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경을 영생 얻기 위한 방편으로만 생각하면 외려 그 반대 방향으로만 직행

Tayseek Kwon 2019. 4. 10. 10:45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경을 영생 얻기 위한 방편으로만 생각하면 외려 그 반대 방향으로만 직행




죄(악)가 무엇인가. 무엇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요 선인가.

삶(생명)의 법칙대로 하지 않는 것이 죄요

그 법칙을 따르는 것이 선과 의를 행함이다.

지금 인생들이 의를 행하든 악을 행하든 그대로 살아지는 이유는

다시 말해 선과 의를 행한다고 형통하고 죄악을 행한다고 당장 멸망하지 않는 것은

3운법칙에 따라 인간의 삶이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통제를 받는 이유는 제대로의 자유 선택으로

영원한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줌에 있다.


이런 통제되는 목숨(길든 짧든)이 끝나면 

이 통제된 삶을 통해 자유 선택을 따라 각자 자기 스스로 정한 대로만

영원한 생명과 멸망으로 나누어져 전개된다. 

고로 그 때 가서는 끝도 없다. 영원히 그 상태 그대로 지속된다. 

다시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세상이 단 한 번 있는 이유다.


진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 살아 온 과거를 후회하여 제대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는

이 세상 한 번뿐이다. 지금 여기서 돌이키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

그 때문에 이 세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요

그만큼 영원 세계와 맞먹을 만큼 중차대한 것이다. 

번복되거나 전환이 없이 영원히 그대로만 나아갈 자기가 정하는 운명이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에서 심사숙고하여 부디 헛다리 짚지 않도록 하라는 뜻으로

이 세상이라는 길든 짧든 천만금 가치의 기회를 주신 것인데

마치 한 세상 살라고 정해진 목숨인 양 어떻게 하면 나만이라도 잘 살아볼까

그것만으로 꽉 찬 생각을 하니 영원에 대한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그렇게 해서 허송세월을 하니 이런 기막힌 현실이 또 있으랴. 


그러므로 '한 몸'체제의 공동체 의식을 버리고 자아중심으로 나간 탓에

이런 현재의 인간 불행이 있고 오늘날의 비극이 전개됨을 현저하게 현장 학습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경우 구제불능이란 낙인이 찍혀질 수밖에 없고

더 다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시는 것이므로 긍휼 없는 심판밖에 없다(약 2:13).

"긍휼히 여긴다"(:13)는 것은 

바로 이 공동체 의식에 의한 역지사지(남의 입장이 되어 그 처지를 생각해 주는 것)를 가리킴이다.


이 영원한 현실 외에는 정의, 불의, 잘 산다, 못산다 등 일체의 관념에 붙들려 있을 일이 아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 

때문에 당시 로마제국의 불의와 횡포를 지적하며 로마 압정의 강압적 종식을 넌지시 촉구하는 발언에 대해  

마지막 아담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눅 13:1) 

오직 이 대답만 주셨다. 

회개하여 올바른 삶 즉 공동체 의식에 의한 선과 의를 행함으로써 그 뉘우친 바를 입증하는 것

바로 이 외에 이 세상은 전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고로 이 세상은 심사숙고의 결단을 촉구한다.

이 세상에서 잘 살든 못살든 살려고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는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가.

성경은 유일하게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성경을 믿고 안다는 이들도 이 점을 분별 못하고

무조건 세상 살려는 것만 보아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의 신(神) 악령이 인간 이성을 좌우지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을 한 손 안에 넣고 주물럭거리니, 그래서 신(神)이라 한다.


이 세상에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요 12:25).

그러나 그 반대가 되어 많은 열매 맺기를 바라고 죽음으로 나가면 영생으로 보존된다(:24).

<하나님의 아들>의 이런 적나라한 경고를 무시하고서

<하나님의 아들> 덕분에 영생하고자 하는 얼빠진 생각에 갇혀 지내는 이가 거의 전부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한세상 잘 살기도 하고 영생도 얻고ㅡ

이것이 사탄이 만들어놓은 사탕발림의 감언이설이다.

에덴낙원에서 똑같은 거짓말로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지금도 자신만만하다.


