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법칙/각 인물 3운법칙 도표

죠지 뮬러의 3운법칙

Tayseek Kwon 2019. 4. 1. 20:10




죠지 뮬러의 3운법칙


순수한 기도 응답으로만 

수만금을 세상에 뿌린 

죠지 뮬러의 '트리니 호모'


3운법칙(트리니 호모, 파쇼모, trini homo, fashomo)



이렇게 생명의 법으로 정해진 것을 부자유로 인식하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것이 악(좋지 않은 것)인 것. 고로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체제에서 각자 자신에게 부과된 지체로서의 역할을 사랑하여 충실히 수행함에 있으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원하시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살도록 되어 있음이니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하심이기 때문.


머리이신 이상 머리는 반드시 몸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도록 되어 있지 않음이다. 서로가 그렇다. 이것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하나로서의 병을 이루어 사는 삶의 밑 뿌리인 3위1체 원리인 것. 인간(아담)은 이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형상 역할이었다. 어차피 이런 형상은 있게 마련이니 그런 머리의 형상을 두신다고 해서 인간(아담)이 머리는 아닌 것이다. 머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므로 머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면 누구는 잘 나고(월등하게 창조되고) 못난(열등하게 창조된) 구별이 없음이다.


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니 머리 역시 몸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구조이다. 따라서 이런 체제가 다양성 속의 완전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럿이 존재하게 되면 제각기 특색이 있으므로 모두가 한결같이 똑같을 수가 없는 것은 필연이다. 이렇게 같지 않으면서도 같게 되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함이 최고 방책이요, 그래서 하나가 되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 머리를 비롯해 몸의 모든 지체들의 위함을 받게 되며 이렇게 위함을 받는 데에서는 모두가 똑같으니 문자 그대로의 완전 평등이다.


불공평 불공정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치우치고 쏠리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됨에서는 그 누구도(머리를 위시해서)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밝힌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데 머리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입증해 보이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머리 자신부터 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셔서 내게 선물롱 다 주심을 확증하셨다(갈 2:20).


고로 처음부터 선언하시기를,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 하셨으니 모든 지체가 당연히 나를 위하고 나에게 자신들을 선물로 안겨주는 구조요 체제다. 다시 말해 나는 아무리 밑바닥에 있는 신분이요 위치라 하더라도 이런 한 몸 체제에서는 당당히 주인 격이니 그 증거가 이렇게 머리를 위시해서 모든 피조물이 다 나에게 자신을 바치고 있지 않는가! 이보다 더 큰 상전(上典, 더 많은 섬김을 받는)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는 없다. 그러나 천국에는 있다.


있어도 나만 아니라 모든 이가 모두 똑같이 그렇다. 모두가 주인이다. 동시에 모두가 종이다. 주인이면서 종이요 종이면서 주인인 이런 기막힌 상황은 하나님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그와 같은 확정적인 본을 보여 주심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요 실제로 이루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 피를 마시고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하신 것.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가 되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법질서  자체이시다.


"내 살과 피를 너희 모두를 위하여 제공한다"(요 6:48-59) 하시니 바로 이상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심인데 많은 제자들이 이를 듣고 반발한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즉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 제자가 되었으면 겸손하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 순응하고 따르겠다는 각오로 임할 일이지 자기 중심으로 입맛 따라 고르겠다는 태도 자체가 교만이다. 사탄이 그래서 망한 것이다(딤전 3:6).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아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죽으라 하시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 아브라함이 나타낸 믿음이요(히 11:17,19) 베드로의 고백에서 또한 나타나는(요 6:68) 것이다. 이것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받으신다"는 의미이다. 왜냐면 그렇게 고지식하게 다소곳이 귀를 기울여 따르겠다는 겸손이 없으면 부질없이 교만으로 흘러 자멸할 소지를 사탄처럼 그 스스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하시고 불변이시므로 그렇게 교만한 이들은 아무리 구원한다 해도 효과가 없으니 처음부터 그런 자들은 가려내질 수밖에 없다. 사탄이 에덴낙원에서 인간(아담 부부)을 거짓말로써 죽음에 몰아넣고, 인간이라고는 아벨과 자기네 부모와 단 넷뿐인데도 가인이 그 아우를 주저 없이 없애 버린 것이 그런 교만의 증거다. 이런 사태를 하나님이 아니시더라도 누가 방치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3운법칙을 정하여 인간을 통제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가려 내는 작업의 첫 단계가, 누구든지 믿는 자에 한해서만 구원이 나타나심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이다. 다음 단계는 그렇게 처음에는 믿더라도 중도에 그 믿음을 버리는 경우 역시 구원에서 제외됨에 있다.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더 좋아하여(요 3:20) 악을 선호한다는 뜻이므로 그 원하는 대로 될 것뿐이다. 그렇게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이들은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심판도 심판대로 반드시 될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믿지 않는다고 보아야 정확하다.


사탄이 이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과 맞물린다. 그가 왜 믿지 않(았)느냐 하면, 자기 계획대로 하면 반드시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것만 아니라는 믿음, 딴에는 믿는(자신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한번 그런 자유를 주신 이상 반드시 그 자유를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판단만은 제대로 하는 것이다. 백방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원칙에 어긋나게 하실 수 없다는 '믿음'은 있으면서 그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 하신 말씀을 믿지 않으니 그 오만함이 자기 눈을 어둡게 한 결과다.


그의 이런 집요함은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서도 드러나게 된다(계 20:7). 사탄이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안다"(12:12)는 것은 자기의 활동 기간이 그만큼 단축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지 자기의 때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정한다는 그 뜻은 아닌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과 대동소이하지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인간들도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판단으로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는 것뿐이나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사탄의 충동 질에 넘어 가 믿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탄이나 인간이나 못믿을 무슨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든다는 말도 있듯이 그 악한 마음이 스스로를 미련하게 만드는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롬 1:22). 이는 분명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빠져드는 현상이다(히 10:31).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따라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원하는 대로 하되" 그것이 정상으로 흐르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죄다.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흘러갈 때 죽음의 길인 것이다. "불의를 좋아한다"(살후 2:12)는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킴이다. 반드시 머리를 위함으로써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그 몸된 지체로서의 당연지사일뿐더러 지혜인데도 이를 버림이다. 그런즉 이런 삶의 체제를 사랑하여 기뻐하는 것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니 불법 곧 범죄 행위는 이런 가장 이상적인 삶의 지혜를 무시하고 어리석게도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고집함이다.


내 스스로 생각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에데낙원에서의 아담 부부처럼 사탄이 넣어 주는 생각에 내 스스로 동의, 동조할 때 범죄가 성립된다. 사탄이 가룟 유다의이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 13:2). 유다는 거기에 동조한 것이다. 광야 시험에서 만일 주님께서 사탄이 넣어 주는 각종 생각에(눅 4:3-10) 동조하셨더라면 주님은 범죄하셨을 것이다. 또 베드로가 "그런 약한 말씀 마십시오, 절대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막 8:33) 했을 때 그 말에 동의하셨더라면 역시 범죄하셨을 것이다.


범죄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아중심이다. 아들을 위하시는 것은 아들이 아니시고 아버지시다. 아버지 친히 위하신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이다. 따라서 아들께서는 반드시 아버지를 위하시고 자기 자신을 위하심이 없다. 만일 위하시게 되면 범죄가 구성된다.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이상(이것이 구원이다),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야지 나를 위하게 되면 범죄다. 나를 위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신데도 내가 나 자신을 위하니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남이요 따라서 범죄요 불신의 교만이다.


한 몸이 되어 있는 생명의 구조에서 벗어남이니 그 마땅한 결과는 죽음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는 사탄의 말에 동조, 동의하고 남자(아담)는 여자의 말에 동의한 것이다. 결과로 엄청난 비극이 벌어졌다. 아담 당시에는 설마 사탄이 그런 악한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이야 미처 알지 못했다 치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의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의 사탄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 같은 꾀임에 빠져들면 죄과가 더 무겁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아담 부부는 육체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우리의 경우 죽음은 사탄과 같은 영원한 멸망이다. 사탄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을 구분한다는 것도 빈 말이니 자아중심에서는 그 본질이 똑같기 때문이다. 


