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진리/삶ㅡ사람 사랑

실생활에서 이성과 본능의 구별도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Tayseek Kwon 2019. 4. 1. 10:46






실생활에서 이성과 본능의 구별도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영이 생명이고 육은 무익하다"(요 3:6/6:63)  하셨으니까 처음부터 사람은 육으로 나고 영으로 나게 되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완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셨다(쉬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모든 창조의 일을 완결하셨으니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한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육으로 났고 다시 영으로 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도 마저 이루실 일이지 창조의 일을 모두 끝내시고 쉬셨다 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 창조, 재 출생을 구속, 속량이라 합니다. 구속(救贖)은 도로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찾아도 대가를 지불하고 찾는 것이니 다시 말해 속전을 지불하고 도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잃어버리신 것인데 도로 찾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소유하셨는데 이제는 소유하시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회복하심인데 왜 처음 소유를 상실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소유는 모두 생명인데 생명 아닌 죽음으로 돌변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니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잘못 만드셔서 그렇게 죽음으로 돌변한 것일까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이 자유 의지가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한 특징입니다) 이 인간의 자주 독립성은 하나님도 손을 못대십니다. 영물(천사 즉 초자연계의 "짐승들"-창 2:19)들에게 이런 자유 의지가 있는 것도 인간을 위해 만드신 것이므로 인간과 대등한 위치에서 인간(아담)을 보좌하도록 만드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자연계의 현상처럼 사람과 동물의 구분이어야지 영물이라 해서 사람의 형상일 수는 없고 자연계 동물의 형상을 취하되 초자연계에 알맞게 즉 뱀이면 용으로 지으신 그 차이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이 형상만은 인간 고유의 것으로서 다른 피조물이 모방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유 의지로써 범죄하면 그 범죄의 대가를 스스로 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어서 영물들은 고의적으로 범죄한 것이었고 그래서 영원한 멸망에 처해진 것이고, 인간은 모든 필요한 지식을 영물들의 도움을 입어 얻는 위치이므로 고범죄(故犯罪)가 성립이 안되어 구원 다시 말해 구속의 기회가 주어진 것뿐입니다.


일단 구속됨으로써 영물들과 같은 모든 생명의 진리 다시 말해 머리와 몸의 하나됨의 이치를 알고도 범죄하면 그 때는 인간 역시 고범죄가 되므로(애초의 영물들처럼) 다시는 용서가 없으므로 요한 사도는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 한 것입니다(요일 5:16). 이렇게 이제는 엄중하게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가 적용되고 처단되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일껏 구원을 받아 놓고서는 자기의 불찰로 그것을 일절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이 고범죄 즉 "짐짓 범하는"(히 10:26) 죄입니다. 영물이나 아담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선물인 자기 생명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스스로 결딴 내어버린 상황과 같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고범죄를 지은 것이고 그래서 교회가 "크게 두려워했다"(행 5:11)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가 인간의 자주 독립성이 억제되기 때문이라고 구차한 핑계를 대지만, 믿지 않음으로 재앙을 자초하게 되어 있는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우신 것이 그 증거 즉 인간의 자유를 절대로 손대시지 못함을 역력히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잃어 버리신 것을 도로 찾아 회복하시는 일도 인간 스스로가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어서 먼저 "회개하라"는 명령부터 주신 것입니다.


이 머리의 지시를 어기는 그 누구도 그 몸의 지체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이 명예로운 회복이 되지 않고 죽은 자로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아담) 스스로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됨으로써 머리가 없는 몸처럼 되고 영혼 없는 육체로만 남아 있는 현재 죽은 자로서의 모든 인간의 실상입니다. 머리를 다시 얻고 영혼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산 자 됨입니다. 영혼은 원래 아담의 경우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초자연계(영계)의 몸이 되게 하는 절대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고로 초자연계 몸이 되지 못하여 영생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을 가리켜 영혼 상실이라 하고 그래서 아무리 인간이 자연계 동물과 달라 영혼이 있다 하더라도 아담이 애초 자연계 육체로 창조되어 영생하는 존재로는 채 되지 못했던 상태와 똑같아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성령)으로 나는 것은 영이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라 번역하기보다 아담의 과정 즉 창조 순서를 다시 밟는다는 의미에서 그냥 "영"으로 난다고 해야 제대로 되는 번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게 되고 우리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다가 즉 '머리'를 떠나고 '영혼'을 잃었다가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온 것입니다(벧전 2:25).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있으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존재 즉 새 피조물이 되므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시는(롬 8:26) 상황에서 우리 자신이야 당연히 우리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나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은 영원히 있을 수 없으므로 그 대신 믿는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의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이 할 때 내 형제들은 나를 위해 기도할 것이므로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함보다 형제들의 숫자만큼이나 배가된 기도를 받게 된다는 그 이치입니다.


