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법칙/3운법칙

보어와의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35)

Tayseek Kwon 2015. 12. 29. 22:34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광야 또는황야는 사람 살지 못하는 곳 곧 이 세상을 가리킨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고

옛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길을 거쳐 가나안 복된 땅으로 들어갔다
필자는 이름도 성도 없이 오직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기를 기원할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틀렸다"의 맺음말 (2) 


보어와의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는 점을 3위1체 원리를 통하여 확정 지었다는 점에서만 그치지 않고, 자연계에만 한정된 지금까지의 인간 인식을 혁파하여 초자연계 또는 반자연계를 동시에 인식하는 새 사고방식을 정립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결론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빛의 입자성을 확신하는 아인슈타인은 빛의 또다른 특성인 파동성을 입증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입자성을 증명하는 것 자체가 이미 파동성을 함께 확증하는 것임을 주저없이 수용하는 자세가 필연 필수임을 이 만유의 법칙인 3위1체 원리는 증언하는 것이다.

 

3위1체의 원리의 존재 의의가 바로 이것이다. 자연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초자연계가 있다는 현실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검증하는 것은 자연법칙이 주관하는 자연계 현상에 한정되는 일이다. 반자연계(또는 초자연계)를 주장하는 법칙은 우리의 한계밖에 있다. 자연계에 속한 존재로서의 우리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지만 그러나 3위1체 원리를 통해 명확히 우리는 그 윤곽은 들여다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현재 '결과'로서의 만물 만상이 있으니 그 원인으로서의 창조자 하나님이 계시는 사실은 굳이 증명하려고 끙끙 댈 필요 없이 현재의 결과 자체가 그 증명이 되어 있는 것이다(롬 1:19,20). 초자연계의 실존을 굳이 증명하려 할 필요 없이 자연계 자체가 그 증명이 되어 있으므로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이를 토대로 접근하려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쌍(雙)으로 존재하는 대칭(상칭, 대립)성의 의미는 반드시 반대되는 성질임을 뜻하므로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며 호화롭게 내로라 하며 삶을 영위한 사람은 오는 영원한 세상에서 오직 그 반대되는 고난 고통뿐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만으로 그런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주재((主宰))는 하나님이시고 기계적인 물질이 아니므로 이런 무지(無知) 행각을 뉘우치고 참 삶의 길을 진심으로 모색하는 이이에게는 갱생의 문이 열려져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하시고 제자들이 놀라자 다시 강조하시기를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더욱 놀라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했으니 부자가 아니더라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인데 이에 대답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막 10:23-27) 하신 이유다.


3위1체 원리는 3운법칙의 구조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 ◑, ●로 표현되는 도식(圖式)이다. 갑(◐)과 을(◑)은 서로 상반된다는 특성을 나타냄만 아니라 그리고 병(●)의 본질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반대 위치에 있음을 보이는 것만 아니라, 갑과 을의 상반되는 특성을 ●(갑)과 ○(을)로 표시할 경우 갑(●)은 을(○)을 그 속에 내장(內藏)함으로써 ◐로 스스로를 나타내고 을(○) 또한 갑(●)을 그 속에 내장함으로써 ◑의 모습을 취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 바탕에 ○을 취하니까 ◐ 모양이 되고, ○ 바탕에 ●을 취하니까 역시 ◐의 모습이기는 하나, 갑과는 반대의 성질이므로 ◐을 거꾸로 한 ◑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 "내장한다"는 것은 갑이면 갑, 을이면 을 스스로 자신을 나타낼 수 없고, 반드시 상대방인 을(갑에게) 또는 갑(을에게)과 함께 하나된 의미를 동시에 나타내게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높다는 개념은 낮다는 정반대되는 것을 함께 떠올리지 않으면 안되고, 여자라고 하면 남자를 동시에 개념화하지 않고는 제대로 의미를 수용할 수 없음이다.


3운법칙의 OT와 SN 유형의 구조가 그러하다. OT는 SN의 19를 19개의 마디(節, internode)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특징인 3을 상징하는 3가닥의 각 가닥 속에 갖추어 있고, SN 역시 그 자신의 상징이 되어 있는 19가닥 속에 한 가닥에 3마디씩 갑의 3을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빛이 파동성과 입자성으로 되어 있음은 이미 입증된 것인데, 따라서 입자성 속에 파동의 성질이 함유되어 있고 빛의 파동성 속에 입자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다면 틀린 말일까.

 

남자가 있다는 것은 여자가 있다는 뜻으로서, 여자가 있는지 여부를 일부러 찾아보고 알아보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빛이 파동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입자성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밝힘이 되는 것.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초(반) 자연계가 존재한다는 증명이 자연계 그 자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확정 확증해주는 것이 3위1체 원리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 원인을 알아내려고 할 일이지 그 원인이 과연 있는지 살펴보려는 수고와 시간 낭비를 줄여주는 효과다.


현재의 모든 만물을 결과로 볼 때 이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검증하고 증명하는 단계가 아니다. 3위1체 원리 자체가 그 증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그 뜻이다. 단지 창조자가 어떤 특성을 지닌 분이냐 하는 것은 각자가 찾아야 하고 진리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 데에 달렸다. '존재'를 증명함일 뿐이지 '형태'나 '내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그 증거 그 증명이 바로 3위1체 원리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의미이요 그 중요성이다. 그래서 만유(萬有)의 법칙이라 한다. 무릇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은 상대성(相對性)을 띠고 있기 있음이다. 절대성(絶對性) 즉 홀로 존재하는 가치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갑은 을의 모습을 내장하고 있고 을 역시 갑을 그 안에 갖추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갑과 을이 대등하지 않고 반드시 그 대표성을 나타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병은 ●로 표현되고 있지만 갑과 을이 ◐, ◑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원래부터 병의 특성이 ○과 ●을 동일 비율로 내포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과 ●이 함께 하나로 있었으나 단지 ●이 대표성을 이루어 있었다는 뜻이다. 갑과 을로 나누어지면서도 그 대표성은 그대로 있어 선후(先後), 대소(大小), 주종(主從), 인과(因果)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대등한 것은 없다. 대등하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

 

갑과 을이 구별은, 같은 ○과 ●으로 구성됨으로써 본질은 같으나 갑은 ● 속에 ○을 내포하고 있고 을은 ○ 속에 ●을 내포하고 있다는 그 차이인 것이다. 고로 갑에서 을로 흐른다는 것은 고장된 것이나 동시에 을에서 갑으로 치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니, 그것은 을 속에 갑이 있으므로 갑 속의 을을 향해 그렇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흐름의 방향이 그렇게 반대가 되어도 서로 충돌이 되지 않고 조화 통일을 이루는 까닭은 이와 같이 갑 속의 을, 을 속의 갑을 상징하는 병이 있어 갑과 을은 이 병으로써 자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고로 을 없이 갑이 존재하지 못하고 갑 없이 을이 존재하지 못한다. 이것이 (사람의) 삶의 원리로 나타날 때는, 너 없이 내가 없고 내가 없이 네가 없다는 것이니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아 너의 생각은 나를 위함에 있고 나의 생각은 너를 위함에 있어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이로써 너와 하는 하나라는 것이다. 여럿이 하나로 살 때에는 반드시 머리가 있게 마련이고 이 머리는 그 모두라는 '결과'를 낸 '원인'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갑은 을로만 흐르고 을은 갑으로만 흐름이니 이는 이상과 같은 생명의 원리에서 뜻 풀이를 하면 갑은 갑 자신을 위할 수 없고 항상 그 상대인 을만을 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을 역시 을 자신을 위함이 없고 항상 자기 상대인 갑만을 위함으로써 정상 순환이 되는 것을 말함이다. 폐일언하고 각자는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는 것이다. 죽어도 그 상대를 위하고 살아도 그 상대를 위함일 뿐이니 이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self denial)이라 한다.

