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IQ150의 중국 청화(淸華)대 전면 장학생의 볼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눈물
무엇이 이 천재 소녀를 그렇게 감동시켰던가ㅡ
다름아닌 한 장의 전도지에 소개된 하나님 사랑
곧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바치신
(자신을 몽땅 내게 선물로 주신-갈 2:20)
"하나님 아들의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의 사실이었다ㅡ
이것이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됨"이다(마 18:3)
하나님이시므로 <우리 모두>를 위하심과 동시
사람이시므로 <나>를 위하심이 엄연한 현실
이렇게 사랑과 사랑의 두 손바닥이 마주 쳐야 "구원"이라는 소리가 나는 것
나와 하나되시는 이유 또는 목적은 내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필연이기 때문이며 이 죽음을 거친 다음에야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하고 하나님과의 정확한 갑, 을, 병 관계를 형성하여 철저한 자기 부인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지 않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데에 있는 것(고후 5:15).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으므로 자기 부인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순종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니 다시 말해 순종의 "행위로써 구원 받지 못함"이었다.
그래서 의인은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 하였다(롬 3:10-12). 왜냐면 자기 부인을 바탕으로 해야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없어야 하나님을 위해 살아 몸과 머리의 관계가 정상 가동(稼動)이 되어 영생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관계를 지키지 않아 아담은 죽은 자가 되었고 악령들은 영원 멸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터다. 생명은 자기 부인 즉 머리와 몸 관계에서 그 누구도(몸의 각 지체도 머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데에 있음이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나와 '갑과 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상대가 나를 위한다는 전제가 붙어야만 되는 일. 애초 아담을 창조하실 때는 그러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어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피조물의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삶의 법칙을 저버리고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됨으로써 영물(천사)들 가운데 사탄을 비롯해 악령들이 자생(自生)하게 되고 그 영향을 받아 인간(아담) 역시 범죄하게(무릇 범죄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아중심에 있어) 되면서 하나님의 그러한 생명의 체제(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완전 단절된 것이다.
이렇게 단절된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있으실 수 없으니 왜냐면 법 질서 확립 차원에서 절대로 그런 일은 불가능함이다. 과거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도 에녹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여러 인물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순종을 통해 "의인"으로 간주된 것은 오직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결단코 그와 같은 "의인"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일.
이러한 자기 부인을 통한 순종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질서 속에서만 가능함을 다시 강조한다. 고로 이들 믿음의 선조들은 자기 부인이야 불가능했지만 이 자기 부인이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에(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오직 믿기만 하고 그 믿음 따라 순종할 때 그 믿음을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듯이 "의(義)로 정(定)하신" 것.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단절 상태가 종료되고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훌륭히 연결됨을 인하여 범죄 전과 같은 갑, 을, 병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한다. 머리는 몸을 위해 사는 것이요 몸은 머리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니(고후 5:15) 이로써 자기 부인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부인이 없다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은 믿음 없음, 믿지 않음으로 간주되는 것은 당연하다. 모름지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에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모든 뜻과 명령 곧 계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때는 자기의 구원 받았음을 의심할 충분한 사유가 된다(롬 14:7-9/고후 5:15).
지금까지 온 세상이 자아중심으로 살다보니 그것이 죄의 기반이 되는 줄을 알지 못했으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생명의 지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단지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 살아야 하고 그 올바르게 사는 법이 공동체 의식 즉 모두가 한 몸으로서 한 분 머리를 중심으로 자기 부인으로써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여럿이 공동으로 살 수가 없다. 개성이 다른 개체가 한데 엉겨 사는데 하나가 되어야 조화 통일을 이루지, 그렇지 않으면 다투고 싸우고 미워하고 죽이고 하는 생명과는 반대 현상이 일어남을 우리는 가인의 살인 행위(그 아우를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자기보다 낫다는 시기심 때문에)로써 그 증거를 보는 것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확연히 증명된 것이다(롬 5:8). 이것이 모든 모성애(母性愛)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모성애다. 그러므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두가 죽은 자가 되어 산 자일 수가 없고 그 어떤 방법으로든 스스로로는 산 자가 될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산 자가 된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아담이 처음 인간으로서 창조된 것처럼 우리 역시 아담과는 다른 별개의 새 차원에서 창조되었으나 창조의 환경과 처지에서는 동일하니, 범죄하여 죽은 아담과는 다른 차이를 나타내 보여야 함이 마땅하다.
이는 이렇게 산 자가 된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해야 구원이 될 만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어떤 하자가 있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이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지시 즉 그 모든 말씀에 절대 복종하지 않고 자행자지로 나가 마치 스스로가 머리인 듯이 행세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함 즉 범죄가 되어 죽은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오직 그리스도(머리되시는)를 위해 살지 않을 때(고후 5:15) 우리 자신의 구원이 무의미한 것이 되므로, 우리 자신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뜻이다.
이런 경고에 근본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건만 엉뚱한 의미로 해석하여(에덴낙원에서 피조물인 "옛 뱀 곧 용"(계 12:9/20:2)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딴판으로 해석하여 인간(아담)으로 하여금 죽음에 빠뜨린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경고로 가득한데 이런 경고를 경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혀 다른 의미로 멸망의 해석을 하고 있어 당초의 에덴낙원에서의 비극 그대로를 되풀이하고 있으니 어찌 아니 슬프리요.
우리는 그래서 '바르게 영원히 살기(바영살) 회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회개하여 바르게 살기 시작해야 그 결과로 영원히 산다는 뜻이다.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함으로(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바르게 살지 않고는 영생이 불가능함을 성경대로 인식시킴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오늘날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도 옛 방법 그대로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건만 마치 다른 것처럼 모두들 속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성경을 믿지 않는다. 성경을 믿는다면서도 피조물 인간의 소위 "성경 해석"을 더 믿는다. 어쩌면 이다지도 당시 에덴낙원의 비극적 상황을 빼닮았으랴. 역사는 되풀이하기에 역사를 모르는 자는 망한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하나 이런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 놓고 믿으니 바울 사도가 당시의 똑같은 사정을 설명하면서 이미 표현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 그대로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지, 자기 자신을 다 바쳐 사랑하심이니 그 절절하고 애틋한 사랑의 실증(實證)이 갈보리 언덕 위에서의 십자가 고난이시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 받은 존재다. <형상>이니, 그 <본체>와 항상 단짝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사탄이 인간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마침내 살인자가 된 것도 이런 인간의 영광,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었기에 이를 시기한 것도 그 동기의 하나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만 자기 수중에 넣어 두면 '본체'이신 하나님도 자기를 무시하시지 못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을 한 것이다.
지금도 그런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교만과 자기 과신의 산 표본이 되어 있다. 사탄이 그런 (제딴은 성사 확률이 많다고 믿어) 계략을 짜낸 것도, 에덴낙원에서의 그 범죄(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 이전에도 이미 죄(자아중심이 그 뿌리인)가 드러나 하나님 눈 밖에 나 있었고 멸망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았기에(마 25:41) 그 멸망을 회피하려는 꾀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는 인간(아담)을 평소 시기하여 눈의 가시처럼 여기던 차에 인간을 자기 계략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을 꾀어 자기 말을 듣게 함으로써 일단 죽은 자로 만들어 자기 수중(手中)에 두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인간 구제의 방편을 취하시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당신께 죽음의 고통(우리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심으로써)이 가해지는 극한 상황에 이를지라도 오로지 원리원칙을 따라 문제 해결을 꾀하시는 본시부터의 의지를 일관되게 추진하시니, 사탄으로서는 그 노리는 틈을 얻지 못하는 제1차 패착(敗着)이었다.
