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기도

휴면 상태에 있는 교회 내의 막강한 기도의 동력실(動力室)

Tayseek Kwon 2019. 4. 10. 18:02





휴면 상태에 있는 교회 내의 막강한 기도의 동력실(動力室)





아담이나 영물(靈物) 용(龍)이나 하나님을 몰라서 범죄한 것이 아니다. 우리로 말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도 믿고 성경이 진실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았지만 범죄한 것이다. 그럼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음"이라고 하지만 따지고 올라가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 없음"이다. 믿음도 "사랑으로써 역사되는"(갈 5:6) 것. 즉 사랑을 기반으로 한 자기 부인이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자아중심으로 흘러버린 것이다.


물론 우리 인생으로서는 하나님이 계심도 알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 각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함이 먼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 뜻인데, 우리로서는 방금 지적한 이 두 가지로써 그런 기본 토대부터 닦아놓는 것이 물론 시급하다. 그래서 그 작업을 확실하게 수행함에 있어서 3운법칙을 말하고 3운법칙으로 검증되고 있는 3위1체 원리를 말하게 되는 것. 둘은 상호 검증하는 관계이다.


3위1체 원리가 있기 때문에 3운법칙의 진실성이 보장되고 3운법칙이 있음으로써 3위1체 원리의 확실성이 공고해짐이다. 물론 3위1체의 법칙이 3운법칙에 의해서만 증명되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신 말씀으로 이미 입증되어 있고, 또 그 구체적 표현으로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신 데에서 이미 확고한 기틀을 잡고 있다.



그러므로 3운법칙은 그 방증(傍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방증으로서는 또한 최근 실험에서 드러난 "양자 얽힘"에서의 두 미립자 간의 "엎 스핀"과 "다운 스핀"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고, 그 이전으로는 빛의 구조에서의 파동성과 입자성과의 대립 관계가 그러하고, 옛부터의 중국 철학 체계가 음양 조화를 기반으로 하여 전승되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나, 어느 하나도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는 미흡했으니 인과 관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 자체만으로도 그 미숙함은 드러나는 것이다.


방증이든 증명이든 하나님 계심을 알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았고 이 세상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저주 아래 있는 터라 이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이고 나 자신 들어갔으면 당연히 남을 구원해내려고 전력을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악마의 방해에 직면하여 각종 고난 특별히 인화(人禍) 즉 바울의 전도 활동에서 악한 사람들로 인해 많은 고난을 받은 것처럼 그런 역경에 부딪치게 되고 이렇게 싸우다가 보면 세상은 (내게 관한 한) 끝나는 것이다.


일하는 작업장이요 싸우는 전쟁 터이니 당연히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전투 지휘관의 작전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 역시 작전 지시이다. 성경은 그런 전법, 전술로 가득 차 있는 작전(作戰) 교본(敎本) 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이 아니라 최신예 전술서(戰術書)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가장 오랜 정보일 뿐 아니라 가장 최신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명령과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 구원 얻음은 원천적으로 사탄과의 적대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므로 영적 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구원 받는 자를 "이기는 자"로 명백히 표현해놓았다. 그러므로 세상의 육체를 따른 전투보다 더 엄중하고 위중한 상황인데 마치 평화의 시기인 양 태평이라면 어찌 무사할 것인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니 그렇게 하면 어떻게 세상 살라는 말이냐 하려는가. 누가 살라고 하던가? 작업 중에 또는 전투 중에 있는 자가 놀면서 춤추며 노래하면서 할 수 있는가. 다윗처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춤 추고 "주님께 노래하는"(엡 5:19)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육체로서의 삶과는 현재로서는 관계 없는 일이다. 이런 구차한 몸으로 세상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가,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움으로써 사람 구원해내는 일을 하기 위함인 것. 


말로 전도만 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제사장의 기도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데 이 기도는 제물로서의 희생적인 고난이 수반되어야 하므로 "살아 있는 제물"로 항상 자신을 드리는 것이 "합리적 예배(reasonable service)"(롬 12:1)이다. 이렇게 세상이 보기에는 저런 사람들 무슨 맛으로 세상 사나 하고 측은하게 여겨 혀를 찰 정도이고 오히려 연민을 느낄 만하지만 이렇게 일하고 싸우는(전쟁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다름아닌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빌 4:4), 궂은 일에나 좋은 일에나 항상 감사함(살전 5:16)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암 6:4-6)가 되는 것을 극력 기피할 일이다. 요셉의 환난은 바로 코 앞의 북한 교회를 예로 들 수 있지 않는가.


