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경관만 아름다우냐ㅡ사람도 삶도 원래는 아름다웠느니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다. 너 없이 내가 있을 수 없고 나 없이 네가 없다". 이것이 한 몸(머리와 몸이 하나를 이룬 신체)의 원리. 이 원리는 삶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아름다움ㅡ세상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자연 만물을 보라. 아름다움은 조화의 일치이다.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얼굴이 아름답다, 몸매가 아름답다 하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없어야 하는 곳에 당연히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조화라고 한다. 이런 조화가 없으면 추하고 악하게 보이는 것이다. 악함은 선하지 않음을 반대로 나타낸 말인데 심성이 아름답지 않음을 뜻한다.
사랑은 내적(內的) 아름다움인 것이다. 눈이 유달리 커도 아름답지 못하고 양미간이 지나치게 좁아도 추하게 보인다. 고로 외적 아름다움이 제 자리에 제대로의 간격과 비율로 들어 있는 것임과 같이, 마음(인품)의 아름다움도 삶의 법칙을 따라 제대로 제 자리를 잡고 작동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사랑'이라 하는 것. 곧 '둘의 하나됨'이다. 둘이 하나됨 다시 말해 내면적 미(美)의 속성 또는 그 요건은 한 몸(신체)의 원리에 있음을 백번 강조해도 좋다. 그 요건은 다름아니라 갑과 을의 하나됨에서 갑도 을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에 있으니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만 비로소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기를 위해주니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고 오직 상대를 위함이다. 이것을 또한 '자유인의 삶'이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원치 않는 것을 아니함인데, 상대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 물 흐르듯 하는 삶의 순리를 따름이다. 이 양자간의 관계를 확대시키면 머리와 몸의 구조가 된다. 머리는 하나이지만 몸은 여러 지체로 구성된다. 눈이라는 한 지체가 있으면 입, 코, 팔과 다리 등 각 지체가 모두 자기를 위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 여러 지체를 위한다. 어느 지체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아니, 위할 수가 없다. 이런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하려 들 때 부조화, 사랑의 파탄, 아름다움이 아닌 구역(욕지기)이 나는 추함이 된다. 자기만을 위하는 자아중심, 이기주의, 욕심 등의 표현이 그런 현상의 한 예다.
요컨대 이 세상은 이 아름다움을 끝까지 추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각자 나름대로 가름하는 시험대요 그 기간인 것이다. 이것으로써 장차 임할 세상의 영원한 운명이 정해진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의 '한 몸'됨을 사랑하는 자유인이냐 아니면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자기 욕심에게 노예가 되어 있느냐 둘 중 하나로서 영원 운명이 결정된다. 신체의 구조에서 보듯이 '머리'는 '몸'의 그 어느 지체보다 별다르다. 다시 말해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 머리다. 개미 한 마리도, 머리가 있어 그 두뇌가 작용하여 동서남북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한다. 팔이든, 다리 하나도 그 직능을 대행하지 못한다. 오직 머리 고유의 권한이요 역할이다.
인간 삶에서도 인간 스스로 머리 역할을 못한다. 오직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필수불가결이다. 이 필수불가결성을 철학자 칸트는 인정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요청적(要請的) 유신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 그 초월적 존재를 아는 것과는 별개다. 칸트의 소속은 불행히도 후자가 아닌 전자이다. 그 지식(시답잖은 것이지만, 왜 시답잖은 것이냐ㅡ상식에 속하니까)이 그를 교만하게 만든 것이다. 쥐꼬리만한 것이라도 남보다 출중하면 사람은 쉬이 이 오만에 빠져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 필요한 존재를 몰라 볼 리 없다. 교만은 머리가 아니면서도 머리인 양 자기를 속이는데 있다.
머리는 인간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가정에 가장이 있고 집단에 단체장이 있는 것은 이 '초월자(인간이 아닌) 머리'의 그림자이다. 때문에 모든 인간의 권력은 이 초월자에게서 나온다고 정리되어 있다. 머리의 특성은 한 몸의 이치에서 절대로 자기를 위하지 않음에 있다. 자기가 아닌 몸(의 각 지체)을 위한다. 그리고 억조 창생 인생 하나하나를 보살필 수 있어야 비로소 말 그대로의 "머리"이다. 또한, 하나이므로 머리든 몸이든 '고난도 함께, 영광도 함께'이다.
