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救主, saviour)시다"(딤전 4:10)
이 구절 아래 "특별히 믿는 자들"에게 그러하심을 강조했으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둘 사이를 구분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따라서 그 구분이 오직 믿고 믿지 않는 것과의 차이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대로 순종하여 살기로 작정하는 이에게는 구원의 문은 열려져 있음이 명백하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기로 작정하는지 여부를 "미리부터 아신다"(foreknowledge-롬 8:29/11:2)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하나님의 주권" 즉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다. 왜냐면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하여 미리 안다는 것은 오직 그것을 만든 제작자만이 가능한 고유의 능력인 것. 그래서 누구도 범접 못하는 하나님만의 위엄이시요 능력이다. 고로 이 "미리 아심"에 대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하는 둥 가타부타 말할 아무 근거가 없다.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선택의 자유 즉 자유 의지를 주셨기에 마지막 심판 때에 가서 악인에게 형벌을 내리실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구원되지 못하도록 미리 정해놓으시고도 악을 행했다는 책임을 물어 심판하시는 것이 되니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심판의 의미가 사라진다. 마땅히 할 일을 아니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고 그것이 마땅한 것이지 그런 자유 없이 벌을 주실 수가 없는 것. 이 점에서도 깔벵은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한 것이 드러난다.
이런 당치도 않는 해석을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맹목적으로 따랐으니 여기서도 사탄 곧 이 세상 신(神)의 전횡(專橫)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속는 자만 서럽지 그 누구 탓도 아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한 대로 된 결과다. 능히 생각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밤잠을 설치면서라도 죽도록 고민하면서 "찾고 구하고 두드릴" 기회로서 인생 역정(歷程)의 그 생애만큼이나 긴 기회를 주셨건만 나 몰라라 했기 때문이다.
오래 살면 인생 7,80이지만 그러나 이런 수명은 절대로 이 세상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세상 살고자 하는 이는 그 사는 재미에 빠져 이와 같이 영원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바로 이런 악한 자들을 걸러내기 위한 함정이요 올무요 덫이기에 그래서 이 세상이 마치 사는 곳과 같이 보이도록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악인(회개 않는 경우 악인으로 분류돼)을 걸러내는 일에 이 세상의 임금 사탄도 그 장치 중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물론 그 자신이야 나름대로의 꿍꿍이가 있어 이 악역을 즐기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뜻은 명백하니,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준비하신"(고전 2:9)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구원임을 성경이 명시하고 있음이다.
사랑하도록 미리부터 정하시고 만드셨다면 다시 말해 로봇(기계)처럼 되어 사랑하도록 그래서 구원되도록 하셨다면 그런 엉뚱한 말을 성경이 하겠는가. 사랑하도록 만드셨으니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행 5:32)는 것도 마찬가지 의미다. 구원은 성령을 받아 모심 즉 그리스도를 영접함을 의미하는데 순종하도록 만드신 후에,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을 하신다" 함은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인가. 그런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하나님이라 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그런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셨기 때문에 구원하셨다"고 해야 보다 정직하지 않은가. 미리 택하셨기 때문에 구원이 되어 있는데 "순종했기 때문"이라 한다면 일종의 거짓말이 된다.
이렇게 부지부식간에(깔벵의 결과적인 거짓말이 의도적인 것은 아니니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혼잡스러운 생각에 의해 생겨난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신봉하고 숭앙해 왔으니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이 모든 굴레에서 이제는 과감히 탈피할 때다. 이런 말씀의 "혼잡"(말씀 자체가 혼잡할 리는 물론 없고 인간의 억지 해석, 아니 그 배후의 악령들과 귀신들의 충동 질에 속은 결과지만-딤전 4:1/벧후 3:16)은 그 역사가 이미 오래다. 바울 사도 당시부터 진행되어 왔음은 바울 서신에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른바 "총체적 타락(total depravity)"이란 것도 그렇다. 이를 죄성(罪性)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말해 자아중심을 가리킴이다. 어쨌든 여기서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까지'라는 것이요 그 후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담이 신령한 몸 즉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는 자로 있다가 인간의 특별한 이중 구조(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로 인해 (선악과 시험에 넘어가) 이 자연계 몸으로 현재 고착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고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율법)은 신령한 몸의 초자연계 존재로서만 지키게 되어 있는 것. 이런 자연계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도 지킬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면 자연계 몸의 습성은 자연계 동식물의 종족 보존이라는 단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한 자아중심이니까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본능적 속성은 이미 자연계 존재가 되어버린 우리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인가. 아니다. 방금 설명한 대로 초자연계 존재가 됨으로써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의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차이가 부각되어 있는 것. 전자는 자아중심, 후자는 자기 부인으로 정리가 된다. 내가 아직 초자연계 몸으로 있지 않는데 어찌 그러냐 한다면,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이치를 항상 강조하는 이유다.
