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법칙/3운법칙

3운법칙(fashomo, trini homo) 작명

Tayseek Kwon 2015. 12. 31. 19:54

 구원의 진리가 너무 간명하기에 

악인(죄인이 아닌, 죄인과 악인을 구별해야)을

(오만함이 그 대표적 악이니 사탄도 이로써 단죄된 것ㅡ딤전 3:6)

차단하시기 위해 여러 장애가 있는 바 
그런 각종 장애 가운데 

진화론이 있었고 무신론도 그 하나였었다

 



 

무신론 진화론 따위가 그런 장애라고 했지만 대규모의 어마어마한 장애가 나타날 것인 바 곧 "창조주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온갖 현란한 기적(초자연적 현상)으로 최후 발악적으로  세계인을 속이게 될 이른바 적 그리스도(anti-christ)의 출현이다. 성경도 이를 미리 언급, 경고하고 있다(살후 2:3-12). 영역(KJV)으로는 대단한 것(strong delusion)이라 번역하고  있으니 각성을 요한다. 그 때 가서 창조주를 시인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니 지금 이 때 이 시간 각자의 영원 운명을 결정할 일이다. 영원 운명이 바로 내 손 안에 있다는 사실ㅡ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가. 잠 잘 때가 아니요 소스라쳐 깨어 있을 때다


  

바벨론 궁전 벽" 20세기 경고에 뒤이어  

이 세상 신(神)의 최대의 사기극 곧 연출될 것


 

3운법칙ㅡ3종류로 나타나는 운명이라니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운명은 운명이다. 세 가지 종류로 한정해서 사람 한 평생의 LP, DP는 물론 JP도 정해지니까. 여기서 그 누구도 빠져 나가지 못하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한 목숨 사는 동안 날고 뛰든 또는 그렇지 못하든 대관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장차 임하는 초자연 세계에서는 물거품처럼 모두 잊혀진다. 오직 단 한 가지, 이 세상 자연계 몸으로 있을 때 이 몸으로 우리가 행한 언어 행실(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가서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는다 하셨으니까-마 12:36) 즉 선악간에 행한(고후 5:10) 바를 따라, 이생이 그 때 가서 전생(前生)이 되는데, "전생"에서 행한 옳고 그름을 따라 심판 받는 대로 영원한 운명이 정해지는 것, 이것이 참으로 두렵고 떨릴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3운법칙이 오늘날 소개되는 유일무이의 의의요 목적이다.


3위1체 원리의 의미는 단적으로 말해서 현상이 있으면 그 대칭(상칭, 대립)되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어서 그 나머지 존재 여부를 확인하느라 머리 싸맬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이것이 있는 것은 저것 역시 당연히 있다는 바로 그 직접적 증거가 됨을 입증해주는 것이요, 그리고 이 법칙을 검증하는 것이 3운법칙이라는 것. 그리고 이 3운법칙의 핵심되는 요소가 19라는 숫자에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 삶(진정한 정상적인 의미의 삶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삶에는 단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어 쓴 맛을 보는 것 역시 삶은 삶이니까 더구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의미일진대 그 비중으로 말하면 영원 세상에서의 삶의 쾌락보다 더 엄중한 의미가 있다)의 운명은 규격화되어 움직여지나 즉 살아지나(살아가는 것이 아닌), 장차 전개될 나의 본격적인 생사 여부는 내 스스로 정하는 것으로서 사람답게(창조하신 애초의 의미대로) 살면 그 자유 선택대로 삶의 낙을 최고도로 향유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이 삶의 법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기 고집 곧 한 때의 편안함과 안일을 따라 자아중심으로 이 세월을 낭비하면 그렇게 심은 대로 거두는 것뿐이니 이야말로 사필귀정인 것이다.


고로 3운법칙이나 3위1체 원리 등이 세상 앞에 이제 뒤늦게 나타난 것은 이 엄중한 사실을 알고 "악함을 버리라"(행 3:26)라는 최후 경고이신 것이다. 만유의 법칙이라 해서 무슨 크나큰 과학계의 발견이나 한 것처럼 놀랄 일은 하나도 없다. 자연법칙만을 다루는 자연과학의 실험 검증의 한도를 벗어나 자연계의 영역 밖이니까 오직 상식과 이지적인 판단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인과론에 불과하여 상식 수준이다. 누구나 감으로는 그렇다고 인정했지만 확증은 못했는데 이제 그 진상이 이 기이한 3운법칙으로 만천하에 드러난 것뿐이다.


