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수십억 중 단 하나라도 고통 당하면 수십억 모두가 고통당함ㅡ이것이 자유, 평등, 박애의 의미 (수정)

Tayseek Kwon 2019. 4. 1. 17:38






수십억 중 단 하나라도 고통 당하면 수십억 모두가 고통당함ㅡ이것이 자유, 평등, 박애의 의미 (수정)



창세기에 여자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 저주로 인함이라 되어 있고 남자 역시 이마에 땀 흘리며 수고를 해야 먹을 것이 생기고 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저주로 되어 있다. "그것이 무슨 저주냐, 당연히 그렇게 되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냐" 한다면, 바로 여기에 성경을 상식대로 읽지 않는다는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


당신이 성경을 읽는 자세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성경이 모순된 말을 하는 것인가 둘 중 하나다. 저주를 받는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이는 자연계 육체가 정상이 아니라 범죄함으로써 된 결과라고 얼른 머리에 들어와야 "상식"이 된다. 다시 말해 초자연계 몸이었다가 자연계 몸이 되니 밭을 갈아야 농사를 지어야 힘을 들여야 겨우 먹을 것이 생긴다.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에 있을 때는 그런 수고가 필요 없고 먹는 것조차도 살기 위해 먹는다기보다 식도락을 즐기기 위함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여자는 "너의 잉태하는 고통을 더할 것"이라고 우리말 번역이 되어 있으나 영계인 에덴낙원에서라면 고통이라 할 것도 없고(여자된 것이 무슨 하자가 있다기에 혼자 고통을 당한단 말인가) 자연계 육체가 되면서 고통이 있되 가중되리라는 말씀이시니 인간의 피부가 처음부터 자연계에 살도록 되어 있지 않고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으로 있도록 창조된 것과 같은 이치다. 


초자연계 몸으로 아무 고통 없이 자식 생산을 하게 되어 있는데 자연계 몸으로 하는 것은 처음부터(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지도 않았고 갑자기 당하게 되는 상황인즉 부자연스럽고 무리이고 따라서 극한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역 "multiply"나 우리말 번역 "크게 더한다"는 말은 번역자들이 자기 선입견을 따라 풀이한 것이다. 지음으로 그 고통이 더해졌다는 편견으로 번역한 것이다. Biblegateway에 따르면 54여개 번역본 중에 이렇게 번역한 데가 대부분이고 단지 CEB, CEV, ERV, HCSB, ICB, TCB, EXB, NABRE, NCV, NIV, NIVUK, NLT만이 위 구절을 "I will cause you to have much trouble"로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


그 중의 단 하나만이 [or increase your pain]이라 되어 있어 "여자가 비로소 해산의 고통을 크게 당한다"고 풀이하면서도 "크게 더한다"다고도 번역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정답은 "비로소 고통을 당한다"는 쪽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도 절대 다수가 반드시 "정의"는 아닌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원문을 본다고 잘 보는 것이 아니고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54 가지 번역본 중에 히브리어에 더 충실하다는 듯이 때때로 히브리 원어를 그대로 옮겨 놓는 번역본도 있으나 그 역시 여기서는 인간의 선입견을 따라 위에 열거한 12번역본에 들지도 않는다.


성경은 누구나(무학이든 학자든) 어느 시대(소위 문명이 발달하든 그렇지 않든)에서나 읽어도 다 알 수 있도록 일부러 쉬운 말 쉬운 단어로 씌어졌기 때문에 그러하다. 만인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그 만인 중에는 무학(無學)이 더 많은 실상이 아닌가. 필자는 우리말 표현이 주어 술어가 분명한 영어와는 달리(예를 들어 복수 단수 구별에서도 드러나듯) 조금 애매 모호한 구석이 있어 그래서 영어 번역본은 보아 왔고 그것으로써 만족하고 있다.


위 대목의 다음 하반절은 더욱 그런 편견에 의한 번역이 심하다. 즉 "여자의 욕구하는 바가 남자에게 있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린다"는 부분인데, 필자는 이런 번역본을 이제 처음 대할 뿐, 이미 그 전부터 4장 7절에서 영역을 보건대 이 3장 16절과 똑같은 표현이 되어 있으므로 그 의미가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뜻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순서대로 하면 남자가 선악과를 먹고 여자에게 주었어야 하는데(물론 그 행위 자체야 나쁘지만) 여자가 먼저 먹고 즉 남자와 의논도 하지 않고 먼저 결정하고는 남자에게 자기를 따라오라는 식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창조의 순서상 나중 난 자식이 어버이와 의논 않고 스스로 결정을 내린 후 어버이에게 자기를 따르라는 식이다. 하나님 친히 여자를 만드셔서 그렇지 아담에게서 그 닮은꼴로서의 여자인즉 부모자식뻘이다.


이렇게 여자가 남자를 휘어잡으려고 한다고 해석해야 전후 문맥이 들어맞아진다. 그러니까 위계 질서상 남자가 이를 허용할 리 없고 여자를 다스리려 하는 것이니, 참으로 죄의 결과란 것이 이런 것으로서 사랑이 아니고 화목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려 하고 선수를 치려 하는 험악한 살풍경이 되는 것. 남녀 부부가 좋을 때는 좋으나 돌아 누우면 남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부라는 것이 이런 관계로 전락해버린 것이 비극의 인류 역사다.


이런 것이 '상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식에 어긋나면 "성경이 모순된 말을 할 리 없다" 하고 "그렇다면 왜 이런 표현을 하고 있을까" 하고 좀 알려고 하는 "찾고 구하고 두드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피상적으로 피동적으로만 읽으려 하고 스스로 알려고는 아니하니 절대 두드리는 것이 될 수가 없고 두드리라는 명령에 어긋나니 진리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옳은 것을 수동적으로 대하여 받아들일 때는 좋으나 세상에 참된 것보다 거짓된 것이 더 넘쳐 나는데 반드시 참된 것만이 찾아올 리가 없다. 거짓된 것에 걸리기가 쉬운데 그 때는 완전 파멸로 끝난다.


그래서 그 54개 번역본을 살펴본 결과 오직 네 번역만이 바르게 풀이해놓고 있다. "you will desire to control your husband"라고 되어 있는 것이 NLT, NET이고 EXB는 "you will greatly desire" 해놓고도 괄호 안에 "the word implies a desire to control"이라 적고 있다. 그리고 VOICE는 보다 자신이 없어 "you will desire your husband" 해놓고 약하게 "but rather than a companion"이라 해두고 있다.


