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더 다시는 로마서 7장에 머물지 말고 고린도전서 7장에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살아야

Tayseek Kwon 2019. 4. 1. 20:16





더 다시는 로마서 7장에 머물지 말고

고린도전서 7장에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살아야


더 다시는 로마서 7장(롬 7:7)에 머물지 말고

고린도전서 7장(고전 7:1-40)에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살아야





그러므로 독자께서도 이런 사례를 거울 삼아 각종 생애 분석 중에 이와 같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인터넷이나 기타 전기(傳記) 등을 뒤져 소상하게 나타나 있는 자료를 수집하는 노고를 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은 조지 뮬러의 자세한 생애의 내역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런 생애는 필자의 분석 경험으로는 극히 드문 예에 속한다. 지금까지 분석해본 여러 역사적 인물의 3운법칙은 흔히 볼 수 있는 약전(略傳)이나 신문지상에 나타나 있는 자료로써 충분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3운법칙의 정확성은 이미 설명한 대로 그 자체 구성되어 있는 짜임새로써 자체 증명되었으니, 천하 없어도 세 가지 유형(FS, OT, SN)밖에 없으므로 생애의 생존연수를 계산해서 각 유형별로 따로따로 셈해 낸 다음 그 3가지 LP 기간에 맞는 사항들을 찾아보면 아주 쉽사리 결론을 얻게 된다. 가령 70세를 일기로 타계한 사람은 FS형으로 가상하면 LP가 40년(70X4/7)일 것이요, OT형으로 가정하면 LP는 23.3년(70X1/3) 즉 23년 하고 4개월 정도이고, SN형일 것 같으면 LP가 25.7년(70X7/19) 그래서 25년 8개월일 것이니, 이 40년, 23년, 26년(간단히, 사사오입하여) 3가지를 들고 이 셋 중 어느 것에 부합하는지 살펴보면 이들 중 어느 하나와 반드시 들어맞는 즉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반 로버츠의 경우에도 생존 햇수가 73년(1878-51)이니 FS형으로 가상하면 LP가 약 42년(73X4/7)이요(무슨 유형에 속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소수점까지 계산할 필요 없이 대략 몇 년이나 하는 정도로만 알면 되므로), OT형이라면 LP는 약 24년(73X1/3), SN이라면 LP는 27년(73X7/19)이므로, 이상과 같은 그의 생애의 특징을 살펴본 대로 하면 27년 곧 SN 유형이라는 답이 나오는 것이다. 정확히 계산하면 26.9에 약간 못미치는데 이를 사사오입하여 27년으로 잡는 것이다.


모든 생애가 이런 식으로 산출되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오차(생존 햇수를 기준하여 4/7, 1/3, 7/19로써 정확하게 계산해 낸 LP 기간 햇수와 연보[年譜]상으로 나타나 있는 연도로써만[예컨대 이반 로버츠의 경우 1930년에서 1903년을 빼낸 것] 계산해 낸 햇수와의 차이) 범위가 모두 1년을 넘지 않았다. 이반 로버츠의 경우 대략 0.1년 차이인 것이다. 물론 이는 햇수(年數)만 계산한 것이고 월일(月日)까지는 생략한 것.


조지 뮬러의 경우에서 보듯이 생년월일 및 사망년월일까지 정확하게 나오면 그리고 그 생애의 연보가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을 때, 달(月)까지도 정확히 나오고 날 수는 며칠 상관으로만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음을 본다. 김일성의 생애가 역시 그런 경우로서 달까지 정확히 나오고 있다. 만일 그의 생전일지라도 정확한 자료 분석만 했다면 그 사망 일시를 달까지는 물론이고 날까지도 아무 날에서 아무 날까지 그 며칠 사이에 죽는다고 미리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반 로버츠는 본격적으로 복음 전도 활동을 시작한 해가 1903년부터이므로 1903년으로부터 시작하여 1945년(FS일 경우 LP가 42년이므로), 1927년(OT형이라면 24년이므로), 1930년(SN이면 LP가 27년이므로), 이상 세 가지에 해당되는 생애의 특이한 연도에 맞추어보면 되는 것이니, 그동안 쥐 죽은 듯이 있다가 느닷없이 집회에 가끔 나가기 시작한 것이 "1925년부터 1930년까지였다"고 한 사실에서 그 "1930년"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므로 SN형으로 확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설명해 온 것과 같은 관점에서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이반 로버츠의 활동을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하는 이라면 이상과 같은 결론을 내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임이 틀림없다. 고로 양자택일의 선택이 강요된다. 필자의 해석에 동의하든가 아니면 '3운법칙'의 진실성을 부정하든가 둘 중 하나다. 그러나 이미 3운법칙(3운법칙)의 절대적 신빙성은 자체 증명이 되어 있다. 이렇듯이 3운법칙의 엄정, 엄밀성은 놀랍기 그지없다.


바로 이와 같은 양자택일이 이 3운법칙을 대하는 모든 인생들 각자에게 강요되고 있으니, 즉 필자가 밝힌 대로의 열 두 가지 메시지를 수용하든가 아니면 3운법칙 자체를 부정하든가 둘 중 하나다. 인생들이여,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그러나 이미 3운법칙의 진실성은 자체 증명이 되어 있다. 진퇴양난이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 마지막 때 당신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은혜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영생에 들어갈 일이다. 왜 스스로 죽고자(멸망하고자) 하는가.


이러한 이반 로버츠 생애의 3운법칙은 여러 모로 이 3운법칙(trini homo)의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다. 임박해 있는 적 그리스도 출현의 성격을 드러내어 미리 경고해 주고 있는 까닭이다. 즉 이반 로버츠의 집회에 나타난 것과 같이 성령의 역사(役事)와 아주 흡사한 것으로 나타나 모든 인생들을 속일 것이기 때문이다. 적 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이라 할 것이니(살후 2:2-12)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 각종 어마어마한 기적까지 첨가되어 나타나니 가히  누가 이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리요. "택한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할 것이다" 하신 말씀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그 충만한 은혜에 젖어 있는 즉 성령의 인도를 입는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함과 풍성함을 향유하고 있는지라 그런 억척같은 변화일지라도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고로 지금부터 그런 충만하고 풍성한 은혜에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다. 
  

우리는 적 그리스도의 속임수를 이 이반 로버츠를 통해 미리 들여다보고 그 적절한 경고를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이를 확정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이상과 같은 도표로 나타나는 3운법칙인 것이다. 그런 속임수는 오늘날도 횡행하고 있다. 웨일즈의 "영적 현상" 이후로 전 세계에 만연되고 있다. 소위 "방언하고 병 고치는 등의 은사"를 강조하는 운동이 그러한 종류다. 이들은 하나님도 증명하고 성경의 진실성도 증명하는 여러 가지를 표방하면서 진실을 호도한다. 그러나 자기 부인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은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반 로버츠의 집회에서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던가?" 할 것이다. 그러나 적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던 때에는 예수를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으나 지금은 모든 실상이 드러나 이제야 그리스도가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으니 나를 믿으라" 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슬람 교도처럼 예수를 단지 마호메트가 오기 전의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취급하면 되는 일이다. 이미 그런 말을 하여 많은 회교도가 생긴 것과 같이 그 때 가서 석가, 예수, 마호메트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당대의 선지자들로서 일괄 해석해 치우고, "내가 바로 그 최종적으로 오게 되어 있는 그리스도다" 하면 되는 것이다.