만법귀일(萬法歸一)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복잡다단한 법칙과 원리원칙들이 하나로 귀일해버리면 너무 간단해서 그야말로 싱겁기 짝이 없고 허탈감마저 드는 것이다. 진리가 그렇다. 기본 법칙은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그것이 적용되어 있는 것을 세부적으로 뜯어가 보면 그야말로 웅장하고 방대하여 어렵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기본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살피면 실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하다. 대충 윤곽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 테두리만 밟아 가면 되겠기에. 진리 특별히 구원에 관한 진리는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 명료한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언어는 어디서든지 통한다.


이 3운법칙이 아주 간단한 수치로 운영되는 것 자체가 누구든지 보고 직접 증험해 보라고 하시는 뜻임이 명백하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얼마든지 사람 생애를 게산해보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라도 내일 아니 이 시간 후라도 얼마든지 사고사를 당하든 병사를 하든 그 영혼이 떠나갈 수 있는 판인데, 그 아이가 언제 어른이 되도록 구원의 이치를 이해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기다려줄 것인가. 지금이라도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어 사랑하면 사랑할 줄 알게 되면 넉넉히 영생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진리는 처음부터 극히 간단 명료한 것이다. 이런 시급하고도 동시에 너무나 간결한 것을 "신학"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 마치 특정인만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해놓은 것 자체가 큰 불찰이다.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나 계시를 무시한 신학은 백해무익임이 이제까지 입증되어 온 바가 아닌가.


아이나 어른이나 무식자나 유식자나 누구나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올바르게 살고자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장벽 곧 이 세상 신(神)이 쳐놓은 장벽을 사랑의 생명력으로 격파하여 나갈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누구든지 구원받아 영생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마치 공짜로 영생 얻어 챙겨 가지는 것쯤으로 이제까지 "기독교"는 잘못 가르쳐 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생하는 자로 다시 출생하고 그래서 새로 창조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다. 과거 죽은 상태에서는 어떤 의도 선도 행할 수 없었다.


다시 출생하여 새로 창조되면서 비로소 의와 선을 행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음이다. 고로 의와 선을 행하기를 요구함은 당연하다. 잘못된 신학 교리는 일체의 행함을 배제하는 식으로 그래서 욕심 내고 자아중심으로 살아도 구원은 받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위험천만의 것이다. 죽은 자로서 선과 의를 행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산 자가 되어 충분히 생명력(이 생명력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어)을 가동시킬 수 있으므로 계명을 지킴이 요구되는 것이다. 계명이라고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한 몸 체제에서 사는 법대로 사는 상식 수준이다.


즉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한 몸을 이룬 머리의 지시를 따라 각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함이니 눈은 손을 위하고 손은 눈을 위하지 자기를 위해보아야 의미도 없을뿐더러 전체적인 자아를 형성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으니까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니 자아중심에 대한 상대적인 용어다. 이 지극히 상식적인 계명이 내가 과거 죽어 있을 때에는 도저히 쳐다볼 수도 없는 태산이었기에 그래서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만 소극적으로 감당한 것으로서 이 곧 모세 율법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문화한 것이 모세 율법이고 불문화한 것이 각자의 양심인 것이다(롬 2:15). 


이제 구원 받아 산 자가 되고 더구나 하나님의 양아들들이 되었으니까 당연히 이 생명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필수인 것이다. 법이라고 해서 강제성을 띠는 것으로 소극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아니하는 것이 자유인인 것이다. 우리의 구원됨을 자유인이 됨으로써 묘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눅 4:18/요 8:32,36/롬 8:21고전 7:22/고후 3:17/갈 5:1,13/약 1:25).


영생하는 자로 새로 창조되었고 다시 출생했으니 당연히 믿는 오늘 이 시간 죽어도 영생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영생하는 것이 아니다. 재출생, 새 창조이다. 창조에 무슨 시간이 필요하며 내 노력이 요구되는 것인가.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몽땅 주셔서(바치셔서) 내 이름으로 죄인의 형벌(죄는 경중의 차별이 없고 똑같이 자아중심이므로 자아중심은 말 그 대로 자기가 중심이어서 자기 이외에 그 누구도 용납 못하기에 필연적으로 살인행위로 종착되는 것인즉 최고형의 중죄 곧 사형에 해당된다)을 나와 함께 받으신(나를 대신해서가 아닌) 그 십자가 사랑을 보는 순간 깨닫는 순간 나는 그 사랑에 감화되어 하나님께 대한 한없는 사랑이 나를 사로 잡게 되고 그리 되면 자연 그 뜻대로 살지 못한 과거 세월이 후회스럽고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회오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다.


