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면 천년 장수 시대가 온다
노아 당시 세상처럼
사람이 천년 장수하게 되나 곧 마지막 심판
3운법칙으로 입증된 노아의 950년 생애에서 보듯이 당시 사람들이 아담을 비롯해 천년 가까이 살았다는 것은 아담이 이런 자연계 존재로 전락하기 전 초자연계 몸으로 있었다는(살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비록 초자연계 몸은 상실했으나 그 기운(여력)은 잔존하여 그토록 장수했던 것인데 노아 홍수 이후 기후 등 여러 자연 조건에 변동이 생겨서인지 사람의 생애가 100살 안팎으로 팍 줄어들게 된다. 그리스도 곧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오시던 당시 인생들의 평균 나이가 겨우 30세 전후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홍수 전 시대 사람들이 천년 가까이 산 사실을 방증하는 또 한 가지는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면 천년 기간의 그리스도 통치 시대가 시작됨을 요한의 계시록에서 알리고 있다는 것. 이는 이사야 선지자도 이미 예언한 바 있어, 그 때가 되면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하게 되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 등 지금의 우리로서는 가히 상상도 못할 일이 전개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때가 되면 100살이 되어 죽는 이는 저주 받아 그렇게 된다고도 했다.
이 말은 모든 인생들이 그 때가 되면 천년 가까이 산다는 뜻이니 이는 무슨 의미인가. 범죄로 죽은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마지막 아담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이 죽는 것처럼 그 죽음을 죽으시고, 그렇게 죽으심으로써 아담이 그 죄의 대가를 치르는 모습이 되신 다음에는, 아담의 범죄 전 모습(초자연계 육체)으로 복구되는 의미의 부활이셨던 것. 그리고 초자연계 에덴낙원을 상징하는 "하늘"로 오르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으로써 애석하게도 망가져버렸던 창조 당시의 모든 영광이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점진적인 회복 단계에 이르는 절차로서 되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필수로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초자연계예 속한 아담이 범죄하여 자연계 존재가 되어버린 이후 인간이 천년 가까이 살던 시대를 지난 후로는 100년 안팎의 목숨만으로 한정되어 오다가 마지막 아담께서 오실 무렵에 그 짦은 목숨이 절정을 이루어 왔던 그 과정을 이제 마지막 아담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다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온전히 "만유가 회복된다"(행 3:21)는 시나리오다.
마지막 아담의 출현으로 인간은 "다시 출생하고" "새롭게 창조됨"을 통해 180도 전환의 U턴을 하게 되는 것. 즉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과거에 거쳤던(범죄 타락으로 인해) 그 기간을 되짚어 가기 시작함으로써 오늘날은 인류의 평균 수명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어지고 이제 이 기간이 마감을 하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에 이르면 노아 세대의 천년 수명을 다시 밟는 순서를 거친 후 그것이 끝나면 애초 죽음을 모르던 첫 사람 아담의 완전한 모습으로 정착되는 그런 양상이다.
이렇게 과거의 모든 과정을 다시 되짚어 올라가게 되는 것은, 현재의 인간 상태가 애당초 창조 때 정하신 것이 아닐뿐더러, 있어서는 안되고 일어나서도 안될 비정상의 모습임을 강조하여 입증함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역으로 거슬러 가는 시늉을 나타낼 아무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천년 세상'은 오래 가지도 않는다. 사람 수명이 천년 가까이 되는데도 "천년 왕국"이라 한정했으니 천년만 지탱하게 된다는 뜻을 요한 사도가 계시록에서 명백히 했기 때문.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 이런 자연계 몸으로 눌러 사는 것이 천년 만년을 산다 한들 결코 정상이 아닌 까닭이다. 영생하는 것이 정상이다. 죽음을 모르는 것이 정상 상태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비정상적이 되어버린 인간사가 마지막 아담으로 인하여 이제 정상 회복되는 순서를 밟아감으로써, 마지막 아담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죽어 그 죄 값을 치르고 다시 살아나는 형국을 나타내심이라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애초 초자연계 몸으로 있던 바로 그 모습으로 부활하심이 당연한 것이다.
이 사실을 그 부활하신 몸으로써 세상에 공표하셨고 다시 세상에 오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는 아담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이 세상을 다스리다가 그 동안 영물이든 인간이든 각자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운명이 정해진 데 따라 선악간에 그 행한 것으로써 악인과 악령들을 심판하게 되어 있었던 아담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심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께서 친히 말씀하시되 "내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심을 강조하신 것)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아버지께서 주셨다" 하셨으니 바로 이 의미이다.
즉 영원한 아담의 자리에 계심이다. 이렇게 육체로 사람 생기는 것은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았지만,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는 원래의 상태가 범죄로써 자연계 육체로 전락하는 불상사를 낳았으나, 이제 육체가 아닌 영혼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순서를 밟음으로써 옛 아담의 영광을 단계적으로 회복하시는 모양새다. 이는 '사람'이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 즉 자연계와 초자연계라는 양면성을 따라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이다.
인간만이 이런 양면 구조로 된 것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망라하여 통할하는 자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는 양면 세계에 동시에 속해야 합당하기 때문.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인한 인간(생명에 합당한 의인들)의 이중 구조에서는 성령께서 '영혼' 격이 되시고 나 곧 각 개인은 그 '육체' 격이 된다. 그러나 멸망에 들어가는 악인들은 그런 새 창조의 이중 구조의 혜택을 받지 못하니 이 이중 구조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애초 창조된 인간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고로 멸망에 들어가는 악인들이 이 새로운 이중 구조에 해당되지 않음은 더 다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일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멸망으로 들어가는 자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실상 자아중심이 속성인 악인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속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지만"(롬 1:28), 자기 부인으로서의 삶으로 한 몸 체제 속에 있는 의인들은 머리되시는 분과의 하나됨은 그 자체가 생의 극한 희열(ecstasy)이 된다.
인간을 애초 이중 구조로 만드신 이유가 더 있으니 '실체'와 '형체'로서의 하나님 모습을 따라 인간(아담)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친히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서 실체(본체)와 형체(히 1:3)로 계시기 때문. 그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하나님 아들께서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이시라 하였고, 외부로 나타나는 표현이 형상인 고로 "말씀"(요 1:1)이시라고도 한 것. 그 지으신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롬 1:20) 고로, 그 피조물의 정점으로서의 인간(아담)이 이런 의미를 지님은 당연하다.