석가(고타마 싯다르타)는 비록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도 당시는 몰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니 창조신을 부정했다고 해서 선지자 군(群)에 끼이지 못할 이유도 없다. 당시의 인류를 가르쳤던 스승이었다고 해석해주면 되는 것이다. 이반 로버츠가 일주간 금식 기도 후 네 가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 중에 죄를 자백하라 하고 모든 의심스러운 행위들을 버리라 한 것은 세상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지금까지 설명해 온 대로의 "우리 대신한 죽으심"이라는 황당한 교리로써 그 의미를 성경과는 전혀 다르게 만들 경우 "다른 복음", "다른 예수"(고후 11:4)가 되는 것이므로, 그런 그리스도를 백 번 높이고 찬양해도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적 그리스도의 영"(요일 4:2,3)이라 했는데,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적 그리스도로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실을 부인함이다.


이는 자기가 바로 그리스도라 하기 위해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 해서, 반드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은 것을 말하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라고 그릇되게 그리스도를 선전한다면 그것은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으므로 적 그리스도의 영인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을 말함이니, 그리스도를 사람함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고 이 하나됨은 자기 부인으로 입증되는 까닭에, 자기 부인이 없다는 것이 이 '사랑 없음'의 증거가 된다.


그런즉 자기 부인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 어떠한 "하나님을 사랑함, 그리스도를 믿음, 구원 받음"도 실속 없는 빈 껍질이요 생화(生花)가 아닌 조화(造花)일 따름이다. 그런 그리스도라면 얼마든지 전도, 전파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탄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탄이 그런 전도를 묵인하고 결코 방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장하는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구원과는 무관하고 오직 속임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해서 단지 그것을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역사라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물론 그런 내용의 전도를 받아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전파되는 것이므로 '교리'를 수용하는 대신 그 '사실', 그 "말씀"을 수용하여 믿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게 될 때 그는 훌륭하게 구원 받는 것이니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 있는"(마 18:3) 경우다. 그러므로 획일적으로 가름하거나 무엇을 단정하는 것은 금물이나 대체적인 현상이 그러하다는 뜻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당시에도 왕성하게 일어났던 사이비(가짜)를 제외하고는, 초대 교회에서 사도들이 전파했던 그리스도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였고 오늘날처럼 모조품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하는 것. 그 증거로서 바울은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살거나 죽는 자는 아무도 없다"(롬 14:7-9)고 확언한 것이니, 알기는 알아도 삶 자체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 3:18)로 변질됨으로써 자기를 속이는 이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의 "멸망"(:19)" 앞에서 바울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반 로버츠가 금식 기도 중에 지시 받았다는 내용 중에, "각자의 그리스도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방하라" 했다 해서 이런 점을 두고 성령의 역사의 증거라 할지 몰라도, 불교 신자더러 어느 불교 승려가 "자기의 불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방하는 생활을 하라"고 독려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요 수준이라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적 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는 "당시는 예수가 구세주인 줄 알고 그렇게 말했으나 지금은 참으로 그리스도가 출현했으므로 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라" 하면 그뿐이다.


성령의 세례


회개하고 세례 받으면 죄 용서를 받게 되고 그러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니 흔히 하는 말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심"이다. 우리에게 임하여 오실 때 성령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있고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지 않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의 세례"가 또 별도로 있지 않다. 모두 같은 뜻이다. 이를 혼동하는 이들이 많은데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능력 받아 일하기 위해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고 오해하는데 성경을 모르는 탓이다.


우리는 구원 받는 즉시 복음 전파의 일꾼으로 투입된다.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 하신 그대로다. 때문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하신 것이다. 병자의 병을 고치신 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알리라" 하심과 같다. "알리지 말라" 하신 때도 있지만 "알리라"고도 하신 것이다.


전자의 경우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소리 치지도 않을 것이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것"(마 12:17-19)이라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고, 후자는 은혜 받은 자의 당연히 할 도리를 말씀하심이다. 온 세상에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존재를 과시하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심이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 백성의 임금으로 옹립하기 위해 허다한 군중이 싸고 드는 등 소동을 벌이면 십자가 죽으심이 그만큼 지연될 수도 있는 일.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혼동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이른바 "성령의 세례" 받기 전에는 구원을 받은 일도 없다가(단지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고 있다가) 그들이 말하는바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세례를 단순히 영생 받기 위한 통과 의례 또는 "그리스도를 믿음"의 한 표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결과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지냄의 성경대로의 의미를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세례 받아도 소용이 없으니 죄 용서도 없고 구원도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결신(決信)"이나 "세례 받음"이 이러한 경우다. 이러한 "말씀의 혼잡"(고후 2:17/4:2) 속에서 이반 로버츠의 모방 또는 가짜도 버젓이 진짜 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오순절 운동"과 같은 소동도 보란 듯이 대접을 받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이들은 "방언 말하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초대 교회 당시 초창기에는 물 세례(회개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구분되어져 인식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증거의 하나로서 방언 말하는 것이 나타났던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처음 방언을 말하기 시작할 때 각국의 거주지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자기 고장의 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배우지도 못한 외국어를 거침없이 하는 것을 듣고 "술이 취했다"고 억지 말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천사의 방언"이라는 것은 바울 사도가 "방언을 아무리 잘 해도"라는 표현으로 사용한 것일 뿐 실제 상황은 될 수 없다. "믿는 자에게 새 방언이 따른다"(막 16:17)는 말씀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행 2:4) 한 것처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데에는 외국어 말하는 것도 포함되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말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게 되는 모든 구재(口才)와 변설(辯舌)이 이에 포함된다(눅 21:15). 스데반에게 돌무더기 속의 죽음을 안겨다 준 성령 충만의 책망도 이에 해당된다. 우리말로는 "방언"이라 번역되어 있지만 舌(설) 곧 혀(tongue)를 말함이다. 그래서 "언어"로도 통용되지만, "새 혀"라 하신 것은 성령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게 되는 일체의 현상을 총칭하심이라 봄이 옳다.


초대 교회 당시는 첫 시작이므로 성령 세례의 분명함을 나타내기 위해 방언 말함이 성령을 받아 모실 때마다 나타나졌으나 그 이후 교회가 정착이 되고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 으레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인식되면서부터 굳이 그런 증거로서의 방언 말함이 필수였겠는가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하다. 그 확실한 예로, 우리가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을 성령의 역사로 단정 짓기에 주저하지 않는데 이 때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 전의 수많은 교회 역사상의 크고 작은 성령의 역사(役事)에서 방언이 반드시 개입해 나타났다는 기록은 없다. 개별적으로는 간혹 나타났는지는 모르나, 성령의 나타나심은 그런 식으로는 즉 혹자에게는 그런 증거가 나타나고 혹자는 그렇지 않게 되는 그런 차별화는 있을 수 없다. 증거가 나타나려면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성령의 세례에 대한 증표 또는 증거로서의 "방언 말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반 로버츠의 집회에서도 그런 방언 말하기가 일반화되지 않았다. 로버츠 개인으로는 그런 현상이 있었다는 말도 있으나 집회에 나온 모든 이들이 일제히 방언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기록은 없다. 만일 그러했다면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이상하게 그 집회를 인식했을 것이고 그리 되면 모조품으로서의 성령 역사로 교회를 혼란시키려는 사탄의 계획은 좌절되는 결과를 빚는다. 그러나 이 로버츠 집회를 근간에 일어난 소위 "오순절 운동"의 뿌리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그대로다.


