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구원론(십자가 짐·자기 부인)

움켜 쥔 손을 활짝 펴고 집었던 것을 탁 놓아라ㅡ그래야 산다

Tayseek Kwon 2019. 4. 6. 14:22





움켜 쥔 손을 활짝 펴고 집었던 것을 탁 놓아라ㅡ그래야 산다





나를 잡으려는 사람 인기척이 납니다. 

항아리 속에 손을 집어 넣어 움켜 쥔 것 탁 놓으세요.

그리고 앞뒤도 돌아볼 것 없이 튀세요.

항아리 속에 든 것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목숨보다는 덜 귀한 것이잖아요. 


'사람'은 짝의 원리이고 '원숭이'는 나입니다.

'항아리'는 세상이고 '항아리 속의 것'은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

'목숨'은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원숭이를 잡을 때 원숭이 좋아하는 것 잔뜩 넣어놓고

가만이 기다리면 된답니다. 

단 항아리 아가리는, 원숭이 주먹은 들어가지 않고

손을 펴서 오그릴 때에만 겨우 들어가는 크기 정도.


그러면 녀석은 사람 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움켜쥔 것을 탁 놓을 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생포된다는 것.

아주 딱 들어맞는 예화입니다. 

원숭이 낯짝만 아니라 너무나 우리가 녀석을 닮았습니다. 


짝의 원리에서 서로 대칭되는 것을 이제 아셨지요.

대칭에서 양쪽의 성질은 180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아는 겁니다. 

그것 모르면 대칭성 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서는 꿩 먹고 알 먹는 일은 없습니다.

꿩 아니면 알, 양자 선택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도 하고 

이 세상 삶을 즐기기도 하는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후자를 택하면 전자를 버려야 하고 

전자를 원하면 후자를 반드시,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는 짝의 원리가 3위1체의 법칙으로 확실히 정착됨을 알았으니

세상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마세요. 

짝을 이룬 소미립자가 하나가 UP spin(엎스핀)이면

반드시 그 다른 하나는 보나 안보나 DOWN spin(다운스핀)입니다.

반대로, 전자가 DOWN이면 후자는 반드시 UP입니다. 


짝으로서의 둘의 공존은 

성질이 서로 반대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양쪽이 반대됨으로써 하나 곧 짝을 이룬다

이것이 3위1체의 법칙입니다. 

양자 역학은 이 3위1체의 법칙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지금은 한시적이니 반드시 영원한 세상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삶을 만끽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추구만 해도

오는 영원 세상에서 그 정반대의 것을 영원히 타고 나게 됩니다.

절대로 면할 수가 없고 피할 수가 없습니다. 

고스란히 그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3위1체의 법칙은

당신의 생/生에 충분한 경고를 해 준 셈입니다. 

첫 창조에서 인간(아담)이 잘못해 죽음 즉 자연계 존재가 되어 버림을

만회, 회복하는 것도 짝의 원리에서 이 단 한 번만의 기회입니다.

처음 아담과 대칭 아담과의 대칭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금 웃는 자는 울게 되고 

지금 우는 자는 웃게 된다고 하셨으니

바로 이 3위1체의 법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입을 벌려 웃는 것을 지적하심이 아니라

행복한 웃음이 연속되는 네 활개치며 사는 

세상 삶의 재미를 가리키심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는 것의 집착만 끊어도

사탄의 시험의 1/3은 이기는 것이 됩니다. 

나머지 2/3는 나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생명(사랑)의 법칙을 준수함에 있으니 

곧 대칭 아담께서 말씀하신 바 "새 계명" 지키는 일입니다.

쉽게 말해 3위1체의 법칙 따라 운영되는 "새 생명"입니다.


이런 조건하에서는 사탄의 시험은 더 이상 맥을 못춥니다.

시험이 오는 족족 모조리 격파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부인을 강조하시고

매일 십자가 짐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내가 구원해야 할 죄인의 그 십자가 지지 않고는

다시 말해 주님의 죽으심을 짊어지지 않고는(고후 4:10,11)

주님의 생명이 그 죄인에게 적용될 수가 없고

따라서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치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항상 내 육체에 채우는 자가

이 세상 삶의 재미를 누릴 수가 없음이니

그래서 일락을 좋아하는(to live in pleasure)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딤전 5:6)는 선고가 내려지게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