이 본체와 형상의 관계는 바로 머리와 몸의 관계다. 때문에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셨으니 그 짝을 지어준다는 것은 머리와 몸의 관계 형성을 위함인 것. 우리말 성경은 "남녀 부부"라는 선입견 내지 편견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아예 "배필"이라고 임의로 잘라 말했지만 영역에는 단지 "helper"이다. 고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를 "우리 위해 죽으셨다"고 바르게 번역해야 하듯이 이 구절도 고쳐야 마땅하다.
이 돕는 이라는 "helper"는 요한 복음에서 성령을 "보혜사"라 하실 때도 사용하신 용어이기 때문이다. 영역으로는 특별히 구별하여 "Comforter"라고도 번역했고 우리말 번역은 한 술 더 떠서 "保惠師"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담의 짝을 정해주려 하실 때 말씀하신 바로 그 용어이니, 다시 말해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면 나는 "육체"가 되고 성령(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께서는 그 "영혼" 격이 되시는 바로 그 원래의 인간의 이중 구조를 따라 우리를 새로 창조하심의 의미다.
고로 새 창조에서의 나의 영원하신 짝이 마지막 아담이시다.
육체로서의 짝이 남자에게는 여자요 여자에게는 남자였던 것과 대조된다. 내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입고 현재 사람으로서 생존해 있는 것처럼, 영(성령)으로서의 마지막 아담을 입고(롬 13:14/갈 3:27) 향후 영원한 복락의 새 생명의 새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성령으로 사는 것"(갈 5:25)이라 하는 것.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에게 통했던 남자와 여자로서의 구조는 이제 새 창조에서는 그리스도와 나의 하나됨 즉 성령을 모심으로써 되는 이중 구조로 정착된다.
때문에 마지막 아담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숨을 내쉬신 것이니 이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 아담의 코에 생기(the breath of life)를 불어넣으시던 형용을 재연, 재현하심이다.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인간에게 영혼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어 이와 같이 영원히 나와 하나가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아기를 안은 엄마의 모습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한 아버지를 모시게 됨을 인하여 "한 형제가 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히 2:11) 또 나를 불러 "친구"(요 15:15)라 하시니 그 겸양지심이야 이루 형용할 길이 없다. 이 모두 단 하나의 이유,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니까. 마지막 아담께서는 내게 자신의 전부를 선물로 주심이기 때문에 "성령의 선물"이시라 하는 것.
우리 인간의 영혼은 몸에 대하여 본체 또는 실체요 몸은 그 형상, 형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보이시지 않으나 그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므로, 우리 피조물이 대하는 하나님께 관련된 일체의 것 즉 그 말씀이시든 나타내시는 모든 일이든, 형상이시고 말씀이신 아들께서 나타내심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본체로서 아들과 함께 하나되어 계시는 까닭에, 아들 홀로 무엇이든 하시지 않고 말씀을 하셔도 무슨 일을 하셔도 반드시 아버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요 아버지의 일을 하심이다. 곧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항상 본체(실체)를 나타내심이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보다 나중에 조성되었으나 영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육체보다 선재(先在)다. 모든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니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시라 함도 이 사실을 가리킴이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도 형상으로서의 아들이시고 신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물론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므로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이시지 아들 단독으로 무엇을 하시는 것이 아님을 앞에서 말했다. 그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말이 아니요 아버지의 말씀이시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따라서 신약에 와서는 더 이상 구약의 "여호와" 명칭은 사용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님으로서 그 위치를 옮기셨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다. 하나님도('아들'께서는 이제는 사람이 되셨으므로 '아버지'를 가리키는 상대적인 이름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만 호칭되신다. 인간이 하나님께 근접할 수 있기는 오직 형상이니, 형상이신 아들 위주로 모든 것이 표현됨은 당연하다. 성경에 무식한 신학자들은 구약의 "엄위(嚴威)로우신 여호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별도로 인식하나 그렇지 않다. 아들께서는 언제나 형상이시고 아버지께서는 그 형상이신 아들을 통해서 나타나신다.
우리의 신체 구조를 볼 때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서 움직이지 결코 따로 행동하는 법이 없다. 이를 연상해서 이해하면 어려운 것도 없다. 영혼과 육체는 전혀 별개인 것이다. 그러나 행동은 함께 하나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아들께서 아버지와 분리되어 계실 때가 오직 단 한 번 있었으니 나 위해(갈 2:20)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시려고 세상에 오신 직후부터 30세쯤 되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때까지다. 아버지의 성령이 세례 받으시던 아들에게 임하시면서 다시 하나로 되신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와 분리되심을 가리켜 성경은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내어주셨다"(롬 8:32ㅡ"to deliver") 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되실 때에도 하나이셨다면 아버지도 사람이 되셨을 것이요 그리 되면 나 위해 죽으신 아들을 누가 살릴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않으면 나도 다시 살 수 없으니 구원은 휴지화하는 것이다(고전 15:14-17). 마지막 아담의 죽으심이 "우리를 대신하신" 죽음이 되실 수 없는 것이다. 이 그릇된 교리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이비가 일어나 민생들을 현혹하였는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헛된 희망 속에서 구원 얻은 줄 착각한 채 영원세계로 흘러 들어갔는지 그 폐해를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이런 결과는 당사자 각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다. 누구 탓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하나님께서 이를 용납하시거나 좌시하실 턱이 없다. 문제는 찾지 않는 자에게 찾으신 바가 되지 아니하시고 구하지 않는 자에게 주시는 일이 없고 문을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진리의 문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는 이 엄연한 현실에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가 알려져 보아야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아 곧 짓밟아버리니 진주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다.
가치를 아는 자에게만 값진 물건은 제대로 대접 받는 법. 때문에 천국은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아 이를 발견하면 기뻐하며 돌아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삼"이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이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자 가서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마 13:44,45) 것과 같다 하셨다. 그런 사람은 당장은 있는 재산 모두 처분했기 때문에 빈 털털이라 우선 생활의 곤고함은 막심하다. 그러나 장차 큰 부자가 되리라는 희망에 겨워 마냥 즐겁기만 하고 싱글벙글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삶을 즐기면서 향유 향락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을 버리든 저것을 버리든 양자 택일만이 요구된다. 둘 다 가지는 것은 3위1체 원리에서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초자연계의 몸으로써 초자연계에서 사는 것을 소망하지 않는 자 치고 자연계의 삶에 연연하는 자 없다. 둘 다 가지려는 헛된 욕심에 사로잡히니 그런 이단 사상, 인위적인 교리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이런 "배도(背道ㅡ살후 2:3)의 핵심은 이 세상도 살고 영생도 얻는다는 거짓 선전에 있는 것.