즉 친히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 죽으심에 나아가는 지경에 이르러도 이 뜻을 변치 않으신 것이다. 사탄은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여차한 경우에는 자아중심으로 나가실 줄 알았는데 완전히 그 기대가 빗나간 것이다. 고로 이런 사탄이 이 세상에서 신(神)이 되어 지배자 곧 이 세상 임금("prince")이 되어 있는 현재의 우리 상황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상대로 하는 전쟁(전투) 그것이다. 애초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던 아담의 원 위치로 우리를 복귀시키신 결과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담의 위치에 내가 있으므로, 아담으로 말할 때 사탄의 반역을 설욕하는 기회의 형태라 할까.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로서의 불가분이다. 그 어떤 인간 관계보다 가까우므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하셨다. "어떻게 하면 아내/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또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척도라고 여겨지는 "잉꼬 부부"도 훨씬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꼬?" 하는 새 피조물로서의 새 삶의 잣대다.
새 피조물은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구원 받아 '다시 나서 다시 사는 삶'을 뜻한다. 지금까지의 삶 즉 "어떻게 하면 아내/남편을 기쁘게 할꼬?"와 상충(相沖)할 정도로 (실은 상충 정도가 아니라 그런 "세상 일에 대한 생각"을 압도, 능가, 제압함이 정상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꼬?"를 의식하지 못하는 삶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숙한 단계의 믿음 생활이 아님이 명백하다. 아직 어린 아이의 단계로서 따라서 많은 시험과 시련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싸움에서 대장부답게 감연히 앞으로 나서서 맞닥뜨릴 단계가 돼 있지 않다. 시급하게 자기 점검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스라엘 광야교회의 예를 들자면 아직도 가나안 땅에 들어서지 못하고 40년 광야 길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제자리 걸음이다.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여 "먹을 것 풍족하던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행하여 모세가 잠시 자리를 떴다고 모세 대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돈이나 기타 가시적인 힘)를 부어 만들어 놓고 그것만이 내가 기댈 언덕이라며 만족해한 것과 같은 모양새의 심히 불안정한 상태다.
내가 그리스도를 그 정도로 의식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알 것인즉 항상 이 잣대로 자기를 재어보고 저울질해 보면 스스로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아내/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은 항상 아내/남편을 대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꼬?" 역시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나 분명 내 앞에 항상 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진실이 그러한데, 이 수준에 미달하지 못하면서 어찌 "내가 주님을 사랑해요" 할 수 있는가.
충성으로 헌금 내고, 교회 충실히 나가고, 교회 활동 열심이고... 그런 것을 주님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비극적 실태다. 물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이 없으나, 문제는 '하나님 사랑'과 '사람(그리고 형제) 사랑'을 별개로 생각하여 사람(형제) 사랑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그것이 탈이다. 요한일서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해서 씌어진 편지다. 그러기에 <사람 예수 그리스도>시다.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시므로 단지 지금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는 그 차이뿐이다.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시지 않는 분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첫째 현상이 그 사랑의 상대를 <생각함>이다. 왜냐면 그 생각 자체가 기쁨이요 낙이요 보람이요 따라서 힘이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의 생명이니 태양이니" 하는 언사들을 사랑하는 상대에게 서슴지 않고 쓰는 것이 아닌가. 우리 각 사람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기에 그래서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한 사람" 곧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한 사람"이시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세 사람, 네 사람(또는 그 이상)간의 사랑 즉 삼각 사각 관계가 아닌 단 둘만의 사랑으로서의 그 "한 사람"으로 각자에게 풍성하시고도 오히려 넘치고 남으신다. 사람되어 계심, 나와 하나 되어 계심이 바로 그 뜻이다. 더군다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똑같은 위상(位相)으로 같이 계심이니 그래서 이와 같이 둘이 하나로 계심을 두고 "아버지" 또는 "아들"이시라고도 할 수 없어 "성령"이란 “이름”(마 28:19)으로 부른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계시는 모습은 우주 속에 둘도 없다. 이 지구상에서의 사람이라면 남자 아니면 여자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주님을 그처럼 '한 사람'으로 모시고 동행, 동거, 동고, 동락, 동역(同役)할 때, 세상에 계실 때의 모습처럼 남자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천사가 그런 구별이 없듯이 이 구별은 원래의 인간(여자가 생기기 전의 아담)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가 장차 "부활의 자녀"가 되면 그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된다.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남자가 아니라 그냥 ‘완벽한 사람’이었음을 상기(想起)할 일이다.
여자가 생기니 그 때 비로소 남자로서의 육체 구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로 존재하던 것이 양쪽으로 분리되니 이제는 각기 서로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완벽하게’ 되어 있다. 그렇잖고 아담이 처음부터 남자였다면 또는 처음부터 인간을 양성으로 만드시려 했다면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기 이전에 벌써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라는 또 하나의 사람을 만드셨을 것이요 그 연후 에덴낙원도 지으셨을 것이다.
따라서 남녀 관념을 불식시키지 못할 이유도 없다. 아니면,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형님처럼 언니처럼 친구처럼,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과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완벽한 <사람>이시므로 아무 제약이 없어 어떤 모습으로 인식해도 좋다. 단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나를 사랑하는 분 따라서 가장 가까워 그 모든 말씀을 내가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나의 주(主, 나를 소유하신 주인)님으로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도들 피차간에 대할 때도 이 같은 새로운 관점에서 대함이 정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한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한다"(고후 5:16) 함과 같다. “육체로 알지 않는다” 함은 성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봄이 온당할 것이다. 장차 우리가 온전한 사람 즉 애초 창조된 아담의 아름답고도 늠름한 모습으로 변환될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현재는 여자는 아름답고 남자는 늠름하다고 대개 표현하는데 아름다움에 늠름함이 가미된 온전한 아름다움과 온전한 늠름함은 우리 중 아무도 구경한 일이 없다.
형제들을 대할 때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시는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피조물로 대하게 된다. 그렇다고 성도들 간의 교제시 마치 성별이 없는 것처럼 성을 무시하란 뜻은 아니다. 젊은 남성 디모데에게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바울이 경고했다. 시험하는 자가 눈독을 들이는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모든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고 어리석은 자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의미.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각 사람의 특색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데 있다(고후 5:15/롬 14:7-9/갈 2:20).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화, 생활화되어 있다. 고로 말만의 형제 즉 거짓 형제를 분간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물론 개중에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14:1/고전 3:1). 믿는 사람들이 모여 합심 기도할 때에도 단 둘일 땐 가족 아닌 남녀는 피하는 것이 원칙이다. "원칙"이라 할 때는 예외도 있다는 뜻.
자기 스스로는 아무리 천사처럼 천진무구하다 자신해도 남들 즉 불신자들에게 일부러 이런 저런 비방거리를 만들어 제공할 필요는 없다.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거룩한 이름이 불신자의 입 언저리에 오르내리게 하리요.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없는 유럽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예로부터 이런 것은 철저히 지켜 왔다. 상식 수준의 일이기 때문이다. 요한 웨슬레도 이 점을 특별히 강조했었다.
