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베드로와 바울도 성경을 참으로 부지런히 읽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

Tayseek Kwon 2019. 4. 1. 10:52





베드로와 바울도 성경을 참으로 부지런히 읽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 




죽음에서 온 저주, 저주에서 온 죽음. 모든 인간의 마음 눈을 어둡게 만드는(고후 4:4) 세상에 태어냤지만, 진리의 빛이 비쳐짐으로 인해 "눈을 뜨게"(행 26:18)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죽음과 저주의 실상을 아는데 있고, 그래야 "어찌 할꼬"(행 2:37/16:30)가 되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목 마름"(계 21:6), "병들어 의사를 찾음"(눅 5:31), 죽음의 절규(요 3:14)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나님께 듣고 배움"(요 6:45)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직하게 그리스도를 떠나거나(믿지 않거나) 그렇지 않고 자기를 속이는 경우이니 구원도 모르면서 구원 받은 줄로 알고 구원 받은 자로 한평생 자처하다가 심판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상을 알게 되나 때는 늦다.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잠꼬대만 하면서 사탄의 교활한 수작에 넘어가게 된다. 세상에서 멋모르고(저주와 죽음의 세상인 줄 모르고) 살고자 하는 마음만 앞서기 때문에 자아중심을 합리화하는 교리를 만들어 스스로 믿기도 하고 퍼뜨리는 것이니 바울이 말한 바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의 사욕(私慾)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름"(딤후 4:3)이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게 될 때 그릇된 길로 나아가는 것이니, 아담도 여자도(당시는 여자의 이름이 지어지지 않고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하게 지냈을 때다) 먹지 말라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고 믿고 있으면 되는데도, 혹시 이럴 수도 있다,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끝에 저질러진 일이 바로 이런 것이 사람을 잡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도 있다는 당치도 않은 생각을 집어 넣어 준 것이 사탄이지만 듣는 당사자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런 성향을 경고하여 계시록에 "이 모든 말씀에서 빼거나 보태거나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하였으니 말씀 앞에 떠는 자가 되어야 미띵힘이다(에스라 9:4). 하나님의 눈길은 그 말씀 앞에 떠는 자에게 주신다(사 66:2).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앞에 떠는 자에게 임하신다(66:5).


그리고 사람은 항상 변할 수 있는 소지를 누구나 가지고 있기에(이것이 자유 의지의 양면성 즉 장단점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임과 동시, 이렇게 변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할 것은 아니니, 당시에 그가 한 일이 옳다고 해서 지금도 여전히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그 때 그르다고 해서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고 선입관을 가지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


언제든 회개하면 얼마든지 용서를 받고 새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참작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항상 오늘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야 하는 것이다. 능력도 행하는 말씀 선포자였으나(마 7:21)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월을 따라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음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어린 아이(같은 사람)에게만 나타내심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 대로,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공고히 하는 것이 지혜요 더 새로운 것이 필요치 않은 것은 요한의 말대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함"(요일 2:27)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곧 성령의 가르치심이다.


여기서 더 새로운 무엇을 알려고 하면 아담 부부와 같이 엉뚱한 짓으로 말려들 수 있으니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여 이것만 실천하여 행하고 이 원칙으로 사는 것 이상으로 안전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한 몸의 구조로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 사는 법이 없는 것.


불교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고 세상 그 어느 종교도 그렇게 가르친 바가 없으니 그렇게 가르치면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므로 지금까지 사탄이 무신론을 퍼뜨린 대로 사탄이 원하지 않았던 바로서 이는 당연한 얘기가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밝히는 성경이니 이 이상으로 관심을 둘 여지가 없음을 확정하여 그대로 좌고우면 없이 매진할 일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으로 기도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일일진대(롬 8:26) 우리야 더 말할 필요도 없으니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힘쓰라"는 것. 전능자이신데 힘 안들이시고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이라 우리는 생각하는데도 아들께서 아버지께 그렇게 신음하시는 중 기도하신다는 것이니 우리 모두 이를 마음 깊이 아로새길 일인 것이다.


"힘쓰라'는 경고가 성경에 많다. 교회적으로는 가난한 자 생각하는 것을 힘쓰고(갈 2:10),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기를 힘쓰고(엡 4:3), 베드로는 "더욱 힘써"라는 말로 사도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한 것이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은 것이다(잊게 되는 것).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할 것이요 이같이 하면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는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로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알기 때문이라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한다"(벧후 1:5-15) 하였다.