로버츠의 집회 자체에서는 그런 현상이 없었으나 이 로버츠의 집회가 그런 현상의 진원(震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즉 "모조(模造) 성령 운동"의 출발점으로서의 이반 로버츠의 웨일즈 영적 운동이라고 결론내림에 인색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위에서 그 요점을 설명한 바와 같다. 성령의 세례를 마치 완성점에 이른 최종적인 그 무엇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역시 마땅히 시정해야 할 점 중의 하나다.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믿어 영접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표면적 증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 증거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나타나는 자기 부인의 삶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 설혹 아무리 방언 잘 하고 예언을 많이 해도 그 일상생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진 것이 아니 되고 자아중심이 여전히 살아 이전과 같이 네 활개를 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한 것이다. 성령을 모시지 않아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지 않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고서도 얼마든지 자아중심으로 흘러갈 수 있지만(그리 되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어 다시는 회개가 불가능하고 영구적으로 회복이 되지 않는다) 이 경우는 처음부터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자체 증명만 될 뿐이다.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다. 이 "권능"으로써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생활의 첫 발걸음이 내디뎌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의 혼돈은 하나님의 "3위1체로 계시는" 의미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 말로 하나님은 엘로힘인데 이는 분명히 복수임을 뜻하므로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이런 상호 상충 점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할 때, 여기서 "하나"라고 할 때의 히브리어는 목적과 행동이 동일한 방향으로 나가는 연합체로서의 하나("echad")를 의미하는 것이고 단 하나의 개체를 의미하는 그런 하나("yachid")의 뜻이 아니라는 것. 성경 창세기에도 "우리가 우리와 같은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만들 것"이라 하신 대목이 있고,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도 성령께 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에게 와서 그와 거처를 함께 할 것이다" 하신 바와 같이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3위1체"로 계신다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신 분부에서 비롯되는 것.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데 사랑으로 하나 되어 계시므로 이렇게 하나로 계시는 경우를 가리켜 아버지시라고도 또는 아들이시라고도 못하기 때문에 이 경우 그냥 "성령"이라고 하면 되는 그런 명칭(이름)이신 것이다. 하나에서 둘이 되어 있으므로 이 둘은 자연적으로 그 하나가 둘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홀로 존재하시던 분이 자기와 똑같은 다른 한 존재를 자기로부터 만드신 데에서 나오는 것.


그러니 인격성이 없는 물질 같으면 저절로 둘로 나누어졌다 하겠는데 인격성을 지닌 분이시므로 만드셨다 또는 낳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목적이 있어 자기와 똑같은 존재를 만드시니 그렇게 해서 존재하시게 되는 분 역시 인격성을 지닌 존재이시므로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니 너는 저렇게 하라는 식의 서로 간의 합의와 약조가 필요하게 된다. 저절로 물질이 나누어짐으로써 둘이 되면 그런 저런 것이 다 필요 없지만 다같이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성의 존재이시므로 그런 필요성이 있게 되고 이 존재의 원리원칙을 '사랑' 또는 사랑의 원리 혹은 생명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다.


이 약속과 합의라는 것은 원래 하나로 존재하시다가 현재 둘로 양립되어 계시는 터이므로 영원히 둘은 둘이되 원래의 그 하나됨을 유지하자는 것. 이것이 조물주와 피조물 즉 낳으신 이와 낳으심을 입으신 이 둘 사이의 영구불변의 생존의 법칙인 것. 고로 무릇 살아있는 자는 다 이 법칙을 따르게 되어 있고 하나님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로 존재하다가 둘로 나누어 졌다 해서 그 둘이 항상 이전에 하나로 있을 때처럼 그렇게 하나이듯이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격성 없이 그냥 물체가 둘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 둘이 하나로 있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그러나 인격성을 갖추신 조물주께서 자신과 같은 별도의 존재를 만드시니 아들이 되셨고 그 형상이 되어 계시는데 이렇게 자기에게서 나오신 분이 한 분만으로서 만족하신다는 것은 그 하나로서 만족하신다는 의지와 목적이 작용하셨기 때문. 물질 같으면 그렇지 않다. 하나로서 둘로 분리된 경험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그 후 얼마든 계속하여 분열 가능성이 있는 것.


만물이 이같이 짝이 있어 둘로 하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말을 바꾸면 애초의 하나가 둘로 짝을 이루어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우주 만물이 우연히 자연 발생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조물주의 그같은 의지와 목적하에 탄생한 것임을 훌륭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우연의 산물로서 생겨난 것이면 그렇게 만물 만상이 짝을 이룬 하나의 구조와 체제로서 탄생하거나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랑이란 것도 존재할 수 없다. 고로 사랑이란 것 자체가 만물이 조물주의 창조의 결과이며 그래서 이 우주 만물이라는 것이 짝으로 되어 있는 이유를 넉넉히 설명하고 입증하는 것.


자연적으로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면 사랑이란 것이 존재할 수조차도 없는 것이니, 다시 말해 둘로만 분리되지 않고 그 이상으로도 얼마든 분리될 수 있고 그 분리된 것이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짝을 형성하여 하나처럼 존재할 수도 없다. 각 개체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함으로써 무질서 가운데 뒤죽박죽으로 혼재(混在)할 것이므로 영구하게 존재할 수도 없다. 이 우주만물의 특성으로서 모든 것이 일사불란한 원리원칙과 법칙으로 철저히 움직인다는 것은, 하나처럼 마치 하나인 것과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워낙 수학의 귀재(鬼才)이므로 그가 한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1은 남자를, 2는 여자를 상징한다고 했다.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태면 3은 남녀 합일 즉 하나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말도 그가 했는지는 모르나, 3위1체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인데 그가 이 일까지 알 수는 없었으리라. 남녀 합이 왜 3이 되느냐 하면, 남자 1과 여자 2와 하나가 되어 한 몸이 되면 애초의 1과 2와는 별개의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별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상태를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또 1과 2와 혼동해서도 아니 되므로 1과 2 그리고 그 1과 2가 하나되어 있는 것을 3이라 하고 이렇게 1과 2 및 3을 3위라 하는 것이다. 3위1체란 말은 물론 성경에 없으나 "성부", "성자", "성령"이란 이 "이름"들은 말 그대로 "이름"들로서 호칭과 관계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시는 것을 성령이시라 한다. "하나"라는 말 자체가 사랑의 의미다.


마치 한 분처럼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계시는 것을 "아버지"시라 호칭할 수도 없고 "아들"이라 부를 수도 없다. 이 때는 단지 "성령"이시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다. 한 아들만 낳으시니 "독생자(獨生子) 하나님"이시다. 아들을 하나만 두신 것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니 당신의 형상은 하나만으로 충분하기 때문.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전부다. 또 "낳으셨다"는 말씀으로 충분한 것은, 낳으셨으니 당신과 같으신 하나님 즉 성령이시지 달리 무엇이 되실 수 없다.