상식 수준에서 얼마든 판단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기도회로 모일 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모이도록 했다.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름이요 또한 명령으로 알고 준행함이었다. 오늘날 세상 자체가 '성 개방'이니 '성의 자유'니 하는 판에 흠될 것이 없다 할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엄연한 성의 방종이요 타락이지 다른 이름이 붙여질 여지가 없다. 악령들은 원래 그런 거룩하지 못한 종류들로서 이 마지막 때가 자기 때이므로 인생들을 부추기고 선동하여 쾌락주의로 흐르게 하는 장본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는 일에 이런 육체적 안락은 그 최대 장애 중 하나다. 그래서 “네피림”(창 6:4)이라는 것도 나왔고 하나님께서도 “너의 씨(seed)”(3:15)라 하여 이런 사실을 미리 예언하셨다. 따라서 올바른 안목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불신자들이라면 그리스도인마저 그런 무분별한 자세를 취할 때 그 영혼들을 실족케 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바울 같은 사도도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할" 필요성을 강조한 이 세상인데, 집요하게 성도들의 타락과 범죄를 목표하여 '우는 사자'처럼 날뛰는 시험하는 자 앞에서 일부러 그런 공격의 빌미와 허점을 제공할 이유가 무엇이랴.
인생이 구원 얻는 길을 차단시키는 효과 있는 방편의 하나로서 이 세상 지배자 이 세상 신(神)이 애용하고 있는 것이 이름도 그럴싸하게 붙인 이 '성적 개방'임을 어찌 모를 것인가. 이런 사회 풍조는 20세기에 들면서 부쩍 성행하기 시작한 타락상의 하나다. 과거에도 물론 사정이야 동일했지만 오늘날처럼 드러내놓지는 않았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지 못하게 그리고 가장 야수처럼 만드는 것이 다름아닌 <혼외(婚外) 성관계>다.
소위 기독교 아동문학가란 평판의 K모씨가 기독교 잡지라는 데에 글을 올려, "상대를 불행케 만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성관계라면 무난하다"라는 무절제한 발언을 했는데 그가 말한 '불행'이란 이 세상에서의 불이익을 의미한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멸망, 위법행위, 질서 문란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악한 욕심을 앞세우는 불법 자행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가 일시적으로 창녀와 관계해도 한 몸으로 간주하는 터이다(고전 6:16).
이 세상에서가 아닌 '영원한 불행'이 관심사다. 육체 관계는 한 몸된 사이에서만 허락된다. 비록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도 그리스도인은 혼전 관계가 용납되지 않는다. 급하거든 결혼을 서두를 일이요 그럴 형편이 안되면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 "혼전 관계"는 사랑이란 미명하의 자기 욕심일 뿐이다. 자기를 위한 삶이요 낙의 추구이지 별 것 아니니 자아중심이요 바로 이 자기 위주로 인해 사람은 멸망에 이른다.
남녀가 한 몸되는 성경의 표준은 부부가 되어 비로소 이루어지는 관계이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탐욕 즉 범죄로 간주된다. 탐욕은 우상 숭배다(골 3:5). 즉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김이다(롬 1:25).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사랑의 하나 되는 이치를 따라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이 됨으로써 한 몸됨이다. 따라서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을 주장하여 다른 여자를 대할 수 없고 여자 역시 남자에 대하여 그런 자세를 가질 때, 그것이 한 몸되는 기본 구조다(고전 7:4).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의 형통한 삶을 바라기커녕 오히려 그런 것을 경계함으로써 미워하는 것(요 12:25).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릴 수 있다고 가정해도, 그렇게 누리는 것을 첫째로 원수 사탄 곧 이 세상 지배자요 이 세상 신(神)이 용납하지 않는다. 이 세상이 자기 영역이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자기와의 전쟁 대상이고 원수들인데 그냥 버려 둘 리 만무하다. 원수인데도 이를 환대한다면 그것은 그 환대 받는 대상자에게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이유가 있기 때문. 원수인데도 적대시를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그와 한 통속이 되어 있다는 증거다. 나는 모를지라도 사탄과 천사는 알고 있다.
세상에서 그 자신 고난을 받으면서도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을 돕고 구제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갈 6:10/엡 4:28). 이 둘이 상치되는 것이 아님은 삶의 기본 바탕이 편안하고 안락한데 있지 않고 사랑하는데 있기 때문. 또 반드시 부유해야만 구제하는 것도 아니다. 편안하지 못한 이 세상 삶이지만 이웃의 고통을 사랑으로 함께 나누려 함이다. 물론 구제하는 등 선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 영혼을 구원하자는 차원에서의 일이다. 따라서 구제만 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기를 게을리 한다면 선행 아닌 악행이 됨이니 자아중심으로 하는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
영원한 죽음의 멸망 가운데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구원 얻을 기회를 얻어 내가 구원되었으면 다른 사람 구원해내는 것이 시급한데, 그래서 우리의 구원 받음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요 20:21) 사람들을 구원함에 있는데, 내일도 기약 못할 이 세상에서(눅 12:20) 조금 편하게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런 일에 빠져 지내리요.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것은 썩는 양식이 아닌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도록 가르치라는 분부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기본 바탕인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 시종일관하는 고로, 사랑인 까닭에 영원한 미래사 곧 그들의 영혼 문제가 이웃을 대하는 일차적 관심사다. "생명이신 조물주 하나님께 다시금 연결되어지는 관계 회복"이 가장 우선이다. 가난 구제보다, 병마의 고통에서 해방됨보다,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조물주 하나님을 이웃에게 알리고 영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관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둘이 하나 되도록 맺어주는 것이(고후 11:2) 선결문제다.
자나 깨나 "어찌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고 생각하는 새 인간형의 피조물을 만들어 내는 일, 만들어 가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은 사랑의 시원(始元)이 조물주께로부터 나왔다는 의미다. 조물주를 떠나서는 사랑을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는 뜻. 이유는 사랑은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일이고 하나 되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나라는 말은 처음에 하나였음을 전제하고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생겨 둘이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만물 만상의 대칭 원리가 하나님의 제조 마크(make mark, producing mark)임과 같이 사랑 역시 바로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나(요일 4:8) 이 사랑이시라는 말은 무조건 사랑하심 즉 죄를 지어도 즉 자아중심으로 나가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그 뜻이 아니니, 그러면 왜 범죄한 사탄을 벌하셔서 영원한 멸망에 처하셨고 아담은 범죄한 결과로 죽음에 이르렀겠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은 그 존재하심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 되는 관계로 계심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의 시원(始原)이요 근본이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이 있을 수도 사랑을 논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도 철저히 이 사랑의 법칙 곧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사랑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일방적인 사랑이 되는데 원래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원리원칙을 따라 사랑하시므로 범죄하는 자는 당연히 죽음밖에 없다. 때문에 사탄을 위시한 악령들은 다시는 용서가 없고 아담은 긍휼히 여기심 받지 못하고 말씀대로 선악과를 먹은 그대로 죽음에 이르렀다.
생명과를 먹으면 도로 영생하게 되지만(창 3:22,23) 이를 허용하지 아니하시고 에덴낙원에서 엄정한 법대로 추방하신 것이다. 사랑은 3위1체의 원리를 따름이요, 멸망시킴도 죽게 하심도 이 원리에서 벗어남이 없다. 하나였으나 지금은 둘이고 그러므로 이 둘은 처음부터 하나였고 따라서 지금도 하나이고 영원히 하나일 뿐 아니라, 그리고 '이 하나는 또한 언제나 둘'이라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3위1체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3위1체의 원리가 곧 사랑이요 3위1체 원리의 정체가 사랑이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아담의 범죄는, 상식대로 하면 되는데 상식에서 벗어난 결과다. "시저(Caesar)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하신 대로, 하나님에게서 났으니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게 하시고 존재하게 하셨으니, 자기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이야 자기를 죽게 하시든 살게 하시든 그 지시를 따름이 당연한 것이지 거기에 달리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 살도록 만드셨으니까 죽게 하실 리도 없고, 또 설혹 "하나님처럼 될까 싶어" 거짓말을 하신다손 치더라도(사탄의 말대로) 그 거짓말을 하신 대로 따를 것뿐이다.
