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법칙/3운법칙

3운법칙의 구조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3과 7의 숫자는 뿌리 깊은 영원 불변의 것

Tayseek Kwon 2019. 4. 1. 07:13




3운법칙의 구조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3과 7의 숫자는 뿌리 깊은 영원 불변의 것 (1)







그러므로 창조도 6일 동안 일하시고 제7일에 쉬셨고(안식) 그리스도께서 3일만에 부활하신것이라든지 그리고 대칭을 나타내는 2라든가, 또한 만법귀일(萬法歸一)을 나타내는 1. 모두 1始(시)2元(원)3位(위)1體(체) 법칙(간단히 3위1체의 법칙)으로 요약된다 할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도 양쪽으로 가지가 7개씩이다. 아래에는 특별히 2가지가 쌍을 이루어 역시 좌우 대칭을 이루어 있다. 제사장인지 사르곤 왕 자신인지 옆에 서 있는 인물도 손에 하나로 된 가지의 세 열매인지 무엇인지를 들고 있다. 3과 7을 "신성수(神聖數)"라 부를 만도 다다. 


대칭으로써 하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3위1체"이다. 하나를 이루고 있지 않다면 그냥 양자로써 끝날 뿐이지 그것이 3이 될 수 없고 더군나 1은 더더욱 될 수 없는 것. 둘이되 처음 하나에서 나머지 하나가 파생됨으로써 같은 본질의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로서 존재하고 또한 움직이되 둘이(양편이) 함께 동시에 움직이니까 대칭을 이룬 둘과는 별개처럼 인식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다 제3의 "位"격을 부여하여 이를 가리켜 "3위(位)라 하는 것. 즉 3'위'는 둘로써 따로 따로 존재하거나 활동하지 않고 대칭(인과, 주종, 대소, 선후의 母子 관계)을 이루어 하나로써 존재하고 활동하는 경우에만 쓸 수 있는 용어다.


3위1체 원리의 도식(圖式)을 잘 나타내고 있는 3운법칙의 구조에서 '병'을 가리키는 FS(Four-Sevenths, 4/7, 아브라함을 대표로 하는 아브라함 유형 생애의 LP 즉 활동기간)에서도 3과 4로 배열이 되어 있다. 즉 3/7이 DP 곧 생애의 비활동기(또는 침체기)이고 나머지가 4/7인데 이 4는 대칭을 상징하는 2의 배수. 3/7으로 정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4/7 즉 4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또 OT(One Third, 1/3. 모세가 대표형 생애이어서 "모세형"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나 몇 분의 몇인가 기억하기 좋도록 영어 머릿글자를 따 와 이름을 지은 것, 역시 모세형 생애의 LP 즉 활동기를 대표적으로 가리킴), SN(Seven-Nineteenths, 7/19, 노아형 생애의 LP)에서 LP, DP가 대칭형으로 되어 있다. FS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OT, SN이 상호 대칭 관계임을 훌륭히 상징하고 있다. 대칭 관계로써 당연히 그 성질이 정반대가 되는 것을 역시 나타내어 3등분(OT)과 19등분(SN)은 상호 도치(倒置, inversion, reversion)되고 있어 19라는 수치가 그래서 탄생된 것.