사람이 세상에 날 때 사람으로서의 육체는 남자 편에서가 아닌 여자 편에서 나온다. 이는 여자가 아담의 육체를 받아 처음 창조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자에게서 나는 자식들이다. 그러면 여자만의 계통에서 육체가 생겨나면 그 육체의 실체가 되는 원 뿌리는 당연히 남자 쪽이다. 여자 일방적으로 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씨는 남자 계통으로 밟아가는 것이니 신약 성경에서도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식으로 모든 족보가 서술되는 바 "이삭이 야곱을 낳았다"(마 1:2)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네피림"이라는 인간 별종이 세상에 생겨나게 된다(창 6:4). 영물들의 초자연계 육체는 초능력이라 인간의 육체로 얼마든 변환될 수 있어 자식들까지 생산하게 된다. 바로 고대의 초대형거인들이다. 이들이 죽으면 아담으로부터 난 사람들과는 달라 그 망령이 집결되는 일정한 장소가 없다.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된 채 세상을 유리 방황하는 것뿐이다. 성경에서도 명백히 지적하는 더러운 귀신들의 정체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낳은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들을 가리켜 "더러운 귀신"이라 하실 리가 없다.
모두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물로부터 합법적으로 나온 존재들이라면 "악하면" 악했지 "더럽다" 하시지는 않는데 더럽다고 하셨으니 불법적으로 출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악령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강제로 제지하시지 않은 것은 악인들을 일정하게 자유를 주시어 강압하시지 않는 것과 어느 정도 의미가 같다. 즉 일정한 허용 범위 내에서 당분간 묵과하시는 것인데, 악인에게는 악을 행할 수 있는 틈을 허용하시면서 악령등은 규제하신다는 것은 평등 차원에서 공정공평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 악령들은 남성이 되어 인간 여자들과 상관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인간들은 육체는 사람이나 그 영은 악령의 분신이다. 때문에 죽은 뒤에는 귀신으로 남고 아담의 씨로서 낳아진 영혼들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여자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것이나 기타 본질적인 것은 남자로부터 나는 것이니 그렇게 되어 나온 육체도 영향을 받아 야수 같은 괴력과 형체도 말도 못하게 우람하여 성경도 이를 거인들이라 한 것이며 그 엄청난 식욕을 채우기 위해 짐승들을 사냥하여 허기를 채웠으므로 "사냥꾼'이라 이름한 것이다. 유튜브(youtube)에 보면 그런 거인의 뼈가 흔하게 발굴되어 공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영혼과 같은 본질은 남성에게서 나오나 육체만은 여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나를 위해 나와 똑같은 여자로부터 출생한 자가 되시기 위해 한 여자의 태에 들어가신 것뿐이다. 그리하여 사람 태어나는 정한 때를 다 채우시고 세상 밖으로 나오시니 곧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날 수를 정확히 채우시고 오시니 나와 하나도 다름 없는 형태요 형상이신 것이다. 단지 영혼만은 사람이 아니시니 성령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네피림(복수를 뜻함)도 여자에게서 났다 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달리 그 무엇으로 성경이 부르지 않는 이유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되신 것이다. 네피림은 영물(악령)들이 먼저 그 초능력으로 사람의 육체가 된 다음에 인간 여자와 관계하여 낳은 자식들인 것이다. 여자의 태에서 나셔도 그 어떤 경우와도 다르시니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네피림처럼 거인이실 수도 없고 또 되셔도 안되는 것이다. 혹 엉뚱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어 혼돈을 야기할까 싶어 항상 당신 자신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심을 강조하여 자기를 가리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son of man)라 하신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께서는 아들께서 그렇게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뒤로는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도 하나이셨고 부활하실 때도 하나이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설명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심을 가리켜 '성령으로 명하셨다'(행 1:2) 한 것이다. 구약의 위엄으로 나타나신 배경으로 하여 신약의 하나님 사랑은 더욱 부각되고 빛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고 동시에 사랑이신 양면성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 안에 거하면 그 인자가 영원 불변이나 그렇지 않으면 그 위엄을 대하지 않을 수 없어 "꺾이고" "아끼지 아니하심"(롬 11:22)을 당하게 되니 어찌 두려워하고 떪이 없으리요.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시기까지 하실 정도로 절대 불가능하신 것이 있으니 악인을 구원하실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불쌍히 여기셔도 그 불쌍히 여기시는 대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는 이 '하나님의 불가능'. 이것이야말로 두렵고 떨 일이 아닌가. 우시기까지 하시나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 죄 앞에서는 단연코 "소멸하시는 불"이실 수밖에 없는 품성이기에 그러하시다. 법 제정자로서 법 집행자로서 법의 심판자가 되심은 지당한 것이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위엄이라 한다(롬 11:22).
이렇게 세례 받으시고 성령 받으심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의 머리, 대표가 되시는 모든 절차였다. 주님의 세례 받으심은 내가 세례 받아 성령을 받게 되는 사실과 일치, 합일됨이다. 내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리스도와 하나됨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품으로 귀속함이다. 세례 받으신 후 곧장 하나님 사업을 시작하셨으니 우리 역시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이 세상에서의 목적이므로(요 20:21,22) 하나님의 사업에 즉각 투입되는 것이다.
죽은 자로서의 나의 죽음과 함께 되시어 죽으셨으니 이 사실을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아주 장사 지내짐(무덤에 들어감)을 나의 세례받음으로써 확인하는 것. 이래서 세례 요한이 세례 받으려 나오시는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하면 의아해 했을 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올바른 이치)를 이룸이 합당하다" 하셨다. 올바른 이치란 이와 같이 우리와 둘이 하나되심으로 인한 우리의 구원이니 만유 법칙인 3위1체 원리가 적용됨은 당연하다. 이 원리가 인간 삶에 적용될 때는 생명의 법칙, 존재의 법칙이 되는 까닭이다.