즉 '남성'만을 원하지 '동반자'로서는 아니다 하는 의미를 담아두고 있다. 나머지 번역은 거의 하나같이 우리말 번역처럼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당치도 않은 해석을 내세우고 있다. 왜 당치도 않으냐 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가인을 사모한다"는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4:7). 심지어는 여자가 그런 산고를 감수하면서도 남자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고도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올바른 번역을 한다고 해서 이상 2~4 번역이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그 번역자들은 다른 데에서는 또 틀리게 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대조하면서 참고 정도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


이렇게 저주 없이 잘 지내다가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니까 그렇게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선악과를 먹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모든 불행한 사태 속으로 함몰해 가고 있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되도록 만물을 창조하신 이의 선언적 판결(법 제정자의 법 집행)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도 각자가 이미 자기 운명을 결정한 연후에  내려지는 사후 추인의 성격이다.


때문에 고의성이 있는 범죄는 영원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악령들이 영원 멸망에 이미 처해 있는 까닭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과는 달리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자아중심으로 나간 그들의 고의성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눈이 띄어져 빛을 받은 후에 예컨대 형제 사랑이 없음과 같은 죄는 스스로 뉘우쳐 자백하면 용서가 있지만(요일 1:9),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도 "범죄하지 않았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아서"(:10)라고 요한은 단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의성에 가깝게 된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살인죄와 같기 때문이다(3:15). 이렇게 형제 사랑 유무로 국한시켜야, 같은 편지에서 요한 사도가 몇 번이나 강조한 "죄를 지을 수 없다", "죄 짓지 말라"는 말이 모순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우리가 죄 없다 하면"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죄 없다 하면 안된다"는 것과 "죄를 지을 수 없다, 죄를 짓지 말라"가 어찌 화합이 되는가.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형제 사랑 없음을 죄로 규정하고 거기에만 국한시켜야 말이 앞뒤가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이들 중에는 이와 같이 알지 못하고 (형제 사랑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일반적이었던 모양) 짓는 죄가 있고, 또 고의적으로 짓는 것이 있어 후자의 경우 요한은 용서되지 못함을 적시하여 그런 범죄자를 위한 기도는 무의미함을 가르친 것이다(요일 5:16,17).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요한 일서를 엉뚱하게 해석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를 다소간에 짓지 않는 이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해 왔으니 그 결말이 어찌 되겠는가. 신신학에 대립되는 보수 정통이라 자처하고 기도 응답도 많이 받아 자신의 경건성과 믿음을 선전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그 해독이 크다. 과거 아무리 능력을 많이 행하고 말씀 선포자 곧 선지자로 일했어도 오늘이 항상 문제이다(마 7:21,22).
 


학위를 앞세워 간판 삼는 사람치고(하나님의 사업에서) 실속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스스로가 그렇게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 이른바 "유식한" 사람들이 교회를 망친 장본인인 것이다. 12제자 중 학식을 내놓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오히려 교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이들 중에 사울(바울)이라는 사람 하나 정도가 나왔다. 그래서 스스로도 "나는 사도 중의 말자(末子)라 죄인의 괴수"라고 했다.


그런 바울도 교만해질 소지가 충분히 있었기에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시지 않으면 안되었다면, 그런 특수 상황이 아니면서도 소위 신학자 다시 말해 선지자처럼 행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다 할 수 있겠는가. 아는 것을 자랑만 하지 않으면 되는데 자랑을 하고 넘치는 생각을 하고 자신을 과대 평가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남보다  더 안다면서 자랑하는 그 지식은 교만하게 만드는(고전 8:1-3) 것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신학자이건 아니건 교역자든 평신도든 가리지 말고  첫째로 인식할 것은 이 세상의 정체다. 저주 받은 죽음의 장소, 그렇기 때문에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人子) 곧 인간은 머리 둘 데도 없다 하신 것이다. 죽음과 저주의 땅인데 들짐승이나 날짐승 따위의 서식처인데 어찌 초자연계 존재로 창조된 사람의 보금자리일 수 있으랴. 즉 "죽은 자"라고 간단히 한 마디로 정의해 버리신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 하시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죽은 자이니까 당연히 산 자가 되어 있는 우리는 이 죽은 자를 벗어나 산 자가 되는 '사는 도리'를 이웃(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에게 전달하는 일 외에 더 긴급을 요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먼저 할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먹고 기도자, 전도자가 될 수 없는 일이므로 선한 직업을 갖되 그 역시 내 잘 먹고 내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목적은 "가난한 사람 구제"(엡 4:28)다.


지금까지 남의 것 후려 먹다가 배운 것은 그 짓밖에 없는데 갑자기 노동을 하자니 식구 풀칠하기도 빠듯하지만 목적은 엄연히 "구제"이다.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이다. 내 식구 먹여 살리는 것도 그런 한 몸됨의 '평형', '평균' 차원에서 돌보는 일이지 내 식구라고 더 먹이고 더 잘 입히는 일은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즉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는 것이다.


사람 삶의 도리 곧 방법은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수십 억 인구 가운데 단 하나라도 고통 중에 있다면 그 나머지 절대 다수는 절대로 '고'와 반대인 '낙'을 즐길 수가 없다. 이것이 한 몸 체제이다. 그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기를 심판하여 이기실 때까지 하신다"(사 42:3/마 12:20) 하셨으니 이것이 공의(公義) 곧 사회 정의이다. 자아중심은 절대 다수라도 자기에게 거추장스러우면 파리 목숨보다 더 못하게 여겨 대량 살륙도 서슴지 않는 것과는 정반대다.


마지막 심판 이후에는 각자 자기 선택한 바를 따라 영원 운명이 정해졌으므로 생명의 길을 택하지 않은 이들은 더 이상 '한 몸 되기 위한' 또는 '한 몸'으로서의 범주에는 영원히 속하지 않는 까닭에 지금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한 몸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한 몸으로서의 체제 적용을 받아 그리스도 안의 의인들도 함께 고통 당하고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이 전체적인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롬 8:22).  


우리가 세상에 의인으로서 고난받는 것이 이 한 몸 체제의 가장 이상향적인 삶의 방식 때문이다. 내가 살리기로 목적하는 상대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인이니까 그 죽을 죄인된 자리에 그와 함께 되어 주는 한 몸으로서(지금은 한 몸이 아니지만 그것을 목표로 하고 접근하는 것이니까) 그 위치에 서 주고 그 부담을 나누어지는 것이므로, 세상에서의 죄인(사형수 그래서 사형수의 형틀인 십자가를 메고 그러한 발자취를 남기신 주님을 따르라 하신 것)처럼 되어, 사람 행세 못하고 온갖 궂은 대접 다 수용하도록 자취하도록 기쁨으로 보람차게 하도록 되어 있는 것.


