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법칙/3운법칙

3운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 원리

Tayseek Kwon 2015. 12. 29. 21:35

만유의 법칙(萬有法則)인 3위1체 원리의 발견



훑어보시기 전에

 


* 간단 명료한 데에서 응집력과 집중성의 힘이 나타나고 복잡다기한 데에서는 제대로 나타나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은 간단명료합니다. 어린 아이라도 이해하고 믿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아래 설명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서, 그림으로 치면 초벌 그림으로 윤곽만 잡아 놓은 것입니다.


기초적인 것인데도 이와 같이 장문으로 설명해야 되나 하겠지만, 이는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알아 온 것이 얼마나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났는지를 방증합니다. 덕지덕지 끼인 엄청난 선입견, 편견 등을 하나씩 벗기자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실제적이고 전문적인 것은 각자가 모신 성령께서 각자의 제반 여건에 맞추어 친히 가르쳐 주실 것이니 성령의 계시를 앙망하는 중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으심으로써 온전한 그림을 완성해 나가십시오.


성경을 선입견과 편견의 색안경으로 읽으니 제대로 읽어지고 올바르게 이해될 리 만무합니다. 이 글은 올바른 방향만을 제시해주는 것에 그치고 세세한 것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뜻입니다. 방향을 올바로 잡아주는 역할이 간단한 듯싶어도, 너무나 오랜 세월 잘못되게 끼인 것이 덕지덕지 돌처럼 굳어져 있기에 이를 완전히 깨뜨려 제대로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설명이 불가피하다 여겨집니다.


 * 되풀이되는 내용은 중요한 대목이기에 그러하니 반복 학습법이라 여기시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기억력과 망각의 실상에 대한 어떤 독일 심리학자의 16년간 연구에 의하면 이 반복해서 기억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 배운 것을 반복 학습 없이 지나면 고작 사흘만에 잊어버리고, 6개월 후 반복해서 익혀 두면 평생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부러 이를 의식하고 한 것은 아니고 깨닫는 대로 수시로 적어 나간 것이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 인터넷은 주변에 적대자를 두지 않을 때는 편리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 신(神)이요 지배자인 이 세상 지배자(사타나) 곧 이 세상 신(神)이 사력을 다해 훼방하는 경우,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악하다" 하지 않고는 구원의 도리를 전파할 수 없는 그리스도 복음의 특성상. 항상 "세상의 미움"의 표적이 되었을 때는 문제가 다릅니다. 끊임없이 해킹을 당할 수 있고 해당 사이트는 완전히 못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 그러므로 내용이 유익하다 싶으시면 전문(全文)을 지체없이 퍼다가 자기 컴퓨터에 저장해 두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저 주신 것이니 거저 주라 하셨습니다. 혹 개인 웹사이트를 운영하신다면 출처만 밝히시고 거기에 내용을 게재하셔도 무방합니다. 단 그 글도 언제 해킹당할지 모르고 그 컴퓨터마저 저장된 모든 내용과 함께 손상될 수도 있으니 '이동식 저장소'에 별도 저장해두실 것을 권유해드립니다.


 * 성경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특별히 명령하셨습니다. 이 글만은 일절 저작권 같은 것이 없습니다.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할 일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때가 너무 절박합니다.


 * 후에 혹 비판을 하시더라도 전문(全文)을 가지고 여유를 두고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내용상 적(敵)을 많이 두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용상 반복되는 것이 너무 많아 간추릴 필요가 있어 요약되고 정리된 내용을 원하실 경우, 메모장 또는 각종 편집 프로그램을 통해  중복되는 것은 삭제하고 필요한 내용만 남기시면 되겠습니다. 복사한 것을 다시 복사해서 두 벌 정도로 확보해 두신 후 하나만을 대상으로 착실히 삭제해 나가면 나중에 잘못 삭제되었을 때 보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이 시대의 하나님 경고 중 하나는, "마지막 때에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것"(단 12:4)이라 한 대로 오늘날은 이 세상 지배자(사타나) 곧 이 세상 신(神)이 정신 못차릴 정도로 급격하게 휘몰아치는 때인즉, 야곱과 에서의 대조적인 삶으로써 우리의 경고를 삼으라는 데에 있습니다. 에서는 이런 조급한(hasty) 시대를 상징하는 삶의 유형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호감이 가는 것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입니다.


이유는 야곱은 사색의 사람이었고, 에서는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사색에는 충분한 시간과 성경, 이 둘이 필수입니다. 초고속 항공기 탑승을 버리고 억지로라도 당나귀를 타고 가는 심적(心的) 자세를 하나님 앞에서 힘써 견지해야 합니다. 이런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명도 끈기 있게 들을 수 있는 훈련이 현대인에게는 시급합니다. festina lente(hurry slowly), '결코 뒤늦지는 않게 그러나 천천히'가 오늘날에 처한 우리 모두의 지혜입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와 같이 할 것이니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고전 7:31)한 대로, 불요불급한 것은 과감히 버리고, "세월을 아끼라"(to redeem the time-골 4:5)는 경고를 받는 대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살전 5:17)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갈망함으로써 야곱의 고요하고도 여유 있는 시간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에서의 분주함과 번잡스러움을 극력 피해야 합니다.


세상 낙에 취하여 미쳐 돌아다니듯 하는 오늘날 삶의 전형이 에서입니다.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에서의 그런 낙은 몰랐지만 사색과 명상의 낙을 알아 이로써 하나님을 가까이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되는 명분이 중하고 귀함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에서의 것을 빼앗듯이 하고 아비 이삭도 속이고 했지만 그것은 나중 얍복강변에서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마음을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렘 17:10/20:12) 태어나면서부터의 장자됨과는 관계없이 에서는 버림 받고 야곱은 택함을 입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혈통으로 난 에서 대신)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해주시는 영예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과 성경 읽고 명상하는 시간을 충분히 잡아 절대로 졸속으로 읽고는 "나는 오늘 성경을 읽었다" 하고 자기를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함과 같이, 이런 장문의 글들도 비록 수없이 반복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한다는 확고한 결의 아래 시간을 들여 정독하실 것을 삼가 권고 드리는 것입니다. 에서를 유혹한바 그 누구나 부정하지 못하는 매력적인 세상 삶과 낙의 손길을 우리 역시 부인하지 못하나, 힘써 야곱의 심정으로 돌아가 그런 모든 생활상의 재미와 유익을 스스로 과감하게 버리는 태세가 완비되어 있을 필요가 오늘날 절실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명확히 밝혀진 그 두드러진 예가 바울 사도의 2년 간의 "죄수"로서의 억류 생활입니다. 예루살렘에 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로마 총독에게 신문을 받고 그 후 로마 황제 앞에 설 때까지의 2년 간, 그 바쁜 전도 활동이 중단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바울과 같은 성령 충만한 전도 활동이라도 야곱이 아닌 에서의 분주함과 '정작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함'이 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바울을 붙들어 야곱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얼마나 복음 전도가 바쁘겠습니까 마는 단 하루도 그냥 있을 수 없는 상황이건마는 바울 사도를 그 전도 활동의 제일선으로부터 그렇게 물러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바로 이러한 교훈과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은 20명 가량의 주한 선교사들이 장감 합동으로 5개월에 걸쳐 합심 기도한 열매입니다.


