의 처참한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여 스스로의 죽은 자 되어 있는 사실과 사단에게 속박되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무서운 현실을 자각하는 것을 말함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기 부인이 아니라 더 심하다고 할 말씀이 있더라도 감히 물러갈 생각을 못하고 베드로처럼 "생명의 말씀이 계시니 누구에게 우리가 가겠습니까"(:68)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먼저 깨우쳐 주어 회개하도록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상태에서 영생하는 복음을 전달함으로써 "믿기만 하면 되고 선물로 거저 받아 챙기기만 하면 된다"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수박 겉 핥기로 말할 때(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모조품인데도), 구원받음은 고사하고 더 완고하고 회개하기가 힘든 종교인(소위 기독교인)으로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네는 구원 받았다고 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거룩함을 강조하고 자기 부인을 역설하는 등의)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그런 세상 종교에 열심일 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가장 선봉에 나서서 방해하고 교회를 탄압하는 일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교회를 "찢어 상하게 하는" 일에 앞장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의를 주시고 경고하시는 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되 정확하게 알아 정확하게 전달하라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가 먹을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막 7:26) 하심이 바로 이 뜻이다.


모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앞에서의 이 세상의 참상, 죄와 사망에 얽매여 있는 인간의 철저한 무기력성을 절감하고 배우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또는 그런 유형에 해당하는 모든 세상 만민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모세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가리키는 데에 그 설정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롬 3:20),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기 이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각자의 죽음의 상태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온전한 회개를 유발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영생 얻는 믿음도 불가하므로 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함부로 전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 얻는 자는 하나도 없고 종교인만 대량 양산하게 된다. 여기서 사람들은 다시 율법을 오해 착각하게 된다. 마치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로 죄인됨을 깨닫게 하는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서 실제는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으로까지 곡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은,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 3:19) 한 대로 죽을 일을 하는 죄의 가지 수도 많으니 이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율법의 가지 수도 덩달아 많아질 수밖에 없음과 같은 뜻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할 때,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딤전 1:8)이라 하였고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를 위함"(:9)이라 한 대로 옳은 사람(의인)의 생활 규범인 것이다. "법"의 핵심은 사랑에 있으므로 사랑을 법문화(法文化)시켜 강제성을 띠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로 그리스도께서도 오직 하나 "새 계명"(요 13:34)만을 주셨으니 그것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를 강조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 생명의 옳은 법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죄이니, 이를 알면서도 여전히 "불의가 좋아서"(살후 2:12) 악을 선호하는 경우는 제외하고(이런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리고 영원히 구원이 해당되지 않는다) 단지 몰라서 죄를 짓고 있는 이들을 그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리는 목적으로 "죄를 깨닫게"(롬 3:20) 해 줌인 것이다. 그 옳은 삶의 규범이 무엇이냐 하면, "온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한데 묶어 집약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과 같이 한 몸 의식에서의 사랑 곧 자기 부인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이다. 이것이 뿌리요 둥지다. 나머지는 가지들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가르친 것과 원래의 하나님의 뜻의 차이를 명백히 하시어, "모세는 그렇게 말했으나 나는 말한다" 하심으로써 모세는 단지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맛보기로 보인 것이고 이제는 그리스도 친히 예로부터 내려 오는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심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법을 기준하면 더 엄격하고 거진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죽은 자로서 죽어 있는 상태에서 산 자의 일을 쳐다보자니까 그런 것이니,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절대로 무리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당연지사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가 이렇게 현격한 것이지 결코 동일한 수준일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는 사뭇 엄격하기만 하여 도저히 이해 난망(難望)이고 그래서 "이는 어렵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느냐"(요 6:60) 하고 물러가는 것이지만, 산 자에게는 자기 부인이야말로 기쁨의 근거가 되는 바로 그 영원한 삶의 법질서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 자기 부인은 사랑의 핵심이니 한 몸 구조에서의 삶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 하는 까닭이다. 한 몸 구조에서는 머리도 몸도 자기를 절대로 위하지 않고(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고후 5:15/롬 14:7-9) 상대를 위하므로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 지혜요 아름다운 도리로서의 자기 부인을 제대로 파악하는 자로서 누가 이를 기뻐하지 않으리요.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사수하여 지킬 영원한 삶의 규범이 아닌가. 그리스도 친히 바로 그런 사랑(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 가운데에서 비록 육체로는 처절한 사투(死鬪)("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4)를 벌이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응하신 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를 죄인으로 자각시키고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많은 사람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생명의 뼈대인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마  5:17) 하셨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죽은 자로서 도저히 지킬 것이라 상상도 못한 것을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새 생명의 능력을 보유하였으므로 넉넉히 지키고도 남을 뿐 아니라 이제는 기쁨으로 자진해서 그 계명 자체를 사랑해서 지키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말할 때 모세 율법과 구별할 필요가 있으니 하나님의 계명 따로 있고 모세 율법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모세 율법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그 실체에 대한 그림자 역할로서 정식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유치원 예비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식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그런 유치한 모든 것을 버림과 같다. 할례(모세 때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당시부터 시작한 것이지만)를 받는다든가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의 온전한 계명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니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신 대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바로 그것이다. 온전한 율법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식 수준이니 하나님의 피조물의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한 몸 구조임을 안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자체가 삼척동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평범한 것이니 진리는 평범한 데에 있다 한 그대로다.


죄가 들어오고 죽음이 옴으로써(롬 5:12)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어 더군다나 악령 사단의 갖가지 농락에 찌들어져 있기 때문에 생명과는 180도 다른 위치인 이런 비정상 상태에서 정상적인 것을 이해하려 하니 마치 하늘과 땅 차이처럼 어마어마한 거리감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이제 눈을 뜸으로 인하여 어두움을 벗어 버리고 빛에 들어와 모든 것을 보게 되고 사단의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서(행 26:18) 모든 것은 일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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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옷을 입고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포악한 이리다. (눅 6: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 (눅 6:44) 나무는 각각 (마 7:16) 그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이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무화과를), 또는 엉겅퀴(찔레)에서 무화과(포도)를 따겠느냐.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니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 (마 7:20) 이러므로 그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이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는 것이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다.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해도


(눅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마 7: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 일을 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나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


(눅 6:47) 그러므로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이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보이겠다. (마 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이는 (눅 6: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지혜로운 사람 같을 것이니 (마 7:25) 비가 내리고 큰 물이(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여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이는 그 집을 (눅 6:49) 주초 없이 흙 위에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니 (마 7: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니 곧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파괴됨이) 심하다".


(마 7:28)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율법학자들과 같지 아니함이었다.


(마 8: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군중이 따랐다. (눅 6:17)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시니 허다한 그 제자들과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 '두로',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들이 함께 하였다. (눅 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으므로 (눅 6:19) 온 군중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었다.


문둥병자를 고치심


(눅 5:12) 예수님께서 어떤 동네에 계실 때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마 8:2) 나아와 (막 1:40) 꿇어 엎드려 절하고 간구하기를,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하였다.(마 8:3)(막 1:41)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눅 5:13)(막 1: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해졌다. (막 1:43)(눅 5:14)(마 8:4) 예수님께서 그를 엄히 경계하셔서 곧 보내시며 (막 1:44)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증언하라" 하셨더니 (막 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눅 5:15)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게 되어 허다한 군중이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한적한 곳에 나가 기도하시다


(눅 5:16) 예수님은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왔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


(눅 7:1)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마 8:5)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百夫長, centurion - 백 명의 군 병력 지휘관))이 (눅 7:2) 그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눅 7:3)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오셔서 그 종을 구해주시기를 청하여 '유대'인 장로 몇을 보내니, (눅 7:4) 이에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말하기를,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합니다. (눅 7: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습니다" 하였다. (나아와 간구하여 (마 8:6) 말하기를, "주님, 저의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합니다" 하였다). (마태는 직접 왔다고 기록하였고 누가는 장로들을 보냈다고 기술하고 있다-註).


(마 8:7)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 하시고 (눅 7:6) 함께 가실 때,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하기를,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제 집에 들어오심을 제가 감당치 못합니다. (눅 7:7) 그러므로 제가 주님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습니다. (마 8:8) 다만 말씀만 하셔서 제 하인을 낫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마 8:9)(눅 7:8) 저도 남의 수하(手下)에 있는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졸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마 8:10)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눅 7:9) 그를 기이하게 여겨 따르는 이들에게로 몸을 돌이켜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마 8:11) 또 너희에게 말하지만,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마 8:13)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되라" 하시니 바로 그 시(時)로 하인이 나았다. (눅 7: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이가) 이미 강건해져 있었다.


'나인' 성의 과부


(눅 7:11) 그 후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도시로 가실 때 제자와 허다한 군중이 동행하더니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데 이는 과부인 그 모친의 독자로서 그 도시의 많은 사람도 함께 나오고 있었다. (눅 7:13) 주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가까이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니, 일어나라". (눅 7:15) 이에 죽었던 이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니, 예수님께서 그 모친에게 베푸신 인자(仁慈)를 인하여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말하기를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였다. (눅 7:17) 예수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다.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눅 7: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눅 7:19) (마 11:2) '요한'이 옥(감옥)에서 그리스도(메시아)의 하신 일을 듣고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님께 보내어 (마 11:3) 여쭙기를,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라" 하니 (눅 7:20)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말했다.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며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라'고 했습니다" 하니 (눅 7:21)(마 11:4) 마침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질병과 각종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사람들을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셨으므로 (눅 7:2)(마 11:5)2) 이에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가서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이가 살아나며 가난한 이에게 복음이 전파되더라'고 하라.(눅 7:23)(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이는 복이 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들이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요 15:24) 하신 대로 요한에게 본 대로 고하라고 하셨던 각종 나타내신 능력은 당시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나를 인하여 실족한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당연히 강하시리라는 선입 관념이 있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약하심은 실족(失足) 거리일 수밖에 없는 것.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둔다"(롬 9:33) 하심과 같으니 악의 무리들을 발본색원하여 처벌하고 정의 사회를 구현시키는 그러한 모습으로 구세주를 기대하는 이에게는 실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러한 것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처하고 나타날 적 그리스도에게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요한도 자기가 불의한 왕의 그 불의를 지적함으로써 받은 대가로 옥에 부당하게 갇혀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당연히 구출해주실 것이라 믿었는데도 전혀 이에 대해서는 미동도 하시지 않으니 슬그머니 의심이 들기 시작하여 제자들을 그와 같이 보낸 것이다.


