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구원론(십자가 짐·자기 부인)

좌우로 치우치면 절벽이기에 조심해 걷는 길이 주님 말씀하신 좁은 길

Tayseek Kwon 2019. 4. 6. 14:19




좌우로 치우치면 절벽이기에 조심해 걷는 길이 주님 말씀하신 좁은 길





아주 신경 쓰며 

걸어야 하는 길임에 비추어

너른 길은 그런 조심성 없이 

갈 수 있는 길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그런즉 하루 24사건 경계 상태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전투 현장에 뛰어든 것이 이 세상 위치다.

이 세상 神에게 눈이 감겨져 아무 것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무조건 살고나 보자는 그런 무감각, 마비 상태가 아닌 것이다.


"주님이 지키시므로(혹은, 자기를 지키시므로ㅡ둘이 하나됨을 인해)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말씀과 일견 상반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일면만 보는 우리의 불찰이다. 

양면을 다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갑과 을이 둘이 하나를 이루어 병이 되어 있다면

병을 갑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을이라고도 할 수 있음이니

어찌 갑이 을이 되고 을이 갑이 될 수 있느냐 하고 일방적인 생각만 고집하면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음과 같다.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이시니까

그 계신 모습을 보고 성자시라 해도 맞고 성부시라 해도 옳다. 

매사가 이러하므로 내가 위 경고대로 

"조심하는" 경우에

악한 자가 나를 "만지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 갑과 을의 관계에서 병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내 스스로 "조심한다"고 해서 나를 "만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친히 나를 지키시므로 즉 나와 둘이 하나된 위치에 계시니까ㅡ

이것이 그 답인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은" 그 "은혜"가 병에 해당된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지키신다"고 해도 

주님께서 "자신을 지키신다"고 해도 모두 진실을 말한 것이니

내 스스로 나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도 옳다.

하나님께서 미리 나를 택하셨다는 말도 틀림이 없다.

이 갑과 을의 충돌에서 병으로서의 조화는,

내가 내 운명을 정하는 향방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그 미리 아심을 따라 

나의 믿음의 순종의 결정이 지장이 없도록 하셨다는 그 뜻.


가령 구원에 이를 내가 인류의 맨 나중에 출생한다고 가정할 때

내가 아직 모태에 있을 때 주님 다시 오심으로 

내가 구원될 기회를 아주 끊어 놓으시는 일은 없다는 의미다.

모든 인간 구원은 주님의 영광을 보지 않고서야 이루어지는 일이니까.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보았다면 당시 안믿을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그것이 주님의 살아나심을 제한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이유다.

즉 500여 형제(고전 15:6)에게만 보이시고 

나머지 사람은 부활하신 사실을 전연 알 수 없었던 것.

그렇게 해서라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심이니

억지와 간섭에 의해 강제로 믿게 하심인 때문.


주님의 영광은 그 많고 많은 모든 기적으로 충분히 나타나셨지만

단지 세상의 안목으로 본 위풍당당이 아니라

한낱 죄인의 부끄러운 처형 모습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가졌던 믿음까지도 다 미련 없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사정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나와 내 복음(구원의 희소식)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심판날에 가서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라 경고하신 것.   


이 세상의 지배자인 악령 사탄은

아담의 위치에 서신 대칭 아담과 원수지간인데

대칭 아담에 속한 그 교회 즉 우리들과도 당연히 원수 사이로서

이 세상에서 집중 공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아니라면 그것이 외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고로 내가 원치 않는다 해도 항상 전투 상황이다.

전투에 임한 자가 어찌 방심 상태에 있을 수 있는가.

"넘어질까 조심함"은 바로 이 24시간 방심 않는 태세일 뿐이다.

때문에 "포효하는 사자가 삼킬 자를 두루 찾아 헤매는" 격(벧전 5:8).


그러나 앞서의 설명대로 나와 사탄과의 대결이라기보다

나와 하나되시는 대칭 아담과의 대결이므로

(아담을 죽게 만들었으니 아담과 사탄과의 대결인즉)

시종일관 대칭 아담과 불가분의 하나로서 그리스도 의식 생활이어야.


말에나 일에나 주님의 이름으로(골 3:17)ㅡ

(농담 같은 것도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어ㅡ엡 5:4)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고전 10:31)ㅡ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 4:11) 

등이 모두 이 때문이다. 


"내 안에 대칭 아담께서 사시는"(갈 2:20) 까닭.

이것이 둘의 하나됨의 삶의 양식인 것이다.

대칭 아담께서 오직 나를 위해 움직이심은 당연지사.

왜냐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시더라도

그 다른 사람이란 것은 장차 나와의 한 몸됨의 

나의 분신 곧 바로 나 자신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의 방심 않는 경계 태세 즉 항상 "조심함"은

비록 한 순간만이라도 자아 의식이 아닌(나를 위한 삶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 의식(그리스도를 위한 삶ㅡ고후 5:14,15/롬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