석자직 목사 사후(死後)에는 그 후계자로 나섰던 목사가 아편이 수익성이 좋다는 이유로 아편을 재배하는 아주 무분별한 행동을 하게 된다. 아편 중독 치유 운동에 나서놓고는, 안정적인 교회 활동과 전도 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도모하고자 도리어 그 아편을 통해 이득을 보려고 한 어리석음이었다. 석목사의 후계자라고는 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석목사의 기도 생활(모든 일 전에 반드시 기도로써 여쭙고 확신 가운데 조심스럽게 내딛는 생활의 지혜)은 물려받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예상대로 되어 교회 수입은 좋았다. 사업 확장도 하고 점포들도 새로 개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한 결과로 교인 중에 아편 중독자가 생기고 증가하게 되자 결국 이 일로 석목사가 주도한 아편 중독 퇴치 사업은 사양 길에 접어들게 된다. 이 사업이 석목사 이후 불행히도 중단된 사례에서 우리는 전에 없이 경각심을 일깨우게 된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업에서는 자진자발적인 사랑이 오직 문제가 되고 강제나 간섭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호되게 책망하시거나 해서 막아주시지 않느냐" 하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 뿌리는 씨앗대로 거두어지게 철두철미 각자의 자유 의지에 맡기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서운 현실이 된다. 물론 쉴 새 없이 경고하신다고 성경에도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경고를 수용하고 하지 않고 하는 최종 결정은 각자에게 즉 우리의 사랑과 믿음에 달린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업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자유 의지를 꺾으시면서까지 강권력을 발동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결코 흔히 들을 수 없는 석목사의 이 진귀한 간증을 통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 우리 역시 이 본을 따라 모든 일에 주님께 여쭙고 일을 결정하는 일상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기도 응답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캐나다의 프레스턴(Ann Preston, “Holy Ann”) 역시 거의 평생 가정부로 있으면서 일일이 기도하고 행동했다. "주님, 오늘 저녁 반찬거리는 무엇으로 할까요" 하는 정도였다.


점장이들이 사사건건 그들의 귀신들에게 묻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나 그들을 부리는 귀신들이나 모두 자기 개인적 욕구에 사로잡힌 자아중심이지만, 우리의 기도는 그 원동력이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를 따름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차원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있으므로 그래서 모든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의미이다.


즉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것처럼 해야 되는 것이므로 마땅히 여쭈면서 일하고 (주님과 함께 일하기 때문-고후 6:1) 그렇게 즐겨 "쉬지 않고 기도하게"(살전 5:17) 된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도 실상은 나 자신의 욕심을 따라(내 자신 호불호에 따라) 행할 가능성으로 인해, 여호수아의 경우에서 보듯 사탄의 계략에 휘둘릴 수도 있으므로(수 9:14) 반드시 주님의 뜻을 따라 하기 위해 그리고 촌음을 아껴 허송세월하여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도 사사건건 주님께 여쭙고 행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상 예를 든 바울 사도, 석자직, 헬렌 이완의 생애에서도 보듯이 그렇게 충성으로 그리스도를 섬긴 이들은 처음 그리스도를 믿어 그 생애가 완전히 180도로 변하기 시작할 때부터가 그 생애의 LP로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예외 없이 다 그런지는 아직 자료를 축적하지 못해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그런 것 같다. 아래 노아의 생애는, 거의 평생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었으므로 대홍수 이전과 이후로 DP와 LP가 나뉜다. 남은 인류는 다 멸망하고 오직 남은 8식구의 가장이었으므로 오는 세대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


노아의 생애


많은 사람이 성경을 믿지 않고 노아의 생애를 다만 신화에 불과한 전설로 받아들여 천년 가까이 생존했다는 이유로 그의 삶을 허구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의 생애 또한 모든 성경 기록이 진실 그대로의 사실임을 '3운법칙'은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한 사람에 대한 진실 입증이 성경 자체의 진실성으로 곧바로 연결된다는 논리는 물론 아니다. 성경은 이미 그 진실성을 충분히 넉넉하게 자체 증명하고 있는 까닭에, '3운법칙'으로든 그 무엇으로든 외부에서 그 자신의 진실을 증명해주기를 원래부터 기다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범할 수 없는 성격적 권위다.


그런 자체 증명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곳곳에서 절로 묻어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그런 자체 증명에 접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3운법칙'이 당당히 이를 증명해준다 해서 나쁠 것은 없다. '3운법칙'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이 우주 관장(管掌), 주재(主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진실성을 지적해 준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이 게시면 그가 창조하신 인생에 대한 메시지가 있게 마련이고 그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이 거짓일 리 없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원래 약자의 몫이지 강자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힘으로 강제로 얼마든지 밀어붙일 수 있으므로 거짓말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3운법칙이 과거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지금 이 세상 종말에 이르러 왜 새삼스럽게 나타났는가 하면, 이 세상의 신(神) 사탄이 이 세상의 종료가 이제 눈앞에 이른 것을 알고 전무후무하게 최종적으로 인류를 속이는 바로 그 시점이므로, 그런 대대적인 기만술과 속임수에 사전(事前) 대비하여 구원 받을 인생들은 차질 없이 모두 구원 얻도록 하시려는 섭리와 배려이신 것이다. 하나님과 그 말씀인 성경에 대한 신뢰를 더욱 돈독히 해주려 하심이다.


숫자상으로 나타나 있는 이런 절묘한 ‘3운법칙’의 구조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죽는 날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기 죽는 날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를" 이 인간 법칙을 세상 마지막 무대의 오늘 이 시점에 나타내심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창조자 하나님의 메시지는 아래 몇 가지로 집약됨을 다시 강조한다.


1)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고 이 우주 만물을 통치 섭리하신다.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된 기록으로서 인간에게 주시는 구원의 말씀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무이의 구원자이시다. 4)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 5) 이 세상 삶에 뜻을 두지 말고(왜냐면 통제된 삶인 만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까닭에) 전력을 다해 영원한 본격적인 생명과 죽음(멸망)에 대비하라는 경고다. 영원한 가치의 삶으로 지향(志向)하라는 마지막 명령이시다.


3/7, 4/7, 7/19. 5/19, 1/3 이상 5가지 수치들로 이루어진 ‘3운법칙’의 구조(structure)는 정확히 3위1체 원리(the law of Trinity)의 구조로 되어 있고 또 이를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데 이 사실은 또 다음 몇 가지를 입증한다. 1) 예외 없이 일관되게 획일적으로 3위1체 즉 대칭성 구조 다시 말해 짝으로 되어 있는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 정하신 모든 일반 자연법칙처럼 ‘3운법칙’ 역시 엄연히 그 중 하나임을 자체 증명한다. ‘3운법칙’의 구조 자체가 바로 이런 원리를 도식(圖式)으로 그려낸 듯이 절묘한 짜임새를 이루어 있기 때문.


2) 이것은 다시 역으로, ‘3위1체의 원리’야말로 (1) 하나님이 계시는 모습이요, (2) 하나님이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기본 원리이자 구조식이요, (3)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원리가 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이 사실은 다시 본디로 돌아가, 1)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입증함이니 왜냐면 우주 만물 모든 것이 ‘3위1체 법칙’의 원리로 되어 있어 그 제조자로서의 조물주의 제조(製造) 마크(make mark) 곧 도형(圖形) 또는 인장(印章)이 찍혀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실 그대로의 사실만을 기록한 것임을 증명함이니 왜냐면 성경의 핵심 논리가 바로 이 ‘3위1체의 원리’에 근거하여 시종 일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공동체로서의 공동체의식의 근간이 되는 인간 양심을 비롯해 인간사회의 모든 법제도, 윤리 도덕 모두가 이 ‘3위(位)1체(體)의 원리’로써 그 기본 바탕과 골격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하신 일의 모든 의미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임이 입증됨이니, 왜냐면 그리스도의 구원의 원리가 이 ‘3위1체 법칙’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들어맞는 까닭이다.  


3위1체의 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쉽게 말해 ‘짝의 원리’로서 짝을 이루지 않은 것이 없다 함이다. 이 ‘짝’이 다름아닌 대칭형의 개념인 것이다. 3위1체 원리는 이 대칭성 원리 또는 인과율을 보다 완전하게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즉 대칭을 이루는 둘은 원래 하나였고 그래서 현재로 양면성을 이루고 있으나 하나로서 표현됨을 밝히는 것이 3위1체 원리다. 만사(萬事) 양면성이 있음도 이 ‘둘의 하나’ 또는 ‘하나로서의 둘’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친히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기 때문이다. 원래 한 분으로 계시다가 자기와 같은 존재를 자기 형상(形狀-고후 4:4)으로서 지으시니 부자(父子) 관계가 형성됨이다. 즉 자기와 같은 존재를 “낳으신(begotten)” 것이다. 그래서 본질이 똑같으시면서도 차이는 분명히 있으시니 먼저 존재하고 나중 존재하게 되는 차이다. 이 차이는 당연히 능력 차이로 나타난다(마 24:36).


그래서 전자는 크다(요 14:28) 하고 후자는 따라서 작다. 주종(主從), 대소(大小) 관계다. 그래서 갑(甲)과 을(乙)이다. 또한 인과(因果) 관계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로서 계시는 모습이야말로 최초의 짝이요 대칭성의 시초이다. 그러나 본질이 같고 애초 한 분으로 계시다가 두 분이 되어 계시는지라 항상 하나로서 행동하시니,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말 그대로 형상과 실체는 불가분이기 때문.


