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생명(삶)의 법칙(머리와 몸)

머리와 몸의 한 몸 의식ㅡ이것이 진리(성경)를 푸는 열쇠

Tayseek Kwon 2019. 4. 10. 17:17





머리와 몸의 한 몸 의식ㅡ이것이 진리(성경)를 푸는 열쇠




혹자 말하기를, "지금 이 때가 그리고 이 세상이 인간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저주에 속한다면 왜 그 실상 그대로 나타내 보여져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못하고 마치 사는 곳 사는 때인 양 만들어 놓으시느냐" 한다면 모르는 말씀이다. 충분히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마음이 악해서 이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 까닭이니 이럴 경우 아무리 강조해서 나타내어도 끝까지 못알아듣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이 악하다는 것은 자아중심이 되어 자기 하나만 편하면 제일이라는 아주 그릇된 생각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의 결여다. 다시 말해 모두 한 몸 같아 자기 혼자만 잘 될 수 없고 모두가 다 잘 되어야 정의라고 생각할 때에는, 아무리 소수로서 잘 되어도 절대 다수가 잘못 되었을 경우 함께 그 잘못된 다수를 따르는 것이 한 몸 의식이요 공동체 의식인데, 다수가 고통 중에 있어도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것이 바로 욕심이요 자아중심인즉 바로 이런 마음에서 살인, 도둑, 탐욕 등 온갖 죄악이 발생함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로부터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했듯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면 이구동성으로 "고생 길이 훤하다" 하는 것처럼 세상 삶이 어렵다는 것 자체가 죽음과 저주임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달리 보면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런가. 그것은 악인들로 하여금 여전히 그 악대로 행하여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즉 악인들을 걸러내는 무서운 함정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악인은 그렇게 걸러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악한 자 사탄이 지금까지 저질러오는 일을 보면 넉넉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악한 자가 영원 멸망에 처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셔도 끝내 자기 고집대로 나갔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런 것까지 세세히 알려야 하는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고로 악인이라고 해서 회개할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결과이다. 말을 바꾸면 의인은 의와 선 자체가 좋아서 죽을 변을 치르더라도 그 사랑하는 의의 도를 따르는 것이어야 하고(히 1:9) 악인은 그 본심은 욕심뿐인데 악을 행하면 당장 자기에게 해가 되니까 선을 행하는 그런 위선이 용납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악을 행해도 형통하고 잘 되니까 계속 악을 행하도록 만들어 그 정체를 여지없이 드러나게 하는 역할이다.


또 반대로 의인은 아무리 역경이 들이닥쳐도 굳게 의를 행하여 선을 따라 산다면 그는 진정 옳음과 좋음을 사랑하니까 그 이치를 따른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입증함이다. 즉 악인은 그 악을 증명하고 의인은 자기의 선과 의 지향성을 증명하는 곳이 이 세상이기에 시험하는 자도 있고 그래서 기세를 떨치며 이 세상 신(神) 노릇도 하도록 허용되는 것이다.


악인이 이렇게 형통하므로 우리처럼 생각이 짧아 미치지 못하여 이 점에 대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며 따지려 들 때 하나님은 "믿음으로써 살리라" 하셨으니 사필귀정을 믿는 믿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유익 곧 선(좋음)이 되게 하시리라는(롬 8:28)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되는 것인들 믿겠는가.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함이다. 그렇다고 악을 행하기로 작정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형통하고 반드시 장수하고 부귀공명에 이르고 영달하는 것도 아니다. 내일 어찌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 선상(線上)에 위태위태하게 걸쳐져 있는 인간 생애가 아닌가. 따라서 그런 인생관이 이치에 맞지도 않는 것이다. 이치대로 하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 오늘로서 유일하게 할 일은 다름아니라 지금 죽어도 영생하는 길이 없는가 하고 그것부터 살피고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욕심이 그 눈을 스스로 멀게 하여 욕심 하나로 미련하게 좌고우면 없이 저돌적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당장 죽더라도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인간의 이성다운 것이다.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만들어 주신 것이고 그래서 복음(福音) 곧 희소식, 좋은 소식, 반가운 소식, 복된 소식이다. 물론 사람이 대중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퍽퍽 쓰러져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중 단 하나만 죽어도 한 몸의 구조로 된 생명 체제를 기준하여 판단하면 여타의 모든 생명들은 그렇게 이미 죽은 죽음과 함께 하나가 되어 <덤으로 사는> 목숨임을 알아야 한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그렇게 남보다 일찍 죽는 것 자체가 모두가 그렇게 죽는 의미임을 한 몸 의식에서는 설명하기 때문이다. 고통 당하면 함께 당하고 영광을 입게 되면 똑같이 골고루 그 영광을 입는 것이 한 몸 됨이기 때문이다(고전 12:26).