잘 살아도 똑같이 잘 살고 못살아도 똑같이 못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의 의미다. 차등이 있으면 하나가 아니라는 증거만 될 뿐이다. 이런 하나됨을 달리 표현하여 "공공(公共)이라고도 한다. 사(私)의 반대 개념이다. 여기서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등의 말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이 "공공 정신" 또는 공익 정신의 본을 보이심이다. 바로 그 화신(化身)이다. 머리로서의 본이시다. 여기서는 사사로운 것은 일절 배제된다.
초월자라고 하면 신, 창조신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을 말하면 피조물 신(神)들도 초월자이다. "초월"은 인간에 대비해서 쓰이는 용어다. 초월자, 초능력자라도 우주의 대주재(大主宰)에 비하면 초월자도 초능력자도 아니다. 인간에 대비해서 "초월"이라 "초능력"이라 하는 것은 초자연계적 몸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공중을 마음대로 번개처럼 달릴 수 있고 깊은 바다 속이라도 거침 없이 휘젓고 나다니고 철벽 콘크리트도 그대로 통과해 버리는 그런 것이다.
그런 육체는 미생물 병원균에 잠식 당하여 폐사하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자연계에 속한 우리 인간 육체와는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러한 육체적인 부적응, 사랑 없는 삶의 부조화가 빚는 모든 인간고(人間苦). 모두 제각기 머리인 양 행세하려는 무질서의 극치인 자아중심(자기 본위, 자기 위주). 그런데도 세상이 지금까지 굴러 온 것은, 오직 3운법칙(3위1체의 원리를 따라 오직 세 가지로써만 모든 인간 생애를 철통 같이 마름질을 해 나가는 법칙)이라는 통제 덕이다.
이러한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인간 삶의 이상적 설계를 밝히고 있는 것은 고금을 통해 성경밖에 없다.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으로써, 각자 자기를 위함으로 야기되는 일체의 악을 제거하는 이상적인 장치가 '한 몸됨'인데, 성경을 무시하는 세상이 이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머리로서의 초월자를 한결같이 부정해 왔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초월자, 초능력자가 바로 악령들이라는 비극적 현실 때문이다. 무신론이나 이 무신론을 토대로 하여 나온 가설인 진화론 등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난 작품이 아니다. 진화론은 진실이나 진리가 아니라 자연 현상에 대하여 시도해 보는 해석일 뿐이다. 그런 빗나간 해석을 하도록 인간을 완전히 조종하는 실체가 악령 곧 이 세상의 신(神)이라는 그 뜻이다.
그러면 자연 그리고 초자연 만물의 창조자만 인정하면 되느냐, 그러면 모두가 다 사람 삶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머리로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이 악령들은 인간들로부터 감춘 것이다. 창조의 실상은 알게 해도 진리로 통하는 통로는 막아 인간 고유의 초자연계적 실상을 깨달음으로써 영원 삶의 행복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음이다. 거짓의 속성이 그런 것이니 그 방법이야 무궁무진하다. A를 부정하는 B를 등장시키는가 하면 A를 시인하는 C를 도출해내어 D라는 새로운 거짓으로 연출해 보인다. A를 시인하니까 거짓이 아닌 진리라고 믿도록 만드는 술책이다. 이런 것이 우리의 현재 실상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대주재가 아닌 피조물 신(神)들, 악령들에 의해 완전한 꼭두각시, 노예가 되어 있는 현실을 성경만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무지몽매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악마, 악인들도 "자유, 아름다움" 등을 예사로 말한다. 입에 발린 것이다. 이 또한 악과 속임수, 거짓의 특성이다. 모방인 것이다. 모방은 겉치레일 뿐 속 내용은 그 반대다. 그러므로 말에만 속아 넘어가지 말고 그 열매, 하는 짓, 행위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다. 그래서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惡神)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 죄 용서하심을 받아", "마지막 아담"으로서 영원한 머리가 되어 계신 유일무이하신 '가장 아름다우신 사람'과 머리와 몸 관계를 이룬 무리의 대열에 합류하여 영원한 생명의 낙으로 들어갈 것을 권면, 경고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행 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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