나를 지으신 분이 가령 거짓말쟁이라면 나는 그것이 설혹 거짓말인 줄 안다고 쳐도 내가 거짓말 자체는 미워할지언정 나를 지은 이의 그 거짓말에는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니 왜냐면 그가 아니었더면 내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물론 나의 부모가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그 자식인 나도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라는 이야기는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유 즉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이이실진대 당연히 그러한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 각자의 자세이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죽으라 하시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피조물을 만드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은 오로지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한 몸 원리에 의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그 사랑이 증명되어 이제는 확실한 근거가 되어 있다(롬 5:8).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신 대로 이 이상 사랑을 더 증명하실 것도 없고 필요도 없다. 자신을 다 내어주셨는데(갈 2:20) 무엇이 또 줄 것이 있다는 말인가(롬 8:32). 있으면 그것도 주셨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최고 한계다. 3위1체의 원리에서 아버지께는 아들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아버지 역시 당신 자신을 다 내게 주신 것이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피조물인 사탄의 말을 더 믿은 것이요 아담은 여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이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롬 1:25)이다. 자기가 아닌 다른 피조물을 따름이 어찌 자아중심인가 한다면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자기를 더 소중하게 여기든 남을 그렇게 보든 이 경우 나 자신 그리고 남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 피조물을 더 위하고 섬김이니 나 자신도 그런 피조물로서의 우상 중의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이신데 피조물(그것이 나 자신이든 남이든)을 머리처럼 위하고 따른다는 뜻이다. 탐욕을 우상 숭배라 했듯이(골 3:5) 자아중심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인 자기의 부모 처자식 등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그리스도를 사랑함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범죄에의 지름길이니 곧 우상 숭배다(마 10:37). 부모는 자식의 머리다. 지식, 판단력, 지능의 우열이 문제가 아니라 '머리와 몸'이라는 관계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것이다.
역시 남자(아담)로부터 여자가 났기 때문에 여자의 머리가 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질서다. 이 질서를 엄중하게 다룸은 당연하다. 때문에 여자는 남자들도 함께 있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즉 앞장서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여 남자를 다스리는 일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14:34-37). 이것을 바울은 주님의 명령으로 전달하고 있다. 여자가 교회 교역자로 있는 것은 성경을 무시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
여자가 가르치려면 같은 여자들을 상대로 할 일이다(딛 2:3). 여자가 나서지 않아도 남자들로써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충분한 것이다(고전 14:36). 당시에도 "여자가 좀 앞장선들 어떠냐"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이것은 이 세상에 있을 때의 일들이다. 영원 세계에 들어가면 남녀 구분이 없는 까닭이다. 교회에 속한 여자로서 크게 이바지하는 길은 남다른 기도이다(눅 2:37/딤전 5:5). 이 역할은 말씀 전파 또는 가르침과 쌍벽을 이룬다(행 6:4).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 되는 관계에서 작은 자가 큰 자를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하는 것을 전제하는, 작은 자의 위함(큰 자에 대한)이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함이 중단되거나 원활하지 못할 때 작은 자를 위하는 큰 자의 흐름 역시 원활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특수성을 갖게 되는 것이 이런 종류의 상호 작용이다. 다시 말해 하나되는 관계가 더 이상 유지되거나 지속되지 못한다.
성경으로 말하면 믿음이 사랑이요 순종이요, 순종이 믿음이요 사랑이며, 사랑이 곧 믿음이요 순종이다. 사랑의 순종이 없는 믿음은 믿음으로 인정되지를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를 대상으로 하는 구원이라고 명백히 하고 있는 성경이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우리의 생명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를 말하는데 이 하나 관계가 그 하나 되는 원리를 따라 원활하게 작동되지 않으니 구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음이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다. 갑이 을을 위한다고 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니 을도 갑과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 그 특성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고후 5:15).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롬 14:9/고후 5:15). 우리를 살리신 결과로서의 그 삶의 양상이 바로 이 몸과 머리 관계가 핵심이기 때문.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똑바로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무조건의 사랑’이라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실제 뵙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상만 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 오늘날의 비극적 실태다. 지어낸 하나님, 망상 속의 하나님으로써는 구원되지 못한다. 현실의 하나님, 십자가 상의 고난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그 실제 사랑에 접할 일이니, 이 십자가 고난은 이상 설명과 같은 철저한 법질서 가운데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무작정의 사랑이라면 그렇게 우리 위해 고난을 당하시지 않고도 용서하실 수 있고 영생하게 하셨으리라.
왜 이 원리원칙을 따라 엄정히 처리하시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삶의 최대 행복을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가르치시고자 함이다. 믿음, 순종, 사랑 이 세 가지의 동일성과 관련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충분히 나타나 있다.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운다는 말씀처럼(히 5:8,9), 고난을 통하여 믿음도 배우고 사랑도 배우니 이 세상은 '배우는 배움터'요 온전하고도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기 위한 수습기간(修習期間)이라 할 것이다.
이 이치 저 이치로 요컨대 고난은 이 세상에서 필수적이 되어 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것이라기보다 어차피 되어진 일이지만, 그것을 전화위복되게 하셔서 무의미하게 된 것을 한량 없도록 의미 있게 만드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지혜이시다. 물론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는 것이나, 이상과 같은 원리원칙을 따라 그렇게 하시니, 미리 아시고 정하심이 없이 원리원칙대로만 하신다고 해도 같은 의미가 된다.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한 대로(고전 13:13) 사랑의 실천, 순종이 없으면 나머지는 알갱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사랑은 사랑의 순종을 말함이다. 입으로는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그래서 주님, 주님 말 끝마다 불러도 행함이 없으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7:21). 사는 방법을 제대로 따라야 비로소 사는 것이니 그렇지 못하면 사탄이 인간을 죽이고 가인이 아벨을 해치는 결과밖에 나올 것이 없으니 그 산다는 의미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의 원리를 따라 만물을 만드셨고 지금도 유지하시고 영원히 그러하실 것이며, 이 사랑의 원리를 따라 만물이 서로 짝을 이루어 지금 우리 눈앞에 존재하고 있고, 이 사랑의 원리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이 사랑의 원리를 따라 우리가 지금 믿음 생활을 하여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려는 것이다(요 20:21,22/4:34). 말세가 되면 악이 성행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하심도 같은 원리로 말씀하심이다.
이 말씀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면, "끝까지 믿는 자"가 그렇게 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 "끝까지 그 사랑이 식어지지 않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그러니 이 사랑의 원리를 따라 정사(正邪)를 판별할 것이요 진위(眞僞)를 구별할 일이다. 어떤 능력을 행한다고 거기에 혹할 일이 아니다. 육신의 안일 제일주의로 나가 육신의 질병을 고친다 해서 병부터 낫고 보자는 식으로 아무 영(靈)에게나 찾아가 빌 일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원리로서의 사랑의 말씀과 구원을 가르치는 성경의 교훈을 따라 그것을 나침반으로 삼아 인생 행보의 방향을 바로잡아 가야 할 것.