 

이렇게 자기 부인으로 살아야 하는데도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자아중심(selfishness, self-centeredness)이라 한다. 모든 죄, 악, 불법, 불의는 이 자아중심에서 나는 것이다. 하나로 결집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가 되므로 모두가 제물에 소멸하는 지름길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자아중심이 되어 있음에도 그래도 지탱해 나가는 것이 무슨 기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자연 순리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니, 오직 3운법칙이라는 강제 통제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 원래부터 이런 통제에 의해 삶을 꾸려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 영원한 존재로 살아가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상 설명한 생명의 법칙을 어기고 자아중심으로 나간 까닭에 이루어진 후속 조처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고로 인생들이 다시 영원 존재로 복구되면 이런 강제성이 제거되고 그 스스로 자기 자유 의지로 선택한 '원인'에 의한 '결과'만이 영원토록 진행된다. 이 경우 일부러 정한 통제가 더 다시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만 철칙이 되어 진행되어 나갈 뿐이다.

 

애당초 한 사람 아담(Adam)만이 창조되어 그가 모든 후속 인생들(그에게서 나오는)을 그 각자 자유 의사 또는 자유 의지에 의해 나타내는 정사(正邪) 즉 의와 불의를 따라 심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자신부터 빗나가는 방향으로 나가 범죄자가 되어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려(범죄 전에는 초(超)자연계 즉 영계에 속한 육체이었음에도)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죽음이 왔으므로"(롬 5:14) 각자에게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다.

 

즉 이제 모든 인생들은 아담의 범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유 결정을 따른 의와 선 아니면 불의와 불법을 따라, 이미 앞서 창조되어 그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천사"들이라 불려지는 영물(靈物)들처럼, 영원한 운명을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름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상 상황이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삶을 구가하는 것은 이 자연계에서가 아니요 영원한 세계에서이니 이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모든 세상 사람들은 전도(顚倒)된 가치관으로 초자연계를 무시하고 이 자연계 삶에만 몰두하고 혈안이 되어 영원 세계에서의 생(生)과 사(死)를 망각하고 있으니 어찌 이를 속수무책인 양 관망만 하리요. 어찌 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가 없으리요.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 그리고 별도로 소개되는 DPA(Devils' Practical Appearances) pix 등이 그 마지막 경고 차원에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DPA pix는 초자연계 존재인 약령을 유사이래 처음으로 비디오 및 사진으로 촬영해둔 것으로서 초자연계의 실존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절대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자도 마찬가지다. 피조물이 그 상대역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 자신께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상대성이시다. 그러나 아들께서 존재하시기 이전은 분명 있었으므로 그 때의 절대성을 원초적 절대성이라 한다. 대표성은 이 원초적 절대성을 따라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먼저 있는 것이 있고 그 짝을 이루는 나머지 것이 그로부터 파생되는 순서를 따르게 마련이다.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생긴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으므로 남자가 대표성을 띠게 마련이다. 갑과 을 둘이지만 둘로서 나타내지 않고 반드시 하나로서 표현되므로 그 먼저 존재하던 것이 대표가 되게 마련이고 이것이 3위1체 원리에서의 병의 역할이다.

 

자연법칙이 일사불란한 체계로 운영되듯이 이와 같이 자연계와 초(반)자연계를 통틀어 만물이 꽉 찬 질서로 돌아가고 있음이 이 만유의 법칙인 3위1체 원리로 밝혀진 것이다. 자연계 법칙을 초월하는 반자연계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것이므로 반(초)자연계는 해당되지 않는 물리 화학적 실험으로는 이 법칙의 진실성이 가름되지 않고 3운법칙에 의해 증명되고 있음은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그래서 3운법칙의 여러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여 그 경이(驚異)를 앞에서 잠시 음미한 바 있다.

 

3운법칙은 3위1체 원리의 진실성을 확증해주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다. 여러 가지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주되는 의미가 이 3위1체 원리의 증명이다. 3위1체 원리가 만물의 구성 원리(법칙)가 되어 있으므로 3운법칙과 같은 종류는 당연히 그 구조로써 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3운법칙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3위1체 원리도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요 또 3위1체 원리 없이는 3운법칙의 진실성 역시 입증되지 못할 것이었다. 3위1체 원리의 도식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그 특유의 구조 때문에, 현재 나타내고 있는 세 가지 유형(FS, OT, SN) 외에 달리로는 더 있을 수 없음을 자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전의 양면"은 자주 입에 올리면서도 우리 자신 이 양면성을 아울러 보는 데에 너무나 인색하고 또한 익숙하지 않음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자연계의 안목' 한 편만 죽으라고 고집하며 살아온 것이다. 가히 놀랄 정도다. 이제는 그 쇠사슬을 과감히 떨쳐 버릴 때가 왔으니 3운법칙으로 증명된 3위1체의 원리가 그 해방자(解放者, a liberator, an emancipator)로 마침내 등장한 오늘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자유, 무엇보다 귀중한 가치는 이 자유인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시기다. 우리 인생들로서는 새로 다시 출생해야 하는 시점이다.

 

아담 이후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이 사람 살리는 일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세상 흘러가는 양상은 부차적인 것이다. 정해진 대로 되어가는 것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개인의 구원인 것이다. 죄인 하나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큰 기쁨이 된다(눅 15:7). 악령들은 단 하나라도 회개할까 전전긍긍하며 백방으로 방해하는 데에만 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사탄에 의해 눈이 감겨 보지 못하여 세상 천지를 모르는 인생들만 제외하고는 하늘과 땅 모두가 사람들의 구원 문제에 매달려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도 매달려 있고, 모쪼록 단 하나라도 회개하도록 갈망하는 차원에서 또한 주야로 매달려 있다. 사탄으로 인해 눈이 감겨진 인생들만이 이 정작 핵심되는 것은 외면한 채 소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바람 같고 안개 같은 일에만 마치 큰 일이나 되는 것처럼 빠져 있는 것이다. 비극이다.

 

오늘이라도 말씀 전파만 종료되면 내일이라도 지체없이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다(마 24:14). 따라서 우리 역시 자나깨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벧전 1:12) 이 사람 구원하는 일에 몰두할 일이다. 우리 자신 여생에 그 어떤 고난이 닥치고 처참한 죽음에 직면하더라도 몇이라도 구원해내는 이 가슴 뿌듯한 보람에 넉넉히 견디고도 남는 것이다. 3운법칙으로 확증되어 있는 3위1체 원리에 의해 초자연계 즉 영원한 영계(靈界)가 있음이 확인되었으니 그 영원한 생과 사의 문제에 고민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려 영원히 후회없는 삶을 영위하실 일이다.

 

3운법칙으로 증명된 3위1체 원리에 의해 양면성의 원리(대칭, 상칭, 대립의 원리)가 입증되었고 인과론(因果論)이 과학적임이 확인되었으니 지금까지의 무지 가운데 지내온 수천 년 묵은 고질적인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일대 혁신적인 삶,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확립할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자연계인즉 오는 세상은 반드시 초(또는 반)자연계인즉 자연계에서의 삶을 생명의 향락으로 착각한 지금까지의 아주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초자연계에서의 삶을 위한 '원인'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인즉 이 '원인'의 '결과'를 항상 염두에 두고 지혜롭게 처신할 것이다.


