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4복음서 한 권으로 보기

메시아 예수님(마, 막, 눅, 요 복음서 한꺼번에 보기)ㅡ4

Tayseek Kwon 2015. 12. 29. 21:16

 


통관복음서(通觀福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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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메시아 예수님ㅡ


l. 탄생 
ll. 가르치심 
lll. 나의 죽음 
Ⅳ. 부활一새 피조물의 탄생, 새 삶의 시작
V. 마지막 아담ㅡ'또 하나의 나 자신(My Another Self)' 
Vl.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구약 성경의 의미) 
4복음서가 아닌 사도들의 서신에 나타난 메시아 죽으심의 의미 
Vll. 제5복음서(logia iesu)
Vlll.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
Ⅸ. 다른 시각에서 4복음서를 일괄해서 보기




(29註-"안식일"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안식일(安息日ㅡSabbath)에 대해'라는 항목으로 별도 주를 달았으므로 참고하실 일이나, 여기 다시 약간 더 설명이 필요한 것은, 위의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안식일"이라 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같은 말씀을 기록해도 마가는 "안식일"은 언급하지 않고 단지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신 것으로만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마태는 물론 직접 들었으므로 더 잘 기억하여 그렇게 기록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만일에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의미의 "안식일"이고 절대로 "쉬는 날"로서의 의미가 아니었다면 마가가 그 "안식일"을 빼먹을 리가 없다. 주님께서 만일 그런 의미 즉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로서 즉 안식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이라는 말씀보다 더욱 더한 무게가 있는 것이 "안식일"이 되겠기에 그렇다.


마가가 다른 사도들로부터 듣고 기록할 때 그 사도들(사도)이 강조한 그대로 기록했을 것이니 그 사도들(또는 사도)이 만일 안식일을 중시했다면 반드시 그런 투로 말했을 것이고 따라서 마가가 안식일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고로 그냥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만 기록한 것을 보아도 사도들이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음이 명백하다는 얘기다.


사도들이 이와 같이 그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 또한 명백하니, 그것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쉬는 날"이지 특정한 날 곧 '유대'인의 안식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는 사실을 위주로 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기에 그러하다. 모세 율법의 본령(本領)인 성전이 멸절되어 사라지는 마당에 안식일을 지킴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물론 과거에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성전이 훼손 파괴되는 일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성전은 재건되어졌다. 그래서 그 성전이 다시 수축되기까지 '유대'인들은 충실히 안식일 준수는 물론 다른 모세 율법을 지켰다. 왜냐면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뿐만 아니다. 그렇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뜨려지고(주후 70년) 지금까지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가 건립되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그들의 성전이 세워진 적이 없다.


제사장들을 세워야 하는데 레위 족속을 오늘날 찾아낼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의지는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그리스도께 대한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의 흔적은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전과 그리고 레위 족속으로 말미암는 제사장과 기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터에 안식일 하나만 덩그렇게 남아 지켜진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우스운 일이 아닌가.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안식일 즉 7일 중 1일만 하나님 섬기는 날이 아니라 매일 즉 1주 7일 모두가 하나님 섬기는 날로 선포되는 내용이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즉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선지자의 말한 대로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하심과 같다"(행 7:48-50)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믿는 우리 각자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니 우리의 일상생활 곧 1년 365일이 하나님께 바쳐진 날 곧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로 선포됨이다. 스데반이 말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히브리서에 명시하지 않았던가. "제사장 직분이 바뀌니 율법도 반드시 바뀌어져야" 하는 것이다(히 7:12). 수입의 1/10만 주님께 바쳐지는 것이 아니요 10/10 전부, 일주 하루만 주님을 섬기는 날이 아니라 평생 그리고 나의 존재 자체가 주님을 위해 있고 나 자신을 위해 있지 않는다는(고후 5:15/롬 14:8) 것이 "바뀐 율법의 강령"이 됨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 하신 뜻이 바로 이것이다. 안식일이 영원히 하나님을 위한 날, 하나님의 날로 정해진다면 그렇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 다시 말해 모세 율법에서 말하는 안식일 개념은 우리 존재 전부가 원래부터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아주 초보적인 안내였기 때문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복음을 종교로 만들고자 하는가? 종교에는 구원이 없음을 왜 모르는가. 종교는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구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생활이 종교가 아니고 종교가 생활이 아니다. 승려나 신부나 교역자나 종교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 이들 외에는 종교와 생활은 별개다. 그러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은 원천적으로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다.


내 것이 없다는 것은, 내 것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 친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로서 성령으로 나와 하나되어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을 나의 것(소유), 나의 힘, 나의 생명으로 매일 매시 누리고 번성하는 나의 일상생활이므로 따라서 나의 삶 자체에서 내가 항상 나타내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아래에 모은 각 구절의 내용들은 이미 12제자들을 전도차(次)로 둘씩 보내실 때 하신 말씀이나, 여기에 와서야 수록하는 것은 미래에 관한 말씀으로서 별도 편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전도한다는 것은 핍박과 갖가지 고난을 감수하며 이를 항상 각오하면서 해야 하는 일이므로 이렇게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시는 사실처럼 위로되는 것도 없다.


이 같이 다시 오심에 대한 말씀과 그리고 대담하게 말씀을 전해야 할 필요성에서 여러 가지 위로와 경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미래에 관해 말씀을 하신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제자들이 여쭈었기 때문이다. 이번 한 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앞서 전도차로 보내실 때처럼 기회가 닿는 대로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가르치셨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 한데 모아 편집한 것이다.


아래 예수님의 말씀(답변으로 주신)을 종합할 때, 복음서에 기록된 혹은 말씀하신 순서는 무시하고 내용으로만 분류하여, 중복되는 말씀을 삭제하는 형식으로 편집했으므로 양해하시기 바란다. 삭제를 하더라도 약간이라도 표현이 다르면 그 다른 점을 일일이 나타내고 임의로 버리는 일은 없도록 했다. 그리고 주님 당시만 해도 지진이 일어나면 국지적(局地的)인 사실로서만 알지 세계 각지에서 지진이 처처에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없었던 상황인데도, 마치 오늘날 한 곳에만 있어도 각지의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은 이미 우리 세대에 통신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세상 곳곳의 사정을 집안 일처럼 알게 되어 있는 오늘날의 실정을 예언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뒤에 또 언급이 되겠지만 예루살렘 멸망의 일과 주님 재림하심으로 세상이 멸망할 것을 나누어 말씀하신 바를 분간 못하고 그냥 기억 나는 대로 적고 있어, 마치 주님 재림의 날에 예루살렘 멸망의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인 양 착각하기 쉬우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혼동하기 좋도록 기록되어진 것 자체가 오히려, 진실만을 말하고 결단코 지어낸 말을 삽입하여 만든 것이 아님을 자체 증명함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데 당시 기록한 사람들은 그 말씀 자체만 기억하여 전달했을 뿐 그와 같이 엄밀히 구분하여 기록했어야 하는 것을 간과한 점 그대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에 이 자체가 그 진실성을 증명해 보임이다. 만일 거짓말로 지어낸 것이라면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보통 머리로서 되는 일이 아닌데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비상한 머리로 "세상 마지막 날에 산(山)으로 피신하면 산다"는 따위의 정신 나간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혼동을 수정하도록 일깨워 주시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두신 것이다.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그런 효과를 나타내도록 하심이다. 과연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신가. 만일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하셨다 해서 즉 둘을 명확히 구분해서 기록했다 해서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말하겠는가. 오히려 이런 옥에 티 같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웅변하는 것이 되고 그런 허튼 말을 하는 사람들의 입을 유구무언으로 봉쇄해버리는 결과로 반전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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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곧 그 때에


(여기서도 성령의 정체 즉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심을 밝히신 대목이므로 한데 섞지 않고 제각기의 구절들을 그대로 별도 수록했다-註).


(눅 21:12)(막 13:9)(마 10:18) 이 모든 일 전에 나를 인하여 (내 이름을 인하여) 또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감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고관들(총독들) 앞에 끌어 가므로 그들 앞에 설 것이니 (끌려갈 것이니), (눅 21: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이는 그들과 이방인(불신자)들에게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내가"-"성령이"-"아버지의 성령이"


(눅 21:14) 그러므로 너희는 대답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눅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材)와 지혜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마 10:17) 사람들을 주의하라. (눅 12:11) 너희를 회당(會堂, 예배 처소)과 공회(公會, 공적인 일을 의논하는 곳)에 넘겨 주겠고 그들이 너희를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정권 잡은 자들과 권세 있는 이들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눅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막 13:11)(마 10:19)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라. 무엇이든지 그 시에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니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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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註-이것이 또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의 하나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진실이요 결코 인간이 만들어낸 꾸민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다. 이런 말은 그 어느 거짓말쟁이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실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 한 나라를 몽땅 장악할 수도 있을 기회가 될 최고 통치자 앞에서의 전도를 앞두고 어찌 그런 '미리 말할 것을 연구하는' 마음이 없으리요. 그러나 그런 것을 금한 것이다.


그러니 만일 성경이 지어낸 것이고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되어 있다면 이런 내용을 담아 두겠는가. 더군다나 그렇게 미리 연구하지 않는 것을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세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그 종교의 자멸과 폐쇄 이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해당 종교의 확산을 꾀하겠는가. 또 그런 확산 확대의 목적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그런 거창한 거짓말을 만들어내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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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


(눅 17: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 하여


(눅 17:22)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때가 이를 것이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할 것이다. (눅 17: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라!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할 것이나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눅 17: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 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할 것이다. (눅 17: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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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註-이제 곧 등장하게 될 "멸망의 아들", "악한 자" 적(敵)그리스도도 여기 해당된다. 그는 처음부터 그런 초자연계 몸으로는 올 수 없기 때문.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초자연계 몸으로써 다시 오신다. 왜냐면 자연계 몸으로는 이미 오셨고 그래서 죽으셨다가 초자연계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 그리스도(구원자)의 의미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라는 데에 있다. 즉 우리와 똑같으셔야 하는 것. 우리가 아담의 몸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음과 같은 이치. 우리와 똑같으시려고 우리와 같은 이런 자연계 몸을 입으시고 자연계 몸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받으신 끝에 죽으신 것.


"약하심"(고후 13:4)으로 죽으신 다음에는 그것으로 일단 종결되어야지 부활하셨다고 해서 그 초자연계 몸으로 세상에 나타나시면 안되는 것은 그리 되면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다 초자연계 몸이 되어야 하기 때문. 왜냐면 마지막 아담이시니까 모든 인생들은 아담(마지막)의 닮은꼴이어야 하기 때문. 지금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히 6:6/10:26,29)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되는 것이니 그런 악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


고로 믿을(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모든 뜻에 순종할) 사람은 다 믿어(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과 계명에 복종하여-빌 2:12) 시험을 거쳐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명한(고후 13:5)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니 그제서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초자연계(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 부활하셨으므로  마땅히 그 부활하신 몸으로 이 세상에 계셔야 하나 그렇지 않고 오늘날까지 "하늘이 그를 한시적으로 받아두는"(행 3:21) 이유 중의 하나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無酵節)이 가까우므로


(눅 22: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無酵節, 유월절이 상징하는 바 '모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하지 않은 빵을 유월절을 포함한 7일간 먹는데 이 기간을 통틀어 무교절이라 한다. 즉 유월절로써 시작되는 무교절이니 그 일주간(7일)에서 첫날은 그것이 그 주의 무슨 요일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안식일이었음)이 가까우니 (마 26: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마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팔릴 것이다" 하셨다.


(막 14:1) 2일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인데 (마 26: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우두머리)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눅 22:2)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마 26:4) 예수님을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었다. 고로 궤계(원칙에서 벗어난 탈법적 방식)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의논하면서 (마 26:5)(막 14:2) 말하기를 '민요(民擾, a revolt)가 날까 하니 명절에는 말자' 하였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막 14:3)(마 26:6)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셔서 식사하실 때에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값지고 귀한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4)(마 26:8) 제자들이(어떤 사람들이) 보고 분하여 서로 말하기를,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 (마 26:9)(막 14:5)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 이상의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므로, (마 26:10)(막 14:6)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여자를(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막 14:7)(마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마 26:12)(막 14:8) 이 여자가(그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함이다). (마 26:13)(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할 것이다".


'그리스'인 몇이 찾아와


(요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그리스(Greece)' 사람 몇이 있는데 (요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말했다. "선생님(Sir), 저희가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 (요 12:22) 이에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가서 여쭈니, (요 12:23)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요 12:24)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이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이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마 10:39와 같은 내용-註)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거기 있을 것이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요 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 저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습니다. (요 12: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하는 소리가 났다.


(요 12:29) 곁에 서서 들은 군중들은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요 12:3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다.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마귀 곧 이 세상 신(神, 고후 4:4)을 가리키심-註)이 쫓겨날 것이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려지면(들려 올려지면-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가리키심-註)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


(요 12: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보이심이었다. (요 12:34) 이에 군중들이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메시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는데 선생님은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할 것이라 하십니까? 이 인자는 누구입니까?"("들려진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처형된다는 말로서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당시 상용어가 되어 있었던 듯하고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말씀의 뜻도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註).


(요 12:3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이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한다.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셨다. ("He did hide himself from them"-자기를 감추셨다).(요한은 이 "숨으셨다"는 표현을 앞에서도(요 8:59) 사용한 바 있다. 대중 앞에 의도적으로 나타나시지 않으려 하심을 말한 것 같다. 우리 위해 죽으시되 정밀하게 때와 시간에 맞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함이니 이에 대한 것은 이미 앞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사실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註).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요 12:37) 이렇게 많은 기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요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으로서 기록되기를, "주님, 우리가 말한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팔이 뉘게 나타나셨습니까?" 한 것이다. (요 12: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말하기를 (요 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킴으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함이라' 하심을 이루시려는 것"이라 한 것이다.