즉 나 혼자가 아니라 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님과 온전히 '하나로서의 둘', '둘로서의 하나'의 존재가 되어 있음이다. 나의 영원하신 짝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이미 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하셨으므로 나는 비록 목적이 있어(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육체에 수용하기 위해) 자연계 몸으로 현재 아직도 남아 있지만 기본 원 위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당당한 초자연계 존재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비결이라 할까 신비라 할까 아주 이상적인 절묘한 구조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위해 죽음을 맛보시려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계셨지만 실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셨으므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셨던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인즉 새로 창조되기 이전의 상황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다. 둘로서의 하나다. 하나로서의 둘이다. 그리스도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이다. "마지막 아담"의 뜻이요 "새 창조", "새 피조물"의 뜻이다.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곧 나를 보는 것이요 나를 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봄이다. 고로 이 둘의 하나됨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 하셨고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확언하신 것이다.
여기서도 삶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서의 '머리와 몸'의 한 몸됨의 체제가 드러난다. 전체가 한 몸으로서의 하나가 되지 않고는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그 뜻이다. 그 외의 그 어떤 방법(삶의)도 하나님의 창조에서 계획된 바가 없다. 오직 단 하나의 생명의 법칙이다. 그래서 인간(아담)이 창조되고 인간을 위해 영물들이 창조될 때 이미 하나님 친히 그 머리가 되어 계심으로써 자기 부인이 가능해졌고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 "계명", "율법" 등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자기 부인이라야 선을 행함이 가능하고(머리께서 나를 위하시므로 그 몸된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 아래) 모두가 의와 선을 행해야 모두의 행복한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이 '머리와 몸' 관계가 깨어져버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새 창조에 의해 그리고 성령을 다시금(아담의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내 영혼처럼 받아 모셔 다시 출생되는 이치를 따라 새로운 머리와 몸 관계가 형성됨으로써만 가능하게 된 것. 덮어놓고 살아진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위 설명대로의) 법을 따라 그 이치로 살아야 사는 것이니 그래야만 에덴낙원에서와 같은 죽음과 저주 등의 불행이 없는 삶이 가능한 까닭이다.
지금까지 이 진리를 몰랐을 때에는 숨을 쉬고 입에 먹고 마시는 것이 들어가니까 사는 것으로 착각해 왔는데 그렇게 잠시 살아본들 금방 가인의 살인 행위가 벌어지는 판이니 무슨 의의가 있는가. 오죽하면 3운법칙을 통해 인간의 수명을 정하시고 그 때가 오기 전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동 장치를 걸어놓으셨으랴.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10, 20대에 죽어 나가는 인생은 그 경우에 해당되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 이유는 현재로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고 장차 영원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모두가 다 이해하도록 되어 있다.
악령들은 범죄했는데 하나님과의 머리와 몸 관계가 깨어졌으니 그러면 어찌 되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운명은 멸망인 것. 생명은 모름지기 사랑이 핵심이다. 그들은 순종을 해도 "거룩한 천사"들처럼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뿐이다. 우리 역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억지로 마지못해'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증거이거나 만약 구원의 확실한 체험이 있고도 그렇다면 필연적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증거이니 당장 회개하여 돌이킬 일이다(계 2:4,5).
고로 지금 세상은 당장 발 등에 떨어진 불똥부터 끄는 것 외에 달리 긴요하거나 시급한 것이 없다는 것. 이것이 이 세상의 의미다. 최소한으로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이 이상 가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구원되었으면 다른 이들 역시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구원해내는 것이 또한 화급하다. 조금도 한가하게 놀릴 시간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진실을 외면하니까 마치 현재의 세상이 사람 사는 곳처럼 착각하게 되고 이러구러 세상이 흘러온 것이다. 계속 흘러갈 리가 없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정해진 대로 가는 것이며 이내 종말을 고할 때가 다 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 시대의 그림자적인 율법을 통해서 인생들에게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가르치려 하신 것이 바로 이 삶의 법칙인 것. 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도록 되어 있다는 것. 자연계 몸으로 타락한 결과로서의 동물적 욕구에 사로잡혀 의를 행할 수가 없었던데 대한 비명과 절규가 로마서 7장이다. 마지막 아담으로 인하여 초자연계 존재가 되고 나서야 즉 머리와 몸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서야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 체제와 구조를 따라 생명의 법(계명, 율법)을 지키는 것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이라 하지 않았던가. 몸은 마땅히 머리를 위하게 되어 있다는 바로 그 뜻이다. 머리가 몸을 위하고 머리의 지시 따라(이 한 몸의 체제에서는 하나같이 머리의 지시를 따르니까) 모든 이웃이 나를 위하니까. 지금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알아도 사랑하지 않으므로(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믿지 않으므로) 이 '머리와 몸'의 체제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교회는 다르니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롬 14:7-9). 그래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 1:22) 했으니,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자기처럼 사랑하지 않을 때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마 25:45).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이 이러한 의미의 순종이었다. 다시 말해 순종함으로써 즉 의를 행함으로써 영생 길로 나아감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의롭다 하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의로 여기심"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아브라함의 순종은 "자기 부인"의 순종이 아니었지만 그런 순종으로 간주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리스도 오신 후의 사람이었다면 반드시 자기 부인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마 8:22/엡 2:5)로서 다시 말해 애초 창조 당시의 초자연계 존재가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의 초자연계 속성의 생명의 법을 지킬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 이루신 우리 구원의 일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이 "믿음"의 속성은 아브라함 때에나 우리 때에나 동일한 것이기에 그렇게 "믿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뿐이다. 