3위1체 원리의 갑, 을, 병 관계에서의 주종, 대소, 선후, 인과 관계를 확인하였으니 그래서 짝을 이룬 둘이 함께 동시에 생겨나는 법이 없고 반드시 하나는 다른 하나를 파생시킨 원인이고 나머지는 그 결과인즉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이 서로 양립되어 처음부터 구성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입자성(또는 파동성)에서 파동성(또는 입자성)이 시간 격차를 두고 나온 것이 분명하나 이를 규명하기 위해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이니 왜냐면 때는 바야흐로 마지막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초자연계 몸이 되면, 지금까지 발전시켜 온 각종 과학 지식에 의한 소위 "문명의 이기(利器)"가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버려질 것이니 지금 이런 것에 몰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초자연계 몸이 그런 기능을 다 소화해내고도 남는 자체 능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고로 오직 그 날을 바라고 전심전력을 다 기울일 때로서 다른 것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시간 낭비에만 그치지 않고 자해(自害) 행위의 결과만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 자연계의 몸을 벗고 초자연계의 몸으로 변환할 것이나 엄정한 법질서를 따라 원리원칙을 따라 되는 것인 바, 현재의 모든 삼라만상이 결단코 뒤죽박죽이 아니고 엄정 정확한 자연법칙의 운행에서 보듯이 한 치 오차 없는 시계 바늘처럼 돌아가는 것이므로 인간 삶 역시 3운법칙으로 이미 증명된 것처럼 빈 틈 없이 전개되어 가는 까닭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현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초라한 몸으로서의 고통을 받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일탈 행위가 그 연유로서 이제 양면성의 이치를 따라 마지막 아담께서 건재하여 새 창조, 재 출생의 과업이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된다는 것은 얼마나 상쾌, 유쾌, 통쾌한 개념들인가.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지금까지의 세상사, 인간사가 꽉 찬 스케줄 속에서 순류(順流)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니 이 새 창조의 대열 속에 끼어야 영광의 초자연계 몸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 몸도 생사)(生死) 나누어지듯이 초자연계 몸 역시 죽음(멸망)과 영원한 삶과 그 생명의 낙으로 분류됨이니 엄연한 양면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는 유무(있고 없음)의 개념이 아니라 없음이 아니라 있되 고락(苦樂)으로만 성질을 달리 하는 까닭이다. 있고 없음은 이미 종료된 것이니 즉 피조물이 생김으로써 과거 한 때 피조물이 없던 때와 구별되어 유무(有無)의 대칭성을 이루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원토록 유 즉 존립의 영역이다. 따라서 악인이나 악령(惡靈)들은 그 죄과로 인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고통 고난 가운데 다시 말해 삶의 낙과는 정반대 현상만을 이루어 끝도 한도 없이 지속된다는 것뿐이다.

 

영원성과 한시성(일시성)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고로 이 세상 끝나면 다시는 둘로 나누어짐이 없이 영원성으로만 고착화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 때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새삼스럽게 여러 군말을 요하지 않는다. 생명의 향락과 영광의 초자연계 몸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죽음(멸망)의 초자연계 몸이 과연 어떤 것인가. 이미 언급했듯이 서로가 반대되는 성질이므로 정반대의 것으로 상상하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이지만, 영광 중에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마지막 아담)를 보고 비록 믿는다는 사람들도 "기이하게 여긴다"(살후 1:10) 했을 정도이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인식을 혁파하고 180도 전환하여 완전히 삶의 천지개벽을 할 일이다. 이 외에 다른 그 어떤 무엇에도 신경을 쓰거나 관심을 둘 여지, 여유가 없다. 그만큼 생사를 다투는 심각한 상황에 우리 모두가 처해 있기 때문이다. 현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과거는 과거대로 흘러간 그대로 버려둘 수 있으나 현재만은 내가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내가 만드는 현재를 따라 미래도 결정되는 까닭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이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 말 그대로 이 세상은 자기 운명을 각자 스스로 결정하는 때요 장소다. 다른 의미는 없다. 그래서 미래의 '결과'를 이루기 위한 '원인'의 의미만 있다고 하는 것이다. 초자연계 몸의 영광스러운 삶을 현재의 자연계에 속한 연약한 육체의 삶으로 맞바꾸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몰라서 그리 되었으나 지금은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어 있는 마당에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를 처음부터 유일하게 밝혀 온 성경의 진실성은 이상 두 법칙을 소리없이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젖혀두고라도 그 자체 증명에 있다. 즉 진실이 아니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말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 거짓이라면 절대로 그런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전편 내용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양식과 상식으로 능히 판단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일이다. 세상 종교 중에 이 "기독교"(여기에 따옴표를 붙이는 이유는 '자칭 기독교'라는 뜻이다)만큼 가짜가 판치는 데가 없다. 이는 성경이 진실성 다시 말해 유일의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임을 역으로 증명함이 된다.

 

성경이 처음부터 거짓말이라면 이토록 가짜가 성업을 할 리가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핵심 부분을 실제는 믿지 않고 딴소리하는 것 역시 "기독교"만큼 심한 데가 없다. 이 역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함이 된다. 성경은 이 세상 신(神)이 건재함을 밝히고 있는데 바로 이 신(神)의 방해 책동으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아니라면 이다지도 심하게 왜곡되게 성경을 풀이해놓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의 권위로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확히 세상에 알리는 것이니 다름아니라 성경에서 경고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라는 가르침을 힘써 강조하지 않거나, 이 세상을 주관하는 지배자로서의 신(神)이 악마 또는 마귀 또는 사탄임을 가르치지 않거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는 평생토록 각종 핍박과 탄압의 표적과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지 않는 그 어떤 집단이든지 "사이비"라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또한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성경의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내용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왜냐면 거짓말하고 속이는 경우 그런 내용으로써 절대로 인생들을 속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란 그 스스로 무식함에서 오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감언이설로 자신을 치장하는 법이기에 그러하다. 거짓말과 속임수의 속성이 그렇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삶을 기피하는 터에 구태여 거짓말하고 속일 필요가 무엇인가.

 

과학은 이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와 법칙을 규명하여 그 합리성을 찾아내는 학문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인생 삶의 합리성이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로서 전자는 자연계에 속한고 후자는 초(超) 자연계의 영역이다. 초 자연계는 말 그대로 자연계의 한계 밖이다. 자연계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 과학은 그 정확한 테두리를 제대로 인식함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자연과학과 초 자연과학으로 대별되는데 우리는 이제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서  자연계 그 너머를 알지 못하고 자연계만이 전부인 줄로 알아 왔기 때문이다.

 

초 자연계의 일은 자연계 법칙을 통하지 않는다. 초 자연계에서만 통하는 원리와 법칙이 따로 있다. 이에 관해서는 자연계에 속한 우리로서는 손이 딸린다. 그래서 자연계 법칙을 취급하던 방법으로는 초 자연계에 접속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양 세계를 관장하는 최고의 법칙을 알아냈으니 여기에 인간 삶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이 포함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만유의 법칙도 하나의 원리이기는 마찬가지이니 검증이 필요하다.