성경과 어긋나는 교리나 해석을 하거든 아무리 죽은 사람 살리는 기적을 행하더라도 거기 붙좇지 말 것이다. 성경을 부인하거든 아무리 기적을 나타내어 당장 숨 넘어 갈 듯한 고통을 치유해 준다 해도 거기 달려가지 말 일이다. 차라리 이 육신의 몸 병들어 피폐하고 죽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고 그 영광의 영원한 생명을 붙잡는 것이 만고에 후회 없는 영원을 두고도 감사할 생명의 길임을 명심할 일이다.
이 육신의 고통 잠시 면하려고 영원한 고통에다 자신을 내맡기고 팔아 버린다면 그런 어리석음이 없으니 영원을 두고 후회할 일이다. 이 시대는 '거짓 기적'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고 판치려는 '마지막 때'다. 계시록에서 말한 바 그 "화 있을진저!"(계 12:12)의 세대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고 희게 하는"(단 12:10) 시대다. "정결케 하고 희게 하는" 일이 "연단을 받음"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에 유의할 것. 뜨거운 불에서 연단을 받지 않으면 쓸모없는 쇳덩이로만 남고 강철은 되지 않는다. 이것을 "다 알고 현재 진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항상 생각나게 하려 한다"는 베드로의 간절한 소망과 충정이 여기에 있다(벧후 1:12).
그리스도의 사람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갈 1:10). 마지막 아담과 하나된 그리스도인(人) 각자는 세상 전체와 맞서야 함을 가리킴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시대를 통해 소수 또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택 받은 자로서의 우월성 같은 것을 말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 우리가 세상의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상기시킴이다.
그래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는" 자에게 대한 경고를 미리 말씀하시지 않았던가(눅 9:26). 교회에서 가르치고 경고한 그대로 바울 사도 자신 "자기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이루어" 나간 인물이다. 때문에 "내가 내 몸을 쳐서 항상 복종시킨다" 하였고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자기가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함이라" 하였다(고전 9:27). 그리고 곧 이어 이스라엘 "광야교회"(행 7:38)의 행보를 기억하여 마음에 두도록 엄중 경고한 것이다(고전 10:1-13).
그러나 자기가 구원 받음이 목적이 아니었으니("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해서) 이는 그의 다음의 진심 어린 토론에서 드러난다. 즉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하는 바라"(롬 9:3) 한 것이다. 오직 산 자로서의 살아 있는 책무를 다함이요 산 자이니까 "마땅히 할 바를 다하는 것"(눅 17:10)뿐임을 가리킨 것.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다함인즉 오직 "무익한 종"(:10)일 뿐이다.
무익한 종이라는 자각에서는, 자기의 한 일을 자랑할 일이 없고(고전 1:29,31) 그것을 담보로 하여 무엇 즉 자기 구원 같은 것을 기대해보는 그런 따위는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 마땅히 할 일을 아니할 때, 도리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함이니 스스로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전 9:16) 하였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는 그것은 기필코 자아중심이 그 원인이다.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고(눅 9:26)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는 그래서 핍박을 면해보려는(갈 6:12)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일체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자아중심으로 인한 필연적인 재앙과 저주를 말함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함이 그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 자아중심이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음이요 때문에 주님의 뜻을 행함이 없고 주님의 일을 당연히 할 나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가 없다"(롬 14:7-9/고후 5:15)는 기준대로 하면 그 "우리 중"에 포함되지 않으니 "믿어 구원 얻은" 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산 자는 마땅히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야 함이니,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해야" 영생이고 "자아중심으로 나가면("당을 짓고"의 우리말 번역 또는 "contentious"의 흠정역은 틀린 것이고 self-seeking, selfish가 정확한 번역) 멸망"이라 한 것이다(롬 2:7-10).
다시 강조하지만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충분히 알아 그 방법대로 행하는 자만이 영생할 수 있는 것.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인간 비극이 있어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 아니던가. 덮어놓고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부자가 거지에게 적선하는 양 몇 푼 던져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생 구원을 착각하는 것은 사탄의 함정이요 덫이니, 한시 바삐 이 사탄의 죄와 죽음과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세상 종교는 그 자체가 진실이 아니고 거짓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체적인 방법을 밝히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막연하고 애매 모호한 말로만 얼버무리거나 아니면 당치도 않게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을 버젓하게 무슨 큰 이치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여 많은 사람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듣고 마음에 생각하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길 위에 뿌려진 씨앗을 새가 날아 와 쪼아 먹듯이" 없애버린다고 하셨다(막 4:4). 고로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전력을 다해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말씀을 빼앗는 것이 되고 또 어떤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이냐 하면, "말씀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 여하"가 그 답이다. 하나님 택하신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사람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손 못대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말씀을 듣고도 유의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소홀히 하기 때문에 얼씨구나 하고 와서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들은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귀하게 여겨 두고두고 명상하는 것이 믿음을 자아내게 하는 방법이고 이 경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감히 손도 못댄다.
마리아가 믿음이 좋았다는 것은 그 보고 듣는 것을 "마음에 두었기"(눅 2:51) 때문임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야곱형의 인간과 에서형의 인간을 구별한다. 야곱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곰곰이 묵상하는 유형이었다. 이에 반해 에서는 생각하는 것보다 충동적인 행동의 사람이었다. 깊이 생각하고 행동에 옮긴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육체가 요구하는 대로 분주하게 쏘다니는 그런 종류의 활동가였다는 의미다. 결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에서는 자기에게 굴러 들어온 복까지 차내는 것이었고, 야곱은 원래는 자기 몫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차지하는 것이 된다.
즉 에서는 면류관을 빼앗긴 것이고 야곱이 그것을 차지한 것이다(계 3:11). 품성과 기질이 에서 같지 않은 사람들도 야곱처럼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 해야 할 것이요 야곱과 같은 성질의 사람도 에서처럼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게 될 때 에서의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내일 일도 기약 못하는 참담한 인생 비극이건만) 세상 낙을 좇아 거기 정신이 팔려 일비일희(一悲一喜)할 것이 아니니, 인생들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이유가 회개에 있음이다(눅 13:3,5). 내가 회개했으면 남들도 그렇게 되도록 전력을 다함이다.
무슨 물건이든 그 진가(眞價)를 아는 자만이 그 소유주가 된다는 바로 그 뜻이 된다. 가치를 모르면 스스로 버리게 마련이다. 아니면 심드렁하게 여겨 방치해 두다가 빼앗기거나(계 3:11) 쉬이 잃어버리게 된다(2:4,5).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하나님의 말씀도 예외없이 그렇다. 그 가치를 아는 자는 자기 전 재산을 다 들여서라도 즉 맞바꾸어서라도 그것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있다(마 13:44,45). 세상 삶과 천국을 맞바꾸는 자만이 천국을 차지하는 것. 천국도 원하고 세상 사는 것도 원하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죄(자아중심)'를 '천국 또는 구원'과 영원히 맞바꾸지 못하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3위1체 원리에서 갑과 을은 서로 대칭이 되어 있음을 말한다. 대칭이 되어 있다 함은 서로가 한 본질로서 유사성이 있고 인과 관계에 있지만 완전하게 별개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별개이면서도 하나로 존재한다는 뜻이니 생명과 죽음은 상극이지만 그것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뜻은 생명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존재한다는 증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가분이다.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금 이 한 때뿐이고, 영원히 양립된 것으로 그리고 분리되어 있는 모습으로 오는 세계는 존재한다. 그 때가 아니더라도 지금 역시 인간 사후(死後)에는 그렇게 철저히 구분된다. 이를 성경에서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다"(눅 16:26)는 말로 명백히 알리시고 있다.
