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수십억 중 단 하나라도 고통 당하면 수십억 모두가 고통당함ㅡ이것이 자유, 평등, 박애의 의미 (수정)

Tayseek Kwon 2019. 4. 1. 10:55







수십억 중 단 하나라도 고통 당하면 수십억 모두가 고통당함ㅡ이것이 자유, 평등, 박애의 의미 (수정)



창세기에 여자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  저주로 인함이라 되어 있고 남자 역시 이마에 땀 흘리며 수고를 해야 먹을 것이 생기고 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저주로 되어 있다. "그것이 무슨 저주냐, 당연히 그렇게 되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냐" 한다면, 바로 여기에 성경을 상식대로 읽지 않는다는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


당신이 성경을 읽는 자세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성경이 모순된 말을 하는 것인가 둘 중 하나다. 저주를 받는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이는 자연계 육체가 정상이 아니라 범죄함으로써 된 결과라고 얼른 머리에 들어와야 "상식"이 된다. 다시 말해 초자연계 몸이었다가 자연계 몸이 되니 밭을 갈아야 농사를 지어야 힘을 들여야 겨우 먹을 것이 생긴다.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에 있을 때는 그런 수고가 필요 없고 먹는 것조차도 살기 위해 먹는다기보다 식도락을 즐기기 위함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여자는 "너의 잉태하는 고통을 더할 것"이라고 우리말 번역이 되어 있으나 영계인 에덴낙원에서라면 고통이라 할 것도 없고(여자된 것이 무슨 하자가 있다기에 혼자 고통을 당한단 말인가) 자연계 육체가 되면서 고통이 있되 가중되리라는 말씀이시니 인간의 피부가 처음부터 자연계에 살도록 되어 있지 않고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으로 있도록 창조된 것과 같은 이치다. 


초자연계 몸으로 아무 고통 없이 자식 생산을 하게 되어 있는데 자연계 몸으로 하는 것은 처음부터(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지도 않았고 갑자기 당하게 되는 상황인즉 부자연스럽고 무리이고 따라서 극한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역 "multiply"나 우리말 번역 "크게 더한다"는 말은 번역자들이 자기 선입견을 따라 풀이한 것이다. 지음으로 그 고통이 더해졌다는 편견으로 번역한 것이다. Biblegateway에 따르면 54여개 번역본 중에 이렇게 번역한 데가 대부분이고 단지 CEB, CEV, ERV, HCSB, ICB, TCB, EXB, NABRE, NCV, NIV, NIVUK, NLT만이 위 구절을 "I will cause you to have much trouble"로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


그 중의 단 하나만이 [or increase your pain]이라 되어 있어 "여자가 비로소 해산의 고통을 크게 당한다"고 풀이하면서도 "크게 더한다"다고도 번역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정답은 "비로소 고통을 당한다"는 쪽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도 절대 다수가 반드시 "정의"는 아닌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원문을 본다고 잘 보는 것이 아니고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54 가지 번역본 중에 히브리어에 더 충실하다는 듯이 때때로 히브리 원어를 그대로 옮겨 놓는 번역본도 있으나 그 역시 여기서는 인간의 선입견을 따라 위에 열거한 12번역본에 들지도 않는다.


성경은 누구나(무학이든 학자든) 어느 시대(소위 문명이 발달하든 그렇지 않든)에서나 읽어도 다 알 수 있도록 일부러 쉬운 말 쉬운 단어로 씌어졌기 때문에 그러하다. 만인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그 만인 중에는 무학(無學)이 더 많은 실상이 아닌가. 필자는 우리말 표현이 주어 술어가 분명한 영어와는 달리(예를 들어 복수 단수 구별에서도 드러나듯) 조금 애매 모호한 구석이 있어 그래서 영어 번역본은 보아 왔고 그것으로써 만족하고 있다.


위 대목의 다음 하반절은 더욱 그런 편견에 의한 번역이 심하다. 즉 "여자의 욕구하는 바가 남자에게 있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린다"는 부분인데, 필자는 이런 번역본을 이제 처음 대할 뿐, 이미 그 전부터 4장 7절에서 영역을 보건대 이 3장 16절과 똑같은 표현이 되어 있으므로 그 의미가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뜻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순서대로 하면 남자가 선악과를 먹고 여자에게 주었어야 하는데(물론 그 행위 자체야 나쁘지만) 여자가 먼저 먹고 즉 남자와 의논도 하지 않고 먼저 결정하고는 남자에게 자기를 따라오라는 식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창조의 순서상 나중 난 자식이 어버이와 의논 않고 스스로 결정을 내린 후 어버이에게 자기를 따르라는 식이다. 하나님 친히 여자를 만드셔서 그렇지 아담에게서 그 닮은꼴로서의 여자인즉 부모자식뻘이다.