고로 갑(甲)과 을(乙)로서의 둘로 존재하되 나타나기는 항상 하나이다. 바로 이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 병(丙)이라 한다. 따라서 이 병은 갑과 을로서의 둘이 되기 전의 원래의 모습이라 해도 무방하다. 무릇 무엇이든 대칭을 이루는 것은 먼저 있던 것을 기준으로 하여 나중에 생성되는 그 닮은꼴을 말함이다. 그리고 이 대칭성을 이루는 것은 혼자 먼저 있던 것이 이제는 양립(兩立)하는 것이므로, 서로 보완 관계에 있어 둘이 따로 떨어져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기에 불가분이라 그래서 '병'이라는 이름 혹은 존재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니 이 병은 그럼에도 추상적인 것도 아니고 가상적인 것도 아니니 왜냐면 갑과 을 둘이 하나로 존재하고 행동하는 실체(實體)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과 을이 서로 하나를 이루어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갑’이라 또는 ‘을’이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별도의 이름(마 28:19)으로 부르는 것이 ‘병’이다. 때문에 ‘3위1체’를 일시이원3위1체(一始二元三位一體)라 한다. 애초 하나였다가 둘로 짝을 이루고 그래서 갑, 을, 병이 되니, 병으로써 이 둘은 일체 곧 하나로서 계속 머무는 것이다.


애초 하나로 존재했으니 계속 하나로 존속되지 않는다면 둘로 되어 있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까닭이다. 스스로의 편의에 의해 둘이 되어 있을 따름이기에 그러하다. 즉 둘이 되어 있는 목적이 분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 둘로서 하나로 있고자 함이다. 높다는 개념은 낮다는 개념을 동시에 떠올리지 않고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항상 둘은 함께 하여 하나로서의 개념으로만 비로소 각각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음이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만물 만사가 짝을 이루어 하나로 되어 있다”고 풀이되는 이 ‘대칭성 이치’로써, 이 세상에 대칭되는 내생이 있고 전생은 없었고, 내생에 있어서도 영원한 행복의 세계(천국)가 있으면 그에 대칭되는 영원한 불행과 고난의 세계(영원한 불 못)가 있고, 현재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가 있으면 천사나 악령과 같이 물질적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비물질(非物質) 세계 곧 초자연계가 건재함이 입증된다.


실험실에서 시험관으로 입증됨이 아니라 모든 실험과 시험의 기본 토대인 논리와 상식으로써 사실과 진실로 확증됨이다. 비물질인 것은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 한 마디로, 이 우주는 조물주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증명한다는 사실로 귀일(歸一)한다. ‘3운법칙’의 수치 배열과 그 구조는 이상의 삶의 원리 곧 3위1체의 원리에 근거하는 인생 도리를 그린 듯이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다.


다름아니라 인생 삶의 핵은 공동체 의식에서 ‘우리’ 의식이요 ‘한 몸’ 의식이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하나를 이루어 사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니 ‘우리’는 여기서 병이요 ‘나’는 갑이요 ‘너(내 이웃)’는 을이다. 바로 이 갑과 을과 병의 위치를 그대로 도식처럼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세 가지 인생 유형 곧 FS와 SN과 OT의 수치 배열과 그 구성인 것이다. 이것이 3운법칙(trini homo, '3운법칙')의 진실성 내지 과학성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어째서 2/3도 아니고 하필 1/3이란 수치를 가지며, 15/20이거나 7/15도 아니고 하필 일견 어정쩡하게 보이는 7/19이라는 수치라야 반드시 통하느냐, 그리고 왜 3/8, 2/5가 아닌 반드시 4/7로만 그 구조가 확정되어 있는가 할 때, 다름아닌 바로 이 3위1체의 원리를 그린 듯이 나타내기 위함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3운법칙’도 3위1체의 원리의 연장선 상에 위치한 창조주 하나님의 법칙임을 ‘3운법칙’ 스스로가 자체의 구조를 통해 증명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이는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3위1체의 원리야말로 이 우주 법질서와 구조의 골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양심이란 것도 이 원리를 따름이요 인간 세상의 모든 도덕률, 법질서 등이 모두 이 원리를 기간으로 하여 존재함이다. 즉 공동체 의식, 공공(公共) 정신이다. 이 원리를 떠나서는 인간이건 이 우주 만물이건 존속할 수가 없음이다. 원자를 쪼개면 음전하를 띤 전자와 양전하를 띤 원자핵 등이 전기적인 양대 세력으로 엄밀히 구분되어 병립됨으로써 하나의 원자라는 음전기도 아니고 양전기도 아닌 별도의 구성체를 이루어 존재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다.


이 역시 모두 이 창조주의 창조 원리 또는 만유 존립의 법칙으로 되어 있다는 증거의 하나다. 동양에서 음양조화라는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켜 온 것도 그것이 단순한 이론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실상인 3위1체 원리를 가리키고 있는 까닭에 지금까지 수긍되어 오고 한의학의 근저이기도 하다. 그런 동일한 이치가 서양의 과학적 이론의 힘을 빌려서도 입증된 것이, 위에 예를 든 원자 구조 또는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이 우주 창조의 기본 원리요 만유 존립의 기본 법질서가 이전에는 동, 서양으로 각각 나누어 인식되더니 이 21세기 세상 마지막 무렵에 와서 서로 완전 일치를 보게 된 것이 ‘3운법칙’으로 증명된 3위1체 원리다. 이 세상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이미 다니엘의 예언에 나타나 있다. 즉 “사람이 빠르게 내왕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했는데, 그동안 세계가 완만하게 지속적인 발전을 점진적으로 해왔다면 그것이 어느 시점이라고 꼭 집어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19세기말 20세기초에 들어 별안간 화산 폭발하듯이 용수철 튀어 오르듯 하는 현상을 보였기 때문에 이 20, 21세기가 다니엘이 지적한 바로 그 “마지막 때”임을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 친히 이 3위1체 원리로 존재하신다고 하면 말 다 한 것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면 창조주 자신께서 이 3위1체 원리라 할 수 있다. 자기의 모습대로 만유를 창조하시니 그 모든 구조와 체계와 운영이 3위1체 원리 일색임은 당연하다. 아니라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창조주의 인간 구원도 이 3위1체 원리에 의한 것으로서 곧 ‘둘이 하나 됨’이니 이 또한 당연 귀결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의 법질서도 이 3위1체 원리를 따를 것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창조주를 상징하는 '로고', 창조주의 작품임을 낙인 찍어놓은 '마크', 그 예술품(피조물)에 그려 넣은 낙관(落款)이라 할 것이니, 인간이고 우주 만물이고 간에 속속들이 구석구석이 스며 있어 그 본질을 이루고 있어 창조주의 작품임을 증명하고 있음이다. 이 3위1체 원리를 증명하고 있는 3운법칙의 구조(structure)는 3위1체 원리를 설명하는 문양(文樣)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무엇이든 충분히 알고 나서 비판을 하든 무시를 하든 반대를 하든 해야 함이 상식이다. 모르고 그런 사전(事前) 지식 없이 속단하여 행동부터 먼저 하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 말은 오직 "어리석다"는 것. 다시 반복하지만, 지금 ‘3운법칙’(trini homo)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당장 도전해오고 있는 것이, “창조주는 과연 실재하는가?”, “성경 기록이 진실의 기록으로 그 모든 주장이 사실 그대로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유일무이한 우리의 구원자인가?“ 하는 이상 세 가지다.


무시를 하든 심각하게 받아들이든 자유이나, 필수 요건은 어떤 결론이든 자신 있게 내리고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기에 충분한 정보 습득이다. 스스로 노력하여 해결하기보다 남의 말을 의지하여 남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려 하면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 정보 제공자 자신이 고의적인 거짓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 또는 본의 아니게 그 자신 충분치 못한 정보로써 섣불리 내린 결론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나의 영원한 사활 문제를 놓고 그런 의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자기 스스로가 지키지 않고 남의 손에 무작정 의탁하는 도박 행위의 어리석음과 같다. 또 만일 이 ‘3운법칙’이 진실이라면 당신은 어찌 하려는가? 아예 공정하게, 진실일 수 있는 가능성 50%, 진실이 아니고 허구일 가능성 50%일 때 당신은 어느 쪽에 비중을 둠이 현명할까? 전자에다 비중을 둘 경우 즉 진실인 줄 믿고 행동했는데 나중에 가서야 진실이 아님이 판명 났을 경우에는, 손해는 기껏해야 진실이라고 믿기까지의 시간적 손해 정도로만 그친다.