이를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 성경은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터이므로, '양면성의 동시성'으로 움직이는 것이기에, 한눈팔지 말고 오직 이 가치 있는 일 곧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바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 즉 사람 구원하는 일 다시 말해 기도와 전도에만 오로지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눅 9:57-62).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행동은 그 어느 곳에서도 쓸모가 없다.


해당 구절 biblegateway 





이 선결 과제부터 해결하시길ㅡ120% 행복한 삶의 비법ㅡ막차입니다ㅡ이 후엔 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세상 보기에는 선하게 살다가 자기 고장 유대인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복덕을 타고 나지 못한(사주 팔개자나 점성술이나 관심 있는 이에게는) 사람, 그저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분으로 보이겠지요. 욕심 없이 오직 남을 위하다가 그렇게 죽은 분으로만 알고 있으니 그를 존경하기는 해도 아무도 그런 삶을 원하지는 않는 그런 '한 인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요 4:10/행 2:38)이십니다. 그 선물을 받음으로써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게 됩니다. 


누구든 새로 창조를 받고 싶고 다시 출생하가 원하거든 이 선물을 받으십시오. 그를 성령으로 받으면 됩니다. 오늘 이 시간도 가능합니다. 이 자연계 몸은 오늘 이 시간이라도 무엇을 잘못 먹어도 죽어버리고 당장 무슨 사고라도 나면 곧장 썩어갈 수 있는 몸입니다. 향후 백년을 산다 한들 그 시간이 끝나면 몸은 노쇠하고 썩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도 보장 받지 못하는 목숨인데 오늘날 아무리 소위 문명이 발달하여 편리하게 살게 되었다 한들 내 죽어 사라지면 그만이고 오늘 세상 하직하면 그만인데 무슨 소용이고 무슨 의미가 있답디까. 


그러므로 그런 데에 신기루 잡듯이 홀린듯이 귀한 시간 허비하며 쫓아다니지 마시고 당장 오늘 죽을지라도 모르니 모를 수도 있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 못하니,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일에 일차적으로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일이 지혜가 아닌가요. 방법이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어떻게 그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하시는가요.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라 하면 창조자를 의미하고 창조자를 그 누구도 인간이라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 이 만유를 지을 리가 없지요. 그러면 나라도 만유를 지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인간 아닌 다른 특별한 존재가 지어야 한다는 말인데 왜 인간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인간처럼 보인다면 그 존재가 설혹 인간이 아니더라도 이 너른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할 것인데 그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만유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사람은 논리적인 사고하여 그 사고력으로 행동하는 존재인데 이 결론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겠지요.


그래서 무신론은 논리의 빈약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의 허점, 불합리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 같은 소위 석학, 그 어떤 내로라 하는 인물이든지 유신론자만 빼고는 다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천재라고 하는 아인슈타인도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다는 즉 유신론자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그 천재성이 한 마디로 젖먹이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입니다. 그런 어린 아이는 하나님이고 무엇이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엄마만 알아보고 젖이나 물고 그것뿐입니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있으니 당연한 결론이지요. 어린 아이는 엄마와 젖은 잘 알아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도 자기가 관심 두는 분야는 잘 압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와 젖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이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도 자기 분야 그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창조자가 존재하시고 그는 우리 눈에 볼 수 없는 보여서는 안되는(왜냐면 보이면 아까 그 먼지만도 못한 존재일 테니까) 분이시기에 창조신 즉 신 곧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먼저 손꼽히는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보인다 안보인다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창조된 피조물 즉 결과물로써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롬 1:20). 공기 곧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그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결과물 즉 바람이 분다는 것으로써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신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하나님되심 즉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한다"(롬 1:20)고 솔로몬의 명판(名判)을 내리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 이상으로는 백 마디 천 마디 만 마디로 말을 만들어보아야 "핑계하지 못한다"는 블랙홀에 다 들어가게 되어 흔적도 찾지 못하는 운명입니다. 자, 불가항력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으니(왜냐면 그 결과물인 만유가 존재하고 그 중에 나라는 존재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니)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가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은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무엇을 우리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느냐,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이 한 분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위의 성경 구절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내개 주시는 개인적 선물이시니까 바로 나의 소유가 되십니다. 나와 불가분, 나 없이 그 분 즉 '그리스도' 없고 '그리스도' 없이 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물이 짝으로 되어 있듯이 이렇게 둘이서 하나로 존재하는 짝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짝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켜 새 창조, 재 출생이라 합니다. 


어떤 모양새로 짝이냐, 신체 구조에서 머리와 몸이 짝으로 되어 있듯이, 사람의 구조에서 영혼과 육체가 짝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둘로서의 하나'입니다. 그는 나요 나는 그입니다. 그러나 물론 나는 그가 아니요 그 역시 내가 아니십니다. 아닌데도 둘이 하나되어 있는 것이 머리와 몸의 하나됨이요 영혼과 육체의 하나됨이요 남자와 여자의 한 몸됨이요 파동성과 입자성의 전혀 다른 성질로서의 하나됨이 빛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됨입니다. 


원래부터 이 하나되는 이치로써 창조자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입니다. 즉 머리는 하나님이시요 만물은 그 몸입니다. 신체의 구조상 머리는 몸(의 각 지체)을 위하게 되어 있고 몸의 각 지체는 일제히 머리를 위함으로써 각 지체 상호간 위하게 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하나님 안에 만물 있고 만물 안에 하나님 계시는 체제입니다. 양자간의 이 하나됨의 체제를 이룸에는 반드시 법칙이 존재합니다. 다름아니라 머리이신 하나님은 몸인 만유 즉 피조물을 위하시고 따라서 당연히 피조물은 머리이신 하나님을 위하는 것, 이것입니다. 


즉 머리 없는, 머리에서 떨어져 나간 몸에다가 새로 머리를 얹어주시고 영혼이 없는 육체에다 영혼을 다시 불어넣어주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 개인'에게 주시는 선물이십니다. 아담이 애초 창조될 때 영혼이 없었습니다. 육체만 있었으니 이미 창조되어 있는 자연계 동물들처럼 그리고 오늘날 보는 이성 없는 짐승들처럼 그런 육체만 있었던 것인데 영혼을 입으로 불어 넣으셨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복제 기술로 만들어 내어도 영혼 없는 육체로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등 허풀을 떨 일이 아닙니다.  