사산(死産)되어 나오는 인생이 있을진대 모든 인생이 바로 그런 상황에 동일하게 놓여 있음을 입증함이다. 이것이 한 몸 구조로서의 인생이다. 고로 원도 한도 없이 죽음과 저주 아래 놓여 있음을 보이시고도 남은 것이다. 미련하여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인생들이 문제다. 방금 말한 대로 무조건 덮어놓고 무턱대고 살려고만 덤비는 비이성적 저돌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자 한 자씩 새겨 들어야지(그래서 구약 성경에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받는다 하는 것) 허수하게 날림으로 듣다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니 조심할 일이다.


그리스스도 안에서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다"(약 1:9,10). "낮은 자가 높아진다" 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알고 보니 인간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이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닌 허망한 생각임을 뒤늦게 알고 모두들 자기를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두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초대교회를 표준하여 하는 말이다. 명색이 교회라면서도 교회가 아닌 데에서는 이렇지 않다. 초대교회는 모든 시대 각 교회의 표본이자 모범이 되어 있다. 또 부자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 낮아짐 자체가 구원을 상징함이기 때문이요 스스로 높아져 우쭐거림이 멸망이 지름길임을 이제야 알기 때문이다. 고로 현재의 부자된 위치에서의 낮아져 있는 자랑이요 현재 낮아진 위치에서의 높아짐에 대한 자랑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고전 11:3) 한 대로, 머리와 몸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 즉 아버지이시다. 이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지칭한 것이다. 부활하신 후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 하심과 같다. 그러나 성경에 성령을 가리켜 "머리"시라 한 데는 없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고 또 움직이시는 모습을 대개 가리키기 때문으로 그래서 그런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두 분이시나 항상 하나로 존재하시고 활동하시므로 그 대표성으로 지칭되실 때는 하나님 곧 아버지이시나 그 역할 측면에서는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므로 항상 아들께서 표면으로 나타나시게 됨은 당연하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실 것이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릴 것이다 하였다"(요 16:13-15) 하신 이유다.


즉 아버지의 형상이신 아들께서 나타내시는 역할이시다. 그러나 "나"라고 아니하시고 위와 같이 우회적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3위1체"가 제대로 설명되어 있는 그 권위(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를 인정한다면,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각자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라는 심각한 경고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두렵고 떨" 정도이니 그 심각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건마는 이제까지 그 경고를 그 어느 설교 강단에서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빼 버린 것이다. 오늘날의 사태가 여간 엄중하지 않음을 보이는 실례 중 하나다. 심지어는 "상급을 타는 것이라고까지 핑계를 갖다 붙일 정도이니 그 왜곡됨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지 않은가.


언제인가 큰 사회적 물의를 빚으며 "이런 것이 내가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게 만든 소위 사이비 기독교 소동도 그런 일종이다. 즉 행함은 내팽개치고 영생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아주 빗나간 구원관이다. 그들은 이제 구원받았으니 기도할 이유도 없고 성경 볼 것도 없다는 식이다. 그것은 종교("기독교"라는 이름의) 교리는 될 수 있어도 사람이 구원 얻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아닌 것이다. 이들 사이비 집단의 특징은 자기 부인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아중심이므로 세상 사랑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단"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부인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단이 아니라는 증거다. 자기 부인은 인도의 소위 성자들처럼 고행이나 하고 세상과 절연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 그래서 그리스도만을 위함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삶 또는 구원의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고 따라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 수준의 약속으로 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말함이다.


고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자기 부인이 될 수밖에 없다. 둘은 이와 같이 불가분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이들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랑 하나로써 이미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 자체가 자기 부인을 본성으로 가르치기 때문. 그 사랑 또는 자기 부인의 정도의 고하(高下)나 깊고 옅음은 여기서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과 그 사람 사이에서만의 문제다. 왜냐면 미흡하고 부족할 경우 성령께서 친히 그 사람에게 알려주실 것이기에.


그러므로 그렇게 경고해주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개인 문제다. 세밀한 것까지는 외부인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사람의 양심이 이를 잘 알고 있고 그로써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로서"("in the church"가 아닌 "as a church"-고전 11:18) 매일 같이 모이는 의미가 크다. 필요에 의해서 모이는 것이지 모이는 것 자체가 계명이기 때문은 아니다.


계명은 주님께서 주신 대로 새 계명 이상 가는 것은 없다(요 13:34/고전 9:21). 안식일 지키는 것이 포함된 10계명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서의 두 큰 계명을 "모세 율법"식으로 나타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일주 한 번뿐인 안식일을 지킴이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 1년 365일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냐 하려는가.