그러므로 죄와 의(義)가 동거(同居) 병존(竝存)할 수 없다. 불법, 불의를 좋아하게 되면 의와 선을 멀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므로 그리 되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생명과는 분리이다. 의를 사랑하게 되면 불법을 미워하게 되어 있다(히 1:9). 흑이 아니면 백이니 그 중간 지대는 없다. 여전히 죄 짓고 죄인으로 있으면서 구원 받을 줄은 추호도 생각하지 말 것이다. 오늘날의 특징인 "배도(背道)"(살후 2:3)는, 이 세상에서는 부득불 죄인으로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얻는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세상 종교로서 인간이 지어낸 교리이지 성경에는 없다. 이런 주장은 그 이면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대한 신성 모독이 스며 있으니 이런 것은 사탄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라고 악선전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새 창조라고 하면서도 인간의 처음 창조의 죄의 잔재는 손도 대지 못하신다는 말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성경의 폄훼(貶毁, 깎아 내리고 헐뜯음)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니, 하나님은 성경에서 선언하는 대로 그렇게 전지전능하시지 못하다는 비방까지 스며있다.
간악하고 야비한 사탄이 수작 부리는 이런 소리를 액면 그대로 용납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에덴낙원에서의 어리석음까지도 대를 물려받고 있으니 될 말인가. 성경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인하여 "죄의 몸이 멸하여"(롬 6:6) 없어졌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믿어도 여전히 육신에 사로잡혀 있는 바울 자신의 고백이라고 기어코 우긴다. 육신에 사로잡혀 있는 바울이 어째서 "자기 몸을 복종시킬"(고전 9:27)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따져보려고도 않는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즉 이와 같이 어느 모로 보나 분명하여 그르칠 수 없는 성경의 내용임에도 이처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도 그렇고, 절대 다수가 이 왜곡시킨 내용을 성경의 내용으로 의심없이 믿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음이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것을 이다지도 그릇되게 해석하기에는 인간 이성과 지성은 너무나 훌륭하게 창조되어 있다. 그러니 악령 사탄이 이 세상 신이 되어 이제는 육체에 불과한 인간들을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성경의 내용 그대로 인간을 조종하고 있다는 증거다.
바로 이런 것이 이러한 성경 내용의 진실됨을 그대로 입증함이다. 성경이 난해하거나 그 내용이 명확히 표명되지 않았다면 문제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이 정도로까지 엉뚱하고 전혀 다르게 풀이해놓을 뿐 아니라 그것도 절대 다수가 매달려 믿고 있으니(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극소수인데도), 이는 사람으로 난 것이 아니라 악령 사탄의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성경이 진실된 기록임을 이로써도 입증된다 하는 것이다.
세상에 본래 가짜 없는 진짜가 없어 진짜에는 반드시 가짜가 들어붙는 법이나, 그러나 가짜가 이와 같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주도권을 쥐고 번창하여 성행해 온 예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련된 이런 일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없는 것. 다른 데에서는 악령이 전혀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독 인간 구원에 관련된 성경에 관해서만은 유일한 예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니 바로 이 점을 말함이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이니 영생의 길은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과 문은 걷기도 수월하고 들어가기도 쉬워 항상 사람들로 북적댄다. 고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고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엄중 경고하셨다(눅 13:24).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이다. 일상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니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 확실하게 하려고 "구원 얻는 사람이 적습니까?"하고 여쭈어본 결과 얻은 대답이니, 한 술 더 뜨신 것이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와 선물"의 구원이라 하니 사람들이 무턱대고 안일하게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들어가려 해도 못하느냐" 하면, "행악하는 모든 자들"임을 명시하셨다(눅 13:27). 다시 말해 의롭게 선하게 사는 것이 이 악한 세상에서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말씀하심이요 그런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이 들어가는 고로 오죽하면 "천국은 스스로 침입하여 강탈하는 자의 것"이라 하셨을까(눅 16:16/마 11:12).
성경은 위로의 말씀보다 오히려 경고로 충만해 있다.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아무리 표방해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마 7:21).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의 일을 했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나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 하신 대로, 능력 행했다는 또는 믿음 있다는 증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어떤 행위를 했느냐'로 생사가 가름된다.
행함
믿음으로 시작한 종착지가 행함으로 좌우됨이다. 당연 귀결이다. 죄 용서 받는 조건으로서의 회개가 "불법을 행함"을 버림, "돌이켜 각자의 악함을 버림"(행 3:26)이니 곧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인 것.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기"(요 5:29)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롬 2:6) 때문.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기"(마 16:27)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 하였고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기에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하였다. "참고 선을 행해야"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과 영생으로 보응되고 불의를 따라 행하는 자는 노와 분으로 보응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고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7-13)는 성경의 선언과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한다"(롬 3:28)는 선언과의 차이를 아는 것은 기초 상식에 속하고 무슨 대견한 것도 아니다. 후자를 강조하는 언급으로는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행 13:39)가 있다.
그 외에도,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롬 3:2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음"(롬 3:24), ,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롬 5:1),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딛 3:7) 등이 있으나, 이상 두 가지 기본 전제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일방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고로 로마서가 난해하다고들 하는데 성경을 읽을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요 8:43) 하심과 같다. "하나님의 율법 행함"(롬 2:13)을, '그리스도 오시기 전'과 '오신 후'로 구분하여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필요 없이 율법을 행함으로 능히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 함과 그리스도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 능력의 구원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율법"(7:10) 을 능히 행할 수 있음과는 본질적으로 하늘과 땅 차이를 설명하는 바울일 뿐인데, 왕청스럽게 전혀 다른 의미로 같다 붙인 것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3:20)이라 한 것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의 부연 설명이다. 율법의 용도가 단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함이라는 생각은 보통 착각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미 "신령한"(7:14) 것이고 "선한 것"(:16)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선하지 못하여 단지 악하고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14)는 사실을 강조함이니, 그런 죄인으로서 율법을 아무리 행해보아야 그것이 구원으로 연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몸(육신)이 파괴된 연후에야(롬 6:6) 그럼으로써 의인으로 인정된 다음이라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율법을 준수할 수 있게 되는 것. 모름지기 율법, 계명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전시용도 과시용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심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신다(요 15:10) 하셨으니 우리가 지키는 하나님의 율법-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이 그 동일한 성격의 동일한 계명이다.
율법(계명)은 다름아닌 사람 사는 법이다.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도리를 명령 또는 지시 형식으로 갖추어놓은 것뿐이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제쳐놓고 어찌 제대로 살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제대로 사는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범죄가 왔고 그 대가로 현재의 불행이 옴으로써 구원을 논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그런데 범죄하여 이미 죽음에 이른 처지이다보니 그 죽음을 타파하고 생명으로 다시 복귀함이 만만치 않고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신 것이요 그래서 죽은 자로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 우리 구원이다.