인간의 부모도 낳으면 자기와 같은 육체를 낳는 것이니 다만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당신과 같으신 성령 즉 하나님이시지 하나님 아닌 다른 무엇이 되실 수 없다. 우주 만물은 독생자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므로(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드셨으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만드신 사실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공간이란 개념은 아들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생긴 개념이니 그 이전의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만으로 족하지 알 수도 알 것도 없다. 우리 지식의 한계 밖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니...만물보다 먼저 계시는"(골 1:15) 이로서 곧 그리스도시다. 성경에서 "성령"이라 할 때는 아버지와 아들 함께 계심을 말하는 것. 특별히 구별하여 아버지 또는 아들이라 하기 전에는 또는 "아버지의 영(성령)", 혹은 "아들의 영(성령)"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령)"이라 하기 전에는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 안에 성령 계시다는 말은(베드로는 내 위에 계신다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아들을 모시고 있다는 의미다(요이 1:9).


그래서 내 몸이 성전인데 마리아는 어디다 쓰려는 마리아인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계신다는 성경의 선언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성령께서 내 안에 사시지 않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자신감을 도저히 가질 수 없으므로 그 종교가 상상해낸 것이 연옥이다. 어떻게 내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모시겠는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역시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거룩함이란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다. 자기 부인하면 된다. 자기 부인해야 하나님을 사랑함이 가능하다. 하나님 사랑이 가능하면 이웃 사랑이 연쇄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하려면 자기 사랑이 먼저 달려오기 때문. 이웃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 먼저 앞장 서서 뛰어와서 자리잡기 때문. 천사는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기 중심이 아니니 이 말은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이라 한다.


베드로나 바울이 우리더러 거룩하라 명하는 것도 또 믿는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들(saints, 성인, 우리말 번역은 성도[聖徒]")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 것은 이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 곧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는 계명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그 말씀대로 해야 산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데 그 명령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것은 선악과를 먹어 자연계에 도로 돌아와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가 되어 있으니 자연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의 본능으로만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미 지은 죄(태어나면서부터 언행심사 일체가 지기 중심으로 되어 있는 바탕인즉)에 대한 죄책감이 양심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이라 그 밑바탕이 되어 주는 힘이 생기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은 죄에 대한 미해결과 그 보응에 대한 공포, 그리고 당장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해줄 자기 부인의 결여 이것에 묶여 꼼짝을 못하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 져내랴" 하고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탄식만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이 과거 죄에 대한 해결을 해주셨고 현재 내가 나의 자유 의지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는 원동력이 되어 계신다는 사실에 있다. 주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다시 살아나 하나님 앞에 앉아 있으니 과거 나 중심으로 살던 것이 죽어 이제는 넉넉히 자기 부인이 가능해진 것.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 중 아무도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한 것이니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곧 거룩함이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신 것은 이 새로 구조화한 삶의 또는 생명체의 체제를 계속 견지하라는 말씀이다. 주님 친히 내 안에 계셔 나 자신처럼 되셔서 과거 내가 나 중심으로 일관하던 일을 나 대신 맡아 하시고, 내 안에 선물로 계심은 영원히 그렇게 해주신다는 바로 그 의미이니 나는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당연히 주님을 사랑하고(내 자신을 사랑하는 대신) 주님을 위하고(내 자신을 위하는 대신) 주님의 일을 하는(내 자신을 위한 관심사로 평생을 살던 대신으로) 것뿐이지 않은가. 이것이 거룩함이다.


거룩함이란 완전히 구분되어 떼어 놓아졌다는 뜻이다. 즉 자신에게서 뚝 떼 내어져 하나님 몫으로 놓아졌다는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셔서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내 것으로 내 몫으로 완전히 갈라 떼어 놓으신 사실에서 비롯된다. 원래 조물주의 사랑이 이러하시다. 이를 의심하여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그렇게 미련하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오로지 아담 자신을 위하신 말씀이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은 말씀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마치 증명이 필요했듯이 또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증명만으로 되지 않는 듯이 아주 내 안에 자리잡아 내 자신처럼 되어 계심으로써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기로 작정하신 한없는 어버이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미이다. 나를 만드신 어버이 하나님께서 친히 바로 내 자신이 되어주신 것이다. 곧 엄마가 그 아기를 다시 그 품에 안으시는 의미요 나는 다시 엄마 품에 영원히 안기는 의미이다.


아버지(하나님은 성별이 없으시므로 아버지라 할 때는 당연히 어머니로서의 의미도 함께 지닌다. 성별이 없기는 스랍이나 그룹이나 천사들이 모두 마찬가지니 오직 자연계와 관련된 인간만이 해당되는 구별이다)께서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계신 모습, 아들께서 아버지 품에 안겨 계시는 모습을 바로 나와의 관계에서도 재현(再現)하신 모습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가 바로 그러하다. 아버지는 영원히 나를 품에 안고 계시는 모습이시고 나는 영원에 영원을 거듭해도 여전히 그런 의미와 모습으로 우리가 모시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령의 의미이시다.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라 했는데 성령을 주실 때 앞으로 이 세상 살 동안에 순종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시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주시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내 마음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순종하겠다, 순종하지 않고는 절대로 살 수 없다 하는 그 인식 가운데 있음을 보시고 주시는 것이다. 순종은 사랑이고 사랑은 언제나 현재 상태를 묻기 때문. 앞으로 이 사람이 얼마 가서는 순종을 아니할 것이라 하고 설혹 미리 보신다고 해도 현재는 그러하니까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원리원칙에 충실하심이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시다. 앞으로 순종할 것을 미리 아시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보시고 주신다는 이 말은 다시 바꾸어 말하면 현재는 그러하나 앞으로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리고 그것을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는 과거 순종하던 것이 다 무효로 돌아간다는 설명이 된다. 왜냐면 언제나 <현재>가 기준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현재이기 때문이요 순종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 이 거꾸로 된 세상에서는 죽음처럼 보인다. 거꾸로 되어서 그렇지 바로 된 세상에서 보면 그것이야말로 생명이요 생명의 법칙이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는 거꾸로 된 것이 바로 보이고 바로 선 것은 거꾸로 선 것처럼 보여져 위험하기 짝이 없고 위태하기가 이를 수 없다. 물구나무 서 있던 곤욕을 풀어주시고 해방시켜 자유인 되게 하셨으니 우스꽝스럽게 사탄이 시키는 대로 또다시 그 노예가 되어 물구나무 서는 꼴이 되지 말 것이다.


설혹 어떤 고난과 고통을 받고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런 사탄의 가증스러운 수작에 말려들어 그런 웃음거리에다 영원한 부끄러움이 될 짓거리를 따르지 말 일이다. 사람이 되어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는가. 삼위 일체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생각은 우리가 믿는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위 양태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한 분 하나님만 계시는데 때로는 아버지, 때로는 아들로 모습을 바꾸신다는 주장이다.


또 양자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원래 사람으로 나셨지만 나중에 요한에게서 세례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 때 비로소 양자(친자가 아닌)로 삼게 되셨다는 주장인데 소위 양자론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이 소위 양태론 같은 것은 지금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이 적지 않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 남자가 자녀에게는 아버지로, 어머니에게는 아들로,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는 것과 같이 어떤 때에는 성부로, 어떤 때에는 아들로, 어떤 경우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므로, 성부께서 태양이라면 성자는 그 비취는 광선이고 성령은 태양에서 나오는 열과 같다는 설명이다.


"삼위(位)" 자체를 부인하는 것보다(성경에 분명히 '삼위'로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언급은 없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분명히 성경이 구분하고 있음을 부인하는, 말씀에 대한 직접 반역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천만부당한 해석이 대충 어떤 직접적인 해를 우리 믿음에 끼치느냐 하면 첫째 우리 죄를 위하신 죽음이 진정한 죽으심이 아니라 일종의 쇼와 같은 것이라고 사탄이나 말함 직한 모독적 언사가 된다.