이미 그 모친의 복중(腹中)에 있을 때부터 모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본 즉시 성령의 감동으로 기뻐하였던 세례 요한이지만 이렇게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니 심각하게 우리 모두 거울로 삼을 일이다. 고난 당하시는 그리스도, 처참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시는 그리스도, 약하고 천한 모습의 그리스도도, 역시 그 몸된 교회로서 동일한 약함으로 학대와 천대를 받으며 "세상의 쓰레기"(고전 4:9) 같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그 육체가 사정없는 능욕의 대상이 되어 있는 각자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곤욕(히 11:35-38) 등은 세례 요한의 경우와 같은 것이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이는 복이 있다" 하신 경고를 겸손히 수용할 일이다-註).


(눅 7:24)(마 11:7)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황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눅 7:25)(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이들은 왕궁에 있다. (마 11:9)(눅 7: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고 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선지자 이상의 사람이다.


(눅 7:27)(마 11: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네 앞에 보내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다. (마 11:11)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눅 7:28)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이라도 그보다는 크다".


침입을 당하는 천국


(마 11:14) 너희가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이 사람이다.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이 '요한'까지니((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to press into). (천국은 침입을 당하는 것이니(to suffer violence) 침입해 들어가는 자(the violent)가 빼앗아 차지한다(to take it by force).  

(눅 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劃)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울 것이다. (마 11:15) 귀 있는 이는 들으라". (눅 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옳다 하였으나 (눅 7:30) 오직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 학자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이다.


(눅 7:31)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눅 7:32)(마 11:16) 비유컨대 아이들이 시장 거리에 앉아 제 동무를 서로 불러 (마 11:17) 말하기를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哭)을 해도 너희가 가슴을 치며 울지 않는다' 함과 같다.


(눅 7:33)(마 11:18)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자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눅 7:34)(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자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하니, (눅 7:35) 그 되어지는 일을 보고서야 지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고라신아"


(마 11:20) 예수님께서 능력을 가장 많이 베푸신 도시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셨다. (마 11:21)(눅 10:13) "화 있을 것이다, '고라신'아! 화 있을 것이다,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능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그들이 벌써 베 옷을 입고 재(ashes)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마 11:2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눅 10:14)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눅 10:15)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陰府ㅡ무덤)에까지 낮아질 것이다! 네게서 행한 모든 능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도시가 오늘날까지 있었을 것이다. (마 11: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달구지나 쟁기를 끌 목적으로 그 채를 잡아매기 위해 마소(牛馬)의 목에 가로 얹는 나무)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다" 하셨다.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눅 7:36) 한 '바리새'파 사람이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이에 그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香油) 담은 옥합(玉盒-alabaster jar)을 가지고 (눅 7:38) 예수님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눅 7:39)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하자 (눅 7:4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말할 것이 있다". 그가 말하기를,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눅 7:41) 이에 말씀하셨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이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 '데나리온'(당시 화폐 단위), 하나는 50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갚을 것이 없어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시몬이 대답하기를, "제 생각에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입니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니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olive oil)도 붓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그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다. 용서 받은 일이 적은 이는 적게 사랑한다".


(눅 7:48) 이에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죄 용서함을 받았다" 하시니 (눅 7: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용서해 주는가" 하였다. (눅 7:50) 예수님께서 다시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셨다.

'갈릴리'로부터의 '예루살렘' 2차방문


(눅 10:38) 제자들과 여행 중 예수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니 '마르다'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어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는데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져 예수님께 나아가 말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치 않으십니까? 저를 좀 도와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눅 10:41)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마리아'는 그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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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註-4복음서를 보면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을 오직 고난 받으시기 위해 올라가신 사실 하나로만 취급하여, 요한처럼 서너 차례에 걸쳐 올라가신 사실은 기록하지 않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행하신 것을 기술할 때 약간 차질이 있듯이 서술하고 있는 점 우리는 이해하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가 그런 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요한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5리 정도로 가까운 곳)에 머무신 사실(눅 10:38)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다시 "예루살렘에 가시려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17:11), 이미 그 앞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9:51)고 하여 고난 받으시기 위해 마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처럼 장면을 전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고로 이런 점을 참작하여, 마르다의 집에 유하신 일(누가의 기록)은 누가가 기술한 사건 배열이나 순서를 무시하고 앞당겨 적당히 삽입해 넣었다. 물론 당시의 사정을 우리로서는 모르지만 '마리아'와 마르다 두 자매가 나사로와 남매간인 그 '마리아' 가족이 아니고 동명이인(同名異人)일 수도 있다. 당시는 자매들 중에 그런 이름이 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나사로의 가정과 동일하다고 결론 짓고 정리했다. 그러므로 마르다의 집에 가신 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방문하신 것도 되겠고, 예루살렘을 떠나시면서 들르신 것도 될 수 있으므로 일단 그렇게 편집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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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38년 된 병자

(요 5:1) 그 후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羊門ㅡthe sheep market)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porch) 다섯이 있고 (요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이 요동 치기를 기다리니, (요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요동 치게 할 때 물이 동(動)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이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었다. (요 5:5) 거기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요 5:6)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므로 말씀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7) 병자가 대답하기를, "주님, 물이 동할 때에 저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요 5: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이 날은 마침 안식일이므로 (요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말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요 5:11) 대답하기를,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였습니다". (요 5:12) 그들이 묻기를,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나 (요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인지 대답을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다.


(요 5:14) 그 후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요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님이라 하였다. (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게 되자 (요 5: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막 2:23)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 제자들이 (마 12:1) 시장하여 길을 열며 이삭을 잘라 (눅 6:1) 손으로 비벼 먹으니 (막 2:24)(눅 6:2) 어떤 '바리새'파 사람들이 (마 12:2) 보고 예수님께 말하기를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합니까?". (막 2:2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눅 6:3)(마 12:3)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궁핍하여 시장할 때 한 일을 읽지 못했느냐? (막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大祭司長) 때 하나님의 성전(聖殿에 들어가 오직 제사장(祭司長) 외에는 (눅 6:4)(마 12:4)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을 수 없는 진설병(제단에 바쳐 벌여놓은 떡ㅡshewbread)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마 12:5) 또 안식일(安息日)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安息)을 범해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律法, 모세의 율법)에서 읽지 못했느냐? (마 1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마 12:7) '나는 자비(慈悲)를 원하고 제물(祭物)을 원치 아니한다'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이를 단죄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막 2:27) 또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 (눅 6:5) (막 2:28)(마 12:8) 이러므로 인자(人子)는 안식일에도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


(마 12:9)(막 3:1) 거기를 떠나 (눅 6:6) 또 다른 안식일에 다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마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오른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으므로 (막 3:2)(눅 6:7)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꼬투리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지 엿보다가 묻기를,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하였다. (막 3:3)(눅 6:8)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그가 일어나 서므로(막 3:4)(눅 6:9)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므로 (막 3:5)(눅 6:10)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셔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마 12:11)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 어떤 이가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마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 하시고(마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내미니 그 손이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해졌다.


(눅 6:11) 그들은 분기(憤氣·忿氣)가 가득하여 ((막 3:6)(마 12:14)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黨)과 함께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죽일꼬 (처치할꼬) 서로 의논하였다. (마 12:15) 예수님께서 이를 아시고 거기를 떠나시니 사람이 많이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마 12: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마 12: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마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이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justice)을 이방에 알게 할 것이다. (마 12: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목청을 높이지도 아니할 것이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마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to lead justice to victory) 때까지 할 것이니 (마 12:21) 또한 이방(異邦ㅡ'이스라엘' 외의 세계 각국)들이 그 이름을 앙망(仰望)하게 될 것이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여


(눅 13:10)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눅 13:11) 18년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다. (눅 13:12)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러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눅 13:13) 안수(按手ㅡ손을 들어 사람 위에 얹음)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눅 13:14) 회당장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에 분 내어 군중들에게 말하기를,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다" 하므로 (눅 13:15)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마구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눅 13:16)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그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눅 13:17)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군중은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다.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눅 14:1)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한 간부(幹部)의 집에 잡수시러 들어 가시니 그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눅 14:2) 주님 앞에 고창병(蠱脹病ㅡ水腫病, dropsy: 대개 심장, 신장상의 결함으로 얼굴이 부어 오르고 팔다리고 크게 부풀어 올라 피부가 물러지는 증상의) 든 한 사람이 있으므로, (눅 14:3)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이에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눅 14:4) 그들이 잠잠하므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눅 14:5)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눅 14: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요 7:1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이가 없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7:20) 군중들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귀신이 들렸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가?". (요 7:21)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니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긴다. (요 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割禮)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임}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준다. (요 7: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全身)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요 7:24)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公義, 정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요한이 할례가 조상들에게서 나왔다고 한 것은 할례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표징(창 17:11)이 되어 있음을 가리킨 것이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주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할례가 모세 율법으로 확립되어 있는 사실을 가리키심이니,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通過節, Passover)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 것이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요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나그네로 있는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다"(출 12:48,49) 함과 같고,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3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라"(레 19:23) 함에서도 드러난다-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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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安息日ㅡSabbath)에 대한 고찰