이렇게 여자가 남자를 휘어잡으려고 한다고 해석해야 전후 문맥이 들어맞아진다. 그러니까 위계 질서상 남자가 이를 허용할 리 없고 여자를 다스리려 하는 것이니, 참으로 죄의 결과란 것이 이런 것으로서 사랑이 아니고 화목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려 하고 선수를 치려 하는 험악한 살풍경이 되는 것. 남녀 부부가 좋을 때는 좋으나 돌아 누우면 남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부라는 것이 이런 관계로 전락해버린  것이 비극의 인류 역사다.


이런 것이 '상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식에  어긋나면 "성경이 모순된 말을 할 리 없다" 하고 "그렇다면 왜 이런 표현을 하고 있을까" 하고 좀 알려고 하는 "찾고 구하고 두드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피상적으로 피동적으로만 읽으려 하고 스스로 알려고는 아니하니 절대 두드리는 것이 될 수가 없고 두드리라는 명령에 어긋나니 진리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옳은 것을 수동적으로 대하여 받아들일 때는 좋으나 세상에 참된 것보다 거짓된 것이 더 넘쳐 나는데 반드시 참된 것만이 찾아올 리가 없다. 거짓된 것에 걸리기가 쉬운데 그 때는 완전 파멸로 끝난다.


그래서 그 54개 번역본을 살펴본 결과 오직 네 번역만이 바르게 풀이해놓고 있다. "you will desire to control your husband"라고 되어 있는 것이 NLT, NET이고 EXB는 "you will greatly desire" 해놓고도 괄호 안에 "the word implies a desire to control"이라 적고 있다. 그리고 VOICE는 보다 자신이 없어 "you will desire your husband" 해놓고 약하게 "but rather than a companion"이라 해두고 있다.


즉 '남성'만을 원하지 '동반자'로서는 아니다 하는 의미를 담아두고 있다. 나머지 번역은 거의 하나같이 우리말 번역처럼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당치도 않은 해석을 내세우고 있다. 왜 당치도 않으냐 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가인을 사모한다"는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4:7). 심지어는 여자가 그런 산고를 감수하면서도 남자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고도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올바른 번역을 한다고 해서 이상 2~4 번역이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그 번역자들은 다른 데에서는 또 틀리게 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대조하면서 참고 정도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


이렇게 저주 없이 잘 지내다가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니까 그렇게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선악과를 먹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모든 불행한 사태 속으로 함몰해 가고 있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되도록 만물을 창조하신 이의 선언적 판결(법 제정자의 법 집행)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도 각자가 이미 자기 운명을 결정한 연후에 내려지는 사후 추인의 성격이다.


때문에 고의성이 있는 범죄는 영원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악령들이 영원 멸망에 이미 처해 있는 까닭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과는 달리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자아중심으로 나간 그들의 고의성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눈이 띄어져 빛을 받은 후에 예컨대 형제 사랑이 없음과 같은 죄는 스스로 뉘우쳐 자백하면 용서가 있지만(요일 1:9),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도 "범죄하지 않았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아서"(:10)라고 요한은 단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의성에 가깝게 된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살인죄와 같기 때문이다(3:15). 이렇게 형제 사랑 유무로 국한시켜야, 같은 편지에서 요한 사도가 몇 번이나 강조한 "죄를 지을 수 없다", "죄 짓지 말라"는 말이 모순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우리가 죄 없다 하면"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죄 없다 하면 안된다"는 것과 "죄를 지을 수 없다, 죄를 짓지 말라"가 어찌 화합이 되는가.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형제 사랑 없음을 죄로 규정하고 거기에만 국한시켜야 말이 앞뒤가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이들 중에는 이와 같이 알지 못하고 (형제 사랑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일반적이었던 모양) 짓는 죄가 있고, 또 고의적으로 짓는 것이 있어 후자의 경우 요한은 용서되지 못함을 적시하여 그런 범죄자를 위한 기도는 무의미함을 가르친 것이다(요일 5:16,17).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요한 일서를 엉뚱하게 해석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를 다소간에 짓지 않는 이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해 왔으니 그 결말이 어찌 되겠는가. 신신학에 대립되는 보수 정통이라 자처하고 기도 응답도 많이 받아 자신의 경건성과 믿음을 선전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그 해독이 크다. 과거 아무리 능력을 많이 행하고 말씀 선포자 곧 선지자로 일했어도 오늘이 항상 문제이다(마 7:21,22).
 