그렇게 하면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했으니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이상과 같은 힘씀인 것이요 그 자신도 이렇게 교회를 일깨우는 것을 항상 힘쓴다 했으니 힘쓰지 않고서 되는 일이 없는 것. 구원의 일만은 힘쓰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배운 이들은 그 생각을 이 성경의 경고 앞에서 말끔히 걷어낼 때가 된 것이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스스로 굳게 한다 했으니 택하심의 정확한 의미를 말함이니, 즉 택하심은 그렇게 더욱 힘쓰는 자임을 미리 아시고 선택하심이다. 스스로 힘쓰고 더욱 힘쓰지 않는 자는 처음부터 택하시지 않음을  우리 골수에 아로새길 일이다. 유다는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말로 격려할 필요를 느껴 편지한다고 했다(유 1:3).


우리가 진리를 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베드로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여러분이 알고 있지만 생각나게 하려 한다"는 동일한 취지의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 스스로를 세뇌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알고 있지만 또 다시 다지기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눅 13:24)이라 하셨다. 다름아니라 세상 사랑 때문이다. 그리고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초대교회는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고(행 2:42/롬 12:12/엡 6:18/골 4:2) 모이기를 힘썼다. 일정한 날이 아니라 매일 모이기를 힘쓴 것이다(행 2;46/히 3:13/10:25). 우리라고 사정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되어 있는 절박한 실정이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고"(롬 14:19),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전 15:58/고전 16:10/빌 4:3)고 독려하고 있다. 베드로만 아니라 바울 역시 예외일 수 없어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고 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했다. "말씀을 전파하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했다. 이를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1)는 말로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딛 3:8)고 하며,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했고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했다(:8).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고 했다.


요사이는 스마트폰 앱으로 성구 사전을 겸하여 성경을 정독할 수 있으니 일목 요연하게 성경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수시로 살펴볼 수 있다. 편리한 세상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언성(각 시대에 주는) 경고로 말한 바, "임박한 환난을 대비하기를"(고전 7:26) 힘쓰는 차원이다.


앞에서 성령 친히 우리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하신다는 대목과 같이, 원리원칙의 하나님이시니 그냥 구원하시면 되는데도 굳이 사람이 되시어 죽음의 고난을 자취하심으로써 구원하심이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정하시고 친히 실천해 본을 보이셨으니 엄정한 법칙과 원리를 따라 만물을 정하셨으므로, 여기에 한 점의 거짓이나 꾸밈이나 속임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성경의 진실성을 제 1로 입증하는 것이건만 세상이 눈이 어두우니 제대로 이해가 될 리가 없다. 이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적 그리스도는 이로써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몸으로서의 고난 받음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 부인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이 거짓됨과 속임수의 제1의 특징으로 꼽히는 것이다.


그냥 얼렁뚱땅 영생하는 것으로 말하고 초자연계 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속인다. 말이야 비단 같이 누군들 못하랴. 속아 넘어가는 자들만 바보일 뿐이다. 오늘날까지의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특징으로 얼룩져 온 것이다. 도무지 힘씀이 없고 힘쓰라 하면 비상 같이 여긴다. 얼마나 진리, 진실에서 떠나 있는지!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날까지도 구소련 치하의 지하교회, 중국의 지하교회, 그리고 북한의 지하교회로써 교회 명맥을 훌륭히 유지 보전되게 하셨으니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3위1체 원리라든가 3운법칙이라든가 하는 모든 것이 이들 형제자매들의 흘린 피 값으로 쟁취된 값비싼 대가 지불의 결과인 줄 아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 사실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우리도 동일하게 순절할 각오로 임할 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질식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그런 고난 받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할 줄 모르는 거의 빈사 상태의 자유 세계의 이른바 "교회"들인 것이다. 거의 전멸 상태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오직 고난 받는 살아 있는 이들 교회로 말미암이 기사회생하는 기틀로 삼아주신 은혜에 우리는 마땅히 감사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시다.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가와 예루살렘 사이를 왕복하시던 사람 예수님이시다. 빌립보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알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실감하지 못함인가. 실상을 말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은 나와 함께 일하시고 나와 함께 이 시간 현재 이 자리에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떠 나의 주인님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아니 함께 있지 않더라도 그 이름 석자를 함부로 입에 내는가. 걸핏하면 예수, 예수 아이 이름 부르듯 한다. 그런 것이 서구식이라면 당연히 그것은 타기해야 한다.


신약 성경 사도들 서신에 보면 깍듯이 거의 주님이라는 호칭,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붙이지, 그냥 부르는 법이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라 한 것은 역사적 기술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반드시 종이 그 주인을 호칭하듯이 한 것이다.


불교인은 부처님이라고 깎듯이 위하기 때문에 세상도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불러준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예수", "예수가 어떻고", "예수를 믿으라", 도대체 누구를 누구라고 부르는 것인가. 예수"라 하는 것도 무엇 해 "아기 예수"라고까지 하는 판이니 이 하나만 보아도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경칭 비칭 존대말 하대말이 발달한 언어문화의 나라인 한국이다. "예수", "예수"... 그 흔한 "님"자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붙이지 못하는가.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