수치로써 이상의 내용을 가장 완벽하게 나타내기로는 이 외에는 있을 수 없는 아주 절묘한 구성인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에서 짝을 이룬 두 미립자가 하나는 "down spin", 다른 하나는 "up spin"이 되는 현상도 이와 똑같이 아주 보란듯이 회화(繪畵)적이다. 대칭성의 "도치성"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하거나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며칠 전 누가 읽어보라고 주기에 100쪽 짜리 "환단고기" 완역본의 가이드북이라는 책자를 들쳐보니 흥미 있는 데가 있어 소개하는데, 우리 배달 겨레의 뿌리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는 의미로 기술되어 있는 중에 그 중심 사상으로서 "신교(神敎)"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바, 여기에 執一含三(집일함삼), 會三歸一(회삼귀일)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 제42장의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는 문구가 이를 토대로 하여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노자는 이 문구만 무뚝뚝하게 적고 나서는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아무 토도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창조자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설명하며 하나님과 관련시켜 3과 7을 말하는 데에 주목하면서 필자는 아담→에녹→노아→아브라함→모세 대략 이런 줄거리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통(法統)"을 생각해보았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부지런히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이들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주시므로 굳이 법통이라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순종의 선조들이 가르쳐 온 바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보지 않은 채 산 자로서 하나님이 데려 가심을 입은 에녹과 대비되는 아담의 죽음은 거의 동시대에 일어남으로써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려 하신 것이다. 즉 의인(에녹)과 죄인(아담으로 대표되는)의 서로 다른 생의 결과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처럼 에녹을 의인의 표상으로 삼아 그 생애의 종국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보이신 것이다.


이 얼마 후(불과 몇 십년)에 노아가 태어났으니 아담의 죽음과 에녹의 불멸(不滅)을 노아는 깊이 명상하기 시작했음에(에서와 대조되는 야곱처럼) 틀림 없다. 그리고 노아는 세 아들에게 가르쳤고 이 세 아들이 현재 인류의 조상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능지수가 제일 높다는 한민족의 조상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이 가르침을 명심한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개중에는 아브라함이나 욥 등이 있었음을 성경을 밝히고 있다. 아담은 초자연계 몸으로서 하나님과 직접 대화했고 따라서 하나님께 관한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후손들에게 전달해 준 여러가지 중 하나가 "3"과 "7"의 숫자인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환단고기에 나타난 대로의 성경과 유사한 유일신관을 지속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동쪽으로 말달려 왔다는 것도 아담의 가르침을 받아 "에덴의 동쪽"을 염두에 두어 동쪽에 대한 친근감을 가진 것이 그 동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에덴과 같은 이상향이 동쪽에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막연히 그런 동경심에서 동으로 민족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노아가 아직 생존하면서 인생들을 교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대 후손들이 곁 길로 나가 악령들의 선동에 놀아나 악령들을 섬기고 있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바울 사도가 "너희가 신속히 이와 같이 바른 길을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긴다"고 탄식한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이 정도나마 지속해 왔다는 것이니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이전에는 그런저런 여러가지 가르침이 용납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정확히 밝히시고 가르치신 이상 여전히 그런 미숙한 과거의 "깨침"에 연연한다는 것은 악령들의 속임수에 말려드는 것밖에 더 의미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하시던 이스라엘 민족도 "음녀, 음부"처럼 하나님을 떠나는 판인데 이런 악령들의 책동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고로 올바른 역사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작 문제는 각 개인의 구원이므로 그런 환단고기 같은 것에 붙들려 있을 때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올 일이다.




 3운법칙의 구조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3과 7의 숫자는 뿌리 깊은 영원 불변의 것


환단고기(桓檀古記)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역사서를 앞세워 정신문화를 표방한 특정 종교의 부흥을 꾀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神敎(신교)라는 종교다. 만약 이 "작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면 적 그리스도의 발판이 되지 않을까. 적 그리스도가 이 "神敎"에 편승하여 정통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이론적인 바탕을 세워 나갈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유일신 사상에다 성경의 하나님과 유사하게 맥을 짚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이 에녹 및 노아로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것으로서 우리 배달 민족이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여 그 믿음을 지켜 온 것이라는 소견을 피력했지만, 그런 유일신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세상에 오신 후로도 계속 명맥을 유지해 간다면 그 때는 문제가 완전히 다르다.