 

희생 양으로서 죽으신 사실을 완전히 뭉개는 결과가 된다. 죽으시지도 않으면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 곧 살아나실 바에야 그 죽으심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그것을 죽음이라 보지 않으니 우리 위한 죽으심이라 보지도 않는다. 단지 죽음의 고통이 어떻다는 것을 친히 체험하신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 위한 죽으심이 실감이 가지  않는다.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아니시라는 것이니 사람이 아니시라면 나와 하나되실 수도 없다.


이런 사람의 구원관은 이런 것이다. 즉 내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선언하시는 이 한 마디가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런 선언을 하시는 데에는 어떤 획기적인 구실 또는 근거가 필요한데 그 근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것이다. 이것뿐 그 외에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최소한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 감사하는 것, 그 정도면 된다. 그래서 이를 은혜라 한다.

 

너무 거저 먹기 식이 되어 황송한 터라 또는 이성적으로도 맞지 않아 공허감이 있고 양심상의 가책도 피할 수 없어, 여기에다 "택정함을 따르는" 구원이라 덧붙인다. 즉 나의 행동은 다른 세상 사람의 행동보다 훨씬 못하더라도 택함 받았고, 그들은 택함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보다 더 훌륭한 행동을 보여도 멸망하고 나는 그들보다 더 욕 듣는 삶을 비록 살더라도 구원 받는 것은 어느 피조물도 손댈 수 없는 조물주로서의 의지 즉 미리 택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그야말로 미신을 믿는 것 외엔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성적이지도 못하고 상식적이지도 않고 그러니 자연 믿음은 무조건 믿는 것이지 따져서는 안되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모든 것 다 똘똘 뭉쳐 표현하면 오직 사랑, 이 한 마디로 충분한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선생님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바로 그것이지 않았던가.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으니 이는 어버이 사랑이라, 우리가 어버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우리 부모에게서 배웠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다 함께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 이것이 내 기쁨이고 내가 너희를 만든 보람이다" 하시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없다. 더 있을 까닭이 없다. 사람답게 사는 것도 이 사랑으로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고 구원 받고 영생하는 것도 이 사랑이라는 한마디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랑을 어떻게 아느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믜 아들로서 아버지께 대한 사람과 그 피조물에 대한 사람을 동시에 나타난 것이 그 십자가 고난 받으심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그 본을 배우는 것이 그리스도시다. 죽도록 사랑하신 것이니 우리도 죽도록 즉 자신을 다 바쳐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즉 자신을 버려 사랑함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그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시고 그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니 나 자신을 사랑할 필요가 없어서 나를 위하지 않는 것뿐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자연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니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으니까(요일 3:16) 배운 대로 사랑하면 그것이 선을 행함이고 의를 사랑함이다.


그 하나를 사랑하니까 그와 반대되는 것과는 등을 돌리는 사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불의, 불법, 죄, 악을 미워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왜 자기는 사랑을 베풀지 않고 남이 사랑해주는 것만 받으려고 하는가. 그것부터가 틀린 것이다. 그런 것이 악이고 불법이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선을 행했다가 악을 행했다가 하는 것은 그 근본이 악이라는 증거로 알면 간단한 것이다.

 

사람들을 멸망 곧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건지려고 기를 쓰고 덤비는 것은 오직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따름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배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배운 것이다. 또 그 본을 따라 사랑하라고 친히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사탄이 이 사랑을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죽이고 또 그동안 갖은 고난과 모욕을 가해 오더라도 이 사랑 변치 않는 것이 떳떳한 도리다.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내 고유의 절대적으로 귀한 자유다. 누가 이 자유를 빼앗을 것인가. 죽더라도 내 자유를 고수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다가 죽는 것이 나의 보람이다. 온갖 대가를 다 치르더라도 끝까지 이 자유를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영원을 두고도 후회 않을 값진 성취이다. 사랑하는 자유, 사랑할 수 있는 자유, 이 자유 위하여 온갖 고초와 죽음을 당하는 자는 실로 행복한 것이다. 누가 이 행복을 빼앗으랴.


이와 같이 보람찬 영원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살았으니까 이와 같은 당당한 사랑의 자유를 내가 향락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산 자가 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 한 때 고난 받고 죽음을 당해도 그것은 죽음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니 반드시 부활할 것이기에 그러하다. 스스로 살아난다면 그것이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살리실 때에는 "죽음이면서도 죽음이 아니라"는 오묘(奧妙)함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으로서 죽으신 것은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죽어주신 것과 같은 의미가 되시기 위해서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나에게 주셨다는 의미다. 나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영원토록 그렇게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실로서 확고부동하다. 그럼으로써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을 다 바쳐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위해주시는 것을 증명해주셨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그 시점에 와서야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 피조물을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모든 일을 하셨는데 그것을 나타내시지 않다가 그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신 것뿐이다. 나도 나의 사랑을 나타내고 증명할 수 있는 천만 금보다 더 귀한 기회는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것 외에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은 막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삶을 향락하는 데에는 일 푼 어치 가치도 없지만 내가 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데에서, 그리고 방금 지적한 대로 나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점에서 영원 세계와도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비중이 큰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셔야 하는 것은(하나님만이 아니시고) 사람으로서의 나의 본이시기 때문에 사람인 나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이 되어주시는 데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람이니 사람이 되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되셔도 일시적으로 사람이시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른바 '양태론'은 그런 일시적으로 사람되신 것으로 착각함이다. 일시적으로 사람이 되셔서 나를 위해 죽으신다면 그것이 어떻게 나를 위한 죽으심이 되는가. 상식으로 판단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나란 존재도 일시적으로 인간이기도 하다가 다음에는 하나님으로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야 양자 일치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원히 사람이니 나처럼 영원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나 자신>이 되어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려우신 결단을 보라! 나를 위해 영원히 사람이 되어주신 것이다. 완전한 자기 부인의 결실이 아닌가.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음이다.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양자의 조화일치가 되기 때문,


하나님만이시라면 이런 일치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고 사람인 나는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하나로 연합할 수가 없다. 그러면 그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안되고 부활도 나의 부활이 될 수 없다. 승천하셔서 모든 권위와 권세와 능력 위에 군림하여 위치해 계심이 바로 나의 모습, 나의 위치가 될 수가 없다. 나 위한 죽으심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내가 되셨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되셔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래서 내 죽음을 죽으셨고 이제 성령으로 내게 임하시어 나와 하나되심으로 그 죽음이 내 죽음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내 죄를 인하여 죽으신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내가 지은 죄 값으로 내가 필연 죽게 되어 있으므로 죽어주신 것이지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미리 앞당겨 죽으신 것은 아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다"(롬 3:25). "그는 새 언약의 중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다"(히 9:15)고 성경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사귐"이 없고 "빛 가운데의 행함"(요일 1:6)이 없다는 경우는 그리스도를 아주 버림의 뜻도 있지만 형제 사랑이 없음을 죄로 여기지 않아 실제는 위험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할 때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사귐"과 "빛 가운데의 행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간단히 말해, 순종이요 사랑이다. 이 둘은 같은 의미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람을 복종이라 하는 것처럼(엡 5:24) 하나님께 대한 사랑 역시 순종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밑바탕이 바로 자기 부인인 것이다. 이 자기 부인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과 연결된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함과 직결된다.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있음, 세상이 내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힘과 같은 말이다(갈 6:14). 또 성경은 이를 가리켜 우리 중에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다(롬 14:7/고후 5:15). 이는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으면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논리상 앞으로 지을 죄까지 미리 포함해서 위해 죽으신 것이라면, 한번 믿은 다음에는 극단적으로 말해 비록 그리스도를 배반하더라도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자기 부인이 없어도 내가 내 죄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는 이상 나는 구원이 된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믿지 않아도 나는 구원된다는 말과 같기 때문. 따라서 나를 위해 죽으심은 나의 옛 죄 씻음 받고 용서 받기 위함이요 앞으로의 내가 문제이니 다시 과거와 같은 죄를 지으면 만사휴의, 죽으심이 무의미가 아닌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과거의 죄 척결(용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구원의 양면성이다. 하나는 과거의 죄 척결을 위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앞으로의 죄 방지 즉 의롭게 사는 비결이 있어야 함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신 것이다. 이 역시 하나님으로서 부활하심이 되어서는 안되고 여전히 내 이름으로 즉 나 자신이 되시어 사람으로서 부활하심이 필수적이 된다. 물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측면이 강조된다. 하나님 스스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죽음 자체가 무의미해지므로) 아버지께서 살리심으로써 부활하신 것이다.