학위를 앞세워 간판 삼는 사람치고(하나님의 사업에서) 실속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스스로가 그렇게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 이른바 "유식한" 사람들이 교회를 망친 장본인인 것이다. 12제자 중 학식을 내놓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오히려 교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이들 중에 사울(바울)이라는 사람 하나 정도가 나왔다. 그래서 스스로도 "나는 사도 중의 말자(末子)라 죄인의 괴수"라고 했다.


그런 바울도 교만해질 소지가 충분히 있었기에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시지 않으면 안되었다면, 그런 특수 상황이 아니면서도 소위 신학자 다시 말해 선지자처럼 행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다 할 수 있겠는가. 아는 것을 자랑만 하지 않으면 되는데 자랑을 하고 넘치는 생각을 하고 자신을 과대 평가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남보다 더 안다면서 자랑하는 그 지식은 교만하게 만드는(고전 8:1-3) 것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신학자이건 아니건 교역자든 평신도든 가리지 말고 첫째로 인식할 것은 이 세상의 정체다. 저주 받은 죽음의 장소, 그렇기 때문에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人子) 곧 인간은 머리 둘 데도 없다 하신 것이다. 죽음과 저주의 땅인데 들짐승이나 날짐승 따위의 서식처인데 어찌 초자연계 존재로 창조된 사람의 보금자리일 수 있으랴. 즉 "죽은 자"라고 간단히 한 마디로 정의해 버리신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 하시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죽은 자이니까 당연히 산 자가 되어 있는 우리는 이 죽은 자를 벗어나 산 자가 되는 '사는 도리'를 이웃(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에게 전달하는 일 외에 더 긴급을 요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먼저 할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먹고 기도자, 전도자가 될 수 없는 일이므로 선한 직업을 갖되 그 역시 내 잘 먹고 내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목적은 "가난한 사람 구제"(엡 4:28)다.


지금까지 남의 것 후려 먹다가 배운 것은 그 짓밖에 없는데 갑자기 노동을 하자니 식구 풀칠하기도 빠듯하지만 목적은 엄연히 "구제"이다.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이다. 내 식구 먹여 살리는 것도 그런 한 몸됨의 '평형', '평균' 차원에서 돌보는 일이지 내 식구라고 더 먹이고 더 잘 입히는 일은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즉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는 것이다.


사람 삶의 도리 곧 방법은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수십 억 인구 가운데 단 하나라도 고통 중에 있다면 그 나머지 절대 다수는 절대로 '고'와 반대인 '낙'을 즐길 수가 없다. 이것이 한 몸 체제이다. 그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기를 심판하여 이기실 때까지 하신다"(사 42:3/마 12:20) 하셨으니 이것이 공의(公義) 곧 사회 정의이다. 자아중심은 절대 다수라도 자기에게 거추장스러우면 파리 목숨보다 더 못하게 여겨 대량 살륙도 서슴지 않는 것과는 정반대다.


마지막 심판 이후에는 각자 자기 선택한 바를 따라 영원 운명이 정해졌으므로 생명의 길을 택하지 않은 이들은 더 이상 '한 몸 되기 위한' 또는 '한 몸'으로서의 범주에는 영원히 속하지 않는 까닭에 지금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한 몸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한 몸으로서의 체제 적용을 받아 그리스도 안의 의인들도 함께 고통 당하고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이 전체적인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롬 8:22).   


우리가 세상에 의인으로서 고난받는 것이 이 한 몸 체제의 가장 이상향적인 삶의 방식 때문이다. 내가 살리기로 목적하는 상대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인이니까 그 죽을 죄인된 자리에 그와 함께 되어 주는 한 몸으로서(지금은 한 몸이 아니지만 그것을 목표로 하고 접근하는 것이니까) 그 위치에 서 주고 그 부담을 나누어지는 것이므로, 세상에서의 죄인(사형수 그래서 사형수의 형틀인 십자가를 메고 그러한 발자취를 남기신 주님을 따르라 하신 것)처럼 되어, 사람 행세 못하고 온갖 궂은 대접 다 수용하도록 자취하도록 기쁨으로 보람차게 하도록 되어 있는 것.



이를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 성경은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터이므로, '양면성의 동시성'으로 움직이는 것이기에, 한눈팔지 말고 오직 이 가치 있는 일 곧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바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 즉 사람 구원하는 일 다시 말해 기도와 전도에만 오로지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눅 9:57-62).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행동은 그 어느 곳에서도 쓸모가 없다.


해당구절의 biblegate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