(요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요 12:42) 그러나 관리들 중에도 그를 믿는 이가 많으나 '바리새'파 사람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부터 (사회적) 축출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었다. (요 12: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 팔려는 생각을 넣어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사람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눅 22:3)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사람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막 14:10) (마 26:14)(눅 22:4) 이에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줄 것이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므로 (눅 22:5)(막 14: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자 ((마 26:15) 은(銀) 30을 달아 주니) (눅 22:6) '유다'가 허락하고 (마 26: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님을 군중들이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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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註-"은 삼십"은 은화(銀貨)로서 30 세겔(shekel-'유대'인의 화폐 단위)을 말함이니 노예 한 사람을 풀어 주는 즉 속량(贖良)해 주는 속전(贖錢-몸값)이라 한다. 따라서 메시아 예수님이 바로 "또 하나의 나 자신"이실진대 이렇게 몸값에 팔리셔서 죽으시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그 몸값으로 속량이 되어 풀려 남을 뜻한다. 그 몸값을 나중에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되돌리려 할 때 대제사장들이 이를 "피 값"(마 27:6)이라 한 것처럼(때문에 이 또한 상징적으로 의미가 심장하다), 나를 속량하시는 그 속전이 바로 예수님의 피라는 뜻이다. 곧 그 생명을 나를 위해 버리심으로써 나의 몸값으로서의 대가(代價)를 지불하신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사기 위해서는 자기 집에서 양을 기르지 않는 한 돈을 주고 사야 했다. 희생 양으로서의 예수님은 이와 같이 유월절 양으로서 죽으시기 전에 그런 팔고 사는 거래 행위로서 상징적으로 나타내어진 것이다. 그러나 꼭 이와 같이 모든 일이 빈틈없이 이루어지기 위해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12 제자 중 하나로 들어오게 되고 나중에 이 같이 그 스승을 팔게 되고 그 판 값이 노예 몸값이라는 판에 박듯이 짜여진 각본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가룟 유다 자체가 희생물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양 한 마리 잃으면 나머지 99마리의 양을 두고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산중을 뒤진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범죄하게 되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각본 따라 짜여졌다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위와 같은 오해는 어디까지나 한정적이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렇게 인간적이라면 하나님이시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나님되시는 것은 여전히 그 하나님다우심에 있으니 인간이 이에 미친다면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라 할 것이 아닌가. 인격성을 갖춘 모든 피조물(인간이든 영물인 천사 및 악령이든)은 절대적인(고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는 법이 없다) 자기 의지대로 자유 의사로 하는 것이나, 이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미리 보시고 아신다는 그 차이다.


이는 조물주로서는 당연하니 우리 인간 역시 무엇을 제작할 때는 그 만들어진 것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 미리 예상하고 머리에 그리지 않고는 착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바로 이 미리 보시고 아심에 따라 개별적으로 피조물(그것이 인간이든 영물인 천사나 악령이든)의 자유 의지를 그대로 보장하신 채 마치 그것을 하나님 마음대로 조종하시듯 하는 '일의 결과'만을 나타내신다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는 항구불변이니 즉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절대로 꺾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꺾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피조물 세계 자체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한번 자유를 주심으로써 창조하신 후 이 자유를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신다면 한번 아신 일을 번복하는 일이 되므로 이 경우 법질서도 원리원칙도 없게 되는 까닭이다. 고로 우리의 지식과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한계에 부닥쳤을 때는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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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만찬


(눅 22:7)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렀으므로 ((막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마 26:17) 무교절의 첫날에)('유대'인의 날 수 계산은 해가 지면서 시작되어 다음 날 해 질 때까지 24시간의 하루이다. 고로 여기서부터는 저녁 시간이 되며 이 날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잡혀 가시게 된다-註)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선생님께서 유월절을 잡수시도록(우리 식으로 말하면 명절 음식을 잡수시도록-註) 저희가 어디에서 준비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니 예수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눅 22:8)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서 우리를 위해 유월절을 준비해서 먹게 하라" 하시므로(눅 22:9) 여쭙기를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니) 말씀하셨다.


(눅 22:10)(막 14:13)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니 그를 따라가서 (막 14: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의 말씀에((눅 22:11) 선생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客室)이 어디 있느냐' 하신다'고 하라. (막 14:15)(눅 22: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이니 거기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여라". ((마 26:18) "성안 아무에게 가서 말하기를 '선생님 말씀에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셨다'고 하라" 하시니) (막 14:16)(눅 22:13)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마 26:19)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通過節)을 예비하였다.


'요한', '누가', '마태', '마가'의 엇갈리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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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註-유월절이 상징하는 바 '모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하지 않은 빵'(이것이 무교병[餠, 떡])을 유월절을 포함한 7일간 먹는데 이 기간을 통틀어 '무교절(無酵節)'이라 한다. 고로 무교절 첫날이란 것은 바로 유월절의 시작임을 뜻한다. 유월절에 잡는 양은 원래부터 상징성을 띤 것으로 메시아 예수님의 우리 위한 죽으심 즉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벗어나던 날 밤에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그렇게 피가 발려 있는 집은 멸망시키는 천사가 들어가지 못하고 지나쳐 갔으며(通過) 피가 발려져 있지 않은 이집트 국민의 모든 집에는 천사의 손이 미쳐 그 가정의 맏아들이 예외없이 몰살 당한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날을 '요한'은 분명히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요 19:14)이라 했으며 그 시간까지 밝혀놓고 있다.


반면 '마태'는 "무교절의 첫날"(마 26:17) 이라 한 것이다. 무교절의 첫날이면 바로 유월절인데 유월절은 그 전날 즉 유월절 예비일에 잡은 양을 먹고(출 12:) 그 피를 문설주(문의 양쪽에 세워 문짝을 끼워 달게 된 기둥)와 인방(引枋, 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문이나 창의 아래위로 가로지른 나무)에 발라놓는 날이다. 다시 말해 '마태'는 이 기록에서 약간 착각을 한 것이다.


이런 착각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즉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막 14:12)이라 하고 있다. 무교절의 첫날과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을 동일시한 것이다. '마가'와 '마태', '누가'로서는 이는 명백히 잘못된 날짜 판단이다. 또 잘못된 지식이다. 원래 '마태'는 율법에 정통하지도 않거니와 '마가'나 '누가' 역시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만을 중시했던 탓에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당시 상황을 증언자들로부터 듣고, 들은 대로 기록하기만 한다는 자세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요한'은 당시 젊었고 기억력이 비상하므로(그의 복음서 기록에서 예수님 말씀을 소상하게 증언해 주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시간까지 대는 것을 보아 그 날짜 관념이 당시 12 사도로 그 일에 참여했던 '마태'에 비해 월등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우선 보기에 손발이 맞지 않은 4복음서 자체가 진실된 다시 말해 꾸며댄 거짓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실 그대로의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고 있음을 앞에서도 강조했다. 이런 서로 엇갈린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 누구도 감히 손대지 않은 것을 보라!


성경이 만일 꾸며낸 즉 인간의 손과 말과 생각이 그리고 의지가 처음부터 주도하고 장악하여 대목마다 빼고 끼우고 다듬고 한 것이라면 이런 것을 방치해두겠는가. 어림 없는 일이다. 성령께서 친히 이렇게 되도록 즉 고스란히 처음 기록된 그대로 버려두도록 섭리 관장하셨기 때문에 인간 그 누구도 감히 손보려 하는 마음을 먹지 못한 것이다.


성경의 축자(逐字) 무오류(無誤謬)


이렇게 되면, 성경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글자 하나하나에도 절대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로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나,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졌다는 의미는 그 내용의 진실성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약점마저 감추고 싸매고 손질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그대로 두는 것이 그 내용의 진실성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굳이 없애려 하시겠는가.


메시아 예수님의 부활이면 그 부활하셨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면 그로써 충분한 것이다. 오히려 위의 설명처럼 그런 착오에 의한 것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면 더욱 더 그런 증거가 되는 마당에서는 유리한 것이다. 그런 엇갈린 기술(記述)들이 부활의 증언에 장애되기커녕 오히려 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만 아니고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의문을 달 것인가.


그 다른 경우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것이 성경인데 만일 그러한 것이 진리를 밝힘에 장애가 된다면 살아 계신(이 점 다시 역설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묵과하실 줄로 감히 생각하는가? 그런 경우 절대로 묵과하실 리 없다. 가령 위의 예와 같이 '마태', '마가', '누가'가 유월절 첫날이 바로 희생 양을 잡는 날이라고 적었다 해서, 구약에 기록되고 그리고 지금도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대로, 양은 그 전날 곧 유월절 예비일에 잡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의 권위가 흔들리거나 그것이 신빙성이 없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그렇게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심이 분명하다. 왜냐면 그렇게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경의 자구(字句) 하나하나가 다 진실이고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우리도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거니와 하나님께서도 그런 데에 대해서는 괘념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위에서 마태, 마가, 누가의 오류를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그 날에는 밀을 손으로 비벼 입에 틀어넣어도 안되고 병을 고쳐도 안되는 등 여러 가지를 금하고 그것을 어길 때는 무조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해 버리고 단정해 버린 당시의 유대인들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도리어 안식일에 노예가 되어 있는 꼴과 같다. 그런 추태를 당시 '바리새'인들은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이 있음으로써 우리 인간이 무엇을 배우고 깨닫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하는 그 본질적인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공연히 그 껍데기만 붙들고 앉아 남의 행동이나 판단하며 손가락질하고 저울질하는 데에만 기준을 삼고 있는 어리석음이다. 당시 '유대'인의 경우와 같이 그런 것은 자멸의 길이니,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경우일수록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으므로 경계를 요한다.


왜냐면 속이 비어 있으므로 겉모양이나마 유지를 해야 본성적으로 안도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그런 외형적인 것에 매달려 모든 판단을 그런 식으로 해버리게 된다. 내면적인 충실을 기하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 그런 외형에 대한 열심이니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래서 항상 "섰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덫과 함정과 걸림 돌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못가노라 쉬어서도 안될 일이지만 잘 가노라 닫는(빨리 뛰는) 일도 없어야 하는 것. 대사도 '바울'이 누가 감히 교만해할 사람이라고 보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내면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런 '바울'이라도 교만할까 저어하시어 그 육체에 "가시"(고후 12:7)를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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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마 26:20)(막 14:17)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그 열 둘을 데리시고 와서 사도들과 함께 ((눅 22:14) 때가 되자) (눅 22:15)(막 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 26:21)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눅 22: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할 것이다".


(다음 기록에서는 누가와 마태(혹은 마가)의 서술이 약간 다르므로 그 다른 대로 두 가지로 구별해서 아래에 소개한다-註). (눅 22:17) 이에 잔을 받으셔서 사례(謝禮)하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눅 22: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할 것이다". (눅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다".


(마 26:26)(막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셔서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하시고 (마 26:27)(막 14:23) 또 잔을 가지셔서 사례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실 때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막 14:24) 이것은 죄 용서함 받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마 26:29)(막 14:25) 그러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할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어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십니까?"


(요 13:7)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 것이다. (요 13:8) '베드로'가 말했다. "제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요 13:9)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제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요 13: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이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 몸이 깨끗하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다" 하시니 (요 13:11) 이는 자기를 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므로 '다는 깨끗치 아니하다' 하셨다.


(요 13:12) 그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主)라 하니 너희 말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


(요 13:16)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상전(上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이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요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다.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이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함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다. (요 13:20)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보낸 이를 영접하는 이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요 13:2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눅 22: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이의 손이 나와 함께 상(table) 위에 있다. 틀림없이 단정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마 26:21)(막 14:18)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사람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눅 22:22)(막 14:21)(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


(요 13:22)(막 14:19)(마 26:22)(눅 22:23) 제자들이 서로 보고 묻되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며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이가 누구일까?" 하고 심히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각각 여쭙기를, "주님, 저입니까?" 하였다. (요 13:23)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이(이를 기록한 요한 자신을 가리킴-註)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기를, "말씀하신 이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요 13:25) 그가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했다. "주님, 누구입니까?".


(마 26:23)(막 14:20)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 것이다. (요 13:26) 내가 한 조각을 집어다가 주는 이가 그다"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집어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셨다. (마 26:25) 예수님을 파는 '유다'가 대답하기를, "'랍비(선생님)', 접니까?".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한 대로다". (유다가 그릇에 손을 넣는 것과 동시에 주님께서도 손을 넣으셔서(혹은 주님께서 손을 넣으실 때 유다도 손을 넣어) 그 집고자 하는 것을 대신 집어 그 조각을 유다에게 건네주시면서 계속 요한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註).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유다의) 속에 들어가므로(요한의 기록은 이 때 사단이 그에게 들어간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누가는 이미 그런 마음을 먹은 때부터 들어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사단이 그런 "생각을 넣었다"(요 13:2)는 것과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요 13:27) 것을 구별하고 있다-註), 이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요 13: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요 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요 13: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인하여(그 안에서) 영광을 얻으셨으면(to be glorified in him)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자기 안에서) 그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니(to glorify him in himself) 곧 주실 것이다.


(요 13:33) 얘들아(Children),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같은 말을 한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올 것이다". (요 13:37)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제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요 13: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해 네 목숨 버리겠느냐?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요 14:1) 이어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處所)를 예비하러 가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거처할 장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할 것이다.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요 14:5) '도마'가 말했다. "주님,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요 14: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요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다".


(요 14:8) '빌립'이 말했다. "주님, 아버지를 저희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리하면 만족이겠습니다". (요 14: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는데도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이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 14:12)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이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할 것이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다.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할 것이다.


성령께 대하여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保惠師)(흠정영역(KJV)으로는 "Comforter"이나 실제 의미는 단순히 '돕는 자'("helper")로서 아담을 위해 여자를 창조하실 때도 우리말 번역 "배필"에 해당되는 단어가 이 "돕는 자"(helper)이다. 그리고 "또다른"이라 하셨으니 주님 친히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그 위치에 계셨기 때문-註)를 너희에게 주셔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靈)으로서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 (삼위일체 원리의 '둘이 하나됨'에서,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된 이 하나됨을  가리켜 갑은 을이라 하고 을은 갑이라 하게 된다. 상대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자기라 할 수 없고 상대를 가리키는 것이 사리에 옳은 것. 이 설명을 하시면서 친절히 설명하시어 "내가 다시 너희에게 성령으로 즉 아버지와 함께 하나되어 있는 모습으로 오게 될 것이다" 하시는 것-註)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고 나는 아들 곧 주님과 하나되어 영원히 존재하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은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보는 것임. 영원하신 나의 짝 곧 삶의 반려자이신 것-註)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이라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나를 사랑하는 이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


(요 14:22) '가룟'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 자신을 저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십니까?" (요 14:23)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함께 살 것이다).