그리 되면 곧바로 적 그리스도가 애용하는 도구일 수밖에 없다. 사탄 스스로 하나님으로 가장하려 드는 시점이 바로 이 적 그리스도의 시대이기 때문. 이미 그 시대가 당도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사탄이 이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을 방불하게 하는 존재로 자신을 부각시켜 전체 인류를 속일 작정이 분명할진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는 필자가 보기에 이 神敎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오시기 전 인생들에 대한 사전 교육 차원에서 노아 이후의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표준 삼으신 이상 그 나머지는 예외없이 모두 사탄의 관할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로서 그 예로 이 "神敎"를 신봉하던 이들 역시 용과 봉황(鳳凰, 민속 상상 동물)을 숭상했다는 증거가 고대 유적 발굴로 입증되고 있음이다. 봉황에 대해서는 성경상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아무런 정보가 없으므로 예외이나, 용과 관련되면 용을 신성시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는 사탄과 직접 연관 지을 수밖에 없는 것.


봉황이란 것도 사탄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즉 에덴낙원의 "뱀" 곧 용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지어내어 인생들에게 퍼뜨린 결과물이라고 개인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즉 용만을 영특한 상상의 동물이라고 둘러대기보다는 같은 또래의 비슷한 것을 더 만들어 마치 그런 것이 처음부터 있어 온 양으로 속이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흉측한 상판의 마귀란 것도 처음부터 그런 것이 있는 양 그렇게 자신을 변장하여 악령들이 인간을 상대로 연극을 꾸민 것과 같은 속임수.


"전설에 따르면 봉황새는 매우 아름다운데, 의 목, 물고기의 꼬리, 의 무늬, 호랑이의 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했으니 용이 자기와 유사한 것으로 변장하여 특정인에게 나타나 세상에다 퍼뜨리게 했을 것이다. 지금도 UFO "우주선"에 사람들을 납치해 데려다가 별의별 것을 보여주고 선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필자가 神敎를 특별한 것으로 보는 까닭은 성경의 하나님과 극히 유사하게 그들이 유일신으로 위하는 "상제(上帝)"를 설명하기 때문이라 했지만, 이 상제를 "三神"상제라고도 한다는데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주 만유가 생성되는 근원을 일신(一神)이라 하는데 곧 각 종교에서 말하는 조물주, 도(道), 하나님으로서, 일신이 실제 인간의 역사 속에 작용을 할 때는 언제나 삼신(三神)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신이지만 실제로 인간과 관련되어 나타날 때에는 삼신이라는 것.


"삼신일체(三神一體, '단군세기'에 나오는) 논리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사상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하나(환단고기가 위작僞作이라는) 삼신일체는 삼신일체상제를 설명하는 말로서, 삼신일체상제는 "얼굴 없는 무형의 하나님인 조물주 삼신과 한 몸이 되어 직접 우주 만유를 낳고 다스리는 유형의 인격적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位格)으로 계신다'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다.


들어보니 본질적으로 다를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라는 성경의 표현에 근접하게 유형과 무형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 색다르다 하겠다. 실체이신 아버지께서는 "무형"에 해당된다 하겠고 그 형상이신 아들께서는 "말씀"으로 표현되시니 "유형"이 되겠다. 이상 내용의 해설자 말마따나 기독교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나 세 위격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으로써 "3위1체"를 해석해 왔다. 이제는 3위1체 법칙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께서 계시되 따로 존재하시거나 움직이시지 않고 반드시 하나로서(둘이 하나됨의 사랑) 움직이시며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하나님께 대해서는 이 神敎의 설명이나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자들이나 차이는 없다.


관점의 핵심은 신학자는 성경상으로 나타난 사실을 근거로 "3위1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일신이 삼신으로 표현되고 작용된다고 하는 神敎의 주장은 성경에 대한 것은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옛부터 내려오면서 적어 나온 그대로의 신관(神觀)이라는데 있다. 그래서 이 환단고기에 나타난 대로의 우리 선조들이 오늘날의 신학자들보다는 더 근접하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점에서 에녹과 노아의 가르침을 어느 민족보다 더 충실히 지켜 왔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다른 민족들은 힌두교에서 보듯이 잡신, 다신(多神)을 어지러이 위하기에 바빴던 것과 대조가 된다는 뜻이다.