하나님의 실존을 아무리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아무리 믿어도 좋다 이것이다.  

핵심 부분에 가서 하나님 말씀의 "부(否)"를 "가(可)"로 살짝 바꾸어놓으면 (사탄에게는) 만사대통이기 때문.

"먹으면 안된다"를 "먹어도 된다"로 바꿔치기한 왕년의 명수가 사탄이다.   

대놓고 하는 '무신론'보다 이런 기독교인의 "세상 형통"의 교리가 더 치명적 폐해를 입혀 오고 있다.


거짓말쟁이는 처음부터 양면 아니, 다면(多面) 전술을 구사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흰 것이 아니면 검은 것이라고 '정직하게' 거짓말하는 법이 없다.

흰 것이 아닌 모든 색깔을 동원하여 검은 것을 위장한다. 

그리고는 검은 것이 아니니까 흰 것으로도 치부된다고 속인다. 


진리는 하나이니 희면 흰 것 단 하나뿐이다.

"가면" 간다는 의미일 뿐이지 "온다"는 의미가 끼일 틈이 없다. 

3위1체의 법칙은 양자간 택일만 밝힌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거짓말이 온갖 나부랭이를 다 집어넣어 복잡다기한 것으로 현혹시키는데 대한 

단순화, 간결성의 위력(偉力)이다.

이것이 '거짓'과 '진리'의 차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함과 '자기 생명을 미워함', 둘뿐이다(요 12:25).


처음부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삶이 아닌 까닭에

이런 자연계에서의 불확실성의 삶이 삶일 수가 없는 것.

당연히 폐기되어야 하는 인간 세상이나 

아담처럼 생명의 초자연계에 있으면서 인간을 시험하기보다

이왕 이 자연계 존재가 되어버린 인생들이므로 

아담에게 해당되었던 시험을 이 세상에서 시행한다는 그 의미뿐이다.


하나님의 애초 창조의 뜻과는 반대로 되어버린 이런 자연계 영역으로 굴러떨어진 인간의 삶은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아담 때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은 범죄 전의 상황이고

노아 홍수 이후의 생육, 번성을 기약하는 축복은

홍수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약속에 불과하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없다는 뜻인즉 여기서 마지막 심판은 제외된다. 


마지막 심판은 엄연히 대기하고 있다.

마지막 심판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어도 아담이 심판자가 되어 

악인들과 악령들을 상대로 행하여지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 

이 자연계에서의 '죽음의 고난'과 '삶의 환락' 가운데

양자 택일하게 함으로써 아담이 거쳤던 시험을 우리도 당하게 하심이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 세계에서는 다시는 이런 시험이 없다. 


또 하나 이 세상에서 삶의 환락을 거부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여념이 없어 삶을 즐길 시간이 사실상 없는 까닭이다. 

때문에 복음 전파가 완료되면 세상 역시 종료된다 하시지 않았는가(마 24:14).


본래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로 창조되었으므로

비록 시한부라는 굉장한 결점을 안고 있기는 하나 '삶의 쾌략'이라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다.

때문에 좁은 길과 문을 통과해야 생명이니

넓은 길, 커다란 문은 찾는 이가 많다 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으며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고 미리 경고하셨다. 

미리 경고를 하셨으면 그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다. 

왜 굳이 자기 욕심대로 기어이 살과자 고집하는가ㅡ여기서 자살 행위가 시작된다.


먹지 말라 하셨으면 생과 사가 하나님께 달렸으니 

죽든 살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되지 왜 기어이 딴 마음을 품고 반대 방향으로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기막힌 일이다. 고로 사탄의 시험은 사탄 단독으로 좌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 편에서의 동조로 이루어진다.  

사탄은 시험하는 자가 없어도 자기 스스로 악의 길로 나아간 것처럼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니 사탄이 없다 해도 그런 비뚜러진 심뽀는 조만간 불행을 자초하게 마련.


사탄의 시험으로 인하여 그 비극적 종말이 앞당겨진다는 것뿐이다. 

그러면 사탄의 시험이 애당초 필요 없지 않은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 전과 범죄 후가 다르다는 것.

