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구원론(십자가 짐·자기 부인)

바울의 로마서 강론의 초점은 "그리스도로써 얻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은혜"에 맞추어져 있어

Tayseek Kwon 2019. 4. 10. 18:26





바울의 로마서 강론의 초점은 "그리스도로써 얻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은혜"에 맞추어져 있어






"이 사람을 아시나요?"


아가서에 "이에 내가 일어나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순행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아 3:2,3) 하는 시구(詩句)가 그러하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왜 남녀 사랑의 연가(戀歌)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남녀 사랑이 무슨 신비한 것도 아니다. 중국 일원의 동양인들이 음양 화합(조화)이라고 말은 풍성히 해왔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이 존재해왔다고만 알았지 그 이치를 알지 못했다. 이치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둘 중 하나가 애초 홀로 있던 데에서 발단되어 다른 하나를 파생시킴으로 된 그 유래를 말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내듯 사람이 사람을 내지 짐승을 낼 수 없고 짐승은 짐승을 내지 사람을 못내듯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사람이라는 결과를 낸 원인은 사람일 수밖에 없으나 사람보다 더 완벽한 존재이신 것이다.


음과 양은 그러므로 사람보다 더 확실한 존재가 사람을 만드셨을 그 분명한 사실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큰 것 즉 양이 음 즉 작은 것을 낸(派生시킨) 것이다. 이러한 명약관화한 사실을 가지고 창조주를 시인하면 마치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 세상이 피조물인 것을 밝히기를 꺼린 것이니 악마 용이 처음부터 인간 세계를 완전 장악해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인 남자가 음인 여자를 내었기 때문에  즉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기 때문에 둘이 독립된 존재가 되었어도 그 원래 하나로 존재하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회귀성, 귀소성(歸巢性)이 작용함으로써 남녀 사랑이 생긴 것이 무어 그리 어렵고 복잡하다는 말인가.


고로 남녀 구별이 없어지면 이런 성향도 언제 있었냐는 듯이 깨끗이 소멸된다. 어떤 이는 천국에서 결혼하여 생산하는 일은 없어도 남녀 교접은 그대로 지속된다고 함부로 할 말 안할 말을 쏟아놓는데 성애(性愛)를 무슨 대단한 것인 양 인식하는 무식의 발로일 뿐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니 마지막 아담에게서는 그 성령으로 그 몸된 교회가 파생된 것이다. 육체로 하나된 것이 여자와 남자의 한 몸됨이요 우리는 주님과 합하여 한 영으로서의 하나다. 육체로서 하나됨이 영으로 하나됨보다 더 완벽할 리가 없다. 고로 이 자연계 몸이 느끼던 희열은 명함도 못내밀 정도로 초자연계에서의 삶의 낙은 완벽하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아 둘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육체로 계실 때 항상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곧 사람)"로 지칭하심으로써 사람이심을 역설하심과 같이 내가 상대하고 있는 대상은 "한 사람"이신 것이다. 때문에 마지막 아담으로서 나와 하나도 다르신 점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심이 드러나느냐 하면 나와 함께 사랑으로 사시는데 나 아닌 다른 이들과도 똑같이 함께 마치 그 사람과만 함께 사시는 것처럼 사신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육체로 계시는 대신 내 속에 계신다는 이 두 가지로 한정해서 생각해도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영으로 계시니까 나와 함께 하시지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점(요 1:1).


고로 항상 '한 사람'이신 사랑의 주님과 함께 기거동작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고 마음에 되새길 필요가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이기는 자'(계 2:11,26/3:5,12/21:7)의 능력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함께 사시는 마지막 아담 친히 그 권능이신 것이다. 사탄을 비롯한 모든 악령은 물론 모든 영물 위에도 군림해 계시는 분과 함께 하나됨이니 아담은 당초부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치였던 것이다.


