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구원론(십자가 짐·자기 부인)

이 세상은 하나님까지도 지금까지 창조의 일을 계속하시는 때라

Tayseek Kwon 2019. 4. 10. 18:08








이 세상은 하나님까지도 지금까지 창조의 일을 계속하시는 때라

고로 만물이 함께 산통(産痛)을 겪는 때인데(롬 8:22)

당신이 무엇이라고 태평세월로 한 세상 즐기려는가

그 결과는 영원히 격리되고 분리되는 것뿐



이 세상 신(神)에게 눈이 감겨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만

이 세상 살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는 것뿐.  





주기도문





법칙이란 것은, 단 한 가지가 규정되어 있고 양자 택일을 요구할 때 성립이 된다. 즉 제 3, 제 4를 용납하지 않을 때이다. 그리 되면 "틀렸다"는 판정을 받게 되고 진리로 수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하면 그것은 법칙 또는 원리가 되지 않는다. 3위1체의 원리가 만유 창조의 법칙, 만유의 유지 존속의 법칙 따라서 삶의 법칙 그러므로 당연히 인간 구원의 법칙이 되는 것은 머리와 몸 관계에서의 한 몸 체제를 이룬 주종, 대소, 인과, 선후 관계를 정확히 규정하기 때문이다. 즉 다자간 선택이 아니라 양자 택일이니 머리와 몸의 양자 관계 그 외의 일체의 관계를 불용(不容)하는 것이다. 즉 둘이 하나됨의 관계가 모든 것의 골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삶에서도 그러하니 공동체 의식이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우리 인생들의 구원도 바로 이 이치를 따라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한 몸 체제를 이룬 머리와 몸 관계에서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지 머리든 몸이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게 되면 더 이상 그 둘은 하나가 아니요 한 몸 구조일 수가 없게 된다. 이 하나됨이 최고 행복의 가치를 생성하는 것이라면 하나되지 못함의 그 반대 현상은 반드시 그 가치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에 그것이 법을 어김 즉 범법, 불법, 탈법이 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나가므로 올바름에 대치되는 올바르지 않음, 좋음에 대하여 좋지 않음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성경에 이 이치를 설명하시어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성령의 이름"으로 밝히시고 있다. 아들께서는 아들이시고 아버지가 아니시니까 아들의 이름은 고유(固有)하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 계실 때는 아들의 이름으로도 아버지의 이름으로도 통할 수 없다.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그 고유한 이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이름"이시다. 따라서 이름이 부여되었으므로 아버지나 아들처럼 한 개체와 같으신 것으로 인정되어 3인칭으로 호칭됨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둘이 하나로 존재하시고 활동하심을 가리켜 아들께서 자기 자신이라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어 그 '하나'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로 그 하나되어 계심을 "나"라고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들과 '하나'되어 계심이기 때문이다. 빛의 성질에서 파동성은 파동성이고 입자성은 입자성이다. 그 둘이 독자적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 둘이 융합되어 다른 성질로 변화됨이 없다. 그렇게 양자 대립하면서도 항상 빛으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이니 즉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이다. 그러므로 빛은 파동성이다. 옳은 말이다. 동시에 빛은 입자성이다. 그 역시 옳다. 


그러면 어느 쪽이 옳으냐, 정확히 어느 것이냐 할 때 나오는 답은, "그 두 상반되는 성질이 하나를 이루어 "빛의 이름"으로 호칭되어져 파동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입자성이라고도 말하지 못하는 별개의 제3의 존재처럼 되어 있다"가 된다. 이런 것은 신비한 것도 아니고 불가사의도 아니고 불가해한 것도 아니니 우리 일상 생활에서 익히 보고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자 여자가 정반대이지만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사는 것이다. 정반대라는 것은 처음부터 둘이 동시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먼저 남자가 난 다음에 그 남자로부터 여자가 났기 때문에 선후(先後)의 구별이 엄연한 까닭이다. 이는 인과를 말하고 대소로써 구별을 지으며 주종 관계로 존립됨을 가리킨다.


거창하게 말해서 "만유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지 쉽게 말하면 만물 만상이 모두 "짝으로 되어 있다" 하면 끝나는 의미이다. 짝이 되도록 만유가 창조되었고 따라서 그 원리를 따라 만유가 운영되며 사람 사는 것도 이 이치를 따름이다. 단지 짝이라고 해서 둘이 대등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는 다른 하나와 인과, 대소, 주종, 선후 관계에 있다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원인으로서의 창조자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 체제를 이루어 있다는 사실만 제대로 인식하면 되는 일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기에 세상이 지금까지 너무나 인색해 온 것이 사실로서, 이는 이 세상 신(神) 용(이제는 성경대로 이 "용"을 실제 존재로서 항상 우리의 대화에 약방에 감초처럼 끼워 넣을 때가 되었다)이 그동안 무신론을 써 먹기 위해 짜낸 계략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진화론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이제는 용이 그 자신 창조신으로 가장하려는 단계이므로 이런 무신론의 철의 장막을 그 자신도 서서히 못이기는 척하며 벗기려는 속셈으로 있는 터이다.