사람이신 마지막 아담의 아름다우심은 필설로 형용 못한다. 예수님이라 하면 유대인으로서의 한 청년의 모습만을 항상 연상하는데 성경을 아주 잘못 배운 결과다. 자연계 몸으로 오신 모습이야 죽음에 갇힌 내 모습으로서 죄인의 모습이시기에 그 모습이 어떻든 관계가 없는 일이다. 잠시 한 때 나타내신 형용이시니까. 그러나 초자연계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휩싸여 계시는 그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살후 1:10). 아직도 자연계에 속한 육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한다는 것은 성경을 너무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라기보다 개인적 견해로는 불경죄에 가깝다 할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나 사람이심을 항상 강조하시어 "인자(人子)를 거역하는 자는 용서가 가능하되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하셨다. 하나님으로서의 측면을 말씀하심이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두고 귀신의 일이라느니 마귀의 소행이라느니 입도 가볍게 빈정거리는 유대인들의 행사를 지적하시는 경고이셨던 것이다.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니 회개하는 경우 그리스도를 비방한 죄가 용납이 되나 그렇지 않은 경우 영원히 용서가 되지 못하는 뜻으로도 우리가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치고 아름답지 않고 영광스럽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은 결과인 것. 창조물의 머리인 인간 아담이 범죄하여 저주 받으니 그 아래 몸된 지체들 격인 자연계 만물이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우주 만물이 한 몸 체제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천사들 중에는 애초 창조된 대로 자기 본분을 지키지 않고 이탈하는 자들이 생겨 사탄 같은 악령이 있게 됨과 같이 인간 중에도 악인이 있게 마련.
따라서 이들을 모두 심판한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되도록 정해져 있는데, 이렇게 심판하는 일은 다스리는 자로서의 아담의 몫이었으나, 아담의 범죄로써 이 일에 차질이 생겼지만, 인간에 대한 지극하신 사랑으로(요 3:16) 하나님(의 아들) 친히 이제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서신 관계로 모든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는 대로 흉측하게 생겨 먹은 악마의 형상은 악령들이 에덴낙원의 자기네 실상(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의)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꾸며서 된 것이다.
초자연계 몸의 행동 반경은 거의 자유자재다. 어떤 형상으로든 변형시킬 수 있다. 사탄의 용으로서의 형상 역시 그러하니 용이라는 괴물이 있는 양 속이기 위해 그렇게 무섭게 가장한 것이다. 물론 뱀 즉 용의 형태 면에서는 그대로이지만 전체로 볼 때 아름답지 않은 피조물이 없다는 의미다. 거짓으로 꾸미지 않은 창조하신 대로의 형상으로 말하면 용은 실로 영물들 중 누구 못지 않게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이 자연계 몸도 초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변환될 때 그 삶의 향락은 무한대로 확장, 확대된다. 그럼에도 잠시뿐인 이 한 세상 괴로움을 못견뎌 그 찬란한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어서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이니 자초하는 재앙이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마지막 아담"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이와 같이 지금은 인간이 과거 천년 가까이 살았던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점이므로, 부득불 이 자연계 세상에서 노아 홍수 전의 상태를 재연(再演)하시기 위해 다스리는 자(아담의 모습)로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이다. 물론 다시 오시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으니, 이 세상 인간 중의 하나로 계시다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유일한 사례이시니 그 살아나신 그대로 마땅히 이 세상에 살아 계셔야 정상이고 이치에 맞다.
그렇지 않으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의미가 퇴색되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이고 일종의 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늘이 잠시 그를 받아두어 이 세상에 아직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는 기간이 있게 되고 이 기간이 마치게 되면 반드시 나타나시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다. 그 이유 즉 일정 기간(부활하시어 승천하신 때로부터 지금까지) 한동안 모습을 감추신 것은, 그 부활하신 몸으로 세상에 만일 나타나시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지막 아담께서 영광된 몸으로 나타나시기가 무섭게 그와 하나되어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모두 영광스러운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즉 그렇게 되면 엄청난 차질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첫째 "주님 위해 받는 고난"(빌 1:29)이 진행될 수 없고 따라서 구원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이 지금까지 존속하는 오직 하나의 이유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인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이 계속 이어짐으로 인해(그 몸된 교회를 통해) 사람들의 구원의 역사가 가능해지는데 우리가 영광의 몸이 되어버리면 구원 사업은 올 스톱이 되어버리니 이 세상 자체의 존속 이유기 사라지는 것이다. 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영광스러운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될 악인들까지도 그런 몸으로 변환되는 것을 욕심 내어 믿는 흉내를 내지 않을 자가 없게 된다.
악인의 구원을 막으시는 것은, 구원 얻기 위한 그 때에만 늑대의 꼬리를 감추다가 그 목적이 일단 달성되면 지체없이 사탄처럼 되어버려 그 본성,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 또다시 지금과 같은 비극을 연출할 것인즉 누가 이를 좋아할 것이며 막지 않으리요. 악령이든 악인이든 간에 자아중심은 그와 같이 항상 암적 존재이니 사탄이 일을 저지름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 당하는(롬 8:22)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왜 그런 암 덩어리를 제거하지 않고 그냥 방치할 것인가. 악인은 격리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격리된 상태가 3위1체 원리를 따른 대칭성에서 생명의 쾌락과는 정반대의 모든 것을 영원세세토록 당함이 되는 것이니, 초자연계에서의 죽음 또는 멸망이 이런 엄청난 것이므로 모름지기 모든 사람은 이런 상태가 해당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릴 일이다. 이 세상 신인 사탄이 쳐놓은 그물, 함정, 올무에 걸려 들어 세상과 노닥거리지 말고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 영원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 곧 한 몸 체제에서의 이상향적 삶을 동경하고 추구할 일이다(롬 2:7-10).
자기 먼저 구원된 다음에는, 이 세상 사람들을 건지고 구출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임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렇게 언제든 복음만 전파되어 이 이상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없을 때(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아시는 것이며, 미리 아시니까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은 그 구원 받음에 지장이 없도록 사전에 만반으로 조처해주시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미리 택하심"이다) 이 세상은 그 즉시 종료된다 하셨으니 이 세상이 존속하는 목적과 의의가 바로 이 인생 구원에 있지 다른 그 어떤 것에도 있지 않으니, 내일 아니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이런 세상에서 기껏 살아보아야 백년도 못사는 처지에 이 세상 살려고 버둥거리고 아우성 치는 것은 이지적인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건만 이 세상 신(神)에게 동조하여 피동적으로 움직이니 마지막 아담께서 "우신"(눅 19:41)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멸망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더라도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생명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하실 수는 없는 일이니 그리 되면 공동 파멸인데 어찌 가엽다는 생각만 앞세우시랴. 그 법이 다름아니라 죄 지은 자는 죄를 받고 형벌 받아야 하고 그 법을 어떤 대가를 무릅써서라도 지킨 사람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대로 영원 복락에 들어가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 법을 어기신다는 것은 죄를 지어도 그 죄를 간과하고 불쌍히만 보시어 살리시고 그래서 모두 재차 야단북새통이 되도록 방치하심을 말하는 것이니 이런 일을 절대로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으로서 불가능하신 일을 두고 우신 것이다. 3위1체로 계신 하나님 자신을 부정할 수 없음과 같이 이 양면성(duality)의 동시성(unity)은 여하한 경우에도 부인될 수 없음이다. 양면성은 3위1체 법칙에서 갑과 을의 도치성 즉 정반대되는 성질을 가리킴이고 그 둘이 하나됨은 동일성이 아닌 동시성으로 표현됨이니 동일성은 두 개체가 동일한 개체라는 뜻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합일성이기 때문에 이를 동시성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위엄 가운데 깃들인 아름다우심, 사랑스러우심 또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총화 속에 스며 있는 위엄이니 이 모습은 인간이 일찍 구경한 일이 없고 친히 나타나실 때에야 목도할 수 있는 황홀한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 역시 마지막 아담과 같은 모습으로 일변할 것이요(생명에 해당되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 남성적인 기품 속에 스며 있는 여성적인 사랑과 아름다움, 여성적인 자태 속에 깃들인 남성적인 위풍당당의 형용으로 변할 것이다.