(요 14:24)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는 내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이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요 14: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聖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다.


(요 14: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다. (요 14: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다.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셨다. (제자들과 함께 나가시면서 또 말씀하신 것을 요한은 기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註).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시다. (요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할 것이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서,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는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룰 것이다.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될 것이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 없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으니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을 것이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다. (상대를 위해 자기 목숨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으니 이는 평소 그와 같이 자기를 상대에게 "주는" 것으로서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상대를 위해 죽는 것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할 일이 아니다-註).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으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다. (요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했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이들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요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요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 (요 15:23) 나를 미워하는 이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한다.


(요 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그들이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 (요 15: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바 '그들이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Comforter)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는 것이다. (성령은 아들께서 보내시는 것이요 그리고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것이니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신 것-註).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니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黜會, 사회로부터 격리시킴)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이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禮)라(to do God service or to offer a service to God)' 할 것이다. (요 16: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다.


(요 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 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다. (요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이가 없고 (요 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함으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다.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실 것이다.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다. (요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릴 것이다' 하였다".


(요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하시므로 (요 16:17) 제자 중에 서로 말하기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요 16:18) 또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 16:19) 예수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함으로 서로 문의하느냐? (요 16:20)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하나, 너희가 근심하지마는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다.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아니한다.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볼 것이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


(요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니 너희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요 16:25) 이것을 비사(比辭, proverb)로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께 대한 것을 분명히 말할 것이다. (요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해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요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다. (요 16:28)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


(요 16:29) 제자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요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압니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요 16:3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니 벌써 왔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의 기도


(요 17: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이르렀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도록 하여 주십시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이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아는 것입니다. (요 17:4) 아버지께서 제게 하라고 주신 일을 제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해드렸으니 (요 17:5) 아버지, 창세(創世) 전에 제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저를 영화롭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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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註-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성경에서 "저를 영화롭게 해주십시오" 하는 말씀이 어색하게 들린다면, "제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해드렸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자기를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목적하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렸다면 결국 당신 자신의 영화를 목적하심이 아닌가 하겠지만, 위의 기도는 제자들 앞에서 하신 기도로써 제자들이 깨닫고 본받아 지킬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으니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생명과 사랑의 법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던 것.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원리를 설명하심이다. 제자들은 요한과 야고보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자기를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고(막 10:37) 서로 누가 크냐 하는 것으로 쟁론하는(9:24) 정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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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7:6) 세상 중에서 제게 주신 사람들에게 제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저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제게 주셨으며 저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요 17:7) 지금 저들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습니다. (요 17:8)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말씀들을 저들에게 주었으며 저들은 이것을 받고 제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알며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줄도 믿었습니다.


(요 17:9) 제가 저들을 위하여 비오니 제가 비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제게 주신 이들을 위함입니다. 저들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요 17:10) 제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인데 제가 저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요 17:11) 저는 세상에 더 있지 않으나 저들은 세상에 있고 저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니 거룩하신 아버지,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을 보전하셔서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요 17:12) 제가 저들과 함께 있을 때에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을 보전하여 지켰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입니다.(요 17:13) 지금 제가 아버지께로 가니 제가 세상에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저들로 제 기쁨을 그들 속에 충만히 누리게 하려 함입니다.


(요 17:14) 제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들에게 줌으로 세상이 저들을 미워하였으니 이는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인함입니다. (요 17:15) 제가 구하는 것은 저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구함입니다. (요 17: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요 17:17)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요 17: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저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9) 또 그들을 위해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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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註-여기서 "거룩함"의 의미를 알게 된다. '거룩하다'는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는 '거룩해지려는' 의지를 포함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범죄 행위가 생김으로써 나타난 그 상대적인 의미이기에 그렇다. 범죄가 자기 자유 의지에서 나오는 것처럼 거룩함도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니 순종함을 통하여 거룩함에 이르기 때문(롬 6:22). 그래서 성경은 "거룩하라"(벧전 1:16/히 12:14/고후 7:1)고 명령하고 있다.


즉 거룩함은 자기를 위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자기 부인의 의지가 확고할 때를 말함인즉 그리스도 친히 자기를 우리 위해 바치시려는 순간의 십자가 고난을 앞둔 시점이므로 "저들을 위해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합니다" 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 위해 죽으심과 더불어 우리에게 생명의 도리를 가르치신다는 목적도 있음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34)을 주신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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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7:20) 제가 구하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들의 말을 인하여 저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 17:21) 아버지께서 제 안에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셔서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


(요 17:22) 제게 주신 영광을 제가 저들에게 주었으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요 17:23) 곧 제가 그들 안에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셔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과 또 저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입니다.


(요 17:24) 아버지, 제게 주신 이들도 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저를 사랑하시므로 제게 주신 저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요 17: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해도 저는 아버지를 알았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 (요 17:26) 제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할 것이니 이는 저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입니다".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막 14:26) (마 26: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갔다. (마 26:31)(막 14:27)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牧者)를 칠 것이니 양떼가(양들이) 흩어질 것이다' 하였음이다. (마 26:32)(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마 26:33)(막 14:29)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니 (마 26:34)(막 14:3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해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셨다.

(눅 22:33)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님, 제가 주님과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습니다" 하니 (눅 22:34) 이에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참으로 네게 말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마 26:35)(막 14:31) '베드로'가 말하기를, "제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다.(요한은 식사 후 감람산에 들어가시기 전에 말씀하실 때 베드로와 닭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는 감람산에 들어가신 후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서로 엇갈리는 듯하나, 연거푸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고 베드로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註).


또 누가 크냐 하는 다툼


(눅 22:24) 또한 그들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났으므로 (눅 22:2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시혜자(施惠者-benefactors,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뜻이므로 "섬긴다"는 것과는 반대)라 칭함을 받으나 (눅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으니 너희 중에 큰 이는 젊은 자와 같고 우두머리는 섬기는 자와 같다. (눅 22:27) 앉아서 먹는 이가 크냐, 섬기는 이가 크냐? 앉아 먹는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이로 너희 중에 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을 이미 앞에서 하신 바가 있다. '누가'는 그 다른 경우를 들어 여기 기록하고 있는 바 제자들이 그런 다툼을 또 벌인 듯하다-註).


(눅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이들인즉 (눅 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table)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throne)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한다".


(눅 22:35)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전대(돈을 넣는)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들이 말했다. "없었습니다". (눅 22:36) 이에 말씀하셨다. "이제는 전대 있는 이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칼)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 사라".(눅 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다". (눅 22:38) 그들이 여쭙기를 "주님, 보십시오. 여기 검 둘이 있습니다" 하니, 대답하시기를 "되었다" 하셨다.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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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36)(요 18:1)(눅 22:39)(막 14:32)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가셔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니 제자들도 따랐는데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거기 동산이 있어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다. (요 18:2) 거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님을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다.


(눅 22:40)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시고 (마 26:37)(막 14:33)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때 심히 놀라시며 고민하고 슬퍼하셔서 (마 26:38)(막 14:34) 이에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눅 22: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으시고 ((마 26:39) 조금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막 14:35)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눅 22:42)(막 14:36) 말씀하시기를, "(아바, 아버지)내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할만 하시거든)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니 이 잔을 제게서 옮겨 주십시오(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저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아버지의 원대로 해주십시오)" 하시니 (눅 22:43) 사자(使者,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 (눅 22:44)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었다.



(눅 22:45)(막 14:37)(마 26:40)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눅 22:46)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막 14:38) 마음에는 원이나 육신이 약하다" 하셨다.


(마 26:42)(막 14:39) 다시 두번째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만일 제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제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시고 (마 26:43)(막 14:40) 다시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자는데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했다.


(마 26:44)(막 14:41)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 26:45) 이에 제자들에게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됐다. 때가 왔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려가고 있다. (막 14:42)(마 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이가 가까이 왔다".


파송된 큰 군중들이


(마 26:47)(눅 22:47)(막 14:43) 말씀하실 때에 한 군중이 오는데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이가 ((요 18:3)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무리들과 군대를 데리고 등(燈)과 횃불과 무기(武器)를 들고) 그리로 오는데 파견된 군중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요 18:4) 예수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요 18:5) 대답하기를, "'나사렛' 예수라" 하므로 말씀하셨다. "내가 그다" 하셨다.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요 18: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다"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면서 땅에 엎드러지므로, (요 18: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니 그들이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라" 하므로 (요 18: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에게 '내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요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마 26:48)(막 14:44) 예수님을 파는 이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말하기를, "내가 입 맞추는 이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으므로 (막 14:45)(눅 22:48)(마 26:49) 이에 그들 앞서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며 "'랍비'(선생님), 안녕하시옵니까? "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유다'야, 네가 입 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마 26:50)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막 14:46) 이에 그들이 와서 곧 예수님께 손을 대어 잡으므로 (눅 22:49) 좌우가 그 된 일을 보고 여쭙기를, "주님, 우리가 검으로 칠까요?" 하고 (눅 22:50)(막 14:47)(마 26:51) 예수님과 함께 곁에 섰는 이들 중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치니 그 오른편 귀가 떨어졌다.((요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눅 22:51)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요 18:11)(마 26:52) 예수님께서 '베드로'더러 말씀하셨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검을 가지는 이는 모두 검으로 망한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ㅡlegion)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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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註-숫자까지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영(營)"으로 나타내셨으니 영역(英譯)으로 "legion"이 되는데 이는 고대 로마식 군단(軍團)의 표준대로 하면 300-700 명의 기병을 포함 3,000-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어 간단히 말해 충분한 전투 태세를 완벽하게 갖춘 일단의 병력을 "영"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바로 이런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보겠다. 육체인 인간이라 전체를 합쳐도 천사 하나를 당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악령의 군단을 대상으로 하여 말씀하신 것일까. 또 조물주 하나님께서 어찌 피조물처럼 그런 숫자에 구애되시겠는가. 단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서 사람의 예를 따라 말씀하신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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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55)(눅 22:52)(막 14:48)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수비대)의 장교들과 장로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나 너희가 나를 잡지 않았다(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마 26:56)(눅 22:53)(막 14:49).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성경을) 이루려 함이다" 하셨다.


(요 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니 (막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막 14: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오다가 군중들에게 잡히니 (막 14: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요 18:13)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丈人)으로서 (요 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이였다. (원래 '유대'인의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었으나 로마 속국(屬國)이 되면서 강제로 '안나스'를 퇴임시키고 그 사위 '가야바'를 세운 까닭에 '유대'인은 '안나스'와 '가야바'를 둘 다 대제사장으로 대우했다-註).


(요 18:19)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 제자들과 그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요 18:2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다.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요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나의 하던 말을 안다".


(요 18:22) 이 말씀을 하시니 곁에 섰는 하인배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치며 말했다. "네 감히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기냐?". (요 18: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말을 잘못했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잘했으면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24) '안나스'가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다.


날이 새니


(눅 22:66) 날이 새는데 (막 14:53)(마 26:57) 예수님을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다 모여 있었다. (예수님을 그 공회(公會)로 끌어들여) (마 26:59)(막 14:55)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증언을 찾되 얻지 못하니(거짓 증언을 찾으나 얻지 못하니) (막 14:56) 이는 예수님을 쳐서 거짓 증언하는 이가 많으나 ((마 26: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그 증언이 서로 합하지 못함이었다.


(막 14: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후에 두 사람이 와서) 예수님을 헐뜯는 거짓 증언으로 말하기를, (마 26:61)(막 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을 것이라'('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였다" 하되 (막 14:59) 오히려 그 증언도 서로 합하지 않았다.


(마 26:62)(막 14: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님께 묻기를,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언이 어떠하냐?" 하되 (마 26:63)(막 14:61) 예수님께서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니 대제사장이 다시 말하기를,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우리에게 말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냐?".


(눅 22:67) 이에 대답하셨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요 (눅 22: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눅 22:6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 후로는(이 후에) 인자가 (능력의 우편에) 하나님(능력자)의 우편에 (앉아 있을 것이다)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눅 22:70)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냐? " (마 26:64)(막 14:62) 이에 대답하셨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다(네가 말하였다)(내가 그다)". "(마 26:65)(막 14:63)(눅 22:71)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그가 불경스러운 말을 했으니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막 14:64) 보라! 너희가  지금 이 불경스러운 말을 직접 그 입에서 들었다. (마 26:66) 너희 생각이 어떠냐?". 그들이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단죄하고 대답하기를, "그는 사형에 해당된다" 하였다.


조롱하고 때리며


(마 26:67)(눅 22:63)(막 14:65) 그를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눈을(얼굴을) 가리우고 그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눅 22:64)(마 26:68) 조롱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메시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하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하고 (하인배들은 손바닥으로 쳤다) (눅 22: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였다.


닭이 곧 울다


(아래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한 이 제자가 요한이므로 요한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가서 당하신 자초지종을 계속하여 지켜 본 증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증언을 기초로 이 때에 일어난 일을 편집했다-註).


(눅 22:54) 예수님을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때 (요 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마 26:58)(막 14:54) 그 결국을 보려고 멀찍이 예수님을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요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으므로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요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므로 그가 말하기를, "아니다" 하였다.


(요 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인들이 뜰 가운데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었다. (눅 22:55) (서서 쬐다가 모두) 함께 앉으므로 '베드로'도 그 가운데 하인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쬤다. (마 26:69)(막 14:66) '베드로'가 바깥 뜰(아래 뜰)에 앉았더니 (눅 22:56)(막 14:67) 대제사장의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아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너도 '갈릴리' 사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하니 (눅 22:57)(마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말하기를 "여자여,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겠다" 하며 (막 14:68) 앞뜰로 나갔다.(이상이 첫번째 부인으로서 요한과 마태(및 마가, 누가)의 기록에 약간 차이가 난다-註).


(마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눅 22:58)(마 26:73)(막 14:69) 조금 후에 곁에 섰던 다른 여종이(사람들이) 그를 보고 거기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하며 (더러는 '베드로'더러) "너도 참으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니 (마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요 18: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기를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아, 나는 아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눅 22:59) 한 시간쯤 있다가 ((마 26:73)(막 14:70)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말했다((요 18:26) 이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가 귀를 베어 버린 사람의 일가(一家)였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않았느냐?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다". (눅 22:60)(마 26:74)(막 14:71)(요 18:27) 이에 '베드로'가 또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하고 방금 말할 때에 (막 14:72) 닭이 곧 두번째 울었다.