 그 고난 받는 북한 교회와 한 몸이라 여길진대 절대로 그 고통과 다르게 생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라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들과 한 몸이 아니라는 증거다. 머리이신 주님과도 당연히 분리되어 있는 상태다. 때문에 이러한 전쟁의 상황에서 말씀을 전달할 때에도 바울 사도는 "약함으로 두렵고 떨면서"(고전 2:3-5) 전함으로써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본이 되어 있는데도 이를 따르는 자 오늘날 과연 누구인가. 이것이 말씀 전달하는 기본 자세다. 


기껏해야 졸음 쫓아준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라면서 만담가로 일관하는 철부지 소위 "설교자"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을 질타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만으로 일관하려는 자들을 이 시대는 요구한다. "나는 이것(엘리야)도 아니고 저것(그리스도)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지금은 다시) 오심을 준비케 하는 소리"뿐임을 자임해야 거기에 무슨 들을 만한 '소리'가 있게 된다. 그렇지 않고는 모두 껍데기 빈 깡통 소리로만 요란할 뿐이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양자 간의 불가분성의 사랑 관계 즉 둘이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건만, 자아중심으로 뭉쳐진 자연계 육체에 속한 인생들은 이 진리를 수용하기에 너무나 미흡했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우리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써 모든 것은 밝혀진 것이다. 밝혀졌지만 역시 "사랑" 하나에 매여 있으니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시는 자가 되어 있으나 이것을 단지 지식으로만 사장(死藏)하는 경우 자기만 속임이니 이럴 경우 차라리 모름만 못하다 하는 것이다(고전 8:1-3).


로마서 7장을 탈피하여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살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니 아내/남편을 기쁘게 해주려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것에 장애가 될까 하여 항상 경계심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당시 초대 교회의 그 정상 상태로 우리는 한시 바삐 복귀해야 하는 것. 아내/남편과 함께 사는 것에 우선하여,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의 전부를 선물로 주심으로 이제 나와 함께 사시는 사랑의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의 새 기원을 각자 나름대로 창출하며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Living with Jesus my Lord"(나의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라는 제목의 찬송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거의 나의 구원 받은 사실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는 내용들이다.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가 보통 아는 대로의 "함께 사는" 것과는 아주 다르니, 삶과 사랑의 법칙대로 정상적으로 사는 사랑의 삶을 말함이다. 즉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어 살 때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것이다. 모름지기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이라 함은,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어 나를 지배하시고 제어하셔서 내가 주님 위해 살도록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주체가 되어 내가 그렇게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시도록 해 드린다는 여기에 사랑으로서의 특징적 핵심이 있다. 물론 주님 편에서는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하심이 되어 있으므로 주님께서 나를 위해 살아주시는 측면에서 주님께서 주동이 되어 계심은(내가 주님을 위해 사는 일에 주체가 되어 있음과 똑같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되어 있는 사랑의 지극히 아름다운 복된 관계에서는 그 한 쪽의 주체로서(나머지 다른 한 쪽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것이니, 따라서 고난 받음도 "주님을 위한"(빌 1:29) 것이므로 이 세상에서 주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은 내 스스로 기쁨으로 자진해서 받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자기 부인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생 삶의 요지, 요체가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욕심에서 이를 외면해 온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가는 것도 이 둘의 하나됨 즉 한 몸 체제에서 오는 "함께 고통 당함"(고전 12:26) 외에 별 뜻이 없건마는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이 구원되는 근본 이치가 되건마는 마치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인 것처럼 여겨 오고 또 가르쳐 온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인간에게 불가능인 것이야 맞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가능이라 하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성경대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 받은 일에 장애가 되어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음을 다시 강조한다. 누구든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마 18:3) 이들은 구원 받음에 하등 지장이 없었으니 앞에서 역설한 대로 사랑이 구원의 핵심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엄마 말대로 따르듯이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으로써 전부이다. 오직 그런 당치도 않은 "지식"에 의존하고 그런 소위 "지식"을 자랑하는 이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의 길의 장애요 철벽(鐵壁)"이었을 뿐이다.