이런 것이 여럿이 하나로서 움직이고 행복하게 사는 뿌리로서의 공동체 의식입니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이렇게 머리(하나님) 없이 몸의 지체들만 모여 그런 이상주의를 실현하자는 헛된 꿈의 물거품으로만 돌아간 시행착오입니다. 스스로 사랑 가운데에서 하나님이신 머리를 모시면 그 이상 바랄 것 없이 순환되어 돌아갈 일을 가지고, 교만하여 하나님은 없이 단지 성경에 기록된 그런 공동체 생활만 모방하여 껍데기만 보고 정작 알맹이는 놓친 채 법석을 대니 그것이 옳게 돌아갈 리 만무합니다.


버트란드 러셀 같은 지성인도 그런 머리 없는 몸만의 하나님 없는 꿈만 꾸는 이상주의 망상에 젖어 있었기에 공산 혁명이 성공하자 환호하며 달려갔지만 실제 달려가 보니 자아중심이 여전한 채로의 시행 착오만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는 카알 붓세의 환멸의 눈물만 글썽인 채로 힘 없이 돌아온 것입니다. 지금도 멋모르는 이들은 저 산 너머 더 멀리에 이상향이 있다고 꿈 꾸는 헛소리만 지르지만 "고아"(요 14:18)가 부모 품에 돌아오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안기지 않고는 영원히 그런 이상향은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죽음밖에 없는 것이니, 즉시 돌아오지 세상 사랑에 매여 주저주저하다가는 반드시 인간의 원수 악마에게 역이용 당해 저 산 너머 멀리 행복이 있다는 적 그리스도의 소리만 듣게 되어 남 따라 나도 가다가 함께 영원 멸망의 벼랑길로 곤두박질치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게 됩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망설이는 유일한 이유로서 적합한 예화가 있는데 그것은 아프리카 토인들이 원숭이 잡는 방법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이 원숭이를 잡는 확실한 방법은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아가리가 있는 항아리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것을 잔뜩 넣어두고 기다리고 있으면 그 원숭이는 한껏 움켜쥔 손으로 아가리 밖으로 나오자니 나올 리 없어 버둥거릴 때 덮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까이 오는 인기척이 나도 원숭이는 차마 그 욕심이 가득한 손을 탁 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꼭 이와 같습니다. 짐승과 하나도 나을 바가 없습니다.


세상을 한껏 움켜잡은 손을 탁 놓지 못하는 인간 "원숭이"들이 얼마나 많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눅 13:24)이라 하셨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도 세상 사랑이요, 소위 믿는다고 하는 이들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들도 세상 사랑에 취해 있는 오늘날입니다. 때 늦기 전에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 하셨습니다. "잡혀 죽기 위해 난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이 되지 않기 위해 "힘쓰라"는 뜻입니다. 때 늦어 슬피 울며 이를 갈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원숭이의 습성이 아니라 인간의 이러한 습성을 잘 아는 사탄이 처음부터 자신 만만했고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이런 일에 관록이 붙은 자입니다. 성공했던 자입니다. 여자는 선악과 나무를 볼 때 세상을 본 것입니다. 세상의 특성이 "육신의 정욕①, 안목의 정욕②, 이생의 자랑③"(요일 2:16)인 그대로 여자는 먹음 직함과①, 봄 직함과②, 지혜 있게 할 만큼 탐스러움③을 본 것입니다(창 3;6).


원숭이는, 손을 탁 놓으면 당장은 아깝고 아쉽지만 목숨부터 건지고 난 다음에 이런 아쉬웠던 것을 만회할 수 있다는 그런 이성적 판단이 없고 오직 본능으로만 움직입니다. 여기에 이성과 본능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 떵떵거리고 활개치며 살지 못사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렇게 살면 전부를 잃게 되고 이 아쉬움을 버리고 영원한 초자연계 몸으로서의 삶으로써 이 모든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다는 이런 정도의 이성 발휘도 못하는 인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즉 값진 보석을 발견하고 자기 전 재산을 다 들여 매입하는 그런 이해 타산도 제대로 못하는 이가 예상 외로 많은 것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장 눈 앞의 이익, 욕심에만 매몰되어 정신을 못차리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일 뿐 무슨 불가항력도 아닙니다. 오직 본인의 어리석음일 뿐이지 누구 탓도 아닙니다. 오직 내 탓입니다. 두려워하고 떨지 않은 탓, 경고를 무시하고 오만 방자하게 나가는 탓입니다. 이런 사람이 망하면 누구도 그를 불쌍하게 여기고 동정하는 자가 없게 됩니다. 오직 혼자 당하는 철저한 고독만이 남게 됩니다. 어찌하여 이런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을 자취할 것입니까.