 

유일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그 검증하는 방법이 3위1체 원리와 동시에 밝혀졌으니 다름아닌 3운법칙이다. 만물 만사 만 가지  현상이 이 3위1체 구조와 형식을 취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3운법칙도 역시 예외일 수가 없다. 그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바 곧 그 특이한 구조가 이를 증명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가리켜 "3위1체 원리를 검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실상 이보다 더 확실한, 이 이상으로 정확한 검증 방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지금까지 학계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오지 못한 것이니 그 진실성이 3위1체 원리에 의해 확고하게 검증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으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이런 3위1체 원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과학 기술의 발달을 이미 2,500년 전에 예언한 다니엘 예언(단 12:4)의 성취에 우리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성경 대목을 해석하는 것이 갖가지다. KJV 등은 오늘날 소위 "과학 문명"의 총아가 되고 있는 교통, 통신의 발달("running to and fro")과 이에 보조를 맞춘 "급증하는 지식"에다 초점을 맞추는데 반해 NIV 등은 다른 의미로 풀이하고 있으나, 다니엘이 "마지막 때"라고 못박은 사실로 미루어 KJV(우리말 번역을 포함해서) 번역이 올바른 것임이 확인되고 있다. 과학 기술 발달은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좀더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라고 하시는 뜻이 아니라 오직 적(敵) 그리스도의 출현과 세계 장악이 용이하게 되도록 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 예언을 감추고 봉함하라는 것은 그것이 드러나고 봉함이 해제되는 경우를 전제하고 하는 말인즉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마지막 때"에는 누구나 쉽사리 "그 때가 바로 이 때다!" 하고 집어서 말할 수 있게 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따지자면 과학 지식의 급증과 문명의 이기 발달이 해당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외 해석으로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시점(時點) 알아내기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 20세기 과학 문명 발달은 말 그대로 20세기를 전후해서 마치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갑자가 분출하는 식으로 급상승 곡선을 지금까지 그려 오는 것으로 누구의 눈에도 명확히 드러나지는 현상이 된 것이다.

 

이 무렵해서 즉 1908년에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Tungus Explosion)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는 바로 사탄이 하늘의 전생에서 패하여 지상으로 추방당한 광경이 연출한 그 시점인 것이다. 그 이후로 연이어 터진 각종 세계 규모의 대전쟁, 러시아 중국 등지의 공산 혁명에 의한 무수한 인명 학살, 대소 천재지변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실정임을 볼 때 적 그리스도의 때는 이르렀고 이로 인하여 대량 살륙의 비극이 대기 중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그 때"로 방향을 틀고 있음이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닮은꼴이 되어 인간 육체가 되어 있는데(아담이 최초의 인간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그러나 이것이 "자연스러움"이 아니라는 증거는 사람으로서 누구나 내일도 기약 못하는 이런 자연계 육체의 목숨을 슬퍼한다는 것이다. 즉 초자연계 몸이 되어 영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연계 육체로는 다 죽게 마련인데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초자연계 몸이어야 하기 때문. 그러면 이 "부자연스러움"의 결과를 잉태시킨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인간이 애초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는 몸이었다가 범죄로 인하여 이 한시적 목숨의 자연계 육체로 전락해 있다는 것이 그 답이다.

 

이렇게 대칭(대립, 상칭)성으로 모든 사물이 되어 있음을 확실히 증명해주는 것이 3위1체 원리(이를 증명하는 것은 3운법칙)다. 범죄했다고 하나님께서 당장 벌을 내리신 결과로 이런 자연계 육체로 인간이 변한 것이 아니라, 위험을 미리부터 알려주시어 그 위험을 피하라고 하나님이 일러주셨는데도 이 말씀을 인간(아담)이 듣지 않고 그 위험을 자초한 탓이니, 인간 스스로 자기에게 좋은 것을 버리고 나쁜 것을 택한 결말 즉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판단대로 그  위험 속으로 스스로 뛰어 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바 모든 "범죄"의 속성이다.
 

자신의 판단이 정확무오하다면야 문제가 없겠으나, 자신의 일에 관한 한 자기를 창조하신 창조자보다는 아무도(자신도 포함하여) 더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는 것은 교만 때문이고 이것이 범죄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고로 이런 초라한 육체를 초월하여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위해 사람되신(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영으로 하나됨"(고전 6:17)이 필연이다.


물론 마지막 심판 후에는 모두가 초자연계 몸이 되기는 한다. 고로 여기서 말하는 바 자연계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초자연계 몸은, 죽음(멸망 즉 영원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만 끝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과는 반대인 삶의 낙을 누리고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애초 창조의 목적이고 의미였기 때문이다. 범죄로 이런 불행한 결과가 와서 이제 초자연계 몸으로 다시 복귀하기에 이르렀으니 자연히 그 전제 조건은 다시는 이런 결과를 이루는 원인을 각자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 조건이 바로 "회개"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다시는 그런 범죄를 하지 않는다는 결의와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다. 이는 당연하니, 또다시 범죄하게 되면 다시금 죽음으로(이제 구원받아 초자연계 몸으로 환원되는 시점에 와 있어도) 도로 돌아가 버릴 것이므로 아예 처음부터 이제 다시는 자기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여 고집하는 교만을 떨쳐 버리고 죽든지 살든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하나님 뜻과 말씀대로만 살리라는 다짐을(나는) 해야 하고 다짐을 받아두셔야(하나님은) 하는 것이다.

 

자기 판단을 더 선호하여 고집하는 범죄는 삶의 법칙(사는 법)을 어김 곧 따르지 않음이다. 산다는 것은 자연계 생물처럼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영적(신령한, 지-정-의 인격성의) 존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어 그 이성과 지성을 따라 스스로 판단하여 가장 옳고 선한(좋은) 방법을 따라 사는 것이니 이 "방법"이 바로 "법칙"인 것이다. 그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사랑에 있으니 이 사랑은 둘의 하나됨(양자간의 조화 일치)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하는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한 몸>을 구성하여 영위되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처음부터 그런 지각을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심으로써 이 모두의 영원하신 어버이로서 머리로 계시니 즉 전적으로 그 피조물을 위하시어 모든 말씀을 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것이니, 각자 피조물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를 위하시는 것이므로 여기에 전적으로 순응하여 따르는 것으로서, 이 각 피조물을 위하시는 뜻을 따라 자기 이웃도 자신처럼 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자신처럼 위하는" 것은 마치 그가 나 자신인 양 위한다는 뜻으로서 '나'는 홀로 하나뿐이지 '둘, 셋'일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나 자신으로 위한다는 의미는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가 나이고 그에게는 내가 그 자신이 되어 있음이다. 그러니 서로 맞바꾸어 서로를 자신으로 삼음이다. 이 이치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육체로 남녀가 하나 즉 한 몸이 되면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것이 되고 여자의 육체는 남자의 소유가 됨이다(고전 7:4).


남자의 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고 여자의 것이며 여자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한 몸 즉 하나됨인 것이다. 이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고 상대만 볼 수 있어 서로가 서로를 봐주어야 한다는 말과 통하고 서로가 서로를 자기 자신보다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으로 통하고 이는 내가 나를 위함보다 상대가 나를 더 잘 위할 수 있다는 사실로도 통한다. 이것은 단순히 상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실'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관점으로 상대를 대한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자기 자신처럼 위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한 가지 예만 보아도 내가 가령 나 자신을 위하면 1이라고 할 때 100사람이 나를 위하면 그 백배인 100이 되는 것이다. 만이면 만배, 억이면 억배가 된다. 이것이 사람 사는 법이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눅 9:23)이라 한다. 이는 자기만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위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무조건 자기를 1순위로 치는 자아중심과 대립되는 개념임은 물론이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자기 부인" 의식으로 살 때에는 앞서 설명대로 머리를 모신 몸의 각 지체 의식으로 발동된다. 신체의 머리와 몸 구조는 '하나'가 특징이다. 부위(部位)는 다르지만 하나로서 움직인다. 팔이면 팔 손이면 손이듯이 각 부위의 명칭과 역할이 달라 개성이 있지만 전체가 움직이므로 한 사람, 개 한 마리, 소 한 마리 등 하나로만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의미의 '하나'다. 이 경우 몸만 머리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역시 몸을 위함은 당연하다.