범죄 전에는 인간이 영물과 동급이라 죽을 이유가 없는 초자연계 존재였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어 범죄한 후에는 오래 살아야 천 년 미만(노아 홍수 이전까지의 경우)이다.

지금은 백년도 채우지 못한다. 그러니 속결(速決) 위주로 인간의 선악이 가려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부패할 것은 서서히 진행될 것도 없다.

금시금방 썩는 것이 일 처리에 적합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오늘날 자연계에 속한 목숨이라 하여

초자연계 생명만을 취득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니,

이 죽음의 자연계 몸이 된 이유가 올바른 삶을 영위하지 않음에 있는 것인즉(인간만 아니라 영물 또한)

아담의 범죄 전이나 범죄 후인 오늘날이나 한결같은 심판의 기준은

"참고 선을 행했느냐"(롬 2:7-11)의 여부 

즉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요 5:29) 곧 "악을 행하는 자"(3:20)를 구별하여 가려냄에 있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심판을 준비함이다.


지금은 마지막 아담의 시대로서 누구든지 얼마든지 새 피조물이 되는 길이 개뱡되어 있다.

그래서 구원은 "선물"로서 "믿기만" 하면 되는 "은혜"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이렇게 빛으로 나오는 길이 열려져 있음에도 

스스로 "악을 행하여 빛을 미워하므로 빛으로 오지 않는다"(:20)는 것.

바로 이 때문에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강조되고(행 2:38) 

이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다(행 17:30/마 4:17).

다시 말해 여기서 "악을 행하는" 것은 "빛을 미워하는" 속성임을 명백히 하셨으므로

악이 좋아서 즉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요 3:19) 때문이다.


고로 이런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또는 구원 받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것"으로서 성경은 구원을 정의한다. 

그 나머지 사람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치 못한다"(고전 2:9) 하였다.

빛을 미워하여 악을 행하는 이들"이다(마 13:15).


깔벵의 주장처럼 처음부터 미리 택하심 하나로써 사람을 차별하여 구원 또는 멸망 길로 들어서게 하심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악을 행하느냐 아니면 그 반대이냐 하는 각 개인의 상황을

미리 아시고(보시고) 후자의 경우 그 믿음대로 차질없이 구원에 이르도록 사전 조처하시느라 미리 택하심이다. 


그런즉 이런 구원의 근본 취지를 바로 가려내지 않고 의미를 희석시켜 놓은 오늘날 "배도"(살후 2:3)

즉 '멸망의 도'에 따르면 악을 행하는 자 즉 빛을 미워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구원은 받는다는 사탄의 거짓말을 "복음"(구원의 희소식)이라 착각하고 선전해 온 꼴이 되어 있다.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증된(롬 5:8) 하나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자를 위해 "준비하신" 복음이 아니라

'자아중심을 여전히 회개 않는 자들을 위한 복음'으로 둔갑시킨 것이 "배도(背道-departure)"이다.


그러므로 "어서 어서 이 남은 인생 나그네 길을 마치면 영생 극락(생명의 최고 경지의 쾌락)"이라는 꿈에만 취하여

그런 생각에만 젖어 있는 사람은 도리어 멸망 길로 접어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니,

왜냐면 자아중심이기 때문이다. 늦게 전에 스스로를 성찰하여 회개할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고생 길이요 고난의 황무지이지만 그래도  단 몇 사람을 더 건지기 위해

더 시간을 들여 기도하고 더 말씀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라는 나날이라야

즉 바울이 솔직히 자기 심령을 피력한 대로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려"(고전 9:22) 해야

"복음에 참예함"(:23)이 되는 것이다. 

"복음에 참예함"이 무엇인가ㅡ"영생을 취함(딤전 :12,19)"이 아닌가.


앞서 설명한 대로 이것은 "사랑"의 발로이다.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고 선을 행함이어야 그것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율법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함"이지

이미 구원 얻어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에 정착한 사람으로서는

천하에 없는 최고도의 선행도 가능한 것이니 이를 혼동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그런 사랑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열매 없는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가 되어 찍혀 냄을 당한다는 의미가 되니 명심할 일이다(눅 13:7/요 15:2).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사랑함에서 서로 상대방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원리원칙을 지키는 가운데

생명은 영원하고 그 행복한 삶도 영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