(17註-안식일이란, 일주 가운데 토요일 하루를 쉬도록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분부하신데 따른 것이다. 쉰다는 것은 그 날에 국민들이 일체의 일을 손놓는다는 의미인데 따라서 자연 그 날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이 안식일은 6일에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쉬시고 제7일에 쉬신(안식하신) 데에서 이를 기념하고, 동시에 이집트에서 종 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던 날 양(羊)을 잡아 '이스라엘' 각 가정 집 문설주에다 피를 발라놓으면 당시 이집트에 임한 국가적 재앙(각 가정의 장자(長子)와 가축의 첫 새끼를 몰살시키는)을 면할 수 있어 이 때로부터 '유대'인들은 이 날을 유월절로 지키는 것인데 이를 함께 기념하는(신 5:15)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서는 일하심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쉬심 그리고 우리 인생으로서는 마귀에게 매여 종 살이 하던 데로부터의 해방 즉 노예 고역(苦役)으로부터의 쉼, 이 둘을 함께 의미함이 된다. 그러나 인류 구속사(救贖史)를 볼 때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신 대로 그 6일 창조가 다시 인간의 새 창조로 연결, 연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이상 두 가지가 합성(合成)된 본질적 의미이다. 당시 첫 유월절 때 각 가정에서 잡은 양은 바로 이 새 창조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두 가지 뜻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첫 창조와 새 창조의 연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첫 창조는 인간(아담)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무효화된 것이므로 새롭게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고로 하나님의 안식이라면 두 창조를 동시에 거론해야 하는 것.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은 첫 창조를 마치신 후의 안식만 아니라 새 창조를 완성하신 후의 안식을 함께 의미하게 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처음 창조의 안식(쉼)으로 상징되는 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하고 섬기는 1주 중의 하루>의 의미가 인간의 범죄와 죽음으로 인해 불가피해진 새 창조(현재까지 진행 중)의 결과로 나타난 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영원하고도 정상적인 삶>으로 최종 종결되는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의 의미는 이 글(17註)의 말미에 가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요일이 수요일이냐, 금요일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언급이 되겠지만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과의 관계에서도 뚜렷이 드러나게 되므로 마땅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유대'인들은 매주 토요일 안식일(일반 안식일) 외에도 또 다른 안식일을 지켰으니, 즉 유월절로써 시작되는 무교절(無酵節)(누룩 없이 만든 떡을 그 일주간 먹는다)의 일주간(7일)에서 그 첫날은 그것이 그 주의 무슨 요일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이래서 이 경우의 안식일을 설명 편의상 '유월절 안식일"이라 부른다. 일반 안식일이 있고 유월절 안식일이 별도로 있는 것은 위의 설명처럼 첫 창조와 새 창조가 구분되어 있고 따라서 첫 창조로서 끝난 것이 아니고 메시아로 인한 새 창조의 과업이 수행 중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무조건 첫 창조의 안식일 휴식에만 매달려 이 새 창조의 의미를 무시해버림에서 오는 마찰이 이상 대목들에서 보는 바와 같은 안식일에 대한 여러 차례의 주님과 '유대'인들과 충돌로 나타난다. 그 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 또는 설명을 시간대별(時間帶別)로 나타난 사건의 전후 순서를 무시하고 여기 모두 한데 모아 편집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요약된다.


즉 모세 율법을 통해 나타난 이 안식일 개념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이 모두 자아중심이 되어버려, 조물주 하나님이 그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위하시고 우리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는 이 생명의 기본 원리, 삶의 질서를 어김에서 범죄가 유발되어 모든 인생들이 이 자아중심 일변도로 변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을 위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위함이 인간 삶의 근본 도리임을 외형적으로나마 가르치는 데에 그 기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하루만이라도 인간 자신을 위한 일체의 일은 중단하고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정하신 것인데 그러나 이는 초보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실상은 일주 단 하루만 아니라 일주 전체, 우리의 삶 전체, 영원한 생명 자체가 하나님을 위하는 (동시에 이웃을 위하는) 것이어야 함을 이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명백해졌는데도, 이를 알지 못한 '유대'인들과의 알력인 것이니 이를 예비 지식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내가 이웃을 위한다는 것은 내 이웃 역시 자기 이웃인 나를 위하는 의미가 되므로, 실은 나 자신이 위해지는 것이요 따라서 전체로서의 우리가 다 함께 위해지는 다 같이 행복해지는 최고도의 삶의 지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안식일 개념이 하나님의 처음 창조만 아니라 새 창조도 아울러 포함하는 까닭에,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그 새 창조가 지금 한창 진행 중임이 명료해진 이상, 현재는 모두(모든 피조물이-롬 8:22)가 달려들어 일하는 시기로서 안식은 이후의 일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의 모든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사업 일색으로 곧 사람 살리고 건져내는 일뿐이요 따라서 새 창조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기이므로 이전처럼 특정한 날을 정하여 안식일이라 선포하고 그 날에만 주님의 일을 하는 날로 정하는 것은 '유대'교와 같은 종교의식으로나 의미가 있을 뿐이지 우리 시대에는 전혀 해당되지도 않는 무의미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주 1일만 주님의 것이 아니라 7일 모두가 주님의 것이요 10의 1만 하나님의 것이 아닌 즉 10프로만 아니라 100프로 모두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나고 새로 삶을 출발시키는 것은 과거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죽었고(그리스도와 함께)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는(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하시므로) 삶 일변도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체의 구별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구별이 있다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사신다는 그것뿐이다. 이 구분만이 유일한 것이다.


제 3일에 즉 사흘만에 부활하신 이유


이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개념이 주님의 3일만의 부활에서도 드러난다. 왜 꼭 "사흘만"일까. 단 하루만에 살아나셔도 되는 일이다. 이 또한 부활과 기타 성경 기록이 인간이 무턱대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을 웅변하는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 되어 있다. 부활이 사흘 동안이나 지체했다는 거짓말보다 단 하루만에 금방 살아나셨다는 거짓말 쪽이 더 능력 있음 직하게 보일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일부러 어떤 의도가 있어 "사흘만"이라고 설정했으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사흘"이라고 한 데에 대한 그럴싸한 설명이 붙게 마련이다. 부활이 거짓말이라고 가정하면 말이다.


그러나 일절 그런 설명이 없다. 이런 것이 바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는 것이다. 왜 3일만인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새 창조와 첫 창조와의 관계를 이로써 설명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월절 양의 죽음이 상징하는 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이제 우리는 새 창조를 입어 새 피조물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養子)이 된다. 새 창조가 필요하게 된 것은 첫 창조에서 인간의 범죄 행위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차질이 빚어진 까닭이다.


모든 인간이 죽음에 이르고 멸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새롭게 인간을 창조하시느라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시다 말고 새롭게 일에 뛰어드신 것이다. 그래서 일을 마치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신 것처럼 새 창조의 일이 완수된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 안식일의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새 창조의 일을 완수하시고 안식하신 것이다.


그것이 목요일인데 즉 수요일 저녁에서부터 시작하여 목요일 저녁까지의 하루 동안이 그 안식일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오는 것이 금요일로서 평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토요일이므로 '일반 안식일'이다. 이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이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6일 창조를 마치신 이후의 하나님의 안식을 상징함이다. 묘한 것은 그리고 여기서 의미 심장한 것은 이 두 안식일 사이에 평일 금요일이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안식일 하루, 평일 하루, 그리고 다시 안식일 하루이다. 그러나 이 두 안식일이 그 의미가 아주 다른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새 창조와 첫 창조의 차이다. 새 창조는 인간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고 첫 창조는 대체적인 즉 일반적인 창조이다. 하나님의 안식 측면에서 볼 때, 새 창조가 먼저 오고(첫 창조가 망가졌으므로 이를 보완한 후) 그래서 이를 완수하신 후 쉬신 그 다음에야 일반적인 창조(먼저 있었던)의 안식이 오는 그런 순서가 합당하기 때문이다.


이 배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총체적인 창조는 이미 6일 창조로 끝난 것이다. 그래서 7일째는 쉬시는데 불행히도 다시 새 창조로써 일을 새로 시작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벌이진 것. 그래서 이 새 창조가 끝남으로써 진정한 총체적 의미의 전체 창조의 안식이 이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즉 새 창조가 완결됨으로써 이전의 그 총체적 창조의 대단원이 비로소 종결됨이니 그래서 새 창조의 안식이 먼저 오고 나중에 총체적인 창조가 비로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의미이다.


원래는 이렇지 않은 것이다. 인간 범죄만 없었더라면 새 창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안식도 한번만으로 끝났을 일이다. 그러나 인간 구원이라는 새 작업을 완수할 절대적 필요성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고 그리고 그것이 완결됨으로 인해 거기 따른 안식(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안수되었음을 고하는)이 필요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이렇게 완수됨으로써 이제 다시 그 총체적인 창조가 처음으로 그 완전 종결을 고하게 되므로, 주님 부활의 그 사흘 기간에 이 '일반적 안식일'이 개입해 있음으로써 상징하는 의미가 이렇듯이 크다.


중요한 것은 다시 말하지만 그 두 안식일 사이에 끼인 평일(금요일)이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평일은 안식일과 대비해 볼 때, 더구나 이 두 안식일 사이에 끼인 그 성격상, 분명 그것은 쉬는 날이 아닌 "일하는" 날로서의 의미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새 창조의 과업은 종결되셨으나 그러나 대단원의 창조 즉 총체적인 창조가 종결되어 끝나기 전에 아직도 여전히 "일하는" 기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이다. 이것이 바로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 바로 오늘날의 이 세상에서의 교회 기간이 가지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아들들이면 당연히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그 상속자된 도리이자 의무이고 받은 바 특권이다. 우리 자신 하나님의 이 새 창조로 말미암아 새로 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인해 이 아버지의 새 창조의 일 즉 하나님의 아들들 탄생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각자의 몸에 채우는(골 1:24) 일차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 받으신 날은 천하없어도 반드시 수요일이어야 하는 것이며 수요일이 '유월절의 예비일'에 해당되어지는 해에 돌아가시도록 모든 것이 짜여져 있었던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 위의 설명대로 유월절 안식일 후의 평일 그리고 그 다음의 일반적인 안식일이라는 순서와 배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안식일과 평일의 배열 또는 위치가 평일, 일반 안식일, 유월절 안식일이 되어도 안되고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이 겹쳐져도 안되는 것.


일반 안식일이 먼저 오고 그 이후에 유월절 안식일이 와도 안된다. 그렇게 되면 그 의미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일반 안식일이 가리키는 바 총체적인 창조가 전부 무효화하고 새 창조가 전부를 차지하는 것과 같이 되어버리기 때문.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총체적인 것은 그대로 두고 오직 인간만을 새로 창조하시어 손보심으로 그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창조라 하더라도 온통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창조의 안식은 잠깐 유보하시고 먼저 새 창조 즉 인간을 새 피조물로 만드시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총체적인 창조가 종결되는 그런 형식을 취해야 제대로 된 순서이고 과정이다.