그러면 안식일은 잘 지키면서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는 것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불완전한 것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명령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기 전에 우선 맛보기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오신 후로 참 실상이 나타나면서부터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왜냐면 하나님이 것이 모두 내 것이라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만유의)가 아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 자신께서 나의 소유가 되어 계시는 마당이다. 이것은 사랑의 언어로서 사랑 안에서 100% 통할 수 있는 말이다. 모든 것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시종 일관함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쳐 베드로에게 물으신 의미는 크다. 베드로가 3번 주님을 부인한 적이 있어 3번을 그렇게 물으셨다 이해해도 좋지만 그렇게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유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주님께서 나와 함께 성령으로 사심을 가리켜 사람 예수님이심을 강조했지만 이 사실은 얼마든지 되풀이해 강조해도 좋다. 다른 그 누구와도 함께 하시지 않고 오직 나와만 사시듯이 하는 것이 나와 함께 계심의 의미, 사람되신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형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요 허깨비에 홀린 것도 아니다.


사실 그대로이니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고 사람이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신 오직 유일의 사람 마지막 아담만이 지니신 특성이다. 첫 사람 아담의 위치 바로 그것이다. 아담 이하 많은 인종이 생겨났지만 첫 사람 아담만이 머리로서 군림하는 자리였으니 왜냐면 그 어느 누구도 모방 못할 아담 홀로만이 누일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즉 아담만은 하나님 친히 만드셨음이다. 마지막 아담의 '하나님-사람'의 의미가 이와 같다.

그러므로 말의 요점은 나와 함께 사시는 마지막 아담께서는 사람이시라는 데에 있다. 범죄 전의 아담의 모습이신 것이다. 범죄 전이라 자연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으로서 완숙한 모습 즉 어리지도 않고 늙어가는 것도 없고 최고도로 꽃 피울 때의 모습으로 아담은 창조되었던 것. 여자가 생기기 전이므로 남녀 양성의 조화를 이룬 말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갖추었으므로 최고로 아름답고 최고로 늠름한 아담이었다. 여자가 생김으로써 여자의 아름다움과 남자의 늠름함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리고 자연계 존재로 치면 늙어가기 직전의 청춘을 한창 구가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자연계에 속하지 않으니까 물론 늙을 일도 없다. 바로 그런 모습으로 마지막 아담께서 계시되 첫 사람 아담처럼 남녀 양성으로 분리되실 필요가 없으므로 남녀 양성으로 완전히 조화된 모습 곧 여자가 생기기 전의 아담의 모습 그대로이신 것. 그러니 성별이 있으실 수 없다. 남자 특유의 장엄함과 여자 특유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조화 구비시켜 나타나 계시는 모습이시다.


남자로 보면 남자 같으시고 여자로 보면 여자 같으시다 할까. 그러나 여자가 청조되기 이전의 아담의 신체 구조 그대로이시니 우리 모두 역시 그와 같은 몸으로 변화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사람이 홀로 지냄이 좋지 않다" 하셨으니 이는 처음부터 생식 목적으로 지으신 것이 아닌 것은 먼저 영물들을 만드신 데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 영물 중에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으므로 자연계 동물들의 암수컷 만드신 방법으로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형상이요 모양이므로 아담은 여자를 처음 대하자 흡족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아담은 비로소 남자로서의 신체 구조를 가지게 된다. 고로 여자가 생기기 전에는 아담 홀로 주변 영물(천사)들의 도움을 입어 자기 닮은꼴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야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초자연적 초능력의 방법이므로 훨씬 완벽하게 출산하는 것이었다고 알면 된다.


그러나 여자가 생겼으므로 그 몫이 여자 담당으로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러므로 범죄 타락하기 전에도 둘은 한 번도 성적 접촉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면 초자연계에 속한 몸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방식대로 할 필요가 없이 둘 사이에 교환되는 하나됨의 교합(交合)의 희열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교감은 다른 것을 더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면서 자연계 동물이 하는 똑같은 방식대로 성적 접촉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지의 그 여부는 모르나 그 때부터 아담은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영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자기 자신과는 일종 소원해져 있는 감을 갖게 됨을 말한다. 영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 영물 중에 마음이 드는 자가 없었음을 나타냄이었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범죄 전의 아담, 더 분명히 말해 여자가 창조되기 이전의 아담으로 계시는 것이다. 꼭 그 모습이신지 아니면 보다 더 나은 모습이신지는 우리로서 알 바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한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성령으로 각자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어 계심이나, 내 안에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으로 계시는 것이 이러한 한 몸의 구조를 이루는 뼈대가 된다.


자연계에 속한 신체의 구조에서 신경 세포가 모두 머리로 집중되어 작동됨과 같은 이치이니, 이렇게 하여 각 지체 각 부분은 머리와 직결되어 머리에 의해 통할되어 한 몸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되는 것. 이러한 구조에서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그 하나를 이루고 있는 각자는 가장 일차적으로 머리와의 관계이고 그 다음은 그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함께 지체된 각 이웃을 상대함이다.


하나님의 계명이 첫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고 내 이웃(한 몸의 지체를 이룬)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이 뜻이다. 실질적으로 이 모든 이웃이 나 자신이 되어 있음이 한 몸 구조이다. 이러한 내 이웃을 통해 나는 거대한 한 몸으로 확대, 확산되어 존재하여 삶을 누리게 되니 원도 한도 없다. 여기서 진정한 평등의 의미가 있다. 모두가 즉 머리도 몸도 몸의 각 지체 각 부분도 '하나'로 통해 있기 때문.