이렇게 부활하신 능력면에서는 분명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지만(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그 부활 자체는 사람으로서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신 경우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 부활하시는 모습 또는 상태는 여전히 내 이름으로, <내가 되시어 하신> 그대로다. 왜냐하면 계속하여 나와 같은 사람이신 때문이다. 영원히 나와 같은 사람이신 것이다. '양태론'을 믿으면 이 사실을 부인해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렇게 되면 앞서 지적한 구원의 양면성에서 첫째 의미만 수용하고 둘째 의미는 빠뜨림이 되니 그것은 구원이 될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나 이제 한번 구원 받았으니 나의 구원은 영원히 확정된 것이고 그러니 성경의 권고나 경고 같은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그런 모든 것에서부터 해방되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하였으니 성경 따로 그런 사람의 그런 주장 따로 서로가 남남이다. 구원을 잘못 알고 있는 결과다. 그러면 그 <죄를 안짓는 능력>의 바탕은 무엇인가. 과거의 죄는 주님의 죽으심으로 해결되었고 앞으로 죄를 안짓는 바탕이 동시에 마련되었으니 그것이 곧 주님의 부활이요 승천이시다.


여전히 나와 같은 사람으로서의 부활이요 승천이시므로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그렇게 부활하여 살아나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음이다. 그러므로 '양태론'이고 '양자론'이고 모두 부질없는 소리다. 성경의 모든 경고 즉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끝까지 유지하라는 의미다. 견지하는 방법은 갑은 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로서의 하나됨 곧 자기 부인이니 주님께서는 변함 없으시나 내가 문제이므로 내 스스로 나를 단속하여 자기 부인하고 자아중심으로 나가지 않도록 정신을 차림에 있는 것.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역사와 공로는 이뿐만 아니다. 사람이시기 때문에 내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성령 받음이다. 이 역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 오심이요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아버지와 하나되어 함께 오심으로 내가 이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주신 주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 안에 좌정하셔서 내 영혼의 위치에 계셔 내 육체 안에 계시니 아니, 영원히 사시니 이보다 더 확실한 능력의 바탕과 토대가 어디 또 있단 말인가.


내 안에 계셔서 철저한 자기 부인으로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시니 그 십자가의 고난 때와 마찬가지의 모습 즉 <나 자신>으로서의 모습과 위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신 그대로이시다. 이것을 요한 사도가 말한 "사귐"(요일 1:3)이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함"(:3)이다. 여기서 "성령"이라는 이름은 빠져 있음에 유의하라. 내 안에 이렇게 계심은 그리스도시요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심이니 이 사실을 "성령 받음"이라 하는 것.


다시 말해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나되어 계심을 일컫는 <이름>인 것이다. 이렇게 받아 모시는 영원한 "선물"로서 나는 그렇게 계심과 똑같이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사람인 내가 사랑으로 하나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니, 이전에는 없었던 존재다. 이름은 여전히 내 이름이지만. 그래서 이를 일컬어 "새 피조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 "사귐"이라 한 그대로 이 사귐은 사랑의 사귐이다. 사랑의 사귐에서 한쪽(주님)에서 철저히 자기 부인하시고 오로지 나만 위하시는데 (나 대신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모습과 위치 그대로) 다른 한쪽(나)은 여전히 자기 부인 않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살고 죽고 할 수 있겠는가.

 

얼마든지 철저한 자기 부인이 이제는 가능해진 것이다. (오직 믿음이 문제다. 믿으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변명하며 둘러대는데 자신에게 정직하고 솔직해질 일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똑같이 상대방을 위하는 것을 "사귐"이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사귐이니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고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것("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왜냐면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내가 사는 것으로 증명하셨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그 영으로 내 안에 계셔 실질적으로 내가 되어 계셔서 나란 존재 즉 새 피조물인 하나님 아들로서의 모습을 나와 함께 이루어 계심이 아닌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 것은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임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니 한 살 에 죽는 인생에 비해보면 될 것이 아닌가. 그 한 살에 죽은 인생에 비하면 이 세상 삶을 탐하는 것은 명백히 헛된 그리고 사악한 사치인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공평하신 하나님의 세계에서 절대로 편파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는 복이 많아 삶을 누리고 누구는 복이 없어 태어난지 일 년도 못사는 그런 일은 없다는 얘기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다면야 모르지만. 아니, 그것보다 하나님이 안계신다면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일 년도 채 못채우는 인생도 생겨나는 냉엄한 현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의 양면성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측면과 내가 "이루는"(빌 2:12) 측면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 그리고 내가 하나님 위해 하는 일이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동시 작용의 양면성이다. 물론 내가 "이루는" 측면은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그 뜻이다. 우리 구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되는 관계일진대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내가 나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이룬다는 의미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루셨으니 나도 그 본을 따라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고 나를 위하지 않음으로써 구원 자체가 성립됨이다. 그 좋은 예가 아담이 아닌가. 하나님은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어주셨지만 아담 자신이 들어 자기를 망쳤으니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죽은 자로 또는 장차 죽는 자로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멸망 당할 악령들을 만드시지도 않았다. 그 스스로 범죄하여 악령이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생명의 양면성이다. 하나님은 처음 피조물(영적인 또는 인격적인)을 만드실 때 생명을 주셨다. 이 생명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지키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을 위하지 않음으로써 지키는 것이었다. 왜냐면 이것이 머리와 몸 관계의 한 몸 체제에서 생명의 영원한 법칙이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머리와 몸으로서 제각기 자기 구실을 함으로써 한 몸을 이루어 생명력을 무한대로 확대 재생산하게 되어 있는데 일방적으로 그 역할을 중지할 때 그 한 몸에서 이탈하게 됨은 정한 이치다. 회개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이 자기를 위하는 자아중심으로부터 철저히 이탈하라는 것이다. 생명은 그 어떠한 경우에서도 자기를 위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진리를 모르니까 속아서 자기를 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겨온 것이다.