그래서 반드시 유월절 안식일이 먼저 오고 먼저 오되 그 후에 반드시 평일이 끼어 있어 "일하는" 기간이 상징되어야 하고 그리고 총체적인 창조가 종결되어 안식을 맞는 그런 상징성이 충분히 완벽하게 나타나 있어야 하는 것.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도 그런 의미에서는 안식일이어서도 안되고 반드시 안식 후 첫날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유월절 안식 후 첫날이어도 안되고 유월절 안식일을 먼저 보내고 일반 안식일도 마친 그 첫날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앞서 설명한 유월절 안식 후 평일(일하는 날)의 의미가 강조되기 때문이다.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의 순서대로 그리고 그 둘을 겸하여 모두 종료한다는 것은, 새 창조이든 총체적 창조 즉 첫 창조이든 모든 창조의 주체이신 조물주로서 이제 필요한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 안식에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두 안식을 종료한 후 첫 날이라야 하는 것은 "일하는 평일(두 안식일 사이에 끼인 그 '3일' 안에 포함된 평일)"로서의 의미를 살려 하나님께서 계속 그 교회를 통해 일하심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구원의 작업 즉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모두가 구원되고 끝난 다음에는 최종 안식이 선포되는데 그 때가 오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도 일하시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 3:9)이라 한 것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라고 표현된 그대로다. 우리가 새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총체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작업을 종결하셨다는 의미이다. 더 다시 창조의 일을 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인데 그런데도 일하는 "평일"이 오는 것은 그렇게 종결되어 완성된 창조 작업을 기반으로 하여 나머지 정리를 하는 작업 기간이라 할까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구원을 터전으로 하여 사람 살리는 일을 하심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단독으로 하시는 창조 작업은 끝냈고 이제는 그 피조물인 우리 구원된 사람들(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과 함께 일하심이니 창조를 위한 작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단독 행위의 영역이기 때문.


피조물인 우리가 동참하게 되는 작업은 하나님 친히 함께 하시는 작업이기는 해도 창조의 일은 될 수 없으니, 하나님의 6일 창조가 끝난 후 아담이 계속 인간들을 배출시키는 작업을 한 것과 같은 속성의 일이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신다 함은 하나님의 아들과 내가 하나됨으로써 이루어진 구원이므로 우리 홀로 일하는 것이 없고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일이 되어 있음이요(하나되어 있음을 인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아버지 또한 움직이시는 일이므로 총체적인 "하나님의 일"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벧전 1:12)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이런 오묘하신 섭리와 경륜은 사람이야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이 이와 같이 빈 틈 없이 아름답게 제대로 된 이치를 따라 짜여져 있음을 우리는 그 한 귀퉁이나마 이렇게 잠시 들여다보고 맛보게 되는 즐거움이 있다. 필자는 예수님 부활의 이 "3일"이라는 '구조'에서 3운법칙의 '특이한 구조'를 불가불 연상하게 된다.


왜 3일인가ㅡ유월절 안식일 이후의 평일 그리고 이후의 일반 안식일 그리고 이후의 평일("안식 후 첫 날")이라는 이 합리적인 순서는, 왜 3운법칙에서 FS형에는 없는 JP가 OT형과 SN형에는 있고 왜 SN형에 유독 특이하게 19라는 숫자가 작용하는가, 그리고 왜 FS형은 7등분되고 OT형은 3등분되어 반듯한 형태를 취함에도 SN형만은 그와는 전연 다르게 나타나는가 등등에 대한 오밀조밀한 설명과 유사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지으신 삼라만상이 그 합리성을 결한 데가 단 하나도 없다, 원인 없는 결과가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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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 택함을 보시고


(눅 14: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윗자리 차지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눅 14:8) "네가 누구에게든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上座)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 (눅 14:9) 너와 그를 청한 이가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할 것이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末席)으로 가게 될 것이다. (눅 14:10) 청함을 받았을 때에는 차라리 말석에 가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이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시오' 할 것이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을 것이다. (눅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 내용은 단지 삶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고후 5ㅣ15) 자기 부인을 가르치신 것이니 사람 삶의 기본 핵심이 이 자기부인이요 죄, 악, 불의, 불법의 뿌리가 자기를 위주하고 자기 본위로 나가는 자아중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아래의 대목도 그와 같은 뜻-註).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눅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셨다.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하나는 세리였다. (눅 18: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 곧 착취,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눅 18:12) 저는 일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하였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눅 14:12) 또 자기를 청한 이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富)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한다. (눅 14: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 병신들, (다리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눅 14: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될 것이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다".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베풀고 베풀지 않음으로써 나의 생사가 왔다갔다 하게 되는 엄중한 경고를 이 대목에서도 연상하게 된다-마 25:45)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이는 복되다" 하므로 (눅 14:16) 이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고자 하여 (눅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했던 이들에게 종을 보내어 말했다. '오십시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하나, (눅 14:18)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말하기를 '밭을 샀으므로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라' 하고, (눅 14:19) 또 하나는 말하기를 '나는 소 다섯 마리를 샀으므로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라' 하고, (눅 14:20) 또 하나는 말하기를 '나는 장가 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 하므로 (눅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했다.


이에 노한 집주인이 그 종에게 명하기를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였다. (눅 14:22) 종이 말하기를 '주인님, 명하신 대로 하였으나 오히려 자리가 있습니다'. (눅 14:23) 주인이 종에게 분부하기를 '변두리로 나가 길과 골목길을 뒤져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아래 비유는 앞에서 이미 말씀하신(눅 14:15-24) 내용과 비슷하나 "예복"에 대한 말씀이 더 있는 것만 다르다. 그러므로 여러 비유를 말씀하실 때 같은 내용도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라 할까-註).


(마 22:1)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으나 오기를 싫어하므로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여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하라' 하였더니 (마 22: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商業) 일로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마 22:7) 이에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종들에게 말하기를,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하였다.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하였다.


(마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때 거기 예복(禮服)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말하기를,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유구무언이므로 (마 22:13) 임금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이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이는 적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요 5:1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 (요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셔서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실 것이다.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에게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이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함이다. (요 5:24)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이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이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요 5:25)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곧 이 때이다. 듣는 이는 살아날 것이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5:27)  또 인자(人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


선행을 하면 생명의 부활


(요 5:28) 이를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이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 것이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이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듣는 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롭다(올바르다). (요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나 (요 5: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안다.

(요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니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요 5:34) 그러나 나는 사람이 내게 대하여 증언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직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다. (요 5: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니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있기를 즐거워했지만 (요 5:36) 내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셔서 이루게 하시는 일 곧 내가 하는 그 일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해 증언하는 것이요 (요 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고 계신다.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 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居)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to search)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요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요 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아니한다. (요 5:42)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 (요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니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다. (요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얻으려 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 5:45) 너희에게 죄 주라고 내가 아버지께 구할까 생각치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곧 너희가 기대하고 있는 '모세'다. (요 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을 것이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다. (요 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여인들이 자기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김


(눅 8:1) 이 후에 예수님께서 각 도시와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실 때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눅 8:2) 또한 그 악귀(惡鬼)를 쫓아내시고 병을  낫게 하신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 사람인 '마리아', (눅 8:3)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 또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겼다.


12제자들을 보내심


(누가복음서에서만은 이후 달리 70인을 보내심을 기록하고 있고 또 내용이 거의 동일하므로 여기에 한데 합쳐 놓았음).


(마 9:35)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촌에 두루 다니셔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마 9:36) 군중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정처없이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 9:37)(눅 10:2) 이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군은 적으니 (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 주십시오' 하고 구하라" 하셨다.

(눅 9:1)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막 6:7) (마 10:1)(마 10:5) 둘씩 둘씩 보내시며 모든 더러운 귀신을 제어(制御)하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눅 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병든 이들을 고치게 하시려고 내어 보내시며(막 6:8) 명하여 말씀하셨다.


(눅 9:3)(마 10:10)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돈이나 물건을 넣어 허리에 차거나 어깨에 걸쳐 둘러매는 것)의 돈이나((마 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막 6:9) 신만 신고 두 벌 옷이나 신도 가지지 말라(누가와 마태는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註). 너희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기를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마 10:8) 병든 이를 고치며 죽은 이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막 6:10) 또 말씀하셨다. (마 10:11) "아무 도시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이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 머물라. (눅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함이다.


(눅 10: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눅 10: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눅 10:4)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눅 9:4) 어디서든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서 유(留)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마 10: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눅 10: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기를 '이 집에 평안이 있으라' 하라). (마 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빌어 준)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눅 10: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막 6:11) 어느 곳에서든지 (눅 9: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마 10:14)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눅 10: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도시에서 나가 (그 거리로 나와서) 거기서 (그 도시에서) 떠날 때에 발 아래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눅 10:11) 그리고 말하기를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마 10:15)(눅 10:12)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그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도시보다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 10:16)(눅 10:3) 가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눅 10: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이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다".


(마 11:1)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셨다. (이 말씀 외에도 미래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잡히시기 6일 전에 역시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대목에 가서 거기 모든 내용을 한데 모아 집중적으로 음미하기로 함-註).


기름을 발라 병을 고침


(막 6:12) 제자들이 나가서 (눅 9:6) 각 촌에 두루 다니며 '회개하라' 전파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고 (막 6: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 (여기서의 "복음" 즉 희소식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이므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길이 열려졌다 등의 내용임에 주목-註)


사도들이 돌아옴


(눅 9:10) 사도들이 돌아와 (막 6:30) 예수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낱낱이 보고하므로, (막 6:31)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었다. 따로 데리시고 '벳새다'라는 도시로 떠나 가셨으나 (눅 9:11) 군중들이 알고 따라왔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영접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셨다.


(막 6: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가실 때 (막 6: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알고는 모든 도시로부터 그들보다 먼저 도보로 그 곳에 달려갔다.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 이에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자 (눅 9:7)(마 14:1) 그 때 분봉왕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해하니,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눅 9:8)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막 6:15) 또 어떤 이는 '이 사람이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고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했기 때문이다. (눅 9:9)(막 6:16) '헤롯'이(마 14:2) 그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구인고.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한다" 하며 보고 싶어 하였다.


(막 6:17) 전에 '헤롯'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채어 데리고 살므로 이 여자의 환심을 사려고 사람을 보내어 (마 14:3)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막 6:18)(마 14: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기를 "동생의 아내(제수)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다. (막 6: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해도 하지 못한 것은 (막 6: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었고 (마 14:5) 민중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 함이었다.


(막 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마 14:6) 생일을 당하여 신하들과 천부장(千夫長ㅡ1,000명의 병력을 거느리는 지휘관)들과 '갈릴리'의 유명 인사들로 더불어 잔치할 때 (막 6:22) '헤로디아'의 딸이 직접 들어와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하였다. 왕이 그 여아(女兒)에게 (마 14:7) "무엇이든 네 원하는 것을 구하라, 내가 주겠다" 하고 (막 6:23) 다시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 하므로 (막 6:24)(마 14:8) 그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구할까요?" 하니 그 어미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 하라"고 했다.


(막 6:25) 여아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제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막 6:26)(마 14:9)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거절할 수 없어 (막 6:27)(마 14:10) 왕이 곧 호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가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막 6:28)(마 14: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므로 여아는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었다. (막 6:29)(마 14:12)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님께 알렸다.


