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P pix(DPA pix)/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인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상 신 사탄과의 전쟁의 역사(창 3:15/계 20:9)

Tayseek Kwon 2019. 4. 1. 19:00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인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상 신 사탄과의 전쟁의 역사(창 3:15/계 20:9)

지금은 그 전쟁이 한창인 때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다"(살전 2:18)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한다"(히 13:19)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바울 사도를 사단이 감히 막다니!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이 빈둥거리고 노는 것도 아니고 불철주야로 인생 구원을 방해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자입니다. 포효하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히브리서가 바울 사도의 글이라는 직접적 증거가 없다고 하여 바울 사도의 서신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 정도의 깊이 그리고 글 쓰는 솜씨로 보아 저자로는 바울밖에 없고 그 내용이 바울 사도가 기타 서신에서 드러내고 있는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므로 바울의 편지라 보아도 하자는 없습니다.


위의 두 대목을 맞추어볼 때 사단이 계속 막으니 기도를 통하여 이를 물리칠 수 있다 함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사단의 방해 작전은 계속하고 끝도 없이 이어져 교회에 해를 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우리의 무기 중 하나는 기도입니다. 이 복음 전파 사업은 여러분의 기도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정도나마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순수하게 북한 교회 형제들의 피 값으로 치러지는 기도의 결과입니다. 그 기도가 아니라면 이 정도라도 세상에 말씀이 전파될 수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모든 것이 되어진다고 생각했다면 교회에 기도를 부탁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우리 위해 손을 쓰시려고 해도 우리 스스로가 기도하지 않으면 동시성, 양면성에서 움직이실 수가 없음을 다음 말씀으로 명백히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ㅡ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 것이다"(겔 36:36,37). 이것은 "둘이 하나됨"의 양자 관계에서 일방적인 것은 없음이니 즉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일방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무조건 베푸시는 이시니까 무엇이 아쉬운 데가 있으시기에 우리로부터 무엇을 바라시겠느냐 하겠지만, 삶의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관계에서 우리는 마땅히 머리를 위하는 위치에 있는 이상, 하나님을 위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본질인 바 즉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든 하셔서 응답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즉 영광 받으시도록 구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관계가 둘의 하나됨입니다.


우리는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모두를 위하는 데에서 즉 우리의 상대를 위하는 데에서 모든 정의가 구현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함으로써 받기만 하려는 자세에서는 일절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근거에서 그렇습니다. 이 진리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를 너희에게 나타내리라"(요 14:21) 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4) 하셨으니 내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주님도 내 안에 계속 거하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내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삶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대로 하시는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배울 것도 없이 우리 본성 즉 양심이 이를 가르칩니다. 즉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위함에서 상대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함께 생각한다면 그것은 말과는 달리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에서 그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뿐이니 말하자면 상대를 이용해 먹는 것뿐입니다. 사랑에는 법이 있습니다. 삶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좋아하니까 베푼다는 뜻이 성경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자기를 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로 그 법입니다. 


이 법을 어김으로써 아담은 죽음을 자초했고 사탄을 위시한 영물들은 멸망을 스스로 벌어들인 것입니다. 거룩한 천사 군단이 하나님의 일을 위한 물 샐 틈 없는 방어와 대처로 임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므로, 우리가 할 일을 하지 않는 데에서 천사들이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기도와 말씀 전파입니다. 그러한 배경에서야 천사들의 막강한 배후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3운법칙, 3위1체의 원리, DPApix, 3환법칙을 통한 이 "마지막 때"의 복음 사업을 위한 여러분의 기도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제1차 DPApix 사진 3점과 동영상 3점 그리고 중요한 NSO 동영상들 및 해설 그림판들을 뜻밖의 스마트폰 고장으로 인해 현재 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2차 DPApix 비디오 10점은 간직하고는 있으나 그 사진 설명 그림판 1~280은 몇 달을 걸려 힘들여 작성한 것인데, 부주의로 삭제를 해버렸기 때문에 복구가 불가능하다 합니다. 두 번째로 당하고 있습니다. 