갑과 을이 하나이면서도 갑이 을이 아니고 을이 갑이 아니다. 그러나 갑이 을이고 을이 갑이 되어 있으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어의 상보성 원리 즉 피차간 보완함으로 완벽함을 이룬다는 둘의 불가분성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대 필수적인 존재이므로 하나로 존재하고 하나로서 항상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그러나 엄연히 둘이므로 양면성과 동시성이니 즉 내가 주님을 위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나를 위하실 수가 없으니 이를 우리는 엄중하게 마음에 아로새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서도 하시고 싶어도 불가능하신 일이기에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신 것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영생할 수 없으니까 영생하는 것이 해답이요 우리 구원이라면 아담의 범죄가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궤변이 나올 만하지 않은가. 왜냐면 아담 덕분에 인간이 죄 가운데 놓이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영생하게 만드셨으니까 당연히 그런 논리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해 있던 인간이 초자연계 존재로 변천해 가는 불가피한 과정에서 생긴 일이므로 인간에게 이 불행의 책임을 전적으로 물을 수 없다는 궤변이 아니 나올 수 없음이다. 3위1체 원리에서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초자연계가 있고 초자연계가 있으니 반드시 자연계가 있다는 증명이 되는데(항상 양면으로 만물이 존재하니까) 인간이 자연계에 처음부터 있었다고 하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순리가 된다.


그러나 성경대로 애초 인간이 영생하고 있었음에도 범죄로써 시방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상황일진대 이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당연한 것이요 이를 알고 회개하여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가 명확해야 함이 우리의 구원에서 필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 위해 죽어주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죄의 대가라는 것이 엄청난 것임을 처음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내가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다시"(히 6:6)라고 했으니까.


이 세상을 사는 곳으로 착각하고 이럭저럭 살다가 덤으로 영생이나 얻어볼까 하는 사람은그 누구도 구원될 수가 없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인류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단지 구원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함이라 하신 대로 구원을 먼저 받음으로써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것. 


목적이 영생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데에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준비하신 것"이라 한 대로-고전 2:9)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신 것이라 한 것이다(마 1:21). 그러므로 구원 얻었다 하여 고대광실 좋은 집에 좋은 옷에 산해진미로 배를 채우며 범죄하기 전의 아담처럼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의 시대인즉 우리의 머리께서 나타내신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본무를 다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일을 함에 유일한 목적이 있다 하는 것이다.


편안하고 잘 살기 때문에 의를 행함이 아니라 갖은 방해와 장애를 무릅써서라도 선이 좋고 의가 좋아서 행하도록 즉 사람 구원하는 일이 너무나 보람 있고 의미 충만한 일이기에 기쁨으로 행하도록 함이요 따라서 그렇게 하는지를 동시에 시험하기 좋도록 짜여져 있는 것이 현재의 이 세상 구조인 것이다. 오늘날 갖가지 오락물 비슷한 것으로 시간 보내기 너무 좋은 것들로 꽉 차 있는 것도 이런 시험의 일환임을 알아야. 그러므로 사람 구원하는 일에 여념이 없는 구원 받은 이들은 이런 것에 물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에 조심을 기울여야 함은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 즉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라"(살전 5:10) 했으므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천국에 가서야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니, 주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당연히 일하는 것이요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심으로 그 일을 수행하시니 나는 그 고난 받음의 육체를 제공해드리어 함께 고난 받음이기에 "내 몸에 그 남은 고난을 채운다"(골 1:24) 함이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다"(빌 1:29) 함이다. 찬송가 가사를 대개 보면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함께 사는 것을 말하지 않고 내가 얻은 것만 강조하여 그것을 감사한다 하고 즐거워한다는 내용으로 그치니 구원 얻는 믿음이 실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5)이라 했지, 자기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영생의 향락을 누리게 함이라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살전 5:10)라고 했지, 우리로 하여금 천국 가게 하셨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소유로서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롬 14:8,9)이라 했지 즉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함임을 강조했지, 단순히 우리가 구원 얻어 영생함이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영생에 대한 보증이나 되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비자쯤이라도 되는 듯이 가르쳐온 것이다. 말 자체야 하자는 없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살아 주님은 나 위해서 사시니까 나는 당연히 주님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한다는 사실을 무엄하게도 생략해버리니 그 때문에 "나의 멸망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까지 논리가 비약하게 되고 그래서 위로보다 더 많이 지적한 성경의 그 숱한 경고 경계의 말씀을 온통 무더기로 완전 무시하니 어찌 자멸로 통하는 통로만 가르침이 아니냐는 것이다.