(눅 22:61)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오늘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하심이 생각나서 (눅 22:62)(마 26:75)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


'유다'의 자살


(마 27:3) 때에 예수님을 판 '유다'가 예수님의 단죄(斷罪)되심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4) 말하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감당하라" 하므로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聖所)에 던져 넣고 물러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평소 능력을 나타내시던 예수님이시므로 잡혀 가도 어떤 기적을 통해서든 해를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유다는 생각했던 것 같다-註).


(마 27: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말하기를, "이것은 피 값이니 성전고(聖殿倉庫)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마 27:7) 의논한 후 그것으로 토기(土器)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마 27: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는다.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으니 기록되기를, "그들이 그 정가(定價-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이 은 30은 노예를 속량하는 속전-출 21:32)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定價)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마 27: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님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다"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는 중 궐(缺)이 난 12 사도 중 한 사람을 채우기 위해 제비 뽑을 때 '베드로'가 아래와 같이 말했으므로 참고 삼아 여기 수록한다-註). (행 1:16)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을 잡는 자들에게 길 인도를 해 준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이는 마땅하다. (행 1:20) 즉 시편에 기록하기를,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이가 없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행 1:17)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數)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었다. (행 1:18) 이 사람이 불의(不義)의 삯(代價)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으므로 (행 1: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이 곳 말로 그 밭을 일컬어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다".


'빌라도'에게 끌고 가다


(막 15:1) 즉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율법학자들 곧 온 공회(公會)가 더불어 (마 27:1)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Pilatus)에게 넘겨 주어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눅 23:1) 군중들이 다 일어나 (요 18:28)(마 27:2) 예수님을 결박하여 '가야바'에게서 '빌라도'의 재판정(裁判廷)으로 끌고 가니 (아직) 새벽이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하여 법정에는 들어가지 않았다('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및 이방인에게 속한 곳을 부정(不淨)하다 하였으므로-註). (요 18: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그들에게 나가 말하기를,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했다.


(눅 23:2)(요 18:30) 그들이 고소하면서 대답하기를, "이 사람이 악행(惡行)하는 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각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케자르'(Caesar)에게 세(稅)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王) 곧 그리스도(메시아)라 합니다" 하니 (요 18:31) '빌라도'가 말했다.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습니다". (요 18:32) 이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다(십자가 처형은 로마 식이었고 '유대'인들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는데, 성경이 주님의 죽으심을 가리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갈 3:13/신 21:23) 하였기 때문. 죽을 죄를 지으면 그 죽은 시체를 나무에 단다고 했으니(신 21:22),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 모두가 "죽을 죄를 지어 죽는" 모습을 취하시는 것이므로, 그 대목이 주님께 대한 예언이라 하는 것-註).


(마 27: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십시오.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하였다.


진리가 무엇이냐


(요 18:33)(막 15:2) 이에 '빌라도'가 다시 법정에 들어가 예수님을 불렀다. (눅 23:3)(마 27:11)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시니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4)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네 말이 옳다. 이는 네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해 네게 한 말이냐?".


(요 18:35) '빌라도'가 대답하기를,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부하)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했을 것이다. 현재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 18:37) '빌라도'가 말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해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이는 내 소리를 듣는다". (요 18:38) '빌라도'가 말했다. 


"진리가 무엇이냐?".


(막 15:3)(마 27:12) 이 때 예수님께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 소리가 들리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므로 (막 15:4)(마 27:13) '빌라도'가 또 물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공격하여 고소하는가 보라. 네게 대해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나 (막 15:5)(마 27:14) 예수님께서 다시는  아무 말씀도(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심히 기이하게 여겼다.


(눅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군중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 하니 (눅 23:5) 군중들이 더욱 힘 주어 말하기를,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합니다" 하였다. (눅 23:6) '빌라도'가 듣고 묻기를,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며 (눅 23: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마침 그 때 '헤롯'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해


(눅 23:8)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기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였다. (눅 23:9) 이에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눅 23:10)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였다. (눅 23:11) '헤롯'이 예수님을 업신여겨 그 군병들과 함께 조롱하며 빛이 나는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눅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가 되어 있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눅 23:13) 총독이 다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나가서 말하기를 (눅 23:14) "너희가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이 사람을 내게 끌어 왔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査實)하였으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나는 아무 죄도 그에게서 찾지 못했다. (눅 23: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그를 도로 돌려보냈다. 보라! 그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아니다. (눅 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다". (눅 23:17){없음}(어떤 사본에, "명절을 당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었다"라고 되어 있음).


'바라바'


(마 27:15)(막 15:6) 명절을 당하면 백성이 구하는 대로(군중들의 소원대로) 총독이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는데 (막 15:8) 군중들이 나아가 전례대로 해주기를 구하므로 그 때에 (막 15:7)(눅 23:19)(마 27:16) 성중에서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인하여 포박되어 옥에 갇힌 자 중 하나가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였다.


(요 18:39)(마 27:17)(막 15:9)(마 27:21) (그러므로 총독이 말하기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너희는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메시아)라 하는 예수냐?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마 27:18)(막 15: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猜忌)로 예수님을 넘겨준 줄 앎이었다.


(마 27:20)(막 15:11)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군중들을 권하여(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고 예수님을 멸하자 하도록 시켰으므로 (요 18:40)(눅 23:18) 군중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말했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주십시오!".


(마 27:22)(막 15: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러면 그리스도(메시아)라 하는(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막 15:13) 그들이 모두 다시 소리 지르기를,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마 27:23) (눅 23:20) '빌라도'가 말하기를, "어찌 된 것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지르기를,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하였다.


(막 15:14) '빌라도'는 예수님을 방면하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나 (눅 23:21) 그들은 소리 질러 말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해주십시오! 십자가에 못박게 하십시오!".


(요 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요 19:2) 군대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자주(紫朱) 색(이는 부귀를 상징하는 색이나 이 경우 조롱하는 의미-註) 옷을 입히고 (요 19:3)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여, 평강을 누리시라" 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


(요 19: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기를,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는 것은,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다" 하였다. (요 19:5) 이에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줏빛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보라! 이 사람이다" 하니 (요 19:6) 대제사장들과 하인배들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 질러 말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십시오!".


'빌라도'가 말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다". (요 19:7)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입니다".


(요 19: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요 19:9) 다시 법정에 들어가 예수님께 말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온 것이오?" 하나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므로 (요 19:10) '빌라도'가 말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오? 내가 당신을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오?". (요 19:1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을 것이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요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쓰면서 (눅 23:22) 세 번째 (나아와) 말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했으니 때려서 놓겠다". (눅 23:23) 그러나 '유대'인들이 큰 소리를 질러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므로 그들의 소리가 이겼으니, 말하기를 "이 사람을 놓으면 '케자르(Caesar)'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이는 '케자르'에 대한 반역입니다" 했기 때문이다.


(요 19: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끌고 나와 "박석"(Pavementㅡ포장한 바닥, 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裁判) 자리에 앉았다. (요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아침 6시였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보라! 너희 왕이다!". (요 19:15) 무리가 소리 질렀다. "없애 버리십시오! 없애 버리십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십시오!".' 빌라도'가 말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했다. "'케자르'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


(마 27:24) 이에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감당하라". (마 27:25) 백성이 다 대답했다. "그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려지기를 원합니다".


(막 15:15)(요 19:16)(눅 23:24) 군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언도(言渡)를 내리고 (눅 23:25)(마 27:26) 그들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그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했다.


(마 27:27)(막 15:16) 이에 총독의 군대가 예수님을 끌고 재판정 안으로 들어가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 모든 부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마 27:28) 그의 옷을 벗기고 붉은 옷)((막 15:17) 자색 옷)을 입히며 (마 27:29)(막 15:18)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절하며 조롱하여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시라" 하며 (막 15:19) (마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쳤다. (마 27:31)(막 15:20) 조롱을 다한 후 붉은 옷(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십자가를 지워


(눅 23:26)(마 27:32) 예수님을 끌고 갈 때에 (요 19:17)(막 15:22)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마 27:33)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으로 나가셨다.


(막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Cyrene-오늘날 아프리까 리비아 수도인 트리폴리, 신약시대에 거기 '유대'인들이 많아 가 살았음)'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 것을 잡아 그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하였다.


(눅 23: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므로 (눅 23:28) 예수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이다.


(눅 23: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할 것이다. (눅 23:31) 푸른 나무에도 이 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눅 23:32) 또 다른 두 악행한 죄수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님과 함께 끌려 갔다.


십자가에 못 박고


(눅 23:33) '골고다'(해골)라 하는 곳에 이르러 (마 27:34)(막 15:23) 쓸개 탄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했으나 받지 아니하셨다(예수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셨다)(이것은 일종의 진통제로서 십자가 형의 죄수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자비였다-註).


(요 19:18)(마 27:38)(막 15:27) 그들이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다른 두 사람(강도 둘)(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고 예수님은 가운데였다. (막 15:25) 때가 제 3시였다('유대'인의 시간은 우리와 6시간 차이다. 고로 오전 9시를 말한다. 그러나 '요한'만은 당시 로마인들의 시간 계산법대로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날과 같다-註). (막 15:28){없음}(어떤 사본에, "'불법자와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 한 성경이 응하였다"(사 53:12-註).


(마 27:37)(눅 23:38)(막 15:26)(요 19:19) '빌라도'가 죄 패를 써서 그 머리 위 십자가 위에 붙일 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유대'인의 왕)이라 기록하니 (요 19:20) 예수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었다.(요 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써달라 하니 (요 19:22) '빌라도'가 대답하기를 "나의 쓸 것을 썼다" 하였다.


"이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눅 23:34)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이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막 15:29)(마 27:39)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하여 말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마 27:40)(막 15:3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마 27:41)(막 15:31) 그와 같이 (관원(官員)들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도 함께 조롱하여 비웃어 서로 말하기를, "그가 남을 구원했으니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메시아)이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 (마 27:42)(막 15:32) 그가 남은 구원했어도 자신은 구원할 수 없구나. 그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메시아)이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마 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면 이 때 구원하실 것이다. 자기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다" 하고, (눅 23:36) 군인들도 조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눅 23:37) 말하기를,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였다.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욕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그러나 '누가'는 '마태' 및 '마가'와는 달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註).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나, (눅 23:40) 다른 하나가 그 사람을 꾸짖어 말했다. "네가 동일한 단죄(斷罪, 定罪)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않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인즉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분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눅 23:42) 그리고 말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눅 23:4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의 옷을 취하여


(요 19:23)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거두어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꿰맨 솔기 없이-註)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므로 (요 19:24)(막 15:24) 그 옷을 나눌 때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군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습니다"(시22:18-註)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다. (마 27:35)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마 27:36) 거기 앉아 지켰다.


"네 모친이시다"


(요 19:25)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그 모친의 여형제(his mother's sister,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여자"라고 부르시는데 우리말 "이모"라는 번역은 온당치 않다. 아무리 "모친"이라고 일관되게 마리아를 지칭하고 있는 성경이지만 부득이 한 표현일 뿐이라 그 경우에만 사용할 것이지 확대시켜 나가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註)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 19:26) 예수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라! 아들이다" 하시고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이시다" 하시니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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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註-앞에서도 이미 지적했지만 존대어 경칭어가 유난히 발달한 우리 어법에 비추면, 마리아더러 "여자"라고 하셨으니 "모친"의 개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므로, 굳이 존칭어를 쓰실 이유가 없다고 여겨 보통 여자들을 대하신 것처럼 표현했다. 의도적으로 마리아를 "여자"라 부르신 까닭은 어머니라 호칭하면 대칭적인 의미로 아버지를 연상하게 되는 까닭이니 그리스도께는 어느 경우로든 "모친"은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서는, 역시 재차 강조하는 바이지만 지금과 같이 "그리스도의 모친"이라고 하여 신성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성이 워낙 부패하여 모세까지도 그 시신을 위하고 섬길까 해서 감추신 사실과 같은 맥락이다. 사단은 모세의 시신을 그와 같이 악용하려 한 것이다(유 1:9).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날 마리아를 위하고 있으니 인간의 이지(理智)를 농락하고 있는 악령 사단의 능력(아니 그보다도 자연계에 속해버린 인간 육체의 비극적인 제한성 즉 원래의 이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에 새삼스럽게 놀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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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5)(막 15:33)(눅 23:44) 때가 제6시쯤 되어(정오를 가리킴-註)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오후 3시)까지 계속하더니 (마 27:46)(막 15:34) 제9시 즈음에 예수님께서 크게 외치셨다(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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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註-그 때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멀찍이 서서 보지 말고 '마리아'와 요한과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이들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십자가 상의 주님을 올려다 보던 것처럼 그렇게 가까이서 주님을 뵙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자세다. 나를 위해 나의 죽음을 죽으시는 나와 함께 죽으시는 모습이 아니신가. 새벽 이른 시간부터 죄인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수모를 견디시고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장장 6시간을 주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이 나를 위해 이루 형용할 길 없는 고통을 당해 주신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한 죽으심인데 어찌 멀찌감치 서서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리요!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묘사할 때 몸의 하체를 흰 수건으로 가린 것으로써 그리는데 이는 거짓이다. 차마 정직하게 그리지 못해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 것이 옳다. 최고형을 받아 십자가에 매다는 처지에 눈곱만큼도 자비가 있을 리 없다. 벌거벗은 몸으로 모든 군중이 다 보라고 치켜들어 세운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은 멀리 서서 있게 되고 모친 마리아만 그 앞에 비교적 나이 어린 요한과 더불어 서 있었던 것이다. 아아, 자식(자신께서 친히 만드신 피조물 인간)을 위하는 어버이 사랑이 이러하시다. 


동네 주먹으로 행패를 일삼던 김익두는 어쩌다 성경을 읽다가 이 대목에 와서 목놓아 울고는 며칠간 그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귀신들을 잘 쫓아낸다고 해서 "시셩모(席勝魔)"라는 애칭으로 통했던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는 믿기 전 인생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그 번뇌를 못이겨 누군가의 권유로 아편에 손댔다가 중독자가 되어버려 고통하던 중 한번은 성경을 읽다가 십자가 고난의 이 장면에 이르러 대성통곡하고 그 후 성령의 능력으로 아편에 대한 죽음의 욕구를 완전히 꺾어버리고는 여생을 오직 사람들 구원해내는 일에만 바쳤다.