그러므로 범죄하기 이전 아담의 상태로 다시 되돌려놓으신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아무 것도 없다. 그 '방법'이 "하나님의 아들됨"에 있다는 것뿐이다. 범죄 전 아담의 상태는 죽음이 없는 죽음을 모르는 '하나님의 창조 그대로'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일정 기간 살다가 죽는 것으로 만들어놓으실 이유가 없다. 그 증거는 영혼의 조성이니 영혼은 한시적인 육체와는 별개의 영원한 속성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영생이었다. 이 영생을 영생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어놓은 것이 그 누구도 아닌 아담 자신인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천신만고 끝에(당신 자신께서 사람되시어 십자가 죽으심을 당하시는 정도였으니까) 이루어놓으신 구원이 이렇게 죄짓는 것도 해결 못한 채 여전히 죄에게 포로된 상태로 남겨두실 리가 없는데도 옛 육신에 사로잡혀 불가항력적으로 죄짓던 그 행습 그대로 고민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탄식하게 버려두셨다는 교리는 가히 하나님의 신성 모독 죄에 해당된다 할 정도로 심각한 성경 왜곡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부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세, 누가 이 사망의 몸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랴" 하는 탄식의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도록 하는 그런 아담으로 만드셨다고 하는 말과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사탄이 인간을 농락하는 정도가 이와 같다. 어린 애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헷갈리도록 만들어 사람들을 멀쩡한 바보로 만들고 있다. 다름아니라 이 모두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세상에 대한 욕심, 세상 사랑,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데에서 빚어지는 혼돈이다. 자초한 것이지 누구 탓도 아니다.
세상을 경계하여 사랑하지 말라는 성경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대로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이 충일하니 처음부터 믿지 않고 시작하는 것이고 불복종의 발걸음인지라 그 행보가 절대로 정상적일 수 없다. 그리고도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그 자체가 기이한 일일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웠으니 나머지도 당연히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런 역사를 지금까지 수천 년이나 이어온 것. 말이 천년이지 영원 세월에 비하면 어제 오늘 같을 뿐. 이런 식이면 천년 아닌 수 만년이라도 그와 같이 단단히 속은 채로 거뜬하게 지나갈 것이다.
사탄은 "육체"로서의 인간에게 상대적으로 "신(神)"인지라 수억의 인생을 속여도 한 사람처럼 간단하게 속일 수 있다. 지식 뽐내지 말고 자기 자랑 말 것이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하늘처럼 자신을 떠받드는 것이 인간이다. 교만이 그렇게 사람이든 영물이든 맹랑한 바보로 만든다. 사탄은 인간을 지푸라기처럼 취급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시몬아,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다"(눅 22:31)고. 허깨비처럼 얼마든지 날려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세상이 좋아! 죽어도 제상이 좋아! 세상 살고 싶어!" 하고 어린애처럼 앙탈 대는 철부지와 같은 것이 "육신" 타령이다. 불에 손을 갖다 대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은 듣지 않고 대다가 데였다고 소리치고 억지 부리는 소리와 같다. 세상 사랑하면 당연히 육신대로 살게 되어 있고 죄짓게 되어 있다. 불에 갖다 대지 않으면 데일 필요도 염려도 없다. 명령대로는 하지 않으면서 명령대로 하지 않은 결과만을 놓고 그것을 핑계로 삼는 어이없는 아우성이다. 누가 그런 막무가내를 들어줄까. 죽음과 멸망만이 들어줄 것이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
그리스도의 "심한 통곡과 눈물(strong crying and tears-히 5:7)" 역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 된다. 성경이 진실과 사실 그대로의 현실을 기록함이 아니고 거짓되고 과장된 것이라면 이런 눈물과 통곡에 대한 기록이 있을 까닭이 없다. 세상의 어느 종교가 소위 그 시조(始祖)의 "눈물 흘렸다"는 기록이 있던가. 어버이(또는 어버이 심정)로서의 창조자의 심경을 여기서 말하는 것이다. 세상 종교는 오직 자기 상념(想念) 속의 논리를 따라 가공(架空)의 소위 "진리(그 스스로 진리라고 착각할 뿐 실제는 진리가 아닌)"를 말하고 거기에 심취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 자신이시다. 진리의 말씀도 그 자신의 말씀이시다. 물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하시는 모든 말씀이시고(요 14:10/7:16/8:28/12:49/14:24/3:34)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이나(5:17,19,20,30), 이는 아버지와의 하나되심에서 갑이 하는 일을 을이 하고 을이 하는 것 역시 갑이 하는 '둘이 하나됨'의 이치를 말씀하심이다. 이를 가리켜 "아버지의 계명"(요 15ㅣ:10)이라,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10:18)이라 하셨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말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개체이시고 결코 한 분이 아니심을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요 14:28) 하셨고 "아들도 천사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는 말씀으로 확인해 주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므로 창조자의 어버이 심령 그대로이신 것이다. 성경이 거짓말이라면 절대로 이런 눈물을 끼워 넣어 거짓말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않는 법이라 하는 것은, 눈물은 '역부족(力不足)'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부족"은 우리 인생과는 달라 능력의 부족을 말함이 아니라 원리원칙을 벗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는 그 점에 있다. 즉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어버이 위치에서는 연민에 가득차시나 그 불쌍히 여기시는 대로 하실 수 없음(원리와 법칙을 친히 어기실 수 없는 까닭에)을 통감하시는 눈물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역부족을 통감하는 "나약한" 교주(敎主)의 모양새를 드러내는 것은 거짓말쟁이로서는(성경이 만일 지어낸 거짓말이라면) 기겁을 하고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요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것 중의 하나다.
최고로 막강한 존재로 묘사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런 위험한 모험은 아예 하려 들지 않는 법. 아버지께서는 "엄위"(롬 11:22)이시고 아들께서는 "인자"(:22)로 통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으로서의 품성은 똑같으시다. 그리고 원리와 법칙에 어긋나는 일을 못하심에서 오는 안타까움에서 흘리시는 눈물일진대, 만일 성경이 인간의 거짓말이라면 거짓말 자체가 원리원칙대로의 정직과 공명정대한 삶의 이치를 자기 욕심을 따라 무시하여 짓밟는 소행이므로, 아무리 천하의 둘도 없는 거짓말쟁이더라도 본성적으로 이런 것을 꾸며낼 재간이 없는 법이다.
그리고 진실과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현실 앞에서의 눈물로서 바울 사도의 눈물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종교는 이런 눈물을 모른다. 그들은 영원한 멸망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멸망의 현실 감각이 없으므로 눈물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바울의 눈물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하면 교회를 상대한 것이었음에 유의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성경 해석을 제멋대로 하는 시대의 안목으로 본다면 그 눈물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이미 구원 얻어 장래에 관한 한 한시름 놓은 교회를 상대로 그들의 멸망을 안타까이 여기는 눈물이기 때문이다.
이 눈물은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교회에 경고한 것과 일치한다. "내가 밤낮 3년간이나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부디 마음에 담아두라"(사도행전 20:31)고 했고, "내가 전에 많은 눈물로 썼다"(고후 2:4)고 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한 후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 3:18)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받은 것으로 자처하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주는 눈물의 설교자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구원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 더 분명히 말해 구원받지 못했으면서도 구원받았다고 가르쳐 사람을 현혹하는 교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대 다수가 물들어 있는가 하는 그것이다. 바울 자신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그러한 위치에서 본이 되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고전 9:27)이라 한 것이 그 뜻이다.
그러면 자기 구원만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항상 의식함으로써 자아중심이었던가 하면 그것이 아니다. 그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 자기 동족의 구원을 열망한다"고 고백한 것처럼(롬 9:3) 그의 눈물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수 없고 순수하게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위함이었다. 영원한 멸망에서 단 한 사람일지라도 목숨을 걸고 건져내겠다는 그 열심뿐이었음을 그 눈물이 입증한다. 조금이라도 그 자신의 구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의 낙이 있고 고난 고통이란 것이 없어야 그것이 생명이지 존재하기만 하고 그런 평안과 기쁨이 없는 것은 생명이 아니니 바로 그런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신령한 몸이라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생명이 아닌 것이니 이 세상 신(神-고후 4:4)을 비롯한 악령들은 신령한 몸 그대로 불 못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들도 불 못에 들어갈 때는 "심판의 부활'(요 5:29)로 나온다 하신 대로 신령한 몸이 되지만 생명의 낙은 없다.