아담이 범죄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이 지금처럼 자연계 육체가 아니라 초자연계 초능력으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악인과 의인이 가려지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현재의 이 세상 체제는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면 악령과 천사들이 섞여 살아서는 안되고 악인과 의인들이 한데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은 악한 자들대로 그들의 선택을 따라 따로 격리, 분리됨이 정상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분류를 위해 현재의 이 세상이 모든 악행에도 불구하고 유지 존속되는 것이니 부디 정신 차려 심기 일전하여 시급히 U턴 할 일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세상의 존속 의미는 영원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는 기회를 각자에게 주기 위함, 이뿐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이 세상 신이 인생들의 주의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이해하면 정확하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자연계 존재로 전락해버려 신(神)이 되어 그렇지 인간과 사탄은 동격이다. 아담에게는 주종, 상하 관계다. 상대적으로 된 엄청난 열세이니 이 비극적 사실을 모든 인생들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영민했던 인도 무갈 제국의 영걸 아크바르(1542-1605)가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이슬람교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종교 교리를 다 들어보고자 하여 천주교 신부를 비롯 모든 종교 대표들을 불러 그 강의를 듣고 믿음을 결정하고자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그 중 가장 합리적인 교리를 가진 종교라면 이슬람 신앙도 버릴 용의가 있다고 했는데, 일단 듣고 나서 천주교 신부들을 불러, "기독교가 제일인 것으로 이해되는데 의문점을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왜 하나님이 삼위일체냐 그리고 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세상에 오느냐"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부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대답을 못했다.
천주교 신부만 아니라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대답을 못해 왔다. 결국 이 의문을 풀지 못해 아크바르는 회교에 그냥 머물러 있기로 했다는 것인데, 모르면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것이 낫지 그런 의문을 안은 채 종교를 새로 바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구도자를 왜 방치하셨는가 하겠는데,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아크바르가 잘못 접근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감읍(感泣)하여 믿음에 들어오는 것이지 영생만 목적하게 될 때 본질을 놓치는 것이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에 대한 응답 또는 보답 외에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순종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행 5:32) 즉 구원하신다 명시하였다.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히 5:9) 것이다. 이 선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모든 것 즉 구원"이라는 말과도 같다(고전 2:9/약 1:12). 영생이야 누구나 욕심 내지 욕심 내지 않을 사람이 없다.
"나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진실이냐 진실이면 목숨을 걸고 그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하겠다 하고 그 진실성 여부를 물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이치에 맞으면 믿고 그렇게 생각이 안되면 못믿겠다는 것은 얼핏 보면 당연한 조리 있는 생각 같으나 본질을 놓친 것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이유를 따지고 사랑하는가. 그 사랑의 진실만 따지면 될 일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랑 유무, 사랑 여부다. 이것이 본질이다. 3위1체의 원리, 3운법칙 아무리 알아도 소용 없다. 지식 하나만 더 보탰다 뿐이지 그 이상 더 나아가지 못하면 오히려 모름만 못하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말씀을 믿느냐 여부에 달린 것이다. 이 때 이 마지막을 당하여 그래도 그나마라도 모르는 것보다야 아는 것이 낫다고 해서 "나 위하신"(갈 2:20) 하나님의 사랑의 진실성을 확신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놀라운 지식도 주시는 것이니 이 뜻을 간과하는 이들은 대관절 어떻게 평가해야 하리요.
영생에 들어가는 문턱까지는 밟았는데 사랑 없어 본질을 놓쳐 영생에로 영영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이 비극적 결말의 비참함을 제대로 형용하리요. 아크바르가 질문했던 주님의 재림 사실은 앞에서 설명하였고 3위1체 하나님에 관한 설명도 3위1체의 원리 곧 만유의 기본 법칙이 하나님 계시는 모습에서 비롯되었음을 이미 밝혔다. 차라리 이런 사실을 모르더라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never)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경고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일 일이다.
너무나 태무심으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니까 세상에 취한 채 인사불성이 되어 있으니까 이런 것을 통해서라도 세상 술의 만취 상태에서 깨어나기를 바라시나 응하지 않는 데서야 하나님도 속수무책이시다. 오죽하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성민들을 향하여 비통해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우시는 것을 상상해보라. 사람이 되셨으나 여전히 변함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만유를 지으신 아들께서(실체이신 아버지께서는 형상이신 아들을 통해 만유를 지으시고)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인생들 중의 하나가 친히 되시어 우리 인간들 눈 앞에 나타나셨건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욕심대로 살려 하니 하나님이신들 어찌 하리요.
하나님을 못본다 하지 말라. 우리 눈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우리처럼 사람이 되시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나타나시겠는가. 더군다나 자연계 몸으로 그리고 자아중심의 죄악 가운데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나를 살리시려"(갈 2:20) 나와 둘이 하나되시는 영원한 짝이 되시려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 이상으로 어떻게 더 나타내시랴. 그냥 보통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최고의 중죄인으로서의 사형수의 모습으로 옷이 벌거벗겨지신 채 나무에 높이 달려 그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다. 당신이 목석(木石)인가, 사람인가. 아무 감동도 없고 반응도 없는가. 당신을 위해서 하신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두 손바닥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 한 손 가지고 아무리 흔들어야 소리가 나지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악인이나 악령이나 일방적으로 놀았기 때문이다. 한 몸 체제에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머리도 몸도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고,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살고ㅡ이렇게 되면 세상 천지 두려울 것도 없고 아쉬울 것 없다. 이거야말로 완전 무결한 이상향의 삶이다.