마가와 '요한'의 "시간"


앞에 잠시 언급한 대로, '요한'(요 19:14)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마지막 재판을 받은 때를 "제 6시"라 소개하고 '마가'(막 14:25)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을 "제 3시"라 기록하고 있다. 얼핏 보면 '마가'의 기록과 '요한'의 기록이 서로 어긋나는 것 같으나 이는 간단히 답할 수 있다. '마가'와 '요한'이 서로 다른 시간 계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두 가지 시간 계산법이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이 사용하는 시간 계산법(우리나라 시간과 6시간 정도 차이), 다른 하나는 로마식이다(하루를 24시간으로 정하는 오늘날과 같음). 당시 로마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이런 두 가지 시간 계산법이 혼용되었으나 당시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어 혼동은 되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음양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에 견줄 수 있을까.


'요한'은 로마 시간 계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 시간에 의하면 주님은 오전 6시에 빌라도에게 최종 판결을 받으셨고(요 19:14-16) 그 후 골고다까지 끌려 가시어 거기서 지체되는 데에 약 3시간이 소요되었고(눅 23:26-3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로마 시간으로 오전 9시였다(우리의 시간과 같음). 로마 시간 오전 9시는 '유대' 시간으로 "제 3시"였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제6시에서 9시까지 해가 빛을 잃었다고 기록했으나 '요한'은 그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 치세시의 하늘에 괴변(怪變)"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Tiberius) 치세시에 3시간이나 해가 빛을 잃은" 사실이 기록에 남아 전해온다고 '로마 흥망사'에서 '기본'(Gibbon)이 밝히고 있다. 당시 로마의 시인(詩人)들과 역사가들이 이 놀라운 초자연적 현상을 언급하고 있다고 '기본'은 전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이 때의 3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밤낮 사흘"


일반적으로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의 날짜 세는 관습에 따라 금, 토, 일 3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나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 하신 말씀대로라면 이는 착오이다. 즉 "밤과 낮"으로 분명히 명시하신 그런 의미로서의 "사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요일이라 여기는 것도 "안식일 전 날"이라는 말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주 토요일 안식일만 아니라 또 다른 안식일이 있다는 것이니 즉 유월절로써 시작되는 1주간 즉 7일(이것을 "무교절"이라 한다) 중 그 첫날 역시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앞에서도 언급했다.


다시 말해 주간 첫날 즉 일요일이 아닌, 유월절을 포함한 무교절로서의 1주간 그 첫날은 그것이 그 주의 무슨 요일(曜日)이 되든 무조건 안식일이다(출 12:16/레 23:7/민 28:16-18). 그래서 편의상 이를 "유월절 안식일"이라 한다. 고로 "안식일 전날"이라 한 것은 이 '유월절 안식일' 전날이고 '일반 안식일'(토요일) 전날(금요일)이 아닌 점에 유의할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의 안식일이 '일반 안식일'(토요일)인지, 아니면 '유월절 안식일'(그 해의 유태력 7월 15일 목요일)이었는지를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으니, 곧 요한이 지적한 대로(요 19:14)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었던 것이다. 고로 '유월절 안식일'의 전날로서 그 해에는 '유월절 안식일'이 목요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바로 수요일이 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일상적인 시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이 아니라 밤이 되기 전에 식사를 하신 것이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유월절 양을 잡던 그 시간 즉 14일 "해질 때에"(출 12:6)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동안 바쳐졌던 모든 유월절 양들은 모두 상징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진짜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로 그 시간에 "바쳐지셨던" 것이다.


'유대'인의 유월절 양에 관한 모든 것은 주님께 관한 예표(豫表)였다. 곧 흠 없으신 어린 양이셨고(출 12:5), '유대'력(曆)으로 7월 10일에 "취택"(출 12:3)되셨다. 왜냐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6일 전(요 12:1) 즉 목요일의 6일 전인 금요일 '여리고'에서 '베다니'로 왔으므로 토요일 다시 말해 그 달 10일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고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은 '베다니'로 온 다음날(요 12:12,13) 즉 토요일이다. '유대'력으로는 7월 10일이 된다.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주님을 은 30을 받고 팔게 된 날도 같은 날이다(마 26:15,16/막 14:3-11). 주님께서 붙들리신 것은 나환자 '시몬'의 집에서의 만찬 후였으니 만찬은 금요일 오후 즉 해 질 무렵, 혹은 해 진 후 토요일('유대'력) 이른 때였으므로 그 만찬 후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가 모의를 한 날은 '유대'력 7월 10일이다.


"은(銀) 30"의 의미


이 "은 30"은 그 날 죽일 희생 양 즉 예수님께 대한 가격을 정한 것이 되어 이 가격으로 율법을 따라 양(羊)을 사게 되는 그런 의미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희생 양"을 죽이는 대제사장에게 그렇게 넘겨지신 것이 바로 그 때로서 '유대'력 10일에 이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부지중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따라 그들은 그 "희생 양"을 구약에서 예언한 정확히 그대로 값 매김을 한 것이다(마 26:15/슥 11:12).


그리고 돌아가셨을 때 예언 그대로 뼈는 하나도 부러뜨려지지 않고 보존되었다(요 19:36/출 12:46/민 9:12/시 34:20). 또 '유대'력 7월 14일 늦은 시간 즉 해질녘 곧 15일의 시작 직전에 돌아가셨다(출 12:6). 주님께서 '유월절 안식일' 직전에 돌아가심으로써 성경의 예언은 세세한 부분에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이 금요일이라면 이상과 같은 성경 예언은 여러 모로 어긋나게 된다. "사흘 낮과 밤을 땅 속에서 지내신 그리스도"라는 그의 글에서 토레이(R.A.Torrey) 박사가 내린 결론이다.


뿐만 아니라, 천문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주후 30년 곧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그 해 유월절은 달(月)이 만월인 4윌 6일 목요일이었다. 그 날이 금요일이라고 믿어 왔던 연대학자들은 주후 30년의 유월절이 목요일이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여 십자가 고난이 주후 33년에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아도 그 해 역시 만월은 목요일이었던 것이다.


"유월절 예비일"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대로 주님께서 '유월절'이 아닌 '유월절 예비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사흘 낮과 밤을 무덤에 계셨을 당시 '유월절 예비일'이 수요일이었고 유월절 안식일은 목요일이었으며 주님의 부활은 금요일 다음의 토요일 안식 후 그 주 첫날인 일요일이 된다. 

주님께서는 수요일 해질녘에 돌아가셨고 그로부터 72시간 즉 사흘 낮과 밤이 종료되는 그 주 첫 날의 시작(토요일 해질녘) 이후에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여자들이 새벽 일찍 무덤에 가니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돌을 굴러내어 그 위에 앉았다 했는데(마 28:1-7), 천사가 돌을 굴린 것은 여자들을 위해서이고 나중에 제자들도 와서 확인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무덤 자체는 이미 비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그 전에 벌써 부활하셔서 무덤 밖에 계신 것이다.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즉 초자연계 육체이므로 나중에 제자들이 문을 잠갔어도 들어오신 것처럼 돌 문이야 그대로 막혀 있든 말았든 즉 굴러  치워져 있든 않든 아무 상관 없이 무덤에서 나가 계신 것이다.


여인들의 날 수 계산


주님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이라 했는데 그 새벽 일찍 여인들이 무덤으로 달려간 것이다. 유월절 안식 후 그 다음날 가지 않고 제7일 안식일 다음날까지 기다린 것은 주님께서 "내가 밤과 낮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살아나실 줄 믿고 갔다면 그 시신에 사용하기로 한 약품은 무엇인가. 다시 살아나시는데 그 약품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당시의 그들은 확신이 아니라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주님의 무덤을 찾을 때의 심정은 예의 차원에서라도 그런 것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생전의 말씀 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여태껏 없었으니 어찌 되었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으로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가 될 경우도 함께 생각해서 그런 물품을 준비하여 무덤으로 간 것이다.


하여간 여자들은 정확히 그 "사흘 밤 사흘 낮"이란 날 수를 세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누가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나 의심했는데 이것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시신에 쓸 약품을 준비해온 것과 같은 심리상태다. 날 수는 세고 있었어도 확신은 서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나 '나인'성(城) 과부의 아들의 예는 다른 사람 죽은 것을 살리신 경우이고 주님 죽으신 것은 능히 그들에게 잡히시지 않아도 되지만 자진해서 잡히심으로써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므로 그렇게 친히 살아나실까 하는 의구심이 들만도 했다. 여인들이 날 수를 세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수요일이 정확하다는 결론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셈이기도 하다. 여인들이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굴려줄꼬" 한 것은 금요일에는 가지 않았고 지금 가는 길이 초행이었음이 분명해진다.


* 위의 글 즉 "밤낮 사흘", "은(銀) 30의 의미", "유월절 예비일", "여인들의 날 수 계산" 항목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내용은 필자의 글이 아니고 토레이 박사의 글을 번역하여 소개한다고 한 어느 인터넷 기사(記事)에서 그대로 옮긴 것임을 밝혀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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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목마르다"


(요 19:28) 이 후에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목마르다"(시편 22:15-註).


"다 이루었다"


(마 27:47)(막 15:35) 거기 섰던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듣고 말하기를, "보라!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마 27:48)(막 15:36)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 (요 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으므로 해융(스폰지)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우슬초(牛膝草, hyssop)(부정(不淨)을 없애는데 그 가지를 썼던 것으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갔던 듯하며 100~120 cm의 갈대와 같은 줄기로 되어 있음-율법을 따라 희생 제물의 피와 함께 물을 뿌릴 때 사용되어졌음, 히 9:19 참조. 이 우슬초 사용에 대한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있다-註)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고 (마 27:49) 그 남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내려 주나) 보자" 하였다.


(요 19:30)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눅 23:46) 그리고 큰 소리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머리를 숙이시고 운명하셨다(영혼이 돌아가셨다).((마 27:50)(막 15:37) 예수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큰 소리를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누가만이 이 "벽력 같은 큰 소리"로 외치신 말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註).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겨져


(마 27:51)(눅 23:4)(막 15:38) 이에 성소(聖所) 휘장(curtain)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한가운데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2) 무덤들이 열리면서 자던 성도(聖徒, saints)의 몸이 많이 일어나 무덤에서 나와 (마 27:53) 예수님 부활 후 거룩한 도시(the holy city-사람이 밀집해 사는 곳)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였다.


("예수님 부활 후"-"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까 이제는 마지막 아담과 하나된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게 되어 있는 일반적 사실을 들어 강조하느라 이렇게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부활하신 당일 그렇게 된 것을 가리킴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전자 쪽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 왜냐면 휘장이 찢어져 우리가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설명과 동시에 "나타내 보였다" 했으니, 당시는 아직 주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이었고 부활하신 시점을 가리키기에는 이른 때였으므로-註).


백부장(centurion)이 그 된 일을 보고


(마 27:54)(막 15:39) 예수님을 향해 섰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였다. ((눅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義人)이었다").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로부터 따라 온 많은 여자


(눅 23: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군중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마 27:55)(막 15:41)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로부터 따라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 27:56)(막 15:40)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작은 '야고보')와 '요셉'('요세')의 모친 '마리아',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모친도 있었다. (또 '살로메'가 있었다).(눅 23:49) 이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이들이요 또 이 외에도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과 예수님의 아는 이들이 많이 있어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다.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요 19:31) 이 날은 예비일로서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신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 19:32) 군인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 19:33) 예수님께 이르러는 이미 운명한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고 (요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다.


(요 19:35) 이를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니 그 증언이 진실되다.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진실인 줄 알아 여러분으로 믿게 하려 함이다. (요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여지지 아니할 것이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다. (요 19: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이를 볼 것이다" 하였다(슥 12:10-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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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註-'요한'이 여기서 "피와 물이 나왔다" 하고 이를 목격한 것을 중대한 증거로서 "증언한다" 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셨을 때의 그 몸이 초자연계 즉 신령한 육체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부활하심을 보고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예수님께서 단지 일시적으로 인간의 육체로 화신(化身)하셨을 뿐 참으로 사람의 육체는 아니시지 않았나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은 아니시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가 쓴 편지에서도 이를 확인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이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이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시다. 증언하는 바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로서,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다"(요일 5:5-8)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가리켜, 전자는 "물과 피"로써 후자는 "성령"으로써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영은 하나님으로서 성령이시고 그 육체는 인간의 육체로서 물과 피로 구성되었음을 자기 눈으로 목격하고 확인하였다는 바로 그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히 사람이시라는 사실은 우리가 새로 창조되는 일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니, 온전한 사람이 아니시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될 수 없고(따라서 구원이 불가능해지고)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나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그와 같이 새 피조물로 만드실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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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무덤이 있어


(막 15:42)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일반 안식일'이 아니라 '유월절 안식일'의 예비일이니 혼동하지 말 것-註)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요 19:38)(눅 23:50) '유대'인의 동네인 '아리마대' 사람 부자(富者) '요셉'이 존귀한 공회의원으로서{그들의 결의와 행사를 옳다 하지 않았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눅 23:51) 예수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드러내지 않다가 이 일 후에 (눅 23:52)(마 27:58)(막 15:43) 당돌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하였다.


(막 15:44)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벌써 운명하였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막 15: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신을 내어 주므로 이에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요 19:39) 일찍 예수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으므로 (막 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이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눅 23:53)(마 27:59)(요 19:40) 내려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香品)과 함께 정갈한 세마포(細麻布)로 쌌다.


(요 19:41)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이 있어 (요 19: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님을 (마 27:60) 거기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


(마 27:62)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말하기를, (마 27:63) "주님(Lord),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 말하기를, '내가 사흘 후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으니 (마 27:64) 그러므로 분부하여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십시오. 그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해 가고 백성에게 말하기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심할까 합니다" 하므로 (마 27:65) '빌라도'가 말하기를,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였다. (마 27:66) 그들이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印封)하고 무덤을 굳게 하였다.


(막 15:47)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모친 '마리아'가(다른 '마리아'가)((눅 23:55)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와 그 무덤과 시신(예수님)을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마 27:61) 무덤을 향해 앉았다가 (눅 23: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으므로 (눅 23:56) 돌아가 향품과 향유(香油)를 준비했다.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는 쉬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이라 표제를 단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내게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註).