이 "회개"는 종교적 또는 신학적 용어가 아니니 뉘우침, 회심, 개심, 전향 등 그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 없다. 죄, 악에서 선과 의(義)로 돌이킴이다. 이렇게 회개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말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게 되고, 이와 같이 마지막 아담과 하나된 사실을 온 마음으로 믿어 감사하게 되면 엄마 품이 한 때 잃어버렸던 고아를 품게 되듯이 마지막 아담 친히 성령으로(아버지와 하나되신 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 내게 임하시면 나는 그 순간 명실 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써는 영으로 출생함이니, 육체로 이미 우리가 출생해 있어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고 있는 터이므로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는 출생을 재출생이라 하는 것. 재출생이 원래부터 필요한 것이 아니나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생이 이 죽음의 자연계 육체가 되어버려 망가졌기 때문에 재출생, 신창조가 아니고는 절대로 초자연계에 진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새로 창조된 그래서 다시 출생함으로써 하나님의 양아들이 되는 것이다.


영원한 세계 즉 초자연계에서는 양자, 양녀 남녀 구분이 없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된다. 바꾸어 발하면 모두가 아리따운 여성 같기도 하고 늠름한 남성 같기도 한 완전한 모습이 되는 것. 자연계 육체로는 남녀 서로 보완적이므로 남성 없이 여자만은 불완전하고 여성 없이 남자만으로 온전하지 못한 상태다. 처음부터 남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보좌할 짝을 정해주시려고 영물들(초자연계에서의 "각종 짐승들")을 만드셨으나 아담이 자기 짝이라고 가까이 할 만한 것은 아무도 없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자기와는 달라 좀 우스꽝스럽게 생겼으므로 그 별명을 붙여준 것이 그 이름들이다.


아담이 처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즉 흙으로써 창조될 때 남녀 성별을 가지지 않았다. 만일 남자로 만드셨으면 곧 이어 당연히 여자를 만드셨을 것이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에덴낙원을 만드신 다음에야 "사람(아담)이 혼자 지냄이 좋지 않다" 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도 여자가 아닌 "각종 짐승들"을 만드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중 하나를 택해 아담의 짝으로 삼고 나머지도 역시 모두 아담의 보좌역이 되게 하심이었다. 초자연계 몸으로 있으면 이 자연계 육체처럼 반드시 양성 구분이 되어야 인간을 생산하는 것이 아님은, 막강한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리고 주변의 영물(靈物)들의 도움을 입어 능히 아담 혼자서 자식 생산이 가능한 것이다. 자연계 몸이 되면서부터 남녀 양성이 필수가 된 것뿐이다.


그래서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아무도 없으므로 아담과 똑같은 또 하나의 인간이 아니면 아담이 만족하지 않을 것이기에 자연계 동물들의 암수를 정하시어 만드신 방법으로 인간을 남녀 양성으로 구분하신 것이다. 이제 새 피조물 즉 다시 출생함으로써 마지막 아담을 기점으로 하는 새 인류는 남녀 구별이 없다. 멸망에 들어가 영원한 고통 속에 지낼 악인들도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면서 성별은 사라진다. 영원한 멸망,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그 곳에서 고난 고통과 더불어 지내게 되어 있는 악령이나 악인이나 모두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도 의인들도 옳고 (의롭고)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어떤 대가를 무릅써서라도 자기 선택으로 그 삶의 법도(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를 준수했기 때문에 영원한 삶의 낙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 자체에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악인이나 악령들은 단지 생명의 반대되는 온갖 것을 겪고 영원 세월을 보내게 된다는 그 차이만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연계에 속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처지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회개하라고 하시는 명령에(행 17:30)  순응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행 2:38/8:20/11:17) 말미암은 것이나 그래서 그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지면 영생에로 직행이나,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과거 거룩한 천사들 중 일부가 사탄을 비롯해 교만한 마음을 품고 범죄 타락하였고 아담이 또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은 똑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지 그들과 차별되는 특별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공평공정 공명정대하시므로 절대로 그 만드신 피조물을 차별하시지 않는다. 많은 자식을 낳은 부모가 똑같이 위하고 차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어버이 마음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있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담의 애초의 초자연계 몸으로 복구하는 의미이다. 이미 범죄하여 그 상응한 대가를 받고 있는 악령들이나 과거 아담과 다른 상황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번도 영생하는 자로서 시험 받아 우리 믿음과 사랑이 저울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시험대에 놓여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의미이다. 시험 받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나 사람 살리시는 아버지의 일을 아들들로서 제대로 수용하는지의 여부가 자연스럽게 저울질되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과거 악령들이나 아담처럼 마음을 잘못 가져 교만해져 범죄하게 되면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은 필연이다. 오늘날의 사정으로 보면 지금까지 믿고 지내왔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도 (그릇된 교리를 따라) 범죄를 했을 경우 거의 전부가 실제 믿지도 않으면서 구원 받은 자로 자처했을 것인즉 지금이라도 제대로 믿음에 들어와 회개하여 순종하기로 확약하고 확정하면 비로소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믿고 구원 받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범죄했으니 다시는 용서 못받는 '고의적인 범죄 행위'에 걸린 것이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끝까지 구원 받았다 고집하고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나가면서 로마서 7장 타령만 하고 지낸다면 영원히 구제 불능이다. 지금은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아주 잘못된 종교적(성경에 의함이 아닌) 교리에 속아 자신의 운명을 망치는 사례가 거의 대부분이기에 이와 같은 3위1체의 원리라든가 3운법칙과 같은 특이한 것을 통해 다시 한번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니, 이 말씀을 모든 인생들은 귀 담아 들을 일이다.