모세 지팡이


그러므로 지금까지 세상이 한결같이 이런 그릇된 교리에 빠져 있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대로 말씀을 선포함인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견해로서만 판단하여 여전히 듣기를 거부할 것이기에, 이 경우 나타내어주신 것이 "모세의 지팡이"(출 4:1,2)로서의 3위1체의 원리 그리고 이를 검증하는 3운법칙 등이다. 여기서 보내심 받는다는 것은 우리 구원 자체가 보내심 받은 것임을 뜻한다. 즉 남은 생애 그럭저럭 살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니,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었은즉 양자(롬 8:23)답게 오직 아버지의 일을 하라는 뜻만이 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를 "보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하라는 것이요 거기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 이 점에서 나타나는 "모세 지팡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3위1체"(성경 용어가 아니고 신학계에서 만든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의미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어도 통용되어 왔었고 그만큼 설명이 요구되는 엄연한 실체임은 분명하므로)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었다. 설명이 안되는 것을 믿고 따르자니 고충이 컸었다. 설명이 안된다는 것은 이해를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3운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의 원리로써 훌륭하게 설명된 것이다. 이런 것을 나타내주셨으니, 더불어 나타내는 실상 즉 성경의 자기 부인, 매일 십자가 짐 그리고 이 세상 사랑에 대한 경고 등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있는 본디대로의 의미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 막중한 무게를 실어줌은 당연하다. 즉 일개인의 소견이나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하신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고유의 뜻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모세 지팡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진실성은 그 자체 증명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그 어떤 조력도 그 진실성에 대한 입증 작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 3운법칙이니 3위1체의 원리니 하는 것이 알려지는 것은 그러함에도 더 무게를 얹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긍휼이신 것이다.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눅 1:4)의 일환이다. 다수가 진리는 아니다. 영생 문제에 관한 한 진리는 오히려 "소수"에 속한다. 그만큼 역류해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는 힘이 더 보강됨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이 없고 잘 모르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사랑하리요 했지만, 우리에게 사람이 되어 임하셔서 나타내신 모든 것을 우리가 듣고 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를 위해 자기의 전부를 주심으로써 친히 내게 영원한 선물이 되어 계시니 이보다 더 자세한 앎은 없다.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ㅡ이보다 더 온전하고 완벽한 지식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만의 일이신가? "아버지"께서는 그렇지 않으신가? 이에 대해서도 명백히 하셨으니, 즉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하시고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나타내고 말씀하심임을 명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하셨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들께서 나타내신 그대로이시니 즉 우리가 아들께 관하여 아는 그대로의 아버지 모습이시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니 당연한 얘기다.


그런즉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없다.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바쳐 십자가의 고난 받으신 사실 이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이상 우리가 요구하는 바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함께 하나를 이루심으로써 항상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아들. 그리고 아들을 나타내시는 아버지. 양면성과 동시성. 이것이 정녕 그러함을 3운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 원리로 대낮같이 밝혀져 있음이다.


이렇게 하나로 계심을 가리켜 제3인칭으로 받아 "성령"이시라 함을 앞에서 여러 번 설명했거니와, 만일 여기 엉뚱한 제3자로서의 성령을 억지로 만든다면 그 성령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따르게 마련이다. 영원한 수수께끼의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면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로 계시고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므로 아들의 모습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라 즉 아들의 어떠하심이 아버지의 어떠하심인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 이상 아버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와 별도로 존재한다 가정한다면 무슨 수로 성령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분명히 주님께서는 너희가 그를 "안다"고 하셨다. 이 "너희가 알고 있다"는 말씀이 "3위1체"에서의 성령을 이해하는 데에 확정적 열쇠가 된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다"ㅡ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뿐인데 "안다"ㅡ그러면 그 알고 있는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뿐이시다. 그렇다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셨으니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아무 어려울 것이 없게 된다.