여자와 아이 외의 5,000 명 먹이심



(마 14:13)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셔서 (요 6:1)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어 따로 빈들에 이르시자 군중들이 듣고 여러 도시로부터 걸어서 따라 왔으니 (요 6:2)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기적을 봄이었다. (요 6:3)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요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通過節, Passover)이 가까웠다. (마 14:14) 예수님께서 나오셔서 (요 6:5) 눈을 들어 큰 군중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막 6:34)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셔서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그 중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마 14:15) 저녁이 되어 (막 6:35) 때가 저물어가므로 ((눅 9:12) 날이 저물어가니) 제자들이(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쭈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어가니 군중들을 보내어 (막 6:36) 촌과 마을로 두루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사먹게 해 주십시오. 우리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마 14:16)(막 6:37)(눅 9:1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리고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셨다. (요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었다. (요 6:7) 빌립이 대답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 '데나리온'(당시 유통된 화폐 단위)의 떡이 부족하겠습니다. 저희가 가서 200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일까요? ".


(막 6:38) 이에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요 6:8)(마 14:17)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알아보고 예수님께 여쭙기를 (요 6:9) "여기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않고는 안되겠습니다". (눅 9:14) 이는 남자만도 5,000 명쯤 됨이었다. (유대인의 셈법에서는 남자만을 다루고 여자는 제외시켰음-註).


(마 14:18)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막 6:39) 제자들을 명하셔서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요 6:10) 그 곳에 잔디가 많음이었다. (마 14:19) 군중들을 명하여 (막 6:40) 떼를 지어 혹 100씩, 혹 50씩 앉으라 하셨다.


(눅 9: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잔디 위에 앉히자 (막 6:41)(눅 9:16)(요 6:11)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셔서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원대로 나누어 주시니 (마 14:20)(막 6:42)(눅 9:17) 다 배불리 먹고 (요 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요 6:13) 이에 거두니, (막 6: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막 6:44) (마 14: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5,000명이나 되었다.


(요 6:14)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였다. (요 6:15)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모셔놓고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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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註-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5,000명이나 되는 큰 군중을 먹이시는 큰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셔서 제자들의 신앙고백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셨으니 예수님과 함께 하면 세상에 적수가 없고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에 군중들은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이런 장미 빛 그림으로 한 세상 만난 듯한 환상을 품지 말도록 주님은 경고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 세상이니 필연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도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실상을 충분히 알고 주님의 말씀을 온천하에 주저하지 말고 전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세상에서 목숨을 잃으면 얻고 사랑하면 잃는다"는 말씀을 연거푸 하시는 장면으로 나온다. 이런 말씀을 거듭거듭 강조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세례 요한'도 사람이 의롭게(올바르게) 살아야 함을 담대하게 전하다가 목숨을 잃었듯이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하는데 세상이 잠자코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세상이 그 악함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받을 수가 없는데 어찌 악하다고 증언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니 자연스럽게 당연히 세상의 미움과 핍박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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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요 6:16) 저무니 (막 6:45)(마 14:22)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자기가 군중들을 보내는 동안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막 6:46) 군중들을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마 14:23)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요 6:17) 배를 타고 바다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님은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아니하셨더니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數里)나 떠나서 큰 바람이 불어 거슬리므로 (요 6:18) 파도가 일어나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막 6:47)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님은 홀로 저물도록 거기 뭍에 계시다가 (막 6:48) 바람이 거슬러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마 14:25) 밤 4경(更 -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 새벽 3~6시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으나 그냥 지나가려 하시니 (요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10여리쯤 가다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마 14:26) 놀라 유령이라 하며 ((막 6:49) 유령인가 하여) 무서워 소리 지르니 (막 6:50) 그들이 다 예수님을 보고서 놀란 것이다.


(마 14:27) 이에 예수님께서 즉시 더불어 말씀하시기를, (요 6:20)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므로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님, 만일 주님이시거든 저를 명하셔서 물 위로 오라 하십시오!" 하니 (마 14:29) "오라" 하시므로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다가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소리 질렀다. (마 14:31)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막 6:51) 그들에게 가시어 (마 14:32) 배에 (베드로와) 함께 오르시니 바람이 그치므로 (요 6:21) 이에 기뻐하며 배로 영접하였으나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랐으니 (막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해졌음이다.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절하며(경배하며-註) 말하기를,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였다. 배는 곧 그들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군중들이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다가 (요 6: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님의 축복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었다} (요 6:24) 군중들이 거기 예수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 즉 (요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선생님), 어느 때에 여기 오셨습니까?" 하니 (요 6:26)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기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요 6:27)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印) 치신 사람이다". (이 문답은 예수님과 군중이 가버나움 회당에 이르기 전후해서 진행된 것-註).


(요 6:28) 이에 그들이 묻기를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요 6: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요 6:30) 그들이 묻기를, "그러면 저희들이 보고서 선생님을 믿게 하실 그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요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양식, bread)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모세'가 광야 길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갈 때 사람들이 먹을 음식으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진 것)를 먹었습니다".


(요 6:3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내린 떡(양식, bread: 이후로는 "양식"으로 통일함-註)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다. 오직 내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내리시는 참 양식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이니 (요 6:33) 하나님의 양식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요 6:34) 그들이 말했다. "주님, 이 양식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요 6:3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니 내게 오는 이는 결코 굶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이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요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말하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한다' 하였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이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이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할 것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요 6: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양식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2) 말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요 6:43)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요 6: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었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


(요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다. (요 6:47)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이는 영생을 가졌으니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다.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황야)에서 '만나'(註-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아래 광야를 통해 복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나그네 길에서 하늘로부터 과자 같이 생긴 먹을 것이 날마다 내려 와 이스라엘 사람들로 먹게 하셨던 것을 "만나"라 함)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양식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다.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양식이니 사람이 이 양식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나의 줄 양식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肉)이다".


(요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말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meat)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drink)이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居)하는(to abide) 것이니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므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 (요 6:58) 이는 하늘로서 내려온 양식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양식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 것이다".


(요 6:5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다.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니 (요 6:61) 예수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살리는 것은 영(靈)이니 육(肉)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요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이들이 있다" 하시니, 이는 믿지 아니하는 이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었다.


(요 6:65) 또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다".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다.


(요 6:67)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님, 영생의 말씀이 계시는데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요 6:69) 저희가 주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 (요 6:7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다". (요 6:71) 이 말씀은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니 그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팔 자였다. (요 7:1) 이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었다.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막 6:53)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막 6:54) 배에서 내리니 그곳 사람들이 곧 예수님이신 줄 알고 (마 14:34)(마 14:35)(막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이를 데리고 왔고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이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와 (막 6:56) 아무 데나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市場)에 두고 (마 14:36) 다만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허락하시기를 간청하였고 손을 대는 이는 다 나음을(성함을) 얻었다.


장로들의 전통적 관습


(마 15:1) 그 때에 (막 7:1) '바리새'파 사람들과 또 율법학자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님께 모여 있다가 (막 7:2) 그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보았다. (막 7:3) {'바리새'파 사람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적 관습을 지켜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막 7: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켜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pitchers, 물주전자)과 놋그릇을 씻는 등이었다}. (막 7:5) 이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마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적 관습을 준행치 않고 범하여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막 7:6)(마 15:3) 이에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관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마 15:7) '이사야'가 너희 위선(僞善)에 대해 잘 예언하였다. (마 15:8) 기록하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 (막 7:7)(마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였다. (막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관습은 지킨다. 너희가 너희 관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린다".


(막 7:9)(막 7:10) 또 말씀하셨다. "'모세'는 ((마 15:4)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막 7:11)(마 15:5) 너희는 말하기를 '사람이(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해 주기를 허락치 아니하여 ((마 15: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막 7:13) 너희의 전통적 관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한다".


(막 7:14)(마 15:10) 군중들을 다시 불러 말씀하셨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5)(마 15:11)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입에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막 7:17) 군중들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마 15: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십니까?". (마 15:1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심은 것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 15:14) 그냥 두어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이들이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하시므로, (마 15:15)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이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주십시오."


(막 7:18)(마 15:1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까지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마 15:17) 무엇이든 밖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므로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막 7: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다. (막 7:20)(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사람에게서 나오는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막 7:21)(마 15:19)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 간음, 도둑질, 살인, 거짓 증언, 훼방하는 것, (막 7:22)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교만과 광패(狂悖ㅡ말이나 행동이 몰상식하고 도의에 어긋남)니 (막 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마 15: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


('누가'는 예수님 친히 손을 씻지 않으셨다고 기록하였으므로 여기 한데 모아 수록한다-註) (눅 11:37)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파 사람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눅 11: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파 사람이 보고 이상히 여기므로 (눅 11:39)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눅 11:40) 어리석은 사람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눅 11:41) 오직 안에 담긴 것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라(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to give alms of such things as you have(to give alms of what is inside), to give what is inside (the dish) to the poor),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할 것이다".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


(막 7:24)(마 15:21)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거기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었다.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곧 그 지역에서 나와 소리 질러 말하기를, "주님, '다윗'의 자손되시는 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습니다!" 하였다.


(마 15:23)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기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그 청을 들어 주어) 보내시지요". (마 15:24)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하시는데 (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그 발 아래 엎드려 말하기를,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하였다.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마태'는 '가나안'사람이라 했음-註)이요 '수로보니게(Syro-Phenician)'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었다.


(막 7:27)(마 15:26) 이에 대답하셨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해야 할 것이니 자녀의 떡을 집어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막 7:28)(마 15:27) 여자가 대답했다. "주님, 옳습니다마는 상(床) 아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막 7:29)(마 15: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다. 이 말을 하였으니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하시니 (막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아 귀신이 나가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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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註-'이스라엘' 자체가 선민(選民)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일제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믿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 대표적으로 한 민족을 일으키심으로 (믿음 있는 '아브라함'이란 개인을 택하심으로써) 그들로 말미암아 장차 모든 인류에게 공통이 될 '하나님을 알고'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메시아)를 영접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의 표본으로 세우시고자 함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이었던 것이다.