성경도 신들을 인정하고 있다. 사탄을 이 세상 신이라고 했듯이 그래서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시라는 성경 대목도 나온다. 이는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시다는 의미와 같은 것으로서 별달리 유의할 내용은 아니다. 실상 유일신을 인식하는 것이 잡다한 신을 위하는 것보다 훨씬 상식적이라 판단되기 때문에 유일신을 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는 의미였다. 다신교는 무조건 위대한 힘에 대해서는 당장이라도 죽는 시늉을 해 보이는 데에서 기인된다고 보는 까닭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 섬길 것은 섬기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데도 그렇게 무분별하게 미신적으로 흘렀으니 지적으로 약간 뒤떨어졌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주의 조물주 하나님을 삼신이라 부르는데 "삼(三)"을 붙여 삼신이라 하는 까닭은 조물주 하나님은 오직 하나뿐인 절대 근원으로서 일신(一神)이지만 자신을 현실세계에 드러낼 때에는 삼신(三神)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신은 만물을 낳는 조화(造化)신, 만물을 기르고 깨우치는 교화(敎化)신, 만물의 질서를 잡아가는 치화(治化)신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삼신이란 말은 서로 다른 세 분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신이 3수 원리로 만물을 창조하며 변화를 열어 나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은 만유 생명의 본체(體)로 보면 일신이고, 그 작용(用)으로 보면 삼신이다.


"삼신은 얼굴 없는 조물주로서 원(元)신이다. 하지만 이 무형의 삼신만으로는 인간과 만물을 태어나게 할 수도, 현실 세계를 출현하게 할 수도 없다. 이 삼신과 한 몸이 되어, 삼신의 조화와 삼신 속에 내재된 자연의 이법을 직접 주관하여 천지만물을 낳고 다스리시는 유형의 신이 있다. 그 신이 바로 '삼신일체(體)상제(삼신과 한 몸이신 상제님)' 또는 '삼신즉일(卽一)상제'이다. 이를 줄여서 '삼신상제' 또는 상제님이라 한다. 삼신상제님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천상 보좌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주(主)신이다. 즉 우주 사회의 통치자이다. 삼신이 만물을 낳았지만 삼신의 작용과 창조 목적은 상제님의 손길을 통해서 실현되고 완성되는 것이다"라는 말도 하고 있다.


좌우지간 애매 모호하기는 여전하다. 창조신은 오직 하나이시나 작용하는 데에서는 3신으로 나타나는데 왜 3이냐 하는데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하나님을 유형 무형으로만 가르니 기독교 신학자들의 견해에 비해 사실상 나을 것도 없다. 유형 무형이라면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인데도 "한 몸"이라고만 할 뿐 구체적인 풀이가 없다. 하기야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 것은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앞에 나타나시기 전에는 "감추어진 비밀"(고전 2:7/엡 3:9/골 1:26)일 수도 있으니 에녹이나 노아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말하기를, "그리고 삼신이 현실 세계에 드러낸 것이 하늘, 땅, 인간이다. 천지인은 삼신의 자기 현현(顯現)으로 결코 피조물이 아니다. 하늘도 삼신이요, 땅도 삼신이요, 인간도 삼신이다. 따라서 천지인 속에 삼신의 생명과 신성과 지혜와 광명이 그대로 다 들어 있다" 하고 있으니 성경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들에게 보이셨음이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됨 그러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함"(롬 1:19,20)이라 한 대목을 연상하게 하나,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이니, 여기서 본격적인 말 그대로의 용두사미, 횡설수설이 시작된다. 천지인이 피조물이 아니라 삼신이라면 삼신이 삼신을 창조해냈다는 말인가.


