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생활을 참새와 독수리로 비유한데 대해서ㅡ
(아래와 같은 글이 있어 여기 소개한다)
우리가 알기로는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으로 어떤 상황과 최악의 조건 가운데서도 비상을 잘 하는 새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류 학자들에 의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독수리는 날개를 펴면 전체의 길이가 2m가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날개로 날아 오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날아 오름의 주체가 독수리 자신에 있는듯 보여진다. 독수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날개를 퍼덕이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날아 오르는 것처럼 묘사되는듯 하다. 이런 왜곡된 해석과 이해로 인해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 죄를 이기기 위해, 자아가 죽기 위해, 거친 파도와 풍랑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의 날개를 퍼덕인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이다! 그것은 독수리의 특성과 실체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 했지만, 영어성경에는"soaring"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링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수고로 날아 오름이 아니라 활공을 의미한다고 한다. 활공이란 패더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엔진의 동력이나 스스로의 힘으로 날아 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떻게 날아 오르는가? 바람과 기류를 이용하는 것이다. 바람의 힘으로 날아 오르는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단어가 "소링"이다.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이 비밀을 안다.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날아 오를 수 없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밑에서 불어 오르는 온난기류를 이용하여 급상승하는 것이다. 독수리가 날아 오를 때를 자세히 보면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이지 않는다.
오직 날개를 쫙 펴고 가만히 있는다. 그러면 바람이 날개를 밀어 올려 높이 날아 오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의 축복은 성령의 바람이 성도의 삶을 날아 오르게 하는 것이다. 날아 오름의 주체가 성령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독수리처럼 스스로 날 수 없다. 은혜의 바람,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날아 오를 수 있다. 우리의 문제점은 스스로 예수를 잘 믿으려 한다는데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선하게 살려 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를 섬기려 한다. 그것은 고행이나 수양이나 종교적 신념이다.
마치 참새처럼 말이다. 참새는 100% 자력으로 움직인다. 오직 자신의 날개짓으로 날아 간다. 그러므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참새는 꼼짝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수리는 비바람이 불거나 태풍이 오면 더 잘 날아오른다. 더 높이, 더 빨리, 비상할 수 있다. 활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두 종류로 분류한다면, 평생을 참새처럼 자력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수리처럼 타력으로 날아 오르는 성도가 있다.
우리의 할일은 분주하고 번잡하게 날개를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힘을 뺀 채로 잠잠히 성령의 난기류를 갈망하며 은혜의 바람이 내 삶에 불어 오기를 앙망하는 일이다.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다. 참새처럼 퍼덕이며 평생을 살든지,아니면 독수리처럼 날개를 쫙 편 채 성령님의 바람을 의지하든지 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참새같은 성도들이 너무 많은듯 하다. 나부터 그런것같다. 여기서 퍼덕, 저기서 퍼덕인다. 뭔가 요란하고 난리 법석인데 실제로는 날아 오르지 못한다. 독수리 같이 유유히 성령의 바람을 타고, 비상하는 성도들이 많지 않은듯 하다.
예수를 믿는다고 요란스러운데 실제의 삶은 언제나 추락이고 탈진이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날지 못한 채 참새처럼 웅크려 들고 만다. 바르게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불행의 열매일 수 있다. 강단에서 조차 "끝없이 날개치며 올라가라"고 가르치고, 다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쓰고, 울고 불고 하면 "다 된다" "할수 있다"고, 학습되어 있다. 아니다! 그것은 왜곡된 성경 통찰이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쉼을 주리라. 내게 붙어만 있으라, 그리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으리라. 주안에 있으라.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관계를 친밀히 가져라. 그리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리라". 성경 어디를 보아도 문제 해결의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독수리가 푹풍우속에서도 날아 오를 수 있는 것은 독수리의 날개 때문이 아니라, 소링의 힘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와 위기는 내가 주체가 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확률은 0%였다. 그것은 참새가 태평양을 건너려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저들은 상상밖의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는 체험을 했다. 마치 독수리가 소링의 힘으로 어떤 바다든, 어떤 험산준령이든 유유히 건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귀는 끝없이, 우리에게 스스로 날개짓을 하여 날아 오르라고 우리를 교란시킨다. 이 영적 싸움에서 영의 눈을 열어 "주를 바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소링의 은혜를 구하고, 소링의 축복을 갈망하라. 내 힘으로 하는 날개짓을 포기하고, 성령의 바람을 앙망하라. 그리하면 거친 파도와 풍랑에도 날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분이 날아 오르도록, 날마다 새 힘을 더하실 것이다.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소링의 은혜를 입으면 우리는 넉넉히 감당하고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필자의 소견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참새와 독수리는 비상하는 '방법' 차이입니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원리입니다. 날고자 하는 '의지'와 실제 날 수 있는 '능력(방법)'을 혼동하는데서 오는 폐단이 큽니다. 오늘날의 혼돈은 후자를 전자로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나의 능력>이라고 하는데서 자랑과 오만 또한 파탄이 옵니다. 모든 능력은 "은혜"(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이 그 근본이 되는 의지만은 나만의 영역이기 때문에 "자유 의지"입니다. 왼발 오른발 번갈아 내딛여 걸음이 가능하듯 항상 이 '양면성의 동시성'이 중요 테마가 됩니다.