경고를 할 자리에 가서 경고하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 전부가 다 비참한 운명을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오도하는 당사자 자신을 비롯해  그런 파국을 당했겠는가! 신약성경은 신학 총론이나 개론이 아니다. 사도들의 편지들만 모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바울만이 로마서에서 체계를 갖추어 요약하여 그나마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서두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 했으니 즉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7) 자기 중심(selfishness-우리말 번역 "당을 짓는다", 흠정영역 "contentious"는 오역)이 되어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명시한 것이다(:8).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못을 박고 믿음의 주제로 옮겨 간 것이다(:13). 


의인은 하나도 없기(:10)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아닌가. 하나라도 있을 수 있다면 절대로 그런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수 없다. 그 한 사람으로 만족하실 수밖에 없음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의라 하여 혹 오해할까(오늘날처럼) 싶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그럴 수 없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 3:31)는 말을 곁들이기를 잊지 않았다. 행위로써 구원 얻지 못함은 하나님의 계명이든 모세의 율법이든(둘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림자와 실체일 뿐이지만) 행함으로 구원될 수 없는 것은 구원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엇이든 행하니까 구원 얻겠다는 자아중심의 발로일 뿐 선과 의가 좋아서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선과 의가 좋아서(생명의 길 곧 사는 방법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생명(생명의 현재 상태의 확증)이고 또한 생명에 이르는(미래 보장) 것이다. 율법은 산 자가 지키는 것이니 죽은 자는 무엇을 하고 말고도 없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먼저 산 자부터 되고 보는 일이 화급하므로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원부터 받아놓고 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즉 산 자부터 되고 나서 살리시는 일부터 먼저 하신 다음에 순종 여부를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려운 일도 복잡한 것도 없고 상식 수준의 평범한 이치다. 이 살리시는 일부터 하신 것이 우리 구원 받음인 것이다.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할 일이 아니건마는 그렇게만 일방적으로 가르쳐 왔기에 성경에 대한 무지무식이 도를 넘었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요점은 빼먹고 겉 핥기만 해온 것이다.


바울이 앞에서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고 말한 것처럼 역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함에 혹여 차질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여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것임을 명시한 것이다. 즉 선을 행함을 의당히 강조해야 하는 까닭에 혹 하나님의 구원이 미완성의 것이라도 되는가 착각할 소지가 있을 경우 이를 완전히 분쇄하기 위함이다. 그 강도는 그 길로 천국행이었음은 주님의 말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심으로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한 연후 선행할 기회도 시간도 없었다. 그러므로 모든 행함도 우리가 먼더 산 자가 된 바탕을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즉 새로 창조되었으면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만드신 것이지 선악 여부를 따져 생명(영생) 여부가 결정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이 그러했고 천사들이 그러했다. 스랍과 그룹들이 그러했다. 잘 나가다가 중간에 변한 것이다. 이 중간에 변하는 것을 미리 걸러내는 작업상 필요해서라도 사람 살리는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니, 사람 살리는 일을 하되 고난을 통해서 이루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의 의미이다. 고난을 받기 싫어서라도 자아중심이 작동되어 불순종으로 분류될 수 있는 소지와 여지를 충분히 남겨 둠이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주심(우리 위해 죽으심)이 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우리의 구원됨)을 위하여 살아나셨음"(롬 4:25)을 바울은 명백히 하고 있으니, 우리 위한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죽으심은 다시 살아나심을 위함이니 그 살아나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이를 거꾸로 알아들어 그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고 하여 "대신 죽으심, 운운" 하는 것이다.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한번 우리 위해 대신 죽으신 이상에는 이 사실이 번복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육신 가운데 살아도 이 사실은 항구 불변이니 우리의 천국 행은 변동될 수 없는 것인즉 좀 죄를 짓고 자아중심으로 살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이것이 은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럴싸해서 제멋대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서 인위적으로 교리를 덜렁 뚝딱 만들어놓고는 이것이 성경이다 하고 가르쳐 온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에 동조하다보니 그런 것도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전통적 가르침으로 굳어져 권위마저 부여되니 지금까지 도미노 식으로 일사불란하게 내려 온 것이다. 자아중심에서 오는 성경 왜곡이다. 자아중심에서는 그 신학자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나, (그 수가 수십 억이 될지언정) 차이가 없어 서로 동조하고 동감하기 때문에 그런 교리가 성행해 온 것이다. 다수가 진리가 아니고 정의가 아닌 것이다. 이 배경에는 이 세상 신으로서의 사탄의 책동과 선동이 깔려 있음이니 인간 욕심과 악령들의 부추김 또는 욕심이 만들어낸 합작인 것이다.


