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복음서"

다시 음미해 보는 LOGIA IESOU(통관/通觀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

Tayseek Kwon 2019. 4. 4. 15:45


다시 음미해 보는 LOGIA IESOU(통관/通觀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

세칭 "도마의 복음서"의 일부 발췌





Vll. 제5복음서(logia iesou)





1897년 팔레스틴 지역에서 발굴된 어떤 고문서에 따르면 내용이 4복음서와 같으나 그 중 몇 가지 특이한 다음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문서를 "logia iesou"라 이름 붙였는데 그 내용이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기에 편집자는 "제5복음서"라는 이름을 붙여보았다. 그 특별한 내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Except ye keep (your life in) the world as a fast, ye shall not find the kingdom of God, and except ye keep the (whole) week as a sabbath, ye shall not see the Father.①

I stood in the midst of the world and in the flesh was I seen of them, and I found all men drunken, and none found I athirst among them, and my soul grieveth over the sons of men, because they are blind in their heart, and see not. ②

Wherever there are two, they are not without God, and wherever there in one alone, I say, I am with him. Lift the stone, and there thou shalt find Me; cleave the wood, and I am there.③

Let not him who seeks cease until he finds, and when he finds he shall be astonished, astonished he shall reign, and having reigned he shall rest.④


①세상에서의 너희 삶을 금식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일주 전체를 안식일로 지키지 않으면 너희가 아버지를 뵙지 못할 것이다. ②내가 육체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보여져 이 세계의 중앙에 우뚝 서서 보니, 사람들이 모두 세상에 취해 있어 목말라 하는 자가 없는 것을 알았고 세상 인생들의 마음 눈이 닫혀 있어 (이를) 보지 못하고 있음이 슬프다.


③어디서든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내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어디서든 홀로 있어도 내가 그와 함께 있다. 돌 밑을 들추어 보라, 거기에 내가 있음을 알 것이다, 나무를 쪼개어 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④구하는 자는 찾을 때가지 멈추지 말 것이다. 찾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요 그 놀라움 가운데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서부터 안식하게(쉬게) 될 것이다.


해석한다면, ①평상시처럼 즐겁게 먹고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것처럼, 세상 지내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니, 평생을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이 세상이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님을 알고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것이 위험천만의 일인 줄 알아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말씀이 된다. 이는 성경에서 시종일관하여 경고하고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리고 한주간 하루만 안식일로 지키는 그런 모세 율법에 얽매인 생활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구원 받은 것일 수가 없다.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은 실체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사전(事前) 교육 차원이었다. 이는 내 것이 있고 하나님의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은 일절 없고 나 자신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가르치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즉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그런 관계가 정상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것은 피조물의 것이 된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내가 나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여 내 마음대로 하려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 죄, 악, 불법, 불의다.


이러한 생명의 기본 법질서를 어김으로써 아담이 범죄에 이르러 죽음에 이르자 모든 인간은 생명으로부터 격리되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산 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나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고후 5:15)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어 주님을 위해 사는 정상 상태로 복구되어 있다(롬 14:7-9). 그러므로 더 다시는 일주 7일 중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 나머지 6일은 나의 날로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런 것은 구원 받은 자라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요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다. 내 것은 없다. 그 대신 주님의 것이 내 것이다. 주님의 것이 내 것이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쓰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심으로써 주님의 모든 것이 내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 것이라 하여 주님 마음대로 하시지 않는다. 반드시 내가 솔선해서 주님께 나 자신을 바쳐야 그래서 주님 위해 살아야 하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강제나 간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②주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구원자로 나타나셨으나 그래서 마지막 때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발을 붙이셨으나, 모든 인생이 세상 술에 취하여 그리스도를 알아 보지 못함을 슬퍼하신 것이니, 사람마다, 세상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음이요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여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므로 이런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무용지물인 것이다.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땅 위에 서신다"는 것은 욥이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Redeemer)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in the end, at last)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도 여전히 내가 육체 가운데 있어 하나님을 뵐 것이다"(욥 19:25,26) 한 데에서 이미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야 할 때에 정확히 오셨으나 세상이 전반적으로 알아보지 못하니 비통한 일이 아니랴.