아버지와 하나로 게시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아들 자신이라 하실 수 없으므로 그렇다고 아버지시라고도 할 수 없어 제3인칭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안다"는 것은 우리의 현재 처지에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외의 것은 우리의 이 "사랑"(생명의 핵심이 사랑인데)에서 현재로서는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우주 전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다는 모르고 일부만 안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 지장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음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니 그러나 이 앎 또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고"(살후 3:2) 믿는 자 즉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어떤 사람의 믿음은 막으시고 어떤 사람의 믿음은 열어주시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고 자유 선택권을 주신 이상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를 정하시어 모든 인생을 심판하시게 되어 있는 이상 당연히 그러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절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는 일 없이 각자의 운명은 각자가 결정한다는 엄숙한 사실을 입증함이다. "누구는 형벌 받고 누구는 영생하고"를 미리 정해놓으시고도 심판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이런 미신에 붙잡혀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놀랍다기보다 말씀을 무시함에서 오는 참담함이라 해야 옳다. 미리 택하심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따라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미리 보셨다는 것을 전제함이다.


"미리 안다"는 분야는 그 특정 제조자 또는 제작자만의 고유 능력이므로 이상할 것도 없다. 미리 아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왜 나는 그 제작자처럼 기술이 없고 재주가 없고 능력이 없어 제작자가 되지 못하는가 하는 점부터 이상하게 생각해야 그것이 재대로 되는 순서다. 그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리 아는 것도 괴이하게 여길 하등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미리 아시니까 그렇게 자유 의지로 믿음에 이르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미리 건사해주시는 것이 "미리 택하심"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타내시는 것이니 왜냐면 아버지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형상이고 실체는 그 형상을 통해 자신이 표현되기 때문. 그래서 "여호와"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아들이시나 반드시 유의할 것은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므로 아들께서 나타내시는 것은 또한 아버지이시라는 사실. "성령께서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롬 8:26,27)이라는 대목도 그러하다.


즉 아들께서 아버지께 그렇게 기도하시는 것을 가리킴이나(롬 8:34) 항상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므로 직접 아들이시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버지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아들과 또한 하나로 계시기 때문. 그러나 이 경우 모든 표현(행위에서나 말씀에서나)을 직접 하게 되는 형상으로서의 아들을 위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 '둘'을 한꺼번에 나타낼 수는 없고 그 중 '하나'가 대표일 수밖에 없으니 이 경우 형상이신 아들에 국한되어 그 대표성을 나타내심은 아무 이상할 것이 없다. 또 어떤 경우에는 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를 그 대표로 인정하는 때도 있다. 그런 사정은 전후 문맥과 사정을 따라 얼마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성경에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명시되어 있지만, 악인만은 구원되지 않도록 철저히 막으신다는 말씀이 동시에 나온다. 그런즉 회개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구원이다. 따라서 이 회개는 각자의 자유 선택에 달렸다는 의미다. 또 한 번 믿기를 거부했다고 그것이 영원한 결정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후라도 얼마든지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올 수 있음이다. 그 기다리시는 충분한 시간만은 하나님의 고유 능력에 속한다.


뿐 아니라 지금까지 사탄 마귀의 정체에 대해서도 날개가 있는 스랍이나 그룹으로 착각한 것이라든가 에덴낙원을 일개 자연계 동산쯤으로 오해하는 것이라든가(사람이 먹으면 영생하게 되고 또는 자연계 몸이 되어 죽게 하는 나무들이 식물의 대표로 있는 그 곳이 어째서 자연계에 속한다는 말인가ㅡ상식 문제가 아닌가) 등의 모든 그릇된 이해가 혁파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3위1체 원리(3운법칙으로 검증된)로써, "3위1체"를 해석한 그 권위로써 나타내는 정확한 성경 해석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해석이 별다른 논리를 내세움이 아니니 성경에 명기된 그대로의 사실을 선포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얼마나 악령 사탄 곧 이 세상 신이 얼토당토않게 지금까지 세상을 속여 왔는지 이 모든 것들이 그 역사이고 증거다. 이 모두가 사탄의 조종에 의한 것이니(성경을 통한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무조건 사람의 권위에 의존한 우리 인간의 잘못 또한 크지만), 왜냐면 에덴낙원이 초자연계이고 "뱀이 용이고 사탄"(계 20:2/12:9)이란 일련의 사실들이 밝혀지면 자기의 "옛 뱀"으로서의 정체가 드러나 자기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극력 이 실상 밝혀짐을 제지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든 우려가 불식되어도 좋은 때이니 드러내놓고 각종 기적으로써 자기를 창조신으로 가장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여건이 조성되어 가고 있는 시점이기에 그러하다(살후 2:7). 그러한 노골적인 용의 조화술이 작동되기 전에 최후 확정적인 하나님의 경고로서 이와 같은 "모세 지팡이"가 나타나 있는 것이니, 때 늦기 전에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에 주목하기를 바라는 최후 통첩과 같은 경고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이다(행 17:30).