바울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을 역설하면서도 계속하여 앞서 지적한 대로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니, 혹 이렇게 은혜를 강조하면 죄를 지어도 이제는 무방하다고 오해나 하지 않을까 하여 다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한 것이다. 그리고 재차 이를 강조해 마지않기를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으려 함"(롬 6:6)이라고 했다.


앞서 지적한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이 우리의 구원이 됨을 좀더 부연 설명을 한다면, 그 죽으심은 다시 살아나심 즉 나와 하나되심을 목적한 것이니, 하나되심이 구원인데(애초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이 하나됨을 토대로 만물이 존속되게 하신 것과 일치하게) 이 하나됨은 먼저 우리 위해 죽으시지 않고는 즉 나의 죽음에 그리스도 친히 동참하시어 하나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아닌 부활이 우리의 구원의 요체가 됨은, 이미 죽음의 선고를 받은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그와 같이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이 완료된(대가 지불) 바탕 위에서만 새 창조의 새 생명이 가능해져 비로소 시동을 걸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 자가 되어 범죄 전 아담의 상태로 복귀되고서도 다시 범죄하면 그 구원이 원천 무효가 됨이니 왜냐면 죽음이라는 결과의 원인이 범죄인데 아무리 결과를 벗어났어도 그 원인을 다시 만들면 동일한 결과로 낙착, 환원되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진전이 없는 까닭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아니, 그리스도께서 나의 죽음에 함께 해주심은 나와 하나되시기 위함이니 이 하나됨은 당연히 죽음에도 생명에도 함께 함이라 나의 죽음에 함께 하시어 죄인으로서의 십자가 처형의 형식을 자진해 취하셨고 그렇게 죽으신 다음에는 그 하나됨을 인하여 그의 생명에 내가 동참 즉 함께 하여 비로소 내가 산 자가 됨이므로 그 죽음이 아닌 부활이 내게 구원의 직접 기반이 되는 것이다.


만약 죽음뿐만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 그렇게 죽으셨다고 해서 내가 살아날 아무 근거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악마는 이런 되지도 못한 근거를 억지로 만들어 땜질하여 붙여 놓고는, 이치로나 상식으로나 전혀 당치도 않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니까 신비하니까 우리의 이성에 맞지 않지만 사실로서 무조건 믿으면 된다" 식의 해괴한 말장난을 하면서 인생들을 이제까지 우롱해온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전파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니 이 하나님의 사랑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믿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교회 "제도"나 "기구[機構]"에 순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우 아무 하자 없이 구원이 가능했던 것이니 그만큼 구원의 도리가 사랑 하나로서 핵심을 이루어 너무나 간결 명료하기 때문이다.


그 살아나심이 내게 구원이 됨은, 이와 같이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살아나심이 나의 부활이 되기에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구원인즉 살아나셨기 때문에 내가 현재 산 자가 되어 있고 산 자와 하나되지 죽은 자와 하나되면(이미 이 과정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완료 종료된 것) 죽은 자로 남을 뿐이지 어찌 산 자가 되는가. 살아 계신 주님과 내가 현재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죽으심,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 등이 모두 내 것이 되어 있음이다.


