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정체(초자연계 존재)/아담·에덴의 초자연계 속성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야 했던 사랑의 사연

Tayseek Kwon 2019. 4. 20. 08:37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야 했던 사랑의 사연





윤호진 박사의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

에 대한 필자의 답변입니다 

에서 발췌





예수님께서 "내가 내 목숨을 <스스로> 버린다"(요 10:17,18) 하신 것은 순수히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아시다시피 자유 의지가 핵심이다. 강제, 간섭을 일절 배제, 배격하는 것이 "사랑"이다.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자진자발성이다. 이 사랑의 세계에서는 강제, 간섭이란 것이 일절 통하지 않는다. 인간을 다루시는 창조주의 모든 일에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도 해당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그런데 이 자유 의지를 선용하지 않고 악용하는 일부 피조물이 생겨났다. 그 중 선두에 서 있던 자가 아담의 살해자인 사탄(그래서 "인간의 원수"라는 뜻의 그의 별칭)이다. 


아담은 하극상의 이 아랫것의 말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고 따른 결과가 되어 그 부산물로 이 사탄의 예하/隸下에 들어가게(만물의 머리가 되시는 창조주의 경고 말씀보다 수하/手下인 자의 거짓말을 오히려 따르고 복종하는 셈이 되었으니까) 되고 오늘날까지 사탄이 아담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이 세상 지배자(왕 그리고 신/神) 노릇함으로써 철권 통치의 독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아담이 하나님의 6일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는 하나님이 대리자로 창조되었던 것).


아담 스스로 벌어들인 죄과의 결말이니까 이 상태는 그대로 고착화되니 인간(아담)에게는 말하자면 크나큰 불운이나 자기가 자초한 것이므로 감수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조주께서도 이런 사탄의 사악함을 응징할 경우 아담의 죄악도 같은 처벌 대상이기에 어느 쪽도 편드실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하나님의 엄정 잣대로는 쌍벌주의로 둘 다 처벌하시면 아담 이후 모든 인생들도 함께 멸망이니 차마 그렇게는 못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어 이 구원의 조건에 부응하는 자를 구출하신 다음에 처벌은 처벌대로 집행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조건에 부응한다는 것은 아담처럼 죄를 짓지 않을 자에 한하는 구원이란 뜻이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하여 "회개하라"는 명령이시니 구원의 선결 요건, 전제 조건이다.) 아담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 없어졌지만 아담의 죄에 휘말려 아담의 죄에 해당되지 않는 그 후대들까지 억울하게 멸망당해서는 안되기에 그래서 구출의 손을 쓰시게 됨은 당연지사. 또 유의할 것은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을 자초하기 전 막지 않으신 것은, 앞에서 지적했듯 모든 것은 사랑으로 좌우되는 것이어서 이미 아담이 자기 자유 의지로 사랑(자발성의 순종)을 버려 자기 마음대로 벋나가버린 것이므로 강제, 간섭하실 수 없기 때문. 


또 먹기만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선악(자연계 동식물의 종족 보존을 위한 선악 인식의 본능적 기능의 장치를 의미하는 것)과 나무 열매이므로 일단 먹어버린 이상 죽음(선악과 나무의 성격에 부합하게 자연계 몸이 되어버림이 인간에게는 "죽음")은 필연. 하나님께서도 한 번 정하신 이상 이 기정 사실을 번복시킨다는 것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고로 오직 남은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뿐이다. 


이 구원은 어디까지나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만 오직 가능한 것인데 그 "합법"이란 것은 짝의 원리를 따르심이니 다시 말해 죽은 아담과 대칭/對稱되는 대칭 아담이 창조주 친히 되어주시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아담의 범죄, 죽음의 과정 그대로를 답습해야만 되는 일이다. 즉 아담의 죽음의 고통 속으로 친히 들어오시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일을 그러나 감행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생각해보라, 창조주 친히 피조물이 되시어 피조물과 똑같이 되시는 것도 무엇한데 하물며 죄인의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부끄러움과 고통의 절정으로서의 죽음을 친히 당하심에서랴. 창조주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이 아니시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죄인의 죽음>이다. 그 죄인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있을 수 없다. 완전 벌거숭이 나체가 되어(죄의 응징이라는 의미에서ㅡ아랫도리를 가린 십자가 그림들은 일종의 거짓이요 사기다ㅡ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 그림으로도 표시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대중의 환시리에 공중 높이 나무에 매달리는 죽음. 감히 창조주께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최대의 광경이 그 날 갈보리 산 언덕 위 십자가 상에서 벌어진 것이다. 법질서 확립을 생명으로 하는 법 제정자, 집행자, 심판자로서의 창조주 하나님 자신께서 오직 사랑 하나로,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심에도 "사랑"의 양면성을 최대한 살리셔서 이 일을 단행하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실 아담이 되시기 위해서는 대칭 아담이 되어주시기 위해서는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필수의 과정이었기에 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당하신 것이다. 