그 중의 한 부분을 맡아 각자는 기능하는 것인즉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공동체 의식의 줄거리, 그 원형이다. 고로 이러한 한 몸 체제에서는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 평등하고 상하, 우열의 구별이 없다. 외관상으로는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는 듯 해도 구성원 중에 단 한 하나라도 없으면 그만큼 몸으로서의 기능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고로 기본적으로 모두가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기에 그런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고전 12:12-27).


이렇게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있는 구조에서는 각자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한 번도 자기 부인(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대로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고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신 주님을 위해 산다는 등의 모든 표현이 바로 이 자기 부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제 문제의 본질로 들어가면, 이와 같이 모든 지체 각 부분을 이루고 있는 각 개인에게 계시는 마지막 아담이시라는 사실 여기에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우리를 육으로 나게 했지만 우리는 영으로 이제 났으니(요 3:6) 곧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받음이다. 피조물은 육체인데 반해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니까, 육체로 치면 육체 그대로 내게 오시는 것과 똑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께서는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므로 하나님으로는 영(성령)으로 오시지만 그래서 그 몸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 현재 정위치이시나, 실제는 육체로 오심과 똑같은 의미로 지금 나와 함께 사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람 그 이상 이하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므로 나와 똑같으실 수밖에 없다. 오직 다르시다면 아담은 그 육체를 물려주어 많은 사람을 파생시켰지만 마지막 아담께서는 그 영을 "물려주시어" 자기의 닮은꼴들을 파생시키시되 친히 우리 각자 안에 영혼처럼 영원히 계심으로 되는 일인즉 "영이신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하게 '하나님되심'이라 해도 좋다.

  

우리 각자는 이 경우 둘이 하나됨의 구조로서 비록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도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니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아버지와 하나되신) 그리스도 곧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즉 사람으로서의 하나이지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는 아니다. 과거 하나님의 아들의 영께서 각 선지자 안에 계셔도(벧전 1:11) 이를 가리켜 "하나됨"이라 하지 않은 것은 엄연히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이 오시더라도 사람으로서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이시다. 사람이심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계실 수 있음은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신 측면이 작용하시는 까닭이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됨이니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무엇인가. 아무 이상한 일도 아니니, 영으로 계시다가 피조물 인간 여자의 태에 들어오신 것뿐이다.


우주보다 크시지만 먼지만도 못한 인간(여자) 육체의 태 안에 드셨다는 그것밖에 없다. 인간이 태어나는 날 수대로 계시다가 태 밖으로 나오시니 사람이 되신 것. 그렇게 나오셨기 때문에 영원히 사람으로 계심이다. 그러나 애초 영이신 하나님으로 계시다가 그렇게 인간 피조물 속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날 수를 다 채우시며 계시다가 나오셨으니 그렇게 특이한(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상황을 만드시며 움직이셨다는 그것뿐이지, 그 일의 처음(시작)부터 종료시까지 하나님으로서의 주체성은 변함이 없고 이상이 있을 까닭이 없다.


단지 우주에 충만히 계시던 자리를 바꾸어 인간의 태로 옮기셨고 거기서 일정 기간 보내시다가 그 정해진 기간이 지난 후에 태 밖으로 나오셨다는 사실로써 스스로 사람이 되신 것이므로 여기에 아무 하자가 있을 리 없다. 그렇게 하시지 않고 얼마든지 사람이 되실 수는 있으나 그리 되면 영원히 사람이시라는 상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사랑의 일념, 의지력으로써 그러한 일시 곤고함을 자취하신 것이다.


영원히 사람으로 계셔야 나도 영원히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이다. 얼마나 이치에 합당하고 과학적인(원리원칙에 충실한) 것인가. 그러므로 항상 제자들과 계실 때 인자(人子ㅡ사람의 아들)라고 스스로를 호칭하신 것처럼 완벽한 사람이시다. 인간의 태를 통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해당하시는 부분은(나는 그 육체에 해당되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으로 계시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의 태에 드셨다가 나오심으로써 피조물 사람의 육체를 입게 되셨다는 그 사실만이 다른 것이니, 우리로서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영혼을 받아(이는 부친으로 연유되는 것으로서 그래서 "남자의 씨"라고 하는 것) 모친의 육체를 동시에 받음으로써 인간이 되어 있음과 하나도 다름이 없으시다. 그리스도만이 "여자의 씨"(seed, 후손)가 되신다(창 3:15).


남자가 관여하지 않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남자로 인하여 영혼(하나님께서 그 근원이신 즉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가 그 근본인)이 생성되는데 친히 영혼으로 임하시어(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여자(애초 아담에게서 난) 곧 산모(産母)를 통해 육체만 입고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영혼이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영혼은 영원부터 계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영 곧 아들의 영 다시 말해 아들이신 것이다.