즉 인간을 차별하심이 아니라, 메시아(그리스도)께서는 오시게 되어 있는데 미리부터 이에 대비하여 인간들을 교육시켜야 하지만 모든 민족이 하나같이 다 타락해 버린 까닭에 그래서 이 사전(事前) 교육의 필요성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대표적으로 다루시려고 택하신 것.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장차 임하게 되는 그리스도 시대의 교회의 표상(表象)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구약을 읽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여기에도 있다(딤후 3:15,16/롬 15:4/벧후 1:21/3:16). 교회에 주시는 경고와 교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의 자손들마저 손쓸 겨를도 없이 급격히 타락해 갔으니 사람의 심성(心性-렘 17:9)을 알 만하다 하겠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증손 12형제 가운데 다른 열 지파(支派)는 모두 타락하여 사라져 버리고 겨우 남은 것이 두 지파 즉 유다와 벤야민 족속들로서 이들을 가리켜 '유대'민족이라 하는 것이다. 고로 그와 같은 사전 교육 차원에서 대표적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가운데 '유대' 민족만이라도 끝까지 남음으로써, 인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께서 마침내 오실 때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신 것이다.


고로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고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고 구세주이신 것이다. '유대'민족의 존재는 그러므로 메시아(그리스도)를 메시아로서 온 세상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나긴 여정과 과정은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므로 오늘까지도 구약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되고 있다(딤후 3:15). 그런 맥락에서 '유대'민족이 거의 2,000년간 나라 없이 오늘날까지 열국으로부터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건재해온 것은 세상의 안목으로 보면 기적 그 자체로서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대한 실증(實證)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성경의 진실성과 확실성에 대한 증거로서의 가치는 한결같다. 만일 오늘날 '유대'민족이 없어져 버렸고 오직 성경 기록상으로만 남아 있다면, 그렇잖아도 앞에서의 지적처럼 하나님을 신속히 떠나고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이 인간 심성인데 성경인들 제대로 믿으려 하겠는가. 무조건 사실에 없는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성경 전체를 폄훼하게 되지 않겠는가. '유대'민족이 그 증거로서 현재 잔존해 있어도 성경이 거짓말이라고 우기는 어리석은 인생들이니, 그런 경우 더욱 더할 것이다.


그러나 '유대'민족이 전체 인류를 위해 이런 구실을 담당해 왔던 그 의미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하겠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열망하시는 것은 물론이나, 특별히 '유대'민족이라 해서 타 민족에 비해 차별 대우를 하심은 없으니 만일 그렇게 하시면 이는 하나님의 원리원칙과 공평공정하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을 차별하실 리 없다(롬 2:11).


'하나님 구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미는 성경의 하나님을 알고 '죄'를 깨닫는 바탕 위에서만 그 절박한 필요성이 인정되기 때문에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킴인 것이다. 그래서 열두 제자들을 전도로 내보내실 때도 바로 그런 뜻에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음이다.


당시는 아직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이었으므로 모세 율법 아래 있는 질서를 따라 취하신 자세이셨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 이상과 같은 '이스라엘'의 영적(靈的) 교육 과정을 따르는 모든 이방인에게 차별없이 '그리스도 구원의 능력'은 유효한 것이다. 이방인을 "개"로 빗대신 것은, 우리 구원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 그 아들들이 됨으로써 한 가족을 형성하는 것임을 나타내심이니, 구원 받음과 받지 못함의 엄청난 차이를 또한 말씀하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받지 못함의 차이다. 마치 신(神-벧후 1:4)과 육체의 차이와 같고 사람과 동물의 차이와 같음이다. 결국 그 여인은 자기의 믿음으로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이스라엘'과 아무 차별이 없게 되지 않았던가. 누구든지 이와 같이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하는 것이요 이전과 같은 그런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엡 2:13,14)).


이는 사람을 만드셨을 때의 그 애초 창조하신 목적을 나타내심이다. 자연계에 이미 동물들이 있는데도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사람 값을 못하면 동물과 다름없는 것이며 아무리 사람을 가까이하는 짐승(개)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고 자아중심이 되어 의와 선을 행함이 없을 때는 짐승과 같지 사람답지는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가 교회(그리스도 오신 후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의미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전달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게 주시는 교회의 머리로서의 말씀이신 것이다. 모든 세상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런 유대인 중에서도 제자들에게만 풀어 말씀하시고 그 외의 일반인에게는 비유로써 말씀하신 이유도 마찬가지다.


즉 교회 중에서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되는 것. 전자는 제자들(12사도를 포함한)에게 한정되고 후자는 비유 말씀밖에 듣지 못한 일반 대중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결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미리 택하셔서 구원 얻고 못얻도록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미리 택하심은 미리 아시는 것을 바탕으로 되는 것) 자기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고"(살후 2:12)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 없을 때는 도리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함으로 나누어 명백히 하신 것이(요 5:29) 그 때문이다. 즉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없을 때는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롬 2:7). 이 사실을 강조한 것인데, 이와 같이 선행을 강조하고 악행을 경고하신 사실을 두고(마 7:21/25:45) 온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도리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세상에 대해서는 이미 모세 율법을 통해 말씀하셨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중복해서 말씀하실 필요가 없을뿐더러 "모세는 그렇게 말했으나 나는 말한다" 하신 대로 모세 율법은 그림자의 성격으로 그 윤곽만을 말한 것이고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시니 온전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심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 상대가 아니라 교회 상대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믿고 인정하여 그 모든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이 교회이니,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말씀이 임하실 까닭이 없다.


그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pearls)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하신 것이다. 이 대목의 "개"도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에서 말씀하신 "개"와 같은 뜻이다. 그런즉 4복음서만 제대로 이해하면 구원의 도리는 온전히 완벽하게 전달되어 있는 것이다. 사도 서신들과 기타는 보완 설명이다. 보강해서 설명하는 정도이다.


세상 사람 가운데 교회로 구성되는 인원 수도 비교해 따지면 소수에 속하지만 교회 중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또한 소수에 속한다. 어느 정도의 소수인가 하면,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광야 교회"(행 7:38)라고 지목한 모세 인도하의 당시 이스라엘을 기준할 때, 그 60만 장정(군대로 나가 싸울 수 있는) 중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 둘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상징성으로 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의 기회는 만인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져 있으나(딤전 2:4/벧후 3:9) 처음부터 성경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살후 3:2)이라 한 대로 극히 제한된 숫자에 한하는 것임을 밝힌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적은 무리("little flock")"라 호칭하신 것이다. 또한 생명에 이르는 길과 문은 좁아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는 많은 사람이 몰린다고 하셨다.


이는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서 하시는 말씀이시니 각자의 분발만이 기대될 뿐이지, 그 때문에 즉 구원 얻는 자가 제한되어 있다 해서 낙담하거나 위축될 일은 아니다. 가령 현재의 내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하나님은 아시나 나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렇게 나를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미리 아심, foreknowledge)도 내 스스로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즉 모든 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유 의지의 의미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만이 이 세상에서는 항상 유효한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 종교처럼 인간이 힘과 노력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니 이 경고는 오직 구원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능력이 나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을 베푸심으로 가능해지기 때문.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고 내게 전지전능이 힘이 되어 주셔도 내 스스로 이를 버리거나 등한히 한다면 나는 잃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히 2:3).


그러므로 시험하는 자(사단)의 시험하는 무대로서의 세상에서 한번 구원 받았다고 해서 태무심으로 그냥 세상 삶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무서운 자살행위는 없다. 이것이 즉 세상 삶을 사랑하는(요 12:25) 것이 사단의 시험의 3가지 침입로(侵入路, route-눅 4:3-13) 중 하나요 동시에 주무기(主武器)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한시적 인간 목숨을 가리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정의하신 데에서 확연히 이 사실은 드러난다(눅 13:1-5).


사는 것이 아니므로 "억울하게 죽는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유대인이 빌라도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일로 혹자가 예수님께 고한 것도 그 죽음이 억울하고 부당한 죽음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1). 이에 대한 하나님 즉 주님의 명확한 대답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느냐", "아니면 이대로 망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 현 시점의 이 세상이요 인생이 지니는 전부의 의미, 단 하나의 의미이다. 이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로 말하면 영원 세상과도 맞먹는 것이니 왜냐면 바로 이 세상에서 각자는 자기의 영원한 운명 즉 사느냐 죽느냐를 스스로 정하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를 주신 이상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각 사람에게 충분히 주신 이성과 지성을 동원하여 오직 자기 스스로 합당하고 올바르다고 여기는 바를 따라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정하신 것이다. 자기 운명은 스스로가 정한다-얼마나 합리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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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먹고 어눌한 이를 고치심


(마 15:29) 예수님께서 거기서 떠나 (막 7:31)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역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마 15:30) 큰 군중이 (막 7:32)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그 발 앞에 두므로 고쳐 주시는데, 한 귀 먹고 어눌한 이를 데리고 와 안수해 주시기를 간구하므로 (막 7:33)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군중을 떠나셔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막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었다. (막 7:35) 이에 그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였다.


(막 7: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셔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나 경계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막 7:37) 사람들이 심히 놀라며, "그가 다 잘 하였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였다. ((마 15: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해지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게 되는 것을 군중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4,000 명을 먹이심


(막 8:1) 그 즈음에 또 큰 군중이 있어 먹을 것이 없으므로 (마 15:32)(막 8: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군중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니 먹을 것이 없다. (막 8: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이다.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다". (마 15:33)(막 8:4) 제자들이 말하기를 "이 광야에서 우리가 어디서 이런 군중들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겠습니까?". (막 8:5)(마 15: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물으시니, 말하기를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습니다" 하였다. (제자들은 그 전에 예수님께서 남자만도 5,000명을 먹이신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이니 우리가 여기서 큰 경고를 얻는 것은, 우리 자신 그와 같이 잘 잊어버리고 명심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註).


(막 8:6)(마 15:35)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명하셔서 땅에 앉게 하시고 (마 15:36) 떡 일곱 개를 가지셔서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군중들 앞에 놓았다. (막 8: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으므로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셔서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막 8:8)(마 15: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막 8:9)(마 15:38)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약 4,000 명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마 15:39)(막 8: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달마누다'('마가단') 지방으로 가셨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다시 "표적'을 구한다-막 8:11,12).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


(마 16:5)(막 8:14)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때 떡 가져가기를 잊었으니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었다. (막 8:15)  그 때에 예수님께서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삼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16:6)(마 16:7)(막 8:16)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하였다" 하니 (막 8:17)(마 16:8) 예수님께서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마 16:9)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리도 둔하냐? (막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 (막 8:19) 내가 떡 다섯 개로 5,000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기억치 못하느냐?" 말하기를, "열 둘입니다".