 

바로 이러한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는 애초 한 분 하나님만이 존재하셨다는 사실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닮은꼴을 최초로 만드셨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하여 만드신 것이다. 본체(실질)와 형체(형상)의 양자 구도이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시발점(始發點)이다. 여기서부터 3위1체의 법칙이 구동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에서 둘이 되는데 먼저 있던 하나가 나머지 하나를 파생시킴으로써의 둘인 것이다.

 

엄마가 아기를 낳았다. 엄마에게서 나기는 났지만 아기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므로 아기로서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을 엄마가 대신해 주는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는 이 아기와 엄마의 관계다. 영원히 아기다. 자연계 육체처럼 자식이 커서 어른이 되고 부모는 늙어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하나님은 영원히 젊은 엄마이고 그 피조물은 영원히 그 품속의 아기들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대표성을 따라 정해지는 것이어서 "어머니"라 할 수는 없으므로-왜냐면 아담에게서 여자가 파생됨으로 인하여 아담이 비로소 남자가 되었으므로 이 아담을 대표로 하는 까닭에)라 하고 외아들이신 하나님 역시 "아버지의 품속"(요 1:18)에 계신다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아기가 유일하게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엄마가 하라고 일러주는 대로 하는 것이 바로 엄마를 위하는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의 위치가 바로 그러하므로 이를 가리켜 순종, 복종이라 하는 것이다. 엄마가 아기에게 일러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율법, 계명, 그 모든 말씀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는 하나님이 이렇게 시키시는 것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집대로 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바로 그랬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비극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보듯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함은 먼저 하나님을 머리로서 어버이로서 모시고 그 품속의 아기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다.


이런 상황에서만 한 머리를 모신 몸으로서의 각 지체 기능이 가능한 것이다. 즉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 위하게 되는 것.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그 뜻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한 몸 체제 안에 있지 않는 경우 그런 사람이 "나 자신처럼 위할 내 이웃"일 수는 없다. 완전히 국외자다. 오직 그들은 지금까지의 행태(行態)를 청산할 결심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자아중심의 행보를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서 머리로 모시는 일만 시급하며 이것이 최우선 과제다. 그런 국외자는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된 비극적 결과(최종 결말은 영원 멸망) 그대로의 상태에 있으므로 오직 구원만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영원 멸망을 앞두고 있으나 이를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받는 비극적 실태이니, 이런 실상부터 먼저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품속에 돌아온 이들의 역할과 활약이 당연히 기대되는 것이니, 그래서 먼저 구원 받는 것을 가리켜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행 1:8) 것으로 요약하신 것이다.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 하셨다. 이것이 "새 생명"(롬 6:4)의 새 생활이다. 비정상적 삶으로 얼룩진 "옛 사람"(골 3:9) 옛 생활에 대비하면 이제 비로소 "새 사람"(:10)의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머리는 몸을 위한 삶의 일변도요 몸(의 각 지체)은 머리를 위하는 삶 일변도다. 몸의 각 지체는 이러한 머리의 의향을 따라 각 지체된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이다. 이것이 앞서 설명한 대로의 최고도의 이상향적 삶이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는 법"이라 하는 것이다. 고로 말에나 일에나 주님 예수 그리스도(머리되시는)의 이름으로 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골 3:17/고전 10:31).


그런즉 모든 일에 반드시 하나님께 여쭙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 왜냐면 우리가 이 세상 있는 것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인데(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계시어 아들을 통해 친히 그 말씀을 하시고 그 일을 하신 것과 같이) 주님과 내가 주인과 종으로서(주님은 동시에 나를 섬기시는 위치에 계시니-눅 22:27, 엄마가 아기를 위함이 아기를 "섬김"이 됨과 같다) 둘이 함께 일하는데 당연히 주님께서 내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실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사랑 가운데에서는 종이 스스로 주인께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하고 여쭙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바로 그런 모양새다. 사소하고 쩨쩨한 일에까지 이럴까요 저럴까요 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쓰시랴 하려는가. 그러면 그 사소한 일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가. 나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정도(正道)다. 결과론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대로 억만배나 나를 위하는 것이 되는 줄 알지만 나의 직접적인 동기는 시종일관 머리되시는 하나님 사랑하여 위하고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사랑하여 위함 일변도일 뿐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이웃(한 몸을 이룬 믿음의 형제들)이 그러하고 머리이신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다(고전 11:3). 이 사실을 철저히 각자 마음에 각인시키도록 성경은 가르친다. 고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그 정상적인 삶의 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 우주 홀로 나를 위할 존재는 나만이 존재하고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최고선으로 잘못 알고 지내온 허송세월을 바야흐로 청산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선언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빌 3:7-9)이라 하였고,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고전 2:2)이라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이 이상으로 "고상한", 최고도의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 다 몰라도 이것만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지식만 있으면 다른 것 몰라 설혹 바보에다 무식꾼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유한, 후회가 없다. 왜냐-바로 내 생명, 내 삶의 영원하신 반려자, 내 짝, 바로 제2의 나 아니, "제1의 나" 자신이 되어 계심이다. 나는 '제2의 나'이다. 내가 '나'를 알아야 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지식이 있을소냐.

 

이제까지 자아중심으로만 살아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정상인 줄로 착각해 왔던 우리들 모두에게 주님은 이 맞바꿈의 삶의 축복을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들여 보물 묻힌 밭을 사는" 비유로도 적절히 설명해주셨다(마 10:44-46). 값진 보물과 자기의 전 소유와의 맞바꿈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과 주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것과의 삶의 맞바꿈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보물은 하늘에 속했으니 나중 초자연계 몸이 되어서야 누릴 수 있고 그 대신 이 자연계에 속한 삶은 다 포기했으니 죽음이든 고난이든 헐벗음이든 굶주림이든(롬 8:35-39)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골 1:24) 위해 당하는 모든 능욕, 능멸만이 있을 뿐이다(행 5:41/히 13:13). 
 

첫 사람 아담은 자기에게서 난 여자(하와)를 통해 낳고 또 낳음으로써 자기와 같은 육체의 나머지 모든 인간의 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머리됨은 범죄로 인하여 그 자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한낱 물거품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머리는 계속 영원히 생존해 있어야 그 나머지 인생들 위에 그러한 역할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지만, 이렇게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아담의 자리" 다시 말해 "머리"의 자리가 공석이 되니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 자리를 메우시기에 이르니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 한다.

 

먼저 창조된 스랍과 그룹을 제외한 6일 창조에서의 모든 피조물에게 머리 곧 다스리는 자가 되는 아담은 영생하는 자의 초자연계 몸이었는데 범죄함으로써 스스로 자연계 육체로 전락해버림으로 인해  모든 인생들이 자연계의 한시적 생명의 대상자가 된 현재의 상황에서, 이들 인생들을 다시 영생하는 초자연계 몸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활용하신 지혜는, 그 자신 인간 죄인의 죽음의 고통을 친히 맛보시는 그 사랑의 확증과 더불어, 가장 합리적인 순서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 창조, 재 출생의 완전무결, 완벽성 그대로다.