이 법칙대로 하면 모든 피조물이 똑같이 하나님 안에 있어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평등을 100% 향유하는 최고 절정의 행복한 삶이 보장됩니다. 아무리 낮은 위치에 있어도 하나이므로 다시 말해 머리와 하나이므로 머리처럼 대접을 받는다는 이 뜻입니다. 다른 아무 이유가 없고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여럿이 존재하면서도 마치 하나처럼 존재하므로 완벽한 이상향적 삶의 구현입니다. 이 이상가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생명의 법칙(하나님 편에서 보면 계명이요 그 피조물인 우리 편에서 보면 순종으로 인식되는)을 첫 사람 아담이 어긴 결과가 바로 오늘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오늘 이 시간 후도 보장 받지 못하는' 비극적 결과입니다. 그래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머리를 위하니까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지 않습니다. 머리이신 하나님께서도 몸으로서의 그 피조물을 위하시지 자기를 위하시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멋모르고 자기만 위해 살아 온(실상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만 치달아 왔던) 무지무식한 일체의 소행을 뉘우치고 오로지 이 법칙대로 살겠다는 결의가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입니다. 회개든 참회든 뉘우침이든 그 어떤 용어를 쓰든 뜻만은 동일합니다. 


이 회개가 명백하고 순수할 때 오늘 이 시간도 나는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머리(성령으로 내게 임하시는 그리스도)와 몸(그 성령을 받아 모시는 나)의 관계, 영혼(성령)과 육체(나 자신)의 관계가 재설정되기에 이르러 애초 인간을 창조하시던 상황으로 완전 회복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연계 육체의 비극적인 결말을 청산하고 신 창조, 재 출생의 120 %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부터 해결하십시오.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한다





"어떤 귀인(貴人)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였다. 그런데 그 나라 사람이 그를 미워하여 사람을 뒤로 보내어 '우리는 이 사람이 왕됨을 원치 아니한다' 하였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 은을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말한다. '주님, 주님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주인이 말했다. '잘했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으니 열 도시의 권세를 차지 하라.'


"둘째가 와서 말한다. '주님, 주님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도 말했다. '너도 다섯 도시를 차지하라'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의 한 므나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수건으로 싸서 두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엄한 분이신 것을 제가 무서워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십니다.'


"주인이 말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는데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않았느냐. 그리했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까지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사람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님,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습니다' 하자 주인이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무릇 있는 사람은 받겠고  없는 사람은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않는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다."(눅 19:12-27).


이 비유 말씀에서 "그 나라 사람이 그를 미워하여 사람을 뒤로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합니다' 하였다" 하셨고, 말미에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않는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다" 하셨습니다. 종들을 주인이 상벌 주는 것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그 주인이 자기를 미워하여 왕이 되는 것을 막은 "원수(enemy, 적)"들을 무자비하게 처치하는 것을 왜 일관되게 강조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당신 자신을 이 주인의 위치에 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다"(약 4:4) 했습니다. 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롬 8:7)이라고도 했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눅 11:23)라 하신 대로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바로 미워하는 것으로 통하고 그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자이신데 어찌 사람처럼 원수가 있느냐 하겠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이라고 이분법으로 가리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것이요(골 1:21,22/롬 5:10),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하나님을)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것이니(:21), 사실상 원수라고 하면 미워하고 나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나를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원수되는 일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어깃장 놓는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이(교회 중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을 보고 거침 없는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원수는 무자비한 척결 대상이 됨이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됨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다른 왕을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시라면 다른 왕은 현재 이 세상에서 사탄밖에 없습니다.


위의 말씀을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탄의 계교로 죽은 아담을 대변하시는 아니, 아담의 위치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첫 사람 아담의 원수는 자기 부부를 꾀어 죽음에 함몰시킨 사탄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원수인 사탄 편에서 서서 자아중심을 고집하는 경우 그와 함께 원수 노릇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여 자아중심으로 흘러가면 이것이 곧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와 반대 방향으로 나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헛되게 하고 무색하게 만드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에 대하여 죽었는데(갈 2:20/6:14) 다시 세상을 사랑하니까 하나님께 원수입니다. 므나가 맡겨진 열 사람의 종은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개중에는 자아중심을 이기려는 확고한 결의 없이 안일주의로 나가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후자에(왕됨을 원치 않는) 속하는 사람은 아예 세상 사랑으로 일관하는 이들로 보면 타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들이라 해서 세상을 원수의 나라로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는 것, 세상 즐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이 모두 자아중심이 그 뼈대가 되어 있으므로) 법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각 사람의 의무라고 가르칩니다. 이유인즉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으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롬 13:1)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처럼 선량한 국민이 없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이들도 없습니다. 최우수 시민으로 표창 받아 마땅합니다. 사탄에게 예속된 문물은 미워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여 살려내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기에 그 일환으로 원수까지 위하여 기도해주고 사랑하는 마당인데 달리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 선행으로 말미암아 이웃의 칭송을 받았지 지금처럼 "기됵교인은 지독한 이기주의자"라는 지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핍박의 태풍이 불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안면을 바꾸게 됩니다. 자아중심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자아중심이 아니면 자기 부인인데 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를 토대로 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 모두가 믿기 전에는 다 야차(夜叉)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아중심인  동시에 누구나 양심이 작동되는 까닭입니다. 단지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발걸음에 차이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 인한 대가를 무서워서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을 인하여 모든 법과 질서에 순복한다고 바울 사도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금을 받을 자에게 충실히 세금을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5-7)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 했습니다. 그러하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막는 법이든 권위이든 그것은 예외입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12사도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응대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8-20) 함과 같습니다. 법 적용에도 상위법이 있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최고 법을 따라 그 기초 위에서 국법도 지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과 법을 금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법이니 불법, 탈법, 무법을 추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죄악들을 대하시며 "매일" 진노하십니다(시 7:11). 그러나 지금은 은혜의 때 구원의 때이므로 오래 참고  계실 따름으로 이 때가 종료되면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또다른 측면이신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심을 모든 악인들은 너무 뒤늦게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섬김과 동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 마땅하다"(:28)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향상 "양면성의 동시성"에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든 이지러진 관점으로는 바른 길을 제대로 걷기 어렵고 좌로든 우로든 치우쳐 빗나가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심과 동시에 "어린양의 진노"(계 6:16)도 동시에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인 고로 이러한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함과 같습니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질 때...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게 된다"(계 6:13-17)고 했습니다. 적 그리스도와 그 우상에게 경배하여 이마에나 손에 그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섞인 것 없는" 순수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 하였고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계 14:9,10)고 했으니, 더 이상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심판자 재판장의 면모로 나타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냥 그대로 "어린 양"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양면성과 동시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가 본을 보이고 사도들이 그토록 역점을 두어 가르친 것인데도 오늘날 이 "두려워함으로 하나님 섬김"(행 9:31/히 12:28)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자비, 은혜의 일방적인 것으로만 잘못 가르쳤고 잘못 배운 탓입니다. 초대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일벌백계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교훈으로써 영원한 본보기를 나타내셨건만 너무나 잘도 무시하고 잘도 망각합니다. 오냐 오냐 해주었더니 손주 녀석이 할아버지  수명 잡아 당기며 늘어지는 꼴이 난 것입니다.