 




안식 후 첫날 ...........................................................................................................................................................

(40註-이 부활하신 대목 역시 4복음서 기록이 각기 다르다. 이는 진실에 대한 증언에서 그 진실성에 대한 아주 강력한 자체 증명이 됨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오직 증언만을 토대로 하여 가감없이 수록한 것이므로 당신의 자세한 형편과 환경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고 또 그것을 설명해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고부동한 사실 그 자체에만 중점을 둔 순수하게 객관적인 기록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태와 '요한'은 사도들 중에 있으므로 직접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누가와 마가는 제3자에게서 간접적으로 들은 것을 기록했다는 차이가 있다. 위의 네 가지 경우에 '막달라 '마리아'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내용이 각각 다르다. 목도한 천사가 하나라 하기도 하고 둘이라고도 하며, 여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알고도 무서워하여 그 일을 전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또 전했다고도 하며,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졌다고도 하고 굴려지던 바로 그 시간에 현장에 마침 있었다고도 하는 등 제각각이다.


그리고 천사가 한 말이라도 직접 여자에게만 말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등 차이가 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도  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여러 여자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셨다고도 하는 등 각기 상이한 기록을 하고 있다. 또 '마리아'의 경우 주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 하신데 반해 마태의 기록에서는 여자들이 함께 주님을 뵙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은 '마리아'가 무덤이 비었다고 하는 말을 할 때 "우리가"라는 말을 했다 하는데, '마리아' 외 다른 여자가 있었음을 암시함인지 아니면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우리"라 했던 것인지도 밝혀놓지 않았다. 또 그들이 목격한 천사가 하나였느니 둘이었느니 하는 것도 여러 여자가 갔기 때문에 또 여자들이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그 중에 더러는 말하는 천사만 보았을 수 있고 그 말하는 천사 외에 또 하나의 천사가 더 있었음을 본 이들이(이가) 있을 수 있어 그들의 증언에 따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역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면서 천사가 말한 것도 여자들이 여럿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 증언에 따라 기록하였으므로 그런 차이가 날 수 있다. 무서워 말하지 못했다는 것과 말했다는 증언의 차이 역시 여자가 여럿이므로 '막달라 '마리아' 같이 담이 큰 경우는 달려가 즉시 제자들에게 알린 경우이고 다른 여자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냥 무서워 곧장 집으로 돌아갔을 뿐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했다는 증언일 수도 있어 그런 차이다.


그리고 마태는 여자들에게 주님이 동시에 나타나셨다고 하고 마가는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이 다 제자들에게 간 것이라고 볼 수 없고, 개중에는 그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고 너무 충격이 커 그냥 집으로 달아나다시피 해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할 (무서워) 수도 있다.


예수님의 발을 만지고 아니 만지고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베드로를 닮은 그 성격답게 너무 기쁜 나머지 좀 더 강렬하게 주님을 붙잡으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은 그냥 살며시 발을 붙잡고 경배했을 수도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 일찍 아직 캄캄한데도 혼자 누비고 다니며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가서 알렸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리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보았다면 "누가 시신을 훔쳐 간 것"으로 의심할 필요가 없는데 '마리아'가 그 일행 중에는 빠졌기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그러면 왜 그럴까. 그리고 '요한'은 아직 어두울 때라 했고 마가는 해 돋을 무렵이라고 했다. 이는 상당한 차이다. 이 역시 '요한'은 직접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간 사람이고 마가는 전해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마가보다 '요한'이 정확해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마가가 그 때의 여자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살로메"라 했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 사건에서는 어느 경우에서나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에 으레 그 경우 갔을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그 이름을 말한 대신, 다른 복음서 기록에는 없는 살로메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아 아마 그 경우 '막달라 '마리아'는 빠지고 그 나머지가 그쯤의 시간에 뒤늦게 갔을 수도 있겠다.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 온 여자들이 적지 않으므로 모두 한 곳에 유숙하지 않고 따로 유하다가 한 무리는 먼저 오고 그 후에 뒤따라 온 다른 무리의 여자들, 이렇게 두, 세 무리들로 나누어진 상황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4복음서 기자는 그 제각각 달려 온 여자들의 증언을 제각기 따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먼저 온 이들에 관한 것이 다음의 마태복음의 기록이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는 어떤가?


'요한' 외에 여자들의 보고를 직접 받았던 당사자들 중 하나인 마태의 기록은, 큰 지진이 나고 그 서슬에 지금까지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또 여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이 일을 보고한 사실에다가 중점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마태는 이 기록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또다른 '마리아'가 갔다고 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는 그 외에도 여러 여자들이 함께 한 사실을 말하므로 반드시 그 둘만이 그 때 갔다고는 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그 둘의 이름을 거명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여러 여자가 가기는 갔는데 애초 함께 가기로 하여 가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일행에서 어떤 연유로 해서 잠시 뒤처질 수도 있는 일이다. 혹 너무 정신없이 서두느라 미리 준비해두었던 물품(향품과 향유) 중 어느 한가지를 빠뜨린 것이 나중에 생각나 그것을 가지려고 도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성격이 남자인 '베드로'와 같아, 다른 여자들은 혼자서 그렇게 뒤쳐진 행동은 아니하려 하겠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일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출발할 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으나 제각기 향품을 사서 준비했는데 혹 '마리아'는 그것을 가져오기를 잊고 중도에서 도로 돌아가느라 일행에서 뒤쳐지게 되어 결국 혼자서 곧 이어 달려오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서 간 여자들이 이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달려가 제자들에게 당도하기 전에 황급히 먼저 달려갔을 수 있다. 길이 서로 어긋나 서로 만나지를 못한 것이다.


억지로 꿰어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개연성은 의당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기록할 상황의 당시 복음서 기록자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그 중요 줄거리만 엮어놓은 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정적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고 따라서 그 부활의 사실을 사실적으로 증명해보려고 노력하는 따위는 아예 의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사이에 다른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보다 먼저 갔다가 그런 지진을 만나고 천사를 보았으며 달려오는 도중에 주님까지 뵙는 동안에 약간 지체하였고, 그리고 뒤처진 '막달라 '마리아'는 잠시 몇 걸음 뒤미처 달려 왔으나, 천사가 돌을 굴려낸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여자들도 수비하던 군인들도 황급히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린 후였으므로, 혼자 무덤에 갔던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옮겨진 것과 빈 무덤만 보고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잠시 지체하던 여자들보다는 먼저 달려가면서 길이 서로 어긋날 수도 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와서 알리자 황망함을 느낀 '요한'과 '베드로'가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뛰어 올 때 '마리아' 역시 달려 왔고 제자들은 집으로 갔으나 '마리아'만 남아서 울고 있다가 두 천사를 보고 또한 주님을 뵌 것이다. 그래서 다시 제자들에게 뛰어가 알린 것이다. 이상이 '요한'의 기록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한 그 여자들은 그 길로 즉시 제자들에게 달려가지만, 그들보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그 여자들은 만나지 못한 채) 무덤이 비어 있는 사실만 알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 없는 동안에 남아 있는 다른 제자들에게 그 여자들이 그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었으나 반신반의했다고 한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그렇게 빈 무덤의 사실을 확인하고 자기네 숙소로 돌아갔더니 그 남은 제자들이 그 여자들의 보고 들은 바를 전해 들었다고 알려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정확히 꼭 그렇다는 얘기는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확정 지을 수도 없지 않은가. 또는 기타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모든 세부적인 사항은 성경이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부활의 사실만을 증언한 여자들의 일만 알려주므로 우리 역시 그대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훨씬 후에 이를 기록할 때의 증언자들의 말이 당시 '막달라 '마리아'도 함께 간 사실만 알고 그 후 '막달라 '마리아'가 뒤처졌는지 어떤지는 챙겨서 굳이 알아볼 경황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막달라 '마리아'도 함께 갔다고 했을 수 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따른 기록 내용을 한데 조합해서 편집하지 않고 제각기 별도의 내용 그대로를 이하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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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의 기록


(마 28: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마 28:2) 큰 지진이 나며 주님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마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니 (마 28:4) 지키던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마 28: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너희가 찾는 줄을 안다. (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 와서 그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너희가 뵐 것이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다".


(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급히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때 (마 28:9)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말씀하시기를 "평안하느냐?" 하시니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데 (마 28: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라. 거기서 나를 볼 것이다" 하셨다.


(마 28:11) 여자들이 갈 때 파수꾼 중 몇이 시내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마 28: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마 28:13) 말하기를,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도둑질해 갔다'고 하라. (마 28: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잘 말해 너희로 근심이 되지 않게 할 것이다" 하니 (마 28: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했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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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註-'마리아'가 먼저 달려갔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다른 여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쁨 속에서 갔을 것이니 비록 빨리 이 희소식을 알리려는 발걸음이라 하나,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그와는 아주 반대로 주님의 시신이 도둑질 당했다는 너무 황당함에서 지체하지 않고 필사적이게 허겁지겁 달려간 걸음이니 어느 쪽이 잽싸게 뛰어 먼저 제자들에게 당도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모두 그만그만한 비슷한 시간에 경각간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두 제자들을 따라 역시 뒤쳐져 달려온 것이다. 고로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향해 달려가느라고 이미 자리를 뜬 다음에 그 앞서 간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알린 것이다. 혹은 '막달라 '마리아'가 이 여자들과는 다른 곳에 따로 유숙했을 수도 있다. 그럼 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매번 나타나고 있는가?ㅡ이 설명은 다음 대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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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기록


(요 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요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므로 (요 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갔다.

(요 20:4) 둘이 같이 달려가다가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 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는데 (요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요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다.


(요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 (요 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 (요 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유숙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요한' 자신을 말한다. 아직 앳된 나이에 두려움을 타기 때문에 멈칫거린 것이다-註).


(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요 20:13) 천사들이 말하기를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므로, "사람들이  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해서입니다".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다.


(요 20:1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말했다. "주님(Sir),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다 두었는지 말해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가져갈 것입니다". (요 20: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시니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뜻, 즉 '랍비'} (요 20:1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더라고 말하라". (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뵈었다" 하고 또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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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註-이 먼저 온 여자들의 다음으로 무덤에 달려온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다음 누가복음의 기록이다. 제자들이 유숙하던 곳으로 이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간 뒤의 일이었다. 여기서 누가는 '베드로'가 이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한' 자신의 증언으로 '요한'이 분명 동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단독으로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누가는 단지 증인들의 증언들을 모아 기록하였으므로 '베드로'가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사실만을 알리기 위해 그 말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해두다보니 그런 것이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그 여자들의 무리 속에 빠짐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즉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단독으로 주님을 뵙기도 하고 그래서 두 번씩이나 그 때 사도들에게 달려간 사실에서 주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린 여자들 중 '대표적 인물'로 당시 믿는 이들 가운데 널리 유포되어 있었으므로 사실과는 관계없이 그렇게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간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이다.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빠짐없이 나타남도(마태의 기록에서는 실제로 거명되지는 않고 있다)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요안나", "살로메" 같은 새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 무덤을 찾은 여자들이 상당수였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가리켜,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이라고 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들 이름대로 그 여자들이 함께 있었나 없었나 하는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때 일을 기록할 때 정작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거명하여 그런 "여자"들이 직접 그런 사실들을 목도한 "증인들"이었다는 데에만 역점을 둔 것임이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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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기록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눅 24:3) 들어가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눅 24: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으므로 (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산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눅 24:7)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하셨다".


(눅 24:8)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 24: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알리니 (눅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였다.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렸다.

(눅 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황한 듯이 보여 믿지 아니하나 (눅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므로 그 된 일을 기이하게 여기며 집(유숙해 있던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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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註-또 다른 무리의 여자들이 있었다. 앞선 다른 무리의 여자들과는 약간 늦게 출발한 듯하다. 이들은 여기서 이 놀라운 일을 당하여 너무 충격을 받아 두려움을 탔기 때문에 비록 천사의 지시를 받았으나 그냥 도망치듯 아무 말도 못하고 숙소로 뛰어갔음이 분명하다. 천사들이 나타나도 천사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을 리도 없고 형체가 천사처럼 특이하여 천사로 인식되었을 리도 없고 그냥 평범한 (젊은) 사람들로 나타났으니 천사인 줄로 여자들이 인식했을지도 의문이다.


4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서로 입을 맞추지 않았음은 이로써도 드러난다. 서로 짜고 내용을 일치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부활의 예에서도 보듯이 확실한 증인이 있었고 그런 증언들을 기록한 이상, 부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첨가할 내용도 수정할 것도 없다고 각자가 판단하여 확신하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만일 오늘날처럼 내용이 상호간 너무 상이하다고 여겼으면 그것이 왜 그렇게 틀리는지 그 자세한 당시의 정황들을 살피기 위해 노력했을 터이지만 당시는 그런 확신만으로 대 만족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설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도 이런 서로의 상이점을 보고서도 있는 진실 그대로의 것을 중히 여긴 나머지 누구 하나 그것을 계획적으로 일치시켜 가필할 생각은 엄두도 못낸 채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일치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그냥 두는 것이 그 자체로써 성경의 진실성을 웅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지혜라기보다 성령께서 시종일관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셨다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 가장 강력한 그리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되어 있음이다. 이 외에 달리 그 어떤 증거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고 여기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


그러나 마가는 주님께서 살아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히 놀라 떨며 무덤에서 나와 무서움으로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쳐 버린" 것으로 되어 있는 그 "여자들" 가운데 분명 '막달라 '마리아'가 있는데도, 같은 마가의 기록에 주님께서 살아나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자 '마리아'는 이에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막 16:8)로만 끝난 것을 나중에 새로 듣고 (막 16:9)에서 (막 16:20) 까지를 새로 갖다 붙인 것일까. 그래서인지 다른 사본에는 이상의 12구절들은 없다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는 것은 '요한'이 기록한 것과 같은 '마리아'의 증언을 소개한 것일까. 그러나 이 대목에서 마태는 다른 여자들도 '마리아'와 함께 주님을 뵌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 등이 지금 여기서 필자가 설명하고 있는 대로의 상황 전개 과정의 풀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가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이 먼저 나타나셨다고 한 것은 다른 여자들이 함께 주님을 뵌 사실을 듣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만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왜냐면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만을 나중에 기록에 남기고자 회고한 것일 뿐 그 자료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애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가나 누가나 "돌이 벌써 옮겨져 있는" 사실만 전하고 있다. 이미 지적했지만 '막달라 '마리아'나 또 그와 함께 행동하고 있던 다른 여자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갔다고는 볼 수 없다. 여러 패로 나뉘어져 각자 행동을 했다고 볼 때 그래서 애초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가기로 했던 즉 맨처음 무덤으로 달려간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만 빼고는 천사가 돌을 굴려내는 현장에 때 맞춰 갔으므로 (오히려 천사가 여자가 오는 그 시점에 맞추어 행동을 개시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것을 목도했을 뿐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여자들은 그 나중에야 왔기 때문에 그렇게 돌이 옮겨져 있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을 뵙고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도로 돌아와 급히 이 사실을 알려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누가의 기록에, "그들이 돌아오니 제자들이 과연 주님께서 살아나셔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했다"(눅 24:34)는 것과 상반된다. 고로 개중에는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하여 마가는 그 믿지 않은 대다수를 가리켜 말한 것이리라.