처음 한 달은 정오부터 시작하여 한 시간을 그렇게 기도하다가 별 성과가 없자 기도회를 그만 두자는 제의도 있었으나 그럴수록 더욱 열심을 내어 기도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정오에서부터 저녁 식사 시간에 이르기까지 계속 남아 함께 기도한 것입니다. 마침내 평양 장대재 교회의 주동 장로였던 길선주가 친구의 과부 돈을 떼어먹은 것을 일요 예배 시간 교회 앞에 고백하며 "내가 아간입니다" 한 것이 전국적인 회개 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참고로,   


미리 알아두실 것


1). 이하의 모든 글 중 "(벧전 3:18-20)"과 같은 표기가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위의 예 (벧전 3:18-20)은 성경 "베드로 전서 3장 18절에서 20절까지"라는 의미로서 그 외의 약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벧전"-베드로 전서, "벧후"-베드로 후서, "마"-마태복음, "막"-마가복음, "눅"-누가복음, "요"-요한복음, "행"-사도행전, "롬"-로마서, "고전"-고린도 전서, "고후"-고린도 후서, "갈"-갈라디아서, "엡"-에베소서, "빌"-빌립보서, "골"-골로새서, "살전"-데살로니가 전서, "살후"-데살로니가 후서, "딤전"-디모데 전서, "딤후"-디모데 후서, "딛"-디도서, "몬"-빌레몬서, "히"-히브리서, "약"-야고보서, "요일"-요한 일서, "요이"-요한 이서, "요삼"-요한 삼서. "유"-유다서, "계"-요한 계시록.


2). 이상은 모두 신약 성경이고 다음은 구약 성경입니다. "창"-창세기, "출"-출애굽기, "레"-레위기, "민"-민수기, "신"-신명기, "수"-여호수아, "사"-사사기, "삼상"-사무엘 상, "삼하"-사무엘 하, "왕상"-열왕기 상, "왕하"-열왕기 하, "대상"-역대기 상, "대하"-역대기 하, "욥"-욥기, "시"-시편, "잠"-잠언, "전"-전도서, "아"-아가, "사"-이사야서, "렘"-예레미아, "애"-예레미아 애가, "겔"-에스겔서, "단"-다니엘, "호"-호세아, "욜"-요엘, "암"-아모스, "미"-미가, "합"-하박, "습"-스바냐, "학"-학개, "슥"-스가랴, "말"-말라기.


3). 이상 성경 구절 인용 표기에서, 부분적으로 생략한 경우 그리고 중복이 될 때는 가령 "(마 8:3)"일 경우 "(8:3)"으로, "(마 7:12)" 다음에 "(7:13)"일 경우 그냥 "(:13)"으로 나타냈습니다. 인용된 성경 구절은 중요하니 직접 성경을 펴 해당 구절을 음미하시면 보다 충실한  내용 파악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가급적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해당 대목을 참조하실 것을 삼가 부탁 드립니다.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닐스 보어(Niels H. D. Bohr(1885-1962)는 1922년 노벨상을 수상한 덴마크 물리학자로서 그의 상보성 원리를 설명할 때 이 원리를 따르면 인간 사회의 바람직한 변혁을 내다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연 과학자로서 이런 주장을 편다는 것은 이례적이라 하겠으나 상보성 원리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감안한다면 당연히 할 말을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과 보어의 논쟁이 아직도 매듭 지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둘 다 무신론자인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세기적 논쟁에서 보어의 판정승으로 끝난 것을 명확히 입증한 것이 '3위1체(三位一體)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3위1체의 원리를 증명하는 것이 3운(三運)법칙(또는 '인간 생애의 법칙')이다. 3운법칙(trini homo 또는 fashomo)은 그 비상한 특이 구조 자체로써 그 확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만 아니라 3위1체 원리(the law of Trinity, trini law)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라틴어로서의 'homo'는 인간 Homo sapiens 즉 인간을 말하고, 'trini(three each)'에서 trinitas, 여기서 영어 trinity(3위1체)라는 단어가 나왔으며 'fas'는 법칙, 법의 의미가 있다.  


3위1체의 원리는 만물의 양면성(혹은 대칭성)을 단번에 밝혀 빛은 반드시 입자성과 파동성이 한데 어울려짐으로써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보어의 주장을 옳다고 최종 판정을 내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면성 혹은 대칭성 원리를 따라, 자연계가 있으면, 바로 그 대칭(대립)되는 영계가 반드시 있자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3운법칙이 3위1체의 원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3위1체의 원리가 만유의 기본 원리인 까닭에 모든 법칙과 원리의 기본 뼈대가 되어 있어, 이 인간 생애를 주관하는 법칙 역시 예외가 아니기 때문인데, 그런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 구성의 짜임새에서 드러나 있고, 그렇게 드러나 있음이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이 선명하게 도식화(圖式化)되어 있기에 특별히 이 사실을 지적하여 "3운법칙이 3위1체의 원리를 증명한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를 '만유 창조와 존립의 원리'라고도 하고 그냥 간단히 '만유의 원'(the Universal law')라고도 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여 지배하는 법칙이란 뜻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원리(법칙) 증명은 자연 과학의 영역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그런 원리들은 실험을 통해 확증되는 단계를 예외없이 밟아 왔다. 그러나 반(反)자연계 즉 영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3위1체 원리는 영계와 자연계를 아우르는 그 특성상 자연법칙의 영역 밖이다.


따라서 일반 자연법칙과는 달리 실험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니, 오직 자체 증명되는 방법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시켜주는 특성을 지닌다. 3위1체 원리와 3운법칙은 이 글을 엮어 가면서 차츰 자세한 설명이 되어질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보어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한 것은 3위1체의 원리가 나타내는 바 '둘이 하나됨'에서 그 '하나됨(융합, 통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이 3위1체 원리와 3운법칙을 알았다면 그같은 부질없는 고민은 하지 않았으리라.


이제는 이 사실이 원리로 정착된 이상 이해 여하를 불문하고 기정 사실로 자리잡고 있는 다음에야 이 기초 위에서 모든 것이 풀어 나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3위1체의 원리는 자연계와 영계를 아울러 입증하는 근본 토대다. 자연계를 형상에 비한다면 영계는 바로 그 형체의 본체에 해당된다. 영계가 자연계와는 별도로 존재하고 있으나 이  둘이 원래 하나이므로 그 진실과 현실은 숨겨질 수 없다. 요즘 과학은 소위 '초대칭성(超對稱性) 이론'이라는 것을 말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외에 그 어디엔가 우리의 초대칭 짝(super partner, super symmetry partner)을 이루어 있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겠느냐" 하고 운을 떼기 시작할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다.


'3위1체 법칙'의 이 기본원리에 의해 만물은 모두 대칭 관계로 짜여져 있음이니, "사람의 몸도 우선 겉보기로만 해도 좌우 대칭이듯 입자들 사이에도 추상적인 대칭 관계로 존재한다"는 정도까지는 과학도들도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있는' 추세다. 입자에는 반(反)입자가 있어 전자와 대칭되는 양전자의 존재를 인정하듯이, 보이는 우주(visible universe)가 있으면 보이지 않는 우주(invisible universe)가 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는 말들을 하고 있다.