소동 고모라의 멸망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앞으로 오는 여러 세대에게 주시는 엄중한 경고라고 명시되어 있건만(벧후 2:6/유 1:7) 세계가 온통 소돔 고모라 짓
(동성 성행위ㅡ롬 1:26,27)으로 난리를 쳐, 소위 투표로 먹고 산다는 국가들이 "합법"이라는 방망이를 연방 두들겨대어도 이른바 "교회"는 "짓지 못하는 벙어리개"(사 56:10), 아니, 죽어 있습니다. 이런 소위 "그리스도의 교회" 집단에서는 아무 들을 것도 볼 것도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회개하라고 호통 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자세히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각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 앞다투어 이 광야의 소리를 내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미련을 못버려 좌불안석이냐, 왜 훌훌 털어 버리지 못하느냐, 그래서 3위1체 원리에서 논리적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DPA pix를 통하여 악령들이 이 세상을 철저히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을 똑바로 세상이 직시하게 되기를 바라서 이런 사실을 우리는 강조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곧 우리 인간의 나라, "임금" 곧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아담, "칙령" 절대 권위로서의 성경의 말씀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적이 된다"는 것은 "왕됨을 원치 않는 자는 다 도륙된다"는 위의 말씀을 빌어 세상 사랑이 어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우리는 거리낌 없이 표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는구나"(사 56:11,12).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치 않으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치 아니함은 내가 오래 동안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57:11).



 하나님은 철저한 '인간의 자주 독립성'을 요구하신다




바울은 자기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빌 3:14)고 하고 교회에 대하여 "그렇게 달려가라"(고전 9:24)고 했습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곧바로 단도직입으로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즉 천국에서 탈락된다(눅 9:62)고 경고하셨습니다. 타율성 인간이 되지 말고 자율성 인간 즉 주체 의식이 분명한 인간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 자율성 즉 주인 의식은 둘이 하나됨의 사랑에서 필수 요건입니다.


갑이 을을 위하니까 을은 갑을 위함 즉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입니다. 이렇게 서로 상대방을 위함에서의 주인 의식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의 특징은 이 주인 의식입니다. 누가 하라고 시킨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자진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공 순신이 나라에서는 일전 한 푼도 주지 않았고 시키지도 않았고 오히려 유력자들은 반대까지 했어도 홀로 결단하여 거북선을 세 척이나 만들어 임진란에 아주 요긴하게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공을 공동체 의식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벽한 자기 부인에 비하면 어린 아이 수준이나 여하튼 그 그림자라도 닮았기에 그 그림자뿐인 것이었으나 경천동지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 의식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세 이것이 자율성입니다. 머리가 되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꼬리라 할지라도 자기의 그 꼬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때 그것이 주인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 주인 의식, 공동체 의식에서의 자주 독립성, 자기 몫을 충실히 다하는 것 다시 말해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철저히 위함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것(선)이요 올바른 것(의)이요 법(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단순 간단 명료합니다.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20대의 관문을 통과하려는 한창 나이의 고등학교 정도의 젊은 나이에는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확고하게 다지는 시기입니다. 이런 젊은 영혼들을 위하여 이런 3운법칙으로 검증되는 3위1체 원리라든가 DPA pix라든가 하는 것이 나타나져 있으니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취사 선택, 양자 택일의 판단에 그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처럼 이 자율성이 요구되는 때가 없습니다. 물론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고 영원히 그러하실 것이지만 지금은 아주 경사진 내리막길이 되어 있는 때이기에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동쪽을 보든 서쪽을 보든 양자 택일입니다. 어느 한 쪽만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한꺼번에 양쪽을 다 볼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든 안가든, 하든 안하든 이렇게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요구됩니다.


동쪽에 관심 거리가 있으면 서쪽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게 됩니다. 거기 푹 빠져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 거리가 없으면 자연 서쪽 남쪽 북쪽 양 사방으로 눈이 갑니다. 그런 인생 삶에서 실제 그렇게 사방으로 관심이 가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둘 중 어느 하나입니다. 선이냐 악이냐, 의이냐 불의, 불법이냐 하는 스스로의 선택. 그래서 이솝(Aesop)은 만물에 양면성이 있어 반드시 어느 한 쪽을 택하게 되어 있으니(한꺼번에 둘을 차지할 수는 없으니) 둘을 잘 살펴보고 결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영화관 같은 데를 출입하는 것을 보면 불량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므로 그런 남의 눈초리가 두려워서라도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지만, 지금은 바로 내 손 안에 그것이 들어 와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자율성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 아무리 위협하고 유혹해도 내 스스로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면 자유인으로서의 결정을 하는 것이지 그런 데에 속박당하고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가락만 몇 번 누르면 음란물이 홍수같이 쏟아져도 그것을 돈 주고 보라고 하더라도 보지 않는 이것이 자율성입니다. 목표가 한 곳에 정해져 있지 않고 마음이 방황하면 모든 것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질질 끌려 다니다가 일생을 허무하게 그리고 불행하게 마치게 됩니다. 영원한 멸망의 죽음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동쪽을 볼 때 확실한 관심 거리가 있으면 내처 그 방향으로 얼굴이 돌려져 있지 다른 방향으로 눈을 줄 사이,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첫머리에 지적한 "푯대", "쟁기"의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인데 천국은 생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음부, 음녀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남편을 위해야 하는데(남편도 한 아내만 위함에는 동일) 주위에서 유혹하는 대로 마음이 쏠리면 다름아닌 한눈파는 것 즉 손에 쟁기를 잡고서도 뒤도 옆도 돌아보는 행위입니다.