 

인간이 처음부터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아우르는 속성의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의 방식 그대로를 따라 아담의 육체 측면과 대칭(상칭, 대립)이 되게 영혼의 측면에서 명실상부하게 새 아담(성경에서는 이를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하고 있다)이 되시는 방도를 취하심이었다. 육체로는 낳고 낳는 것으로 아담의 머리 역할이 수행된다고 앞서 설명했지만 마지막 아담에 이르러서는 친히 성령으로 즉 영혼 격으로 각자에게 임하여 영원히 동거하심으로써 머리로서의 100% 기능을 담당하심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자의 몸에('안에' 또는 '위에") 임하여 계심이 가능해져 아담이 그 후생(後生)들에게 자기 육체를 물려줌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 즉 각자 안에 그렇게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그 필연성이다. 그리고 이 유일하신(현존하는 사람으로서의) 특성은 비록 이렇게 영(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지만 그가 당시 12제자들과 함께 육체로 계시던 꼭 그대로이시고 하나도 다름이 없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요 16:7)이라 하셨다. 육체로 계시는 경우 요한과 함께 계시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베드로와는 함께 하실 수 없으나 성령으로 계시면 마치 육체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누어져 각 사람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런 현상이 벌어짐과 같기 때문이다. 단지 실제 육체로 계시지 않으므로 그 음성을 듣거나 형용을 보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할 수 없다는 그 차이뿐이다.


이는 마치 아담에게서 아담을 빼닮은(자연계의 각종 동물을 상징하는 영물 즉 천사들의 형상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 여자가 났으며 이로써 모든 인류가 아담의 육체를 받아 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성령을 각자가 모시게 됨으로써, 그렇게 최초로 아담의 육체를 받아 나는 아담의 닮은꼴을 여자라 했듯이 이와 같이 성령을 받아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는 이들의 집합체를 그리스도(신랑이신)의 신부라 하는 것이다(계 21:9). 완전한 머리와 몸 관계의 회복(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와해되었던 것의)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히심"ㅡ이 외에 우리 각자가 일차적으로 알아야 할 일이 세상에 도무지 없다.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바로 나의 실체이심을 입증하심이다. 나의 실상이 그러한 저주 받은 죄인, 죽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비극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즉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나로서 어찌 세상과 더불어 살아 생명의 낙을 즐기며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리요(요 12:25).

 

불철주야 그리스도(및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만 매진하지 않으랴. 이렇게 세상의 지배자 악령 사탄이 결사적으로 막는 일에 진력하다보면 바울처럼 육체의 능멸을 당하고 죽음의 고난에 항상 걸려드는 것이야 불문가지다. 이런 여러 가지를 처음부터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것을 미리부터 경고하시면서 망대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눅 14:25-35).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눅 13:24)이라 하셨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여 어느 쪽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둘이 하나됨이니, 서로가 서로의 삶을 맞바꾸어 사는 이상적인 삶의 축복이다. 이는 평안할 때만 아니라 환난과 역경의 때에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심으로 우리 위해 죽으심을 맛보셨으니 다음은 당연히 우리 차례로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음의 고난 받음"(빌 1:29)은 마땅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주님의 일 즉 사람 구원하는 일을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다시 말해 그 남으신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주님께서는 우리 육체를 통해) 마저 채우는 일을 하기 위해 죽음의 고난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감"이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1:21)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 결코 대단한 것도 아니니 주님이 일깨워주신 말씀대로 오직 "무익한 종"(눅 17:10)일 뿐이다. 말씀 순종하여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즉 미워하면"(요 12:25) 되는 일이다. 세상 삶이 보장되어 있는 경우 그렇게 목숨을 버리면야 혹 대단하다 할지 모르나 삶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도 않은 죽음의 때와 곳일뿐더러 머리께서 당하신 고난을 그 몸된 처지로서 당연히 함께 하는 것뿐이기에(함께 당하지 않으면 머리와 함께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 더욱 그렇다.

 

그리고 만물이 이 한 몸됨의 이치를 따라 함께 고통당하고 있는 시점(時點)이 아닌가(롬 8:22). 고통도 보통 고통이 아니라 인간이 아는 극통(極痛)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산고(産苦)다. 만물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통 중에 있음에도 인간만이 자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 역시 함께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생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이야말로 언어도단이요 절대 용납되지 못할 일이 아닌가. 세상 사람이야 이 진실과 실상을 몰라 그렇더라도 진리의 성경을 읽고 아는 우리가 그러하다면 영락없이 믿음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성경이 공표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순종을 의미하는 것임을(야고보가 설명한 대로 "행함"이 따르는 "믿음")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서슴없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 아무 이의도 제기함이 없이 분부하신 대로 결행하려 한 데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안점은 "행함"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으니 왜냐면 믿음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순종이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다름아닌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과정을 거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우리의 새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새 생명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순종이라야 영생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함을 강조하여 거기에 주안점을 두면 행위로 구원 얻음이 되는 까닭이다. 믿음에 두어야 그래서 하나님 친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우리 구원의 기반 위에서만 되어지는 우리의 순종 곧 "구원을 이룸"이기 때문이다. 이는 갑을 을이 위하고 을을 갑이 위함으로 둘이 하나되는 이치에 부합함이다. 을은 갑이 보이신 본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시종일관 그렇게 하는 것이니 왜냐면 을의 그와 같은 반응에 연하여 갑 역시 연속적으로 을을 위할 수 있는 까닭이다.

 

어느 일방적으로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 둘이 하나됨의 생명 구조다. 즉 머리와 몸 관계에서 몸은 시종일관 머리만을 위하고 머리는 몸만을 위하는 자기 부인에서만 가능해지는 생명이다. 이것이 생명 아니 모든 것의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니 곧 3위1체의 법칙이다. 이 한 몸 이치를 따라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신 일을 이루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 나를 위하시는 일을 계속하실 것이니 몸(의 지체)된 나로서 역시 마찬가지로 오직 머리만을 위해 충성을 다함이다. 이것이 "항상 복종함"(빌 2:12)으로 나타나는 것인즉 "항상 복종함으로 구원을 이루라"(:21) 함이다.

 

나는 이렇게 "항상 복종"하기를 힘씀으로 인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씀"으로써 갑에 대한 을의 본분을 다하고 갑은 또 을을 위해 힘쓰심으로써 을이 갑에 대한 복종을 다할 수 있도록 실제 능력이 되어주심이니 이것이 우리 구원의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어느 일방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양쪽 측면이 있고 동시에 함께 움직여야 하는 특성이다. 고로 나는 마땅히 힘쓰지만 이렇게 힘쓰는 대로 능력이 나타나게 해주시는 것은 주님의 능력인 것이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니 이를 가리켜 "은혜"라 하는 것. 왜냐면 처음부터 나는 일절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죽은 자였기에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고 이제는 생명 있는 산 자가 되어 있지만 일방적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이 정상적 생명의 구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이는 일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처음부터 내가 생명 있는 자가 되어 이런 샨 자로서의 마땅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계기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였기 때문이다. 모든 토대와 기조가 은혜인 것이다.

 

내 능력이 아닌 것이다. 내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요 아무리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도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일 수가 없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시종일관해서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 이런 사연을 알지 못하고 무턱대고 "은혜로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을 일방적인 의미에서만 강조하다보니 오늘날과 같은 혼돈과 혼란이 온 것이고 "배도"(살후 2:3)에 이른 것이다. 순종을 전연 배제한 특정 사실만을 사실로서 수긍하는 것을 구원 얻는 믿음으로 착각했으니 믿음의 도리에서 떠난 배도(背道)일 수밖에 없다.

 

범죄로 인해 고난 고통은 기존(旣存)의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죄, 악, 불의, 불법, 죽음, 고난, 고통을 처음부터 창조하실 리 없다. 모두가 선하고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기만 한 생의 환희, 찬가(贊歌)뿐이었었다. 그러나 범죄와 더불어 온 그 범죄의 대가로 인해 이런 양면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한부 세상이 끝나면 영원한 세계가 도래하는데 거기도 엄연히 양면 세계로 구성되어 천국과 영원한 불못(lake of fire)으로 나눠지게 될 수밖에 없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고난 고통 역시 피할 수 없되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 고통이야말로 바람 직하고 받음 직한 것이다. 바로 이런 기회의 세상에 우리는 위치해 있다. 이 기회를 제대로 어느 정도로 살리느냐 여부는 각자 소신나름이요 그리고 사랑의 분량나름이다. 생명 아닌 이 죽음의 질서에서는 죽음의 고난을 감수함이요 또한 자연스러움이지 억지로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추구하는 것은 장차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영원 세대에서 온갖 불행의 고난 고통을 자초하는 밑거름만 되니 이 경고를 받을 일이다.