이 후자에 속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영계(靈界)라 해도 좋은 것이다. 급기야는 2012년 7월 유럽입자물리 연구소(CERN)가 '힉스' 입자의 실체를 밝힌다고 하면서 "우주를 탄생시킨  것이 자연이냐, 신이냐"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까지 관심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고 그들 스스로 자평(自評)할 정도다. 지금까지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면서 신(神)에 대한 언급을 꺼려 왔던 것이나, 이와 같이 진실이 하나씩 그 베일을 벗겨가면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이상, 이 현실을 절대로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이 판정은 상보성 원리를 주장한 보어를 위해 하는 말도 아니고 보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세기적 논쟁에서 3운법칙으로 확증되어 나타난 3위1체의 원리가 당당히 판가름 지어주는 결론이다. 단 상보성 원리는 이 3위1체 원리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었을 뿐 정작 그 핵심을 말하지는 못했다. 즉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이라는 이 양자의 대립 관계가 인과(因果), 대소(大小), 주종(主從)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둘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형체만 파악했을 뿐 그 실질적인 내용까지야 알 턱이 없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 보어와의 논쟁에서 편 갈라 양분되어 있는 상태이나, 보어 지지 쪽이 약간 우세한 것은 보어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보어의 주장을 확증할 근거가 없는 터라 그 어느 쪽이건 단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지금까지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3위1체의 원리가 혜성처럼 나타나 모든 의문을 일거에 해소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 원리를 이처럼 부각시키는 동력은 다시 강조하지만 3운법칙이다. 아니 그보다도, 3운법칙이 드러내어짐으로써 3위1체의 원리가 명명백백하게 나타내 보여졌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구성의 짜임새가 바로 3위1체 원리의 도식 그대로를 그림 그리듯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3운법칙 자체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의미가 된다. 왜냐면 그 구조가 현재 나타내고 있는 현상에 대한 하나의 완벽한 줄거리(story) 또는 구상(構想)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기에, 이 외 달리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음을 자체 증명하기 때문이다.


보어가 힌트를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한 주역(周易)의 소위 음양 이원(二元)론도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관찰과 판단으로서, 그런 '대소' '주종' 관계를 어렴풋이 나타내는 정도로만 그쳤을 뿐 그 원인 규명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럴 듯한 법칙이나 원리가 발견되어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고는 과학적 사실로 그 정당성과 합리성이 인정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가닥이 잡혀진 것이다.


주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어느 글을 보니, "천지간의 음양 두 기운(氣運)을 하나의 근원적인 기운의 두 가지 움직이는 모양으로 보고 이 하나의 기운을 태극(太極)라 생각하여, 태극과 음양을 상고(上古) 의 신비적 점술(占術)과 결부시키는 데에서 주역이 성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묘하다고 할까, 3위1체 원리의 갑(a), 을(b), 병(c)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 설명대로 하면, "음양"은 갑과 을이고 태극은 병이 된다고 하겠다.



점술 자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인간사를 주관하는 요소로서 부분적으로나마 시인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되어지는 일이요 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명확하다. 따라서 주역이 그런 유사한 설명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고 이상한 일일 수가 없다. 보어의 주장대로 빛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는 물리학적 발견도 그런 '예'에 불과한 것이다. 만유가 이 3위1체의 원리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과학이 확실한 결론을 못내렸던 인과율도 이제는 그 당당한 모습을 3위1체의 원리로 인하여 비로소 그 진가(眞價)대로 그 웅장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왜곡과 오해가 불식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과학적 원리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는 것'이 성경에 계시(啓示)된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福音, 희소식, 복된 좋은 소식)이다. 근원적으로 처음부터 영계(자연계에 대한 대칭으로서의)에 관한 것을 밝히고 있는 성경이니, 당연히 이 3위1체 원리를 처음부터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도 3운법칙도 모두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창조의 산물(産物)인 이상, 만유의 기본법칙으로서의 3위1체의 원리가 성경에서 나왔고 성경만이 유일하게 이를 처음부터 말해 왔으며, 이 원리를 증명하는 3운법칙이 또한 성경에서 나타낸 인물(이제까지 전설로만 취급해 온 950년 생애의 노아를 비롯)들의 생애가 나타내는 연대(年代)에서 나온 것은, 자연법칙의 모든 원리가 창조의 결과물이기에 이는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그래서 과학적 원리가 그 진실성을 담보하는 성경의 모든 내용이라 하는 것이요 특별히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치가 그러하다 하는 것이다. 사색, 명상을 통한 논리성과 합리성을 추구하고 이기심에서 오는 모든 욕망의 폐해를 깨달아 무소유의 철학을 내세우는 지극히 상식적인 불교의 주장을 들어, 아인슈타인이 자기의 과학적 견지에서 "과학적 종교"라고 말했을진대, 양심과 상식과 만유(萬有)의 원리원칙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과학"인 것이다.


진리에는 무리(無理)와 모순이 없다. 상식적이든 양심적이든 그것이 순리(順理)요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니, 둘 다 모두 일정한 틀을 지니는 보편적 가치의 진리에 속하기에 그러하다.  아인슈타인이 "고결하다(훌륭하다)"고 그 내용만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한 성경이 이 양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바울이 공회(公會)를 주목하여 말하기를, '여러분 형제들이여, 오늘날까지 내가 매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행 23:1),


성경이 양심을 강조할 때에는 성경을 기록한 당자들만은 의식적으로 진리 아닌 것을 말하는 등 사실에 없는 지어낸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점만은 우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느 종교 경전을 보든지 그 경전을 기록한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꾸며서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경전들이 초자연적인 사건(이를 대개 "기적"으로 분류하는데)들을 수록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거짓말은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물론 그런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그 기록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듣기만 하였으나 그것을 그 자신 신뢰하였기에 그런 것들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이 경우 그 진실성 여부는 논외가 된다. 그렇게 소개했다고 해서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아무 근거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부가 직접 목도한 사람들의 증언으로만 되어 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성경(신약)이 양심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은 더 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행 24:16),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 고발 혹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롬 2:14,15) 했고,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다"(고전 8:12) 하였다.


"이 계명(commandment, 명령)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 1:5)이라고도 했고,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shipwreck)하였다"(:19) 또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 것"(3:9)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16) 등등의 말을 한 것이다. 이런 양심을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거짓말로 직접 목도한 것처럼 꾸며댈 수는 업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함은 그러한 그의 견해(학자적 양심에 의한)를 가리켜 틀렸다 함이 아니라, 만유(萬有)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의 원리가 내리는 결론을 부정하고 외면하기 때문에 이를 지적함이다. 정반대 입장을 취하는 갑(a)과 을(b)이 병(c)이라는 하나를 이루어 존재하는 까닭에 파동성(波動性)과 입자성(粒子性)을 함께 설명해야 빛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보어에 맞서 입자성만을 아인슈타인이 주장했듯이, 갑이면 갑만 보고 을을 보지 않으며 을이면 을만 외곬으로 보려는 일방적인 편향의 고집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절대로 과학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의 주장을 절대적이라 여기니 과오가 넘쳐 난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은 대개 상대적이다. 환경과 여건에 좌우되니 그래서 나약하다고 말하게 된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다. 각자 자기가 체험하고 아는 대로의 관점만을 절대적이라 고집하는 한,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두의 관점과 인식을 조화 통일시켜야 비로소 제각기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인정받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소위 '종교관'은 그가 자라나고 교육 받은 특정된 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속박의 결과물이었다. 자유가 없는 곳에는 진리가 발 붙일 수 없다(요 8:32). 아인슈타인이 말한 "종교적 경지"라는 것은 단지 우주 법칙의 위대함과 조화 및 보편성을 깨닫고 각자의 이기심, 고집, 편협성에서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학자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경이(驚異)와 양심의 신비에 경외감(敬畏感)을 나타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神)은 우주를 우연에다 팽개치지 않았다"라든가, "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악의적이지는 않다"라든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우주에 나타나 있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감성적 확신이 내가 이해하는 신"이라는 등의 그의 표현이 이런 우주의 합리성에 대한 '종교적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1632-77)가 "과학, 수학, 논리, 명상이라는 매개(媒介)를 통해 신에 도달했다"고 말했듯이, 아인슈타인의 종교는 세계가 곧 신이라는 범신론이었다.