그러면 나와 똑같은 그리스도시라면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의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 이중 구조로서의 A 개체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오심으로써 이 A개체를 "육체"로 하여 그 "육체"의 "영혼" 격으로 오심이니 새로운 이중 구조 즉 A'개체가 됨이다. 그러면 A'개체의 이중 구조를 이루어 계시는 성령이시든 그리스도(한 사람으로서의) 안의 그 영혼이신 성령이시든 같은 "한 영"이시니, 첫 사람 아담의 육체나 현재 나의 육체나 "한 육체"인 것과 같은 모양새이다.


후자는 육(첫 사람 아담)으로 난 옛 사람이요 전자(A'개체)는 영(마지막 아담)으로 난 새 사람이다. 그런데 성령은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을 따른 모습이시므로, 내가 육신의 부친의 영혼의 본질을 받아 그래서 영혼이 조성된 것처럼(그러나 이 영혼은 부친의 것이 아니라 영은 물질과는 별개로서 그 고유성이 인정되어 나 자신의 영혼), 성령을 받는 것은 아버지(하나님)의 본질을 받아 그 아들이 되는 것.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하나되어 오시는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으로서 나와만 영원히 하나되어 함께 사시므로 새로운 "나의 고유의 영혼"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서의 나의 처음의 A개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이중 구조로서의 하나이셨으니, 전자는 사람(육체)으로서의 이중 구조인 반면 후자는 하나님(영)으로서의 이중 구조인데, 전자는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써, 후자의 경우 사람의 육체를 입으심으로써 서로 대조를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엎 스핀"과 '다운 스핀"의 도치성(倒置性)을 보이는 정반대 현상이다. 그래서 사람이 되시기 전의 아들과 아버지로 하나(이중 구조로서의)로 계심을 B개체라 한다면, 이제 사람이 되심으로써는 아들께서 B'개체가 되어 계심이니,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나와 구별하여 새 사람과 옛 사람으로 나누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전에는 하나님으로서의 아들이셨으나 이제는 나와 불가분의 존재로 '사람으로서의 하나님 아들' 또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 양상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 계실 수 없어 나 없이는 그리스도의 의미가 없으시고, 그리스도 없이는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이다. "하나님께로서 받는 영혼"이라 했거니와 이 영혼은 처음 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심으로 생겼고(하나님은 생명이시므로 그래서 "생기" 즉 "breath of life"), 아담(여자가 생김으로써 이제는 남자가 되어 있는)에게 속한 것으로서(여자에게는 속하지 않고), 따라서 육체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모성적 기반과 반대가 되는 부성적 기반이라 할 것이다.


즉 육체는 어머니에게서 영혼은 아버지의 인자(因子)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는 것. 그래서 영혼이 중요하고 핵심이 되므로, 성경은 사람을 낳는 것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삭의 어머니가 낳았다든가 아브라함의 아내가 낳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다. "남자의 씨"라 하고 "여자의 씨"라 하지 않는다. 자식을 탄생시키는 모성적 기반을 이루는 육체도 여자가 남자(아담)에게서 받은 것이다.


고로 아담 하나로 통일 조화되기 때문에 아담의 대표성을 따라 아담이 남성이므로 하나님을 "아버지"시라 하고 또한 그 "아들"이시라 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구별은 마지막 심판을 거쳐 영원 세계에 들어가 본격적인 생명과 죽음의 세계로 나누어질 때에는 영원히 사라진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심도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즉 역시 이러한 면에서도 하나님 모습의 닮은꼴이기 위해 그 짝을 만들어주심을 목적하신 것.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이신 아들을 낳으심도 그렇게 하심이 최상 최고 최선이기에 그렇게 하신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不善, 惡)" 하신 것. 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든 사람(믿는)이 다 모시게 됨으로써 그런 의미는 남녀의 성별로써는 더 이상 나타내어지지 않고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다.


영혼(마지막 아담)과 육체(나 곧 우리 각자)의 양자 관계처럼 더 긴밀한 관계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계시지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라는 유일무이의 위치에 계시므로, 우리로서는 우리 영혼이 육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나(자연계에 속한 우리 몸으로서는 그것은 곧바로 죽음인즉)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마지막 아담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를 기준해서 말하는 '육체를 떠난 영혼'처럼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핵심이 있으니, 성령으로 계심은 육체를 떠난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육체를 그대로 지니신 그대로의 모습, 그런 상황으로 내게 임하여 계심이라는 데에 강조점이 있다. 왜냐,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또 이제는 하나님만 아니시고 똑같이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보이시는 않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마는 그 당시 제자들과 함께 사시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 내 안에 계심으로써 나와 함께 일상 생활을 영위하신다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즉 태초부터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로 계심과 같이 그런 이중 구조다. 우리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된 이중 구조의 존재인 것과 같이 새 창조에서도 그 과정을 그대로 밟아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나 이렇게 이중 구조이다.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을 가리켜 "내 안에 아버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하신 그대로의 표현으로 "내가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요 15:5/6:56) 하시는 것이니 바로 이 이치를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오심을 가리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다"(14:20) 하셨고, "제가 저들 안에 아버님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17:23)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됨은 항상 강조하는 대로 양면성의 동시성으로서 쌍방이 동시에 작동되는 것이니 어느 일방적으로는 되지 않는 법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일방적"이라 착각하여 아무 것도 아닌 허공에다 전신을 내맡김처럼 하고 있는데 위험천만 자멸의 길이 된다.