이 '둘이 하나됨'이 인생 삶에 구현될 때 사랑의 법칙이고 삶(생활)의 법칙이이 이 모두 3위1체의 원리를 따름이다.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을 따라 이 원리가 태동되었으니 곧 만유에 해당되는 존재의 법칙이다. 하나님의 존재하시는 모습을 따라 비롯됨이니 이를 토대로 일사불란하게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다. 이 이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마지막으로 온 세상에 전달하시는 메시지를 보고서도 무반응일 때 당신은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다.
이 세상은 각자 자기 운명을 스스로 정하는 장소요 때로서 그 이상 이하도 의미가 일절 없다.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포되시는 분이 우셨다는 대목을 보고 마음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믿음에 들어왔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장 인간다우신 모습이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했듯이 이 기회 지나면 하나님의 희생 양, 어린 양이신 마지막 아담께서는 "어린양의 진노"(계 6:16)로 나타나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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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계 삶으로는 아무리 날고 뛰어도
그럴수록 자승자박하는 꼴이니 이것이 자연계 인간의 한계요 비극.
문명 발달이라 자랑하더니 보라,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자멸을 재촉한다
고로 깨끗이 이 비정상적인 삶을 접고 영광의 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하신
마지막 아담을 시급히 따르시라
원래의 초자연계 모습으로 환원함이 긴박한 제1차적 과제다
http://trinitrinia.blogspot.com
The first day job for Camie Camel and Osty Ostrich,
after the first night of their wedding,
learning their good lessons
from their neighboring suffocating Human Civilization
that failed to keep the GREEN of Mother Nature.
Mr. Camie Camel, in their longing for the old times
when people were totally ignorant of the 20th century foolishness of
destroying the GREEN heritage of Mother Nature,
wears a Korean gentleman's hat of those days
holding in his left hand the long bamboo pipe of that time in Korea,
one of the masterpieces of Nature's GREEN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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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람 내며
휘파람 불며
어깨 춤추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ㅡ엡 5:19)
이것이 정확히 말하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를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앞에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2:12) 했는데 왜 딴 말이냐 할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3위1체 원리의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실상 두렵고 떠는 것과 항상 기뻐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울리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에 거짓말하지 않는 성경이 그렇게 대문짝 같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해서 항상 경직된 얼굴이 되어 전전긍긍 또는 노심초사하는 것은 없다. 왜냐면 이미 구원 받아 마지막 아담과의 영원한 짝이 되어 사랑의 노래, 사랑의 희열, 사랑의 막강한 생명력 속에 넘쳐 나는 시편 23편의 마음 속의 에덴 낙원을 향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으니, 항상 기뻐함이 있는 고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이 가능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이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함으로 엮어가는 매일의 시간이 줄기차게 연이어지는 것.
이 진실, 진리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계시하여 주심을 바라고 믿고 부지런히 다시 말해 어린 아이가 젖을 찾듯이 성경을 읽을 일이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다(벧전 2:2)" 함과 같다. "구원을 받았는데 뭘 또 '구원에 이르도록' 한단 말이냐" 하는 우문을 인제는 마음에 품지 말 것이다. 어린 아이는 젖 떨어지면 죽을 지경에 이르고 여차하면 죽는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다. 때문에 우리의 마지막 아담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내가 먹을 양식이다"(요 4:34)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신 것이다.
내가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고 안간힘을 다하여 먹으려 하고 마시려 하는 이는 천하에 아무도 없다. 왜냐면 먹고 마시는 것이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삶의 기쁨인 고로 먹으려고 사느냐 살려고 먹느냐 할 정도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즉 사람들 구원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사랑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고난 받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받는"(빌 1:29) 사랑의 행위이므로 "은혜"(:29)가 되는 까닭에 고난 받음 자체가 기쁨이 되니 어찌 하리요. 바울의 승리의 개가를 듣지 못했는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악한 것들(고난 받음)에 대하여 자랑하리라"(고후 12:9) 하지 않았는가.
세상 천지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고 이것을 자기 "자랑"(고전 15:31)이라고 사자의 포효성을 울리는 인간은 바울을 위시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공 순신의 한 마디 "常有十二 微臣不死"를 대단한 배포라고 민족적인 긍지를 일깨워주는 명언 중의 명언이라고 자랑하지만 바울 사도가 우리를 대표하여 승리의 함성을 내지른 이 대목에 와서는 할 말을 잃는다. 나는 아직 이렇지 못하다 싶으면 전력을 다하여 이 정상 상태로 각자의 믿음 생활을 회복시킬 일이다. 자유! 얼마나 소중한 말이더냐. 자유 위해 죽기까지 할 정도다. 자유, 사랑 모두 상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를 주신 것도 사랑의 삶이란 것이 처음부터 자유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삶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삶, 사랑, 사람ㅡ우리 조상들은 이 지혜를 일찍부터 꿰뚫고 있었기에 이런 말들을 한 사슬에 꿰어놓았던가.