그러나 이것을 손해라고만 단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 시간 투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를 속속들이 알아내는 '특수 정보 취득'이라는 무형의 자산 가치를 축적해 두는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얼마든 유효한 방면으로 활용함으로써, 이전에 그것을 진실이라 착각함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낭비"라고 치부했던 각종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을 수 있다. 왜냐면 다시는 그런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진실임이 최종 증명되어 나타날 때(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허구'라고 낙인 찍고 일절 무시해버렸을 경우), 그 손실은 가히 '손실'이라고 이름 붙일 여유마저도 송두리째 박탈당하는 최대의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파멸'로 곧바로 직행해버린다. 그러므로 이상 두 가지 50대 50의 비율로 저울질할 때 우리가 취할 자세는 금방 뚜렷해진다. 어느 쪽이 현명한지 판세가 당장 나타난다.


영생을 논할진대, 영생하지 못하는 인생은 영원하지 못한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시한부적 생명은 똑같은 시한부적 생명밖에 창출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식을 생산해도 자기와 같은 즉 닮은꼴로서의 인생일 뿐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은 창조자다워야 함이 마땅하니, 다시 말해 창조주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다 영원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 일시적인 시한부로 나타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 때뿐인 그런 것을 만들어놓고 만족하실 리도 없다. 모두 현재 영원성을 띠거나 아니면 조만간에 띠게 되어 있다. 전자에는 천사나 악령 같은 영물(靈物)들이 속하고 그 후자에는 우리 인간과 이 자연계가 속한다. 인간 역시 처음부터 이런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영생하는 존재로 아담을 만드셨으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른 결과가 이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썩음 곧 죽음인 것이다(롬 5:12).


성경에, 장차에는 "불 속에 들어가 있는 굼벵이도 죽지 않고 그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데, 하물며 인생이랴. 진시황 같은 이는 장생불로(長生不老) 약을 찾아 천하를 헤매게 했는데 이 모두 인간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것이요, 이 영원에 대한 갈구 자체가 인생이란 존재는 영속하는 것이지 결코 허무하게 시한부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접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인즉 영원하지가 않다.


그렇다면 그 까닭이 분명히 있다는 증거다. 그 까닭, 그 이유를 성경은 밝히고 있고 ‘3운법칙’은 이제 강력하게 이를 측면 지원하고 있다. 고로 영원세계는 있다. 없는 것을 갈망할 리 없다. 한시적인 것, 임시적인 것, 일시적인 것이 있으면 그 대칭적인 영원한 것이 없을 수 없다. 다른 것은 다 대칭으로 되어 있는데 유독 이 일시적인데 대한 대칭이 없을 수 있는가. 실상 우리의 모든 의식구조가 이 대칭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고 또 벗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영생을 희구하는 것이 인생이다. 의식 구조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문제는 이 영원 세계를 어떤 상태로 우리 인생 각자가 보내느냐 하는 데에 있다. 창조주께서 이같은 ‘3운법칙’을 이 마지막 때 나타내어 주신 이유는, 바로 이 때가 영원세계로 넘어가는 바로 그 초입에 놓여있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불행에 대한 각자의 각성을 각별히 촉구하실 필요성에서다. 다시 말해 ‘3운법칙’에 의해 만물이 다 그 짝이 있고 그 두 가지 측면 또는 양상(樣相)이 서로 조화하여 불가분의 하나를 이루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힘이다.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과 그 상대적인 의미의 영원한 반(反)생명(非生命)이 엄연히 양립하여 영원히 존속하는 법질서로 장차의 세계가 확고부동하게 연이어질 것이므로, ‘3운법칙’은 이에 대한 시의적절한 경고가 되어 있다. '반 생명'이라 함은 '생명'이란 의미가 내포 함축하고 있는 모든 개념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생명'에는 '고통'이 연상될 수 없다. 그것은 '생명'에선 결코 수용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고 허용된 한시적 현상이다.


'고통'은 당연히 '반 생명'에 속한다. 이제 모든 것이 '생명'과 '반 생명'으로 구분되어 장차 오는 세계에서 "정상 운영되는" 것이니, 이 역시 ‘대칭성 구조’를 드러내는 3위1체 원리의 범접할 수 없는 만유의 법칙을 따름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창조주께서 이 ‘trini homo(3운법칙)’으로써 인생에게 마지막으로 권고, 경고하시는 메시지는, 이 '반 생명'을 피하고 '생명'으로 들어가라는 바로 그것이다. 이 '생명'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란 말로 통칭하고 '반 생명'은 "멸망"이란 말로써 구분 짓는다.


"멸망"은 고통의 연속이니 더군다나 그것이 영속(永續)될 때 그 참담함이야 무엇으로 형용하리요. 이 글을 대함으로써 3운법칙의 존재를 알게 된 당신은 싫든 좋든 당신에게 증언을 하게 되어 있는 증언자(證言者)를 만난 것이다. 곧 ‘3운법칙’이다. 이 만남의 사실을 이제는 영원을 두고 지워버릴 수 없게 되어 있다. 물론 반드시 부정적일 수는 없다. 부정적으로 대하면 부정적으로 결과가 나타날 것이고, 긍정적으로 조처하면 또한 긍적적인 의미의 증언자 구실을 하겠기에 이는 순수하게 당신에게 달렸다.


당신이 만약 이 ‘3운법칙’에 대한 지식을 평생을 다 끝내기까지 무시하면 문자 그대로 저주가 될 것이다. 왜냐면 조만간 창조주의 심판대 앞에 당신이 서게 될 때,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알려 경고해 주신 ‘3운법칙’을 알고도 자의적으로 무시했다는 사실을 이 ‘3운법칙’에 대한 기억은 그 날 당신의 마음 속에 분명하고 또렷하게 증언할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 경고를 듣고 '생명'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 "구원"의 문은 아직은 어느 때건 활짝 열려질 수 있도록 당신을 위해 대기 상태에 있다. 아직은 늦지 않으나 이 문은 서서히 닫히려는 만반 준비에 또한 들어서 있음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찾는 이에게 찾은 바가 되고 구하는 이에게 얻은 바가 될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문은 열릴 것이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수명이 15년 연장된 히스기야 왕의 '3운법칙'


"히스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25세니 예루살렘에서 29년을 다스렸다"(대하 29:1).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 하나님, 구하오니 제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님 앞에 행하며 주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하고 심히 통곡하였다.


"이사야가 시내(市內)까지도 이르기 전에 주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시기를, '너는 돌아가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말하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곧 주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내가 너를 낫게 할 것이니 네가 3일만에 주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15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도시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도시를 보호할 것이다' 하셨다" 하라'"(왕하 20:1-6).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로부터 "집을 정리하라"는 통고를 받은 때가 그 나이 39세 때이니 15년 수명을 더 연장 받아 54세에 죽었다. 여기 히스기야 왕을 소개하는 것은 그 두 가지 경우 즉 39세에 죽었을 경우와 54세에 죽음으로써 확정된 그의 '3운법칙'이 다 같이 '3운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참고로 히스기야가 죽고 그 아들 므낫세가 왕 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12세다. 그러므로 이 아들은 15년 수명의 연장 이후에 낳은 것이다.


이 사실이 히스기야의 '3운법칙'을 셈하는데 결정적 자료가 된다. 39세로 죽었다면 그의 3운법칙은 SN형으로서 14년이 LP로서 곧 25세 때부터 왕 위에 있었던 기간이다. 그러면 15년이나 수명이 연장된 54년의 생애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즉 FS형일 경우 LP는 30.8년이 되므로 실제 왕위 재임 기간 29년 언저리에 오게 된다. 그런데 이 히스기야의 수명이 연장된 기간 중에 생긴 특이 사건은, 히스기야가 그 이후 교만해져 그 교만해진 가운데 낳은 아들이 므낫세였다는 것이며, 이 므낫세가 들어 장차 온 국민들로 범죄하게 만들고 마침내 그 대가로 재앙이 임했다는 것이니 고로 그 생애를 평할 때 차라리 그 때 39세의 나이로 끝을 맺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다시 말해 생명의 연장이 오히려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관점에서 살필 때, 히스기야의 생애를 OT형으로 정하면 활동기 18년이 되는데(54세에 죽었으므로) 이 때 므낫세의 출생이 그 열쇠가 된다고 보고 히스기야가 죽고 그 아들 므낫세가 왕 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12세였으니(대하 33:1) 그러므로 이 아들은 15년 수명 연장을 받은 후 3년을 전후한 시점에 낳은 것이다. 그러면 히스기야의 실제 LP는 17년 또는 18년이 된다는 뜻이다.