그 중 하나라도 부분적으로 내 것으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다 차지하는 것이므로 없으면 아무 것도 없고 있으면 전부가 있음이다. 우리가 그 영광에 동참함과 동시 고난, 고통, 죽음에도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영생이라는 별개의 그 무엇을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사람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아 그 삶을 내 삶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내 것으로 하여 그와 함께 하나되어 사는 것 자체를 가리킴이니 곧 이 사실을 기반으로 영위되는 삶, 일상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살아나심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이라 한 이유이다(롬 4:25).


바울 사도는 계속하여 이상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그러므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본능적인 자아중심의 욕구)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바치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할 것이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이다. 그런즉 어찌 되는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짓겠는가. 그럴 수 없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는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가 아니면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든가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는가.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이 영생인 것이다"(롬 6:10,22).


영생은 여기서 얻어지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영생 자체이시니 그리스도를 차질 없이 내 안에 모심 즉 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든 죽든 하는 것이 그 모시는 방법인 것이며(왜냐면 내가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 역시 나를 위하시어 내게 대한 그 몫을 하시므로, 나는 내 몫을 하고), 영생을 얻었으나 즉 그리스도를 모셨으나 끝까지 모심이 핵심인 것이다. 성경은 이 "끝까지"(마 24:13/고후 1:13/히 3:6,14/6:11/계 2:26)를 강조한다.


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가리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이라 하는 것이다. 곧 "성령으로 사는 것이요 그리고 또한 성령으로 행함"(갈 5:25)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롬 8:13) 한 그대로다. 고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롬 13:8) 한 대로 의인 즉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이 본분인 것이다(고전 7:19/요일 2:3,4/계 12:17/요 15:10/14:15).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고 움직이심을 가리켜 대개 "성령"이라 제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형상으로 하시는 일이지만, 그 형상의 실체로서 아버지 친히 항상 함께 계시고 움직이시는 까닭이다. 이 관계를 일부러 설명이라도 하는 듯이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아버지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롬 8:9,11).


이러한 명확한 성령에 대한 정의는 주님 친히 하신 말씀에서도 명백하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될 것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눅 21:12,15) 하셨고,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버지의 성령이시다"(마 10:19) 하셨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다"(막 13:11) 하신 것이다.


바울은 계속하여 경고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옳다, 저들은 믿지 않음으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이는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 그대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요 15:4-6)에서 "내 안에 거하라"는 명령(계명, 율법,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을 지켜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하신  것이다.


이런 명령을 하심은 이제까지 거하시지 않은 것을 말씀하심이 아니라 주님과 나 쌍방간의 연속적인 동작을 의미하심이다. 쌍방의 동시 움직임이지만 번갈아 드는 움직임이니, 갑 다음에는 을, 을 다음에는 갑. 다시 갑이 하면 을이 하고 을이 하면 갑이 하는 그런 순서다. 그리고 내 편에서의 움직임을 순종이라 하고 계명 또는 율법 지킴이라 하는 그 차이뿐이다.


"계명 지킨다" 하면 무슨 폭약이나 건드리는 것처럼 비상처럼 인식하고 있으니 진리에서 너무나 멀어져 있었던 연유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달리 말하리요. 그런데도 성경과 상치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4:2) 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자기 합리화에만 바쁘니 이런 자아중심에 진리가 깃들 틈이 없다.


우리의 구원이 기정 사실화한 것을 가리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하신 말씀을 잘 인용하지만, 정작 이 말씀을 전달한 요한은 이를 정확히 해석하여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고 못박은 것이다. 그런즉 "새 계명"(요 13:34)을 주신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에 순종하는 바탕 위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가 적용되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니(롬 15:30). 여기에 그리스도 외에도 성령을 더 언급했다고 해서 "성령"을 대표하는 "형상"("실체"이신 아버지께 대한)으로서의 아들의 격(格)에 이의를 제기하려는가. 그러면 왜 여기 바울의 지적에 아버지께 대한 언급이 없는가. "성령의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 '아들'의 사랑을 따로 따로 다 말해야 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경우 아버지도 포함되는 의미의 사랑은 "성령"의 사랑으로 간단히 끝내는 것이 무난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의식적으로 이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말해놓고 보니 하나님의 사랑을 더 지적하고 싶어서 나온 언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