반드시 머리는 몸을 위하게 되어 있고 몸은 머리를 위하게 되어 있음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 생명의 한 몸 체제가 유지 존속할 수 없음이다. 회개하라 명령하셨다는(행 17:30) 것은 머리로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바 그 양면성의 일 측면을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증하시고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본을 보여주심으로써 양면성의 한 면을 완성하셨으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그 나머지 측면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충분한 동기가 부여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전적으로 위하심을 알았으니까 이제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나 자신을 위함이 최고선인 줄 알아왔던 자아중심을 뼈저리게 뉘우치게 되어 자기 부인으로 돌아서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본을 보신 대로 오직 하나님만 위해 살고자 하는(하나님께서 오직 나를 위해 사시므로-개인별로는-갈 2:20-"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으니-자신을 전부 내게 선물로 주셨으니") 결의를 굳게 하게 되는 것, 이것이 "회개"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거의 모두가 자기 구원 하나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일방적인 것으로 편파적으로 오해해온 것이다. 하나님이 영생하게 만드셨으니 그저 영생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니 심하게 말하면 사람을 죽여놓고도 일단 영생하게 되어 있는 것은 기정 사실이니까 자기 구원은 불변이라 하는 것이 그런 사이비 구원론의 핵심이다. 머리와 몸의 구별 없이 전부가 머리가 되자거나 전부가 몸이라거나 그런 식이다. 
 

세상 모든 사람의 증오의 표적이 될 줄 알면서 

결론을 내리면, 그리스도께서는 또 하나의 나, 제2의 나 자신이 되어 주신 것이다. 영원히 그렇게 되어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이다.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됨으로 이루어진 "나 자신"이시다. 단 이 하나됨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사귐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므로 따라서 내 만일 아담처럼 또는 사탄을 위시한 영물들 중의 일부처럼 자아중심으로 나가고 둘이 하나됨의 바탕이 되는 자기 부인으로 나아가기를 싫어할 때 이 하나됨은 깨어지고 아담의 죽음과 일부 영물들의 멸망의 운명의 비극은 재연(再演)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 필연임을 알아야 하는 양면성을 지닌다(막 10:30). 이 세상 삶을 향락하면서 절대로 그리스도를 이렇게 모실 수는 없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도시[사는 곳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이 세상]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세상]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여기는 영구한 도시[살 만한 보금자리]가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음이다. 이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히 13:11-16). 세례 요한이 사람 살지 않는 황야에 나가서 "회개하라" 외쳤고 주님께서 그 황야에 나가 시험을 받으신 그 "황야(荒野, wilderness)"라는 배경의 의미가 이 세상이 절대로 사람 살지 못하는 곳임을 언제나 강력히 주지시킴에 있는 것. 세상을 이와 같이 똑바로 인식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믿음을 갖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지적해 둔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처럼 축복과 경고가 병존하는 것이니 때문에 초대교회는 "주를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한"(행 9:31) 것이다. 오늘날 거의 빈사지경에 빠진 심각한 타락상은 주를 경외함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 사도의 다음의 엄중한 경고를 버렸으니 생명이 없다. 고로 시급한 것은 회개운동이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1,22).


이 글에서 아인슈타인만 "틀렸다" 한 것이 아니다. 소위 양성평등주의자도 틀렸다, 동성 성행위자들도 틀렸다, 간통자들도 틀렸다, 불교도 틀렸다, 개신교도 틀렸다, 천주교도 틀렸다, 세상 모든 종교가 다 틀렸다,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틀렸다 했으니 세상의 증오와 비난의 표적이 이미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알린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이 결과,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임"(마 10:22)을 알고 있다. 또한 이 말을 감히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다"(행 20:26,27).


아인슈타인은 만물의 대칭(대립, 상칭) 원리에서 양면을 다 강조한 보어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성 성행위자들은 갑과 을이 결합하여 병이 되는 것 즉 남녀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질서 파괴 행위로서 영물(靈物)로서 인간과 관계한 악령들의 질서 유린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유 1:6,7). 간통자들은 인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판사 군(群)에 의해 자행된 소위 "성의 자기 결정"이라는 해괴한 망발로 인류 질서 파괴한 행위에 동조하는 까닭이다.


불교가 틀렸다는 것은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반(초)자연계가 있어 쌍벽을 이루어 모든 삶이 이루어지는데도 자연계 일변도로만 그릇되게 사물을 판단하여 "모든 것은 덧없다"는 착각으로 창생을 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다"는 것은 자연계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자연계와 똑같은 현실로서의 초(반)자연계는 그것과는 정반대이므로 그 세계에서의 생명을 추구하고 그 법질서를 따르라고 가르쳤어야 옳은 것이니, 이 사실을 몰랐던 과거에는 통했던 무식이라도 오늘날 3위1체 원리가 밝혀진 이상 더 다시는 통하지 않는 것이요 그래도 고집한다면 혹세무민(惑世誣民)으로 규탄되어야 마땅할 것뿐이다.


천주교가 틀렸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구별이 엄연한데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될 수 없고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데도 특정 여인을 마음대로 신격화하여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숭상하고 기도하라고 유도하는 미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여전히 하나님 그대로 계시면서 사람되신 까닭에 가능하셨다.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데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는 언사를 예사로 쓰니 신성 모독 죄에 해당되어 그 죄과는 불교에 비할 수도 없음이다.


개신교는 구원의 양면성을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이다. 일면만을 가르치기에 급급하다. 이는 한 면만이 찍힌 동전이 화폐 가치가 없음과 같다. 인간의 자유 의지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를 관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담이 자기 관리를 그르쳐 죽은 자가 되었고 영물들 역시 그러하여 오늘날 사탄 일당과 같은 악령들이 생겨나게 된 현실을 무시함이니 그들의 가르침은 허공에 뜬 메아리다.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엄중 경고를 외면하니 진리 아닌 거짓말의 종교로 탄핵 받음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글과 내용은 어느 순간에든 핵킹을 당할지 모르니 참고가 된다 싶으시면 지체 없이 자신의 컴퓨터에 자료를 이동시키실 것을 권장드리는 바이다. 바쁘게 세상에 발표하느라 꼼꼼하게 살필 여유도 없었으므로, 에디터에 옮기시면 원하시는 대로 편집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책으로 내면 현대판 분서(焚書, 책을 불살라 버리는 일로서 특정 지식인과 학문의 탄압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음)를 당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임해 있다. 핵킹을 당할 경우 혹은 그 전이라도 요청이 있을 때는 블로그, 카페 등 웹사이트에 글을 연재해서 올릴 계획으로 있으니 연락 주시기 바란다(1회 분량 65 KB 정도, 그림이 있을 때는 약간의 차이가 생김).


"세상이...나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언함"(요 7:7)이라 하심과 같다. 그러나 세상이 다 미워하더라도 그 중의 몇 사람만이 진리를 알고 영생에 들어간다면 이 모든 불이익의 고통 그리고 고난 죽음까지라도 값지고 보람찬 것으로서 스스로 간주할 것이다. 누군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한 것뿐이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다"(요 15:20).


천국은 좋은 곳이다. 막무가내로 침입하여 들어가 힘으로 빼앗아 차지하라.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주님께서 이와 같이 가르치셨으므로 이 방법 외에 달리 생각함은 뜬 구름 잡는 허황한 꿈 이야기가 되는 것이 <당신의 구원>이다. 사랑의 적극성과 주인 의식으로 그리고 세상의 모든 핍박과 환난 가운데에서 이를 과감히 젖히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빗대어 가르치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은 자"의 모습이 아닌 "산 자"의 모습이다. 우리의 구원은 이런 "산 자가 됨"을 가리킴이니, 죽은 자로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자신을 위해 사는 자아중심과 이 세상에서의 안일한 생활을 꿈꾸는 것과는 동의어다. "죄 짓는 것"과도 같은 의미의 말이다. 주님의 경고 말씀을 들으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失足, 죄를 짓게 함)케 하거든 빼어 내버릴 것이다. 네 백체(白體, 지체, 신체의 각 부분)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릴 것이니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마 5:27).