"영생 얻으라"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다. 회개하려는 의지 앞에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생(구원)이 빛을 발하는 까닭이다. 고로 주님이 세상에서 육체로 계실 때 언제나 강조하신 것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이셨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구원하셨음에도 그 점을 강조하신 것은 우리 구원의 양면성과 동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이라도 온전치 못하면 둘 모두가 다 역사될 수 없다. 작동이 안되는 것이다.


병 고칠 때에는 그 고치는 당시에만 필요한 믿음이다. 그러나 구원 얻는 믿음은 끝까지 지탱해야 하는 특점이 있다. 다시 말해 중도에서 그 "처음 사랑"이 떨어질 수 있는 것이어서 병 고칠 때처럼 한 번 믿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믿음으로써 믿음에 이르는"(롬 1:17)" 특성 때문이다. 고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한 것(엡 3:17). 내 마음에 이미 계시는데 무슨 소리냐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믿음이 사랑이 식어짐(첫 사랑을 잃어버림)과 동시에(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되니까-갈 5:6) 흔들리기 시작하는 속성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자라기도" 한다(살후 1:3). 따라서 믿음은 "파선될"(딤전 1:19) 수  있고, "믿음에서 떠날"(4:1/6:10) 수 있고, "믿음을 배반할"(5:8) 수 있고, "믿음을 저버릴"(:12) 수 있고, "믿음에서 벗어날"(8:21) 수 있고, "믿음을 무너뜨릴"(딤후 2:18) 수 있고, "믿음에 관해서는 버림 받은"(3:8) 자가 될 수 있다. 고로 "믿음은 지켜야"(4:7) 하는 것이니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가 이 때문에 있는 것.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전 2:5) 한 대로 자기 과시를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계시되지 않는다. 자기 학벌, 경력을 앞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통용되지 않는다. 사도들 가운데 글줄이나 쓰고 체계 있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기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바울 한 사람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처음부터 많이 배우고 지혜 있다고 하는 자처하는 자들을 택하시지(마 11:25-27) 않은 이유다.


그런 것을 아예 쇠똥처럼 취급하는 자에게만 비밀을 나타내시고 그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대상 후보군(群)에 속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왜냐면 그런 이들은 교만해질 이유가 없음이다. 교만하게 되면 그 당사자의 미래도 문제지만 말씀이 계속 나타내질 수가 없음이다. 알아도 그 지식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마땅히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일 뿐인데도 괜히 우쭐대어 자신도 타인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딤전 4:16).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로 인한 그들 자신의 교만 때문이다(고전 8:1,2).


에덴 동산이 자연계가 아니라 초자연계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인간(아담)의 몸이 자연계에 속한 이런 육체가 아닌 천사들과 같은 신령한(초자연계에  속한) 몸이었다가 범죄함(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불복종하여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 육체의 목숨이 되었다고 인식하는 것과, 처음부터 자연계 몸이었다고 인식하는 것과는 대단한 근본적 차이가 있다. 우리들이야 처음부터 자연계에 속하여 태어났고 죽는 인생들이지만, 내가 첫 사람 아담이라고 가정할 때 과연 내가 어떠하겠는가.


이런 자연계 목숨은 슬픔과 고뇌 그리고 분노(사탄의 불의한 행동에 대한)로 점철될 것이 아닌가.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은 쥐꼬리만도 없을 것이다. 우리라고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다시 말해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숙지하고 있을 때는, 아담과 같은 정도는 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 수준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몰라도. 세상 사랑에 대해서는 입맛이 싹 가시게 될 것이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아니리요.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아담 부부도 지금까지 이팔 청춘의 아름다움으로 살아 있을 것이요 우리 역시 이런 자연계 몸의 초라함과 연약함에 갇혀 지낼 이유가 없이 천사들처럼 공중에나 물 속에서나 하늘에서나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아담이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정하셨을 때에는 공중의 새나 물 속의 어류나 모두 그 다스림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지 지상 동물만 다스리는 것이 아닐진대 물 속에도 공중에도 자유 자재로 다닐 수 있는 초자연계 몸이어야 제격이다.