왕위에 계속 머물기는 했지만 므낫세를 낳은 때로부터 그 나머지 기간은 비록 왕위에 머물러 있기는 했으나 DP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히스기야의 수명 연장 이후의 '3운법칙'의 의미인 것. ‘3운법칙’이 인간 생애에 대한 해석을 내릴 때 Jenny Lind나 효봉 선사의 경우에서 보듯 ‘직역(直譯)’을 하기보다 ‘의역(意譯)’을 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니, 히스기야와 같은 이런 특별한 경우도 ‘의역’ 쪽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히스기야의 '3운법칙'이 ‘번역’해내는 핵심 골자는 무엇인가. 애초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생애를 39년으로 정하셨으니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바가 최고,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짧은 식견으로도 히스기야처럼 불평하거나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 결코 선(좋은 것)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히스기야처럼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 기도 요구를 듣지 않으실 때에라도 이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실상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 히스기야의 경우 그렇게 단 한번만 그런 기도를 들어주신 예가 된다고 할까. '3운법칙’ 계산에서 연보(年譜)가 연수(年數)로만 대강 나오고 월일(月日)까지 상세히 나오지 않는 경우, 산출(算出)한 것(연보(年譜)상으로 나타나 있는 대로의 LP를 해당되는 유형(FS, OT, SN)을 따라 셈한 것)과 실제(생존한 햇수를 따라 유형 별로 나타나 있는 LP)와는 보통 1년 안쪽으로 대개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오차(誤差)가 1년을 넘는 때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분석 대상으로 삼은 모든 인물이 어김없이 세 유형으로 분석되기에 더 분석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분석 작업을 중단해 버려 이제까지 그리 많은 인물은 분석해보지 않았으나) 찰즈 대제(샤를르망)만은 오차가 1년을 넘게 나와 예외였다. 이 경우도 자세한 전기류(傳記類)의 자료에 접하면 그런 오차를 줄이거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처럼 단 며칠 상관으로 정확히 맞아 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예단(豫斷)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몇 살에 죽었고 몇 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등으로만 기록되어 있어도 정확히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 정도로나마 상세히 소개되어 있는 성경의 인물이라고 해보아야 노아,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 정도인데 모두 정확히 3유형 중 하나에 적응되고 있다. 구약성경 역대기(혹은 열왕기)에 나오는 여러 왕들도 여기 해당되는데 몇 살에 왕위에 오르고 몇 살에 죽었다는 등이 그런 것이다. 그들의 LP는 왕위 재임기간으로 나타날 듯한데(다윗이 그 전형적인 것) 그런 인물들은 아직 분석해보지 않았다.


히스기야 왕만은 15년 수명이 연장된 인물이므로 호기심에서 분석해본 것뿐이다. 히스기야의 경우 FS형으로 잡으면 LP로서 29(왕 위에 있은 햇수로 14년에 15(연장 수명)년을 보탠 것)년과 31년(30.8년)으로서 2년 가까운 차이가 난다. OT형으로 정했을 경우에는 LP로서 17(14년에 3년(므낫세가 출생한 후의 왕위 재임 기간을 DP로 잡을 때)을 보탠 것)년과 18년으로서 1년 차이므로 FS형이 아닌 OT형에 해당된다 하겠다.


실상 이미 정해진 수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친히 연장시켜 주신 예는 히스기야가 처음이고 마지막일 수 있다. 따라서 '3운법칙'(3운법칙)을 적용시킨다면 히스기야의 생애에만 적용되는 이상과 같은  '해석'도 결코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리라. 참고로, 분석상의 "오차"라는 것은 생애 분석 대상 인물의 생존 햇수(사망 연월일에서 출생 연월일을 빼주면 알 수 있다)가 밝혀졌을 경우 그 해당되는 유형을 따라 계산되어져 나오는(생애의 4/7, 1/3, 7/19밖에 없다) LP①와 그 인물의 연표(年表)에 따라 LP라고 생각되는 기간을 셈해 낸 결과②와의 차이다.


모세, 노아 등 성경의 인물들처럼 이 둘이 서로 맞아 떨어져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몇 개월 정도의 오차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인물로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믿음으로 고아원을 세워 운영한 죠지 뮬러 목사, 김일성 등은 단 며칠 정도의 오차만 생긴 사례다. 그러므로 이런 오차는 해당 인물에 대한 정확한 자료의 결여에서 야기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래에 죠지 물러의 '3운법칙'을 소개한다.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미 소개한 우희다수가, 트루만, 산마틴 등의 생애에서 보듯이 LP(활동 기간)가 될 수 없고 DP(침체 기간)임이 분명한데도 그 일부를 LP에 합산시켜 그런 비교적 짧은 활동 기간을 제 모습(3운법칙으로 계산해낸 LP 수치)에 맞도록 꾸며 주는 재미 있는 현상이 있음을 본다. 한 사람의 생애만 아니라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고로 일정 규격화가 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런 특이 현상은 LP가 장기간으로 배열되어 있는 FS형에서만 볼 수 있다.


LP, DP, JP(출생시로부터 시작되는 유청소년 기간, 3운법칙에서는 초창기[草創期]라 하는데 SN, OT 유형에만 있음)가 골고루 배분되어 있는 OT형이나 SN형에서는 볼 수 없는 양상이다. OT, SN유형에서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활동, 비활동기의 개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FS형은 LP, DP가 동일 기간으로 되어 있지도 않고 JP도 없어 아기자기한 맛이 없는 대신 그와 같이 흥미 진진한 색다른 다채로운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조지 뮬러의 3운 법칙 분석


조지 뮬러가 목사로서 사례비를 일절 받지 않고 오직 기도하여 그 응답으로 생활하기로 작정한 것이 25세 때이고 고아원 사업을 시작한 것이 31세 때이므로(1836년 4월 11일) 그의 생애가 93세(1805년 9월 27일 생, 1898년 3월 10일 운명)에 끝났으니 장수한 사람으로서 그 LP가 길다. 장수한 사람일 때에는 무조건 FS형으로 우선 설정하고 생애 분석에 들어간다. 뮬러의 경우 전체 생애의 4/7인 LP가 53년이다.


70세에 고아원 사업을 사위에게 맡기고 세계 전도를 나섰으므로 고아원 사업은 39년간(31세 때부터 시작)이고 나머지 14년은 세계 전도 강연 시기이다. 아래 영문 자료에 따라 다음과 같이 그 해외 전도 강연 기간을 계산할 수 있다. 그의 생애 분석을 여기 소개하는 것은, 이와 같은 세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면 그의 '3운법칙' 분석이 원활히 되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여 "3운법칙은 어떤 생애에는 잘 들어맞지 않더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여지를 미리부터 봉쇄할 목적에서다.


다시 말해 이런 죠지 뮬러의 생애를 통해서도 확인되듯, 그 어떤 생애든 자세한 연보나 전기를 충분히 참작하면 분명히 '3운법칙(trini homo, 인간 생애의 법칙, 3운법칙)'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적응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그 증거로서 아래와 같은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다. 뮬러가 해외에 있던 기간을 상세히 표시한 것이다.

1875. 3. 26-1875. 7. 6....3개월 6일,
1875. 8. 14-1876. 7. 5....10개월 21일,
1876. 8. 16-1877. 6. 25....10개월 9일,
1877. 8. 18-1878. 7. 8....10개월 20일,
1878. 9. 5-1879. 7. 18....10개월 13일,
1879. 8. 27-1880. 6. 17....9개월 21일,
1880. 9. 15-1881. 5. 31....8개월 16일,
1881. 8. 23-1882. 5. 30....9개월 7일,
1882. 8. 8-1883. 6. 1....9개월 24일,
1883. 9. 26-1884. 6. 5....8개월 10일,
1884. 8. 18-10. 2....1개월 24일,
1885. 5. 16-7. 1....1개월 15일,
1885. 9. 1-10. 3....1개월 2일,
1885. 11. 4-1887. 6. 13....1년 6개월 9일,
1887. 8. 10-1890. 3. 11....2년 7개월 1일,
1890. 8. 8-1892. 5. (날짜 미상)....1년하고 약 9개월.

해서 모두 13년 9개월 18일간을 해외에 있었으므로, 정확한 생존 일수가 92년 5개월 11일 즉 총 일수가 33,765일이니 이것을 4/7로 셈하면 52년 10월 14일(필자의 계산이 1, 2일 정도 틀릴 수도 있음)이 그 LP가 된다. 그러면 고아원 시작한 날이 1836년 4월 11일인데 언제 뮬러가 사위에게 사무 인계를 했는지 여기서는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고, 또 마지막 전도 여행의 마감일이 1892년 5월인즉 달까지는 알고 날짜는 모르므로, 52년 10월 14일에서 39년(뮬러가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여 사위에게 관리권을 넘겨주기까지의 햇수)을 빼면 대략 13년 10월 보름 정도가 된다.