"모든 존재들이 법칙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는 그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도 했다. 그래서 "온 우주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 원리에 감화 받는 종교가 우주적 종교"라 했고, 자신의 상대성 원리를 통해 "우주가 잉태하고 있는 조화"를 알고자 했었다. "젊은이들이 과학적 정신을 가지고 이런 우주적 종교의 신도가 되었을 때 평화로운 새 시대의 서막이 열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피노자도 아인슈타인도 인격적 신을 믿지 않았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스피노자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했고 아인슈타인은 불교를 과학적이라 하면서도 불상에다 대고 절하며 기도하고 재를 올리는 것 등을 미신과 같은 저급한 것으로 평했다. 이는 "자기가 지은 피조물을 상 주기도 하고 벌 주기도 하는 신은 싫다. 보편적인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신봉하는 이라면 세상사, 인간사를 간섭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한 순간이라도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과학은 자연 세계의 보편적 진리와 법칙에 관해서만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그 한계성이다. 3위1체 원리에서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반(反) 자연계 또는 영계(靈界)가 있는 것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영원 불변의 짝(상칭, 대칭, 대립)의 개념이 3위1체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a(甲), b(乙), c(丙)를 함께 말하고 인식해야 하는데, a 하나만 말하고 b 하나만 관찰하는데 그치고 c 하나만을 따로 분리해서 인식하니 문제가 제대로 풀릴 리가 없다. 자연계와 영계를 혼동하거나, 영계를 외면하고 자연계만을 두고 절대적인 것이라 우기니, 진리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계에 한정된 지식으로써만 자기 도취에 빠져, 자기 지식의 영역 밖인 것에 대하여는 오불관언이거나 아니면 이렇다 저렇다 섣불리 함부로 넘겨다보고 잣대를 대려 하니, 어린 아이에게 실탄이 장전된 총기를 쥐어 주는 꼴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Know thyself.)"고 한 것도 이런 자기의 분수와 한계를 인식하라는 의미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숨지기 1년 전 1954년 1월 한 철학자(Eric Gutkind)에게 보낸 독일어로 된 편지 속에서 그는, "나에게 신(神)이라는 단어는 한낱 인간의 연약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이라 했고, 성경에 대해서는 "고상하기는 하나 원시적이고 유치한 전설들을 끌어 모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아무리 그럴 듯하게 해설을 덧붙여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했다.



그는 평소 "인간의 운명이나 행위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는 인격화한 신"은 사절한다고 했었다. 그가 성경의 조물주(造物主)를 가리켜, "길고 흰 수염을 기르고 있는 신"이라 묘사한 데에서도 드러나듯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다. 안경의 색깔대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가 다녔던 카톨릭 계통의 학교에서 그런 "색안경"으로 볼 수밖에 없는 교육을 받은 것이다. 설혹 개신교라고 해도 나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유는 차츰 밝히겠지만,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으려 하지 않고 처음에는 "유명한 과학서적"(이미 12세 때부터 탐독했다고 한다)이라는 렌즈를 끼었고 그리고 "로마 카톨릭"이라는 렌즈를 끼었던 것이다. 개신교나 천주교나 모두 불교와 다름없는 '세상 종교'로 우리가 분류하는 것은, 기독교라 자처하여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자기 부인(self-denial)은 전적으로 외면하여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그 점 하나만으로도 이유는 명백해진다.


자기 부인이야말로 성경의 핵심되는 내용 중 하나이기에 그러하다. 자기 부인과 반대되는 것은 자아(自我)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이다. 이것이 현재 인간고의 뿌리이고 모든 죄악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경고하는 대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으로서 상당 수준에 이를 정도로 이질화(異質化)되어 있는 오늘날 기독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리는 어린 아이라도 듣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 명료하기에 이를 수용하는 경우 구원의 역사(役事)는 연속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확증된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사랑으로 반응하고 그리하여 사랑으로써 형성되는 믿음의 당연한 귀결로서의 순종에 이르면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데에 아무 하자가 없는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하등 지장이 없었음을 덧붙여 말해 두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를 "세상 종교" 또는 "종교"라 굳이 분류하는 이유는, 일상 생활로 나타나는 삶 자체에 핵심을 두지 않고 특정한 날,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의례를 정하고 특정 계층으로서의 사제직(司祭職)을 두어 그것을 대행(代行)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사람답게 사는 삶의 기본 원리를 가르쳐 그렇게 살도록 해야 그것이 인간을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임을 상식 차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과학 관련 독서에 남다른 취미를 기른 아인슈타인은 이른 10대 시절부터 "성경 이야기의 많은 것들이 사실일 리 없다는 신념이 왔다" 하였고, 심지어는 "어린이들을 의도적으로 거짓말로써 속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한다. "물리적인 죽음을 당하고도 살아남는 것을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바 있는 그의 소위 우주 종교의 윤곽들이다.


"사후 세계는 중요하지 않다. 천국이나 지옥을 믿지도 않는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해 있고, 영원한 신비의 일부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했던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단일 군사력을 가진 세계 정부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한 때(1947-54) 골수 공산주의자였다고 당시 미연방수사국(FBI)장 에드가 후버가 밝힌 바 있다. 누구나 이런 이상주의를 품을 수 있고 그 현실화를 꿈꾸는 것은 당연하고 행동파에 속한 아인슈타인이 잠시나마 그런 것에 심취하다가 환멸의 비애를 느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의학박사라고 해서 만병 통치의 만물 박사라는 뜻이 아니고 자기 전문 분야에만 한정되는 것과 같이 사람은 자기 전공 이외의 것에는 백치에 가깝다 해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에게 종교를 논하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우주 질서의 모든 원리에 경탄의 눈길을 보내고 경모(敬慕)의 정을 품으며 양심의 소리를 따라 무욕(無慾),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할 때, 거기에는 "종교"가 아니라 그 어떤 명칭을 붙여 주어도 가하다는 생각이야 비단 아인슈타인만이 아닌 만인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이다.


범신론(汎神論)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들 속에 보임이니 하나님께서 이를 저들에게 보이셨음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한다"(성경 로마서 1장 19,20절) 한 대로, 일체 만유가 신이며, 신은 일체 만유라고 하는 종교관 내지 철학관도 일리가 있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형체와 실체를 분간 못함에서 오는 혼란과 혼동은 너무나 크고 엄중하다.


형체를 두고 실체라 하니 하나만 알고 둘은 너무 모르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A, B, C 삼자(者)를 아울러 함께 보는 안목 또는 견식이 3위1체의 원리에 따른 정확한 지식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기는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동 21절) 있는 상태다. 3위1체 원리에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상호간 위함으로써 (이를 보어는 "상보(相補)"라고 했다) '병'을 이룬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생활에 미쳐서는 '몸과 머리 관계'가 된다.