은혜의 능력(성령) 없이 나의 의지만 앞세우니 전천후로 독수리처럼 날지를 못합니다. 자력 갱생의 세상 종교가 그런 종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나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한편으로, 사랑의 의지력 없이 피동적으로 은혜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의 모든 경고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치우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하나님께서 다 잘 해주신다는 미신으로) 이 역시 생명과는 거리가 멉니다. 전반적으로 오늘의 교회가 이런 식이어서 세상사람들로부터까지도 지탄을 받는 지독한 이기주의가 됩니다.
삶이란 것 자체가 열심히 부지런히 사는 데에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한 열심과 부지런함이 아닙니다. 사랑 다시 말해 남(나의 상대)을 위한 삶입니다. 사랑은 속성상 항상 능동, 적극적인 주인의식입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일방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ㅡ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고. 이렇게 양자가 함께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를 사람 앞에서 시인하는 자는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나를 부인하는 자는 나도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부인할 것이라" 하신 말씀이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만 고집하는 이는 아직도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이, 자기의 자아중심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여전히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명설교가"로 이름이 나 있다는 찰즈 스펄존이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는 20대 무렵 '은혜' 없이 '의지'에만 몰두했습니다. 당연히 좌절, 실의, 절망 가운데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겨울 일요일 폭설이 워낙 심해 자기 다니는 교회에는 못가고 조그만 낯선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보라"라는 말을 실감 있게 듣고 자기의 모든 정신적 영적 고뇌의 짐을 내려놓았다고 했는데 여기서부터 그의 오도된 복음관(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은혜"에 이르렀으면(전에는 이 은혜에 이르지 못했으나) 이제 그 은혜의 능력대로 사랑(순종)을 얼마든지 나타내게 될 수 있음에도, 이전 은혜(구원)받기 전의 죽은 자로 있어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었던 상태와 구원받은 상태를 혼동시켜 뒤섞여놓음으로써 많은 청중들로 하여금 "다른 예수, 다른 복음"함몰하게 만든 것입니다.
즉 이제 구원받았으니 무엇이든 얼마든 내 역량이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도록 구원하신(은혜의 능력을 주신) 것인데, 그래서 과거 죄인이라 죽었기 때문에 행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구원받아 살았으니까 능히 그 새 생명력으로 하나님의 뜻(말씀)을 행하게 되어 있는 것을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행할 수 없는 것으로서 항구적인 딱지를 붙여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거의 모든 모양새입니다. 독수리로 날든 참새로 날든 나는 것은 동일합니다. 산 새만이 날고 죽은 새는 날지 못합니다. 관점을 나느냐 날지 못하느냐에 두어야지 참새로 나느냐 독수리로 나느냐에 두는 것은 지엽적입니다. 다시 말해 열매를 맺느냐 못맺느냐 하는 것이지, 30배, 60배, 100배 등 거두는 실적이 문제의 초점이 아닙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 죄를 이기기 위해, 자아가 죽기 위해 스스로의 날개를 퍼덕인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이다."
이 말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서로 모순이 됩니다. "결과가 참패"일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를 나타낸 것입니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은 다음의 상태를 말해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의 축복은 성령의 바람이 성도의 삶을 날아 오르게 하는 것이다. 날아 오름의 주체가 성령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독수리처럼 스스로 날 수 없다...우리의 문제점은 스스로 예수를 잘 믿으려 한다는데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선하게 살려 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를 섬기려 한다. 그것은 고행이나 수양이나 종교적 신념이다."
위의 말도 의미는 대동소이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선하게 살려 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를 섬기려 하고 예수를 잘 믿으려 하고"ㅡ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아무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생활하지 않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성령)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하는 자로서, "주를 잘 섬기려 함"(이는 "주를 기쁘시게 하려 함"과 같은 의미ㅡ고후 5:9/고전 7:32),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 없을 때 그는 자기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도 않으면서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해주고 있습니다. 즉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일이 없는 자"(롬 14:7-9)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나를 위해 사시고 나를 위해 일체를 하시는 그 능력으로써 나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ㅡ이것이 "성령"께 관한 일체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단일 방향으로 주님의 삶을 살고(빌 1:21) 따라서 그리스도인 됨으로써 받게 되는 고난도 "주님을 위해서"(빌 1:29) 받습니다.
"성도들을 두 종류로 분류한다면, 평생을 참새처럼 자력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수리처럼 타력으로 날아 오르는 성도가 있다."