그리고 더군다나 그런 동물들에 대해 전문가적 지식을 가진 영물들 즉 초자연계 존재들을 보좌역으로 거느리고 있는 데에서야 당연히 아담 스스로 초자연계 몸으로 있어야 함은 필연. 과연 그렇게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수장으로 있어 초자연계 몸이었었는데 "사탄 곧 용 즉 옛 뱀"(계 12:9/20:2)의 간계로 자연계 생명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 악령의 말을 들은 결과는 그 아래 예속되는 의미가 되었으니 이는 당연하다.


왜냐면 당시는 6일 창조가 갓 끝난 때로서(여자가 창조됨으로써) 아직 창조의 여운(餘韻)이 남아 있는 기간인지라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도전하여 말씀에 정반대로 나가는 피조물의 말(비록 속임수이고 거짓말일지라도)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순종할 경우, 바로 그렇게 도전 행위를 하는 자의 지배 아래에 들게 되는 국면으로 즉각 변환되는 특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처럼 악마 용이 인간 세계를 지배하게 된 연유이다(눅 4:6).


고로 인생들은 자연계 육체로 전락해버린 비극도 크지만 더욱 더한 것은 원수의 지배 아래에까지 놓이게 된 처참한 결말을 맞은 것이다. 이 모두 죄가 낳는 생명과 반대되는 현상의 하나라 이해하면 정확하다. 즉 저주이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셔서 저주가 아니라 생명과의 도치(倒置) 또는 전도(顚倒) 현상을 자취한 결과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자 얽힘"에서 "엎 스핀(up spin)"과 "다운 스핀(down spin)"이 되는 바로 그런 현상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고로 이 경우 피조물이 자초한 결과이지만 하나님께서 "형벌하신다", "저주하신다" 는 등의 표현이 가능하고 그 정당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한 때 인간 아래에 종속되어 있던 자가 그 악한 궤계로 인간을 허약한 자연계 존재로 만들어놓고(죽음으로 결말 짓는 존재로 빠뜨려 놓고)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이런 불의, 이런 실상 앞에서 어찌 그 장단에 놀아나며 그 앞에서 춤추는 역겨운 짓 즉 살겠다고 아둥바둥거리는 모양새를 나타낼 수 있으리요.


성경에서 가르치고 경고하는 바대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그런 사탄의 꼭두각시 놀음이라는 사실에 누가(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로서) 이의를 달리요. 그러므로 이런 진실을 몰랐을 때에는 모르니까 그렇게 했다고 쳐도 이제 모든 실상이 대낮같이 밝혀져 있는 오늘날 여전히 그러하다면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께 대한 정면 도전의 만행으로 귀착된다. 그래서 양단간의 결정, 선택이 만인간에게 요구되는 이 21세기라고 하는 것이다.


과거와는 전연 다르다. 100%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100% 그 반대가 된다. 그래서 양자 택일, 흑백 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생명을 취하지 않으면 곧바로 죽음 즉 영원 멸망을 스스로 선택함이다. 스스로 선택함이므로 다시 말해 하나님은 여기에 전적으로 관여하실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연민에 복받쳐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신 것이니 어찌하실 도리가 없음이다. 이것이 거듭 말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가능하신 일을 우리는 태연히 해치우는 상황이니 어찌 아니 떨겠는가.