진화론의 핵심은 무신론에 있는 것이다. 생물의 환경 적응을 "진화"라고는 이름 붙이지 않는 법. 불교의 교리도 무신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자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망상이다. 머리 없이 몸뚱이만 있다는 논리이니 이것이 이제는 더 이상 진리일 수가 없다. 이제는 상식에서조차 어긋남을, 진작 알았어야 했지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무신론보다 더 쓸모없는 것이 소위 오늘날 "기독교"라는 종교이다.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이들은 그 생각을 바꾸어 실존하신다고 뒤늦게 인정하면 될 간단한 일이지만, 이런 소위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여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로마서 서두에서 사도 바울이 질책하고 있는 현대의 "유대인들"이다. 오늘의 혈통적 유대인들은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 역시 무신론자와 같아 그리스도를 인정하면 되고 성경(신약성서)을 왜곡하지는 않기 때문에 최소한 기독교 "유대인"의 범주에서는 벗어나 있다. 그런즉 지금 때는 무르익어 이르렀으니 현대 바리새인들이나 무신론 종교인들이나 모두 마지막 아담께로 나아와 영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창조의 일 곧 절대자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가 함께 일하는 때이지 안식(일을 끝낸 다음의 휴식)이 아닌 것이다. 일하기에 골몰하여 정신을 딴 데 둘 여가가 없는데 어느 틈이 있다고 이 세상 삶을 즐기려 들 것인가. 그러므로 때를 분별하라 하셨다. 세상 삶을 즐기는 자는 이 때를 분간 못함으로써 영원히 자기 운명을 망치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 오히려 미워하라"(요 12:25), "웃는 자는 화가 있다"(눅 6:25) 등의 빗발 같이 경고를 내리신 것이다.


3위1체 원리에 의해서도 확인되듯이(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차치하고라도) 반드시 그 정반대되는 상황을 맞게 되어 있음이니,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게 되면 오는 세상에서는 삶을 절대로 누리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철칙이다. 이 세상이 있으면 오는 세상이 있고, 이 세대(this generation, 용이 이 세상의 신 곧 지배자 노릇을 하는)가 있으면 반드시 오는 세대(the generation to come)가 있게 마련이라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 세계로 이루어져  있는 하늘과 땅과 대립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마지막 심판 후 전개되도록 짜여져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범죄 타락으로 야기된 결과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지혜는 전화위복되게 하신 것이다.


고로 불교를 믿어 왔든 기독교를 믿어 왔든 진화론 무신론을 "믿었든" 이제는 모두 심기 일전, 인식 전환을 하여 새 생명으로 지체없이 앞 다투어 진입할 일이다.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첫 사람 아담(한 사람을 인류 조상 즉 기원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과학자가 일치하게 인정하고 있어)을 통해 이렇게 사람의 육신(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입고 있듯이, 이제 "마지막 아담"(제3, 제4의 아담이 연속될 성질의 것이 아니고 단 한 번만의ㅡ이 역시 짝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영을 받을 때가 정히 온 것이다.


아담의 육체(자연계) 다음에 영혼이 조성될 때 하나님의 생기가 직접 주입되어 생겨난 것이기에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시라 하는 것이다. 육체는 하나님이 자기 영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것 즉 자연계 땅의 흙으로 지으신 것이므로 직접적인 창조가 아니라 간접적 창조라 할까 하여튼 차원이 다름이다. 그러므로 이제 아담의 범죄로써 초자연계 몸을 항구적으로 상실한 마당이라 처음 창조의 과정 그대로를 밟아 먼저 성령(새로운 영혼 격)을 받은 다음에 우리 몸이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는 순서이다.


이는 첫 사람 아담이 '자연계 육체'ㅡ'영혼 조성'ㅡ'에덴낙원 창설'ㅡ'초자연계 몸으로의 변환'이라는 단계를 밟아감과 똑같다. 이 과정이 마지막으로서, 이후에는 창조의 일(지금이 바로 그렇게 일하는 때이지 쉬는 즉 그 일한 보람을 누리는 때가 아닌 것)은 영원히 종결되고 영원한 안식만이 있을 따름이다. 용이 창조신으로 자기를 꾸며 인간에게 나타나 그 스스로 무신론을 걷어내고 광분, 광란하기 전에 우리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3운법칙으로 검증되는 3위1체 원리로써 이런 진화론, 무신론적 종교의 거품들을 최후로 대대적으로 걷어내려는 것이다.