왜냐면 갑은 크고 을은 작기 때문에 대등하지를 않음이다. 대등 관계에서는 머리와 몸의 관계가 설정되지 못한다. 3위1체 원리의 핵심은, '갑'과 '을' 양자가 대립되어 대소, 주종, 인과  관계를 형성하되 '갑'이 일방적으로 '을'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을' 역시 '갑'에게 영향을 미치는 쌍방간의 흐름이 되어, 진행 방향이 '갑'에서 '을'에게만 아니라 '을'에서 '갑'에게로 역으로도 흐를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병'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므로 이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되기도 한다. 즉 조물주 하나님은 머리이시고 그 모든 피조물은 그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肢體)이다. 이는 또한 사랑(愛, love)의 도식(圖式)이기도 하다. 일방적인 짝 사랑으로는 사랑이 형성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간 구원이 조물주의 사랑의 산물(결과물)일진대, 반드시 나의 사랑이 동시에 함께 작용되지 않고서는 구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어 미래에 속한 약속이 되어 있음이니 바로 이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몸과 머리' 관계로서의 사랑을 달리 표현하여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하나' 의식이라 한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반드시 머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이니, 어느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님은 상식적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일방적으로 나갈 때 부조화가 일어나고 여러 불행한 사태가 발발하는 것이며 이를 가리켜 악(惡), 죄, 불의, 불법이라 하는 것이다. 3위1체 원리를 따라 상호 교류 또는 상보성을 따라 만물이 진행하는 것임에도,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이므로 스피노자나 아인슈타인이나 기타 여러 사람들이 그런 '종교'를 등진 것이야 자연스럽다. 왜냐면 인간 이성(理性)에 영합(迎合)되지 않아 너무나 이질적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미신으로 취급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왜 일방적으로 나가는 것이냐 하면, 갑이 을만을 위하는 것으로써 성경을 제멋대로 풀이하여 일을 헝클어놓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기독교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불교 같은 것이 더 이성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니 인간의 의지와 자주 독립성을 강조하므로 이를 당연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소위 "기독교"만이 그러한 천부적(天賦的)인 것을 왜곡시키고 있는 결과가 낳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갑과 을의 양자 관계가 주종, 대소, 인과 관계이지만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고 병을 통해 을에서 갑으로 또한 흐르게 된다. 이것이 '상보(complementarity)'다. 상보이면서도 원래의 대소, 주종, 인과 관계는 고정 불변이다.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써 네가 있다는 것이니 곧 인(因)과 과(果)의 관계인데, 갑도 을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을도 갑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이 사랑으로서, 때문에 사랑의 핵심은 양자(兩者)의 주인 의식에 있다 하는 것이다.


즉 양자가 모두 항상 능동적으로 적극성을 띠고 움직이는 것이지 소극적으로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 자주 독립성이 여기서 100프로 발현된다. 조물주 하나님만 인간을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인간 역시 하나님을 위하는 삶이다. 천주교나 개신교나 모두 일방적인 편향성이라 한 것은, 우리 인간이 주인 의식으로써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배제한 채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하는 것으로만 그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예속적이고 무기력하게 타율적인 것으로 인간을 그려놓고 있으니 과연 이런 식의 신이야말로 실존하시는 조물주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신이다. 스피노자나 아인슈타인이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이를 옳은 것으로 보지 않고 그르다고만 했지 제대로 진리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그런 종교인들에 비해 아무 나을 것도 실상 없는 것이다. 검댕이 앉은 것을 보고 까마귀가 검다고 나무라는 격이다.


아인슈타인이나 스피노자가 '그런 종류의 인격 신'을 수용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나, 그들의 근원적이고 치명적 결함은 성경을 직접 읽음으로써 성경을 음미하거나 분석하거나 판단하려 하지 않고 그러한 "기독교"가 설명해 놓은 "성경"을 보고 성경을 다 안다고 했다는 데 있다. 하나님 친히 각 사람에게 계시하셔야(to reveal)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성경의 선언에 귀 기울이지 않은 탓이다. 그러니 "신"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나약함을 표출하는 것뿐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한 것이다. "지어낸 인간의 신"이므로 성경의 모든 기록을 두고도 원시적이니 유치하다느니 하는 말밖에 나올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논리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재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 작용을 가리킴이다. 즉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우리 인간 피조물이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말함이다.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 상대를 항상 자기 마음에 둔다는 말과 똑같은 표현이다.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과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것과의 차이다.  우리 마음에 계시지 않고는 절대로 우리 안에 계실 수가 없으니, 그렇게 되면 독재가 되고 우리로서는 노예밖에 더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을 영접해 모시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논할 때 만유에 충만하시어 만유 안에(in all), 만유를 관통해서(through all), 만유 위에(above all) 계신다 한 것이다(엡 4:6). 만유 가운데 계시나 단 사람의 마음만은 예외이니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해 주신 까닭으로 이를 가리켜 "지, 정, 의의 인격성을 갖추었다" 하는 것이다. 인격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완전한 자유인임을 의미한다.


고로 엄밀한 인과율에 의하여 피조물 각자가 벌어들이는 생명(평안과 희락) 아니면 죽음(고난과 불행)이다. 피조물 위에 군림하여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며 대중없이 벌하고 상 준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나 만들어낸 신'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 자체가 자아중심(selfishness)으로서 걷잡을 수 없는 폐해를 낳을 경우 부득불 강권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우리의 상식으로도 능히 판단되는 사실이다. 그 예가 3운법칙이다. 인간 생애를 단 3 가지 유형으로만 굴레를 씌어 철두철미하게 단속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옛 말에도 있는 "인명재천(人命在天)"을 실질적으로 증명하고 있음이다. 이 현실로써 다음의 사실이 도출된다. 즉 이 세상은 일반적으로 짐작하고 있듯이 악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에도 밝혔듯이, 악인의 형통을 흔히 볼 수 있고 그 대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이는 쌀의 겨와 같이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 증거다. 디오게네스(Diogenes, -323 B.C.)가 벌건 대낮에 초롱불을 치켜 들고 온 시내를 배회하며 "진실된 사람을 찾노라"고 기행(奇行)을 벌이던 것과 같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악인이 천벌을 받고 의인이 포상되어야 하는데 세상의 현실은 거꾸로다. 따라서 '이미 버림 받은 세계'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까지 임시로 필요에 의해 잠시 지탱되고 있는 세상이다(벧후 3:13/계 21:1/시 102:26,27). 현재는 과거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요, 또한 미래라는 결과를 낳을 원인이 되어 있다. 이 인과율은 3위1체의 원리에 의하여 영구불변으로 확정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현재라는 '결과'에 대한 '원인'은 성경 외에는 달리 그 어느 서책에서도 밝히지 않는다. 혹 밝혀놓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조리 정연하게 논리적으로 타당성 있게 말하지는 않는다. 절대로 그렇게 못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는 것이다. 논리성을 결한 것은 진리일 수 없다. 이는 진리를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진리는 결코 애매 모호하지 않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모순되지 않는 것 역시 물론이다. 부분적으로는 논리성이 엿보이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또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정확한 이해'와 '착각 또는 착오'가 여기서 분명히 갈라진다. 전체적으로 이상(異常)이 없으려면 일정한 판단 기준이 정해져야 한다. 그래서 원리원칙이 있는 것이요 각종 법칙이 존재한다. 물론 이들 모두 체계화된 방법으로 검증이 되어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상대성 원리를 확립시킨 아인슈타인이 보어의 상보성 원리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었던 사례에서도 보듯이, 모든 원리와 법칙을 총망라하여 한 묶음으로서의 정리가 가능한 최고 기본율 또는 만유(萬有)의 법칙 같은 것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름아닌 3위1체의 원리다. 쉽게 말해 짝의 원리, 양면성의 원리, 또는 인과율이라 할 수 있으나, 갑과 을은 반드시 선후 관계 즉 먼저 있고 나중에 있는 차이가 있어 구별되므로 대등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기에 3위1체 원리는 이들과는 상위(上位) 개념이기 때문에 "만유(무릇 존재하는 것)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다. 즉 파생한(파생시킨) 자와 그에서부터 파생(派生)된 자로서의 상이점(相異點)을 3위1체 원리는 분명히 가름하고 있다.