또 다른 3위1체 원리의 심볼 또는 로고이다. 주종, 대소, 인과  관계를 표현하는데 업고 안은 것을 나타낸 모습으로서 이 "업고 안은 것"이라 한 것은 노자가 그의 도덕경 12장에서 한 말이다. 노자의 표현은 갑이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었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양은 안고 있고 음은 업고 있다는 뜻으로서(萬物負而抱陽) 의미는 비슷하다 할 수 있으나 전자는  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후자는 그냥 양은 크고 음은 작은 것으로만 말하나 전자는 그렇게 된 원인을  밝힘이니 즉 갑(양)이 을(음)을 낳았다, 파생시켰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인과 관게를 말함이므로 세상은 창조주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반면 노자의 사상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다. 큰 자는 작은 자를 안고 있고(엄마가 아기 안듯) 작은 자는 큰 자를 업고 있으니(연로하신 어버이를 자식이 업어드리듯) 이렇게 한 덩치가 되어 있는 모습을 가리켜 어버이라고도 못하고 자식이라고도 못한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 음양조화의 이원론이나 혹은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의 차이점은 3위1체 원리는 갑과 을은 파생시키고 파생되어 나온 관계를 명시한다는 데에 있으니 인과율이 이로써 하나의 법칙으로서 최종 정립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됨이다.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이 된 나는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하나되시어 내 안에 계시므로 즉 아버지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내 안에 사시므로ㅡ이 관계를 요한은 "하나님의 씨"로 표현하고 있다-요일 3:9) 것이다. 이상 그림과 같이 나는 마지막 아담과 둘이 하나됨으로써 불가분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나 없이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실 수 없고 그리스도 없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가. 그리스도를 보라, 바로 내 모습이시다. 나를 보라,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갈 2:20). 그래서 나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니(롬 14:7/고후 5:15)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다"(빌 1:21). 때문에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하는 것"(고전 10:31)이다. 이 말씀을 허수히 들을 일이 아니니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기 자신을 그와 같이 부정함이 되는 까닭이다. 왜냐면 주님 친히 제2의 나 자신이 되어 계심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주님'을 살고 주님은 '나'를 사시니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 바로 그 관계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키는"(고후 10:5) 일상생활이다. 즉 "생각 자체를 미워함이니",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시 119:113" 했기 때문이다. 영역(KJV)에서의 "vain"은 번역자가 끼워 넣은 것일 뿐 원문에는 그런 말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일체의 생각을 미워함이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As he thinks, so is he"(잠 23:7)라고 한 그대로다. 그래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잠 4:23) 한 것이다.

둘이 하나됨이 갑은 을을 보고 을은 갑을 봄으로써 서로 상대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이 그런 하나됨의 삶이 골격이라 했거니와 우리가 성령을 모심을 가리켜 성경은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 했는데 이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시 16:8)를 인용한 것이다. 전자는 주님이 나를 위하시는 모습이 되어 있고 후자는 내가 주님을 위하는 모습이 되어 있는데 위의 이치대로 하면 같은 뜻이다. 즉 갑으로 말하면 을을 안은 것이요 을로 말하면 갑을 업은 것이다. 

갑을 기준하면 을을 위함이요 을을 기준하면 갑을 위함이다. 이것을 양면성의 동시성이라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 구원받음이니(요 20:21,22) 나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온 사명 받은 자의 위치이요 상태다.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으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일하려고 세상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후  6:1)고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즉 생각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일 일이지 이 세상 살려고  하면 부적격자로 탈락된다.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주님께서 이 세상 살려고 하셨던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심으로써 이 점에서는 우리가 주님이나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부적격자로 탈락되는 사례로 말하면, 주님께서 미리 경고하시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로 일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니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밝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마 7:22,23) 하심으로써 분명히 하신 바다. 


그들은 모두 자타 공인으로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하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것은 과거이고 현재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치  않은 것"(:21)이다. 시종일관해야지 과거에 사는 이들이 많은 것이 언제나 비극적 현실이 되어 있다. 믿음의 요체는 사랑이요 사랑은 항상 오늘에 있지 과거에 있지도 않고 미래에도 있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오늘에 살지 않고 과거에 사는 이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늦기 전에 경고를 받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