세상 유혹에 넘어가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사랑을 잃지 않도록 삶을 제대로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구원을 이룸이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에서 자신을 채찍질하여 주님을 사랑함에 믿음의 형제들 사랑함에 불신자들 구원하기 위한 열성에 마음이 식지 않도록 하는 것이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 감이다. 구원 받은 기쁨 속에서 지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모든 악령들("사탄"이라는 말로 대변되는)의 시험에 굴하지 않고 초지일관 사랑 가운데에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을 때 그것이 두렵고 떪으로 구원을 이룸이 되는 것.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자아중심이어서 그런 것이므로 하늘 나라에는 불합격인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 자기가 그 죽음의 선악과를 입에 넣고 씹을 줄이야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어느 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을 우리가 어찌 잊을손가. 그래서 두렵고 떪이다.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경고하는 대목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광야 교회를 항상 교회에 연상시키기를 힘썼다. 그들이 세례 받고 성령의 은사에 참예하고 다 했지마는 결국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멸망하였음"(고전 10:2-5)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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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만유의 법칙(3위1체의 원리)의 로고로서 우리나라 태극문양과도 다르고 태극도(太極圖)와도 차이가 있다. 우리 태극 문양은 붉은 색인 양의 머리가 왼쪽에 있고 음과 양이 가로로 포개져 있으나 태극도의 양을 표시하는 흰 바탕은 머리가 오른 쪽에 있고 세로로 서 있는 반면, 만유의 법칙의 심볼 마크는 태극도처럼 갑(양에 해당)의 머리가 왼쪽에 있되 세로로 서 있음과 가로로 포개져 있음의 중간 쯤에 있고, 그것보다 윗쪽 즉 갑과 을의 접점이 꺾여져 갑과 을의 머리를 형상화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래서 갑은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고 있는 형상으로서 갑은 머리 부분이 태반을 차지하고 을은 팔 부분이 그러하여 머리(갑)와 몸(을)으로서의 특징을 상징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모양새를 가리켜 갑은 을을 안고 있고 을은 갑을 업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된다. 갑이 을을 안고 있다고 하든지 을이 갑을 업고 있다 하든지 두 가지 중 한 가지 표현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 이같이 양면으로 말할 수 있는 즉 갑으로 보면 갑이고 즉 갑이 을을 안고 있는 모습이고 을로 보면 을 즉 을이 갑을 업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만유의 법칙의 골자. 왜냐면 둘이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과 음의 관계를 업고 안는 것으로 재미 있게 말한 것은 노자의 도덕경이다. 안는 것은 어버이가 자식을 대하는 자세요 업는 것은 어버이의 자식 업기보다 장성한 자식이 노년에 기진맥진한 어버이를 업어드리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재치 있는 말로 표현은 했으나 왜 안고 업는 것인지 다시 말해 처음으로 하나로 존재하던 갑이 을을 파생시킴으로써 현재는 둘로서 존재하나 그 처음의 질서를 따라 주종, 대소, 인과, 선후 관계에 있음을 세상에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단지 음과 양이 불가분으로 하나되어 있음을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밝힐 수 있었더라면 세상이 조금 더 지내기 수월했을지도 모르니, 왜냐면 현재의 삼라만상(결과물)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조물주 하나님을 앎으로써 사람들이 보다 더 자정(自淨), 자숙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석학이 보어와의 논쟁에서 빛의 입자성만을 고집하고 죽을 때까지 자기의 그 오류를 철회하지 않을 정도로 입자성과 파동성은 마치 물과 기름과 같이 전혀 판이하다. 그러나 한데 "얽혀"(entanglement) 업고 안고 있는 현실을 어쩔 것이냐. 극과 극의 대립 그러나 동시에 일치 조화하는 양면성. 최근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의 실험도 두 소립자간의 이러한 '둘이 하나됨'을 양자 역학 측면에서 방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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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람 내며
휘파람 불며
어깨 춤추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ㅡ엡 5:19)
이것이 정확히 말하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를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앞에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2:12) 했는데 왜 딴 말이냐 할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3위1체 원리의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실상 두렵고 떠는 것과 항상 기뻐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울리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에 거짓말하지 않는 성경이 그렇게 대문짝 같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해서 항상 경직된 얼굴이 되어 전전긍긍 또는 노심초사하는 것은 없다. 왜냐면 이미 구원 받아 마지막 아담과의 영원한 짝이 되어 사랑의 노래, 사랑의 희열, 사랑의 막강한 생명력 속에 넘쳐 나는 시편 23편의 마음 속의 에덴 낙원을 향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으니, 항상 기뻐함이 있는 고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이 가능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이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함으로 엮어가는 매일의 시간이 줄기차게 연이어지는 것.
이 진실, 진리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계시하여 주심을 바라고 믿고 부지런히 다시 말해 어린 아이가 젖을 찾듯이 성경을 읽을 일이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다(벧전 2:2)" 함과 같다. "구원을 받았는데 뭘 또 '구원에 이르도록' 한단 말이냐" 하는 우문을 인제는 마음에 품지 말 것이다. 어린 아이는 젖 떨어지면 죽을 지경에 이르고 여차하면 죽는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다. 때문에 우리의 마지막 아담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내가 먹을 양식이다"(요 4:34)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신 것이다.
내가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고 안간힘을 다하여 먹으려 하고 마시려 하는 이는 천하에 아무도 없다. 왜냐면 먹고 마시는 것이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삶의 기쁨인 고로 먹으려고 사느냐 살려고 먹느냐 할 정도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즉 사람들 구원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 사랑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고난 받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받는"(빌 1:29) 사랑의 행위이므로 "은혜"(:29)가 되는 까닭에 고난 받음 자체가 기쁨이 되니 어찌 하리요. 바울의 승리의 개가를 듣지 못했는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악한 것들(고난 받음)에 대하여 자랑하리라"(고후 12:9) 하지 않았는가.
세상 천지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고 이것을 자기 "자랑"(고전 15:31)이라고 사자의 포효성을 울리는 인간은 바울을 위시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공 순신의 한 마디 "常有十二 微臣不死"를 대단한 배포라고 민족적인 긍지를 일깨워주는 명언 중의 명언이라고 자랑하지만 바울 사도가 우리를 대표하여 승리의 함성을 내지른 이 대목에 와서는 할 말을 잃는다. 나는 아직 이렇지 못하다 싶으면 전력을 다하여 이 정상 상태로 각자의 믿음 생활을 회복시킬 일이다. 자유! 얼마나 소중한 말이더냐. 자유 위해 죽기까지 할 정도다. 자유, 사랑 모두 상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를 주신 것도 사랑의 삶이란 것이 처음부터 자유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삶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삶, 사랑, 사람ㅡ우리 조상들은 이 지혜를 일찍부터 꿰뚫고 있었기에 이런 말들을 한 사슬에 꿰어놓았던가.