서로 닮은꼴이기는 하나 하나는 먼저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 먼저 있던 것에서 나왔으므로 둘은 같으면서도 같지 않으니 본질은 같으면서도 각기 독립성을 지님이다. 작도(作圖)를 하더라도 먼저 기본되는 것(점이든 선이든 면이든)을 정한 다음 이를 근거로 하여 나머지(그 닮은꼴)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논할 때 불교는 지엽적인 것으로는 아무리 소위 연기론(緣起論)을 내세워도 앞에서 말한 전체를 두고 논할 때 현재의 모든 현상들은 결과인데도 이런 결과를 낳은 근본이 되는 최초 또는 제1 원인을 말하지 않으니, 일방적인 결과만을 말하므로 천주교나 개신교와 같은 범주에 속하고 진리일 수가 없다.


마치 보어와의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이 빛의 입자성만 고집하고 파동성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는 보어의 주장에 끝까지 승복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양면성에서 어느 일면만을 고집하는 것은 진리일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덧없음,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다는 것)은 이 자연계에만 한정되는 용어요 개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면에만 국한해서 그러함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지를 않으니, 아인슈타인은 이를 "과학적"이라 했지만 과학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만 일인자요 권위자일 뿐이다.


아무리 천재라도 모든 면에서 정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분수를 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에도 겸허하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종합적으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보어의 주장에 대하여 입자설(粒子說) 하나만을 끝까지 고집했으니, 이 경우만은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과학이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이다. 하기야 보어가 자기 이론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온 당연 결과이므로 아인슈타인만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증명이 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의 무상은 단지 결과일 뿐이요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니, 처음에 사람은 생멸전변을 모르는 여상(如常)하고 상주(常住)하는 것이었으나 '상주'의 법칙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현재와 같은 생멸전변의 무상의 세계 곧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버리는 결과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고로 문제 해결은 그 원인을 깨닫고 그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데에 있다. 천주교나 개신교도 조물주를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길고 흰 수염을 기르고 있는 신"으로 상상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불교보다도 못한 맹목(盲目)이다.


늙지 않는데 어찌 수염이 나며 늙는 것을 인간고(人間苦)로 인지하지 못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처음부터 편견과 선입견으로 시작하니 어찌 제대로 진리를 알 수 있으랴. 성경을 안다고 해도 그 모양이다. 아인슈타인이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물리적으로 죽음을 당한 인간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상상도 할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다" 한 것 역시, 이상 불교의 주장처럼 현재의 "사바세계"에만 국한해서 일방적으로 보는 관점의 불합리에서 오는 것이다.


앞에서 물질이 있으면 반물질이 있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마음 설레며 기대하고 있다고 한 대로, 그 대립되는 대칭(상칭) 세계가 분명 건재하고 있음을 확증해주는 것이 3위1체 원리요 이 원리를 입증하는 것이 3운법칙이다. 원인이 있어 그 결과로 오늘의 죽음이 왔다면(롬 5:12), 그 원인을 제거하던가 아니면 현재의 결과를 낳기 전의 상태로 복귀하게 되는 새 원인을 창출하게 되면 그 최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새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은 바로 이 원인 제거를 말하는 것이다. 원인이 존재함으로써 결과가 있게 되었으니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과거 상태로 환원되는 것이야 지극히 합리적이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종교는 진화론과 범신론이라 하는데, 그 진화론(찰즈 다윈(Charles Darwin, 1809-82)이 주창한 것)이 또한 퍽 과학적이지 못하다. 오늘날 3운법칙이 진화론의 조종(弔鐘) 소리를 우렁차게 울리고 있지만, 그런 법칙이 아니더라도 그 증거는 아주 간단하게 주변에서 찾아낼 수 있는 터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바보 같은 질문에서 드러난다. 진화가 사실이라면 그 진화가 하루 아침 또는 몇 십년 몇 백년 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저히 우리가 보는 앞에서 진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화하자면 첫째로 그 해당 생물체가 생존하는 것부터가 우선 당면문제다. 천사들과 같은 영존(永存)하는 영물(靈物)들이 아니므로 대를 이어가며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득불 암수 양성으로 처음부터 생겨나야 한다. 모든 법칙과 원리는 그 작용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듯이 처음부터 양성으로 둘이 동시에 생겨나야 할 것이므로 반드시 둘이 함께 생겨나게 될 때에는 처음부터 그런 목적(생식을 위한)을 두고 생겨나게 된다. 그러니 사전(事前) 의도, 고안, 기획, 설계가 작용했다는 훌륭한 증거다. 그 스스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생겨났을 리 없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스스로 지닌 것이라면 처음부터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으로 당연히 생겨났을 것이니 왜 허무하게 죽을 것으로 자신을 만들겠는가.


순수하게 타 의지에 의해 그렇게 생겨난 것이니, 이렇게 자의(自意) 자율이 아닌 타의(他意) 타율에 의해 계획적으로 뚜렷이 어떤 일정 목적을 두고 생겨난 것을 우리는 "창조"라 한다. 진화는 단순히 이런 설명 하나로도 풍비박산이 되어 버린다. 너무 허무한 소위 "과학"이다. 왜냐면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이런 진화론을 지금까지 장장(長) 150년간을 신주(神主)처럼 모시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말하는 바 소위 "과학"의 허구성을 단 한 숨에 짚어보았으니 무조건 "과학"이라고 하면 맥도 못추고 껍뻑 죽는  시늉만은 더 이상 하지 말 일이다.


아인슈타인도 진화론이라는 이런 미신에다가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절대적 권위를 두는 판이었으니 과학의 권위가 도대체 무엇인가. 과학은 정직하게 정의하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알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상은 손도 댈 수 없는 국지성(局地性)과 한계성을 통감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든지 인류는 이런 '과학의 미신'에 속아 넘어갈 수 있음을 진화론의 예에서도 충분히 입증되었다. 모두 일방적으로 사물을 보려고만 하는 고집에서 빚어지는 인식 착오다.


생명 아니면 죽음이다. 엄정, 엄밀한 양자 관계다. 그 중간은 없다. 철저한 흑백 논리만이 통한다. 현재의 시한부 생명이 있으니 영원한 생명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 차원의 판단에 속한다. 현존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부터 비로소 창조되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에 관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죽은 자로서의 인생이 영원히 사는 데에서만은 새 창조가 필연이고 필수다. 3위1체 원리는 사물을 반드시 양면으로 보라는 지혜와 경고를 주는 것이다.


창조는 과거 없던 것을 새로 있게 하는 행위다. 고로 영원한 생명을 새로 창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지금 그 생명을 잃어 버렸는데 이를 회복시켜 다시 누릴 수 있게 되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구조를 두고 "새 창조"라 한다. 이렇게 완전한 새로운 체제로 다시 출생하니까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으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자연법칙을 따름이 아니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영계의 또는 영적 법칙'을 따라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데 무슨 하자가 있다는 말인가.


새 차원으로서의 세계인데다 창조 행위다. 한시적 생명이 있음을 보아 반드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이 3위1체의 원리로 확인되고, 후자를 가리켜 천국이라 하고 전자를 가리켜 멸망 또는 영원한 불 못(火湖, lake of fire)이라 하는 것뿐이다. 생명이 살아 있음의 평안과 희락일진대 그 반대 현상인 고난뿐이라는 의미다. 항상 이런 대립 개념으로 만물, 만상은 움직여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자연을 보고 무엇이라 하였던가.


"우주 법칙의 위대성과 보편성", "모든 존재들이 법칙을 따라 조화를 이룸", "우주의 합리성",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우주에 나타나 있는 초월적 존재", "우주에 대한 종교적 감정", "전 우주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 원리에 감화 받음", "우주가 잉태하고 있는 조화", "영원한 신비" 등등으로 그 표현이 현란하고 화려하기까지 하다. 이 찬탄과 경이의 대상을 집약하면 바로 인격 신으로서의 조물주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에 그의 인식은 이르지 못한 것이다.