서로 좋아서 다시 말해 상대에게 어떤 해를 입히지 않는데도 남녀가 자기 반려자 외의 이성과 관계할 때 죄를 묻는 것은 이러한 둘이 하나됨이 문자 그대로 만유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이 되든 한 영이 되든 마찬가지입니다. 이 법질서를 유린하는 행위는 절대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열에 달아 올라 거의 벌겋게 되어 있는 겨울 난로에 손이 닿았는데도 무사할 수가 없음과 같습니다. 뜨거운 온수 파이프에 피부가 닿았는데도 무사할 수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동성 성행위를 엄벌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둘이 하나됨은 성질이 정반대가 되는 것끼리의 조합 또는 화합입니다. 같은 것끼리 엉기는 것은 이 역시 만유의 법칙에 대한 범법이므로 엄단되는 것입니다. 허용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질서 유린 행위, 만물 파괴 행위로 직결되는 까닭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를 방치하실 리가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목표"가 다름아닌 '을'이 상대하는 '갑'이고 '갑'이 상대하는 '을'인 것입니다.


자아중심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위하는)"(롬 15:1,3) 것은 모두가 범법이 됩니다. 다시 말해 나는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상대의 것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나의 상대가 나라는 존재의 주인이다, 상대는 또한 내가 주인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내가 소유한 주인이라 하더라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가 하는 일입니다. 상대가 나를 위해주어야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주체 의식 곧 자율성입니다.


내가 주인이지만 철저히 내가 나를 위해 좌지우지 못하는 것. 상대가 나를 위해 줌으로써 내가 위해지고 그가 나의 소유라는 사실이 현실화되어 작동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것, 주님의 소유이지만 주님께서 나를 강압하시거나 억제하셔서 되는 일이 아니라 내 스스로 주님을 위해야 위해서 살아야 되는 일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사실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그리스도의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정된 것입니다(갈 2:20).


바로 이것이 삶의 목표 즉 끊임없이 달려가야 할 "푯대"입니다. 이 달려감은 사랑이므로 피곤할 줄 모르는 것이 특색입니다. 사랑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희열과 넘치는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참으로 자유인으로서의 긍지와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할 것이라 하셨고(요 8:36),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했습니다(고후 3:17). 악인(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난)이 제 마음대로 욕심 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주 독립성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에서만, 내가 진정 하고 싶어서 하는 여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사탄의 사슬을 끊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무이의 방법  




사탄이 그와 같이 철통 같이 통제하게 되면 그러면 사람이 구원은 어떻게 받게 되는가. 헤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야 철저한 통제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틈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이 구원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강압적으로 사탄을 억누르심으로써 사람들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뜻이고 합당하시다면 처음부터 사탄이 아예 이 세상 지배자가 되는 것부터 막으시면 될 일이다. 철두철미 원리원칙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는 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 위해 일하심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양면성과 동시성으로 함께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기도는 제사장의 기도다. 모두가 평안하고 행복한 천국에서 기도가 필요할 리 없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므로 이 사람 살리는 일은 한 몸이 되는 이치에서, 그 죄인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그 죄인의 위치에 있어야 그래서 그 죄의 대가로서의 저주를 함께 짊어지는 차원에서 다시 말해 희생 제물의 위치에 서 있는 제사장의 기도라야 함은 정한 이치다.


그래서 그림자로서의 모세 시대 당시 제사장은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했다. 제물이 없으면 제사장 직 수행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 제물이셨고 동시에 제사장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산 제물"(롬 12:1)로서의 기반 위에 드려지는 기도가 아니고는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일을 하실 수 없는 것.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사 53:12)"한 그대로다.


성령께서 다시 말해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의 영이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심도(롬 8:26)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몸된 교회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남은 고난-골 1:24)과 함께 하여 드리는 제사장의 기도로서, 그 신음하심은 고난 받는 그 몸의 고통 중의 신음 즉 산통(産痛)의 신음과 함께 하심인 것이다. 악령이 인간을 무자비하게 지배하는 것도 죄로 인한 저주의 일환으로서 인간이 받는 마땅한 보응이기에, 이 사탄의 쇠사슬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그래서 이러한 희생 제물의 고난을 기반으로 하는 기도라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위해 모든 것을 하시고 그래서 인생들을 구원하시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 우리 또한 하나님을 위하는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그래서 그 영광 나타나시도록 그래서 영광스럽게 사람들이 구출되는 일이 성사되도록 힘써 기도하여 구하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이다.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되어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6,37) 하신 것.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이 기도 없이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으니 우리의 기도 없음이 하나님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드린다는 사실은 실로 너무나 엄청나고 엄중한 것이다.


성경에 "Yea, they turned back and tempted God, and limited the Holy one of Israel"(KJV-사 78:41) 즉 저들이 등을 돌려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제한하였다"인데 우리말 번역 "격동하였다"는 것은 오역이다. 어떻게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느냐 하는 선입관이 역시 만들어낸 것으로서 이런 그릇된 관점은 "사람이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요 시인하면 나도 시인할 것"(마 10:32)이라는 말씀을 제대로 수용하려 들지 않은 탓이다.


양면성과 동시성의 진리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생명의 핵심인 사랑에서의 완전한 자주 독립성을 부여하셨으므로, 먼저 본은 보이시되 그 본을 따름으로써(내 쪽에서) 이후부터는 완전히 쌍방이 동시에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그냥 통념상 인간이 하나님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그 잣대로써 성경을 해석하려 한 불찰이다.


Biblegateway에 따르면 이렇게 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는 번역본이 KJV, NKJV, KJ21, AKJV, BRG, TLB, MSG, NOG, GNV, GW, LJB, YLT, JUB 등 13종이다. 그래도 이나마라도 정확한 번역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죄의 저주의 결과로 사탄이 이와 같이 철통과 같은 지배를 하고 있으므로, 이 압제의 사슬을 끊는 일에는 그 저주의 대가를 치르는 일 없이는 즉 그 죄의 저주를 함께 짊어지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이 없이는 그래서 그런 희생 제물을 바탕으로 하는 간구와 기도가 없이는 한 마디로 불가능한 것이다.


위 구절에서 왜 이스라엘의 범죄가 하나님을 제한시켰느냐 즉 속수무책이 되시게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위치이신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하는 자기 본분을 다하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이치는 아담이 범죄했을 때 이를 하나님 일방적으로 아담을 범죄 못하도록 막으실 수는 없었다는 의미와 통한다. 사탄 등 악령들의 범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하나님 위하기를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기를 기대하시느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심이 없기 때문. 모든 것을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요 그것이 마땅하고 옳은 것이다.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고 그래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기로 서로 간에 약속을 하자"는 것이 창조의 근본 뜻이요 또한 새 창조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사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홀로 계실 때에는 자기를 위하심이었는데 피조물이 생겼으니까 전적으로 자기 위하시던 모든 힘을 피조물을 위해 쏟으시니 과거 당신 자신을 위하시던 그 위함의 공백을 당연히 우리 피조물들이 채워드리게 되어 있음이니 여기에 아무 하자가 있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앞서 소개한 악령의 발자국 건에 관한 것인데, 영물 치고는 발자국이 너무 작지 않으냐 한다면, 악령의 몸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투명성에다 신축 작용이 뛰어나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자기 형체(체형)를 확대 또는 수축시킬 수 있는 초능력의 보유자임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실상 우리가 이런 말을 하지만 초자연계나 그 존재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런 초능력의 신축성으로 인해 자기 몸을 얼마든지 축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만 이런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면 되는 것. 물론 어느 정도까지 확대할 수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초자연계 몸의 체격이나 크고 작음을 따라 판단할 여지는 아주 없다.



