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구원론(십자가 짐·자기 부인)

로마서 7장에 대한 억지 풀이의 혼돈과 무지를 극복하는 고린도전서 7장의 핵심 교훈

Tayseek Kwon 2019. 4. 10. 10:48




로마서 7장에 대한 억지 풀이의 혼돈과 무지를 극복하는 고린도전서 7장의 핵심 교훈









장기려 박사 부부의 순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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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聖山) 장기려 박사 약력 관련 기사의 주소




"그립고 보고 싶은 당신께.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 키운 것이 아닙니다."

"택용 엄마, 어느덧 40년이 흘렀소. 6·25 참화로 가족과 생이별한 이가 어찌 나뿐이오만, 해마다 6월이 되면 뭉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이산의 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도로 눈물을 삭이곤 하오.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떠날 때 둘째 가용이만 데리고 월남한 것이 지금 내 가슴에 못이 되었소."


이 애틋한 편지의 주인공은 6·25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된 남한의 장기려 박사와 북한에 남은 부인 김봉숙이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에 살고 있던 의사 장기려는 남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여보, 당신 먼저 아이들과 출발하시오. 나는 병원과 교회에 들러 짐을 꾸려서 갈 것이니."
"그러세요. 짐 꾸리는 걸 도와 줘야 하니 가용이 네가 아버지와 함께 다녀오너라."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해주 쪽으로 가다가 중국군이 남행길을 막는 바람에 북에 남게 되었다. 이후 부부는 재혼하지 않은 채 서로를 마음속에서나마 옆에 두고 50여 년을 헤어져 살았다.

1980년대에 들어 남북 관계가 개선되자, 노부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95년 장기려 박사의 별세로 끝내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돌아가신 장기려 박사를 대신해 아들 장가용이 2000년에 어머니를 만났다.

"어제 아침 평양 보통강 호텔에서 5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헤어질 때 38세였던 어머니는 이제 얼굴에 세월의 골이 깊게 패였으나 피부는 여전히 맑고 고우셨다. 한동안 껴안고 울다 내가 어머니에게 처음 건넨 말은 '나를 기억하세요?'였다. 어머니는 목멘 작은 소리로 '이게 꿈이에요, 생시예요?'라고 존댓말로 말씀하셨다."



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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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별이 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남편이지만 내 곁에 여전히 있는 양 모든 일에 남편과 의논하듯이 하여 중대사를 결정했다고 하는 데에서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상상한다. 그리고 에덴낙원에서 남자(아담)와 의논하지 않고 스스로 일을 결정함으로써 앙화를 자초한 여자의 '엎질러진 물'의 비극을 나의 거울로 삼는다. 내가 그와 같은 전철을 밞을 때 영락없는 범죄의 길로 들어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향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항상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서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어 그의 일을 하심을 따라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에 주님의 일을 내 마음대로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닌즉 사사건건 주님께 여쭙고 그 인도를 받들어 행하는 것이 필수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상대의 뜻대로 하여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고 마음 씀이기 때문.  


첫 사람 아담에게 짝을 지어주시려고 먼저 영계(초자연계) 즉 에덴동산의 땅("ground", 자연계에 속한 아담의 육체를 만드실 때에는 자연계인 땅의 "dust")을 소재로 하여 영물들(창세기 창조 당시의 "각종 짐승들"-창 2:19)을 만드셨으나, 아담이 그 기기괴괴한 형상을 보고(현재 사람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 다른 창조물이 이런 사람의 형상으로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니 "그룹"과 "스랍"의 형상도 사람과 사자, 독수리, 소 등의 사면으로 되어 있어) 달갑게 여기지 않고 별명 지어주듯 이름을 다 지어버리므로, 아담의 형상대로 그 똑같은 모양을 만드시자면 자연계 생물을 암수 대칭으로 만드셨듯이 아담도 그렇게 밖에는 될 수 없다 판단하시고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다. 


이제 마지막 아담의 경우 그 짝은 당연히 교회다(계 21:9/엡 5:32). 따라서 나와 하나를 이루시어 "한 영"(고전 6:17)이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각자의 영원하신 짝이시다. 남녀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아담)이 독처(독거)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먼저 지으신 것이 우리가 현재 천사라 부르는 영물이었음이 그 증거이다. 다름아니라 원래부터 짝의 개념은 생식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자연계  생물은 그러하나 초자연계 존재인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음)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님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심과 같은 모양의 사랑의 교제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자연계 존재로 전락하게 되면서 자연계 생물과 같은 그런 생식의 목적으로 변질 또는 환경 적음이 되어버린 것뿐이다. 원래 목적대로의 사랑의 교제 대신 남자가 악한 이기주의로 흘러 여자를 구박하기 시작하였고 여자는 남자 위에 올려서려는 잠재의식이 불러들인 인과 관계에 의한 저주라 할 수 있으나, 인간의 자아중심으로 인한 불화가 근본적 원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불행한 반목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자기 자신을 교회 위해 내어 주심과 같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교회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복종함과 같이 여자가 남자에게 순복할 때 풀어지는 문제다.


이렇게 질서 정연한 아름다움의 둘의 하나된 조화 일치된 삶 속에서는 "오호라, 나는 죽는 몸이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나올 까닭이 없다. 거의 모든 교회를 죽음 속에 가두고 산 자로서의 활동을 못하게 묶어 둔 '구제 불능'의 족쇄가 바로 이 로마서 7장에 대한 "억지 해석"(벧전 3:16)인 것이다. 사랑에 눈 뜨는 것이 시급하다. 사랑에 10%, 30, 60, 100% 차등을 두는 법이 없다. 사랑하면 하고 아니하면 아니하는 것뿐이다. 사랑이 아니면 미워함 둘 뿐이고 양자 택일이다.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라 하신 이분법 즉 대칭 개념이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 하신 말씀도 같은 의미다(마 6:24). 그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 외에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모두 미움의 대상일 뿐이다. 50/50이 존재하지 않는다. 0 아니면 100 전부다. 몽땅 주님게 드리지 않으면 몽땅 내 것으로 아직도 꿈쩍 없이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말 것이니, 영원한 사활이 달린 유일무이의 최대 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