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억지로 사랑하도록 "만드실" 수는 없어ㅡ이것이 하나님의 유일의 "불가능"

Tayseek Kwon 2019. 4. 6. 23:12




억지로 사랑하도록 "만드실" 수는 없어ㅡ이것이 하나님의 유일의 "불가능"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고전 9:16). 


여기서 혹자는 물을 것이다ㅡ

바울이 자기에게 미칠 수도 있을 "화"를 인하여 복음을 전했느냐 

아니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롬 9:3)라 한 대로 

사람을 사랑하여 진정 저들의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함으로 복음 활동을 했느냐? 


성경에 기초한 답은, "둘 다이다". 

그렇지 않다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교회를 상대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으라" 한 것도

절대로 무리한 말일 수가 없다.

초대교회가 왕성한 것도(쇠락 내지 타락하지 않고)

"주님을 경외함"을 "성령의 위로"와 병행했기 때문이다(행 9:31).


오늘날은 그릇된 인위적 교리로 인하여

전자를 완전히 제외시키고

후자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배도"(살후 2:3)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실 때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먹으면 죽는다고 즉 자연계 몸이 된다고 하셨으니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하는데

용의 말을 듣고 여자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


다시 말해 그 과일을 먹는 경우 죽는 것을 생각해서 두렵고 떨었어야 하는데

도리어 용의 부추김을 따라 그 반대되는 해석을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오늘날도 그 때와 꼭 마찬가지다. 전혀 두렵고 떪이 없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는 성경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구원받았으니 죽을 턱이 없다"이다. 맹랑한 해석의 한 구석이다. 


차이는 지금 여기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하는 때이므로 그러하고 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고

허용될 리도 없으니 혼동하지 말 일이다. 

구원받은 자가 시험에 넘어져 망하는 일이 없다면

사탄이 굳이 시험하려고 덤빌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도 사탄의 이런 역할을 허용하실 리도 없다. 


구원하신 후 하나님 친히 그 구원을 취소하시지 않는다.

내가 나의 자유 선택으로 이 시험의 기간에 자살행위를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런 자유 의지를 간섭하실 수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TO WEEP)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제약한다(to limitㅡ시 78:41)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우리말 번역을 위시해서 

50여개 영역 중 38개 번역이 자의적이라 오역으로 판단된다.

이현령비현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하신 불가능의 영역이

인간의 자유 의지 곧 자유 선택은 간섭하심이 불가능이기 때문).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느냐 하는 선입견에서

그렇게 많은 번역본이 진실 아닌 왜곡된 풀이를 하고 있는데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는 그들의 천박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도 KJV를 비롯해 13 군데에서 그나마 충실한 번역(to limit)을 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성경을 읽을 때 원문 연구는 하지 않기로 처음부터 작정했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원어를 배워야 한다는 

그릇된 선입관을 넣어 주어 성경 연구열을 식게 할 우려가 크기 때문. 

쉬운 문장과 단어로 일부러 짜여진 성경인데 원어를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르치심을 받아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굼까지 그대로 나온 것이고

과연 성경을 제대로 읽는 일에 아무 지장이 없음을 

지금도 일말의 꾸밈 없는 기쁨으로 공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