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진리의 증언자·證言者

구원받은 삶과 종교인의 삶의 차이는 여기서도 드러나

Tayseek Kwon 2019. 4. 6. 14:04





구원받은 삶과 종교인의 삶의 차이는 여기서도 드러나



구원 얻는 믿음을 성경의 경고대로

달리기 경주와 같이 인식하지 않는 것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좌이니 일대각성이 요구됨





구원 받은 사람의 이 세상에 처한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나.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목적에 따라 좌우됨은 당연하다.

구원되었다는 것은 범죄 전 아담의 모습/상태로 복귀됨을 뜻한다.

즉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죄인으로부터 의인으로>이다.


산 자라 함은 애초 아담이 창조되었던 그 모습이니

이는 초자연계 존재로서의 형체를 말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둘이 하나되어 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하신 그대로

함께 하늘에 올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현재 위치한 상태(엡 2:6).


고로 이 둘의 하나됨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

이러한 본질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구원 받아 이 세상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세상에 다시 보내심을 받은 의미이다.

대칭 아담께서 성령으로 오심으로써 나도 함께 세상에 온 것이 되는 것.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세상에 오심과 같은 양상.

머리와 몸은 같은 본질이므로 의당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 살리시는 성부의 일을 하고자

하나님의 양자로서 "맏아드님"이신 주님의 본을 따라

하는 바로 그 일에서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처럼" 하는 것이다.


오직 우승하겠다는 일념뿐이다.

다른 생각할 여유가 전연 없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니 충격에 가깝다.

구원만 받으면 그만이라고 그릇되게 교육 받아 온 까닭이다.


이 "달리기"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그런 의미가 됨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그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고 핵심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아담"의 닮은꼴이다.

육(체)으로 난 첫 사람 아담의 육체에서 그러하고

이제 대칭 아담 안에서 또한 그러함은 당연하다.

즉 이 세상에서 대칭 아담께서 하신 일을 닮아야 하는 것.

<하신 일>이지 <사신 것>을 닮는 것이 아니니

왜냐면 일하셨지 사신 적은 일절 없으시니까.


30세쯤 되시어 세례 받으시기 전까지는 사셨다고 해도 좋다.

목수로서 일하시며 가사를 돌보셨다. 인생 사는 방법 중 하나다.

그러나 성령 받으시자 당장 시험의 대상이 되셨고

그 후로부터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으니 바로 우리의 판박이이시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나름대로 세상 사는 삶이었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접하여 순응함으로써

세례 받고 성령을 모신 이후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 나 자신의 일이 아니다.

왜냐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빌 1:21)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갈 2:20).


부르심을 받을 당시의 상태 그대로 지내라고 한 것도 그 때문.

종으로 믿게 되었으면 자유인될 수 있어도(고전 7:21)

차라리 종으로 있으면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

왜냐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요

내가 내 마음대로 나의 인생을 요리하며 산다고 살았던

과거의 "옛 사람"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

이 차이를 거의 모든 소위 구원받았노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면하며 또한 모른다.

이것은 성경에서 벗어난 "구원"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 내가 살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지 할 때

그것이 주님이 경고하신 넓고 큰 멸망의 문이 된다(마 7:13).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은" 이유다.

이치상으로는 성경대로 함이 맞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 짐이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면" 간단한 일인데도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인식되어지는 것.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장래를 예단하기 무척 어렵게 된다.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좁은 문 너른 문의 구별은 알아 성경 내용에 대한 지식은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여

가련한 운명의 벨릭스 총독(행 24:26)의 운명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벨릭스는 바울의 직접 전도를 듣고 두려워 하기가지 한 사람이다.

그러나 끝내 세상 사랑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해 멸망에 든 예다.

"세상 사랑"이 무슨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 지배자요 神이 마귀인 줄 알면 어맛 뜨거라 하고 피해야지

그럼에도 집요하게 세상 미련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무언가.


사탄이 이 세상 왕이라는 것은 못믿으면서

어떻게 주님께서 나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가.

둘 다 믿지 않는 것이다. 그 증거가 세상 사랑이다.

믿음이 아니라 단지 영생에 대한 욕심이었을 뿐이다.

욕심을 특수 환경에 따라 믿음으로 오인한 것뿐이다.


믿음이 약한 것도 아니고 젖먹이의 단계도 아니다.

그리스도께 오는 기본 요건이다.

즉 말씀하신 대로 의사 찾는 중병환자,

모세 당시 불 뱀에게 물려 죽음에 이른 것을 자각하는 자,

목 말라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 이른 자

이런 자들만이 그리스도께 오는 법이다.


이상과 같은 상태를 스스로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요 6:45).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알고 있다가

이런 점에서 자기를 관찰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자각한다면

이에 대해서 찾고 구하고 두드림이 있어야 한다는 경종이다.


그래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말해 주는 것 귀동냥으로 구원될 생각 아예 말아야 하는 것.

부지런히 두드리는 가운데 자신의 미비점을 성령으로 깨닫게 되는 것.


이런 상황은 "목회자"든 "평신도"든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