 

현재의 질서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고난 고통이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축복이 언급되어 있으나 어디까지나 "생육하고 번성함"에 있다. "땅이 저주"(창 3:17) 받은 결과로 생육과 번성에 차질이 있으면 아니 될 일이다. 구약 이스라엘 시대에서의 축복도 이방인에 대한 심판 차원에서의 전쟁으로 인한 대량 살육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모세 율법의 상징적인 사전(事前) 교육 차원인 것이다.

 

초자연계 몸으로 살게 되어 있었던 인간으로서 이런 초라한 것은 고사하고 내일 당장의 목숨까지도 보장받지 못하는 불확실선상에 놓인 자연계 목숨으로 사는 삶이 축복 받은 생명의 영역일 수가 없는 것. 진리와 실상을 알지 못함에서 오는 심각한 착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인생들은 이 사실을 똑똑이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 지배자 사탄은 갖가지로 세상 삶에로 유혹하는 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고 않아 왔으나,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이 거짓됨을 우리가 간파하는 데에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한 때의 혼미를 벗어나 지성을 제대로 발휘한다면 넉넉히 알고도 남을 일이다. 
 

로마서 7장에 살지 말고 고린도전서 7장에 살아야


"돌이켜 어린 아이들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셨으니 어린 아이들은 학문 같은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학문을 찾을수록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말씀하신 대로 곧이 알아듣지 않고 "간다" 하면 "온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고 억지로 우기는 데에서 소위 "학문"이 시작된다. 최소한 "신학(神學)"이 그렇다는 얘기다. 곧이곧대로 알아들으면 학문이 필요 없어진다.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데에는 학문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경이 그와 같다.


성경이 어렵다고 하는 이들은 성경을 "학문"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학문이 필요하다. 성경을 그런 학문에다 엉뚱하게 끼워 넣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짓거리를 충동한 것은 사탄이다. 악령들과 귀신들이다(딤전 4:1). 사탄은 우리가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일이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일이요(마 11:27) 이 계시를 받는 자는 당연한 말이지만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자에 한정하는 일이다(7:7). 남이 그렇게 두드리고 찾은 결과물을 나는 그 덕에 배우면 되겠다는 게으른 망상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학덕이 많은 사람에게 계시를 하신다면 "어린 아이에게 진리를 나타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실 리가 없다(11:25). 오히려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신다고 하셨다. 비록 그렇게  나타내주셨다 가정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두드리고 구하는 자에게 그러한 가르치심(다른 사람을 통한)이 제대로 풍성히 나타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베뢰아 사람은...더 고상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다"(행 17:11-13) 한 대목이다. 성경이 이러한 자세를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3위1체 원리에 의해 짝을 이루는 둘의 관계는 서로의 모습을 반대로 한다는 데에 있다. 이 세상에서 삶을 즐기는 자는 반드시 오는 세상에서 그 정반대되는 것이 자기의 영원한 몫으로 돌아오는 고로, 이 세상에서 웃는 자는 애통하여 울 것이요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는 화가 있다 하신 것이다(눅 6:24,26). 그리고 우는 자는 장차 웃게 될 것이라 하셨는데 그러나 이 경우는 어디까지나 새롭게 창조되는 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니 새 질서의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6:21,22).

 

이 대칭(對稱, 對立, 相稱)되는 것끼리의 상반성은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항은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가 성립되지 못하면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정도로 3위1체 원리의 적용은 철저한 것이다. 즉 첫 창조에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것이나 반면 새 창조에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임하신 것이니(롬 8:3) 다시 말해 사람이 되심으로써 친히 당신 자신을 사람으로서 만드신 셈이다.

 

그리하심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이니 사람되신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되는 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담이 자기 육체를 물려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낳고 낳게 되었던 경우와 대립된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그런 방법론에 한정되거나 기인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죄와 죽음 가운데 매인 우리를 해방시켜 산 자가 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우리 각자와 하나되심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나, 3위1체 원리를 따른 것이라는 사실만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와 하나되심도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되어 계심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니 이 곧 3위1체 원리의 정수(精髓)이다. "둘이 하나됨"의 특징은 말 그대로 갑과 을이 둘이면서도 하나 즉 병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니 이를 위해서는 필연 필수적으로 갑은 그 안에 을이 있어 을의 삶을 살고 을 역시 그 본을 따라 그 안에 갑을 두어 갑의 삶을 사는 데에 있다. 그래야만 명실상부하게 하나로 존재하고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남녀 한 몸의 이치에서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 되어 여자가 주인이고 여자의  몸은 남자가 주관하여 주인이 되는 것 그대로다(고전 7:7).


우리는 마지막 아담과 "한 영"(고전 6:17) 관계에 있으니 곧 삶 자체가 그와 같이 상대의 소유 곧 상대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이미 그리스도 즉 마지막 아담께서는 이를 그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증하신 바다(갈 2:20). 나는 머리께서 보이신 그 본을 따라 똑같이 머리를 대하게 되어 있음이니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즉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다시 말해 오직 나를 위해 살아나심으로써 나를 위해 영원히 사시는 주님만을 위해 사는(고후 5:14,15) 삶이 "새 사람"(골 3:10)의 "새 생명"(롬 6:4)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삶을 묘사한 것이 고린도전서 7장이다. 로마서 7장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아내 남편을 어찌 하면 기쁘게 할꼬 하는 것보다 주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꼬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왜냐면 가까운 차이를 말함이기 때문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 하심이 이 까닭이다.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느냐 하는 기로에 있을 때는 가까운 쪽을 택함이 상식. 그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 하셨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한다"의 뜻은 마지막 아담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 방법인 것이다(갈 2:20).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한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또 십자가를 지는 것 역시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방법대로 함이니 즉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은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사랑은 울이 하나됨을 전제하는 것인즉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상대를 구원하기 위해 그와 하나됨에서 오는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형수의 모습이라면 나 역시 그 형상을 띠어야 그 사람을 내가 위치해 있는 생명 쪽으로 인도할 수 있음이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의 길(방법)이니 명심할 일이다. 로마서 7장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황으로서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되는 것임을 밝히는 바울 사도의 설명이다. 이것을 난데없이 바울 자신의 믿은 다음의 체험이라 너나없이 가르치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이상 설명한 구원의 진리와는 전혀 배합이 되지 않는 황당무계이다. 세상 사랑 즉 세상에서 잘 살고자 하는 것이 원인이다. 살 바에야 잘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바에야 사는 것 자체를 단념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스도인은 후자에 속한다. 살 바에야 하나님의 아들답게 초자연계 영광의 몸으로 당당하게 살아야지 이런 꾀죄죄한 자연계 몸으로 더군다나 내일도 기약 못하는데 이 세상 삶을 향유하려 들다니 언어도단이다. 더더군다나 인간의 원수 사탄이 이 세상 신(神)이 되어 있어 세상을 주름 잡고 있는 터에 원수인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방치, 방관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렇듯이 성경에 대한 완전 백치 상태가 세상 사랑이다. 구원 자체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른다.

 

아내 남편이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다 쓰지 못하는 것 같이 하는 데에서는 세상 사랑이 있을 리 없다. 세상 형적은 지나가니까 "염려 없어야"(고전 7:32) 함이니 주님께서 경고하신 바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세상 염려"(마 13:22)와의 단절이다. 우는 자는 울지 않는 것 같이,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즉 주님의 일에 전념하기 위한 일편단심에서 오는 것이다.