주님께서 먼저 움직이셨으므로 곧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이니 이제는 나의 차례이다. 이렇게 쌍방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니 왜냐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 것. 아기와 엄마와의 사랑도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 아기가 엄마 말을 순종하는 것이 엄마를 사랑함이요 위함이다. 우리 역시 요구되는 것은 당연히 순종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는 방법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빌 2:12)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거하라"(요 15:4) 하심이니 이는 명령인 것이다. "이(내 생명)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10:18) 하심과 똑같은 것. 그렇게 하면 즉 그 명령에 순종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15:4) 하신 것이다. 그리고 강조하시기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할 것이다" 하셨다.


이와 같이 나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 갈릴리 바다 가에서 병을 고치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시던 그 모습의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다음에는 지금 나와 함께 사시는 것이다. 내가 고난 받을 때에도 기타 그 어떤 경우에도 나와 하나되어 계시니 나는 홀로가 아니라 이중 구조로서의 둘이요 하나, 하나이면서 주님과의 둘이다. 다만 부활하심으로 입증하신 것처럼 범죄한 다음의 아담의 상태 즉 자연계에 속한 몸이 더 이상 아니시므로 옛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나타내시던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바울 사도(당시는 사울)가 뵙던 그 모습 또는 요한 사도가 이상 중에 뵈었던 그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감당하지 못해 그 앞에 요한처럼 졸도하거나 바울처럼 금방 눈이 멀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우리 역시 초자연계 몸으로 복귀한 다음에야 정상으로 뵐 수 있는 모습이심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 따라서 그 몸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가 아니라 현재는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으므로 볼 수 없음을 알고, 이 자연계 육체처럼 보이고 보이지 않고 하는 것에 괘념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주님과의 '둘이 하나됨'의 관계가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나 자신의 반응 여하, 태도 여하, 순종 여하에 달려 있어 좌우됨을 알고(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 한 것-빌 2:12) 성경에 밝혀 두신 모든 말씀대로 행할 것을 유의하고 주의하는 것이 이 둘이 하나됨의 관계에서 요체가 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내 안에 사신다고 해서 나를 강압하시거나 간섭하시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체인즉 모든 것이 나의 자세, 태도, 마음(사랑하여 충성하려는 의지)에 달려 있음을 알고, 그와 같이 말하고 행하며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등 성경을 통해 나타나 있는 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는 열성과 지성이 필요함을 재차 강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자아중심으로 흘러 비록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벌어져도 주님께서는 순순히 못박히신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왜냐면 그 순간까지는 나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100% 나를 위하심이지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아니기에 그러하시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무서운 불상사가 일어나 주님과 내가 분리되어 남남이 되었을 순간 완전히 문제가 달라짐은 당연하다.


이 자체부터가 이미 우리가 두렵고 떨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내가 주체로서 주객(主客)이 분명한 까닭이다. 우리가 하는 대로 당하시고 우리가 하는 그만큼만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것이 인간의 자유 의지가 지니는 의미이다. 아담이 범죄해도 이를 막지 않으셨고 영물들이 범죄를 해도 이를 강압하여 제지하시지 않은 사실이 다시 말하지만 우리로 두렵고 떨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근심하시게 말라" 했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거듭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는 초지 관철의 마음으로 이 나그네 길을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베드로 사도도 경고하고 있다(벧전 1:17). 악한 자가 부단히 참으로 부단히 우리를 시험하는 때, 무대가 이 세상이다. 베드로는 삼킬 자를 찾아 두루 헤매며 포효하는 사자와 같다고 했다(벧전 5:8,9). 좌로든 우로든 치우치지 않고 정도(正道)로 행하는 것이 필수이니 이래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긴요하다(살전 5:17). 한 시라도 세상에다 한눈팖으로써 스스로 실족하는 일 또는 남을 거쳐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성경에 명시한 대로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이다.


그렇다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니니 항상 양면성과 동시성을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너무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사물을 단순하게 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양면성을 잘 생각하여 스스로 조절 조정해 나가면 다시 말해 한 쪽으로는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빌 2:12) 의지와 다른 한 쪽으로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4:4)을 잃지 않는 평형된 감각을 유지하려 "힘쓰고"(신약 성경에 이 "힘쓰라"는 말이 많이 강조되어 있는 것처럼) 빌립보 편지의 가르침을 항상 따르는 자세라면 나머지는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능력의 손바닥과 나의 사랑의 의지의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어느 일방적으로 되어지는 일이 없음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항상 기억할 것은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다 안다고 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한에는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므로(고전 8:2) 성경을 항상 가까이 할 것이다. 다 안다고 하여 홀로 믿음 생활을 해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것은 역시 교만하여 멸망으로 통하는 지름길에 서 있는 것이니, 매일이다시피 "교회로서 함께 모이기를"(고전 11:18) 힘쓸 일이다(히 10:25/행 2:46).