(막 8:20)(마 16:10) "또 일곱 개를 4,000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말하기를, "일곱입니다". (마 16:11)(막 8:2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줄 깨달았다.


눈에 침을 뱉으시며 고치심


(막 8:22) '벳새다'에 이르니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손대시기(안수(按手))를 구하므로 (막 8:23) 예수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막 8:24) 우러러 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봅니다". (막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자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분명히 보게 되므로 (막 8:26)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셨다.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27)(마 16:13)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막 8:28) 여러 마을로 가시다가 (눅 9:18) 따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더니 노중(路中)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나를(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눅 9:19)(마 16:14) 말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합니다". (마 16:15)(막 8:29) 또 물으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눅 9:20)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메시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7)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말하지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니 명부(冥府ㅡ사망, 무덤, 저승)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줄 것이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 18:18에도 동일한 말씀이 있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0)(눅 9:21)(마 16: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셔서 자기가 그리스도(메시아)인 것을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사람이 그리스도이신 줄 알게 되면 그렇잖아도 군중이 왕으로 모시고자 하는 판이므로 우리 위한 죽으심을 이루시기에 지장이 되는 까닭-註) (눅 9:22)(막 8:31)(마 16:21) 이 때로부터 그리스도(메시아) 예수님께서 "자기가(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가 되시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되 (막 8: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諫, 어른이나 임금께 잘못을 고치도록 말함)하여 말하기를(흠정영역(KJV)에서는 "rebuked"라 되어 있는데 이는 나무라듯 하는 강력한 어조였음을 의미하는 바, 베드로 딴에는 예수님께서 패배주의로 약하게 나오신다고 판단했기 때문-註), "주님, 그리 마십시오.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마 16:23) (막 8:33) 예수님께서 돌이키셔서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하시고 (막 8:34) 이에 군중들과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마 16:24)(눅 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일이다. (막 8:35)(눅 9:24)(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구원할) 것이다.


(막 8:36)(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눅 9:25)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막 8:38)(눅 9:26)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마 16:27)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을 것이다".


(막 9:1)(눅 9:27)(마 16:28) 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the  kingdom of God coming with power)) (인자가 그 왕권(王權)을 가지고 오는 것을(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 볼 자들도 있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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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註-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확실한 자체 증명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미리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할 수 있음"을 선언하셨으니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그러하리라는 의미이시다. 거짓말로 지어낸 것으로써 어떤 종교 교리를 삼아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의 세력화를 꾀하게 되어 있고 선전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거짓말쟁이의 목적은 조만간에 온 세상이 그런 종교화가 되어 그 종교 천하를 만드는 것에 있다고 자랑삼아 말하게 될 것이야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소수이어서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할" 정도임을 이와 같이 친히 하신 말씀으로 소개했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런 말씀을 친히 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천하의 거짓말쟁이도 이런 내용의 말은 감히 지어낼 수가 없다는 뜻이다. "제자가 선생보다 크지 못하니 나를 핍박하였으므로 너희도 반드시 핍박하게(세상이 너희를 미워함으로써) 되어 있다"는 말씀 역시 같은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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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희어져 광채가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막 9:2)(마 17:1) 6일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눅 9:29) 기도하실 때에 (마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용모가 변하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그 옷이 희어져 빛과 같이 광채가 나 (막 9:3) 세상에서 빨래하는 이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다.


(마 17:3)(막 9:4)(눅 9:30) 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문득 나타나 두 사람이 예수님으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면서 (눅 9:31)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때 (눅 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던 중 아주 깨어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다가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막 9:5) (마 17:4)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기를, "주님('랍비'(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주님께서 원하시면 제가(우리가) 여기 초막(草幕) 셋을 하나는 주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습니다(지으십시다)" 하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였다.(막 9:6) 이는 그들이 심히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었다.


(막 9:7)(마 17:5)(눅 9:34) 마침 이 말 할 즈음에 홀연히 빛난(bright)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므로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눅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 (마 17: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는데, (눅 9:36) 소리가 그치고 (마 17:7) 예수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시기를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셨다.


(마 17:8) 제자들이 (막 9:8) 문득 둘러보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다.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막 9:9)(마 17:9) 그들이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며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 (막 9:10) 제자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막 9:11)(마 17:10) 이에 예수님께 여쭙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할 것이라' 합니까?".


'엘리야'


(마 17:11)(막 9:12)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일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다' 하였느냐? (마 17:12)(막 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임의로 대우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시니 (마 17:13) 그 때에야 제자들이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깨달았다.


거품을 내고


(눅 9:37)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시니 (막 9:14) 큰 군중이 둘러 있는 중에 제자들이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는데 (막 9:15) 온 군중이 곧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였다. (막 9:16) 예수님께서 물으시기를 "너희가 그들과 변론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니 (막 9:17) 군중 가운데 (마 17:14)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예수님께 와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제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습니다. (눅 9:38) 선생님! 간청합니다. 주님! 제 아들을 돌아보아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는 제 외아들입니다. (마 17:15) 그가 간질(癎疾, epilepsy)로 심히 고생하여 (눅 9:39) 귀신이 어디서든 그를 잡으면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거꾸러져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흘리게 하여 이를 갈게 하고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납니다.(마 17:16)(막 9:18)(눅 9:40) 제가 주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바라고 데려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했습니다".


(눅 9:41)(마 17:17)(막 9:19)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없고 패역(悖逆, perverse)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눅 9:42)(막 9:20) 이에 데리고 올 때에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곧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므로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렸다.


(막 9:21) 예수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기를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말하기를 "어릴 때부터입니다. (막 9: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자주 불과 물에 던져 넘어지므로 파리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도와주십시오".


(막 9:2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시니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 질러 말했다(흠정영역에는 "눈물을 흘리며"(with tears)"라는 말이 있음-註) "제가 믿습니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하였다.


(막 9:25) 예수님께서 군중이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마 17:18)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벙어리되고 귀 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 (막 9: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자,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막 9:27)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섰다.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비에게 내어주시니 (눅 9: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워하고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하게 여겼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막 9:28)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마 17:19)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저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마 17:20)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다". (눅 17:5) 사도들이 주님께 여쭙기를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니 (눅 17: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할 수 있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할 것이다". ((마 17:20)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해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막 9:29) 또 말씀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다". (마 17:21) {없음}(그러나 흠정영역(KJV)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되어 있음-註).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막 9:30)(눅 9:43)(마 17:22)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때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막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3일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는 연고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눅 9: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하시나 (막 9:32)(눅 9:45)(마 17:23)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기만 하고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요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함이었다.


성전세(聖殿稅)


(마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半) '세겔'(당시 유통된 화폐 단위, 성전(聖殿)의 유지 보수를 위해 전 '유대'인들로부터 거두던 세금)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말하기를, "너희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마 17:25) 말하기를,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關稅)와 정세(定稅)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마 17:26) '베드로'가 말하기를 "타인에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稅) 납부를 면할 것이다. (마 17:27) 그러나 우리가 그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셨다.


누가 크냐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눅 9:47) 예수님께서 그 마음의 변론을 아시고 (막 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가 노중(路中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나 (막 9: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다.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막 9:35) 예수님께서 앉으셔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시고 (막 9:36)(마 18:2)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자기 곁에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막 9:37)(눅 9:48)(마 18:3)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이다".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마태는 어린 아이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중복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여기에 한데 모았다-註) (마 19:13)(눅 18:15)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안수하심과 기도하심을 ((막 10:13)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이들(어린 아기)을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보고 꾸짖으니(마 19:14)(막 10:14)(눅 18:16), 예수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다. (막 10:15)(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이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시고 (막 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셔서 축복하시고 (마 19:15) 거기서 떠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마 18: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다". (막 9: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메시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결단코 상(보답)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실족케 하는 이에게 화 있다


(마 18:6)(막 9:42)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小子, 아이)( (눅 17:2) 작은 자("little ones")) 중 하나를 실족(失足, 넘어지게 함)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둥글게 만든 돌을 굴려서 곡식을 찧게 되어 있는 바 큰 매의 돌로서 이 연자매는 말이나 소가 끌어서 돌리게 되어 있음. 매란 것은 두 짝 또는 두 개의 육중한 돌을 맞부딪쳐 그 무거운 힘으로 곡식을 찧게 되어 있는 기구를 말함-註)이 그 목에 달린 채 깊은 바다에 빠뜨려짐이 낫다.


(마 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다. (눅 17:1)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


양 100 마리가 있는데


(마 18:11) {없음}(어떤 사본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함이다"라고 되어 있음)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100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을 헤매고 있는 그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3)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만일 찾으면 길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 한 마리를 더 기뻐할 것이다. (마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마 18:15)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 18:16)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언케 하라.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불신자에 해당되는 의미)과 세리(죄인에 해당되는 의미)와 같이 여기라.


두 사람/두 세 사람


(마 18:18)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 18:19)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 (마 16:19에도 동일한 말씀이 있음).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말하기를,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겠습니까? 일곱 번까지 하겠습니까?" (마 18:2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게 말하거니와,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눅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눅 17: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한다' 하거든 용서하라.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마 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臣僕)들과 회계(會計)하려 하는 어떤 임금과 같다. (마 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당시 유통된 화폐 단위로 하루 품 삯의 90,000배가 금 1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니 (마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왕)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니 (마 18:27) 그 종의 주인(왕)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마 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1'데나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당시 유통된 화폐 단위) 빚진 자기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빚을 갚으라'  하니 (마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기를, "참아 주시오. 갚겠소' 하나 (마 18:30) 허락하지 않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므로 (마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왕)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했다.


(마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으니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두었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赦,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막 11:26) {없음}(어떤 사본에, "너희가 용서치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용서치 아니하실 것이다"가 있음).


아내를 내버리는 것


(이미 산상보훈에서 이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마태는 소개하고 있으나 연거푸 말씀하신 것으로 다시 기록하고 있으므로 여기 한 군데로 모아보았음-註).


(마 5:31) "또 기록되기를,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마 5:3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눅 16:18)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이도 간음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이에게 (무릇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 드는 이도 간음함이다".