또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이라고 해서 죽음 일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명의 본질인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나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나아가시던 주님께서 대단한 낙심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내 평안과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16:33)고 위로하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 부인 중에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 수고하고 해산(解産)의 고통을 겪지만 성령 안에서의 평안과 기쁨과 넘치는 의(義)는(롬 14:17) 그 자체가 이미 막강한 동력(動力)이 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에덴낙원에 생명나무가 별도로 있다고 해서 당시 아담의 몸이 신령한 몸이 아니었고 따라서 영생하게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생명과 나무는 선악과 나무에 대하여 대칭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니 애초 아담의 몸이 처음에는 자연계에 속한 썩어질 흙으로 지어졌으나 그 이후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가 신령한 과일을 먹음으로써 신령한 몸으로 변해 있었던 그런 대칭 관계와도 유사한 것이다.
즉 선악과 나무나 생명나무나 인간과 밀접한 관계로 존재해 있었던 것으로서 말하자면 인간의 이전 상태와 현재의 환경을 설명하는 또는 상징하는 두 나무였던 것.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 혹 있을 어떤 피치 못할 실수에 의한 것이었다면 생명과를 먹으면 그것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았으면 생명과를 먹을 필요가 없음이니, 고로 먹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신 것도 이 선악과였지 생명과가 아니었던 사실에 주목할 것은 이미 아담 내외는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생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면 생명나무만 혹은 생명나무 역시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어야 하지 않는가. 아담(내외)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복종하는 동기에서 먹은 범죄의 결과이므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지라, 스스로 죽음을 면하려는 자아중심이 되어 생명과 나무에 손이 뻗치게 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운명처럼 될 것밖에 없으니 이를 사전에 차단하지 않으면 안된 것이다(창 3:22). 그래야 나중에 구원의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중심이 동기가 되어 선악과를 먹었을 뿐 아니라 그 선악과 자체가 인간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시켜 버렸으므로, 이제는 근본적으로("육신"[롬 7:14-8:13]으로 인하여) 악한 것 즉 자아중심 일변도로 흐르게 되어 있는 것. 생명과를 먹어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복구되어 버리면(이미 아담의 몸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신령한 몸은 상실되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다시 환원되어 버린 연후인즉) 인간의 운명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운명과 똑같게 되어 그렇게 되면 구원이고 무엇이고 아무 것도 없다.
아담이 범죄로써 자연계의 육체로 환원되어버린 까닭에, 이제는 모든 인간이 부득불 육체의 죽음 가운데에서 죽음을 맛보고 난 다음이라야 거기서부터 이상 설명처럼 신령한 몸으로 복구되는 과정을 밟음으로써 영생에 들어감이 비로소 가능해진 것. 앞서의 설명대로 인간의 생명은 영원하므로 생명이 중도에 끊기는 그런 것은 정상이 아니고 명백히 죽음이며, 따라서 ‘죄 값은 죽음’이다. 그리고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쾌락에 대칭적으로 죽음에는 갖가지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것이니, 자연계에 속한 육체임으로 해서 받는 이러한 고난이 인간에게 불가피한 것은, 범죄의 결과인 죽음의 의미로서의 모든 고난 고통이기 때문이다.
생명에는 원래 고난 고통이란 것이 없다. 자연계의 동식물에게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으로서의 고난이라기보다 기계적 생명이므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기계적 작용 즉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위를 유발하는 경계 신호로서의 역할로서, 인간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작용된다. 물론 지금은 인간으로 인해 저주 받은 땅이므로(창 3:17) 동물들 역시 저주 받기 전의 상황과 같을 수는 없다.
결과가 이와 같으므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을 위해 고난 받으실 (친히 사람되심으로써) 것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이어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짐승(물론 자연계에 속한 것이고 그리고 양(羊)이었음이 분명하다)을 죽여 그 피 묻은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것. 비로소 옷의 개념이 생긴 것이니 빛으로 둘러싸이던 신령한 몸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 받는 죽음의 의미로서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인간을 증오하고 파멸시키며(살해) 갖가지 고통을 가하는 것에 악취미를 지니게 된 이 세상 신 및 그와 함께 하는 악령들의 소행이 버젓이 이 세상 지배자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도 여기서도 그 정당성을 찾게 된다.
아담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추종함으로써 즉 그의 말을 들음으로써 범죄하여 그 수하(手下)에 들어가버린 결과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가리켜 성경은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는"(히 2:14) 자라 했다. 또한 우리 인생이 고통 받는 것을 죄 값이라 하는 것(애 3:39). 혹자는 "범죄한 것은 아담인데 왜 그런 범죄에 빠지지 않은 그 후대들이 그 죄 값에 동참하느냐" 할 것이나, 답은 이렇다. 아담은 가장 완전한 자로 지으심을 받은 자다. 그리고 아무 유한(遺恨)도 고난도 없는 말하자면 극락 속에 살았던 것인데도 무엇이 부족하여 범죄를 하게 되었겠는가. 욕심 때문이다.
그러면 인생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한 육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롬 7:14-8:13) 더욱 더한 아니, 완전히 육신의 욕망 가운데 사는데 어찌 아담만을 허물하리요. 그러나 아담과 달라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으나 육신 때문에 그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불평할 경우에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탄을 위시해 악령들처럼 그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경우 처음부터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지를 않는 법이다.
왜냐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자아중심의 성향이 절대로 환영할 리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성경은 비록 그리스도를 따랐을지라도 이런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데에 부닥치게 되면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어 있음을 이미 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요 6:66).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가 그들 스스로 물러나버리고 다시는 따르지 않은 것. 그 옳고 그름을 곰곰이 따져볼 생각도 없이 우선 당장의 욕심에 휘둘려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의 인간 비극도 그래서 일어난 것이다.
이 세상 사랑 즉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충동도 바로 에덴낙원에서의 선악과 먹는 그 충동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아무리 고난 고통의 대가가 혹심하더라도 이 원리원칙을 버리지 않고 지키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요건으로서의 자기 부인을 처음부터 가르치신 것이니 '몸과 머리'의 체제로서의 한 몸 구조에서 이는 필연이다.
이 생명의 법을 충심으로 사랑하여 지키는지 여부가 판가름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일부러 시험해보시는 마당인데, 여기 이 세상에서는 지키지 못하고 천국에 가서나 지킨다는 비논리적인 핑계가 용납될 리 없다. 그리스도(하나님)의 말씀(계명)이 어렵지 않은 것은(요 6:60/요일 5:3),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만 없으면 간단하기 때문이다. 세상 삶의 집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니까 다시 말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진 사실을 믿지 않으니까 어렵고도 어려운 것.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려는 것과 같은 것.
'생명의 진리 > 진리의 증언자·證言者'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로 동방의 빛이 되어주시게들"ㅡ詩人 타고르 (0) | 2019.04.01 |
---|---|
영국 리처드 린 교수의 공동 연구 보고 자료(세계 각 민족의 IQ 관련) (0) | 2019.04.01 |
구원의 진리가 너무 간명하기에 (0) | 2019.04.01 |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면 천년 장수 시대가 온다 (0) | 2019.04.01 |
세상 삶에 대한 사랑이 천국 가는 발목 잡아 기어코 낙오자를 만든다 (0) | 2019.04.01 |