이를 절대로 경고를 위한 경고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일향(一向, 한결같이) 또는 일편단심 자기 부인이 되면 얼마든지 그 경고 말씀대로 하고도 남을 수 있다. 자기 부인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고후 5:14,15).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치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불가능한 것만을 말씀하신 것처럼 착각하는 것뿐이다. 집 번지 주소를 잘못 찾아 서성대고 그것만 죽어라 하고 고집하면 백년 가도 못찾는 법이다. 인식을 달리하고 발걸음을 옮기고 관점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아중심 아닌 자기 부인은 사랑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자기 부인이 되도록 되어 있다. 물론 그 사랑의 상대가 예수 그리스도라야 하는 엄정한 단서가 붙는다. 왜냐면 같은 사랑이라도 그 사랑의 상대에 따라 의미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의 상대의 능력 여하, 본질 여하를 묻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라면 사람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한도"는 그 끝을 모른다. 나의 죽음, 나의 부활, 나의 승천, 현재 하나님 우편에 위치함 등 모든 것을 총괄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혼동하지 말 것이다. 사람 하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정신을 바짝 차릴 일이다. 

때문에 "이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는 말이 연속해서 나온 것이다.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시는 발걸음이심에도 "내 평안, 내 기쁨을 너희에게 끼쳐 준다" 하신 근본 내용이다. 또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말하니 기뻐하라"(4:4) 했던 동일한 내용이다. 성령의 열매는 넘치는 기쁨과 넘치는 평안과 넘치는 의로운 행실이기 때문이다(롬 14ㅣ17/갈 5:22). 기쁨이 넘쳐 나는데 어찌 할소냐. 이 기쁨과 평안이 과연 내가 그리스도 안에 제대로 위치해 있는지 여부를 스스로 측정하는 계기(計器)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의미는 실로 막중하다. 오늘날까지 초대교회 당시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이 측면을 등한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첫 사람 아담에 대비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의미인즉 여기서부터 "새 창조" 개념이 활성화하는 것이다. 즉 우리 각자는 인간(아담)이 애초 창조되던 당시와 똑같은 양상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이다.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되는 고로 "성령으로 난다"는 표현도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조성됨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측면이 완성되고 후에 영혼이 조성됨으로 초자연계 속성이 가미된다. 그래서 양 세계를 통할하는 "다스리는 자"로서의 자격과 권한이 부여된다. 자연계 생물의 정점이 됨과 동시 초자연계의 수장(首長)이 되는 것이다. 초자연계 존재가 됨을 인하여 자연계에만 국한해서 살 수가 없으므로(자연계 육체로는 썩어지니까) 초자연계가 새로 창설되니 곧 에덴낙원이다.


당시는 창조의 기간이므로 모두가 창조로서 물론 에덴낙원도 여기 포함된다. 그냥 자연계 동산을 하나 만드셨다는 것은 전후 문맥마저 고려하지 않는 소아병적 해석법이다. 에덴낙원에서 각종 동식물을 만드시는데 분명히 "만드셨다" 했으므로 이미 동식물은 지상에 널리 퍼져 있는데 다시 또 만드신다는 것은 어불성설. 별종의 동식물 창조이니 영물(靈物) 곧 우리가 지금 말하는 천사나 악령 곧 영적인 존재, 초자연계 생물인 것이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에서 곁길로 빠져드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기를 바라는 것은 새 창조이므로 죄인을 창조하실 리 없다는 것. 단순히 우리를 영생하게 하시고자 주님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이 아니니 아담 창조처럼 죄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를 만드심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창조라는 단어가 동원될 까닭이 없다. "창조"는 창조이지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죄의 대가인 죽음을 치렀으니(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없어 죄인이 아니요,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로써 새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으로 살게 되었으므로 짐짓 일부러 자아중심을 선호하지 않는 한에는 죄가 원천적으로 발 붙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부인"을 강조하신 것이다.


자아중심은 내가 내 스스로를 위하는 일체의 것인데 주님 친히 나를 위하시는 자리에 영원히 위치해 계시므로 내가 나를 위할 수 있는 필요도 이유도 여유도 명분도 없어졌음이다. 주님 친히 전적으로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이 바로 나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두 사실을 다 믿지 않음이다. 오늘날 소위 믿는다 하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이 똑같은 본질의 믿음을 억지로 분리하여 후자만 고집하고 전자를 부정함에서 온간 비리와 이단 사이비가 싹 트는 것이다.


주님 친히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신(갈 2:20/요 4:10) 것을 믿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께서 성령으로 오시기 때문에 성령을 "선물"이시라고 하는 것(행 2:38). 선물, 곧 나의 소유이다. 나의 소유라는 것은 전적으로 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의미다. 주님께서 바로 그러하시니 즉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신 다음에 내가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를 바라시는 것이 사랑이요 삶의 법칙이다.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 위하니까 그 위하는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이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므로 자기 부인이다. 죄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기초부터 배울 일이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면 그럼 지금 내가 사는 이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할 것인가. 최소한 모든 것이 척척 소원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선입 관념 때문에 또 일을 망치는 것을 되풀이하려는가. 성경에 이 세상 "살라"고 하신 적이 없다. 싸우고 일하는데 무슨 삶의 낙을 누린다는 것인가. 구약을 들먹거리지만 신약의 실체에 대한 그림자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이 구약이다. 실체이신 마지막 아담께서 오신 다음에는 그런 형체적 요소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인간이 본능 위주의 동물적 삶에 속박된 자연계 몸이 되면서 자기 부인의 영원한 삶의 이치를 알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오시기 전 사전 교육 차원에서 유치원생들을 상대하듯이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는 완전한 성인으로 출발하는 시점에 이르러 과거 구약 사례를 지적함은 아직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로마서 7장에서 보는 바와 같은 육신의 포로됨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다. 많은 사람이 이 노예의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단단히 속고 있으니 그럼에도 구원은 받고 있다는 사탄의 황당한 교리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마지막 아담과의 하나됨이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그와 하나됨을 인해 아담의 육체를 그대로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육체가 아닌 삶(생활)의 하나됨이니 마지막 아담께서는 내 삶을 사시고 나는 그 분의 삶을 사는 것이 새 창조요 다시 출생함인 것이다.

 

이 둘의 하나됨은 동일한 이치로서 남녀 한 몸되는 구조에서 역시 그대로 통한다. 즉 부부간에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것, 여자의 것은 남자의 것으로서 자기가 자기 몸이라 해서 좌지우지 못한다. 반드시 상대가 하게 되어 있고 여기서 벗어날 때 둘의 하나됨은 깨어지며 더 이상 존속되지 못한다(고전 7:4). 우리 각자는 마지막 아담과 한 몸이 아니라 "한 영"(6:17)으로서의 둘이 하나됨이니 삶 즉 생활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자기 부인임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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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라"(살후 3:1,2),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 4:3),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셔서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주시기를 구할 것이니"(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 and for me)(엡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