 

세상 삶에서 오는 기쁨이나 슬픔이 덧없다는 것이요 주님의 일에서는 항상 기뻐함이 당연하다.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일하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으로 일하고 마음을 쓰기 까닭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고 한 것은 세상 일을 두고 하는 말이요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는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한 대로 그야말로 노심초사다. 남의 종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경우 자유인이 될 수 있어도 차라리 그 종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구원의 말씀의 매개자가 됨이 합당하다는(:21) 바울 사도의 절박한 경고는 우리 모두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 삶을 누리고자 하는 헛된 욕망은 씨앗도 구경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때가 "단축해졌다고"(:29) 하여 마치 그 때가 주님의 재림이 박두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사도들이 성령을 통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예언의 성격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주님의 재림은 때를 가리지 않고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아무 하자가 없는 것이다. 당시나 오늘이나 우리의 이 기본 몸 가짐에는 변화가 있을 리 없다. 항상 언,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내일이 주님 오시는 것처럼 임해야 하는 까닭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이 평범한 문구에 대해서도 이상할 정도로 무지하다. 날 위해 죽으셨다면 결초보은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 역시 주님 위해 죽어야 사람 도리가 아닌가(요일 3:16). 그렇지 않으면 지독한 이기주의의 발로일 뿐이다. 이런 이기주의자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이런 이기주의자들을 위하신 것이라면 처음부터 아담이 죽었을 리도 만무하고 악령들이 영원 멸망에 처해 있을 리도 없다. 처음부터 "회개하라"고 명령하실 리도 없다(행 17:30).


"그런 식으로 나가면 누가 이 세상 살 수 있는가" 하려는가? 누가 이 세상 살라고 하던가? 살려면 앞의 말 되풀이지만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하고 싸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요 20:21,22)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바다. 그래서 상황이 같음을 명백히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 하셨다. 무식이 대판이 아니라 억지가 대판이다. 막무가내로 밀어부친 사탄의 얼토당토않은 죽음과 멸망의 교리다.

 

이 교리가 대체적으로 전"기독교"계를 풍미하고 있는 오늘이다. 다수(多數)가 정의가 아니다. 악마가 이 세상 신 노릇을 하고 있을진대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신이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가 중간에 이 세상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인간 세상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얼마나 그가 튼튼한 전통과 인습과 역사와 "권위"를 쌓아올렸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자체가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 "권위"에 도전하는 자 세상에서 따돌림 받고 죽어지내듯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영광 가운데 나타날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고 엄중 경고하시고 있다(막 8:38).
 

아인슈타인은 틀린 것이고 보어는 모른 것이다


보어가 무엇을 몰랐다는 것인가. 만물의 양면성을 알았다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은 자연계와 대립되어 있는 세계를 알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학자로서 요즘 대두되고 있는 반(反)물질 정도의 감이라도 잡히는 말쯤 할 법한데도 도대체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입을 다문 것이다. 이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증거다. 만물의 양면성을 논할 때는 이 초자연계와 자연계가 대립되어 있는 사실이 정작 중요하고 핵심인데 이를 간과했으니 아인슈타인보다 나은 것이 없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틀렸고> 보어는 <몰랐다>. 모두 무식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무식하다는 결정적 증거는 둘 다 성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배제했기 때문에 나오는 필연적 결론이다. 성경을 모름이 아니라면 감히 그들을 무식하다고 칭하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유식이고 모르는 것이 정직하게 말해 무식이다. "알고" "모르고"의 자랑이 아니라 영원한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 어찌 그만한 무게를 두지 않으리요.

 

초자연계를 말하게 되면 당연히 성경의 모든 사실이 논의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성경의 모든 기적은 바로 초자연계 존재들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무시하는 까닭은 그 기록된 기적을 두고 하는 말인데 실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가정한다면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이 어찌 비이성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니,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이 과연 실존하는지 그 여부부터 먼저 따져야 제대로 된 순서이고, 그 올바른 해답은 이 초자연계가 자연계와의 대립 관계로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성에서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초자연계는 자연계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자연계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들어가는 터라 기적 정도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초자연계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부터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다른 것이야 말하나마나다.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못믿는다고 한다. 공기는 보이는가? 그러나 그 힘은 느끼지 않는가 하겠지만, 바로 하나님의 힘이 이 만물이 아닌가. 이 정도라도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기보다 생각 자체를 하기를 싫어함이니,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가 일종의 거부감을 일으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속박, 제약, 억압 등의 단어만 떠올리는 것이니 이는 솔직하게 말해 자아중심의 근성 때문이다.

 

법과 질서의 아름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창조자를 법과 질서의 화신쯤으로 보아도 그런 망상을 일으킬 리 없다. 악인들이 법과 질서를 미워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고 이치다. 법과 질서를 대표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머리의 존재다. 모든 기관, 단체, 집단에는 머리가 있고 이 머리 없이는 구동하지 못한다. 최소 단위인 가정에서도 가장(家長)이 있다. 하물며 이 우주에 머리가 없다고 상상이 될 수 있는가. 필자는 여기서 유신론을 펴려는 것이 아니다. 유신론보다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만유의 법칙(3위1체의 원리)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 모든 인생이 보어나 아인슈타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 상식 차원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부터도 외면하고 무시하고 들어가는 인간의 교만이 무서운 것이다. 이 바로, 자기 파멸의 장본이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진실되게 사물을 규명해보려는 열의가 없이 어찌 산다고 할 것인가. 외곬으로 편견만 앞세울 때는 이미 진리는 실종되어 있다. 좌우지간에 이제는 싫든 좋든 초자연계의 실상을 필연적으로 대면하게 되어 있는 시점에 우리는 위치해 있다. 앞으로 "악한 자"(살후 2:9)가 나타날 때에는 누구나 예외없이 이 사실을 신물이 나도록 시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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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서도 밝혔지만 이 글은 모든 종교의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일 뿐이지 다양한 얼굴을 할 리가 없습니다. 표현 표정의 방식이야 다양하지만 얼굴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속성상(악마 마귀에게 예속된-고후 4:4/요 14:30/계 12:9) 거짓됨과 속임수가 판을 치므로 진리 아닌 것이 진리 행세를 하므로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 비진리의 가면을 부득불 아니 벗길 수 없어 여기서 충돌이 일어남은 필연입니다.

 

고로 이 글은 항시라도 공격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은 정보 취득에서 편리하나, 반면 처음부터 공격의 대상으로 인터넷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책자로 발간함이 안전하나 아직은 상황이 열악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고가 될만 하다 싶으시면 지체없이 컴퓨터에 복사하시어 틈 나는 대로 충분히 음미하여 살펴보신 다음에 처리하셔도 늦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에 동조하시면 널리 소개하실 것은 기대합니다. 이것이 "말씀 전파"(딤후 4:2)입니다.

 

사정이 좋으면 책자로 발간할 계획이 있으나 현재로는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글에 대한 비판은 나중에 하시더라도 늦지 않으니 일단 복사하여 옮겨 놓아주시기를 거듭 간곡히 권해드립니다. 세상 종교 집단을 공격함이 목적이 아니고 단지 그들과의 차이를 지적한 것뿐이니(성경 해석 등) 관계되는 분들은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을 타인에게 다시 옮겨주실 때에는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라는 제목의 글을 허락을 받아 옮긴다는 문구를 함께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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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라"(살후 3:1,2),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 4:3),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셔서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주시기를 구할 것이니"(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 and for me)(엡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