그러면 위의 13년 9월 18일과 근사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것으로 보아 날짜를 정확하게 계산하면 뮬러의 생애의 LP 역시 4/7로 정확히 산출되어 나온다고 단정할 수 있다. 다른 예 즉 김일성의 생애 분석도 이렇게 아주 정확하게 나왔고,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의 생애 분석도 빈틈없이 정확한 수치로 계산되어 나왔음을 밝힌다. 다른 사람의 생애는 아직 셈해볼 필요를 느끼지 않아 이상 정도로만 만족하고 있다. 충분히 정확하게 계산되어 나오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더 이상 생애 분석을 시도하지 않았었다.


어쨌든 위에서 보듯이 모든 인간 생애는 이 인간 생애의 법칙(3운법칙)의 철저한 규제 아래 전개되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뮬러의 경우 이런 해외 전도 여행 일자가 다행히 나와 있기에 망정이지 만일 이런 기록이라도 없었더라면 퍽 당혹했을 것이다. 왜냐면 무조건 63년간 주님의 일에 헌신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이 63년이란 숫자는 인간 생애 법칙 중 그 어느 유형의 LP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생존 연수가 92년 5개월 11일이므로).


그러나 죠지 뮬러의 생애에 관한 모 기록에서 다른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이상과 같은 진귀한 자료가 있기에 마침내 정확하게 산출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인간 생애의 법칙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다시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역사적 인물의 생애 분석에서 예상한 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경솔하게 판단하고 포기할 일이 아니라, 이런 사례가 분명히 있으니 그렇게 금방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정확한 생애의 내용을 알기 위한 노력이 최소한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종이든 불신자든 무릇 모든 인생의 걸음걸이는 모두 그 걷는 자 즉 본인 당사자에게 있지 않고 철두철미 하나님의 통제 아래 되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주 하나님, 제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한다"(렘 10:23) 함과 같다. 3운 법칙의 의미는 이효봉이나 제니 린드(Jenny Lind)의 생애에서 보듯이 소위 "길흉화복"을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과 그의 인간 생애 주재(主宰)를 증명하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 3위1체 원리를 확증해주는 증거가 됨에 있다.


도합 16회에 걸치는 전도 여행 일자지만 섬세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진행된 것을 보지 않는가. 빈틈이 없고 차질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런 '3운법칙'의 통제가 아니라면 자아중심의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이웃들을 죽이든 말든 할 것이니 인간 삶이 뒤죽박죽이 되어 이미 오래 전에 다 함께 망해 버렸을 것이리라. 이런 조물주의 강제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세상은 돌아가고 구원 받을 사람은 구원 받게 되는 것이다. 가인의 손에 죽는 아벨과 같은 일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되겠기에 통제는 필연적인 것이다.

아래의 전도 여행 일정에 보면 1887년 8월 10일에 시작되는 여행은 뮬러의 딸 리디아가 사망했다는 급보를 받아 좀 더 연장될 일정임에도 갑자기 취소되고 급거 귀국하게 된 것이며, 뿐 아니라 그 자신이나 부인의 병환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했으니, 이렇게 병에 걸림으로 여행 일정이 취소됨으로써 3운 법칙대로의 날 수 계산에 어김없이 들어맞게 나타나 차질이 없음을 보게 된다. 딸의 사망 역시 이와 같이 ‘3운법칙’에 어긋남이 없도록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진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철저한 인간 생애의 법칙을 따라 바로 그 시간 혹은 날짜에 맞추어 딸의 사망이 있었고 또는 아내와 자신이 병들게 되었으니, 어찌 ‘톱니바퀴의 맞물림’이 아니라 하리요. 지금까지의 여러 인물의 생애 분석에서, 병으로 앓게 되면 LP에서 제외되는 공통점이 드러나고 있다. 위에 소개한 여행 일정표를 내용별로 분석하게 되면,


1875. 3. 26-7. 6: 잉글랜드(Brighton, London, Sunderland, Newcastle). 스펄전의 교회(Metropolitan Tabernacle) 등에서 70회 설교.
1875. 8. 14-1876. 7. 5: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리버풀 5주 체재하면서 일요일 청중 5,000명.
1876. 8. 16-1877. 7. 25: 스위스, 독일, 홀란드. 68 곳에서 3개 국어로 302회 설교.
1877. 8. 18-1878. 7. 8: 캐나다, 미국. 299회 설교. Hayes 미국 대통령과 면담.
1878. 9. 5-1879. 7. 18: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그가 후원하던 여러 학교를 둘러 봄.
1879. 8. 27-1880. 7. 17: 미국과 캐나다. 42 곳에서 299회 강연.
1880. 9. 15, -1881. 3. 31: 캐나다 및 미국. 그 이전 여행에서 부득불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 곳 방문.
1881. 8. 23-1882. 5. 30: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 소아시아, 터키, 그리스. 여행길이 험로이어서 신체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주었음. 

1882. 8. 8-1883. 6. 1: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러시아, 폴란드. 러시아에서는 전도 여행이 억제되어 어떤 때는 고작 20명 정도에게 전도 강연.
1883. 9. 26-1884. 6. 5: 78세 생일. 인도. 206회 전도 강연. 3만3천6백 킬로 여행.
1884. 8. 18-10. 2: 잉글랜드 및 남 웨일즈. 아내의 병으로 나머지 여행 일정 취소.
1885. 5. 16-7. 1: 잉글랜드. 자신의 병으로 나머지 여행 일정 취소.
1885. 9. 1-10. 3: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
1885. 11. 4-1887. 7. 13: 오스트랄리아, 중국, 일본, 말라카 해협. 81-83세. 596,498 킬로 여행.
1887. 8. 10-1890. 3. 11: 오스트랄리아, 타스마니아, 뉴질랜드, 세일론, 인도. 인도 캘커타의 혹서에 거의 죽을 뻔함.
1890년 1월 10일의 딸의 사망 전보 받고 나머지 여행 일정 취소.
1890. 8. 8-1892. 5.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86세로서 많은 청중에게 설교.


보통 우리는 활동기(LP)를 잡을 때 죠지 뮬러의 경우 그가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때부터 아니면 최소한 그가 결혼한 후 목회자로서의 사례비를 받지 않고 온전히 믿음의 기도 응답으로 평생을 살기로 작정한 때부터 잡는 것이지만, 3운법칙은 그 사람의 특색을 지적해 주는 것이니, 즉 죠지 뮬러는 고아원 사업으로써 기도 응답의 산 본보기를 모든 교회에 훌륭하게 보여주자는 것이 그 목적으로서 사업의 특징을 삼은 까닭에, 바로 그 시점부터 그의 LP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아사업과 그리고 그 결과를 온 세계에 알리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이 모든 내용이 어김없이 그의 '3운법칙'에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이상 생애 분석에서 날짜까지 네 귀가 들어맞도록 맞춰지기 위해서는 이 3운법칙에 대한 면밀한 연구 차원에서 보다 많은 인물들의 생애 분석이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스럽고, 동시에 그 해당 인물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자료(정보)가 무엇보다 확보되는 것이 필수임이 이 죠지 뮬러의 생애 분석에서 다시 확인된다.


예컨대 LP 기간 중에 와병 중이어서 활동이 불가능했을 때는 그 날짜나 기간만큼 LP 기간에서 빼 주어야 하기 때문. 고로 우리는 대충 우리의 생애 분석 계산이 생존 일수를 계산하여 얻어낸 그 LP기간의 언저리에 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다. 이런 대충으로 하는 식의 생애 분석에서도 이런 오차(誤差)가 12개월을 넘는 경우가 없다. 위의 죠지 뮬러의 생애 분석은 불과 며칠 사이의 오차다. 김일성이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경우도 그렇다.
 

"때"가 되어야


아이젠하워는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이 4,50줄에 들어서도 "만년 영관" 급으로만 전전하며 별 볼일없는 인생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의 LP 즉 때가 되자 2차대전이 터지면서 자기 앞서 달리던 동료들을 한꺼번에 젖히고 갑자기 용수철처럼 솟구쳐 올랐다. 5성 계급에까지 이르더니 마침내 대통령 직에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혜성처럼 나타나는 것을 그의 '트리니 호모'는 정확히 그 한계를 그어주며 나타내고 있다.