아래 그림은 1855년 발자국이 발견되었던 영국의 데븐셔(Devonshire) 지방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고, 그 말발굽(말의 편자 형상) 모양의 발자국 사진으로 youtube에 나와 있는 것을 올린 것이다.










든 피조물이 함께 더불어 산고(産苦) 중에 있는데 당신 홀로 태평연월인가



누구든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는가.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약 4:4)이라 한 대로 세상 사랑은 수십 억 생명을 몰살시키기에 충분한 마약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점에서도 드러난다.


우리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역사를 속수무책으로 만드니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눅 11:23)라 하심과 같다.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기복(祈福)주의 신앙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 종교, 성경적 복음(福音, 복된 소식, 좋은 소식, 반가운 소식)을 기준하면 이단인 것이다. 그것을 주창하는 자가 아무리 능력을 행해도 그것은 사이비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4)일 뿐이다.


그가 나타내는 소위 "능력"은 사탄으로부터 나는 것 외에 달리 아무 것도 아니다. 오늘날 그런 식으로 현혹하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 얼마 전 소위 "신유(神癒)의 은사"라고 하여 각종 질병을 나타내던 이른바 "부흥사"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 나은 질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많은 돈을 "헌금"이라 하여 쾌척했다. 결과 그 "부흥사"는 치부하고 "하나님의 축복 받아 병도 고치고 구원도 받고 세상에서 보란 듯이 잘 산다"는 식으로 선전, 그 본을 보인다 하여 최고급 자가용을 몇 대씩 굴리고 다녔었다. 거금을 들여 자기 이름으로 종합대학도 세웠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물론 있다. "기독교"가 번창하는 곳에서는 사탄은 그런 식으로 독버섯처럼 화려하게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룸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성령의 은사(gift)"는 한 몸으로서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만들기로서, 능력만 나타낸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고, 자기 부인과 매일 십자가 지는(하나님 앞 사형수를 구원해내자는 것이므로 그 사형수의 모습이 되어 그 저주와 형벌을 함께 나누어 지겠다는 의미의) 기본 기조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방법이다. 


그런 것 없이 초능력만 발휘한다고 해서 "은사"가 되지 않는다. 사탄의 모방 행위의 특징은 이런 자기 부인이 없다는 것이고 구원의 대상인 '하나님 앞 사형수'의 저주 받은 모습으로 그 상대와 스스로 하나되어 그 형벌을 나누어 지는 형상이 됨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 데에 있다. 자기를 위해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뜻대로 않는데 어찌 머리의 지시를 받는 그 몸의 한 지체가 되겠는가. 그러니 세상과 벗하고 세상에서 호강하겠다는 생각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고 하여 일부러 인도의 소위 "성자(聖者)"들처럼 고행(苦行)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구원의 말씀을 명확하게 전달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고난은 약방의 감초처럼 따르게 마련이다.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용 사탄이 이렇게 인생 구원의 사업을 좌시하고 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탄압이 없다는 것은 실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 된다. 초대교회는 각 시대 모든 교회의 본으로서 가동되기가 무섭게 핍박이 닥쳤다. 믿는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그 때문에 복음 확산이 되는 것이기도 했었다.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가서 말씀을 전파하라 명령하신 그대로다.


그런데도 로마 천주교의 핍박 아래에서 마리아 숭배를 거부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더 이상 성경적으로 배우지 않고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세상 살기를 선호하고 물 좋고 산 좋은 고장에 남아 살기를 바라 "우리는 선량한 시민인데 왜 보호를 해주지 않느냐"며 국가에 탄원서를 내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복음 전파의 물길은 막히고 썩는 웅덩이로 변해 간 것이다. 12세기 "왈도파(Waldenses)"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 모든 헛된 미망에서 벗어날 때이다.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그리스도와 하나된 이들은 세상에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된다. "이마나 손에 표를 받지 않은 자는 매매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계시록에 명시된 대로 사람 사는 곳에서 살지 못하니 히브리서에 적힌 것처럼 산으로 바위 굴로 숨어들 지경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다(히 11:35-38). "모든 민족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다" 하신 그대로다(마 24:9). 


세계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 준 적 그리스도를 반대하니 너희가 바로 사탄의 무리가 아니냐 하게 되므로 필연적인 결과다. 그래서 하나님(적 그리스도가 가장하는)을 섬기는 예배라 하면서(요 16:2) 족치기 시작할 것이다. 이미 그런 사례는 많았으나 전세계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 사실 앞에서 또다른 교리를 만들어 소위 "휴거"라는 것을 지어냈다. 즉 그런 환난의 때가 오기 전에 믿는 이들은 공중으로 들려 올려진다는 맹랑한 발상이다.


이는 끝까지 세상을 사랑하고 안일을 탐하겠다는 고집인 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 "우리 살아남은 자"(살전 4:17)는 그런 고난 중에서도 살아남은 자 다시 말해 적 그리스도를 응징하기 위해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 살아남은 자가 몇이나 되는지 밝히지 않았다. 두 셋이 되어도 거기 해당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가 먼저 부활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함께 오는 이들과 대조되어 살아남은 자 역시 변화한다는 사실에다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우리"라 했다고 바울을 포함한 것이라 억지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예언이므로 그런 것이다. 이 구절을 베드로가 적절히 경고한 대로,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는"(벧전 3:16) 것이다. 상식적인 논리에도 맞지 않다. 고난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인데 왜 굳이 그런 환난을 기피하려 들 것인가. 교회의 생명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고난에 동참함에 있으니 한 몸이기 때문이다(고전 12:26/딤후 2:3/1:8/히 11:25).