이제 이런 양자 택일이 요구되고 가부간의 결정이 강요되는(왜 "강요"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양자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기 때문) 그 결과에 대한 심판이 곧 닥칠 것인데 곧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살후 2:11,12)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3위1체의 원리, 3운법칙 등은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임박해 있다는 그 직접적인 증표가 되어 있기도 하다. 과거에는 이런 것을 나타내주신 역사가 없음이다. 다니엘의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고 더군다나 천사들과 악령들과의 일대 접전에서 악마 용은 이미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으로 입증되었듯이 지상으로 쫓겨 내려 온 상태다. 그것이 1908년이다. 남은 것은 적 그리스도의 등장밖에 없다. 이로써 "이 세대"(this generation)는 끝나고 "다음 세대" 또는 "오는 세대"가 된다. 곧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써 잠시(영원 세계에 비하면) 시작되는 천년 통치 기간이다. 그리고는 마지막 심판이다.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는" 마지막 때 현상을 가리켜 "사람이 많다, 결단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다. 결단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다" ("Multitudes, multitudes in the valley of decision: for the day of the LORD is near in the valley of decision")(욜 3:14,15) 한 대로 지금은 결단(decision)의 때이다. 오늘날만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처음부터 "결단의 골짜기"인 것이다.  즉 생명과 죽음의 양자 택일의 결단의 골짜기인데, 마치 생명 세계인 양 착각하고 모두들 인생을 잘못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좌로도 우로도 비켜 갈 수 없고 당장 결정(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따르고 마귀를 따르며 세상과 함께 영원 멸망에 들어가겠다 하든가, 이 세상에서 무슨 고생을 당하든 죽음을 당하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겠다 하든가 둘 중 하나다. 이 세상에서 안일을 꾀함으로써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엉거주춤할 때 그는 엉거주춤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따르기로 작정하는 쪽에다 그 운명을 걸어버린 의미가 되니 때문에 "강요"라고 한 것이다.


위 구절에서 우리말 번역은 "판결"(judgment)이라 되어 있으나, biblegateway 47개 번역본 중에 "결단(decision)"으로 번역한 쪽이 36, "판결"이 9, 둘을 섞은 것이 2이다. 적 그리스도가 오면 세상이 한 나라, 한 세상이 되어 적 그리스도 기간의 말년에 그 증표를 받은 이는 다 심판을 받으므로 다시 말해 구원을 얻고 있는 이들은 그동안 핍박 받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의인으로 남아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되어 남아 있어도 극소수일 것인즉 "온 세상이 다 심판 받는다" 할 일이지 "사람이 많고 많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즉 "심판"의 의미가 아니고 "결단"의 뜻이다.


그런즉 오늘날 최대(인류사상)의 세계 인구를 가리켜 이 많은 인생들에게 이와 같이 양단간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킴이라 해석해서 하자는 없다. 즉 결단하도록 강요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강조한다기보다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의 세상이 되기 전에 그런 결단의 기로에 서게 만드는 특수 상황 즉 오늘날과 같은 마지막 은혜의 기회(고후 6:2)가 베풀어짐을 지칭함이라 해석함이 타당하다.



이 기회 한 번 넘기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곧바로 심판으로 넘어가는 찰나이다. 즉 처참한 순교(계 13:15)에 대비하지 않으면 즉각 적 그리스도에게 넘어가는  순간이 된다. 왜냐면 "사탄의 무리들"이라고 뒤집어씌워 해를 입힐 것이요 가해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편에서 그렇게 심판을 집행한다고(명백한 살인 행위이건만) 스스로 여기는 때임이다(요 16:2). 즉 믿는 이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죽는 일만 남아 거기 대비하도록 되어 있는 때다.


지금까지처럼 세상 사랑하여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 일찌감치 걷어치우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각자 사도들로 자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과단성을 보이지 않으면 영원히 "바깥 어두움에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양단간의 결정이 내 손 안에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절대로 지체할 일이 아니다. 이 결단의 기간이 끝나는 대로 즉시 악한 자가 임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이 진실을 외칠 것이요 이런 설교자를 기도하는 이들은 사생 결단의 기도로써 그 말씀의 능력에 막중한 힘을 실어줄 의무가 있다. 무엇보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합심 기도로 모이는 기도 그룹을 형성할 일이다. 이런 소규모 회집에는 동성끼리 모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찰스 웨즐레(Charles Wesley)도 이 점을 강조했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였고 "두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거기 있다" 하셨으니 당연히 아버지께서 계시는 자리다.



교회에 남아도는 인력이 있으니 과부로서 홀로 지내는 사람들이다. 남아돈다는 것은 그 막강한 힘을 활용하지를 못하고 있음을 지적함이다. 올바르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배우지 않았다는 증거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모쪼록 재미 있게 시간을 보내려는 것)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다"(딤전 5:5)고 한 것이 초대 교회의 표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