이렇게 상당 시간이 경과한 후의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기록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불일치가 '주님의 부활'이라는 주제만은 진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입증하는 대목이 되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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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기록


(막 16:1) 안식일이 지나니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 16:3)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막 16: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컸다. (막 16:5) 무덤에 들어가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니 (막 16:6) 청년이 말하기를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님을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으므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다. (막 16:7) 가서 그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알리기를 '예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뵐 것이다' 하라" 하므로 (막 16: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막 16:9)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므로 (막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님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니 (막 16:11)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막 16장의 9~20절까지는 다른 어떤 사본에는 빠져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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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註-이상 네 사람의 기록 가운데서 당시를 직접 증언할 수 있는 이는 '요한'과 마태이다. 만일 '베드로'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기로 했다면 '요한'이 기록한 것과 같은 상황으로 말했을 것이다. 왜냐면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 즉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그렇게 헐레벌떡하고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보인 사람은 오직 '요한'과 '베드로' 둘뿐이었으므로 (실상 다른 제자들은 그런 여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고 이상 기록은 밝히고 있는 것) 그렇게 주님 살아나신 것을 확인하고 그 기쁜 소식을 다시 제자들에게 전달했을 때도, 반신반의하는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과 '베드로'를 상대로 말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태는 그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급히 달려간 후에 처음 여자들로부터 그 놀라운 사실을 전달 받았으므로, 그가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더 극적인 것 즉 지진이 나고 천사가 번개 같이 강림하여 나타나 지키던 군인들이 죽은 자 같이 되는 그런 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어 그것만 기록으로 남기는 것으로도 아주 만족했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실도 누가, 혹은 마가가 기록한 바와 같은 내용으로 역시 들었을 것이지만 자기로서는 자기가 직접 기술한 그 내용 이상으로는 더 알아 볼 마음이 없었을 수 있다. 비록 '막달라 '마리아'가 그 여자들과 함께 있었다고는 해도 그 시간대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너무 근접했던 탓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어느 경우에 나타나 알렸는지는 그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복음서를 작성하며 기억을 되살리는 터였기에 정확성을 기하려는 필요성마저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마가나 누가가 각기 다른 내용으로 여자들의 무덤을 찾아간 사실을 기술할 때는 당시 사도들과 함께 있지 않고 직접 여자들의 증언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한'이나 마태가 이미 기록한 내용을 참작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증언들을 찾아 '요한'이나 마태가 기록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소개할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그들 네 사람 모두가 무슨 역사가도 아니고 따라서 체계 있게 전후 사정을 따져 그 사실들을 종합해서 기록에 남길 의사도 없었고 오직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만이 중요하고 그 처음 확인하였던 여자들의 증언 중 단 하나라도 기록에 남기면 족하다고 했을 것이므로 이상과 같은 각기 상이한 부활의 내력이 성경에 담겨져 온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시는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그리고 그 부활이란 연속적으로 일어난 충격 때문에 거의 어림짐작으로 누가 누구와 함께 갔다는 식으로 알고 있을 따름으로 그런 자세한 자초지종은 오랜 후에야 살펴보고 밝히려고 했겠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 당시만큼은 그 기억이나 증언들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시 그들이 받은 충격은 그 모든 엄청난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있던 터라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슬퍼서 혹은 너무 기뻐서 정신이 거의 다 나갔을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몹시 창황한 때였다. 그리고 그 당시 상황은 역시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이라 사람 식별이 그리 분명치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기록상의 상이점


이런 갖가지 사실을 종합해보면 이런 기록상의 상이점이 주님의 부활 사실을 더 한층 확실하게 증언해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오히려 그런 차이점이 있음으로써 그 증인들의 증언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백 번 강조해도 좋다고 생각된다.


만일 지어낸 이야기라고 가정해보라. 이런 갖가지 차이점이 있겠는가. 일사불란하게 공통점만 꾸며대고 꿰어 맞추려 했을 것이 아닌가. "공통점"이라 하는 것도 이 경우 어폐가 있다. 서로 다른 증언이라는 것 자체가 진실된 사실임을 이미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칠 거짓 증언을 구할 때도 그 증언들이 서로 맞지 않은 것 역시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그런 성전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서 자체 증명하고 있음과 같은 이치다.


또는 이렇게 각자가 통일성 없이 기록하도록 버려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계획적으로 꾸미는 거짓이기 때문에 구수회의를 거쳐 단일 기록을 남기려면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복음서 기록을 중구난방으로 네 사람이나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이 기록들이 진실의 사실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는 것임은 이미 강조했다. 이는 분명 성령의 지혜로 난 것이고 하나님의 경륜이자 섭리에 의함임을 거듭 역설하고 싶다.


단일 복음서가 아니라는 이 사실이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다. 제각기 표현은 다르지만 그 표현 하나하나는 일리가 있고 이로써 그들 모두가 다른 물체가 아닌 바로 '코끼리'를 만졌다는 사실에서만은 일치하고 그 증언의 진실성을 입증함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 장님들의 증언이 일치하고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면 서로 입을 맞추어 꾸며댔다고 말하지 누가 그들 모두가 코끼리 있는 현장에서 제각기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믿겠는가. 거짓은 그래서 당장 드러날 것이 아닌가. 주님의 부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확실한 방법을 통해 온 인류에게 증명하시건마는 이 세상 신(神) 사단에게 완전히 예속된 인생들은 그 훌륭한 지능을 가지고도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같은 사람이나 이렇게 전후를 따라 자초지종을 꿰어 맞추어 보려고 하지 누가 이런 일을 하겠는가. 왜냐면 부활을 믿기 때문이니 이렇게 믿는 마당에서는 이런 저런 갖가지로 구질구질하게 꿰어 맞추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네 가지 기록의 복음서는 고스란히 그대로 지금까지 가감없이 보존되어 온 것이다. 서로 상치되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건재해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실일 수밖에 없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있다. 이 글의 말미(Ⅸ.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에 밝혀놓고자 한다.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성경 자체가 모든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사실 그대로만 진술하는 것으로만 철저히 일관하는 것이고 설명은 성령께서 친히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선생은 하나뿐이라" 하심과 같다(마 23:8).


그러므로 원래부터 신학자가 성경 진리를 신학으로 가르치는 법이 아니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대중들에게 비유로가 아니면 달리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풀어 설명하시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학문이 아니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 친히 그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사람에게만 가르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진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진리 아닌 오류로 빠져들 개연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들어가는 것이고 그 위험성을 안고 가는 것이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


성경이 이것저것 설명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주님의 역사적 부활의 영광스러운 사실을 웅변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재삼 강조한다. 거꾸로 생각해서 주님의 부활이 실제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라 하자. 이렇게 허술하고 엉성하게 이야기를 꾸며놓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듬고 손질하고 해서 모쪼록 듣는 사람이 속아 넘어가도록 빈틈없이 해놓는 것이 거짓말의 속성이고 또 인간 상식이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기록해두지 않는 법이다.


이 사실을 기록한 네 사람 각각이 서로 손발이 맞지 않게 기록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아무 설명도 없이 '요한'의 "6시", 마가의 "3시",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제각기 기록에 남기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 사람이 기록하게 할 리도 없다. 한 사람, 그것도 꾀가 있어 그럴 듯하게 속이기 위해 여럿이 기록하게 한다면 서로 꽉 차게 들어맞도록 짜임새가 있게 쓰도록 해놓지 이 사람 이 말하고 저 사람 저 말해서 서로 틀리게 해놓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 같은 특징이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점에서 약점 아닌 큰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이런 부인 못할 진실성 앞에서, "성경 기록이 이렇게 그 내용상 상치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니 어떻게 그것을 사실로서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 스스로가 진지하게 알아볼 생각도 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사람들의 습관성과 외고집의 당돌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직접 관련은 없는 내용이지만, 성경은 단 한 구절이라도 특이한 말씀이 있으면 그 대목을 응시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전체 의미를 망가뜨릴 수 있는 그 정도로 엉성하게 되어 있고 결코 체계 있고 치밀하게 씌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세밀하게 세련되게 쓰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정도로 진실이 뚝뚝 듣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적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진실만을 증언하는 모든 진술들의 특성이자 당당함이다.


거짓말일수록 번지르르 하게 해놓는 법이다. 글로 기록하거나 말을 해도, 광산에서 광석 그대로를 채취한 것처럼 다듬지 않은 울퉁불퉁 생 돌 그대로 가져오는 법이 없다. 그러나 진실 그대로 사실 그대로일 경우에는 그런 다듬고 손보는 일이 없다. 그냥 그대로 진실만 전달하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대목이라도 필요 없다 싶으면 당장 가지 치기를 하는 다듬은 말이나 글을 세상에 발표하는 일이 거의 없다. 왜냐면 듣는 사람이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까 하는 그런 신경쓸 일이 거짓말쟁이가 아닌 이상 거의 혹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삼위 일체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소홀히 함으로써 빚어내는 사례 중의 하나로, 삼위 일체 하나님께 대한 대립적인 견해가 있다. 소위 양자(養子)론과 양태(兩態)론인데, 양자론은 성부(聖父)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성자(聖子) 예수님은 원래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는데 후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강림하신 성령을 통해 비로소 양자(養子)가 되는 신적(神的) 요소가 부여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말씀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있어 왔다", 또는 각종 사도 서신에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말씀 등으로 그리스도를 주물주로서 밝히고 있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단으로 단죄되어 마땅하다.


양태론은 성부와 성자를 같은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상황에 따라 양 형태(아버지의 형태 및 아들의 형태)로 나타나신다는 주장이니 마치 한 남자가 자녀에게는 아버지로, 양친에게는 아들로,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성부로, 어떤 때에는 아들로, 어떤 경우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설이므로 "삼위(位)"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성자가 되셨다는 것인 바 이들은 주님의 말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그리고 바울 서신 중 "아들 안에 있는 자기 영으로써 아버지 친히 아들을 살리셨다"라는 설명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신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그려놓는 결과가 된다. 그런 착각을 하기 때문에 성부께서 태양이라면 성자는 그 비취는 광선이고 성령은 태양에서 나오는 열과 같다는 황당한 말도 나오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사람(인자(人子))되심을 부인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다시 살아나실 죽음을 죽으신 것이 되어 고통만 당하고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의미가 됨으로써 역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낙인 찍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과도 무관하다. 서기 261년의 교회 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된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중요하고 한 대목 한 대목이 중요한데, 어찌 감히 그런 서로 어긋나는 기록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부활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런 거짓말을 꾸며내는 자들로서) 감히 남기려 하겠는가. 이런 허술한 기록 자체가 부활의 확실한 증명이 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셔서 당신과 같은 존재를 만드시니 곧 당신의 형상과 모양이시라 곧 아들이시고, 이 아들로 말미암아 즉 아들 안에 계셔서 만물을 지으시니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항상 하나로 계심을 가리켜 성령이라 하는 것으로서, 어렵다고 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는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다.


단지 둘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개념만은 우리 인간의 주변에서는 남녀가 육체적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 외에는 따로 비유할 사항이 없으므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겠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이 바로 그런 것이므로 이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배워감을 따라 능히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하나로 계시다가 둘이 되어 계시니 비록 둘이시지만 애초의 그 하나로 계시던 상태를 계속 유지 존속코자 하는 모습이 바로 '둘이 하나됨'이요 이를 가리켜 "아버지"라고도 또는 "아들"이라고도 못하므로 두루 통하는 '이름'(마 28:19) 즉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시기도 하는 것이다.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의 절묘한 배치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사이에 두 종류의 안식일이 끼이는데 하나는 '유월절 안식일' 그리고 '일반적인 안식일'로서, 처음 안식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한 "일하심" 즉 '새 창조'를 "다 이루시고"(요 19:30) 이전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제7일"째 쉬신 것처럼 쉬신 것을 의미함이다. 이 사실은 이미 '안식일(安息日ㅡSabbath)에 대해'라는 항목에서 설명한 바 있다.


말하자면 안식일 개념에서 그 첫째의 것 즉 하나님의 애초의 "6일" 창조 후 안식하심과 같은 의미의 '창조 작업 후 그 완성에 따른 쉼 즉 안식'에 해당됨이다. 이전 창조나 새 창조나 창조임에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안식일의 두번째 의미 즉 하나님께서 쉬시니 우리도 쉬는 것 다시 말해 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됨으로써 편히 안식하는 것, 곧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으므로 너의 하나님이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다"(신 5:15)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첫번째 의미는 말할 것도 없이 천지창조에서 "6일" 창조를 마치시고 "7일"째에 쉬신 것을 가리킴이다. 그래서 새 창조의 완결을 고하는 유월절 안식일이 목요일이고 그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을 격(隔)하는 경계가 되는 금요일은 첫 안식일 즉 "6일" 창조의 완료가 인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미완성이 아닌 미완성이 되어 버려 하나님께서 부득불 새로 창조의 일을 하실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새로 일하실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을 가리킴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미 천명되어진 바다. 그러나 이제 새 창조가 완료되었으므로 이제 진정한 의미의 "6일" 창조가 완료되었다는 점에서 토요일의 일반 안식이 중복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반적인 안식일은 이와 같이 안식일 그 자체에도 의미가 분명하지만 그 안식일 이후 첫날이 되는 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 비로소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 "일하게" 되는 첫날을 의미함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6일 창조의 그 첫날부터 창조의 일을 시작하신 것처럼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머리로 하여 주님을 모시고 사람 구원하는 일에 새롭게 뛰어드는 계기를 처음으로 맞는 의미가 됨이다. 이제 이렇게 "일하는" 날들의 안식은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마치는 그 날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 하는 그 날 들어가게 될 것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이를 가리켜 "저 안식에 들어간다"(히 4:3) 한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주제를 삼고 주님을 공박하여 물고 늘어질 때에, "너희는 하나님이 창조를 다 마치시고 이제 안식하시므로 그런 의미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느라 그렇게 고집하지만 실제는 하나님이 쉬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범죄로 인하여 지금도 일하시는 과정이시고 나도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니 너희가 고집하는 그 주장은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것이다" 하시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인간 구원의 종료가 아직 끝나지 않아 여전히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해낼 막중한 책임을 그 교회로서 지고 있고 일하고 있는 와중에 있으므로 구태여 당시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특정일로 정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으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명백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언급에서도 나타나듯이 "한 날을 더 중히 여기지 않고 모든 날을 똑 같이 여기는"(롬 14:5) 경우가 그런 뜻이다.