이미 설명한 대로 세상이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음은 인류 구원에 있고, 이 구원은 한 몸되는 이치를 따라 함께 고통 받는 토대 위에 이루어지는 역사(役事)다. 때문에 만물이 함께 고통 당하는 판에(롬 8:22) 나만이 그 고통에서 제외된다면 구원 곧 영원 생명에서 제외된다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 고로 복음 전달의 사업이 완수되면 세상도 끝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24:14). 그런즉 이러한 고난 받음을 터전으로 하여 드리는 기도가 구원의 역사를 낳는 것이니 만사 젖혀놓고 기도에 힘쓰는 것 자체가 이러한 고난에 들어가는 양상이기도 하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專務)하겠다며(행 6:4) 기도를 앞세운 것을 보라. 기도 없이 행하는 설교, 기도 없이 행하는 전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명령을 무시하는 일체의 삶이 무의미한 것이 이 때문이다. 바울이 전도의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2년간이나 구금되어 있던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바울이 복음 전하느라 기도 시간을 크게 할애하지 못했던 결점을 보충 보완하려 하심이었다.


분명히 알 것은 지금 이 때는 해산의 수고를 하는 때이다. 성령께서도 그 산고의 신음 중에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 하였고(롬 8:26) 모든 피조물이 그 산고 중에 신음한다고(롬 8:22) 기록되었거늘, 어찌하여 당신은 거기서 그 영광스러운 한 몸의 일에서 스스로 배제되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자멸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17-18).


영원히 받아 누리게 될 영광을 놓고 어찌하여 그 영원에 비하면 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고난을 마다하는가. 너무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 아닌가. 스스로 판단해도 단죄를 면할 길이 없지 않은가. 세상에 단 맛과 쓴 맛이 병존하여 조화를 이루는데 어찌하여 일방적인 단 맛만 요구하는가. 그것도 다른 이들 구원하기 위해 받는 숭고한 고난 고통이니 곧 산통(産痛)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요 16:21) 하셨으니 우리도 의당히 같은 말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신 덕에 나는 영생 얻으리라는 생각에만 한정되고, 함께 두 팔 걷어붙이고 사람 살리는 고귀하고도 숭엄한 일에 몸 바쳐 죽도록 일해보자는 생각이 당신을 휘어잡지 못한다면 실로 당신은 갈 데가 없다. 오직 가는 곳은 한 곳뿐이다. 그래서 이 세상 유혹이 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서기를 "힘쓰라" 하셨고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고 경고하신 것이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 지체하지도 않는다. 다니엘의 20세기를 지칭하는 예언은(단 12:4) 이미 이루어져 있다. 진실로 "결단, 결정의 골짜기"(욜 3:14)에 정히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의 주님'을 만나 뵈었는가 




성경에 아무리 해박한 지식이 있어도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이 없어도 그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비밀을 알아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그것이 영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몸을 다 바쳐  남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여도 그것이 단지 선을 행하기 위한 것으로 그치고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나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고린도전서 제13장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믿음의 형제를 사랑함이 없으면 하나님 사랑한다는 그 말은 거짓임이 드러납니다(요일 4:20).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또한 자기의 믿음의 형제를 사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마다 하나님께로서 출생한 사람이니 또한 출생하신 이를 사랑하는 사람마다 그 분에게서 출생된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한 이마다 세상(사랑)을 이기게 되는 것으로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다름아니라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요일 4:21-5:4).


단 여기서 사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머리로 모시어 그 분의 종이 되어(나를 위해 죽어주심으로써 나를 상전으로 삼으시고 당신 자신께서 나의 종이 되시어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이로 계시는 것처럼-눅 22:27) 다시는 영원히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의 주인(소유주, 임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이름만 믿는 자이고 교회에나 나가고 말만 나는 구원 받았다 하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 하셨듯이 반드시 거기 상응하는 열매가 열려야 그가 내 "형제"인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없이 비록 예언을 하고 지식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어도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어도 그리고 남이 놀라는 선행을 해도 그는 내 형제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받아 모셨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성령의 세례를 받는(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시는) 즉시 성령의 은사는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만 위해 살겠다는 우리 각자의 약속을 사랑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다시 말하거니와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많은 사람"이라고 했듯이(빌 3:18) 그리고 이스라엘 "광야 교회"(행 7:38)의 큰 무리가 가나안 복된 땅으로 나아갔어도 "그 중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으로"(고전 10:5) 노중(路中)에 모두 멸망하였다고 엄중 경고한 것처럼 중간에 변절하는 것이 무척 슬픈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생명의 길은 알고 있어 좁은 길이라고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눅 13:24)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상속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히 12:15-17) 한 절절한 경고도 이미 믿는 교회를 상대로 한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스스로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영생하는 자가 되었지만 아담은 그 선물로서 받은 자기 생명을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이 비참한 경우는 영물(천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라고 차별 대우를 하실 리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보다 더 관대하게 대하실 수 없고 죄는 죄로 다스리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고전 8:3) 않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사람이 이 경고를 망각하기보다 아예 무시해 버렸습니다. 요한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요 14:15,23). "나를 사랑하면 나도 그를 사랑하여 나를 나타낼 것이다"(:21) 약속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순서가 분명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요일 4:19).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면"이라는 조건을 내거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네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4). 이와 같이 두 손바닥이 동시에 마주쳐야 소리가 분명해집니다. 이 '동시성으로서의 양면성', '양면성으로서의 동시성'을 많은 사람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무시하고서 자연 만물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고서 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 반성해볼 일입니다.


나는 과연 주님이 약속하시고 나타내어주시는 대로 내 주님을 알고 있는지, 주님은 내게 주님 자신을 나타내어주셨는지. 아직 나타내주시지 않은 때와 나타내어주신 때의 상황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영광 가운데 계신 그대로 나타나심을 대하면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게 됩니다. 사랑의 눈물이요 무한 감동 감격의 눈물입니다. 눈물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 그런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훈계하는 엄마의 사랑 앞에서 터뜨리는 울음과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무디(D. L. Moody)가 그렇게 주님 앞에서 울었고 피니(Charles G. Finney)가 그렇게 울었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요한이 적시한 것처럼 이 사랑이 세상(을) 사랑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 나와 일대일 관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개별적인 선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이십니다. 어느 인생보다 그 누구보다도 가까우십니다. 모든 인생들은 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모시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을 떠나서 어찌 우리가 가히 생명을 알고 사랑을 안다 하리요.


성경은 과학의 근원


성경이 <과학적>이라고 말 못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는 증거다.

자연과학의 제반 법칙은 

창조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세상 종교와  방불하여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 관계로 

"과학과 신앙은 별개"라는

따위의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던 것이다.


성경이 과학의 근원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만유의 법칙

다시 말해 짝의 원리, 3위1체의 법칙이 아닌가.

3운법칙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고,

인간 구원의 법칙,

가장 이상향적인 삶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의 법칙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