모든 법과 질서의 창조자이시므로 이 원리에서 벗어나는 일을 절대로 하시는 법이 없다. 시종일관 이 원리와 법칙을 따라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만 움직이는 하나님이시다. 이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 있는가. 사실대로 말하면 과학자들의 하나님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 아닌가. 한 치 변함도 없고 어긋남이 없는 법질서와 원리원칙의 아름다움이다. 우리 생명의 핵이라고 할 사랑 역시 엄연한 법칙 즉 3위1체의 원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법칙이나 원리는 그 자체로서 목적성이 없는 것이 없다. 즉 어떤 목표를 정하고 그런 원리가 존재하게 된 것 아니, 창조된 것이다.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을 때는 이미 그것은 한 이성적(理性的) 존재에 의해 사전(事前) 고안, 기획, 의도, 설계 아래 이루어졌음은 바보나 미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3운법칙이 이를 증명한다. 위 그림에서 보았듯이 3위1체 원리의 도식(圖式) 그대로 마치 그림을 그려놓듯이 3운법칙이 형성되어 있음이다.


이는 우주의 장관(壯觀)이나 위대함에 못지 않는 찬탄스러움, 경이 바로 그것이다. 무수한 인생의 생애들이 꽉 차게 꼭 이 3가지 유형으로만 나누어져 그 죽는 기한이 정해지고 전성기(융성기, 활동기간)가 정해지고 그리고 그 반대되는 침체기간이 명확한 그 비율에 맞게 일정 수치에 따라서만 구별되어져 나타나는 것이야 말로, 천체(天體)의 운행과 맞먹는 오히려 그보다 비중이 더한 일사불란함이다. 천체는 무생물이지만 인간 개체는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인격적 생명체이면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엄정하게 원인과 결과를 따라 즉 인과율로 움직이시니 그 피조물도 그와 같이 살고 행동하기를 요구하심은 당연하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원인을 제공하고 그 결과를 거두는 개체이다. 여기에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과 같은 "자기의 피조물을 임의로 상 주고 벌 주고" 하는 등의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계속 강조해오고 있는 터이지만, 일방적인 편견으로 보기 때문에 정작 핵심되는 것을 놓치는 것이다. 항상 양면성에다 동시성(同時性)이다.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갑으로 보면 갑만이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고 을로서 보면 갑이 아닌 을만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이는, 빛을 파동이라 결론 내리고 이에 따라 다루게 되면 입자성은 전연 나타나지 않고 반대로 입자라는 관점에서 다루게 되면 빛의 파동성이 전연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3운법칙에서 보듯이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애 따라서 세상사가 강권력에 의해 통할되는 것은 사실이나, 각 개인의 영원한 운명은 오로지 그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이 어떤 성격인가 하는 것부터 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특성을 말하는 데는 성경밖에 없다. 성경은 표현하기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 외아들, 獨生子, the only begotten Son)께서 "아버지 품속에("in the bosom"-요 1:18) 계신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을 만드실 때 '어버이'로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버이 모습이신 것이다. 이로써 영원히 확증된 것이다(롬 5:8/요 3:16).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인자(仁慈, goodness, kindness)라 하는 것이고(11:22)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라 한다. 그러나 3위1체의 원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신지라 양면성을 갖추심은 당연하고 그래서 그 다른 면을 두고 하나님의 엄위(嚴威, sternness, severity)(롬 11:22)라 한다. 때문에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consuming fire)이시라고도 한다(히 12:29). 극과 극의 대립이시면서도 완전 조화다.


이 역시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어 있는 모습이기는 하나, 갑으로 보면 갑이고 을로 보면 을이다. 이 사실을 성경은 잘 나타내고 있으니 즉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기를" 구하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은 특별히 따로 있지 않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라는 칭호만 있을 뿐이다. 이는 3위1체 원리에 의한 '둘이 하나됨'의 이치를 따른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심이니 아들께서는 '형체'이시고 아버지께서는 그 '실체' 또는 '본체'이시기 때문이다(고후 4:4). 이 3위1체의 원리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창조의 원리, 창조된 만물의 유지 존속의 원리, 따라서 이는 당연히 우리 구원의 원리가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으로써, 아담의 범죄와 죽음 이후의(롬 5:12)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죽은 자'로서의 현실을 벗겨 버려 '산 자'가 됨으로써, 범죄 전의 아담의 상태로 복구되는 "재차 출생"(요 3:3)과 "새 창조"(고후 5:17)가 가능해진 것이다.


단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 전 상태로 복귀함이라는 설명보다, 애초 창조된 아담의 상태(물론 범죄 전의 모습)처럼 우리의 새 창조도 당연히 같은 상태가 되었다고 설명해야 옳다는 것이다. 단순히 복귀라면 "복귀, 회복"이라 표현되어야 마땅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기 때문이다. 즉 이전 것은 "이미 지나간"(고린도후서 5장 17절) 것이므로 재차 거론될 필요조차 없음이다.


새 창조에서는 구조 자체가 다르니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음이다. 아담은 이렇지를 않은 것이다. 아담의 이중 구조는 단순히 '영혼과 육체'의 관계였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이중 구조(영혼과 육체)이기는 하나,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이시고 나는 그 '영혼의 육체'로 되어 있음이다. 같은 설명이라 하더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므로 확실하게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모습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2장 45절/14장 9절)이라 하신 대로 그 모습을 아버지라 보면 아버지이시고 아들이라 보면 아들 곧 그리스도이시다. 둘이 하나되어 존재하시므로 둘이 함께 계신다는 뜻과는 아주 다르다. 어디까지나 둘이 아닌 '하나'로서의 모습이시다. 모습은 하나이시나 실제는 둘이신 것이다.우리의 구원 즉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것이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됨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라는 모습은 그리스도로 보면 그리스도이시고(그렇다고 내가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아니니 전혀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둘이 하나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이시고 아들께서는 아들이신 것과 같다) 나로서 보면 나인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니니 하나님으로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이다.


그래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하심이 나의 부활, 그 하늘에 오르심 및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은 내가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이 되어 있다(엡 2:5,6). 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내가 그리스도를 볼 때 나라고 보면 나 자신의 모습이고 그리스도로 보면 그리스도시다.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있는 나라는 존재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새로운 창조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든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립보서 1장 21절)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자기 자신을 주신-"to gi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 가운데에서 하나인 것이다. 사랑 아니면 속박일 뿐이다. 둘이 그런 상태에서는 한 시도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엄마 품속의 아기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즉 문자 그대로 자신을 내게 송두리째 선물로 주시어(21절)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 계시나, 나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이심은 불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준비하실 때에도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너희에게 올 것이다"(14장 18절) 하신 그대로다. "고아(orphan)"-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어버이와 자식 관계다. 이사야서(書)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라 함이 그 때문이다.


아버지께도 당연히 그러하다. 이와 같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품속"(bosom)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엄마의 역할은 아기에게 사랑의 종 노릇이다. 아기 스스로 그 무엇이든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언하시기를,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누가복음 22장 27절) 하셨다. 영원히 갑으로서 을을 위하는 위치에 계심이다."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니 우리는 불가분으로서 하나"라 하게 되어 있는 것이 3위1체 원리에 의한 사랑의 삶의 정확한 설명이다.