성경에 "주님의 날"이라고 특별히 표현된 것은 있으나 이는 '유대'인 안식일의 대안(代案)으로 삼으라는 의미도 아니고 또 그런 것은 위의 설명처럼 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단지 주님의 날로서 기념하면 가하나 그것을 다른 날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안식일이나 십일조 바치는 것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무조건 내게 속한 것이니 모두 내 것이라는 자아중심 일변도의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 또는 해방되어,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가르치실 진리 즉 우리의 전부, 우리 존재 자체가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것임(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이니, 이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을 부분적으로나마 미리 일깨우는 한가지 방편으로 그렇게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이 되어 있다. 7일 중의 하루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7일의 7일, 일년 365일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고 내 것은 없는 것이다. 나의 소유의 1/10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100프로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게 주신 선물로서 주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전히 9/10는 내 것이다 또는 7일 중 6일만은 내 것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 진리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이가 없고 죽는 이도 없다"(롬 14:7)가 된다. 이 언급에 다 함축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고 아주 못 박아 버리지 않았는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내 것이 어디 있으며 나의 9/10가 어디 있고 나의 6일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런 것을 미련스럽게 아직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1/10, 하나님의 안식일(7일 중의 1일) 등을 고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루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다. 안식일로 치면 하루만 아니라 7일 모두가 안식일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날이지 내 일을 하는 날은 더 다시는 존재하지를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나의 영과 육체가 다 주님의 것이다.


혹자 이를 두고 "그렇다면 내 것과 하나님의 것과의 경계가 불분명해지지 않는가. 주님의 날(이전의 안식일 개념)도 지킬 것 없고 십일조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 것이 대관절 어디 있는가? 아직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을 믿지 않고 어떻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논하는가?" 하는 반문이 그 답변이 될 것이다.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다. 즉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주님을 위하고 섬기는 차원이 아니면 나는 한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새 피조물"됨이다. 나를 위하는 몫은 주님 친히 담당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게 영원한 선물로서 성령을 주신 의미이다. 곧 그리스도 자신께서 내게 영원한 선물이 되어 계시고 생명이 되어 계심이다.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적인 소유 즉 하나님 주신 개인적인 선물로 모시고 있음이다.


이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생명과 사랑의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나를 위하심은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갈 2:20) 사실로써 충분히 입증되어 더 이상 증거를 요하지 않는다. 창조(새 창조)의 차원에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나를 위하시는 사실은 영원무궁 변하심이 없다. 고로 이런 의미에서도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에 걸쳐 또는 두 의미가 동시에 두루 겹쳐지는 "사흘 밤 사흘 낮"에 의한 그리스도의 수요일 수난(受難)은 정확한 것이다. 왜냐면 이는 첫 창조와 새 창조의 관계 및 이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자세를 명확히 마치 그림을 그려 주듯 나타내고 있는 까닭이다. 새 창조를 떠나서는 첫 창조가 완결될 수 없고 첫 창조를 무시하고서 새 창조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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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길에


(눅 24:13) 그 날에 제자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라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눅 24: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 (우리말은 공대말, 예삿말이 구분되어 있으나 '유대'인의 언어를 비롯한 세계 거의 모든 나라 말이 이런 엄격한 구별이 되어 있지 않다-註).


(눅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이가 대답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거처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는가?".(눅 24:19) 이에 말씀하셨다. "무슨 일인가?". 그가 말했다. "'나사렛' 예수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인데 (눅 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료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 (눅 24:21) 우리는 이 분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사람이라고 바랐었다.


이뿐 아니다.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눅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했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 24:23) 시신은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알려온 것이다. (눅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이들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과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눅 24:25) 이에 말씀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아, (눅 24:26) 그리스도(메시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눅 24:28) 그들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는데 예수님은 더 가시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눅 24:29) 그들이 강권하여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유하십시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습니다" 하므로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셨다. (여기까지도 그들은 예수님이신 줄 깨닫지 못했다-註).


(눅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셔서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 (눅 24:34) 말하기를 "주님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니(요 20:19) 이 날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였다.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했다.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렸으나 역시 믿지 않았다).(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이야기는 이와 같이 마가도 취급하고 있으나 내용이 약간 다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역시 두 사람이 엠마오가 아닌 다른 촌으로 가다가 역시 같은 모양으로 주님을 뵈었을까. 누구도 이를 가부간(可否間)에 단언할 수는 없다-註).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註) (요 20:19)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음에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눅 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혼령(魂靈)으로 생각하므로 (눅 24:3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다".


(요 20:20)(눅 24: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눅 24:41) 너무 기뻐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하게 여길 때 이에 말씀하셨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눅 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 24:43) 받으셔서 그 앞에서 잡수셨다.


(눅 24:44)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한 말이 이것이다"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말씀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눅 24:49) 보라!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에 머물러라".


(요 20:2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 (요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용서하면 용서가 될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


(요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하여,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하니 '도마'가 말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요 20:26) 8일이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요 20:27)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이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말했다.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요 20: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이 사실에 대하여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註).((막 16: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나신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었다).


(요 20:30) 예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기적도 제자들 앞에서 많이 행하셨으나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여러분들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요 21:1) 그 후에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다. (요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다가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므로 나머지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밤이 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요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므로 (요 21: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Children),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요 21:6)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하시므로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다.


(요 21:7)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다. (요 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50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어 왔다. (요 21: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다.


(요 21: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므로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 찬 큰 고기가 153 마리였다.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요 21:1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와서 아침(朝飯)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이가 없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3) 예수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다. (요 21:14)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요 21:15) 그들이 아침밥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그러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 21:16) 또 두번째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그러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에 말씀하셨다. "내 양을 치라".


(요 21:17) 세 번째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말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릴 것이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이가 누구입니까?" 하고 묻던 이였다.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여쭙기를,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 21:2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요 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퍼져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다. (요 21:24)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요한 복음서를 쓰고 있는 요한-註)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진실인 줄 안다.


하늘로 올려지시니


(마 28: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마 28:17) 예수님을 뵙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마 28:18)(막 16:15) 예수님께서 나아와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새 혀(언어)로 말하며"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斷罪)될 것이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기적)이 따를 것이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혀(언어)로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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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註-위에서(막 16:17) 우리말 번역은 "새 방언을 말하며"("to speak with new tongues")로 되어 있으나, '방언'이라 하면 한 지역 또는 계층(階層)에 한해서 행해지는 언어의 체계나 지방 사투리를 의미한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방언"이라 하면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 말씨를 뜻한다. 영역으로 "tongue"은 문자 그대로 혀를 말하지만 단수 또는 복수 취급이 되어 있을 때는(성경에서처럼) 그 혀를 굴리어 나타낸 "말"인 것이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특수 용어와 같은 인상을 주는 우리말 번역 "방언"(올바르지도 않은 의역)은 버리고 제대로 직역하는 쪽을 택해 "새 혀(new tongues)"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이 지적한 것 역시 "방언"이라 하지 않고 "이방언(異邦言)이라고 함으로써 뜻을 분명히 했다. 즉 외국 언어(바울 당시 현지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기준할 때)인 것이다. 국어 사전에도 나오는 바, "신약 시대에 성령을 받은 신자가 하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라는 정의(定義)는  당치도 않은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혀(new tongues)"는 새 언어, 새 말이란 뜻이다. 오늘날 이상한 풍조가 잠입하여 성행하는 소위 "방언 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마귀는 마지막 때 마지막 발악으로 교회 내의 혼돈을 시도하여 이 "새 방언"이라는 "새롭다"라는 의미를 악용함으로써 성경적인 "이방언"이 아닌 악령을 받게 하는 속임수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바울이 말한 이방언(異邦言: 우리말 번역은 "방언")과도 차이가 있다.


거기서는 이 "새 방언"이란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전혀 없다. 그냥 "tongues" 즉 "언어" 또는 "방언"이다. 이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사도들을 비롯하여 그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들을 하기 시작하는데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하는 각국 말을 구사했으므로 여기서 유래된다. 당시 주변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다가 제각기 자기 고장의 말을 듣게 되자 신기하게 여겨 "새 술에 취했다"고 분별도 없이 조롱했던 것이다.



오순절은 맥추절 곧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출 23:16) 날로도 불려지는 만큼, 유월절로부터 시작하여 50일째 되는 날 즉 승천하신 지 10일만으로(행 1:3) 따라서 이 날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수고에 의해 결실된 것을 추수하는 일을 교회와 더불어 주님 친히 참예하시는 의미를 지닌다(벧전 1:12). 따라서 7주(週)를 다시 7번을 채운 첫 날이므로, 창조는 모두 끝나고 오직 그 모든 수고가 종료된 이후의 결실에 뛰어드는 새로운 국면의 작업이 시작되었음을 이 날은 상징하고, 바로 이 날에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임하여 오시는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새 언어" 혹은 "새 혀"라는 것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마 10:20/눅 12:12/21"15)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전도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강조하심이다. 물론 그렇게 외국에 나가 전도를 하다보면 외국어를 유창하게 쓰지 못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그 나라 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말하는 자의 자기 의지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이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겠다는 의지야 물론 불가결이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표현력 또는 그 방식을 두고 하는 얘기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임하여 오신 후 제자들이 "이방언"을 한 것과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말한 그런 "이방언"들 즉 당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같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행 2:4)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함이 핵심이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모든 나라 각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함을 이 때 명확히 나타내신 것이다.


주님께 대하여 '세례 요한'이 말한 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의 "불"이란 표현을 역시 악용하여 악령을 성령으로 착각하여 받게 하는 혼란스러움과 맥을 같이 한다. 이 "불"이란 것은 반드시 그 다음에 오는 대목 즉 "꺼지지 않는 불"과 연관되어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임에도, 이렇게 이 세상 신(神) 사단은 "말씀의 혼잡"(고후 2:17)을 꾀하여 유도하고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 혀를 통하여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것이야 "표적"이 되고도 남지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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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50)(막 16:1..9) 주(主)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셔서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들려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눅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때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셔서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입증하셨다. 아멘. (요 21:25)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


'누가'의 추가 증언一사도행전


(행 1:3)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셔서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셔서  그들에게 분부하여 말씀하시기를,"'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셨다.


(행 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 여쭙기를, "주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니 (행 1:7) 말씀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8) 오직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하셨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서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였다.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의 곁에 서서 (행 1:11)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시는 이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하였다.


(행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었다. (행 1: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사람(Zelotes)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행 1:14) 여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행 1:15) 모인 군중들의 수가 한 120 명이 되었다.


'바울'의 추가 증언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메시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12 제자에게와 (가룟 '유다'로 인한 결원(缺員)을 '맛디아'가 채우게 되는데 '맛디아' 등 다른 여러 형제들이 11 사도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나타나신 사실을 말함-즉 다음 구절에서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다는 사실과 같다)(고전 15:6)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


현재 부활해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영으로써가 아니라 친히 몸으로-비록 그 영광의 광채 때문에 빛 외에는 주님의 형상을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유일하게 나타나신 예가 바울의 경우이므로 아래 그 내용을 수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註). (행 9:3) '바울'(당시는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가는데 (행 26:13) 때가 (행 22:6) 오정쯤 되어 길에서 보니 홀연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큰 빛이 그와 그 동행들을 둘러 비추므로 (행 26:14) 일행이 다 땅에 엎드러져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다" 하셨다.


(행 26:15) '바울'이 대답하기를, "주님, 누구이십니까?". (행 9:4)(행 9:5)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행 22:8) '나사렛' 예수다" 하셨다. (행 22:9)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바울'더러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해 말을 못하고 섰었다).


(행 22:10) '바울'이 말하기를, "주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주님,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으니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행 26:16) 네 발로 서라.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행 9:6) 네가 하기로 작정된 모든 일을 거기서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종一심부름꾼)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행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용서 받고 나를 믿어 거룩케 된 사람들 가운데 있어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상속 받도록 하게 할 것이다" 하셨다.


(행 9:8) 바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행 22:11) 그 빛의 광채를 인해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행 9: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행 9:10) 그 때에 '다메섹'에 (행 22:12) 율법(모세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는데 주님께서 환상 중에 불러 말씀하시기를, "'아나니아'야" 하시므로, 대답하기를,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니 (행 9:11)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 직가(直街-"straight street")라 하는 거리로 가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2) 그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 하시므로, (행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기를, "주님, 이 사람에 대하여 제가 여러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聖徒)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사람이라 합니다. (행 9:14) 여기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 받고 있습니다" 하니, (행 9:15)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될지 내가 그에게 나타낼 것이다" 하셨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 '바울'에게 안수하며 (행 22:13) 곁에 서서 말하기를, "형제 '사울'아, 주님 곧 그대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어 그대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니 (행 9:18) 즉시 '사울'('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즉시 그를 쳐다보게 되므로 (행 22:14) 그가 또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그대를 택하여 그대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義人-그리스도를 지칭)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 22:15) 그대가 그대의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위해 증인이 될 것이다.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는가? 일어나 주님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그대의 죄를 씻으라" 하였다. (이에 '사울'이)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9) 음식을 먹으니 강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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