(마 19:1)(막 10: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역에 이르시니 (마 19:2) 큰 군중이 다시 모여 들므로 예수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다시 전례(前例)대로 가르치셨다. (마 19:3)(막 10:2)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막 10:3)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막 10:4)(마 19:7) 그들이 말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습니다". (마 19: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막 10:5)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마 19:8)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막 10:6) 창조시로부터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마 19:5)(막 10:7)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막 10:8)그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9:6) 따라서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막 10: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막 10: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여쭈니, (막 10:11)(마 19:9)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이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막 10: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다". (마 19:10) 제자들이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 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 19:11)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 것이다. (마 19: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鼓子, a eunuch)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해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이는 받으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위하는 자


(눅 9:49)(막 9:38) '요한'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주님(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습니다". (눅 9:5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사람이 없다. (막 9:40) 너희를(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우리를) 위하는 자다" 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요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草幕節ㅡ9,10월경)이 가까우므로 (요 7:3) 그 형제(아우)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형님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시지요. (요 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지요" 하니 (요 7:5) 이는 그 형제(아우)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이었다.


(요 7: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는 것이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언함이다.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은 올라가지 아니하겠다". (요 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다.


'갈릴리'로부터의 '예루살렘' 3차 방문


(요 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셨다. (요 7: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요 7:12) 예수님께 대하여 군중들 중에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군중을 미혹하게 한다" 하나 (요 7:13)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이가 없었다.


"불을 명하여"


(눅 9:51)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실 기약이 차 가니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 9:52) 사자(使者)들을 앞서 보내시니 그들이 가서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는데 (눅 9:5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자 (눅 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말했다. "주님, 저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그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십니까?" (눅 9:55)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어떤 사본에는, "너희가 지금 어떤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나는 사람을 멸망시키려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음-註)(눅 9: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셨다.


70인을 세우셔서


(눅 10:1) 이후에 주님께서 달리 70인(어떤 사본에는 72인)을 세우셔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 10:2) 말씀하셨다. (이 때 하신 말씀들은 앞서 12제자들을 보내실 때 이미 하신 말씀과 똑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니 12사도들을 보내실 때 하신 말씀을 참고하실 것-註).


70인이 기뻐 돌아와


(눅 10:17) 70인이 기뻐 돌아와 말했다. "주님, 주님의 이름에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합디다". (눅 10: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scorpion)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을 것이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


(눅 10:21) 이 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셔서((마 11:25) 화답(和答)하여)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主宰)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마 11:26)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마 11:27)(눅 10: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계시(啓示, revelation)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


(눅 10:23) 이에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눅 10: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다". (다른 경우 즉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만 그 비유를 풀어 해석하실 때도 즉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아니 되었다"(마 13:11)와 같은 말씀을 하셨으므로 앞서 소개한 내용을 참작하실 것-註).


선한 '사마리아'인


(눅 10:25) 어떤 율법(律法, 모세의 율법) 학자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여 말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눅 10:2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말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우리말 번역은 "네 몸"이라 되어 있으나 "네 자신"이 의미가 명확하다)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눅 10: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여쭙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눅 10:3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니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진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이 지파의 출신이라야 제사장이 되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선택된 계층이다-註)도 그곳에 와서는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갔다.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이방인 즉 불신자로 취급되던 계층이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시던 앞의 사건을 참작하실 것-註)이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는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말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 갚겠소이다' 하였으니 (눅 10:36) 네 의견에 이상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그가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끈덕지게 구하는 것을 못이겨서라도"


(눅 11:5)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친구, 떡 세 덩이를 빌려 다오. (눅 11: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먹일 것이 없다' 하면 (눅 11:7) 그가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게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다' 하겠느냐? (눅 1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비록 벗됨을 인해서는 일어나 주지 않을지라도 그 끈덕지게 달라는 것을 못이겨서 일어나 그 소용대로 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눅 11:9)(마 7:7) 내가 또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0)(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눅 11:11)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구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마 7:9)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눅 11:12)(마 7:10) 달걀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마 7:11)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화 있을 것이다"


(마 23:23)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가 박하와 회향(운향)과 근채(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눅 11:42) 공의(公義)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린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당시 예수님은 구약시대(終結點)와 신약시대(始發點)의 중간에 위치하신 것이다-註)


(눅 11:43)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거리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한다. (눅 11:44) 너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평토장(平土葬)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한다".


(눅 11:45) 이에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입니다". (눅 11:46) 이에 대답하셨다. "화 있을 것이다, 또 너희 율법 학자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다. (눅 11:47) 화 있을 것이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다. 그들을 죽인 이도 너희 조상들이다. (눅 11: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고 그들의 일을 옳게 여기고 있다.


(마 23:13)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마 23:14) {없음}(어떤 사본에, "그들은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키며 위선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할 것이다"와 같은 즉 막 12:40, 눅 20:47과 같은 내용이 있음). (마 23:15)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


(마 23:16) 화 있을 것이다,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聖殿)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 것이라' 한다. (마 23:17) 어리석고 눈 먼 사람들아,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 23:18) 너희가 또 말하기를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禮物)로 맹세하면 지킬 것이라' 한다.


(마 23:19) 소경들아,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 23: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마 23: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마 23: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이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다.


(마 23:24)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camel)는 삼킨다. (마 23:25)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한다. (마 23:26) 소경된 '바리새'파 사람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마 23:27)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마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나 안으로는 위선과 불의가 가득하다.


(마 23:29)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말하기를, (마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마 23: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언함이다. (마 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후예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하나님의 모든 계명, 말씀에 정통한 자, scribes)들을 보내면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할 것이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마 23:36)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것이 모두 이 세대(世代, a generation).에게 돌아갈 것이다".


(눅 11:49)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에 말씀하시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것인데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할 것이다' 하셨으니 (눅 11: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눅 11: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祭檀)과 성전(聖殿)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대하 24:21,22-註)'의 피까지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할 것이다. (눅 11:52)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율법 학자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이도 막았다.

(모두 같은 내용의 말씀들이나 기록한 사람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것을 한데 모아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따로 음미해도 좋을 것 같아서다-註).


"행위는 본받지 말라 "


(막 12:38)(마 23:1)(눅 20:45) 모든 백성이 듣는 가운데 군중들과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눅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거리에서 문안 받는 것과 (막 12:39)(마 23:6) 회당의 상좌(上座)와 잔치의 상석(上席)을 원하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막 12:40)(마 23:7)(눅 20:47) 그들은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키며 위선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할 것이다.


(마 23: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


(마 23:5)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해서 하는 것이니 곧 그 차는 경문(經文, phylactery. 성경의 문구를 기록한 양피지를 넣은 작은 가죽 상자를 '성구함(聖句函)'이라 하는데 이것을 '유대'사람이 율법을 잊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하나는 이마에, 다른 하나는 왼팔에 잡아매었음-註)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사람에게 '랍비(선생님)'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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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註-유대인들이 율법을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단단히 새겨 두어 철저하게 삶의 규범으로 삼으라는 모세의 지시를 따른 것으로(신 6:4-15) 나중에는 이것이 형식으로 흘러 자기의 경건(우리로 치면 믿음이 좋은 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과시하려는 경향을 띠게 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책망하신 것이다.  

신명기의 관련 내용은 이러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걸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이마)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烈祖)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 나무를 얻게 하시어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이집트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다.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들의 신(神)들을 따르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시어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한다(신 6:4-14).


사람은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먹는 것으로써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시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 4:4). 자연계의 육체의 생명은 자연법칙을 지킴으로 사는 것과 같다. 예컨대 먹어야 사는 것이 그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중 하나다. 자연계에 속한 한시적(限時的) 생명은 자연법칙으로써 영위(營爲)되지만 죽음(육체가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이 없어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은 영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아담)의 육체(자연계에 속한)를 지으신 다음 영계에 속한 영혼을 조성하시고 이에 부합되게 영계인 에덴 낙원을 창설하신 것이다.


그러면 자연계가 아닌 영계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그 영생을 지속시킬 수 있는 법칙이 필요한 것이다. 자연계의 생명은 단순히 자연법칙을 지키면 되지만(예를 들어 독이 있는 버섯은 먹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무슨 식물이든 먹을 만한 것을 먹어야 식용이 되고 약용이 된다는) 영생에서는 영원히 사는 법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의 운영 체제를 보면 사람과 닮은 동물을 예로 삼을 때 머리와 몸의 체제임을 알 수 있다. 몸(의 각 지체)은 머리가 있음으로써 그 지시를 따라 행동하게 되고 머리는 몸이 있음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어 상호 의존적이라 결코 독자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런 이치를 기반으로 하여 사람이 머리와 몸이 있는 육체로(자연계에 속한) 창조되었기에 그 영원한 생명의 방법 역시 이를 따름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모든 영적 피조물 즉 영생하게 되어 있는 인간 및 영물(천사)의 각 개체는 그 몸을 이룬 지체가 되어 있는 체제다. 이런 한 몸으로서의 삶의 구조는 모두가 행복되게 그리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차등 없이 똑같은 수준에서 모두가 행복해지고 평등해진다는 것은, 이런 체제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이것이 "자기 부인") 몸은 머리 위해 머리는 몸을 위해 그리고 각 지체는 머리를 위하면서 동시에 자기 이웃을 위하기 때문이다.


즉 서로가 섬기고 섬김을 받는 즉 상대를 위하고 상대에게서 위함을 받는 구조이므로 아무리 그 조직에서 말단 중의 말단이라도 머리 자신이 그에게 사랑으로 종 노릇하므로(위하며 섬기므로) 진정한 평등이 여기에 있음이다. 머리부터가 그러하니 다른 지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아무리 몸의 꼬리 혹은 발가락의 발톱에 위치해 있다 하더라도 머리를 자기 아래 두고 있으므로 이 한 몸 체제에서는 자기가 최고로 섬겨지고 있음이다. 그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다.


머리와 꼬리라는 구별은 단지 '구실(역할)의 차이' 또는 분담(分擔)일 뿐이다. '우열(優劣)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인간들(우리 각자)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다 바쳐 죽어 주신(이는 완전히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신 것을 의미-갈 2:20) 사실이 그 확증이다(롬 5:8/요일 3:16). 그러니 완전하고도 진정한 '평등'이라는 것이고, 또 진정한 '자유'라 함은 이런 조직체를 이룸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이므로 모두가 이 방법을 좋아하고 사랑하여 적극적으로 기쁘게 자진자발적으로 자기 부인에 나서기 때문이다.


개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실증(實證)해 주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고로 이 이상 가는 사랑이 없고(요 15:13), 하나님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그 누구도 없는 것이니, 그 무엇이든 누구든 하나님 이상으로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마 10:37). 그러므로 성인(成人)이 되어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하는 아내/남편을 기쁘게 해 주려는 것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경고는 지당한 것이다(고전 7: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