세상사 되어가는 흐름과 각 개인의 모든 사건들이 철저한 3운법칙에 맞춰져 뚜렷한 사변이나 변고를 생성시킨다는 것은 그 어느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상상 못할 아주 치밀하게 구성된 종합 예술과 같은 모양새를 이루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것도 억조 창생들의 생애를 단 3가지로만 압축시켜 일괄성 있게 보여준다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의 자아중심적 성향에 비추어 본다면 명확히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야생마와 같이 걷잡을 수 없이 날뛰는 인간 야성(野性)을 제어하고 통할하여 각자의 자유 의지는 일절 손대지 않으면서도 기계처럼 움직이도록 함으로써 조금도 무질서한 일이 있거나 차질이 없게 하는 빈 틈 없는 조물주의 섭리와 경륜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자아중심 일변도의 인생들을 그냥 방치한다면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명줄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답은 들으나마나다.


아벨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인 가인의 소행이 그 증거다. 모든 인간이 이 '3운법칙'의 철칙을 따라 움직인다면 이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구조를 연상하게 한다. 세세한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장관을 이루는 것. 인간이 모두 70억이라면 그런 세세한 톱니바퀴 70억개가 제각각 돌아가면서도 그럼에도 한 덩어리로 뭉쳐져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그런 세계임을 본다. 모든 인간이 이 '3운법칙'의 철칙을 따라 움직일진대 명실상부하게 이는 거대한 톱니바퀴들의 구조다.
 

인과율(因果律, the law of causality)


인과성의 법칙, 인과 법칙은 모든 일은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이 없이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아니한다는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주로 철학 용어로만 사용되어 왔으나, 이제 3위1체 원리로 인하여 자연법칙이 바로 인과율에 의하여 운행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인과 법칙 자체가 하나님의 실존(實存)을 직통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간단한 진리가 입증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했으니 이는 지금까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사탄의 조작에 의한 무신론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 그 스스로 조물주 신으로 가장하여 인류를 대대적으로 기만하려는 시점에 이르면서 다시 유신론의 분위기를 서서히 조성시켜 가는 단계에 있는 것을 본다. 무신론으로써 생길 단 물은 다 빨아먹은 다음이므로 이제는 황급히 이를 걷어냄이 시급하니 그 스스로 창조주로 자처하여 등장해야 할 필요와 시급성 때문에 그렇다(살후 2:4).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사실을 광포(廣布)함에 주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구원의 실상을 성경대로 밝히자니 먼저 하나님의 창조부터 거슬러 올라가 말문을 열지 않을 수 없기에 이런 말도 하게 된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사탄이 그동안 워낙 무신론의 장막을 두껍게 깔아놓은 까닭에 이를 발겨내기에 상당한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인과성은 예로부터 그 이해를 둘러싸고 유물론과 관념론 간의 견해 차이로, 그리고 변증법적 이해와 형이상학적 이해의 대립으로 백가쟁명(百家爭鳴) 식이 돼 왔었다. 엄밀하게 인과 관계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어 지난 수천 년 간 많은 철학적 논의를 거쳐 왔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로까지 소급된다.


어떤 개별적인 인과 관계는 그 자체의 독립된 현상이 아니고 복잡한 상호 관계의 체계 속에 있는 단지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반드시 고정된 불변의 것은 아니라고 하여 엄격한 인과율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었다. 인과율의 진리성은 논리적이거나 경험적 근거가 전혀 없는 오직 심리적, 실용적, 해석적인 필연성에서 오는 것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실재(實在)하는 법칙으로서의 필연성이 없다고 하여 일원적 인과율로서의 의미 즉 확정성으로서의 원리임은 배제하고, 어디까지나 확률의 원리를 따를 뿐이라고 말해 왔던 것인데, 이제는 그 실체가 3위1체의 법칙이라는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사실 그대로 시인하면 간단히 해결 날 문제를 가지고 굳이 창조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에서 그 범주 내에서만 빙빙 돌며 알 듯 모를 듯한 애매 모호한 말만 만들어내어 왔으나, 정확히 알고 나면 너무 허탈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간단명료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3위1체의 법칙에 의해 그 모든 부질없는 말들은 일소되고 인과율은 확고한 진리로서 자리잡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이 인과율을 중요 교의 중 하나로 인식하는 것으로 세상은 알고 있는데(모든 현상은 상대적 의존 관계에 있다는 소위 연기설(緣起說)로써), 이는 고대로부터의 인도교의 인과응보 사상을 물려받은 것으로 그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만물 만상(萬象)이라는 이 방대한 '결과'의 최초 '원인'이신 조물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마당에 인과 개념의 그 언저리에도 가 있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논리성과 합리성을 도출해내겠는가.


3위1체 원리에서 갑과 을의 대칭성은 '모(矛, 창)'와 '순(盾, 방패)'으로서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정반대의 성질인 것이나 병이 존재함으로써 '모순의 조화(調和) 일치 또는 통일'을 이루는 기막힌 조화(造化)인 것이다. '높다'와 '낮다'는 이 둘의 개념은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영원한 상극이다. 즉 갑(a)과 을(b)이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높다'는 개념은 '낮다'는 개념을 동시에 떠올리지 않고는 절대로 개념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낮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인식상 둘을 한꺼번에 동시에 떠올리지 않고는 절대로 그 의미가 통할 수 없는 이것이 다름아닌 병(c)이요 그런 역할로서의 존재 가치이다. 이래서 갑(a)과 을(b) 그리고 병(c)의 3각(tripod) 구도가 만유 구성의 절대 요소로 영원히 존립하게 된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파동이기도 하고 파장이기도 하다는 두 상극(相剋)에서 그 논리적 합리성을 찾지 못한 데 따른 아인슈타인의 항변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보어(Niels Bohr, 덴마크, 1885-1962)는 파장으로 그리고 동시에 입자로 증명되고 있는 실험상으로 나타나는 빛의 실체를 부정할 수 없었기에,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것. 그러면 답은 무엇이냐, 빛이라는 실존 바로 그 자체가 답이다. 이는 논리로 대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왜냐면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 다시 말해, 그 자체가 논리가 되어 있다. 곧 3위1체의 법칙이다.


원래 하나로서 존재하던 것이 둘이 되니 그 둘의 본질은 같으나 각기 자기의 독립성을 유지하므로 형태를 달리함으로써 이런 특성을 나타낼 필요성에서, 갑과 상대되는 이 또 하나의 형상은 갑의 형상을 문자 그대로 거꾸로 또는 뒤집어 놓은(도치시킨) 것으로써 그 고유의 형태를 정한 것이 3위1체 원리의 구조도(構造圖)다. 3운법칙의 구조에서 바로 이 형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는 것. 즉 갑(OT)의 모습으로서의 '3X19' 형태를 '19X3'으로 도치시켜 도식화(圖式化)한 형태로 을(SN)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의 의미는 그 두 숫자가 곱해진 '57'이라는 값이 아니라, 두 숫자 3과 19의 순서가 뒤바꾸어져 있는 모양새를 말함이다.
 

갑은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고


"안고" "업고" 하는 것은 노자의 표현이다. 노자 도덕경(老子 道德經) 42장에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라 했으니 만물이 음을 업고 양을 안았다는 뜻이라기보다 만물 자체가 양이 음을 안고 음이 양을 업은 모습이라 해야 더 적적하다. 이는 3위1체의 원리(The law of Trinity)를 그대로 나타냄이다. 즉 만물은 별개의 성질이면서도 한 갈래에서 나와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는 조화되고 통일된 모습 바로 그것이기 때문.


단지 여기서, 도(道) 자체가 일(一)이라는 사실을 노자가 놓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데 그런 정확한 표현이 나올 리 없다. 그러나 '道'가 아버지를 가리키고 '一'을 아들을 가리킴이라 하면, 아버지께서는 "실체"이시고 아들께서는 그 "형체 또는 형상"(고후 4:4)으로서 낳으심을 받으셨기에, "형상"으로서의 아들께서 역시 자기 형상으로서의 모든 피조물을(피조물의 특징은 자기 고유의 형상을 지녔다는 데에 있으므로) 창조하셨다는 이치로서는, 위의 표현이 어느 정도 진실에 근접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현령비현령"으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이 가능하다면 이미 그것은 언어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것이니 모름지기 말이나 글이라는 것은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가 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어야 바르고 제대로 된 표현이 나올 것인데, 그렇지 못하니 이런 표현에는 그 어떤 비중도 둘 가치가 없다. 오히려 이 3위1체 원리의 암시를 중국의 ‘음양 조화’ 사상 속에서 부분적으로 받았던 보어(Niels Bohr)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이 원리를 물리학에도 적용시켜 양자 역학의 핵심이 되는 ‘상보성(相補性)의 원리(Complementarity)’를 1927년 처음 세상에 알렸다. 이로써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때 보어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 역(易, 중국 주(周) 나라 때의 경서(經書)로서 천문, 지리, 인사(人事), 물상(物象)을 음양 변화의 원리에 따라 설명한 것)을 참고했다고 밝힌 것이다. 고로 보어의 상보성 원리의 또다른 이름이 3위1체의 원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아래 도식에서와 같이 갑(a)과 을(b)이 병(c)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이 3위1체 도식은 동시에 병으로 있던 갑이 을을 파생시킴으로써 현재 갑과 을로 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음이니, 그렇게 둘이면서도 옛 모습 그대로의 병을 유지 보전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즉 갑과 을은 대등하지 않고 주종, 대소, 인과(因果), 선후(先後) 관계에 있음을 보임이다. 상보성 원리는 이를 말하지 못하고 또 그 자체를 증명하지도 못한다. 객관적인 증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보어는 아인슈타인을 설득시키지 못한 것이다.