율법은 선하며 의로우며 신령하다"(롬 7:12,14) 등의 표현이 이를 가리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3위1체 원리에서의 갑과 을의 관계 형성이 이루어짐으로써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 즉 의와 선을 행함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선동을 따라 소위 신학적 논쟁을 일삼던 일체의 소요를 미련 없이 걷어치우고 백지 상태로 돌아가 오직 성경을 다시 배우며 스승으로서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할 일이다. 얄팍한 지식의 자존심을 못버려 그 때문에 영원 멸망을 자초하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스스로 만드는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이다. 깔벵의 교리는 사람을 무작정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주인 의식으로서의 사랑의 속성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천국은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는 말씀에 정면 위배되는 것이다(마 11:12/눅 16:16). 그러나 이러한 칼빈주의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에 얽매이지 않고 다시 말해 그런 시답잖은 논리로 자기의 자아중심을 합리화하려 하지 않고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경우 하나님의 은혜는 한결같고 차별하시지 않은 것이다. 언제나 핵심은 나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사랑함으로써(행 10:35)(갈 2:20) 이 사랑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순종에 있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사탄 운운" 한다 할지 모르나 실상이 그렇다. "사탄의 권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행 25:18) 나아가지 않는 한 사탄에게 매여 있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진리를 말하지 않는 한 사탄에게 속한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의 독자적인 위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의 범죄 후 지금까지 내리달아 사탄의 쇠사슬에 꼼짝없이 매여 있는 인류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욥과 같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틀림없는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인간의 자유 선택만은 아무리 이 세상 신이라도 간섭 못한다. 하나님도 간섭하시지 못하니까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것이 아닌가.
선지자 발람도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지만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타 인생들은 아브라함이나 욥과 같이 당시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으니 그들의 결말은 어찌 되는가. 욥과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나님을 찾은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일 뿐 그들만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의 속 사정은 하나님만이 아시므로 경우에 맞게 모든 일을 처리하실 것인즉 우리의 관심사나 소관사일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정공평하심과 의로우심을 알므로 그런 일에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단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고 또 해야 마땅한 것은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이 사실에 있다. 일단 허용하신 자유에 대한 간섭은 그 존재의 말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받으신다"는 사실이다(행 10:35). 이미 설명했듯이 그 "의"는 구원에 이르는 의는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셔야 되는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만 명실상부한 합리적인 온전한 의가 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받으시는" 인생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 창조되는 기회를 베푸심이니 무조건 구원은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 "행한 의"(:35)에 비중을 두심이 아니라 그런 의를 행하는 사랑(자유가 핵심)의 순종의 '의지'에 무게를 두시어 복음을 듣게 하심이다. 노아 당시에는 "순종치 않던"(벧전 3:19,20) "옥의 영들"이 이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일단 죽어서도 기회가 열린다면 그럴 바에야 애터지게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을 전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서 볼 때 믿음에 있는 사람들의 고난 받음이 필수이기에 이 세상에서 구원 받는 사람의 무리는 계속 이어져야 하고, 동시에 이와 같이 말씀을 전함으로써 고난 받는 것이 새 생명 가운데 있는 자로서는 마땅한 바로서 그 증거이기 때문에, 만일 이런 것이 없다면 구원받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의인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때이다. 징계로서의 의미의 비중이 크다(히 12:5-11/신 8:5/욥 5:17/계 3:19).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가운데에 받는 "은혜"(빌 1:29)이다.
우리가 고난 받으며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찌 일하시리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일하신 것처럼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즉 성령의 명령을 받들어(행 1:2/마 28:19)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로 이것 저것 따질 것도 없이 나 자신 구원받았으니 새 생명을 얻은 산 자로서의 당연한 열매로서 다른 이들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사업에 뛰어듦은 사랑(구원의 뿌리)의 속성상 의당히 치를 과정이요 순서인 것이다. 누가 이를 제지하리요. 막을 수 있으리요. 자연스러운 흐름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치흐르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끝으로, 하나님은 아래와 같이 미리 경고해 두신 바가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가 어디 있고 학식(學識)이 어디 있고 이 세대에 변론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오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것이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다...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으니...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이 지혜는 이 세대의 힘 있는 자들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전 1:18-2:11).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고전 3:21)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 것이다. 세상의 소위 실력자들이 하나님께는 안중에 없으시니 십자가의 도가 그 내용만 아니라 이 도를 전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이 일부러 실력자들을 배제하시고 세상의 업신여김을 받기에 좋을 만한 그릇들을 택하여 세우실 것이니 조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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