형제의 권함을 받고 또한 형제를 권하는 일이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에서는 필수이다. 한 몸의 유기적 체제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눈에게는 팔이 필요하고 팔에게는 귀 또는 입 등 다른 지체의 역할로 보완됨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교만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려는 찰나가 됨이니 화급하게 발을 거두어야 하고 겸손하게 항상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정상 자세로 돌이켜야 하는 것. 성경이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고 경고함도 같은 맥락이다.


기도를 해주어야 하고 나는 또 기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홀로 지탱하려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한 몸 체제이다.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생명 가운데로 이끄는 바울 사도라고 해서 혼자 잘 해 나가리라 생각하면 오산 오판이다. 그래서 "나를 기도해 달라"고 교회에 끊임없이 부탁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의 머리이신 주님(상전[上典])께 매인 몸으로서 주님 위해서만 산다고 수없이 자신에게 되뇌어 주고 자신을 편달하고 순간순간 확인하는 "경건의 연습"(딤전 4:7,8)이 필요하다.


주님께서 바로 그렇게 나를 위하시니 즉 나를 상전처럼 위하시니(눅 22:27) 내가 주님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야 불문가지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달리는 자처럼 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는 우승하겠다는 일념뿐이지 달리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주님께서 경고하신 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자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 하신 그대로다. 그렇게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결승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하면서도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 한 빌립보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것"(빌 3:10-15)이라 한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제 이 시대는 90%도 안되고 100% 사랑과 믿음에 있든가 아니면 전혀 없든가 양단간의 하나만이 통하는 때가 되었으니 TV, 인터넷, 스마트폰, 기타 온갖 것을 통해 온갖 쓰레기 잡탕이 홍수 덮치듯 인간의 정신세계, 의식 세계를 덮쳐 장악하고 조종하려고 그야말로 "강압 시대"이다. 교통 통신 분야의 발달이 정보를 빨리 효과 있게 습득하고 알리는 데에는 편리성과 장점이 있으나 그런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전부 유익한 것도 아니니 세상이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져 있고 악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바로 그와 똑같은 양상이다.


다시 말해 악을 지으라고 온갖 유혹을 해도 불의를 미워하기 때문에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온갖 위협을 해도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 한이 나더라도 의를 행하는(히 1:9) 그런 자세만이 영생에 관한 한 살아남을 수 있는 때가 되어 있다. 엉거주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머물러 있어 자기를 속이는 것은 이제는 더 용납이 되지 않는 때다.


긴가민가 애매 모호하게 자세를 취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니 흑이 아니면 백이요 백이 아니면 온통 흑일 뿐이다. 보아서 안되는 것은 보지 않아야 하고 들어서 안되는 것은 듣지 않아야 함이니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 다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은 없다. 감히 어디라고 함부로 주님의 것을 손댄단 말인가.


"나와 함께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마 12:30)라 하심과 같다. "함께 모으지 않아도 모으는 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도 아니고 곧바로 내리는 결론이 "모은다"와 정반대인 "헤쳐버린다"는 뜻이  된다. 다자간 선택이 아니고 오직 양자 택일이다. 둘 중 하나다. 때문에 더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이런 3운법칙이나 3위1체의 원리 같은 것이 소개된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명확히 태도를 확정하여 일로 전진, 매진하라는 의미다. 좌우 돌아볼 여지가 없다. 한번 정했으면 그 길로 내달릴 일이지 속도를 조절할 여유조차도 없다.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시대가 그런 양상으로 바뀌어버렸다. 적 그리스도는 거센 태풍처럼 대홍수처럼 휘몰아갈 것이다. 세상이 소위 "편리해져서" 손가락 조작 하나로 심지어 음성 하나로 마음 내키는 대로 거의 모든 것을 작동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 증거다. 고로 의(義)이면 의, 불의면 불의 어느 한 쪽을 정하여 그대로 밀고 나가야지 중도에서는 재선택의 여유도 거의 주지 않는다.


머뭇거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의를 좋아함"(살후 2:12)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불의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중히 따짐으로써 최후 결단을 내릴 일이니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하시고 망대를 세우기 전 예산부터 살펴보고 전쟁하러 가기 전에 승패 여부부터 미리 찬찬히 따져보는 것과 같이 하라고 경고하신 것을 마음 속에 아로새길 일이다(눅 14:25-33).