방금 설명했듯이 "성도"라면 구원 얻은 사람인데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자력 즉 자기 힘이나 노력으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면 자기라는 존재가 실질적으로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실질적으로"ㅡ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진(무덤에 있는) 까닭입니다. 현재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된 복합구조로서의 "새 사람"입니다. 홀로 나만의 존재는 "옛 사람"으로서 이미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땅에 묻혀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왜 "실질적이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지심이 실질적인 역사적 사건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분주하고 번잡하게 날개를 요동 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힘을 뺀 채로 잠잠히 성령의 난기류를 갈망하며 은혜의 바람이 내 삶에 불어 오기를 앙망하는 일이다.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다. 참새처럼 퍼덕이며 평생을 살든지,아니면 독수리처럼 날개를 쫙 편 채 성령님의 바람을 의지하든지 해야 한다."
갈망할 것도 없고 앙망할 것도 없고 "힘을 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성령의 은혜의 능력을 활용하면, 더 정확히 말해 주님 친히 그 성령(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에 "아들"이시라 또는 "아버지"시라 하지 않고 "성령"이시라 하는 것)으로 나와 불가분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니까 나는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 위해 살겠다는 일념으로 그대로 생활하면 능력은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런 적절한 능력 배분은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고후 4:11)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사후(死後)에나 나타나는 능력이 아닙니다. 현재 내가 믿음으로 향유하는 능력, 주님(성령) 친히 나를 위해 발동시키시는 막강한 초강력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참새 같은 성도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뭔가 요란하고 난리법석인데 실제로는 날아 오르지 못한다. 독수리 같이 유유히 성령의 바람을 타고, 비상하는 성도들이 많지 않은 듯하다. 예수를 믿는다고 요란스러운데 실제의 삶은 언제나 추락이고 탈진이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날지 못한 채 참새처럼 웅크려 들고 만다."
"날고자 하는데도 실제로는 날지 못한다"ㅡ이런 표현은 그리스도인에 관한 한 앞서의 언급대로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실상은 로마서 7장 24절로 대변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상태를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 받은 상태로 착각하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약하고 처량한 것일 수가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창조(아담의 처음 창조에서나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는 새 창조에서나)에서 무릇 능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니 "하나님의 선물"로서 불완전한 것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없습니다. 완벽하고 무흠입니다. 그럼에도 내 스스로의 방식으로(그것이 독수리의 날개로든 참새의 날개로든) 무엇이든 하려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생래적, 태생적인("다시 출생"[重生]함으로써 모시게 되는 성령 친히 완벽하게 나의 일부분으로 계시므로) 능력과는 완전 동떨어지는 의미가 되기에 애초부터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한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믿음으로 거저 받는 선물로서의 새 생명을 성경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체의 것이 곧 "바르게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불행의 열매"요 "왜곡된 성경 통찰"입니다. 교역자 자신조차도 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외면하기 때문에 "'끝없이 날개 치며 올라가라'고 가르치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힘쓰고, 울고 불고 하면 '다 된다', '할 수 있다'고 학습되어 있는"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있지만, 실상 위의 필자 자신도 성경 몰이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쉼을 주리라. 내게 붙어만 있으라, 그리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으리라. 내 안에 있으라" 하심과 동시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하셨으니, 결코 대신해서 내 멍에와 짐을 져주시는 것이 아니니 이 점이 중요합니다. 함께 지는 멍에요 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하나되어 있음이 우리의 구원이기에 그렇습니다. 다만 그 짐이 그렇게 가볍고 쉬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주님을 위해 지고 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주님은 나를 위해 지시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와 위기는 내가 주체가 되려는 것이다."
"주체"는 어느 면으로 주체이냐,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능력의 주체이냐, 사랑의 의지(will)의 주체이냐. 이것을 혼동하기 때문에 간단한 것임에도 마치 풀기 어려운 아니면 아리송하기만 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사랑의 의지력의 주체는 나입니다. 결단코 주님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사랑하는 것이지 주님이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없으니까. 그 대신 주님을 나를 사랑하시는 일에 주체가 되십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나를 위하시는)의 주체가 되어 계시는 것을 나의 의지의 주체가 되시는 것처럼 뒤죽박죽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혼란이 옵니다.
"마귀는 끝없이, 우리에게 스스로 날개 짓을 하여 날아 오르라고 우리를 교란시킨다. 이 영적 싸움에서 영의 눈을 열어 주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내 힘으로 하는 날개 짓을 포기하고, 성령의 바람을 앙망하라. 그리하면 거친 파도와 풍랑에도 날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분이 날아 오르도록, 날마다 새 힘을 더하실 것이다."
마귀가 부추기는 것은 주님의 광야시험에서 확인되고 있듯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하라는 것, 고로 주님께서 당연히 나를 위하시게 되어 있는 것을 의심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위하는 이 자아중심의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자아중심에 묻혀 지내다가 멸망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 세 가지로만 분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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