초자연계의 실존을 주지시키려 노력하는 이유




애초 창조하시던 대로의 정상적 인간 삶의 원리인 한 몸 체제로서 전개되는 초자연계 몸의 초자연계 이상향인 천국("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로 성경은 처음부터 명시해 왔다)에서는 머리를 비롯해 나를 상대하는 모든 이웃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몸 구조에서는 다 하나로서 너와 나의 구별이 없기 때문. 손, 발, 머리, 다리 모두가 제각기 다르면서도 한 몸으로 결집되어 있음이다. 눈, 코, 입 등의 너와 내가 결코 같지는 않지만 하나, 한 몸으로서 기능하는 까닭에 그러하다.


머리로서의 마지막 아담께서는 바로 그 증거(모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로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바치셨으니(갈 2:20) 곧 나를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이다. 우리를 위한 죽으심이나 하나님이시므로 또 동시에 사람이시므로 '우리'와 '나'에 똑같이 통하시는 유일한 사람이신 것. 사람은 육체가 하나뿐이라 사람을 사랑해도 자기처럼 된 한 사람만 사랑하지 여러 사람을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여러 사람을 그와 같이 하나처럼 한 사람처럼 다시 말해 나만 사랑하시는 한 사람으로서의 관계를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각자 모두에게 두루 통하시는 의미가 되실 수 있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갈 2:20) 안에서 산다 한 것이다. 그런즉 나 자신의 삶의 확장, 확대, 극대화이다. 이웃이 천명이면 천 배의 다종다양한 삶을 살고 1억이라면 1억 배의 다종다양한 나 자신의 삶을 향유함이다.


이 자연계 몸의 외톨이 삶에 비하면 좋아서든 놀라서든 입이 벌어지고 다물지 못할 지경이다. 머리되시는 주님께서 자신을 나를 위해 바치시고 선물로서 통째로 주신 마당에(갈 2:20/요 4:10/행 2:38) 다른 내 이웃들이야 자기 자신들을 나를 위해 전용(專用)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자신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시기 때문에 나의 소유가 되시어 나와 함께 지금 계신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소유하셨으므로 나와 함께 사시는 양면성의 동시성.


전도하는 것도 알고 보면 "잃은 양" 하나라도 찾으려고 두루 헤매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손이 되고 발이 될 사람을 찾아 다니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결국 자기를 위하니까 이기주의가 아닌가 하겠으나 핵심은 항상 양면을 동시에 의식함이다. "어렵다, 어찌 동시에 생각함이 실제 가능한가" 할 것이나, 여기서도 양면성으로서의 주종, 대소, 선후, 인과 관계가 작용된다. 즉 양면성이지만 대등하지 않다는 것이니 역시 머리와 몸의 관계다.


그러므로 상대를 위함은 머리 부분이다. '인'(因)이다. '인'은 항상 '인'일 뿐이지 '과(果)'의 색채를 띠는 법이 없다. 그러나 머리 홀로가 아니니 몸이 있음으로써 머리가 비로소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인즉, <동시에> '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 이런 것이 동시 작용이다. 고로 항상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일념으로만 동기 설정이 되고 결코 남을 통해서 내가 위해진다는 그런 의식이 행동의 목표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 아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림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누군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 18) 하신 것이다. 만일 "생명을 버리심"과 "생명을 얻으심"이 대등한 것이었다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끝까지 망설이시고 두 틈바구니에서 고민하셨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의 행보를 살필 때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제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저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신 것이 전부다(마 26:39). 그 기도하시기 전에 또한 제자들에게 고민하고 슬퍼하셔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기까지 하셨다(마 26:37,38/막 14:34).


얼마나 진솔하신 심령의 피력이신가. 한 인간으로서의 죽음 앞에 임하는 얼마나 진실된 가식 없는 고백이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니 아무 거리낄 것도 없다" 하시지 않았다. 이 역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인 것이다. 그 부활하심이 지어낸 것이라면 일견 이런 잣단 내용을 삽입해 넣을 이유가 없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4복음서 저자들이 서로 약속이나 하여 짜맞추기도 하듯이 일제히 그런 모습을 그려놓은 것도 아니다. 오직 마태와 마가만 기록했을 뿐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젊은 요한도 그 대목은 무시해 버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바로 이 두 틈바구니에서 머리되는 부분을(몸이 아닌) 끝까지 붙들고 충실히 놓치지 않으시는 아들의 그 점 때문임을 친히 밝히신 그대로다. 아들의 뜻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없다면 그것은 기계이다. 내 뜻이 있지만 내 뜻을 거두고 나의 상대를 위하는 즉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내 이웃을 위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원 얻게 하는"(고전 10:24, 33ㅡ바울 사도가 여기서 거듭 강조하는 것을 보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터전이 되는 것(8:3).