이와 같이 따져보는 시간은 충분히 갖되 절대로 차일피일하지 말 것이니 때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10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바로 어제같이 후닥닥 지나갈 수 있어 "아니 벌써" 하고 놀랄 때는 이미 때는 늦다. 후회할 여유조차 없게 된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이 내일 아니 오늘 이 시간 후에도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결정에 유보를 둔다든지 무작정 시간을 끈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고삐를 늦추지 말고 충분히 셈하고 따지기를 빈 틈없이 한 다음에 최후 결단은 신속해 내릴 일이다. 다니엘의 예언(단 12:4)은 이미 성취되었으니 20세기로써 점을 분명하게 찍어놓고 있다. 노벨상이 생긴 것도 20세기를 전후해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롬 13:11)이라고 한 바울의 경고는 어느 시대에서나 통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이 시대를 겨냥한 예언성 발언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함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일 일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거니와 때가 단축되어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물건을 매입한 자들은 그 물건이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다"(고전 7:29,31).


남자만 언급했다고 남성 상위의 케케묵은 변론이라 생각하지 말 것은, 남녀를 둘이 하나됨의 이치로만 밝히는 것이 성경이므로 그 대표성을 따라 말하기 때문이다. 영어로도 부부를 지칭할 때 번거롭게 남자와 여자의 이름을 다 말하지 않고 그냥 간단히 Mr. and Mrs. John Smith라고 하여 남자의 이름을 대표로 하게 되면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전달이 됨과 같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여 대등 위치에 있다면 남녀라 할 것인가, 여남이라 할 것인가. 남녀라 할 때 남이 먼저 온다고 해서 여남이라 한다면 남이 불평등하다 할 것이 아닌가. 양 쪽의 의견을 다 들어줄 양이면 아예 그런 표현 자체를 없애야 할 판이다. 이와 같이 질서가 있는 법이니, 이 질서가 3위1체 원리에서 말하는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선후(先後)의 구별이다.


이 세상에서 빈부귀천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은 영원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3운법칙의 우리(cage) 속에서 통제 받은 생애는 아무 의미가 없음이다. 대통령을 해 먹었든 또는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든 모두 정해진 틀에 짜여 영위되었던 것으로서 마치 무대 위에 세워진 배우 역할이기 때문이다. 오직 각자 자기 몸을 따라 선을 행했느냐 아니면 악을 행했느냐 그것만이 의미가 있을 따름이다.


바울 사도가 명시한 대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한 그대로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다(롬 2:7-10). 이 선악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갈라진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기 부인이 가능하여 선이 행해질 수 있음이다. 이런 선행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음과 같은 맥락이다. 빈부귀천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능력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까닭이다. 내 힘으로 선을 행함이 아닌 것. 오직 순종하고자 하는 나의 사랑이 좌우하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랑의 주체가 됨이 당연하기에 때문에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거짓과 속임수에 능수능란한 사탄은 처음부터 되지도 않은 이치에 닿지도 않는 생각과 말로써 인생들을 우롱해 왔다. 그러나 그런 우롱도 척척 먹혀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 인생들로서는 변명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부터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는 양으로 태연히 속이는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양상을 보라. 오늘날 상황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소위 지식이 있다 하고 안다고 하는 계층일수록 더욱 더하다.


우리는 다음 말씀을 항상 되새길 필요가 있다.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셨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식자가 어디 있느냐...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유대인(종교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지식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종교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지식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종교인)이나 헬라인(지식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하나님의 미련하신 부분이 사람보다는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하신 부분이 사람보다는 강하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으며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심으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심으로써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심으로써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18-29).


지금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윤곽 정도를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성경이 그만큼 이해하기에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나는 맞춤형 교육을 받아야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 우러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만 잔뜩 쌓이고 음식 먹고 소화시키지는 못하고 체하여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것과 같이 된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즉 배운 자만이 내게로 온다"(요 6:45) 하신 그대로다.


성령으로 직접 교육 받지 않고는 말씀은 아무리 많이 듣고 지식은 있어도 그것이 믿음으로 통해지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세가 필수다. 성경이 칭찬하는 베뢰아인들의 자세가 바로 그렇게 성경을 가까이하는 자세였다(행 17:11). 베드로는 의인이 가까스로 겨우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벧전 4:18). 악령들과의 전쟁 마당인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믿고 구원 얻음을 결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 일이 아닌 것이다.


생명이 한 몸의 체제를 말함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고난 고통의 때로서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 중에 신음(아이 낳는 산고, 산통 중의)하게 되는 것이 필연이다. 구원 받음 즉 새 생명 탄생시키는 수고인 것이다. 이 수고는 범죄의 결과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다. 피할 수가 없는 것을 억지로 모면하려는 행위와 자세는 자멸뿐이다.


쉴 새 없이 사람들의 목숨이 죽어 나가는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고 나 혼자 구원받았다는 것으로만 만족하여 태평연월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는 아직 구원을 모르고 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을 위시하여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이 일에 매달려 있는 판에 그런 나 홀로 식의 태도는 생명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자체 증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