이 외침에 대한 부정적 반응은 거셀 것이고 이렇게 말하는 필자도 앞서 간 우리의 믿음의 선배 바울 사도가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죽을 것도 각오하였다"(행 21:13) 한 그 말을 복창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파하기를 작정한 사람마다 모름지기 이런 일사각오로 임할 일이다. 세상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호적이었던 역사가 없다. 이 세상 신(神)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고 한 그대로다(고후 4:4/요일 5:19). 세상을 짝사랑하여 세상 삶을 유지 보전하고자 하는 데에서 온갖 기독교 비리는 싹튼다. 죽음과 고난에 초연할 것이니, 죽음에 대하여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 오는 세대에서의 영광을 바라는 모든 자의 마땅히 취할 자세가 아닌가.


3운법칙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입에 익숙한 이름으로 부르면 좋을 방법을 찾다가 라틴어를 원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fas homo라 한 것이다. 라틴어를 택한 것은 특정 국가 용어로 하면 국수적인 배타 감정을 갖게 될 수 있으므로 두루뭉실하게 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fas는 라틴어로 신 또는 하늘의 뜻, 명령, 법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 거기에다 사람이라는 homo를 덧붙인 것이다. 또 3운법칙은 3위1체 원리를 검증하는 것으로서 3위1체와 불가분이기에 3위1체 원리(the law of Trinity), 간략히 trini law와 일관성이 있게 trini homo로도 알리고 있다.


fas homo를 부르기 쉽도록 fashomo라 하기도 한다. trinitas라는 3위1체를 의미하는 라틴어도 정확히 의미를 반영한 것은 물론 아니다. triad(3개씩 1 벌)라는 뜻뿐이다. dyad 즉 두개씩 한 벌과 마찬가지로 우리 말의 신 한 켤레, 양말 한 켤레 등의 의미다. 애초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냥 편하게 지어 부른 것뿐이지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것은 아닌 것이다. 다만 "3위 1체"가 널리 알려진 단어이기에 또 그런 용어가 성경에 말씀하신 바로 그 대목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3위1체 원리"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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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한 켤례를 영어로는 a pair of socks. 앞에 분명히 단수 a다. 뒤에는 복수 s가 붙는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요강이다. 셋도 아니다. 사람 손이 둘이고 발이 둘로서 짝으로 되어 있는 생김새를 따름이다. 양말 하나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항상 단위가 하나 즉 둘을 하나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고 양말 하나만 고집한다. 자연계만 고집하고 피조물인 이 보이는 세계뿐이라고 한다. 창조자와 짝이 되어 한 켤레가 되어 있는 줄은 모른다. 인과론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무슨 진리를 논하리요. 창조주께서 피조물과 하나로서, 자신처럼 위하시기에 나 위해 십자가 고통의 부끄러움과 죽음까지도 불사하신 것임을 모른다. 기막힌 일이 아닌가. 막된 자식이 들어 어머니 눈물을 마를 날이 없게 한다.


가까이 오시어 성을 보고 우시며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다. 지금 네 눈에 숨겨져 있구나"(눅 19:41).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마 23:37). "숨겨져" 있는 까닭은 새끼가 암탉 앞으로 나오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당신 이름을 대입해보라. 성경은 내 이름을 대입해서 읽는 세상 유일의 책이다. 그러면 당신에게 들려주시는 거룩하신 이의 오열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은희야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다. 그러나 지금 네 눈에 숨겨져 있구나.  은희야, 은희야...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네가 원치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