이런 풍성한 삶을 코 앞에 두고, 이 세상 한 때뿐인, 내일도 보장받지 못하는, 목숨이 오늘 이 시간만일지도 모르는 자연계 삶에 코를 박고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미친 마음"(전 9:3)이 아닐 수 없다. 남이 80을 살았으니 나도 80은 살리라고 자신을 우격다짐으로 속이고 사는 궁색함이다. 식욕 다음에 성욕이란 말이 있는데 이 역시 그렇다. 왜 남녀 사이가 그런가 하면 원래 아담 홀로 존재하다가 아담의 육체(갈빗대 하나)로부터 여자가 분리됨으로써 존재하게 된 까닭이니, 3위1체 원리에서 갑, 을, 병 관계다.


애초 홀로 있던 것으로부터 다른 하나가 파생됨으로써 그 둘이 당초 하나로 존재하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귀소성(歸巢性)인 것이다. 이유가 그것뿐이다. 다른 아무 신비한 것도 불가사의한 것도 없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애초 그런 남녀간의 욕구도 있을 까닭이 없다. 천국 곧 영원한 이상향에서는 남녀 구별이 없으니 그런 동물적 욕구도 없다. 그 대신 그 근본 이치는 여전한 것이니, 왜냐면 아담은 그 육체를 여자에게 그리고 여자를 통해 그 씨들에게 물려주었지만, 우리가 모신 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육체와 상대적인 의미의 영의 근본이시기 때문.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귀소성이 그러하다면 초자연계 영역의 영의 귀소성은 더 완벽하고 더 오밀조밀하고 더 이상적일 것임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육체의 귀소성은 억지로 비교한다면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즉 지혜자 솔로몬이 결론적으로 말한 대로 이 세상 자연계 삶은 너무 헛되어 "바람을 잡는"(전 1:14) 격이니, 깨끗이 단절하고 이웃을 위해 보람찬 사람다운 일, 즉 영원 멸망으로부터 건져내는 구출작업, 구출작전을 펴는 것이 영원을 두고 후회할 것이 없고 오히려 보람찬 전생(前生, 즉 그 때 세상에 가서 추념해보는 이 세상)을 보냈다는 자부심에 겨워서도 그 행복감은 끝이 없으리라.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하지 않았는가.


참고로, 성경에 네피림(창 6:4/민 13:33)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악령들의 일부가 그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으로 사람의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남성으로 화(化)해 인간 여자의 육체와 결합하여 자식을 생산함으로써 생긴 인간 별종을 말한다. 여기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함은 하나님 친히 직접 창조하신 것을 뜻한다. 인간이나(아담만은 제외하고) 자연계 동물은 낳고 낳는 과정으로 통해 간접적 창조에 속하지만 아담이나 에덴동산의 영물들은 하나님 친히 만드신 존재들인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면 그들은 아담과는 별개인데 여자와의 어떤 관계로 그리하였던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전술한 대로 귀소성이 있어서이나 이 악령들은 성경이 밝히는 대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다" 한 그대로다. 자연계에 속한 사람의 육체의 방법대로 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 일에 사탄이 선두를 섰다(창 3:15). 곧 세상에 등장하게 될 적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자식인 것이다(:15/계 17:8). 세상에서 말하는 환생, 전생이란 것은 이런 네피림의 장난인 것이다.


사탄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인생들을 보다 효과 있게 속이고 시험하고 장악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사탄이 이 짓을 감행하는 것을 따라 다른 악령들이 저지른 짓거리인데 이들은 이런 불법 행위를 인하여 마지막 심판 때까지 무저갱(bottomless pit)에 유폐되어 있는 상태다(유 1:6,7). 사탄만은 이 세상의 신(神)이요 지배자라는 점에서 유보되어 세상에서 시험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다가 그리스도 천년 통치 기간 중에야 들어가게 된다. 그 대신 그 자식이 무저갱에 들어가 있다가 이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모두 희대의 아니, 세계 제일의 성인 군자라고 칭송하게 될 것이나 실상은 인류 최대의 사기한(詐欺漢)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