용이 그런 수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이미 때는 늦다. 요란한 기적으로 한 몫 보려는 자이므로 "기적"들로써 진실을 가장(假裝)하는 증거로 삼을 것이기에 "놓쳐버린 막차"라는 것이다. 성경은 기적을 강조하지 않는다. 왜냐면 기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더 큰 기적, 또 더 큰 기적을 계속 요구하게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는 인간 이성으로 상식적 판단을 기초로 해서 알아지는 것이지 능력 과시를 통해 터득하게 되어 있지 않다. 이성적 판단은 생명의 핵심인 사랑을 낳는 것이나, 능력은 강제, 강요와 통하므로 이런 측면에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적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충격 요법으로 잠깐 쓰이는 것에 한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더 큰 기적으로써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삼겠다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은 "악한 세대일수록 기적을 요구한다" 하신 다음 "요나의 기적밖에는 더 이상 기적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답하셨다.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그래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기적이 어지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니 그 어떤 피조물도(천사도 악령도)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면 아버지께서 '둘이 하나됨'을 통하여 살리시는 유일무이의 전능자만의 일이시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 길을 지나갈 때 그 어느 민족보다 또는 전무후무하게 기적의 잔치를 맛보았으나 "그들의 다수"(고전 10:5)가 믿음에서 탈락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일이요,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기적을 나타내시어 그 권위를 나타내셔도 그 많은 사람이 다 믿음에 들어왔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 즉 초자연적인 현상을 능사로 삼지 말 것이다. 그럼에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경우 기적만을 되풀이해서 요구하게 되는데 용은 이를 악용이라 할까 활용하게 됨을 가리켜 성경이 다음과 같이 미리 경고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니 이는 저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살후 2:9-12).


생명의 법이 머리와 몸의 한 몸이 됨에 있고 그 외로는 이상적으로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진대 이 한 몸 관계에서 서로 상대를 위하지 않는 그 무엇이든 생명과 반대되는 것인즉 악이요 불의, 불법일 수밖에 없는 것. 즉 생명의 법을 어기는 것이어서 죽음이고 멸망인 것이다. 멸망이라고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한 번 창조하셨으니 창조하신 그대로 존속되는 것이니 단지 탈바꿈을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사람도 "새 사람"이다. 생명도 "새 생명" 그래서 "새 창조"다. 고로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는다는 것뿐이지 '옷'은 그대로다.


사탄(인류의 적대자 곧 용)의 거짓말의 특징은 모든 지식이 있는지라 99가지 진실을 말하고 나머지 핵심되는 부분 한 가지만 진실이 아닌 것으로 진실처럼 꾸미는 재주에 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진실 그대로요 거짓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눈 여겨 정신 바짝 차려 따지고 보면 그 음험한 구석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판단에는 기준 즉 잣대가 있어야 그 자로써 짧고 긴 것을 판단할 수 있으니 그 잣대가 성경이다. 성령의 역사는 기록된 말씀 밖의 것으로 나타내시는 법이 없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부지런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는 것이다. "다 아는 내용인 걸" 하는 순간 그는 교만에 사로잡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바울 같이 믿음에 풍성하고 사랑이 넘치는 인물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런 바울도 교만할 수 있다고 판단하셨기에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 아닌가. 이 혼탁하기 짝이 없는 때에 하나님은 그 79세 북한 교회 "감독(이는 성경적 명칭-행 20:28/벧전 2:25-이니 "보살피는 이"란 뜻으로 목자와 같은 의미다)"이 이끄는 65명의 교회로써 진리의 본 또는 기준을 보여 주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시하여 주신 것이다. 고난을 통하지 않으면 인생들이 구원되지 못한다. 이 모두 '둘이 하나됨'의 한 몸 체제로서의 법칙을 따름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함은 이 세상이 죽음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요 믿지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자기 입맛대로 취사 선택하여 믿는 데에서는 구원의 믿음이 있을 리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창조 후 인간을 축복하신 하나님이시나 이제는 다시 친히 말씀하시기를 "천국을 위하여 된 고자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 선언하신 것이다. 바울 사도도 자기가 성령의 뜻을 따라 말하는 것임을 시사하면서(고전 7:40) 사람이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40) 하였다. 사람이 외톨로 독신 생활하면서 무슨 낙을 누리겠는가. 고기 씹는 맛을 버리고 무슨 수로 식도락을 즐기겠는가. 이상 두 가지 욕망을 빼 버리고 무슨 재미로 이 세상 삶을 누리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평생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전 8:13) 했을 정도로 어디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