그러니 둘이 하나라고 해서 속박이기커녕 상대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 있음이다. 이것이 머리와 몸의 관계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지 결단코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되면 그 하나됨은 와해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self-denial)이라 한다. 엄마가 아기를 위해 하는 모든 것을 어느 누가 "아기에 대한 간섭"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강제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내 스스로 주인 의식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하기를 바라신다.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들어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내 이웃 곧 나와 함께 한 몸의 지체된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위하는 것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나 또한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어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목숨을 버려도 다시 얻는 권세가 있는 것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사도행전 1장 8절)이다. 모든 것을 내 스스로 주동이 되어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 스스로 원해서 즐거이 하는 일이다. 이런 관계에서의 "인격 신"이라는 데에 대관절 무슨 하자가 있는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우주 만상의 질서를 보고 "영원한 신비"라 하고 자기는 이 "영원한 신비의 일부가 되어 있음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비"가 아니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사랑의 영원한 원리가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요 4:25). 3위1체의 원리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및 기타에서는 상보성 원리로 나타나지만 인간 삶의 도리 면에서는 사랑의 원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사랑은 그저 막연히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철저한 원리를 따름이라는 사실에 눈떠야 하는 것이다. 정연한 우주 원리의 아름다움이 피조물의 생명체 속에서는 사랑의 원리의 아름다움으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여 너는 나의 삶을 살고 나는 너의 삶을 살아 너 없이는 나 못살고 나 없이는 네가 못사는" 불가분의 '머리와 몸'의 관계이다. 우리의 신체 구조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즉 머리도 몸도 자기를 위해서는 존재 불가능하다. 반드시 상대를 위하여 존재함으로써 전체 '우리'로서 존재함이니 여기서 삶의 가장 이상적인 덕목인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이 태동하여 뿌리를 박아 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공(李公) 순신(舜臣)을 추앙하여 '이순신 정신'을 기림은 이공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을 가리킴이다. 중국에는 주공(周公) 단(旦)이 있지만 우리는 천하에 자랑스러운 이공 순신이 있다. 세계 앞에 자랑스럽다는 것은,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산 사람은 주공을 비롯하여 역사에 숱하지만 그러한 정신이 낳은 결과물이 혁혁하게 나타남으로써 우리에게 가시적인 교훈이 되어주기로는 온 인류사를 통틀어도 이공 순신만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이 유례 없는 전란(戰亂)을 통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평범한 자아중심적 사고방식의 원균(元均)과 대조되어 극적인 의미로 부각되어 있음이다. 자아중심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 의식에서 나오는 공덕이 얼마나 위대한지 한 눈에 들어오는 교훈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매료시키고 있음이다. 이공 순신의 그러한 공동체 의식은 한반도 구출만 아니라(비록 그 입은 전화(戰禍)는 한반도가 비참했지만) 중국 대륙까지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출해내는 위업을 이룩했었다.


이공이 아니었더면 왜군은 남해안을 돌아 포위 작전을 하여 한반도를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보급기지로 삼은 다음 단번에 중국의 산동반도로 직격(直擊)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본래 그런 야심으로 풍신수길은 한반도 침공을 감행했었다. 그러나 이공으로 말미암아 분쇄되고 영원히 좌절된 것이다. 명나라 구원군이 한반도를 구해냈다 하지만 이공 순신이 오히려 명나라를 구원해 준 것이다. 남해의 길목을 지켜 주었기에 그 덕분에 명줄을 이어가게 된 명군(明軍)은 거들먹거리고 한반도에 들어와 오히려 왜군보다 더 심한 행패를 부리고 해를 입혔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요 평가다.


우리가 여기서 이공 순신의 공동체 의식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공동체 의식이 바로 앞서 설명한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공 단은 우리의 이공처럼 전쟁 상황이 아니었기에, 철저한 공공(公共) 정신으로 일관하여 공자가 우러러 높이 받든 인물이기는 했어도, 이공처럼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지 못했으므로 세계 앞에 내놓고 선전할 거리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공은 그의 전승(戰勝)으로 원균의 경우와는 하늘과 땅 차이로 자아중심이 벌어놓은 결말과의 격차를 벌여놓음으로써 만대에 걸쳐 만인을 교화시키는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가시적인 증명으로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론적으로는 그리고 양심상으로는 공동체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줄 다 알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로 효과를 거두는지 실지로 검증되기가 어려운 것인데, 그리고 자아중심의 폐해를 알지만 역시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데, 임진란 무대에서의 두 인물의 결과는 너무나 뚜렷하여 한 눈에 조감(鳥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의 결과가 두드러진 예로 나타나야 하는데 대개 음지(陰地)의 미덕(美德)으로만 그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이내 사라져 그 영광을 추적하기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어서 번번이 그 위대성을 간과하기 쉬운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우리 인간 사회에서 회자되는 죄, 악, 불의, 불법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정의하면 바로 이런 공동체 의식의 결여 곧 자아중심이다. 머리와 몸의 이상적인 삶의 구조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이 자아중심이나 이것이 버젓이 행세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인즉, 이공 순신이 전란 이전에는 음지 속에 가려져 볕 볼 날이 없는 불우(不遇) 속에 갇혀 지낸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사주팔개자(四柱八個字) 잘 타고 난 덕에 원균은 전쟁 중에도 호의호식하다가 죽어서도 감히 이공 순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무일등공신에 봉해졌었다.


이와는 대조되게 이공은 전쟁이 끝나면 필시 모함과 시기가 옥죄어 올 것을 충분히 예상한 터라 자진(自盡)할 요량으로 마지막 노량해전의 전투에서는 갑옷도 걸치지 않고 진두 지휘하던 끝에 그 소원대로 진몰(陣歿)했다. 세상이 악하면 의인이 용신(容身)을 못한다. 그런 세상이 자고이래 언제 한번 변한 일이 있었던가. 성경은 처음부터 즉 인간 세상이 시작되자마자 악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이유없이 무참하게 죽였다고 서술해놓고 있다. 이는 향후 세상의 성격을 규정 지어주는 일이기에 눈을 비비고 부릅뜨고 주목할 만한 일이다.


자아중심과 반대되는 개념이 자기 부인(self-denial)이다. 성경이 이 자기 부인을 강조하고 있음이 이 때문이다. 곧 의(義, 무릇 올바른 것), 선(善, 무릇 좋은 것)의 대명사다. 자기 부인이 다름아니라 몸과 머리 관계에서 몸도 머리도 각기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하는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를 부인함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은 상대가 자기를 위해 주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대하 13:12) 그 아래 모든 피조물은 그 한 몸의 각 지체(肢體) 각 부분을 이룬다고(고전 12:11-28/롬 12:5) 설명하고 있다. 사랑, 인애(仁愛), 자비(慈悲) 등의 모든 단어들은 바로 이 머리와 몸 관계에서 오는 당연 귀결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죄이고 악이며 무엇이 선이고 의로운 것인지 이로써 확연히 드러난다. 추상적이고 애매 모호한 것이 없다. 족집게로 집어내듯이 이처럼 설명이 되어 있다.


이는 상식 차원에서 알 수 있는 일이니 아인슈타인이 이기심, 고집, 편협성을 배격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런 것이 결코 사람 삶의 도리가 아님은 양심적으로 능히 판단 가능하기에 그렇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과 자기를 위해 사는 것, 이렇게 양분되어 선명하게 나타남이니 이는 밤과 낮이 월등하게 차이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죽음과 생명의 차이다.  자율과 타율의 차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자율에 속한다. 사랑은 강제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머리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아예 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부모가 자식을 내었으니 부모 자식 관계에서는 형성된다. 그러나 나이 많으면 머리로서의 기능은 상실된다. 이는 자연계에 속한 일로서 애초부터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기준에서 보면 정상이 아니다. 비정상인 것은 일시적이요 임시이기 때문에 영원성이 없다.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므로 인간은 머리가 될 수 없다. 불교는 인간이 신불(神佛)이 된다고 가르치므로 그래서 논리의 모순을 처음부터 안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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