우리 위해 대칭 아담("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심에서 이 죽으심이 최대 고비였는데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일편단심으로써 그 고비를 넘기시니 그리하여 명실상부한 대칭 아담이 되셨고 이것이 인간(아담) 승리다. (이제는 성자/聖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계시기 때문). 일단 죽으신 다음에는 부활은 필연.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살리심은 당연하시니까. 아버지의 권위와 능력으로써가 아닌 둘이 하나됨의 원리를 따르심이다. 


아버지시라고 하여 이미 죽으신 아들을 살릴 수는 절대로 없다. 그렇게 되면 죽음의 의미 자체를 말살함이 되니까. <둘의 하나되심> 때문이다. 이 말은 이 "하나되심"으로 인해 성부 하나님께서도 성자 하나님과 똑같이 죽음의 고통, 고난을 당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이실 수 없으니까. "하나"의 의미가 이러하다.


이렇게 아담의 죄값(죽음)을 치르시니까 죄의 결말을 벗어나셨으므로 남은 단계는 범죄 전 아담의 영광의 몸, 초자연계 속성의 영생하는 몸으로의 환원임은 당연 순서.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토록 쓰라린 죽음의 고통을 먼저 통과하셨던 것이다. 일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아담의 전/全 과정을 완수하신 대칭 아담으로서의 새로우신 존재 그대로 그 성령으로 내 속에 내 영혼(새 창조의 새 영혼)으로 오시니 내가 바로 대칭 아담이 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으심이 내 죽음, 그 부활이 내 부활이니까 나의 모든 죄는 용서되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의인됨이며 당연히 영생이고 바로 이것이 "구원받음"인 것이다. 


이를 두고 "아담의 양면성"이라 한다. 범죄 전 아담과 범죄 후 아담의 확연한 차이다. 에덴 동산에서 경고하셨던 "죽음"의 경고가 바로 이러한 자연계 육체로 아주 돌아가버림의 의미였던 것이다. 애초에는 아담이 자연계 육체로 창조되었으니 이는 그 때까지의 모든 자연계 존재의 최고 절정으로서의 인간 아담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었는데 형상은 그렇지만 내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 "내용"은 아담의 몸이 영생하는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어야 가능한 것. 그래서 초자연계인 에덴 동편에다 동산을 창설하신 것이다. 


이는 이 모든 일 전에 이미 초자연계(에덴)가 건재해 있었다는 증거다. 거기에다 즉 그 "동쪽"(창 2:8)에다 아담을 위한 동산을 따로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이 영계(초자연계) 곧 에덴에 대해서는 성경은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이런 <생략>은 창세기 초두에 물과 혼돈과 암흑을 기정(기존) 사실로 해버림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는 터이다. 따라서 "에덴"은 그런 생략의 두 번째다. 이렇게 생략한다는 것은 성경이 지어낸 내용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지어낸 이야기라면, 기왕 꾸며내는 이야기인즉 <생략>할 필요도 없이 그냥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되기 때문.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지혜시라 할까. 


그래서 아담의 양면성은 대칭/對稱 아담의 양면성이 되어 있으므로 그 양면성을 나타내심이 다름아닌 "세상에 다시 오심"이다. 이전에는 죄인 곧 죽은 자로서의 아담의 모습으로 오셔야 했고 이후에는 범죄 전 아담 본연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는 필연성 때문이다. 이후의 모습을 보이셨으니 이전의 모습을 함께 나타내셔야 짝을 이룬 둘이 비로소 온전한 모습이 될 것이기에 그러하다. 오셔서 아담이 그 죽음으로 못다한 역할을 하시게 되는 것이 게시록에 나오는 대로의 "천년 통치"다. 아담은 그 범죄로 죽는 바람에 한 번도 세상을 통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칭 아담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심으로써 모든 것은 정상적인 규모, 규격을 갖추어 진행된다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하심은 철두철미 완벽하시고 빈 틈이 없으시고 완전 조화 그 자체이시다. 그 후에 마지막 심판이다. 


이 심판주로서의 역할도 아담의 몫인데 죽음으로써 수행 불능이 되어버렸으나 이제 대칭 아담께서 그 역할을 하심이다. 때문에 바울 사도가 아레오바고 전도에서 이 사실을 천명하여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다"(행 17:30,31) 한 것. 심판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아담이 없어 불가능했었다. 다시 말해 모두가 죄인뿐이므로 심판 자체가 의의가 없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구원의 길이 열렸으므로 구원받은 자는 "회개한"(17:31) 결과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은즉 의인과 악인이 완연히 구별 가능해졌음이다. 따라서 "참고 선을 행한 자는 영생, 자아중심으로 불의를 행하면 심판"(롬 2:7-10)으로 철저히 갈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