세상 유혹에 넘어가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사랑을 잃지 않도록 삶을 제대로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구원을 이룸이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에서 자신을 채찍질하여 주님을 사랑함에 믿음의 형제들 사랑함에 불신자들 구원하기 위한 열성에 마음이 식지 않도록 하는 것이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 감이다. 구원 받은 기쁨 속에서 지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모든 악령들("사탄"이라는 말로 대변되는)의 시험에 굴하지 않고 초지일관 사랑 가운데에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을 때 그것이 두렵고 떪으로 구원을 이룸이 되는 것.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자아중심이어서 그런 것이므로 하늘 나라에는 불합격인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 자기가 그 죽음의 선악과를 입에 넣고 씹을 줄이야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어느 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을 우리가 어찌 잊을손가. 그래서 두렵고 떪이다.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경고하는 대목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광야 교회를 항상 교회에 연상시키기를 힘썼다. 그들이 세례 받고 성령의 은사에 참예하고 다 했지마는 결국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멸망하였음"(고전 10:2-5)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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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만유의 법칙(3위1체의 원리)의 로고로서 우리나라 태극문양과도 다르고 태극도(太極圖)와도 차이가 있다. 우리 태극 문양은 붉은 색인 양의 머리가 왼쪽에 있고 음과 양이 가로로 포개져 있으나 태극도의 양을 표시하는 흰 바탕은 머리가 오른 쪽에 있고 세로로 서 있는 반면, 만유의 법칙의 심볼 마크는 태극도처럼 갑(양에 해당)의 머리가 왼쪽에 있되 세로로 서 있음과 가로로 포개져 있음의 중간 쯤에 있고, 그것보다 윗쪽 즉 갑과 을의 접점이 꺾여져 갑과 을의 머리를 형상화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래서 갑은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고 있는 형상으로서 갑은 머리 부분이 태반을 차지하고 을은 팔 부분이 그러하여 머리(갑)와 몸(을)으로서의 특징을 상징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모양새를 가리켜 갑은 을을 안고 있고 을은 갑을 업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된다. 갑이 을을 안고 있다고 하든지 을이 갑을 업고 있다 하든지 두 가지 중 한 가지 표현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 이같이 양면으로 말할 수 있는 즉 갑으로 보면 갑이고 즉 갑이 을을 안고 있는 모습이고 을로 보면 을 즉 을이 갑을 업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만유의 법칙의 골자. 왜냐면 둘이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과 음의 관계를 업고 안는 것으로 재미 있게 말한 것은 노자의 도덕경이다. 안는 것은 어버이가 자식을 대하는 자세요 업는 것은 어버이의 자식 업기보다 장성한 자식이 노년에 기진맥진한 어버이를 업어드리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재치 있는 말로 표현은 했으나 왜 안고 업는 것인지 다시 말해 처음으로 하나로 존재하던 갑이 을을 파생시킴으로써 현재는 둘로서 존재하나 그 처음의 질서를 따라 주종, 대소, 인과, 선후 관계에 있음을 세상에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단지 음과 양이 불가분으로 하나되어 있음을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밝힐 수 있었더라면 세상이 조금 더 지내기 수월했을지도 모르니, 왜냐면 현재의 삼라만상(결과물)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조물주 하나님을 앎으로써 사람들이 보다 더 자정(自淨), 자숙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석학이 보어와의 논쟁에서 빛의 입자성만을 고집하고 죽을 때까지 자기의 그 오류를 철회하지 않을 정도로 입자성과 파동성은 마치 물과 기름과 같이 전혀 판이하다. 그러나 한데 "얽혀"(entanglement) 업고 안고 있는 현실을 어쩔 것이냐. 극과 극의 대립 그러나 동시에 일치 조화하는 양면성. 최근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의 실험도 두 소립자간의 이러한 '둘이 하나됨'을 양자 역학 측면에서 방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화론이니 무신론이니 하는 따위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부정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한 악령의 교활한 조화술에 인간은 속절없이 피동적으로 당해 온 것. 어버이 사랑(자신 한 몸을 오직 그 자식 위해 바치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여과 없이 증명하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마치 전제군주처럼 여기도록 만든 것도 이 세상 신(神)이 부린 획책 중 하나다. 자기가 바로 그런 독재 신이므로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속칭 천사들이라 부르는 이 영물(靈物, 초자연계 존재를 영물이라 총칭하는데)들이 신(神)들로 대접 받고 있는 것은(고후 4:4) 아담의 범죄로 인해 자연계 몸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의 비극에 편승한 상대적인 의미일 뿐이다.
애당초 그들 위에 군림해 있던 첫 사람 아담이 초자연계 몸으로 있음을 기준하여 이 영물들이 창조되어 아담을 보좌하기 위한 역할이었는데 그 중 하나 곧 용(자연계 동물인 뱀과 초자연계 존재로서의 대칭을 이루는ㅡ창 2:19) 인간(아담)을 시기하여 하극상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궤계(속임수의 거짓말, 거짓 조언)에 넘어가 자연계 동물과 같은 자연계 육체가 되다보니 자연히 용(이 블로그에 올린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 참조)은 인생들 위에 지배 신(神)으로 군림하게 된 것. 그가 휘몰아가는 대로 맥없이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노예로서의 현실이니 얼마나 비통한 일이냐. 그래서 모름지기 인간은 자기의 정체성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라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첫째 이유로 자기의 자유 곧 자주 독립성이 저해되고 속박되는 것을 들고 있는데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들 스스로 이미 이 세상 신에게 완전 장악 당하여 철권 통치되고 있는 현실인데도 이는 무시하고 용의 꼭두각시 놀음을 하여 용의 각본 따라 무신론을 외치면서 그런 자유, 자주를 표방하니 이런 참상을 두고 비극이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비극적 실상을 용이 인간으로부터 감추어 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그를 "이 세상 신"이라 하겠는가.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은 왜 이를 방관 내지 묵과해 오셨는가. 묵인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필귀정으로서, 인간 자신이 어리석어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은 결과 즉 자업자득임을 왜 똑바로 인식 못하는가 하는 답답함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영물들까지 모두 자결권 즉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음로 이에 저촉되는 일을 하실 리도 없거니와(하신다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주착없는 일관성 없는 극히 위험한 처사가 되시므로) 하실 수도 없다.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면 악령으로서의 용에 인간 스스로가 동조, 동참하고 있는 격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밝히고 경고하신 대로 쥐꼬리만한 자기의 몇 푼어치 안되는 지식에 넘쳐나 교만하지 않고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되어"(마 18:3) 구하고 찾고 두드린(마 7:7) 이들은 약속하신 대로 진리를 수용하게 되고 구원받기에 하등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 진화론 따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대수가 아니다. 각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똑바로 파악하고 인간 고유의 천부적인 존엄성을 되찾아 더 다시는 이런 사악한 초자연계 존재에게 농락당하지 않는 것이 급선무요 일차적 과제라 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정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만이 주는 유일한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정보원도 성경 이상 가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을 효과적으로 유효 적절하게 읽는 데에 보탬이 되리라 믿어 <4복음서 한 권으로 읽기>, <신약 사도 서신들 한 권으로 읽기>를 엮어 일목 요연하게 필요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도 서신 읽기>만은 이 구글 블로그에도 옮겨놓았다.
이렇게 성경에 친숙해지면 구약의 고어투성이 글을 접헤도 별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요한 계시록 읽기도 위의 다음 블로그에 올려놓았으니 참고하시면 될 것이다. 자기 컴퓨터에다 복사해놓고 각자 스스로 편집하여 짜집기 하듯이 조목별로 붙이고 떼고 하는 동안 훌륭한 성경 공부가 되리라 확신한다. 영어 성경도 역시 복사해서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필자는 그렇게 하고 있으며 안드로이드 웹에서도 좋은 도구가 나와 있으므로 성경 공부에 편한 한경 조성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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