"천지인 중에 인간이 하늘과 땅의 뜻과 이상을 실현하는 존재로서 하늘과 땅보다 더 크고 위대하기 때문에...한민족 우주사상의 원형인 神敎는 '삼신'에서 출발하여 '태일(太一)'에서 매듭 지어진다"고 했다. "태일"이라 하는 것은 천일(一), 지일, 인일이지만 '인'이 '천', '지'보다 크다는 뜻으로 '인(人)일' 대신 '태'일이라 한다는 것. "삼신"이라 하여 3을 강조하기에 무슨 특이한 것이 있나 살펴 본 결과가 겨우 이뿐이다. 어쨌든 3의 숫자가 창조신에게 유래된다 하여 3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상수철학으로 표현하면 '통일과 조화의 완전수'인 '10무극'이다. 10 무극 상제님을 다시 체용(體用) 관계로 보면 상제님은 삼신을 본체로 하여 칠성으로 만물을 다스리고 작용하신다(10=3+7). 삼신은 생명을 낳는 하나님이고 칠성(七星)은 생명을 기르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神敎 문화에서는 하나님을 삼신상제님으로만 모시는 것이 아니라 칠성님으로도 모셨다...칠성은 곧 북두칠성인데 삼신상제님이 계시는 별이다."


이런 말을 그냥 황당무계로만 돌릴 것인가. 아니면, 진실은 아니지만 어떤 낌새가 엿보이는 모종의 흔적이 있는 표현으로 볼 것인가. "10무극"이란 것이 어떤 이유에서 나오는 말인지 모르나 합리적 근거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3이나 7은 보통 수가 아닌 것은 분명한 듯하다. 계시록에도 성령을 "일곱 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1:4/3:1/4:5/5:6). 하나님의 성령을 7과 연관시켜 표현한 사실에서도 입증되듯이 하여간 이 7이란 숫자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명백하기에 "칠성님"이니, "상제님이 북두칠성에 계신다"는 등의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신다"(사 57:15)는 것과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행 7:49)인 줄 알면 그 이상 알 것은 없다.


"참됨으로 만물을 하나되게 한다"는 말을 자주 쓰고 있고 "사람은 지혜와 능력이 있어 위대하니, 서로 협력하여 태일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 지구촌이라는 거대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그 공동체를 따뜻하고 보람 있는 곳, 나아가 조화로운 태일(太一)의 이상 세계로 만드는 원동력이 협력과 참여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됨"은 그들도 강조하듯이 공동체의식을 말함이요 머리와 몸의 일체됨을 뜻하니, 성경이 처음부터 가르쳐 오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일절 설명을 못하는 불교와 대비가 되지 않는다 하겠다. 이 공동체에서 필수 불가결한 머리의 위치를 조물주로 확정해놓고 있는 神敎에 비해 불교는 이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는 인간의 위대함을 깨우쳐 주는 삼신 문화의 놀라운 소식이 들어 있다. 그것은 조화신이 내 몸에 들어와 '성(性)'이 되고 교화신이 들어와 '명(命)'이 되고 치화신이 들어와 '정(精)'이 된다는 것이다. 곧 내 몸 속에 삼신 하나님의 신성과 생명이 온전히 들어 있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살아 있는 대우주 자체요 하나님인 것이다". 불교가 말하는 "인간 각자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조물주는 조물주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이다. 그 경계는 분명하다. 분명하지 않으면 법질서가 아예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의 위대성 내지 존엄성 그리고 그 주인의식(주체의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자유 의지 이상 가는 것이 없다. 성경은 누누이 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으로 말하려니까 또 하나의 '진리에 대한 사이비'를 지적한다는 허망함뿐이다. 환단고기는 역사적 구명 정도로만 그치고 이를 확대 해석하여 UFO를 종교화하는 것처럼 종교화하지 말 일이요, 환단고기를 읽는 독자들도 3운법칙으로 검증되고 있는 3위1체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성경 이상으로 합리적인 인간 삶의 지침서, 역사서가 없는 줄 알고 마지막 아담에 의한 새 창조, 재 출생의 시급한 문제부터 반드시 풀어놓고 볼 일이다. 인생은 원천적으로 내일이 없다. 오늘뿐이다. 