보어는 자기 코트 앞섶에 그의 상보성 원리의 심벌 마크를 달고 다녔다. "대립은 상호 보완(CONTRARIA SUNT COMPLEMENTA)"이라는 라틴어 구호 밑에 태극도(太極圖) 문양을 그려 넣는  등 직접 디자인한 것이었다. 자신의 과학적 업적과 덴마크 문화생활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 작위를 받게 되자 보어가 자기 귀족 가문의 문장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의 전체 삶과 학문을 상징하는 것이 이 상보성 원리라고 결론 내렸음이 분명하다.


위의 태극도 문양에서도, 그가 말한 대로 "대립은 상호 보완"이라는 의미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음과 양이 모두 자기 바탕에다 상대방의 색깔을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3위1체의 원리는 왜 "대립이 상호 보완"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갑과 을이 대립하면서도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것은 병과 더불어 이루고 있는 3각(tripod) 구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원래 하나에서 났으므로 본디의 하나로서의 본성을 그대로 갖추어 계속 하나로 머무는 것이 당연하고도 옳은 것이다.


왜 그러면 시방은 둘로 되어 있느냐, 하나보다 둘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이서 하나로 존속되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둘로 갈래가 져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이 하나가 되어 있음으로써, 둘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하나보다 더 풍성하다는 의미가 계속 살아 있게 되는 것. 노자(老子)가 제창한 도교(道敎)의 이 태극 문양이, ‘역학(易學)’에서 말하는 바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본체(本體)(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기 전의 세상 만물의 원시(原始) 상태)를 ‘음’과 ‘양’ 둘로써 반원 형태로 양분하여 나타내되 두 바탕 안에 서로 상대방 색깔의 점을 찍어, 서로 반대지만 조화의 씨앗을 함께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표현이라 할 것이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의 변(辯)을 들어보면 이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보어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자연 현상이나 인간사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지만, 이는 모순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이 둘을 함께 보지 않고는 진리를 논할 수 없다. 개인과 공동체의 이해는 일견 상반된 것이나, 이는 모순이 아니라 전체를 설명하는 부분적인 것일 뿐이니, 서로 대립하며 공존하는 가운데에서의 조화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균형 잡힌 접근 자세라 할 것이니, 자연 현상이나 인간의 사회 현상을 구성하는 원리는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철학자는 꽤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아도 실제 마땅히 알아야 할 원리에 대해서는 안다고 할 수 없고, 과학자는 제법 구체적인 것을 아는 듯 싶어도 근본적 원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과학자나 철학자는 이 상보성 원리에 관해 전반적으로 새로운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하리라"는 소견을 덧붙였다.


만물의 근본 이치와 사람 삶의 이치가 하나에서 나온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 '하나'가 인격적 존재일 수밖에 없음은(사람이 인격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불문가지(不問可知)인데도, 왜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지 유감천만이다. 이 창조자 하나님을 성경에서는 찾을 생각을 않고 무턱대고 다른 데에서만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인격적 존재가 물질을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물질은 인격적 존재를 파생시킬 수 없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을 일을 굳이 부정하려  드니, 오직 어린 아이들 같은 이들을 찾으시는 것이다(고전 1:21).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


양자 이론 즉 양자 역학(量子力學)은, 물리학에서 거시적(巨視的)인 물체에 대해 성립하는 고전 역학에 대하여, 에너지에 소량(素量)이 있다는 양자론을 따라 전자·원자·분자·광자(光子)·복사 등 미시적인 대상을 역학적으로 취급하는 학문으로서, 양자(量子, quantum)라 함은 그 이상으로는 더 나눌 수 없는 물질의 최소량의 단위를 말한다. 이것이 빛으로서 공간을 진행하는 경우가 광양자(光量子)다. "양자론"이라 할 때는 양자 역학은 물론이고 물리학만 아니라 화학·공학·생물학 등의 분야에서도 이를 기초로 하여 전개되는 모든 이론을 총칭한다.


미시적(微視的)인 것 즉 원자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동과 입자로서의 특성을 모두 기술해야 한다는 원리가 상보성 원리다. 아인슈타인은 빛은 입자(粒子, particle)라고 단정했는데, 보어는 "입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파동(波動, wave)도 아니고 둘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는데 그러나 그 둘의 성질을 동시에 관찰될 수는 없다" 하였다. 빛이나 전자(電子)는 실험 조건에 따라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입자처럼 행동하여 ‘파동’과 ‘입자’로서의 이중성(二重性, duality)을 지니기 때문이다.


고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성질 곧 파동의 측면과 입자의 측면을 동시에 관찰하기는 불가능하나 이 두 가지 측면을 합쳐 조화시키면 어느 한 가지 일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보다 더욱 완전한 설명과 이해가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즉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은 상호 배타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보완적인 측면들로서 비록 그 어느 한 쪽이든 언제나 다른 한 쪽을 배척하지만 이 둘은 모두 빛을 이해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존재라는 설명이다.

요약하면, ‘하나’의 사물은 서로가 매우 다른 ‘상호 배타적‘인 두 가지 특질을 통해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니, 겉보기에는 이런 표현은 매우 모순되고 비논리적이나 이 두 가지 상호 배타적인 성질을 ’하나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물을 좀 더 완벽하게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보어의 해석이다. 다름아닌 '3위1체의 원리'다. 보어가 말한 대로 '상호 배타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보완적인 이중성 또는 양면성으로서의 둘'을 3위1체의 원리로 정확히 풀이하면, 이 둘은 대등하지 않고 반드시 주종(主從), 대소(大小), 인과(因果), 선후 관계에 있으니 그 이유는 둘 중 큰 것(大, 主)이 작은 것(小, 從)을 파생(派生)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대칭(對稱 또는 相稱) 원리’와 ‘상보성 원리’와의 차이점이다. 상보적(相補的)이라 하면 상호 간의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나 전혀 그렇지 않음이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든 일방적인 것은 아니니 상호 교류 관계에서 ‘둘’이 ‘하나’로서의 의미를 지님이다. 따라서 빛으로 말하면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성질 사이에서 어느 것이 ‘주(대)’이고 어느 것이 ‘소(종)’이냐 할 때, 아인슈타인이 수년 간 보어와의 논쟁에서 빛이 입자임을 강조하였으므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아 ‘파동’이 ‘입자’에서 파생되었다고 가설을 세워도 좋을까.


아인슈타인이 빛은 입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음에 대하여 보어가 설명할 때,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둘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는데 그러나 그 둘의 성질을 동시에 관찰될 수는 없다"라고 막연히 말할 것이 아니라,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되 입자라고만 말해도 안되고 파동이라고만 말해도 안되는 것은 파동이라고 하면 입자이기도 한 때문이고 입자라고만 해도 안되는 것은 파동의 성질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고로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한꺼번에 ‘하나’로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빛이다" 하고 말했어야 제대로 된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기적으로 양전하를 띠고 있는 양자(전하가 없는 중성자와 더불어 원자핵을 이루어)와 음전하를 띠고 있는 전자(電子)가 원자(原子)를 구성함으로써 전기적으로 평형(양전하도 음전하도 아닌)을 유지하고 있음과 같은 이치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보어의 법칙은 자연 과학 특별히 물리학에서의 원리로 소개되고 있으나, 이는 ‘3위1체 원리’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한 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불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대칭 원리’가 그 확실한 설명이고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 둘이 그와 같이 대등한 듯하면서도 대등하지 않고 주종, 대소, 인과(因果), 선후 관계에 있는지라 그 근원적인 설명을 못하는 것이 상보성 원리로서, 결과론적으로 중국 철학(周易)을 원용(援用)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인과(因果) 관계에 대한 자체적 설명이 결여돼 있거나 부족하다는 점이다. 삼위 일체 법칙은 그와 같이 둘이 하나 되어 있는 또는 하나가 둘로서 구성이 되어 대칭 형태를 띠고 있는 그 원인을 풀어 주는 것이다.



.....................................................................................................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주시기를 구하라"(살후 3:1,2),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 4:3),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셔서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주시기를 구할 것이니"(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 and for me)(엡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