세상 사는 재미, 세상 삶의 낙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있다.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영생만 욕심 내고 세상에서 사는 것만 생각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 즉 다시는 죄 짓지 않는 것 더 정확히 말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먼저 들이키고 있는 주제넘은 모양새가 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 친히 "누구든지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요 6:45,65) 하셨다. 위 욥의 예언에서 우리말 번역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했지만 이렇게 번역한 의도는 육체가 썩어 없어졌으니까 육체 밖 즉 영혼으로써 본다는 뜻으로 그렇게 번역을 한 모양이나 영역(KJV, NIV)에서 번역한 대로 육체(자연계에 속한)가 썩어지지만 부활한 신령한 새 몸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왜냐면 구속자가 오시면 우리는 당연히 부활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③이 대목은 그리스도 친히 자기가 하나님이심을 밝히심이다. 즉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니 이 우주에 충만해 계심이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나와 함께 그리고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당연히 함께 계심이다(마 18:2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하늘에 계심은 '사람'으로서 즉 육체로서 그렇게 계신다는 뜻이요 성령으로는 이 우주에 충만하시다. 이미 이 세상에 오순절 날 성령으로 오시어 교회와 함께 계시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하심과 같다.


④두드리라, 찾으라, 구하라 하셨고 그렇게 할 때 열릴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끝까지 두드리고 찾고 구할 것을 말씀하심이다. 중도에 그만 둘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하지 않음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는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 사실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가르친 것으로만 대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까닭에, 아무 것도 새로운 것도 놀라운 것도 없어 백년 천년 가야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기가 현재 소위 "신학"의 현주소다.





세상 사랑 즉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세상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 됨으로써 제대로 사리판단을 못하는 것"으로 제대로 인식하라는 엄중 경고이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세상 지내는 것을 금식하듯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세상을 먹고 마시는 것에 비유한다면 세상을 금식한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 사형수가 자기가 사형당할 십자가 형구(刑)를 짊어지고 사형장으로 나가는 행보여야 한다는 뜻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취하신 이 세상에서의 하루하루의 자세는 십자가 죽으심으로 나아가시는 행보였던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 하십니다. 


"매일을 안식일로 삼는다"ㅡ이 역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일주 하루 즉 안식일에만 주님의 날이라 하여 거룩하게 여기고 그 날에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냐 자신과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으니 거룩한 것이며 따라서 나의 하루하루가 주님의 일을 하는 거룩한 안식일의 의미가 되어 있음이 바로 우리의 구원받은 의미입니다. 거룩하라고 명령하심은(롬 6:19/12:1/고전 7:34/고후 7:1/살전 4:3/히 12:14/벧전 1:15)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상태를(행 20:32/고전 1:2,30/6:11/히 10:10) 스스로 끝까지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거저 주심으로 내가 받은 은혜이나(우리가 은혜로 선물로서 구원을 받는 것) 한 번 받은 구원은 우리 자신이 지켜야 즉 "이루는"(빌 2:12/딤전 4:16) 단계가 필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면 사랑은 내가 받으면 반드시 나도 사랑하게 되어 있는 양면성이요 동시성이요 쌍방향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사랑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짝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마 10:33). 


그러므로 어떻게 이루느냐, 방법이 분명합니다.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삶으로써 이룹니다. 내 구원을 이룬다고 나의 구원을 의식함 즉 내 구원을 잃지 않으려고 유지하려는 등등의 생각은 절대 금물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은 이제는 영구히 주님의 몫입니다. 내가 할 나의 몫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위해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힘쓰는 것을 나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니(요 4:34) 이렇게 하도록 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22) 하신 것입니다. 


비신자처럼 세상 살고자 돈을 사랑하고 그래서 세상 염려, 세상 쾌락(이 쾌락은 세상에서 말하는 방탕과 방종을 말함이 아니라 세상 사는 재미, 욕구 등), 부자되어 사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 등을 주님께서 열매 없는 짓으로 그래서 멸망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가르치시고 엄중 경계하셨음에도(마 13:22), 이 말씀을 무시하고 "육신대로 살아도 죽지"(롬 8:13) 않는다는(에덴 당시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한 사탄의 여전한 속임수에 넘어가) 않는다, 멸망하지 않는다는 미신에 빠져 멸망 길을 재촉하는 것이 오늘날 "믿어 구원받았다"는 거의 모두의 실상입니다. 


때문에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고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자기 부인 없는 자아중심의 그릇된 생활 자세와 더불어 끊임없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각성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승하기 위해 달려가는 경주자는 오직 그 우승이라는 일념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 자세가 구원받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라고 경계했습니다. 세상 일에도 어떤 목표에 뜻을 두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일에 철저히 절제하며 금욕생활을 하다시피 하는데 꼭 그와 같다고 어김없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9:25).


오늘날 교회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태평이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 위해 내어주셨는데 비록 연약해서 불의한 짓을 저질렀다기로서니 설마 멸망시키시랴" 하는 조로 인식하도록 잘못 가르쳐, 생명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독극물을 마시게 하는 종교를 선전하기를 서슴지 않아 왔는데 이제는 환골탈퇴 말씀(성경의 올바른 이해)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더 다시는 마귀의 주구 노릇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