CONTRARIA SUNT COMPLEMENTA







Among all the major scientists of the twentieth century, Niels Bohr may have most wanted to be considered a philosopher. Bohr thought that his concept of complementarity, developed in the same weeks as Werner Heisenberg was formulating his uncertainty principle, could explain many great philosophical issues. Complementarity in the form of wave-particle duality lies at the core of the Copenhagen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 Over the years, Bohr suggested complementarity could illuminate the mind/body problem, it might provide for the difference between organic and inorganic matter, and it could underlie other classic dualisms like subject/object, reason versus passion, and even free volition versus causality.


Like any educated person of his time, Bohr knew of Kant's phenomemal/noumenal dualism. He often spoke as if the goal of complementarity was to reconcile opposites. He likened it to the eastern yin and yang, and his grave is marked with the yin/yang symbol.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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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운법칙은 점술이 아니다








3운법칙의 숫자 배열








우주의 천체(天體)가 아담 이후 모든 인생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점성술이 성행했는지는 모르나 성경은 엄중하게 이런 점술 행위(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간에)를 금하고 있다. 3운법칙으로 좌우되고 있는 인생들이 영위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므로 그 길흉화복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아중심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3위1체의 법칙이 가르치는 것은 우주 운영의 대칭적 구도다. 만유가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가 바로 그 뜻이다. 그것을 물리학적 측면에서 궁구한 것이지만 보어는 이 진리가 물리학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유를 지배하는 원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중국에까지 가서 음양이론에 깊은 흥미를 나타냈고 그의 물리학적 업적을 치하하여 내려진 작위를 상징하는 가문 문장을 만들 때 태극 무늬를 직접 그려넣을 정도로 상보성 원리가 그의 학문의 중심임을 명시했다.


그의 묘비(墓碑)에도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과학자 중에서 가장 철학자이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만사에 양면이 존재하여 서로 보완한다 즉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에는 접근했으나 그 양자 관계가 상호간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 양자(兩者) 관계가 바로 인과 관계(causality)임을 증명한 것이 3위1체 법칙이다. 이 3위1체 법칙은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과 상호 검증 관계를 이룸으로써 그 독보적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3운법칙이 반박되고 부정되지 않는 한 3위1체 법칙의 위치는 요지부동이다.


3운법칙과 3위1체의 법칙이 성경에서 모두 나온 것인데 성경이 점성술을 죄악시하는 것은, 이 대칭적 삶의 구조에서 이런 시한부인 자아중심적 삶이 아닌 초자연계 육체 가운데에서의 영원한 공동체 의식 중심(이것은 모두 3위1체 법칙을 기반으로 한다)의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의 체제(구조) 향유가 인간 삶의 본령임을 밝히고 있는 까닭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세계요, 이 삶의 법칙이 3위1체의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유를 지배하는 법칙이므로 생명과 사랑의 원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고로 인류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 자연계 세계가 아닌 "저쪽(彼岸)"의 세계 다시 말해 초자연적인 영원무궁한 세계임을 마음에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의 생사 흥망이 문제가 아니라 그 세계의 영원한 생을 누리느냐 아니면 죽음의 고난 가운데에서 영원을 보내느냐 하는 것으로써 가름되는 즉 각자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갈라내는 데에만 관심을 집중해야 마땅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찰나적인(내일 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생사존망에 연연하고 급급하여 동물적인 자아중심의 일체의 이기적인 행위를 죄와 악으로 규정 짓고 성경은 엄중 경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이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명목상의 소위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이 생명의 진리가 비방의 표적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 온 것은 지극히 유감이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력으로는 철두철미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이니 가장 우선적으로 다시 출생하여(再出生) 새로 창조됨으로써만 자기 운명 자기 스스로 개척하는 주체적 인간 본연의 자주 독립성을 비로소 구가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고(人間苦)는 원인(cause)이 아닌 결과(effect)이니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인즉 이제 첫 사람 아담과 대칭이 되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써 본래의 위치로 복귀되는 것이요 오늘날의 세계는 그 일련의 진행 과정에 속한다.



첫 사람 아담으로 우리 모두가 인간이 되어 있으나 아담이 범죄의 결과로 본디의 창조 목적에 반하여 죽었은즉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고로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다시 복구되는 오직 마지막 기회가 이 세상의 존립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