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정체(초자연계 존재)/아담·에덴의 초자연계 속성

"마지막 아담" 희망의 부활의 메시지 2019년

Tayseek Kwon 2019. 4. 20. 00:29




"마지막 아담"

희망의 부활의 메시지 2019년




윤호진 박사의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

에 대한 필자의 답변입니다 

에서 발췌

https://blog.naver.com/trinia/221516402407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다시 세상에 오심)과 연계시켜 이해하면 가장 확실하다. 그리고 이 부활과 재림은 아담과 관련시켜 마땅히 이해해야 하고 아담 관련해서는 아담의 범죄 전과 후 즉 초자연계 몸으로 있을 때와 자연계 몸으로 추락했을 때를 반드시 나누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야 예수(본 고장 히브리 말로 "구세주, 구원자"의 뜻)님께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라 함은 더 이상 "아담"이 없다는 뜻이요 단 둘 즉 첫 사람 아담과 예수님이실진대 이는 대칭(짝)의 개념으로 말한 것이 분명해진다. 짝의 원리에서 짝을 이루는 둘은 본질이 같고 성질이 정반대라는데 있다. 첫 사람 아담이 그 육체를 우리에게 물려줌으로써 우리가 사람이 됨과 같이 대칭 아담께서는 그 영(성령)을 우리에게 영원한 선물(요 14:16)로 주심으로 인한 대칭 관계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 전과 후의 양면성은 대칭 아담의 부활 전과 후의 양면성으로 짝이 되어 맞추어진다.


다시 말해 단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희생 제물로 죽으신 것으로 설명하기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세상에 오셨고 또 우리 위해 죽으셨고 우리 위해 부활하셨으며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이제 아담("첫 사람 아담"과 대칭을 이루신)이 되셨으니까 첫 사람 아담의 그 육체로 말미암아 우리가 인간이 되어 있는 것처럼(불행히도 범죄 후의 아담의 육체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썩음과 죄의 온상으로서의 자아중심적 본능까지 함께 물려받아), 대칭 아담의 성령을 "선물"(행 2:38)로 받아 모셔 새 인간("새 사람")이 되어 대칭 아담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수용하게 되니 죄성/罪性처럼 되어 있는 이 "죄의 몸"(롬 6:6)을 박살내고 자아중심의 본능을 완전 무력화시켰으니 완전 자유 해방이다. 


더 이상 "오호라, 이 나의 곤고함이여" 하고 장탄식할 필요 없이 "죄와 사망의 법"이 여지없이 분쇄되고 "새 생명"(:4) 가운데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8:2) 아래 당당히 안주하게 된 것이다. 180도 변화된 삶. 그래서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게"(갈 5:25) 된 것이다. 이런 획기적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대칭 아담을 옷입고 있게 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육체로는 아담을 입고 있듯이. 


다시 말해 부활하시어 다시 살아나신 대칭 아담께서 성령으로 내 속에 계심으로써 다시 출생함으로 인한 <인간 천지개벽>이 이루어진 것.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비판자는 이런 사실을 모를뿐더러  말해도 믿지도 않기 때문에 "어떻게 이렇게 거창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인류문화와 세계역사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기독교의 기적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것이 기적이 아니라, 위에 말한 바로 이점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정직하게 토설하게 만든 것이다.


비판자여, 당신은 바로 이 부활의 기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기적이 아니다. 비판자가 말한 그 "기적"의 정체이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신 것이다. 다시 거듭 강조하거니와, 대칭 아담으로서 부활하심으로써 내가 새로 창조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엄청난 사실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구원을 말하려면 이와 같이 명백하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아담과 "마지막 아담"과의 대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